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한참 놀아준 뒤, 나는 그 둘을 샤워시키고 휴식을 취하려다가 고민 끝에 김미애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나는 문자로 배인호가 날 찾아온 일과 그의 태도에 대해 말했다.곧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그래, 알았어. 걔가 원래 좀 제멋대로잖니.」그렇다.그 때문에 나도 뭘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그녀에게 말을 털어놓으니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정아가 나에게 전화가 왔을 때쯤, 나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나는 스피커로 그녀의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로는 정아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지영아, 너 서울로 왔으니까 우리 오래간만에 뭉쳐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모이지 않은 지도 오래됐잖아!”“난 아이가 둘이라서 시간이 없는데, 넌 아이 셋이면서도 시간이 남아?”내가 웃으며 물었다.“야, 돈만 있으면 아이 봐줄 사람은 줄 섰어. 아이 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서 그래? 나 베이비시터 3명 고용했거든. 한 사람 한 명씩 말이야. 그동안 내가 봐온 바로는 아기 돌보는 솜씨가 괜찮더라고. 그래서 거기에 대해 별걱정은 없어!”정아는 웃으며 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 때문에 우울해하던 그녀가 다시 원래의 활기차고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그녀의 말에 일리는 있지만, 현재의 나는 외출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내 베이비시터는 아직 제주도에 있으니 말이다.내 고민을 눈치챈 정아는 자기 집에서 모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집 베이비시터가 대신 우리 아이들도 봐줄 수 있고 일거양득이다.그녀의 강렬한 푸쉬 끝에 나는 정아의 말에 응했고,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점심을 먹은 뒤, 나는 이 기사님과 기선혜에게 외출한다고 인사를 했다. 이 기사님은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게 힘들까 봐 차로 나를 정아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정아는 현재 자신의 명의로 된 집에서 세 아이와 지내고 있다. 그리고 세 명의 베이비 시터와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도우미를 고용해 편안
나는 바닥에 공을 준 뒤 정아를 보니, 정아도 거의 다 주운 상태였다. 이윽고 그녀는 배인호를 노려보며 말했다.“앞으로 노성민 대신 이렇게 뭐 보내지 마세요. 다음번에는 문도 안 열어줄 테니까요!”그 말에 배인호가 차갑게 답했다.“내가 보내주고 싶어서 보낸 줄 알아요? 둘이 이혼했다고 해도, 성민이가 아이 아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걔 영통이나 전화 다 거절하고, 아이를 위해 산 선물도 다 거절하는 정아 씨는 자신이 별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왜 제 탓을 하는 거죠? 노성민한테 가서 말해요. 왜 먼저 날 건드렸냐고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이혼할 일이 없다고요.”정아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고, 그녀는 배인호 앞에서 겁을 먹은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다.정아가 노성민이 저질렀던 멍청한 일을 이야기하자, 배인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정아는 그가 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는지 이어서 말했다.“내가 지영인 줄 알아요? 그렇게 참을성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냐고요?”그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얘는 아직도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듯하다.그 말에 배인호의 표정도 일그러지며 다시금 나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나는 그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격이다.나는 어이가 없어 정아에게 눈치를 줬고, 그녀도 그제야 그걸 알아차렸는지 다소 뻘쭘해하였다.“그러니까 내 말은 남자들이 뭐 잘못해 놓고는 꼭 용서받길 원한다는 거예요. 매 사람들의 인내심은 그렇게 좋지 못하다고요!”“정아 씨와 지영이는 달라요. 그러니 서로 엮어서 말하지 말아요.”배인호는 다소 불쾌한 듯 답했다.“됐어, 정아야. 들어가자.”나는 정아가 배인호에게 또 반박하며 나까지 끌어들일까 봐 얼른 그녀에게 말했다.정아는 물건 한 아름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왔으며 나는 그녀를 도와 몇 개를 들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배인호가 어차피 물건을 보내려고 했으면, 왜 어젯밤 그 오르골을 정아네 아이한테 오늘같이 주지
