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가긴 곤란해요. 시간 나면 내가 연락할게요.”나는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우범이 어떤 조건을 걸든 절대 들어주지 마.”전화를 끊기 전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조금 조급해 보였다.나는 멍해졌다.‘설마 우범 씨가 조건을 걸 거라는 걸 예상한 건가?’순간 나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서란에게 면회라도 가서 이런 상황에서 너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우스운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나는 혼자 베란다에 한참을 서 있었다. 핸드폰이 다시 울려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지영아, 배 씨 그룹과 이 씨 그룹 진짜 싸움 난 거야?”정아가 놀란 말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이유가 뭐래? 설마 너 때문에?”“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너는 어떻게 알았어?”나는 넋을 놓고 멍해서 물었다.“노성민이 전화 왔더라고. 사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내부 소식 잘 몰라. 근데 노성민도 배인호와 이우범 사이에 큰 문제가 생겼다고 확신하고 있더라고...”정아가 난감한 말투로 말했다.“나도 도와주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너한테 좀 물어보라고 귀찮게 해서 전화 한 거야.”노성민은 지금 머나먼 제주에 남아있으면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쪽 프로젝트 총괄이 두 명이나 비면 프로젝트 추진에 큰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나도 지금 복잡한 상태다. 아직 이우범이 어디 있는지도 보지 못했다.“정아야, 나도 일단 상황 파악되면 다시 말해줄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혹시 지금 우범 씨 집안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너 최근에 서울에 있으면서 뭐 들은 거 없어?”정아가 잠깐 고민하더니 답했다.“이우범 아버지 사퇴한 거 같던데. 다른 건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아이 돌보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이우범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회사를 아들에게 넘기다니,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그럴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우범은 최근까지 계속 의사로 있었다. 전에 잠깐 회사에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회사를 이끌기엔 부족했다. 그때 수화기
“지금 우리 이런 말 할 때 아니에요. 감정을 회사 일에 끌어들이지 마요.”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배인호의 말을 듣자 마음이 복잡해졌다.“지금 안 하면 언제 해? 네가 진짜 머리가 어떻게 돼서 우범이가 건 조건 들어주기라도 하면 어떡해. 난 우범이를 잘 알아. 무슨 말인지 알지?”이우범 말이 나오자 배인호의 표정이 차가워졌고 눈빛도 서늘해졌다.나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었지만 그냥 짜증이 났다.이때 배인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마도 회사 일 같았다. 그는 간단하게 몇 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나 회사 들어가 봐야 해. 일단은 서울에 좀만 더 남아 있다가 일 해결되면 제주로 다시 내려갈 생각이야. 엄마는 며칠 뒤에 먼저 건너가실 거고. 너도 돌아갈 거면 엄마랑 같이 가. 그러면 엄마가 애들 같이 돌봐줄 수 있잖아.”“알겠어요. 가서 일 봐요.”내가 대답했다.배인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올라갔다.기선혜는 이미 일어나 베란다에서 화분을 다듬고 있었다. 이 기사님은 주방에서 아침을 하느라 바빴다. 간단한 생활이었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지영 씨, 아침부터 어디 다녀오는 거예요?”기선혜는 돌아온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베란다에 있었으니 나와 배인호를 봤을 수도 있다.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잠깐 밑에요.”기선혜는 더는 캐묻지 않았고 그저 곧 아침을 먹을 수 있다고만 했다. 나는 대답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확인했다. 이미 깨어났지만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고 침대에서 잘 놀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로아와 승를 보면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그 아쉬움이 잘 메꿔지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 엄마와 같이 지냈고 완벽한 집안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아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기에 내 아이도 이런 온전한 가정을 가지길 바랐다.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아이들과 좀 더 놀아줬다. 기선혜가 들어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했고 나를 대신해 잠깐 아이를 봐주었
내 말에 이우범의 표정이 드디어 변했다. 그는 전혀 본 적 없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한눈에 민설아의 이름을 확인했다. 왔는데 사람이 안 보이자 전화로 재촉하는 것 같았다.벨 소리가 계속 울렸고 나는 이를 조롱했다.“얼른 받아요. 기다리다 지쳐서 토론하려던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이우범은 아주 심플하게 전화를 끊더니 핸드폰을 찔러넣고는 설명했다.“설아랑 상의할 거 없어요.”“아직도 나를 속이려고 하는 거예요? 진짜 나 때문에 배 씨 그룹과 맞서는 거면 내가 확실하게 말해둘게요. 앞으로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당신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나를 갖고 노는 사람이 제일 싫거든요.”나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화에 사로잡혀 말투가 점점 사나워졌다.“속인 적 없어요. 내가 한 모든 일은 우리 미래를 위해서예요. 알아요?”내가 너무 흥분하자 이우범이 내 손을 잡아주려 했지만 내가 매몰차게 이를 밀쳤다.“건드리지 마요.”나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이래요? 이게 당신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인가요?”“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요.”이우범은 확실히 정서가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침착하게 나에게 진정하라고 하는 걸 보면 그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나는 최대한 차분해지려고 애썼다. 아직 이우범의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거짓말로 나를 속일지 궁금했다.차 안의 분위기가 좀 풀리자 이우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최근 들어 설아와 연락한 거 인정해요. 하지만 다 배씨 그룹과 관련된 일이었어요. 당신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요. 내 말 이해해요?”“배 씨 그룹과 관련된 일이라고요? 왜요? 둘이 손 잡고 배 씨 그룹 무너트리기라도 하려고요?”나는 진짜 세상에서 제일 우스운 농담을 들은 기분이었다. 민설아는 배인호와 결혼해 있는 집 사모님이 되려고 안달인데 이우범을 도와 배 씨 그룹을 망하게 한다니, 말도
