배씨 집안이 돈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나도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팔고 난 뒤로는 더 이상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 전보다 더 잘 지냈다. 지금 부모님께서 삼촌의 회사를 넘겨받으신 일도 더 잘될 것이다.문제는 돈이 아니라 배인호가 걸렸다.그는 당연히 로아와 승현이를 예쁘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귀여워도 누구의 아이인 가를 생각할 때마다 분명히 화가 날 것이다.“아저씨, 아주머니.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으시면 오셔서 보세요.”내가 김미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우리의 특별한 신분 때문이었다. 만약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다.김미애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숙이고 품 안에서 잠든 로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이때 배건호가 작은 선물상자 두 개를 내게 건넸다.“자, 이건 우리가 로아와 승현이에게 주는 선물이니 받거라.”상자를 열어보니 예쁜 디자인의 금팔찌였다. 하나는 용의 그려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 전에 두 분이 로아와 승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선물을 주셨다. 지금 또 금팔찌를 선물로 주시니 조금 부담스러웠다.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큰 선물을 받아도 될지 기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바로 아이들에게 끼워 보자.”김미애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바로 팔찌를 꺼내서 로아의 손목에 채웠다.팔찌가 로아의 흰 아기 피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여 김미애도 만족스러워하며 자신의 안목이 맞았다고 자랑했다.다른 한 팔찌도 승현이에게 해주었다. 나는 방금 이미 배인호 부모님의 부탁을 거절했는데 지금 이 선물까지 거절하면 너무 매정해 보일까 봐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때 희선 언니가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얘기했다. 식탁에 요리들을 올리면서 우리를 불렀다.나는 로아와 승현이를 침실에 데려가서 계속 재웠다. 그런 뒤 배인호의 가족들과 식사했다. 풍성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장면은 꼭 배
우지훈은 내 말에 분노하긴 했지만 조금 조심스러워하며 말했다.“허지영 씨도 정말 멍청하네요. 예전에 배인호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요?”그는 배인호에 대한 나의 증오심을 불러일이켜 내가 자기와 손잡고 함께 배인호를 상대해 주길 바랐다.하지만 난 우지훈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자기와 손잡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배인호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지 이런 진흙탕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과거 일들은 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더 이상 그런 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 잘못 찾았어요.”나는 계속 거절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인호가 준 상처는 아직 남아 있잖아요.”우지훈은 포기하지 않았다.“당신하고 인호 사이에는 아이도 없고 증오만 남았잖아요. 우리 두 사람은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요.”최고의 파트너라니 정말 대단한 개소리였다. 우지훈은 미친놈이 확실했다.내가 말이 없자 우지훈의 말투는 더 조급해졌다.“배인호를 상대하는 사람이 나뿐인 줄 알아요? 당신이 옛정에 젖어서 인호에게 복수하지 못하겠다고 해도 인호를 상대할 사람은 많아요. 이제부터 알게 될 거예요. 허허”배인호를 상대할 사람이 또 있다고?나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지훈이 말하는 복수는 어떤 것일까? 생명까지 위협할 생각일까?내가 더 묻지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어보니 핸드폰은 이미 꺼져 있는 상태였다. 내 협박이 우지훈에게는 꽤 위협적일 것이다. 나에게 손을 대려면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지영 씨, 우리 만나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오후에 갑자기 민설아의 전화를 받았다.시간을 보니 오후 5시쯤이라 잠시 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산책을 나가려고 했다. 게다가 민설아와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설마 배인호와 그의 부모님이 이틀 전 여기서 들은 얘기를 그녀에게 말한 것일까?그렇다면 민설아가 나를 찾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민설아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지만 나는 아주 태연했다.아까 그녀의 반응으로 봤을 때 나는 이미 우위를 차지한 것 같았다. 오히려 민설아를 이용해 내 두 아이에 대한 배씨 가문의 의심을 완전히 깰 수 있다.곧이어 나는 계산을 하고 쇼핑몰에서 나와 차를 불러 집으로 갔다.요 며칠 우지훈과 민설아가 번갈아 가며 나를 협박하다 보니 살이 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며칠 뒤 김미애와 같이 설악산으로 가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니 그때 몸에 낀 재수 없는 기운을 씻어낼 계획이다.하지만 그날 나를 데리러 온 건 김미애뿐만 아니라 배인호와 민설아, 그리고 빈이도 함께였다.모두 3일이 걸리는 일정이라 나는 로아와 빈이를 모두 데리고 비행기로 이동할 계획이었다.김미애는 차에서 내려 아이를 같이 옮기려 했다. 민설아도 가식적으로 도우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넌 빈이랑 먼저 차에 타 있으면 돼.”김미애가 차갑게 말했다.“네.”민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에 있는 빈이 곁으로 갔다.배인호는 운전을 책임졌다. 그는 차창 너머로 나와 김미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글라스가 그의 눈매와 코를 가려 오뚝 솟은 콧날과 얇은 입술, 그리고 잘 빠진 턱선이 보였다.김미애는 발걸음을 멈추고 낮은 소리로 나에게 해명했다.“지영아, 원래는 설아를 데리고 가기 싫었는데 빈이가 같이 가겠다고 생떼를 쓰면서 민설아도 같이 가야 한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어.”나는 김미애가 손자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알고 있었다. 만약 빈이가 진짜 설악산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민설아까지 꼭 가야 한다고 했다면 김미애는 무조건 설득당했을 것이다.“이해해요. 괜찮아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민설아가 있는 한 그녀는 무조건 배인호와 김미애가 내 아이를 가까이하고 예뻐하는 걸 어떻게든 막아낼 것이다.나와 김미애는 아이를 한 명씩 안아야 했기에 민설아는 조수석에 앉았고 빈이는 우리와 뒤에 같이 앉았다.빈이는 나를 보자마자 큰 원수라도
