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에는 총 30여 채의 단독주택이 있는데 전부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이루어졌고 600평에 달하는 그곳에는 몇 개의 스위트룸을 제외하고도 오락실, 바, 헬스장 등 모든 게 갖추어져 있다. 심지어 주택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온천과 정원은 필수 조건인 셈이다.인테리어로 말하자면 거실은 6개의 유리창을 사용하여 실내의 충분한 채광을 보장했고 거실 소파에서는 정원과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심지어 2,3층 테라스에는 야외 바도 마련되어 있었다.그린 빌리지는 일반인이 쉽게 넘어볼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김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돈이 그렇게 많아?”“현금은 얼마 없어. 대출받아야지.”연도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하랑 씨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싸게 줄 수도 있잖아.”“됐어. 승민 씨랑 아직 화해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부탁하는 건 너무 민폐잖아.”“두 사람 아직도 화해 안 했어?”“응. 승민 씨한테 딸이 있대. 쉽게 용서할만 한 일은 아니잖아.”연도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내가 알기론 하랑 씨도 그 애랑 엄청 가깝게 지냈거든? 승민 씨도 미처 몰랐을 뿐이지 일부러 숨기려는 뜻은 없었을 거야.”“알든 모르든 갑자기 아이가 생긴 건 맞잖아. 이엘리아 씨는 엄마라는 이유로 무조건 아이를 보겠다고 하루 멀다고 찾아올 거야. 어떤 여자가 그걸 감당하겠냐?”말을 마친 김시연은 의심의 눈초리로 연도진을 바라봤다.“설마 나몰래 아이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연도진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터졌다.“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전에 승민 씨가 바람피웠을 때도 용서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단호하지?”“하랑이 임신했어. 그리고 이엘리아 씨가 어떤 성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앞뒤 생각 안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여자인데 만에 하나 하랑이가 승민 씨랑 화해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걸? 지금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이엘리아는 사건의 경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오늘 점심. 이엘리아는 부시아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부시아더러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라고 시켰다.부시아도 처음에는 꺼렸지만 마지못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부승민이 전화를 받았는데, 평소보다 목소리가 많이 쉬어 있었지만 이엘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곧 핸드폰 너머로 숨을 헐떡이는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심각성을 깨달았다.부승민은 순간 당황하여 대충 몇 마디 하고선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고 그의 반응이 너무 의심스러웠던 이엘리아는 분명히 온하랑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채우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이엘리아는 그 자리에서 테이블을 뒤집어버리고 즉시 사람을 보내 부승민의 위치를 조사하게 했다.흥신소의 말에 따르면 부승민은 점심에 퇴근했고 회사를 나와 날씬한 몸매의 여성과 함께 호텔에 들어갔다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은 CCTV에서 캡처한 것으로 보였는데 두 사람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사진 속의 여자는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낀 채 호텔로 걸어갔고 그걸 본 순간 이엘리아는 온하랑이라고 확신했다.사진 속의 여자가 입고 있는 하얀색의 원피스는 필라시에서 온하랑이 입은 것과 매우 흡사했다.분노가 이성을 지배한 이엘리아는 눈이 뒤집힌 지 오래였고 앞뒤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무작정 흥신소에 호텔의 위치를 보내달라고 했다.부승민의 방 번호를 알아낸 뒤에는 호텔에서 성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며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경찰이 출동되었다.그들은 이엘리아가 알려준 방 앞에 도착한 후 망설임 없이 안으로 쳐들어갔다.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그 방은 평범한 호텔 방이 아니라 작은 회의실이었다.테이블 앞에서 이름표가 놓여 있었고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정장 차림으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경찰도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당사자를 불러내
“난 당연히 네 편이지. 그냥 네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솔직히 성공하지도 못하는 일에 목숨 걸고 안간힘쓰는 게 너무 안타까워.”“왜 내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페이 임신했어.”“뭐라고?”이엘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더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페이 정말 임신했어.”앨리스는 다시 한번 얘기했다.“사실 승민 씨랑은 이미 화해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따로 사는 거겠지. 페이가 건강이 안 좋아서 임신하는 게 어려워. 힘들게 가진 아이인데 괜히 네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일부러 헤어진 척한거야.”이엘리아의 넋이 나간 표정을 바라보며 앨리스는 계속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서 한번 알아봤거든? 얼마 전에 승민 씨랑 같이 산부인과에 검사받으러 갔대. 이렇게 철저하게 숨기는 걸 보면 아이를 엄청 아끼는게 틀림없어. 널 사랑하는 마음은 아예 없을 걸?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나면 부시아도 뒷전인 상황인데 너랑 만나겠냐?”