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몇몇 부잣집 자식들이 돈을 투자했고 연도진은 GP(일반 파트너)로서 회사의 총 책임자이자 관리자였다. 모든 프로젝트의 투자와 철수는 연도진이 결정하는 것이었다.7년 후, 라네즈 투자 회사는 M 국 업계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고 그동안 투자했던 프로젝트 대부분이 성공적으로 상장해 라네즈에 엄청난 경제적 수익을 안겨주었다.투자 회사의 주식구조만 살펴보아도 도현민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게다가 조금 전 연도진을 말로만 미루어 보아도 그가 지능이 정말 높은 사람인 데다가 생각도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사교 능력 또한 뛰어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김시연 같은 단순한 사람은 연도진이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때 그의 손에 쉽게 놀아날 게 뻔했다.이런데 엄마로서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공부와 회사 업무 쪽으로 약한 김시연이 연도진과 함께라면 서로 보완해줄 수 있지 않을까?오직 연도진과 김시연이 한마음이라면 연도진은 김시연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적어도 지금 상황으로만 봤을 때 연도진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김시연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다.하지만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마치 그녀도 결혼할 때까지는 김웅이 바람이 날 줄은 몰랐던 것처럼.여러 생각이 뇌리를 그녀의 뇌리를 스치다가 결국 김시연의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시연이가 널 안 좋아한다고 했으면 넌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그럴 일은 없을 거란 자신이 있었습니다.”연도진이 김시연을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김시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생각했다.‘자신? 자아도취에 빠졌구먼!’정말 자기 체면 하나는 잘 살리는 사람이었다.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 시절 시연이는 분명 공부라면 질색을 하던 아이였는데 어쩌다가 누군가한테서 과외를 받을 생각을 했을까?이런 청년
김웅이 추측했다.“집이 그리웠던 거야?”“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셨는데,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연도진은 옆에 있는 김시연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시연이가 강남이 있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김시연은 연도진을 흘겨보며 마음속으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말은 아주 청산유수였다.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연도진의 말에 완전히 홀려있었다.김웅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렇게 뛰어난 사위를 제이엔 그룹에 영입하면 김씨 가문은 점점 잘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나중에 김윤재가 회사에 들어가도 연도진이 형부로서 잘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디민 제이엔 그룹의 의류 업계는 화영 캐피털보다 잘난 게 없었으니, 자신의 제안을 연도진이 승낙할지 말지는 미지수였다.아무래도 상황을 지켜보며 천천히 얘기를 꺼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김시연의 부모는 이미 연도진을 미래의 사위로 생각하고 있었고 연도진 역시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에 세 사람의 점심 식사 자리는 화목하기 그지없었지만 김시연만은 속이 답답했다.그녀도 자신이 왜 답답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님이 연도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충분히 좋은 일이었는데 말이다.연도진이 부모님을 즐겁게 해주는 모습을 보자 김시연은 그저 속이 답답해 났다.점심을 먹고 김시연의 어머니는 김시연에게 연도진을 2층으로 데리고 가 잠시 쉬도록 했다. 의도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던 생각이었다.연도진은 김시연을 따라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에 도착하자 김시연은 아무 방문이나 열며 말했다.“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연도진이 김시연의 손목을 잡더니 말했다.“같이 들어가자, 할 말 있어.”“무슨 말인데?”김시연이 연도진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연도진이 문을 닫더니 입을 열었다.“결혼 얘기는 오늘이 아니라 다음에 얘기할 생각이야.”“응, 어쨌든 다음에 얘기해도 부모님께서 다음 달에 바로 하는 결혼을 허락하실지
어릴 때부터 학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김시연을 어머니는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김시연은 애교만 부리면 당시의 모든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김시연은 아예 학업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어머니는 그런 자신의 양육방식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엄하게 가르치는 게 진정 김시연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김시연을 입술 삐죽 내밀며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니가 다시 물었다.“나한텐 솔직히 얘기해. 너 연도진이랑 고등학생 때 사귄 적 있지?”김시연이 입술을 꾹 다물고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손을 흔들었다.“엄마, 그게 다 언제적 일인데 인제 와서 그런 말을 왜 해요?”어머니는 김시연의 말을 듣고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그때 너희 아빠랑 내가 너 유학 보내려고 했을 때, 네가 죽어도 안 가겠다고 버티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니?”“음... 사실 그건 아니에요. 그냥 유학 가기가 싫었고, 엄마랑 떨어지기 싫었어요!”“다 지난 일이고 너랑 연도진은 지금 혼담까지 오고 가는 사이인데, 솔직히 말해봐. 솔직히 말한다고 내가 널 어떻게 할 수 있겠니?”김시연이 잠시 생각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우리 고등학생 때 사귀었었는데 연도진이 유학 간 이후로 헤어졌어요. 그리고...”“그리고 귀국하고 나서 다시 너 쫓아다녔니?”“네.”“너도 아직 걜 좋아하는 거야? 계속 같이 있고 싶어?”“네...”“에휴, 너 하고 싶은대로 하렴. 네가 뭘 하든 엄마는 널 응원할 거야.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네가 연도진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만약 연도진이 마음먹고 널 이용하려고 한다면 네 지능으로는 네가 팔려간다고 해도 걔한테 돈을 쥐여줄걸?”“엄마, 어떻게 딸한테 그런 말을 해요?”“내 말이 틀려?”“...”“엄마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나한테 팔아넘길 게 뭐가 있다고.”김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엄마, 연도진이 우리 결혼
