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는 그를 구경만 하러 온 진상 손님 취급하고 있었다.그래서 기본적인 예의도 지킬 생각이 없는 듯했다.천도준은 여직원에게 따지는 대신,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리고 자리를 뜨려는 장유민을 불러세웠다.“여기 소개 좀 해주실 수 있나요?”장유민이 티가 나게 인상을 썼다.이대광 믿고 어떻게든 실적을 채워보려고 했는데 믿던 이대광이 추락하면서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팀장이 자신을 이런 고객이나 접대하라고 보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어차피 사지도 않을 거면서 소개가 왜 필요한 걸까?하지만 팀장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결국 불쾌한 얼굴로 천도준의 앞으로 다가갔다.“손님의 요구사항을 말씀해 주시면 그에 맞는 상품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아주 불쾌했지만 팀장이 보고 있는 데서 손님한테 너무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그랬다가는 당장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좀 큰 집을 원합니다.”천도준이 말했다.장유민은 티 안 나게 그를 흘겨보았다. 천문동 분양 센터까지 와서 큰집을 요구하다니! 대체 주제파악을 모르는 사람인가?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 짜증을 참으며 가장 저렴한 단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리고 모델 하우스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300평, 여기서 가장 작은 별장 면적이 300평이에요.”진심으로 접대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 정도 말해줬으면 천도준이 포기하고 물러갈 줄 알았다.매매가를 들으면 일반인은 겁 먹고 도망갈 가격이었다. 빨리 이 손님을 보내버리고 다른 고객을 기다리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천도준은 그녀가 가리킨 모델 하우스를 바라보며 웃음이 나왔다.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장유민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가장 작은 별장이라… 그쪽은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군요.”그의 불만에 장유민도 가소롭다는 그에게 말했다.“3백 평짜리 별장도 최소 수십억은 해요. 구매할 실력도 없으면서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얘기예요.”“지금 뭐라고 했어요?”천도준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
그리고 이때, 얼굴에 퍼렇게 멍이 든 이대광이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장유민의 확 달라진 태도에 속이 타서 바람 좀 쐬고 온 건데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대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장유민의 앞에 서 있는 천도준을 알아보았다.이대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어제 그렇게 괴롭히고 부족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팀장님, 이런 진상 손님은 원래 경비 불러서 내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장유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나쁜데 아침부터 진상 손님이 걸려서 속이 울렁거리고 짜증이 가득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이대광이 흠칫하더니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장유민 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짜증이 잔뜩 치민 장유민에게 이대광의 등장은 그녀의 분노 지수만 더 올린 격이었다.“이대광 씨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이제 당신은 팀장도 아니잖아요. 마케팅 직원이라고 아무 손님한테나 굽신거려야 하나요?”이대광이 마케팀 팀장직에 있을 때, 그녀는 실적 한번 올려보겠다고 이대광에게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그런데 그의 직위가 강등되면서 온 세상이 자신을 배신한 기분이었다.짝!조급해진 이대광이 그녀의 귀뺨을 때리며 고함쳤다.“제발 그 입 좀 닥쳐!”그는 무능하지만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게다가 매형이 지금 누나랑 이혼을 고민하는 시점에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의 안락한 생활도 끝장이었다.장유민은 매형인 주건희마저 경외심을 갖고 대하는 인물을 진상 손님 취급하고 있었다.장유민이 어떻게 되든 그가 알 바는 아니지만 상대가 천도준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지금 나 쳤어? 이대광 당신이 뭔데 나를 쳐?”장유민이 얼굴을 감싸며 미친 사람처럼 포효했다.마케팅 팀장과 직원들이 달려와서 이대광을 말렸다.팀장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대광은 자신을 잡고 있는 직원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이거 놔!”그리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천도준에게 다가갔다. 그는 천도준
분양 센터에 무서운 정적이 감돌았다.모두가 머릿속이 하얘지고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250억을 무슨 시장에서 장을 보듯이 아무렇지 않게 일시불로 결제하는 구매자가 나타나다니!“네. 절차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이대광이 환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평사원으로 강등된 뒤에 첫 실적이 단지의 최고가 별장이었다.천문동 별장단지는 분양이 시작된 뒤로 가격이 떨어진 적 없었다.산기슭에 위치한 최고급 별장은 신분과 지위의 상징으로 평가 받았지만 가격대가 너무 비싸 아무도 건들지 못했던 매물이었다.장유민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온몸에서 힘이 쫙 빠지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그녀가 진상 손님이라고 비웃던 손님이 250억을 일시불로 구매할 실력을 가진 자였다니!그녀의 판단 착오로 실적은 이대광에게 돌아가게 생겼다.장유민은 원망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스스로 귀뺨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저 정도 실적이면 마케팅 직원이 가져가는 보너스만 해도 어마어마했다.부족한 실적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만 놓쳐버린 것이다.천문동 분양 센터의 연봉은 업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사실 그만큼 경쟁도 심했다.실적을 달성하지 못한 직원은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구조였다.