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이 추측했다.“집이 그리웠던 거야?”“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셨는데,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연도진은 옆에 있는 김시연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시연이가 강남이 있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김시연은 연도진을 흘겨보며 마음속으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말은 아주 청산유수였다.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연도진의 말에 완전히 홀려있었다.김웅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렇게 뛰어난 사위를 제이엔 그룹에 영입하면 김씨 가문은 점점 잘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나중에 김윤재가 회사에 들어가도 연도진이 형부로서 잘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디민 제이엔 그룹의 의류 업계는 화영 캐피털보다 잘난 게 없었으니, 자신의 제안을 연도진이 승낙할지 말지는 미지수였다.아무래도 상황을 지켜보며 천천히 얘기를 꺼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김시연의 부모는 이미 연도진을 미래의 사위로 생각하고 있었고 연도진 역시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에 세 사람의 점심 식사 자리는 화목하기 그지없었지만 김시연만은 속이 답답했다.그녀도 자신이 왜 답답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님이 연도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충분히 좋은 일이었는데 말이다.연도진이 부모님을 즐겁게 해주는 모습을 보자 김시연은 그저 속이 답답해 났다.점심을 먹고 김시연의 어머니는 김시연에게 연도진을 2층으로 데리고 가 잠시 쉬도록 했다. 의도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던 생각이었다.연도진은 김시연을 따라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에 도착하자 김시연은 아무 방문이나 열며 말했다.“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연도진이 김시연의 손목을 잡더니 말했다.“같이 들어가자, 할 말 있어.”“무슨 말인데?”김시연이 연도진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연도진이 문을 닫더니 입을 열었다.“결혼 얘기는 오늘이 아니라 다음에 얘기할 생각이야.”“응, 어쨌든 다음에 얘기해도 부모님께서 다음 달에 바로 하는 결혼을 허락하실지
어릴 때부터 학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김시연을 어머니는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김시연은 애교만 부리면 당시의 모든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김시연은 아예 학업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어머니는 그런 자신의 양육방식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엄하게 가르치는 게 진정 김시연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김시연을 입술 삐죽 내밀며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니가 다시 물었다.“나한텐 솔직히 얘기해. 너 연도진이랑 고등학생 때 사귄 적 있지?”김시연이 입술을 꾹 다물고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손을 흔들었다.“엄마, 그게 다 언제적 일인데 인제 와서 그런 말을 왜 해요?”어머니는 김시연의 말을 듣고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그때 너희 아빠랑 내가 너 유학 보내려고 했을 때, 네가 죽어도 안 가겠다고 버티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니?”“음... 사실 그건 아니에요. 그냥 유학 가기가 싫었고, 엄마랑 떨어지기 싫었어요!”“다 지난 일이고 너랑 연도진은 지금 혼담까지 오고 가는 사이인데, 솔직히 말해봐. 솔직히 말한다고 내가 널 어떻게 할 수 있겠니?”김시연이 잠시 생각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우리 고등학생 때 사귀었었는데 연도진이 유학 간 이후로 헤어졌어요. 그리고...”“그리고 귀국하고 나서 다시 너 쫓아다녔니?”“네.”“너도 아직 걜 좋아하는 거야? 계속 같이 있고 싶어?”“네...”“에휴, 너 하고 싶은대로 하렴. 네가 뭘 하든 엄마는 널 응원할 거야.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네가 연도진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만약 연도진이 마음먹고 널 이용하려고 한다면 네 지능으로는 네가 팔려간다고 해도 걔한테 돈을 쥐여줄걸?”“엄마, 어떻게 딸한테 그런 말을 해요?”“내 말이 틀려?”“...”“엄마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나한테 팔아넘길 게 뭐가 있다고.”김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엄마, 연도진이 우리 결혼
스튜디오 입구.김시연은 오늘 하루의 촬영을 마치고 입구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의 마이바흐가 다가와 그녀의 앞에 멈춰 섰고 차창이 내려가면서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얼른 타.”“갑자기 여긴 웬일이야?”김시연은 어리둥절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나 이제 네 남자 친구야. 퇴근하는 여자 친구 데리러 온 게 그렇게 이상해?”연도진은 가볍게 웃었다.“아주 과몰입했네.”김시연은 메이크업 박스를 트렁크에 넣고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고마워.”“남자 친구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건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잖아.”차는 과속 방지턱을 지나 어느덧 도로에서 주행했다.“연기가 적정에 맞나 보네?”김시연이 비웃듯이 말하자 연도진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계약한 이상 내 역할에 성실히 임해야지. 물론 계약서에는 연장자 앞에서만 연기한다고 적혀있어도 우린 항상 조심해야 돼.”“막말로 곧 결혼할 사이인데 사적으로 아예 안 만나면 아버님이 의심하지 않을까? 그리고 만에 하나 네가 실수로 아버님 앞에서 나한테 고맙다는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당연히 의심하지.”미간을 찌푸린 채 듣고 있던 김시연은 그의 말이 꽤 설득력 있었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밀려왔다.“다음 달이면 결혼하는데 우리 아빠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해봤어? 어머님은...”“우리 엄마는 내가 이미 설득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버님께는 대충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회사 상사의 딸이 날 좋아한다고 할까? 너무 집착해서 다음 달에 여자 친구랑 결혼한다고 거짓말했는데 꼭 참석하겠다며 난리를 피워서 어쩔 수 없이 진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얘기하지 뭐.”“자기애가 남다르네...”김시연은 입을 삐죽였다.“그 상사가 누군데? 지어낸 얘기라면 우리 아빠 아예 안 믿을걸?”“정훈 삼촌.”“그래?”김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따님이 있으셨나?”“응. 서이란이라고 학교 후배야.”유학 시절 같은 학교를 다닌 후배인 모양이다.“그렇구나.