지금도 부시아를 이용해 부승민에게 접근하는 게 어려운데, 하물며 온하랑의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어떨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그러니 절대 온하랑이 아이를 낳게 해서는 안 된다.이엘리아는 넋을 잃은 채로 멍을 때리다가 생각에 잠겼다.“안돼... 절대 아이를 낳게 해선 안돼... 앨리스, 빨리 방법 좀 생각해 봐.”이엘리아는 잔뜩 흥분한 채로 앨리스의 손을 꽉 잡았다.“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도대체 왜 부승민 씨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거야?”“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무조건 승민 씨를 갖고 말 거야.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도와줘.”부시아가 그녀의 아이임을 증명하는 친자확인서는 이미 전부 까발려졌다.지금 물러선다면 이엘리아는 미혼모라는 낙인이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고, 필라시에 돌아가는 순간 벨라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진실을 얘기한다면 부승민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물론 든든한 가문을 등에 업고 있으니
온하랑이 출장 간 지 이틀 만에 김시연은 연도진과 계약을 마치고 상견례까지 했다.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온하랑은 의아해하며 계약서를 훑어보았다.“너한테 유리하게 적혀있긴한데 다음날에 결혼하는 건 너무 빠른 거 아니야?”김시연은 작은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내 생각에도 빠른 것 같은데... 동생이 나이가 많아서 어쩔 수가 없네...”“결혼하면 어디서 살 거야? 도진 씨랑 얘기해 봤어?”“우린 새집 장만하려고. 마침 내일 집 보러 갈 거야. 하랑아, 너도 같이 갈래? 가서 조언 좀 해줘.”온하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촬영 일정이 타이트해서 시간이 안 될 것 같아.”“그럼 할 수 없지.”김시연은 신이 나는 듯 온하랑에게 바짝 다가갔다.“글쎄 이미 집을 알아봤다고 하더라고? 실버 플라워, 푸르지오, 그린 빌리지 셋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어.”“그린 빌리지? 반도에 있는 그거?”“응.”“도진 씨가 이번에 힘 좀 썼나 봐? 돈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온하랑은 장난 섞인 눈빛으로 김시연을 바라봤다.“솔직히 설레지?”“새집인데 당연히 설레지.”김시연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일반인이 쉽게 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잖아. 그런데 둘이 살기에는 별장이 엄청 크대. 우린 진짜 부부도 아니고, 아이도 없을 텐데 수지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어머, 이제는 도진 씨 돈 걱정까지 하는 거야?”온하랑은 농담을 던졌다.“온하랑, 감히 날 놀려?”김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손을 뻗어 온하랑을 간지럽혔다.“미안,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온하랑은 웃음을 꾹 참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용서를 빌었다.김시연은 온하랑의 몸 여러 군데를 주물이더니 푹신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그분은 참 행복한 생활을 했네. 너무 부드러워서 나까지 얼굴을 파묻고 싶다니까?”“꺼져.”온하랑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버럭하더니 소파 구석으로 옮겨 앉아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말해봐.
20분 후, 부승민은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수술실의 불은 아직 켜져 있었고 이엘리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는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고 겁을 먹은 듯 입술을 깨문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부승민은 성큼성큼 달려가 단호하게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에요?”그를 본 이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해하며 설명했다.“시아랑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려고 하교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갔어요. 레스토랑에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맞은편에 차를 세웠거든요? 그러다가 시아랑 같이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차 한 대가 달려왔어요.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상황 파악도 못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시아는 이미 쓰러져 있었어요.”“승민 씨,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요.”이엘리아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흐느꼈다.“신고는 했어요?”“아니요... 깜빡했어요.”이엘리아는 옷깃을 쥐고 쩔쩔맸다.“시아를 빨리 병원에 데려갈 생각만 하고 있어서 경찰에 신고할 틈이 없었어요.”마침 주차한 차가 옆에 있어 구급차를 기다릴 바엔 운전하는 게 훨씬 더 빠르다고 생각했다.부승민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비상구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다.경찰에 신고한 후 곧장 연민우의 번호를 입력했다.이엘리아는 긴장한 기색으로 이따금 부승민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상황을 정리한 후 부승민은 다시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경찰에 신고했어요?”“네.”부승민은 이엘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엘리아 씨를 탓하는 건 아닌데 아직은 혼자 시아를 케어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네요. 앞으로 시아랑 같이 나갈 때는 꼭 경호원을 동행해요.”“알겠어요.”이엘리아는 눈물을 닦으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할게요. 시아한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부승민은 말없이 옆에 앉아 기다렸다.30분쯤 지나자 수술실의 빨간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부시아는 링거를 꽂은 채로 간호사에게 이끌려 나왔다.