그리고 이번 달 그녀의 실적은 꼴찌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대광에게 빌붙을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며칠만 있으면 이번 달이 다 지나가는데 남은 시간 안에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그녀는 해고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장유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마케팅 팀장과 동료들은 그녀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냈지만 다가와서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별장의 구매 절차는 아주 복잡했지만 이대광의 도움이 있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계약서에 사인한 뒤, 천도준은 집 키를 받았다. 이제 그 집은 그의 소유가 된 것이다.분양 센터를 떠날 때, 천도준은 팀장에게 혼나고 있는 장유민을 힐끗 보았다. 어렴풋이 해고라는 단어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이난희는 박유리가 오해할까 봐 다급히 말했다.“유리 씨는 정말 잘하고 있어요. 덕분에 내가 요즘 정말 편해요. 그런데 쉬지 않고 일하는 걸 보니 내 마음이 안 좋네요.”박유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울먹이며 이난희에게 말했다.“저는 아주머니가 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한테 그만두라고 말씀하신 줄 알았어요. 사실 이 일, 저한테는 정말 중요하거든요.”이난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박유리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아니면 우리 아들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할까요? 그래야 유리 씨도 집에 가서 편히 쉴 거 아니에요.”박유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아주머니, 대표님도 일하느라 바빠서 저를 고용한 건데 어떻게 저 힘들다고 대표님을 오라가라 하겠어요?”“알았아요. 그럼 저녁에는 푹 자둬요. 어제처럼 밤을 꼴딱 새면 곤란해요.”박유리가 머뭇거리자 이난희가 정색하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해요. 예쁜 얼굴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았잖아요. 그 얼굴로 남자친구가 도망가겠어요. 여자는 스스로 자신을 챙길 줄 알아야 해요.”박유리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이난희의 말이 따뜻한 온풍처럼 그녀의 시린 마음을 녹여주었다.이렇게 진심 어린 걱정의 말을 들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녀는 이난희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아주머니.”한편, 또 다른 병실.얼굴이 창백한 장수지가 병상에 누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약혼식장에서 심장병이 발작하며 응급실에 실려왔지만 다행히 조치가 빨리 이루어져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오덕화는 조용히 아내의 옆에서 사과를 깎아 아내의 입에 넣어주었다.“조금이라도 먹어.”하지만 장수지는 눈물만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류였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성대한 약혼식을 고집했다.하지만 약혼식에서 임설아의 행동은 그녀가 친척들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게 만들었다.장수지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오남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엄마를 바라보았다.“엄마, 약혼식 전날 나 진짜 임설아랑 잘 얘기했었어! 그애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었고!”그녀는 몹시 억울했다.약혼식 날 그들 일가가 창피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며칠 동안 장수지의 거센 비난에 몇 번이고 해명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아직도 거짓말이야?”장수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반박했다.“설아 걔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거짓말을 약혼식에서 하겠니?”“누나 대체 왜 그래?”오남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큰소리로 말했다.“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가장 잘 알아. 걔는 절대 그런 거짓말을 할 애가 아니야!”오남미는 온몸이 덜덜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그녀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왜 다들 내 말을 안 믿어줘? 엄마, 나 엄마 딸이야!”장수지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뻔히 보이는 거짓말인데 내가 어떻게 널 믿어? 설아도 결혼하면 우리 식구야. 어떻게 설아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엄마….”오남미가 뭐라고 하려는데 오덕화가 땅을 치며 버럭 소리질렀다.“그만해, 오남미! 엄마 또 쓰러지는 거 보고 싶어?”그 말에 오남미는 변명을 포기했다.“엄마, 쉬고 있어. 난 출근하러 가볼게.”그녀는 도시락통을 내려놓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그거 얼마나 번다고 맨날 바쁜 척이야? 엄마가 입원했는데 옆에서 간호는 못해줄 망정!”등 뒤에서 장수지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말을 들은 오남미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복도를 돌아 비상계단으로 가서 울음을 터뜨렸다.“왜 다들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나 혼자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해?”최근 벌어진 일들은 이미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엄마가 입원한 뒤로 병실에 찾아올 때마다 욕을 들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가족들을 위해 도시락을 나르고 출근까지 해야 했다.하지만 돌아온 건 엄마의 불신과 맹비난뿐이었다.임설아한테 찾아가서 왜 약