나는 빈이가 로아와 승현이에게 일부러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쪽으로 가서 지켰다.“흥.”빈이는 나만 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에 대한 거부감과 실증을 대놓고 티 냈다. 나는 괜찮았다. 아이와 겨룰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하지만 그 전제는 빈이가 내 마지노선을 밟지 않는다는 것이다.“거의 도착하니까 엄마한테 가서 얌전히 앉아 있어. 뛰어다니지 말고.”나는 빈이에게 말했다.빈이는 지금 나와 매우 가까이 있었고 또 로아와 승현이를 보기 위해 이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까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빈이는 트림을 했고 나는 옅은 콜라 냄새를 맡았다.‘콜라를 언제 마신 거지?’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빈아, 이리 와. 곧 랜딩인데 엄마 곁으로 와야지.”이때 민설아가 빈이를 부르자 빈이는 바로 얌전하게 그쪽으로 다가가 앉았고 나는 아직도 의문에 잠겨 있었다.비행기에서 내릴 때 민설아는 빈이의 손을 잡고 제일 앞에 섰다. 김미애는 적극적으로 로아를 안으면서 배인호더러 승현이를 안으라고 했다. 그러자 오히려 나는 빈손이 되었다. 아까 빈이가 점심을 먹은 자리를 지나칠 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민설아가 버린 병을 주어 내 가방에 넣었다.비행기에서 내린 후 기사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먼저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하고 내일 아침 일찍 설악산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나는 방 세 개를 예약하면 되는 줄 알았다. 나와 로아, 그리고 승현이가 한방을 쓰고 김미애가 한방, 배인호와 민설아가 빈이를 데리고 패밀리 룸에 입주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배인호가 혼자 방을 쓰는 바람에 방은 네 개였다.민설아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봐줄 만했다. 이 일로 정서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예약한 방은 다 VIP룸이어서 매우 아늑했다. 거기에 아이를 같이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아와 승현이는 말을 잘 듣는 편이었지만 가끔 떼를 쓰면서 안아달라고 할 때면 한 번에 둘을 안을 없어 머리가 아팠다. 만약 이 두 아이를 혼자서 돌봐야
나는 김미애가 배인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략 추측은 할 수 있었다.김미애의 성격에 무조건 배인호에게 민설아를 쫓아내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배씨 가문에서는 이렇게 꿍꿍이가 많은 여자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저를 쫓아내려는 건가요?”민설아도 이를 눈치챘는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인호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나를 버리겠다는 건가요?”그때 일은 배인호가 굳건하지 못했던 건 맞다. 하지만 민설아도 본인도 너무 극단적이었고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전생에 배인호는 서란이 민설아를 빼닮았다는 이유로 서란을 참 많이 아꼈다. 이 부분에서 첫사랑인 민설아가 그의 맘속에서 얼마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빈이까지 생겼다.배인호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빈이가 방에서 달려 나와 민설아의 다리를 꼭 껴안으며 울기 시작했다.“난 마미랑 떨어지기 싫어요. 대디, 할머니, 마미 가라고 하지 마요. 안 그러면 난 마미랑 같이 갈 거예요.”“빈아, 마미가 가도 할아버지랑 할머니, 그리고 대디 말씀 잘 들어야 해. 알았지?”민설아는 빈이와 같이 빌지는 않았다. 그저 몸을 반쯤 숙인 채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빈이에게 말했다.그러면서 나를 힐끔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새 마미 말씀도 잘 듣고.”이는 일부러 싸움의 화염을 내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빈아, 걱정하지 마. 새로운 마미 생기는 일은 없을 거야.”나의 심플한 한마디에 민설아의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하지만 배인호와 김미애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어쨌든 이는 배씨 가문 집안일이라 내가 여기에 더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배인호의 태도를 보니 더 기분이 나빴다. 민설아에 대해 어떤 감정인지 궁금했다. 이런 때에 깔끔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아주머니, 로아와 승현이 아직 방에서 자고 있어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나는 김미애에게 인사를 하
“네, 저도 인호 씨 믿어요.”민설아도 김미애 말투에서 짜증과 거부감을 느꼈는지 눈치를 챙기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갑자기 우지훈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우지훈이 꼼수 부린 거 아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건가?’무슨 원인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우범이 생각났다.하지만 이우범은 지금 제주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내 일 때문에 집안과의 관계가 좋아지지 않았는데 우지훈과 손잡고 배인호를 건드릴 겨를이 없을 것이다.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설악산 산자락에 도착했다.설악산은 매우 웅장하고 높았다. 여행을 오거나 기도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민설아는 빈이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계단을 보더니 다른 족을 가리키며 말했다.“우리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요.”“응, 그래.”김미애는 이번에는 민설아의 말을 들어줬다.우리는 두 개의 케이블카에 나눠 앉았다. 김미애는 나를 도와 아이를 안아야 하니 나와 같이 탔고 민설아는 빈이를 데리고 다른 데에 탔다.