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침묵은 한 여자가 나타나 나를 알아보고 나서야 깨졌다.“잉? 또 보네요?”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한참을 쳐다봤다. 며칠 전 카페에서 내 편을 들어준 단발머리 여자였다.그녀는 오늘 오버스러운 귀걸이를 하고 옷도 매우 화려하게 입고 있었다. 하지만 촌스럽다기보다는 굉장히 섹시하고 활발해 보였다.“또 만났네요.”나는 내던 성질을 감추고 단발머리 여자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배인호가 내 옆에 서서 모르는 사람은 절대 가까이 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고 차가운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하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술 마시러 왔어요?”단발머리 여자는 꽤 열정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이었고 말하는 목소리도 매우 시원시원했다.“이분은, 남자 친구?”단발머리 여자가 배인호를 가리키며 물었다.나는 빠르게 부인했다.“안 친해요. 그냥 보통 친구예요.”단발머리 여자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말했다.“그래요? 내가 찜해도 괜찮죠? 잘생긴 거 같은데.”그는 아주 직설적으로 배인호에 대한 흥미를 드러냈다.“당연하죠. 화이팅해요!”나는 그녀의 말을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팔을 들어 화이팅 하라고 손짓했다.배인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단발머리 여자가 연락처를 받으려고 다가오자 험악하게 나를 째려보더니 길옆에 세워둔 포르쉐를 타고 사라졌다.단발머리 여자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예쁜 언니, 친구가 성격이 되게 더러운데요?”“더럽기만 하겠어요? 눈치도 없어요. 그냥 타겟을 바꾸는 게 어때요? 저 사람한테 당신은 너무 과분한 사람이에요.”배인호가 가고 나는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하지만 도전적인 걸 좋아한다면 제가 저 사람 전화번호 줄게요.”단발머리 여자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어 보였다.“진짜요? 아까 보니까 친하지 않다기보다는 커플 간의 사랑싸움 같던데요?”나는 웃음이 나왔다.“나랑 저 사람 다 서른 살 넘은 아저씨 아줌마예요. 커플은 무슨. 걱정 마요. 진짜 안 친해요.
이상한 여자...나는 냥이의 빨간 머리와 오버스러운 귀걸이, 코걸이를 한번 보고는 생각했다.‘이건 이상한 게 아니라 개성이 있는 거야.’반항심 때문인지 나는 배인호의 전화번호를 냥이에게 넘겼다.“전화번호는 문자로 보내줬어요. 잘 메모해 둬요.”냥이가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 고마워요!”만약 냥이가 나 대신 배인호를 해결해 준다면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한다.이때 냥이의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찾으러 나왔고 냥이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나도 다시 돌아가려는데 양아치로 보이는 서너 명의 청년들이 나를 감쌌다.이때 유진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민머리를 살살 매만지더니 가식적으로 웃으며 말했다.“허지영 씨 맞죠? 자기소개 좀 할게요. 저는 유진웅이라고 합니다. 아주 반듯한 서울시 시민이죠!”유진웅은 전에 세화 프로젝트에서 난동을 부리던 양아치 삼식이 형님의 본명이었다. 딱 봐도 유진웅은 오늘 나를 목적으로 온 것 같았다. 저번에 차 사고도 그렇고 왜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알아줘야 할 건 그가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아주 능수능란하다는 것이었다.“유진웅 씨? 저한테 무슨 일로?”내가 담담하게 물었다.“아가씨가 저 같은 서민을 다 알고 계시고, 참으로 영광입니다!”유진웅은 웃을 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마침 오늘 이렇게 만났는데 아가씨한테 차 한잔 대접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친구라도 사귑시다!”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진웅 씨, 무슨 일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제 친구가 곧 저 찾으러 나올 텐데 차는 다음에 마십시다. 그때는 제가 살게요.”“딱 오늘 마셔야겠어요. 어디가 맛있는지 잘 아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갑시다. 제 차가 바로 저쪽에 있는데 올라가시죠?”유진웅이 길옆에 서 있는 차 한 대를 가리키며 말했다.만약 내가 거절하면 유진웅은 아마도 나를 강제로 끌고 갈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나만 손해다.“그래요, 그럼 한잔하러 가시죠.”나는
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고 이성만으로 버티고 있었다.하지만 곧 이우범의 목소리가 들렸다.“허지영 씨!”그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고 매우 조급해 보였다.순간 내 목에 칼이 들어왔고 누군가 나를 인질로 삼아 이우범을 협박하고 있었다.“테이블에 있는 물 마셔. 아니면 지금 당장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나는 힘들게 눈을 떴다. 눈앞이 흐릿했고 그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이우범이 테이블 옆으로 걸어가 그 위에 놓인 물을 마시는 걸 보았다.마시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매우 허약했다.“이우범 씨...”이우범이 물을 다 마시자, 내 옆에 있던 남자들이 바로 도망쳤고 대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이우범은 다른데 신경 쓸 새 없이 내 옆으로 달려왔고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가까이 와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걱정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이우범 씨, 빨리 신고해요. 그 물에 약을 탔어요...”나는 몸이 너무 불처럼 타올라 말할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약이요?”이우범이 머리를 돌려 빈 페트병을 보았다.나는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디워시 향 같았다. 그 향은 마치 맑고 푸른 수림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꽃향기가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전에 배인호가 약에 취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이건 확실히 컨트롤하기가 힘들었다.잘생기고 몸매가 좋은 남자라, 그것도 이렇게 활기 넘치는 남자라니...나는 그의 몸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의 몸도 나처럼 열이 달아올랐고 눈빛도 점점 흐려졌다.“우범 씨,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나도 더 이상 버티긴 힘들었다. 머릿속에 모자이크가 필요한 화면이 자꾸만 떠올랐다.이우범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목젖이 움직이더니 갑자기 머리를 숙여 나에게 키스를 해왔다. 하지만 입술이 아닌 볼이었다.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나는 솔로다”를 외치고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우범을 바닥에 눌러 눕혔다. 그러고는 이우범의 몸 위에 올라