정아는 전화를 내게 건네준 뒤, 내가 편히 통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다.“지금 어딨어요?”이우범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만나요.”“나 정아네 집에 있어요. 지금은 안될 거 같으니, 내일이나 모레 어때요?”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우범은 이미 많이 사그라들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도움이고, 그렇다고 해서 바로 그와 연락을 끊을 수 또한 없는 것이다.“그래요, 주소 보내줘요. 내일 오후에 데리러 갈게요. 로아와 승현이도 다 거기 있는 거예요?”이우범은 이어서 두 아이에 관해 물었다.“네, 여기 있어요.”나는 간결하게 답했다.이우범은 잠시 멈칫하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친 뒤 나는 정아더러 다시 들어오라 했고, 정아는 의아한 듯 나에게 물었다.“뭐야? 둘 사이에 복잡한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통화를 끝마친 거야? 그냥 집념으로 서로 통화한 거야?”“내일 오후에 만나서 이야기하지 뭐. 나보고 만나자고 하는데, 네가 나에게 해준 화장을 이대로 썩힐 순 없잖아.”나는 내 얼굴에, 과한 속눈썹을 가리키며 말했다.“근데 속눈썹 길이 이거 맞아? 내가 눈 깜빡일 때마다 다들 부채로 오해할까 봐 겁난다 얘.”정아는 진지하게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예뻐. 오늘은 주로 요염하게 클럽 느낌으로 밀고 가보자고.”나는 정아가 내 얼굴에 뛰어난 화장 기술을 계속 발휘하도록 내버려두었다.우리 둘은 메이크업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갔다. 정아는 그녀의 긴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때마침 시간도 딱 좋아. 얼른 출발하자고, 친구!”짙은 화장을 한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솔직히 아주 신기했다. 나는 평소에 이런 스타일을 거의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간혹가다 보면 아주 새롭고 신선했다.게다가 전에 의사 선생님이 나더러 감정을 조절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정아와 함께 나가서 육체적,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 또한
이우범의 말이 떨어지기도 바쁘게 배인호는 이미 차갑게 그를 쳐다봤다.술을 많이 마셔서 환각인 줄 알고 손을 들어 눈을 비비기도 했지만, 눈앞에 두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를 더 불편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그 시각, 정아는 이미 한 무리의 선수들을 데리고 세희네를 쫓아 나갔다. 세상은 넓고, 술집도 많으며 사람도 많지만, 정녕 내가 머물 곳은 없단 말인가?“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그 순간 나는 뭐라고 설명할지 몰라 아무런 핑계나 대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하지만 배인호가 나를 막아 나섰다.“나랑 같이 가.”“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냥 여기서 술 좀 마시고 있어요. 이따가 내가 와서 다 설명할게요.”나는 배인호의 손을 뿌리치며 그더러 소파에 앉으라고 했고,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이번에는 이우범이 나를 막아 나섰다.“지영 씨, 옷차림새가 그게 뭐예요?”나는 고개를 숙여 내 섹시한 튜브톱을 보았다. 확실히 이상한 것 같았다. 나는 내 가슴쪽 튜브탑을 살짝 여미며,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이거 정아가 준거에요. 저 이따가 와서 다 설명할게요.”“저 곧 가봐야 해요. 그러니 지영 씨도 같이 가요.”이우범은 내 팔을 잡은 채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저 지금은 어디 갈 수 없어요. 조금 전 정아도 일 보러 나갔고요. 일단 정아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죠.나는 이우범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내 손을 더욱 꽉 잡았다.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배인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손을 강하게 낚아채며, 무섭게 말했다.“그 여자 만지지 마!”이우범의 표정은 원래부터 좋지 않았지만, 배인호의 말로 인해 더욱 굳어졌고, 이어서 그가 차갑게 답했다.“잊지 마. 지금은 내가 지영 씨 남편이라는걸.”“너 굳이 그렇게 너 자신까지 속일 필요가 있을까?”배인호가 담담하게 되물었다.“허지영이 널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는 거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너희 둘 사이에 두