40여 분 후, 부시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부승민은 곧바로 침대 곁으로 다가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시아야, 깼어? 몸은 좀 어때?”“삼촌...”이제 막 정신을 차린 부시아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서서히 몸 곳곳에서 통증이 밀려오자 마침내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랐다. 부시아는 입술을 깨문 채 고통에 울부짖으며 엉엉 울렸다. “엉엉... 삼촌, 너무 아파요. 무서워요... 차에 치였어요.”가슴이 미어진 부승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타일렀다.“시아야, 울지마. 아빠가 여기 있잖아. 우리 시아를 아프게 한 사람들은 아빠가 다 잡았어.”줄곧 싸늘하고 날카롭기만 했던 눈빛은 지금 이 순간 온화하고 부드럽게 변했다.이엘리아는 부승민의 진심 어린 보살핌을 받는 부시아에게 질투의 감정을 느꼈으나 가슴 아픈척하며 앞으로 다가갔다.“시아야, 미안해. 엄마가 널 지키지 못했어. 쓸모없는 엄마 때문에 우리 시아가 괜한 고생을 했네.”이엘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부시아는 무서운 듯 눈치를 살피더니 부승민의 옷깃을 움켜쥐고 눈물을 글썽였다.“삼촌, 저 사람 싫어요. 보고 싶지 않아요.”이엘리아는 순간 표정이 돌변하더니 재빨리 침대 반대편으로 다가가 부시아의 손을 잡았다.“시아야, 이러면 엄마가 너무 속상하잖아. 앞으로는 시아를 잘 지켜줄게. 미안해.”부시아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가볍게 이엘리아의 말을 무시했다.아이의 반응을 본 부승민은 곧바로 이엘리아에게 말했다.“여기 제가 있으니까 이만 들어가 봐요.”“저도 그냥 있을게요. 남자가 병간호하는 게 시아 입장에서는 더 불편할 수도 있어요.”“도우미 아줌마한테 연락했어요. 이제 곧 도착하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부승민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무엇보다도 시아가 지금 이엘리아 씨를 보고 싶지 않다잖아요.”이엘리아는 할 말이 있는 듯 부시아를 보며 입을 벙끗했으나 부시아는 곧바로 머리를 부승민의 품에 파묻었다.“알겠어요.”이엘
부승민은 곧바로 영상을 틀었다.“저도 볼래요.”부시아도 궁금한지 옆에 바짝 붙었고 두 사람은 핸드폰 속의 영상을 바라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사람들은 부시아 천천히 걷는 게 답답한 듯 대부분 앞으로 지나가거나 옆으로 비켰고 화면 속 부시아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오직 이엘리아만 곁에 있었는데 마치 부시아를 지켜주는 것처럼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차가 온 후 부시아가 부딪혔고 곧이어 차는 떠났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부승민은 뒤로 가기를 누르며 다시 한번 영상을 살펴보았다.이때 부시아가 손으로 화면을 가리켰다.“삼촌, 여기 봐요. 어깨로 절 밀었잖아요. 틀림없다니까요.”“그렇네.”부승민도 이엘리아의 이상한 행동을 발견했다.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 작은 행동이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부시아가 직접 누군가가 밀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니 이대로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었다.‘도대체 왜 시아를 밀어서 다치게 만든 거지? 교통사고가 우연이 아니라면 이것마저 계획한 걸까? 도대체 왜?’이엘리아가 부시아에게 손을 쓸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불가능한 일인 건 아니다.부시아가 친딸이 맞지만 이엘리아는 눈곱만큼의 모성애도 없었다. 어쩌면 딸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부승민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일 가능성이 크다.이엘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시아를 하나의 도구로 여겼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니 부시아에 대한 감정이 없을뿐더러 다치든 말든 대수롭지 않았기에 성격상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 지극히 정상이다.“시아야, 왜 널 다치게 했을까?”부승민이 핸드폰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긴 듯 조심스럽게 묻자 부시아도 고개를 들며 곰곰이 생각했다.“아마 삼촌을 만나려고? 시아가 입원하면 삼촌이 매일 저 보러 올 거잖아요. 그러면 삼촌을 만날 수 있으니까...”부시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아줌마를 엄마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런 상황이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하지만 부승민은 여