반도에는 총 30여 채의 단독주택이 있는데 전부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이루어졌고 600평에 달하는 그곳에는 몇 개의 스위트룸을 제외하고도 오락실, 바, 헬스장 등 모든 게 갖추어져 있다. 심지어 주택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온천과 정원은 필수 조건인 셈이다.인테리어로 말하자면 거실은 6개의 유리창을 사용하여 실내의 충분한 채광을 보장했고 거실 소파에서는 정원과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심지어 2,3층 테라스에는 야외 바도 마련되어 있었다.그린 빌리지는 일반인이 쉽게 넘어볼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김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돈이 그렇게 많아?”“현금은 얼마 없어. 대출받아야지.”연도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하랑 씨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싸게 줄 수도 있잖아.”“됐어. 승민 씨랑 아직 화해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부탁하는 건 너무 민폐잖아.”“두 사람 아직도 화해 안 했어?”“응. 승민 씨한테 딸이 있대. 쉽게 용서할만 한 일은 아니잖아.”연도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내가 알기론 하랑 씨도 그 애랑 엄청 가깝게 지냈거든? 승민 씨도 미처 몰랐을 뿐이지 일부러 숨기려는 뜻은 없었을 거야.”“알든 모르든 갑자기 아이가 생긴 건 맞잖아. 이엘리아 씨는 엄마라는 이유로 무조건 아이를 보겠다고 하루 멀다고 찾아올 거야. 어떤 여자가 그걸 감당하겠냐?”말을 마친 김시연은 의심의 눈초리로 연도진을 바라봤다.“설마 나몰래 아이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연도진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터졌다.“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전에 승민 씨가 바람피웠을 때도 용서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단호하지?”“하랑이 임신했어. 그리고 이엘리아 씨가 어떤 성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앞뒤 생각 안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여자인데 만에 하나 하랑이가 승민 씨랑 화해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걸? 지금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이엘리아는 사건의 경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오늘 점심. 이엘리아는 부시아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부시아더러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라고 시켰다.부시아도 처음에는 꺼렸지만 마지못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부승민이 전화를 받았는데, 평소보다 목소리가 많이 쉬어 있었지만 이엘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곧 핸드폰 너머로 숨을 헐떡이는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심각성을 깨달았다.부승민은 순간 당황하여 대충 몇 마디 하고선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고 그의 반응이 너무 의심스러웠던 이엘리아는 분명히 온하랑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채우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이엘리아는 그 자리에서 테이블을 뒤집어버리고 즉시 사람을 보내 부승민의 위치를 조사하게 했다.흥신소의 말에 따르면 부승민은 점심에 퇴근했고 회사를 나와 날씬한 몸매의 여성과 함께 호텔에 들어갔다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은 CCTV에서 캡처한 것으로 보였는데 두 사람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사진 속의 여자는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낀 채 호텔로 걸어갔고 그걸 본 순간 이엘리아는 온하랑이라고 확신했다.사진 속의 여자가 입고 있는 하얀색의 원피스는 필라시에서 온하랑이 입은 것과 매우 흡사했다.분노가 이성을 지배한 이엘리아는 눈이 뒤집힌 지 오래였고 앞뒤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무작정 흥신소에 호텔의 위치를 보내달라고 했다.부승민의 방 번호를 알아낸 뒤에는 호텔에서 성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며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경찰이 출동되었다.그들은 이엘리아가 알려준 방 앞에 도착한 후 망설임 없이 안으로 쳐들어갔다.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그 방은 평범한 호텔 방이 아니라 작은 회의실이었다.테이블 앞에서 이름표가 놓여 있었고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정장 차림으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경찰도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당사자를 불러내
“난 당연히 네 편이지. 그냥 네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솔직히 성공하지도 못하는 일에 목숨 걸고 안간힘쓰는 게 너무 안타까워.”“왜 내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페이 임신했어.”“뭐라고?”이엘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더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페이 정말 임신했어.”앨리스는 다시 한번 얘기했다.“사실 승민 씨랑은 이미 화해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따로 사는 거겠지. 페이가 건강이 안 좋아서 임신하는 게 어려워. 힘들게 가진 아이인데 괜히 네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일부러 헤어진 척한거야.”이엘리아의 넋이 나간 표정을 바라보며 앨리스는 계속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서 한번 알아봤거든? 얼마 전에 승민 씨랑 같이 산부인과에 검사받으러 갔대. 이렇게 철저하게 숨기는 걸 보면 아이를 엄청 아끼는게 틀림없어. 널 사랑하는 마음은 아예 없을 걸?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나면 부시아도 뒷전인 상황인데 너랑 만나겠냐?”