배인호와 이우범이 같이 온 것은 아니지만 그 둘이 내 앞에 같이 나타난 건 사실이다.나는 정아에게 이 기묘한 인연에 대해 설명하기 다소 어려웠다.“같이 온 거 아니야.”나는 간단하게 그녀에게 답했다.“그래, 아직 우리를 못 본 것 같은데 너 일단 먼저 나가봐. 내가 가서 가방 갖고 바로 나갈게.”정아가 나에게 말했다.나는 정아가 가방을 갖고 나올 때까지 잠시 앞으로 걸어가 기다렸고,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그녀는 도통 오지를 않았다. 나는 조금 걱정이 되어, 정아를 찾으러 되돌아갔다.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내가 이우범과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배인호는 쉽게 정아를 보내지 않았다. 그 순간 정아는 미친 듯이 눈을 희번덕거렸다.그 시각 배인호는 정아의 예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고, 정아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더니 매우 욱해서 말했다.“만약 저 가방이 한정판만 아니었다면, 나 그냥 저거 버렸어!”“가.”배인호는 가방을 정아에게 던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적은 정아를 통해 나를 찾는 것이었다.정아는 가방을 받아들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난 안 가요. 지영이랑 뭔 얘기가 하고 싶으면 그냥 내 앞에서 해요.”“…”배인호는 정아의 꿈적도 않는 모습을 보더니 어이가 없는 듯 했다.“배인호 씨, 난 이해가 안가거든요? 대체 지영이랑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건가요?”정아는 다리를 꼰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이어서 말했다.“어디 한번 말해봐요. 내가 분석 좀 해줄 테니.”배인호는 정아의 말은 대꾸하고 싶지 않은 듯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내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데리고 여기를 떠날 참이었다.나는 배인호의 손을 뿌리치며 냉담하게 답했다.“정아의 말이 맞아요. 할 얘기 있으면 그냥 여기서 해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얘기할게 남았나요? 굳이 따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하지만 이때, 정아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그녀는 발신자표시를 확인하더니 조용한 곳을 찾아가 전화를 받았다. 그 자리
정아의 그 설명을 들은 뒤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어휴, 이 일에 대해 정아가 몰라서 망정이지, 알면 꼭 밖으로 새어나가겠네.“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조금 얼빠라 내 아이들도 얼빠일 수 있어.”나는 일단 아무렇게나 그녀의 말에 답했다.이때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다른 간호사분이 들어왔고, 아마 경험도 충족한 듯 보였다. 그 간호사는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배인호의 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있어요.”로아는 배인호의 품에서 얌전히 있었고, 가끔은 그를 향해 웃어 보이기 까지 했다. 그 모습은 마치 다정한 부녀의 모습 같았다.그 시각 정아는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십거리를 좋아했기에, 어느 부분이 다소 이상한 것 같으면 그걸 깊게 파고드는 성격이었다.“아이 엄마가 안게 하세요.”간호사가 배인호를 향해 말했다.“아마 엄마가 조금 더 나을 거예요.”나는 손을 뻗어 배인호의 품에서 로아를 받아안았고, 간호사는 어떻게 안아야 주사를 놓기 편한지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때 배인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 번에 성공할 수 있죠?”그 말에 간호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로아 머리의 상처를 보고는 다소 미안한 듯 답했다.“조금 전 그 간호사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지라 많이 긴장했나 봐요. 저는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배인호의 눈빛은 그제야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는 증거는 없지만 왠지 배인호가 나보다 더 로아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그렇게 이번에는 드디어 한 번에 성공했다. 비록 로아는 잠시 울었지만, 적어도 이번은 주삿바늘을 꽂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로아를 안고 링거 실로 갔고, 늦은 시간이라 링거 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는 나와 로아, 그리고 정아와 배인호만 있을 뿐이었다.승현이는 아직 정아네 집에 있었고, 정아 또한 아이가 셋이나 있기에 나는 그녀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정아야, 너 먼저 들어가 봐. 로아가 링거 다 맞으면 내가 차 불러서 갈게.”“왜 차를 불러