스튜디오 입구.김시연은 오늘 하루의 촬영을 마치고 입구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의 마이바흐가 다가와 그녀의 앞에 멈춰 섰고 차창이 내려가면서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얼른 타.”“갑자기 여긴 웬일이야?”김시연은 어리둥절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나 이제 네 남자 친구야. 퇴근하는 여자 친구 데리러 온 게 그렇게 이상해?”연도진은 가볍게 웃었다.“아주 과몰입했네.”김시연은 메이크업 박스를 트렁크에 넣고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고마워.”“남자 친구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건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잖아.”차는 과속 방지턱을 지나 어느덧 도로에서 주행했다.“연기가 적정에 맞나 보네?”김시연이 비웃듯이 말하자 연도진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계약한 이상 내 역할에 성실히 임해야지. 물론 계약서에는 연장자 앞에서만 연기한다고 적혀있어도 우린 항상 조심해야 돼.”“막말로 곧 결혼할 사이인데 사적으로 아예 안 만나면 아버님이 의심하지 않을까? 그리고 만에 하나 네가 실수로 아버님 앞에서 나한테 고맙다는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당연히 의심하지.”미간을 찌푸린 채 듣고 있던 김시연은 그의 말이 꽤 설득력 있었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밀려왔다.“다음 달이면 결혼하는데 우리 아빠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해봤어? 어머님은...”“우리 엄마는 내가 이미 설득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버님께는 대충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회사 상사의 딸이 날 좋아한다고 할까? 너무 집착해서 다음 달에 여자 친구랑 결혼한다고 거짓말했는데 꼭 참석하겠다며 난리를 피워서 어쩔 수 없이 진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얘기하지 뭐.”“자기애가 남다르네...”김시연은 입을 삐죽였다.“그 상사가 누군데? 지어낸 얘기라면 우리 아빠 아예 안 믿을걸?”“정훈 삼촌.”“그래?”김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따님이 있으셨나?”“응. 서이란이라고 학교 후배야.”유학 시절 같은 학교를 다닌 후배인 모양이다.“그렇구나.
반도에는 총 30여 채의 단독주택이 있는데 전부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이루어졌고 600평에 달하는 그곳에는 몇 개의 스위트룸을 제외하고도 오락실, 바, 헬스장 등 모든 게 갖추어져 있다. 심지어 주택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온천과 정원은 필수 조건인 셈이다.인테리어로 말하자면 거실은 6개의 유리창을 사용하여 실내의 충분한 채광을 보장했고 거실 소파에서는 정원과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심지어 2,3층 테라스에는 야외 바도 마련되어 있었다.그린 빌리지는 일반인이 쉽게 넘어볼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김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돈이 그렇게 많아?”“현금은 얼마 없어. 대출받아야지.”연도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하랑 씨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싸게 줄 수도 있잖아.”“됐어. 승민 씨랑 아직 화해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부탁하는 건 너무 민폐잖아.”“두 사람 아직도 화해 안 했어?”“응. 승민 씨한테 딸이 있대. 쉽게 용서할만 한 일은 아니잖아.”연도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내가 알기론 하랑 씨도 그 애랑 엄청 가깝게 지냈거든? 승민 씨도 미처 몰랐을 뿐이지 일부러 숨기려는 뜻은 없었을 거야.”“알든 모르든 갑자기 아이가 생긴 건 맞잖아. 이엘리아 씨는 엄마라는 이유로 무조건 아이를 보겠다고 하루 멀다고 찾아올 거야. 어떤 여자가 그걸 감당하겠냐?”말을 마친 김시연은 의심의 눈초리로 연도진을 바라봤다.“설마 나몰래 아이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연도진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터졌다.“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전에 승민 씨가 바람피웠을 때도 용서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단호하지?”“하랑이 임신했어. 그리고 이엘리아 씨가 어떤 성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앞뒤 생각 안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여자인데 만에 하나 하랑이가 승민 씨랑 화해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걸? 지금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이엘리아는 사건의 경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오늘 점심. 이엘리아는 부시아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부시아더러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라고 시켰다.부시아도 처음에는 꺼렸지만 마지못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부승민이 전화를 받았는데, 평소보다 목소리가 많이 쉬어 있었지만 이엘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곧 핸드폰 너머로 숨을 헐떡이는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심각성을 깨달았다.부승민은 순간 당황하여 대충 몇 마디 하고선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고 그의 반응이 너무 의심스러웠던 이엘리아는 분명히 온하랑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채우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이엘리아는 그 자리에서 테이블을 뒤집어버리고 즉시 사람을 보내 부승민의 위치를 조사하게 했다.