기선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가슴에서 전해지는 아픔이 더 심해졌다. 이런 상황은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더는 거절하지 않고 이명한과 같이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 유방에 문제가 조금 생긴 건 맞았다. 예전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졌지만 제때 발견해서 약만 잘 먹고 스트레스만 받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선생님, 감사합니다.”나는 한시름 놓고는 의사가 써준 처방전을 가지고 약 타러 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약을 타려는데 마스크를 쓴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말투를 들어보니 한국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이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혹시 민 선생님 이 병원에서 출근하나요?”민설아?이 이름을 듣자 나는 조금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를 몇 번 더 힐끔 쳐다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눈매가 짙고 눈썹이 거의 1자로 연결된 것 같았다.“저는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에요”다른 사람이 하나같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그는 조금 실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다 나를 보고는 서툰 한국어로 내게 물었다.나는 민설아를 알긴 하지만 이 사람이 민설아를 왜 찾는지는 몰랐다.“민설아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여자인가요?”내가 되물었다.내 말을 듣자 남자의 눈이 밝아졌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여자예요. 뛰어난 의사입니다.”뛰어난 의사라는 말까지 듣자 나는 그가 말하는 사람이 내가 아는 민설아임을 확신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을 잘 안다고는 못 하겠어요. 근데 전에 내 병을 고쳐준 적이 있어요. 의술은 확실히 뛰어나고요. 진료받으러 오신 건가요?”남자가 멈칫하더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몇초 뒤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민설아 선생님께 진료받으러 왔어. 혹시 연락처 있나요?”“저는 연락처가 없어요. 근데 찾아낼 방법은 있어요. 그러니 전화번호 남겨줄래요? 찾으면 알려줄게요.”내가 대답했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이우범은 잠잠해졌는데, 배인호가 갑자기 반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게다가 그 기세로 봤을 때 당장 죽일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내 친구들은 깜짝 놀란 나머지 단톡방에서 난리였다. 정아:「배인호 미친 거 아니야?」세희:「어디 배인호만 미쳤니? 이우범도 미쳤잖아! 내가 봤을 땐 둘 다 미친 사람들 같아.」민정이:「이게 진짜 지영이를 위해서라고?」민정이는 직접 나를 태그하며, 나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나는 뭐라 답할 수 없어 일부러 못 본 척했고, 그녀들이 계속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이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고, 그 전화는 배인호의 어머니 김미애에게서 온 전화였다.요 며칠 동안 나는 그녀와 별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배인호 말로는 빈이가 제주도에 있는지라 그녀도 제주도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설마 민설아가 여기 있는 걸 아직 모르는 건가? 민설아가 여기 있으면 빈이도 여기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지영아, 잠시 만날 수 있을까?”전화기를 받자마자 그녀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주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내가 물었다.“나 청담동에 있어. 너는? 너 애도 데리고 있으니까 내가 그냥 네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게.”그녀는 내가 아이들 때문에 움직이기 불편할까 봐 직접 여기에 찾아오겠다고 했다.하여 나는 이 기사님네 집 주소를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대략 30분 뒤, 그녀는 문 앞까지 도착했고, 때마침 내 두 아이도 잠이 든 상태였다. 나는 기선혜에게 아이를 맡긴 뒤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밖에 나가보니, 그녀는 큰 나무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얼굴빛은 다소 조급해 보였다. 내가 나온 걸 본 그녀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나를 맞이해줬다.“지영아, 나도 진짜 방법이 없어서 널 찾아온 거야.”나는 사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원인에 대해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배인호와 이우범에 관련된 일일 것이다.역시나 한참 동안 대화 후, 그녀는 여기에 온 목적에 대해 명확히