올라가는 동안 김미애는 조용한 편이었다. 나는 배 씨 그룹이 이번에 큰 문제에 부딪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김미애의 기분이 이렇게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나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일이다. 이 얘기를 꺼내서 기분 상하게 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그녀를 돕는 것이다.끝내는 김미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영아, 민설아 돈 좀 쥐여주고 쫓아내라고 인호에게 말했다. 그냥 빈이를 사는 셈 치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무 했다고 생각해?”“아주머니, 이 일은 저도 뭐라고 하기가 그래요.”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데 인호 씨와 민설아 씨도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거잖아요. 그때도 억지로 헤어졌고요. 그래서 둘 다 아쉬움이 남았을 거예요. 일단은 인호 씨 생각 존중해 주세요. 아니면 뒤에 또 원망할 수도 있어요.”“원망해?”김미애는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전에 인호 아빠랑 내가 두 사람 뜯어말리지 않았으면 민설아가 아마 우리 집
“어떻게 막을 건데요?”민설아는 이 화제를 끝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김미애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만해!”참다못한 김미애가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여기까지야.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해결할지 여기서 토론하면 답이 나와?”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미애가 아무리 나를 예뻐한다고 해도 이런 큰일에서까지 계속 내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내가 이우범을 만나는 것 자체가 너무했다. 대놓고 배인호의 체면을 구긴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배씨 집안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신경 쓰지 않고 나를 한결같이 대했다.민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네, 그럼 여기까지 할게요. 허지영 씨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만약 허지영 씨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면 반드시 해결 방법을 찾을 거라는 것도요.”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끔 보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돌아가는 길에 나는 김미애의 기분이 바닥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안색도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내가 걱정할까 봐 해명했다.“지영아, 너를 원망하는 건 아니야. 그냥 이런저런 걱정거리를 생각하다 보니 조금 피곤하네.”“아주머니, 저도 알아요.”나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김미애가 나를 원망해도 정상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전제는 배 씨 그룹이 부딪힌 상황이 진짜 이우범 때문일 때에만 해당한다.산에서 내려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우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만 들릴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불안한 기분이 엄습해 왔고 나는 가시방석이었다. 이우범이 만약 감정적으로만 배인호와 틀어졌으면 그래도 어떻게든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데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면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배 씨 그룹과 이 씨 그룹은 모두 손에 꼽히는 가족 기업이었고 전에는 서로 협력하는 파트너였다. 하지만 일단 서로 견제하기 시작하면 영향받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나는 이우범에게
“우범이를 찾으러 간다고?”김미애가 미간을 찌푸렸다.“네, 가서 볼 일이 좀 있어서요. 서울로 올라간 건 맞더라고요. 저도 그쪽으로 건너갈게요.”너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미애의 섬세함으로 아마 왜 가는지 대략 눈치챘을 것이다.김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조금 복잡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김미애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그럼 같이 출발하자.”“민설아 씨는요?”내가 한마디 더 물었다.“제주로 돌아갈 거야. 출근도 해야 하고 빈이도 학교 가야지.”김미애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설아가 서울을 가지 않는 게 오히려 좋았다. 이우범과 대화할 때 민설아가 다른 꿍꿍이를 부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나와 김미애는 아이를 한 명씩 안고 방에서 나와 체크아웃했다. 민설아와 빈이는 이미 호텔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호텔에서 공항까지 우리를 데려다줬다. 비행기 시간은 비슷했다. 그냥 가는 방향이 다를 뿐이었다.“아주머니, 허지영 씨, 조심히 가요. 며칠 뒤에 제주에서 봐요.”민설아가 타는 비행기는 우리보다 조금 빨랐다. 그녀는 빈이의 손을 잡고 우리에게 인사했다.왠지 모르게 나는 그녀가 매우 태연해 보였다. 마치 나와 김미애가 같이 서울로 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없는 것 같았다. 배인호도 서울에 있는데 민설아 성격으로 이를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리고 또 하나, 나도 이우범이 직장을 그만둔 걸 모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떻게 안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분명 서로 다른 병원에 있는데 말이다.전부터 나는 이 두 사람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증거를 찾지 못해 마음속에 꾹꾹 담아 놓았다.지금 생각해 보니 겉으로는 서먹서먹하고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의심의 씨앗은 진작부터 내 마음속에 있었지만 정작 싹이 튼 건 지금이다.——익숙한 서울로 돌아왔지만 나는 뭔가 미묘한 기분이었다.임신하면서 제주도로 이사했고 로아와 승현이도 태어난 지 6개월이 다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