클래식 캐슬.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핸드폰은 옆으로 치워두고 하던 음식을 마무리한 후 냄비 뚜껑을 받았다.순간 부승민의 충고가 떠오른 듯 재빨리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잠갔다.그 후 거실 바깥쪽 창가를 지날 때 자연스레 문을 열고 주위를 살펴보았다.뿌연 안개가 뒤집힌 밤은 몹시 어두웠으나 아파트 바깥 도로를 드나드는 차량과 희미한 가로등 불빛 덕분에 그나마 안정감이 있었다.멀리 떨어져 있는 집집마다 불이 켜져 있어 아름다운 야경의 모습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온하랑이 서 있는 곳에서 내려다보면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주차된 봉고차가 보였다.경찰이 없어서 망정이지 저렇게 주차하면 무조건 딱지가 붙어 벌금을 물어야 한다며 투덜거렸다.그러나 그 생각이 드는 동시에 봉고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어느 한 검은색의 승용차를 따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별생각 없이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돌아와 냄비 뚜껑을 열고 두어 번 휘저었다.하지만 알지 못했다. 그 틈에 검은색 승용차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고 몇 분 후 봉고차도 동네를 벗어나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는 사실을.온하랑은 냄비에 끓인 갈비가 졸아드는 걸 보고 쪽파 2개를 까서 깨끗이 씻은 후 송송 썰었다.어찌 된 일인지 별안간 불안한 마음이 들더니 손가락을 베었고 곧바로 피가 줄줄 떨어졌다.뇌리에 뭔가 번뜩인 온하랑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김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기계적인 연결음만 들려올 뿐 받는 사람은 없었다.“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온하랑은 전화를 끊자마자 연도진에게 연락했다.몇초간의 연결음 끝에 통화가 연결되었고 온하랑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도진 씨, 지금 시연이랑 같이 있어요?”연도진은 흠칫했다.“방금 지하 주차장까지 데려다줬는데 아직 안 올라갔어요?”“안 왔어요.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요. 제가 지금 나가기 불편한 상황이라서 그런데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전 바로
어두운 조명과 검은색 자동차가 어우러져 최동철의 실루엣이 희미해졌고, 거기에 부승민이 거의 다 왔다고 메시지를 보낸 터라, 온하랑은 무심코 그가 부승민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하필 이때 최동철이 올 줄은 말이다.“너 내 차가 온 걸 보고서도 그 사람한테서 안 떨어지고 오히려 머리를 돌려서 못 본 척하더라.”그는 최동철이 일부러 그와 비슷한 차를 몰고, 비슷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 온 걸 보면 내일 출장을 핑계로 별장에 묵으려는 게 뻔했다.“...!”온하랑은 난감해서 울상 지었다.“못 본 척한 게 아니라 진짜 못 봤어...”눈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이 쫙 비친 순간 온하랑은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냥 지나가는 이웃 차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내가 경적 안 울렸으면, 넌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그 사람이랑 얘기했겠네?”“아니거든.... 사람 잘못 본 걸 발견하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네 차를 알아봤어.”온하랑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변명하듯 말했다.부승민이 말없이 그녀만 지그시 바라보자 온하랑은 눈을 깜빡였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내가 그 사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렇다면?”온하랑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바로 널 차버렸지. 뭐 하러 여기 앉아서 연기하겠어?”“...”온하랑은 문득 차창 밖을 보다가 여전히 차 옆에 서 있는 최동철을 발견했다. 그를 보는 순간 다시 민망해져서 부승민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우리 이제 가자.”부승민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온하랑 뺨에 입을 맞췄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몸을 살짝 뒤로 빼고 투명한 창문 너머로 최동철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가속 페달을 밟아 단지 밖으로 차를 몰았다.차 안에는 난방이 빵빵하게 돌아서 훈훈했다.온하랑은 얼굴이 달아올라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뒷자리에 던졌다. 그러곤 바깥 풍경을 힐끗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우리 어디 가서 밥 먹을 거야?”부승민은 대답 대신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웠다.“왜 멈춰?”