내 말이 끝나자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이우범만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진짜예요?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거예요?”나는 일부러 배인호를 무시하고는 이우범을 향해 웃어 보였다.“네. 오늘도 봐요. 우범 씨가 제일 먼저 나 구하러 왔잖아요. 기회를 안 주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이우범이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억제하지 못했다.배인호의 표정은 전례 없는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에겐 더 이상 손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우범과 사귀는 건 나의 자유였다.“먼저 병원부터 가자.”엄마가 걱정스레 말했다.나는 머리를 끄덕였고 이우범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배인호 옆을 지나치는데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허지영, 후회할 거야.”나는 배인호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후회하지 않을 거예요.”배인호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겪었던 아픔을 겪었으니 서로 퉁친 걸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엄마 아빠는 그런 배인호를 힐끔 쳐다보더니 나를 데리고 나갔다. 곧이어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경찰이 온 듯싶었다.나와 이우범은 병원에 도착해 치료받았다. 약 효과가 지나긴 했지만, 몸에 해로운 약이라 신중하게 대해야 했다.엄마는 새벽까지 내 곁에 같이 있어 주면서 말했다.“네 아빠 아직 경찰서에 있는데 화가 잔뜩 나 계시더라.”“서란이랑 유진웅이 한 짓이에요. 증인이 있어도 부족하대요?”내가 물었다.“유진웅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란이 너무 깨끗하게 빠져나가서 어려울 수도 있어.”엄마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너 배인호를 알게 되면서부터 계속 다사다난하네, 어떡하지?”그러다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그리고, 이 선생님이랑 사귀는 거 진짜 신중하게 고려해 봤어?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야.”“네, 생각해 봤어요.”나는 굳건하게 대답했다.“엄마랑 아빠도 내가 이 선생님이랑 만나보는 거 원하지 않았어요?”엄마가 한참 침묵하더니 말했다.“저번에 절에 가서 제비를 뽑아서 길흉
“난 털어내기 싫어. 이것만 말해. 진심으로 이우범과 같이 있고 싶은 거야?”배인호의 눈에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나는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고는 물었다.“인호 씨, 전에 그렇게 나를 멸시하면서 밀어낼 때 이렇게 후회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전생에 죽기 전 이 화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배인호는 드디어 세상에서 그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과 이미 진작에 나한테 반한 것을 깨닫고 내가 죽은 뒤 뼈저리게 후회하는 장면 말이다.지금 끝내 이루어졌고 나는 살아 있지만 나는 그가 나와 끝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배인호가 한참 침묵하더니 여태껏 살아오면서 제일 비천한 태도로 말했다.“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지금 후회한 건 맞아. 난 네가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인호 씨, 이 말을 해줘서 고마워요. 내 복수심이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어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에 기대여 배인호에게 웃어 보였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후회에요. 난 다시 기회를 줄 생각도 없어요. 난 이제부터 우범 씨의 여자 친구예요. 거리 유지해 주세요. 우범 씨한테 영향 주기 싫어요.”배인호는 자존심을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나는 그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그와 눈을 마주쳤고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려고 애썼다. 그래야만 내 눈빛이 충분히 안정되어 보인다.“내가 서란이랑 있어도 상관없다 이거지?”배인호의 입술이 움직였다.“네, 축복해 줄게요.”내가 대답했다.“근데 제발 서란한테 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 좀 전해줘요. 이번 납치 사건도 서란이 계획한 거 알고 있어요.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예요.”배인호가 차갑게 냉소를 던졌다.“허허.”나는 이 냉소가 무엇 의미인지 몰라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배인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일기장을 꺼내 침대에 던지더니 병실에서 나갔다.배인호가
서란의 목적은 나와 이우범을 단단히 묶어 배인호가 마음을 접게 하는 것이었다.일이 커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배인호에게 디엠을 보내 그의 전처와 친구가 무슨 일을 했는지 보라고 했다. 하지만 배인호는 마치 증발한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나는 이런 복잡한 일에 관심이 없었고 몸이 좋아지자 바로 출근했다.회사에 돌아오자,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퇴근 시간이 거의 되자 배달원이 꽃 한 다발을 가지고 올라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카드에 적힌 이름은 이우범이었다.이우범이 전화를 걸어왔다.“퇴근했어요? 저녁, 같이 먹을래요?”관계도 성립한지라 거절하기 그래서 나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요.”