나와 배인호는 그렇게 병원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로아가 약을 갈 때가 되자 다시 링거 실로 가서 간호사를 불렀다.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링거를 다 맞게 되었고, 우리도 그제야 돌아가서 쉴 수 있게 되었다.배인호는 차로 나를 정아네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차에서 내린 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오늘 저녁 고마웠어요.”“일찍 쉬어.”배인호는 간단히 한마디만 건네고 차로 그 자리를 떠났다.그때는 이미 새벽 4시였다. 나는 로아를 제대로 눕힌 뒤 화장을 지우고 씻으러 들어갔다. 오늘 저녁은 확실히 너무 힘든 저녁이었던지라 나는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다행히 정아네 집 베이비시터가 아이를 잘 돌보는지라 점심까지도 아이의 일 때문에 나는 잠에서 깬 적이 없었다.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쯤 배인호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그 문자는 아주 길었으며 그건 전부 아이의 장염에 대해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와 연관된 내용이었다. 그 문자를 보고 나는 잠에서 덜 깬 듯한 환각을 느껴 순간 멍해졌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고, 이우범이라는 세글자가 나를 환각 속에서 끄집어냈다.“집에 잘 들어갔어요?”전화를 받자마자 이우범의 냉랭한 소리가 들려왔다.“네, 왜요?”나는 앉아서 주위를 한번 살폈고 목소리는 약간 쉰 것 같았다. 아마 어젯밤 술을 먹은 원인인 듯 하다.“별거 아니에요. 어제 잠시 가봐야 해서,지영 씨랑 정아 씨를 데려다주지 못했던 게 걱정이 되어서요.”이우범이 내 말에 답하더니 이어서 물었다.“지금 정아 씨네 집에 있어요?”나는 부인하지 않았다“네, 뭔 일 있어요?”“잠깐 나와봐요. 정아 씨네 집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이우범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었고 나는 다소 당황스러웠다.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거 아는 거지? 게다가 이미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 까지 하다니.나는 재빨리 일어나 씻었다. 그 시각 정아와 몇몇 아이는 거실 매트에서 기어다니며 놀고 있
정아의 말을 들은 이우범의 눈에는 초조함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약간 비난 섞인 말투로 나를 향해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왜 제일 먼저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그때 민설아 씨와 같이 있었잖아요?”내가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이우범은 내 반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듯 묵묵히 나를 쳐다보기만 하였다.이때 정아가 나 대신 입을 열었다.“그런 눈으로 지영이 보지 마요. 전에 난 이우범 씨가 깨끗한 사람인 줄 알고, 심지어 지영이 더러 그쪽 받아주라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쪽도 배인호와 별 다른 거 없네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건데 말이죠?”그 말을 들은 이우범의 얼굴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 곳에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욱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제 저녁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이우범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정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약간 망설이는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곧 원래대로 다시 돌아왔고, 계속하여 이어서 내게 물었다.“민설아가 여기 있는 거 알면서 인호한테는 안 알려준 거예요?”“왜 배인호 씨한테 알려줘야 하죠? 그건 그 둘 일이라 저는 별로 간섭하고 싶지 않네요.”나는 담담하게 답했다.“그래요, 알겠어요.”이우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려 큰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로아 안에 있어요? 저 로아 보고 싶어요.”정아는 곧장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그녀가 이우범을 제지하지 않게 했다.이우범의 두 아이에 대한 사랑은 거짓 하나 없이 진심이었고, 나 또한 앞으로도 그와 아이가 거리를 두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한마디 했다.“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가서 로아 안고 올게요.”이우범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이윽고 나는 로아를 안은 채 밖으로 나왔고, 오늘 로아는 전보다 많이 좋아진 듯 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