장수지가 고개를 돌려 애틋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들, 약혼식 끝나고 설아는 만나봤어?”“엄마, 설아 걔 요즘 만나주지도 않아. 아침 일찍 출근하기 전에 데리러 가도 내 차도 안 타고 나랑 말도 하지 않아.”오남준이 절망한 얼굴로 말했다.“세상에….”장수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탄식했다.“남미 그 계집애가 거짓말을 안 했으면 어떻게든 빌려서라도 2천만 원은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이런 상황도 없었을 거 아니야!”오남준은 갑자기 통화에서 천도준이 돈이 많다고 하던 임설아의 말이 떠올랐다.그 뒤로 오남미에게 죽는다고 협박해서 천도준에게 가서 돈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오남미가 왜 갑자기 임설아를 찾아갔는지 의문이 들었다.생각할수록 화가 난 오남준은 무릎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아빠, 엄마, 천도준 엄마가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지?”오덕화 부부는 의아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오덕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누나한테 들은 것 같아.”사실 그 역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난희의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한 뒤로 딱 한번 문안 차 병실을 찾은 적 있었는데 아주 오래 전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나 그 아줌마 좀 만나고 올게.”그 말을 끝으로 오남준은 병실을 나갔다.그는 천도준이 정말 부자인지 확인이 꼭 필요했다.임설아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만약 천도준에게 치료비를 감당할 돈이 있다면 분명 그 돈으로 엄마 병치료부터 했을 것이다.‘그럼 그 자식이 누나랑 이혼한 것도 실은….’오남준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한편, 박유리는 병실에서 이난희의 팔 다리를 닦아주고 있었다.이난희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유리 너 손에 굳은살이 많네.”“죄송해요. 제가 아프게 해드렸나요?”박유리가 화들짝 놀라며 사과했다.“아니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이난희가 다급히 말했다.“어린 여자애가 밖에서 얼마나 고생했으면 손에 굳은살까지 생겼을까? 안타까워서 그래.”박유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
박유리는 그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전직 프로 격투기 선수가 저런 솜주먹 하나 무서워할 리 없었다.게다가 그녀와 오남준은 체형으로도 별로 차이 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한 뒤, 그대로 오남준의 복부에 주먹을 쫒았다.쾅!오남준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아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박유리는 손을 툭툭 털며 비웃음을 날렸다.“너 같은 인간은 열 명이 동시에 덤벼도 날려버릴 수 있어.”“이런 미친….”오남준은 배를 끌어안고 욕설을 퍼부었지만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에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이난희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박유리처럼 참한 여자애가 한 주먹에 남자를 쓰러뜨릴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당장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꺼져!”박유리는 오남준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병실 밖으로 향했다.“다시는 여기 찾아와서 아줌마 자극하지 마. 안 그러면 병신을 만들어 줄 테니까.”“이거 안 놔?”오남준은 거칠게 몸부림치며 박유리를 뿌리쳤다. 그리고 험악한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뭔데? 나 천도준 그 자식 처남이라고!”처남?박유리가 잠깐 당황했다. 천도준에게 그의 가족 사항에 대해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말했다.“대표님이 아줌마를 돌보라고 날 고용했어.”“뭐야? 간병인까지 고용한 거야?”그 말을 들은 오남준은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을 깨닫고 목청을 높였다.“전에는 그 4천만 원이 마지막 치료비였다면서 누나랑 이혼한다고 난리를 부리더니 언제 돈이 그렇게 많아서 간병인까지 고용했대? 돈이 있으면서 누나랑 이혼하기 위해 일부러 쇼한 거잖아! 그게 아니면 이게 다 뭔데?”박유리는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이난희가 울며 소리쳤다.“닥쳐! 내 아들은 그런 사람 아니야!”죽을 고비를 넘긴 뒤로 아들이 갑자기 돈이 많아졌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억울해? 내가 틀린 말 했어? 우리 누나가 더 억울하지!”오남준이 이를 갈며
그리고 박유리의 과감한 행동에 그들은 간담이 서늘했다.“당장 꺼지라고 했어!”박유리가 오남준의 어깨를 밀치며 다시 말했다.이 남자가 계속 여기서 난리를 피우면 이난희가 스트레스를 받고 쓰러질까 봐 더 걱정이었다.박유리는 고개를 돌려 울고 있는 이난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줌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다 쫓아버릴게요!”“간병인 주제에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해?”오남준이 목청 높여 소리쳤다. 집에서 곱게 자란 그는 천도준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곱게 물러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그만해. 아줌마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험하다고!”박유리가 애원의 목소리로 말했다.“위험해? 저 여자가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오남준은 목이 갈라져라 소리를 질렀다.“하찮은 시골 출신 주제에 우리 누나를 만나서 좀 사람구실을 하게 만들어 줬더니 저 여자를 살리겠다고 전재산을 병원비에 갖다 쓴 것도 모자라 누나랑 이혼까지 한 인간이야! 양심에 찔리지도 않아?”“그만!”박유리가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오남준이 곱게 물러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사람을 죽일 수도 없었다.“유리야, 그냥 보내.”이난희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우린 쟤네한테 빚진 거 없어. 우리 아들이 그 오남미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저놈은 지금 우리 아들을 모독하는 거야!”“아줌마, 제가 해결할게요. 아줌마도 그만 진정하세요.”박유리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이난희와 오래 시간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착하고 심성 고운 사람이라는 건 같이 지내며 충분히 느꼈다.간병인에게까지 이렇듯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오남준이 말한 것처럼 파렴치한 인간일 수는 없었다.그리고 이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 박사가 사람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상황을 파악한 장 박사는 화가 치밀었다.지난번에도 이난희 환자를 자극해서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