지금도 부시아를 이용해 부승민에게 접근하는 게 어려운데, 하물며 온하랑의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어떨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그러니 절대 온하랑이 아이를 낳게 해서는 안 된다.이엘리아는 넋을 잃은 채로 멍을 때리다가 생각에 잠겼다.“안돼... 절대 아이를 낳게 해선 안돼... 앨리스, 빨리 방법 좀 생각해 봐.”이엘리아는 잔뜩 흥분한 채로 앨리스의 손을 꽉 잡았다.“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도대체 왜 부승민 씨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거야?”“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무조건 승민 씨를 갖고 말 거야.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도와줘.”부시아가 그녀의 아이임을 증명하는 친자확인서는 이미 전부 까발려졌다.지금 물러선다면 이엘리아는 미혼모라는 낙인이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고, 필라시에 돌아가는 순간 벨라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진실을 얘기한다면 부승민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물론 든든한 가문을 등에 업고 있으니
온하랑이 출장 간 지 이틀 만에 김시연은 연도진과 계약을 마치고 상견례까지 했다.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온하랑은 의아해하며 계약서를 훑어보았다.“너한테 유리하게 적혀있긴한데 다음날에 결혼하는 건 너무 빠른 거 아니야?”김시연은 작은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내 생각에도 빠른 것 같은데... 동생이 나이가 많아서 어쩔 수가 없네...”“결혼하면 어디서 살 거야? 도진 씨랑 얘기해 봤어?”“우린 새집 장만하려고. 마침 내일 집 보러 갈 거야. 하랑아, 너도 같이 갈래? 가서 조언 좀 해줘.”온하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촬영 일정이 타이트해서 시간이 안 될 것 같아.”“그럼 할 수 없지.”김시연은 신이 나는 듯 온하랑에게 바짝 다가갔다.“글쎄 이미 집을 알아봤다고 하더라고? 실버 플라워, 푸르지오, 그린 빌리지 셋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어.”“그린 빌리지? 반도에 있는 그거?”“응.”“도진 씨가 이번에 힘 좀 썼나 봐? 돈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온하랑은 장난 섞인 눈빛으로 김시연을 바라봤다.“솔직히 설레지?”“새집인데 당연히 설레지.”김시연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일반인이 쉽게 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잖아. 그런데 둘이 살기에는 별장이 엄청 크대. 우린 진짜 부부도 아니고, 아이도 없을 텐데 수지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어머, 이제는 도진 씨 돈 걱정까지 하는 거야?”온하랑은 농담을 던졌다.“온하랑, 감히 날 놀려?”김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손을 뻗어 온하랑을 간지럽혔다.“미안,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온하랑은 웃음을 꾹 참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용서를 빌었다.김시연은 온하랑의 몸 여러 군데를 주물이더니 푹신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그분은 참 행복한 생활을 했네. 너무 부드러워서 나까지 얼굴을 파묻고 싶다니까?”“꺼져.”온하랑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버럭하더니 소파 구석으로 옮겨 앉아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말해봐.
20분 후, 부승민은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수술실의 불은 아직 켜져 있었고 이엘리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는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고 겁을 먹은 듯 입술을 깨문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부승민은 성큼성큼 달려가 단호하게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에요?”그를 본 이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해하며 설명했다.“시아랑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려고 하교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갔어요. 레스토랑에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맞은편에 차를 세웠거든요? 그러다가 시아랑 같이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차 한 대가 달려왔어요.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상황 파악도 못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시아는 이미 쓰러져 있었어요.”“승민 씨,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요.”이엘리아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흐느꼈다.“신고는 했어요?”“아니요... 깜빡했어요.”이엘리아는 옷깃을 쥐고 쩔쩔맸다.“시아를 빨리 병원에 데려갈 생각만 하고 있어서 경찰에 신고할 틈이 없었어요.”마침 주차한 차가 옆에 있어 구급차를 기다릴 바엔 운전하는 게 훨씬 더 빠르다고 생각했다.부승민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비상구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다.경찰에 신고한 후 곧장 연민우의 번호를 입력했다.이엘리아는 긴장한 기색으로 이따금 부승민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상황을 정리한 후 부승민은 다시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경찰에 신고했어요?”“네.”부승민은 이엘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엘리아 씨를 탓하는 건 아닌데 아직은 혼자 시아를 케어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네요. 앞으로 시아랑 같이 나갈 때는 꼭 경호원을 동행해요.”“알겠어요.”이엘리아는 눈물을 닦으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할게요. 시아한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부승민은 말없이 옆에 앉아 기다렸다.30분쯤 지나자 수술실의 빨간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부시아는 링거를 꽂은 채로 간호사에게 이끌려 나왔다.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