흥신소의 말에 따르면 부승민은 점심에 퇴근했고 회사를 나와 날씬한 몸매의 여성과 함께 호텔에 들어갔다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은 CCTV에서 캡처한 것으로 보였는데 두 사람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사진 속의 여자는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낀 채 호텔로 걸어갔고 그걸 본 순간 이엘리아는 온하랑이라고 확신했다.사진 속의 여자가 입고 있는 하얀색의 원피스는 필라시에서 온하랑이 입은 것과 매우 흡사했다.분노가 이성을 지배한 이엘리아는 눈이 뒤집힌 지 오래였고 앞뒤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무작정 흥신소에 호텔의 위치를 보내달라고 했다.부승민의 방 번호를 알아낸 뒤에는 호텔에서 성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며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경찰이 출동되었다.그들은 이엘리아가 알려준 방 앞에 도착한 후 망설임 없이 안으로 쳐들어갔다.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그 방은 평범한 호텔 방이 아니라 작은 회의실이었다.테이블 앞에서 이름표가 놓여 있었고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정장 차림으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경찰도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당사자를 불러내
“난 당연히 네 편이지. 그냥 네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솔직히 성공하지도 못하는 일에 목숨 걸고 안간힘쓰는 게 너무 안타까워.”“왜 내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페이 임신했어.”“뭐라고?”이엘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더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페이 정말 임신했어.”앨리스는 다시 한번 얘기했다.“사실 승민 씨랑은 이미 화해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따로 사는 거겠지. 페이가 건강이 안 좋아서 임신하는 게 어려워. 힘들게 가진 아이인데 괜히 네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일부러 헤어진 척한거야.”이엘리아의 넋이 나간 표정을 바라보며 앨리스는 계속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서 한번 알아봤거든? 얼마 전에 승민 씨랑 같이 산부인과에 검사받으러 갔대. 이렇게 철저하게 숨기는 걸 보면 아이를 엄청 아끼는게 틀림없어. 널 사랑하는 마음은 아예 없을 걸?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나면 부시아도 뒷전인 상황인데 너랑 만나겠냐?”지금도 부시아를 이용해 부승민에게 접근하는 게 어려운데, 하물며 온하랑의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어떨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그러니 절대 온하랑이 아이를 낳게 해서는 안 된다.이엘리아는 넋을 잃은 채로 멍을 때리다가 생각에 잠겼다.“안돼... 절대 아이를 낳게 해선 안돼... 앨리스, 빨리 방법 좀 생각해 봐.”이엘리아는 잔뜩 흥분한 채로 앨리스의 손을 꽉 잡았다.“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도대체 왜 부승민 씨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거야?”“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무조건 승민 씨를 갖고 말 거야.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도와줘.”부시아가 그녀의 아이임을 증명하는 친자확인서는 이미 전부 까발려졌다.지금 물러선다면 이엘리아는 미혼모라는 낙인이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고, 필라시에 돌아가는 순간 벨라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진실을 얘기한다면 부승민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물론 든든한 가문을 등에 업고 있으니
온하랑이 출장 간 지 이틀 만에 김시연은 연도진과 계약을 마치고 상견례까지 했다.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온하랑은 의아해하며 계약서를 훑어보았다.“너한테 유리하게 적혀있긴한데 다음날에 결혼하는 건 너무 빠른 거 아니야?”김시연은 작은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내 생각에도 빠른 것 같은데... 동생이 나이가 많아서 어쩔 수가 없네...”“결혼하면 어디서 살 거야? 도진 씨랑 얘기해 봤어?”“우린 새집 장만하려고. 마침 내일 집 보러 갈 거야. 하랑아, 너도 같이 갈래? 가서 조언 좀 해줘.”온하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촬영 일정이 타이트해서 시간이 안 될 것 같아.”“그럼 할 수 없지.”김시연은 신이 나는 듯 온하랑에게 바짝 다가갔다.“글쎄 이미 집을 알아봤다고 하더라고? 실버 플라워, 푸르지오, 그린 빌리지 셋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어.”“그린 빌리지? 반도에 있는 그거?”“응.”“도진 씨가 이번에 힘 좀 썼나 봐? 돈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온하랑은 장난 섞인 눈빛으로 김시연을 바라봤다.“솔직히 설레지?”“새집인데 당연히 설레지.”김시연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일반인이 쉽게 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잖아. 그런데 둘이 살기에는 별장이 엄청 크대. 우린 진짜 부부도 아니고, 아이도 없을 텐데 수지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어머, 이제는 도진 씨 돈 걱정까지 하는 거야?”온하랑은 농담을 던졌다.“온하랑, 감히 날 놀려?”김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손을 뻗어 온하랑을 간지럽혔다.“미안,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온하랑은 웃음을 꾹 참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용서를 빌었다.김시연은 온하랑의 몸 여러 군데를 주물이더니 푹신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그분은 참 행복한 생활을 했네. 너무 부드러워서 나까지 얼굴을 파묻고 싶다니까?”“꺼져.”온하랑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버럭하더니 소파 구석으로 옮겨 앉아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말해봐.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