“인호 씨, 비즈니스 하는 사람으로서 일단은 이익에 대해 생각해 봐야죠. 이렇게 적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자신한테도 상처를 입히는 일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요.”나는 이익적인 관점으로 배인호의 생각을 움직이려 하였다.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갑게 웃어 보였다. 마치 웃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말이다.이 말은 아마 그의 부모님이나 노성민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내가 조금 전 한 얘기가 확실히 그에게 있어서는 웃긴 이야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미애가 나에게 부탁한 일이 난도가 높은지라 나는 아마 들어줄 수 없을 듯하다. 전생에 배인호와 이우범이 죽일 듯이 싸울 때도, 그 누구도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두 가족도 결국에는 큰 고통을 겪었었다.“오늘 그래서 여긴 왜 왔어요?”나는 그 주제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너 이우범 만났어?”배인호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 심문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나는“네”라고만 답할 뿐 자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자 배인호는 뭔가 깨달은 듯한 모습으로 답했다.“어쩐지 갑자기 잠잠하다 했어. 너 말해봐. 대체 뭐라고 했기에 걔가 생각을 바꾼 거야?”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혹시 몸으로 때우겠다 하고 그런 건 아니지?”나는 경계심 가득한 상태에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그와 거리를 두었다. 매번 배인호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늑대가 가까이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경각심이 가득해진다..내 그 행동에 배인호는 더욱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의문 섞인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진짜 몸으로 때우는 거야?”“미친!”나는 더는 들어줄 수 없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내 욕설을 들은 배인호는 오히려 표정이 조금은 풀렸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너 만약 진짜 그렇게 했으면 그 결과는 네가 알아서 책임져야 할 거야.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인호 씨,
아이들과 한참 놀아준 뒤, 나는 그 둘을 샤워시키고 휴식을 취하려다가 고민 끝에 김미애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나는 문자로 배인호가 날 찾아온 일과 그의 태도에 대해 말했다.곧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그래, 알았어. 걔가 원래 좀 제멋대로잖니.」그렇다.그 때문에 나도 뭘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그녀에게 말을 털어놓으니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정아가 나에게 전화가 왔을 때쯤, 나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나는 스피커로 그녀의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로는 정아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지영아, 너 서울로 왔으니까 우리 오래간만에 뭉쳐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모이지 않은 지도 오래됐잖아!”“난 아이가 둘이라서 시간이 없는데, 넌 아이 셋이면서도 시간이 남아?”내가 웃으며 물었다.“야, 돈만 있으면 아이 봐줄 사람은 줄 섰어. 아이 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서 그래? 나 베이비시터 3명 고용했거든. 한 사람 한 명씩 말이야. 그동안 내가 봐온 바로는 아기 돌보는 솜씨가 괜찮더라고. 그래서 거기에 대해 별걱정은 없어!”정아는 웃으며 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 때문에 우울해하던 그녀가 다시 원래의 활기차고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그녀의 말에 일리는 있지만, 현재의 나는 외출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내 베이비시터는 아직 제주도에 있으니 말이다.내 고민을 눈치챈 정아는 자기 집에서 모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집 베이비시터가 대신 우리 아이들도 봐줄 수 있고 일거양득이다.그녀의 강렬한 푸쉬 끝에 나는 정아의 말에 응했고,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점심을 먹은 뒤, 나는 이 기사님과 기선혜에게 외출한다고 인사를 했다. 이 기사님은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게 힘들까 봐 차로 나를 정아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정아는 현재 자신의 명의로 된 집에서 세 아이와 지내고 있다. 그리고 세 명의 베이비 시터와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도우미를 고용해 편안
나는 바닥에 공을 준 뒤 정아를 보니, 정아도 거의 다 주운 상태였다. 이윽고 그녀는 배인호를 노려보며 말했다.“앞으로 노성민 대신 이렇게 뭐 보내지 마세요. 다음번에는 문도 안 열어줄 테니까요!”그 말에 배인호가 차갑게 답했다.“내가 보내주고 싶어서 보낸 줄 알아요? 둘이 이혼했다고 해도, 성민이가 아이 아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걔 영통이나 전화 다 거절하고, 아이를 위해 산 선물도 다 거절하는 정아 씨는 자신이 별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왜 제 탓을 하는 거죠? 노성민한테 가서 말해요. 왜 먼저 날 건드렸냐고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이혼할 일이 없다고요.”정아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고, 그녀는 배인호 앞에서 겁을 먹은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다.정아가 노성민이 저질렀던 멍청한 일을 이야기하자, 배인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정아는 그가 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는지 이어서 말했다.“내가 지영인 줄 알아요? 그렇게 참을성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냐고요?”그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얘는 아직도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듯하다.그 말에 배인호의 표정도 일그러지며 다시금 나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나는 그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격이다.나는 어이가 없어 정아에게 눈치를 줬고, 그녀도 그제야 그걸 알아차렸는지 다소 뻘쭘해하였다.“그러니까 내 말은 남자들이 뭐 잘못해 놓고는 꼭 용서받길 원한다는 거예요. 매 사람들의 인내심은 그렇게 좋지 못하다고요!”“정아 씨와 지영이는 달라요. 그러니 서로 엮어서 말하지 말아요.”배인호는 다소 불쾌한 듯 답했다.“됐어, 정아야. 들어가자.”나는 정아가 배인호에게 또 반박하며 나까지 끌어들일까 봐 얼른 그녀에게 말했다.정아는 물건 한 아름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왔으며 나는 그녀를 도와 몇 개를 들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배인호가 어차피 물건을 보내려고 했으면, 왜 어젯밤 그 오르골을 정아네 아이한테 오늘같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