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이우범과 약속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나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허지영 씨, 전에 납치됐던 사건에 새로운 수사 진척이 있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네, 말씀하세요.”십 분 정도 들었는데 내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진웅과 서란 모두 아무 일 없었다. 이번에도 유진웅 밑에 있는 몇몇 양아치들이 죄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고 이는 이우범을 만날 때까지 지속되었다."왜 그래요? 나랑 밥 먹기 싫어요?"내가 죽상을 하고 있자 이우범이 내 볼을 꼬집으며 친근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서란이 너무 강해져서 나 같은 피해자가 지목해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에요."내가 자리에 앉으며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이우범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괜찮아요. 내가 처리할게요."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처리할 거예요?"이우범은 거의 집안 배경으로 일을 해결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의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서란과 맞서기엔 어려웠다.게다가 나와
이우범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려던 찰나,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서란이 죄를 면한 이유가 뭔지 그냥 말해줘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내일 만나서 얘기하죠? 같이 밥도 먹고요.”이우범은 담담하게 답했으며,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피곤함이 섞여 있었다.나는 밥을 먹고 싶진 않았지만, 그 일을 위해 흔쾌히 동의했다.“그래요, 내일 봐요.”전화를 끊고 나니 이미 퇴근 시간이었다.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 민정이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헐, 지영아. 배인호와 서란 다시 만난다는데 알고 있었어?”“응?”나는 어리둥절해 물었다.“서란이 배인호와 만난다고 공식적으로 입장 발표했어! 지금 그 둘의 신분 때문에, 많이 술렁이는 분위기야. 그 둘이 다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민정이는 어이가 없는 듯했으며, 매우 화나 보였다.나는 살짝 의아하긴 했으나, 금세 이해가 갔다. 배인호가 나한테서 더는 희망을 보지 못하니, 결국은 자신한테 헌신하는 서란을 택한 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말이다.“음, 그러라고 해.”나는 담담하게 답했다.“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그러니 너도 절대 다시 되돌아보지 마.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역겹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긴 해!”민정이가 씩씩거리며 답했다.나는 그녀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서란으로 하여금 역겨웠던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 말이다. 단지 앞으로 더는 나를 역겹게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이다.——다음날.이우범이 오늘 저녁 당직인 관계로, 우리 둘은 오후에 만나서 밥을 먹게 되었다.“괜찮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는데, 거기로 가요.”이우범은 나를 보자마자, 먼저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끌고 갔다.그 힘은 너무 세지 않은 적당한 정도였고, 그 몸에 밴 은은한 비누 향은 햇빛을 가득 머금은 듯했다.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최대한 적응하려 하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대략 2~3분 정도 걷다 보니 눈앞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하나 나왔다.그
배인호의 위치는 이우범과 나란히 즉 바로 내 옆 맞은편 자리였기에, 나는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숙인 채 핸드폰만 하고 있었고, 그 늘씬한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만 분주하게 두드렸다. 또한, 메뉴선택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견이 없어 보였다.“아무거나. 네가 먹고 싶은 거로 해.”“그래요!”서란은 배인호의 그런 냉담한 모습에 전혀 개의치 않고, 배인호가 좋아하는 음식을 능숙하게 주문했다. 그런 서란의 모습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배인호에 대해 잘 알고 있네? 나는 이 세상에서 배인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인 줄 알았다. 어쨌든 10년이란 시간 동안, 해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사람만 둘러싸고 있었으니 말이다.“왜 그래요? 입맛에 안 맞아요?”내가 별로 먹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이우범이 부드럽게 물었다.“제가 피망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나는 접시에 담긴 수제 먹물 파스타를 가리키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이우범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이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먹물 파스타에서 꼼꼼히 피망을 골라냈다.평소의 그는 수술도 참여하기에 그 손은 항상 섬세하고 깨끗했으며, 나이프와 포크를 잡는 자세도 매우 우아하고 안정적이었다.그는 피망을 다 고르고 난 뒤, 자신의 그 먹물 파스타를 나한테 건넸고 내가 먹다 남은 파스타를 가져갔다.“어, 그거 내가 먹던 건데!”나는 재빨리 그를 말렸다.“괜찮아요.”이우범은 아무렇지 않게 내가 먹다 남은 파스타를 가져가서 먹었다.그 모습에 나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사실 나는 피망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단지 아무 핑계나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는 내가 먹던 거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의 온화함과 섬세함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한창 먹물 파스타를 집중해서 먹고 있을 때쯤, 갑자기 옆에서 서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일 한 지 얼마 안 돼서 새우가 먹고 싶어도 깔 수가 없네.”이어서 몇 초 늦게 배인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