온하랑은 하루 종일 메이슨과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해 질 무렵이 돼서야 돌아왔다.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메이슨은 이미 잠이 들었다.도착하자 도우미가 저녁 식사를 먼저 할 거냐고 물었다. 온하랑은 메이슨이 잠에서 깨면 같이 먹겠다고 했다.오후 늦게쯤, 메이슨이 조금 출출해해서 온하랑이 그를 데리고 디저트 가게에 갔고 같이 케이크를 먹었기에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온하랑은 노트북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테이블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창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온하랑이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휴대폰이 두 번 울렸다. 확인해 보니 부승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금 데리러 갈게. 야식 먹자. 거의 다 왔어.]온하랑은 답장을 보냈다.[좋아, 나도 아직 저녁 못 먹었어.]그리고 노트북을 덮고 도우미에게 말했다.[잠깐 밖에 나갈 건데 언제 들어올지 몰라요. 30분 뒤쯤에 메이슨 깨워서 밥 먹여 주세요.]도우미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방으로 올라가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방에서 나오며 베란다를 지나칠 때 무심코 밖을 내다봤다.부승민의 차가 이미 별장 입구에 와 있었다.차 옆에는 듬직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한 손을 차 문 위에 올리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였다. 불빛이 빨갛게 깜빡이고 있었다.온하랑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왔다.부승민이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자, 온하랑은 조용히 다가가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서프라이즈!”남자는 온몸이 움찔했다. 뜨거운 손이 온하랑이 교차한 두 손을 덮었고, 다른 손에서 담배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담배꽁초를 발로 짓눌렀다.마침 그때, 앞쪽 코너에서 자동차 한 대가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비추며 다가왔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남자 등 뒤에 얼굴을 묻은 채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게 꿈인 것 같아.”낯설지
“그러면 이젠...”“네가 기회를 봐서 사모님을 도발해 봐. 사모님이 열받아서 너를 미워하게 만들어야 해.”간하림이 말했다.그 말이 떨어지자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간하림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윤이 내 의도를 알아챈 거 아니야?’“내가 임신한 척해서 사모님을 자극하고 사모님이 열받아서 나를 밀면 유산한 척한다... 이런 걸 말하는 거야?”“맞아.”간하림이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바로 그거야!”‘때가 되면 사모님이 널 밀기는커녕 오히려 네 거짓 임신을 들춰내 버릴걸.’“근데...”“왜?”“나, 진짜 임신했어.”“진짜 임... 뭐라고? 네가 진짜로 임신했다고?”간하림이 깜짝 놀랐다.“응.”설윤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어제 집에 돌아왔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매스꺼워서 문득 생리가 밀린 게 떠올라 임신 테스트기를 사 봤거든. 근데... 정말로 임신이라고 나오더라.”간하림은 속이 쓰린 듯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나이도 많은 최국환이 그녀를 임신시킬 줄도 몰랐다.‘운도 참 좋지.’만약 아이를 낳아서 최씨 가문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물려받게 되면 설윤은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늦둥이는 더 귀여움을 받기 마련이다.“맞다.”설윤은 혼잣말하듯 계속했다.“아직 병원에는 안 가 봤어. 언제 가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너 임신한 거 회장님한테 말했어?”간하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병원에서 검사받은 다음에 보고서 들고 가서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려고.”“그렇구나... 음, 윤아. 네가 임신했다면 아까 그 방법은 쓰면 안 돼. 네 몸 상하면 안 되지. 내가 좀 더 고민해 볼게.”‘사모님께 한번 물어보고 나서 다시 얘기해야겠다.’“하림아,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면 회장님한테도 양육 의무가 생기지 않아? 그럼 사모님도 날 쉽게 쫓아내지 못할 텐데 굳이 지금 상대할 필요가 있나?”“...”전화를 끊고 나서, 간하림의 마음속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견딜
임연지도 임가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임가희는 그녀가 너무 성급했다고 나무랐다.임연지는 입으로는 잘못을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그녀는 일부러 설윤의 정체를 드러내서 가방을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오후가 되자, 임연지는 예상대로 점원에게서 설윤이 환불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녀는 곧바로 가방을 예약하고 직접 가게에 가서 찾아왔다.가방을 손에 넣은 임연지는 후련한 기분으로 예쁜 사진을 찍어 한진에게 보냈다.[나 가방 받았어.]시간을 보니 이때쯤 한진은 막 일어났을 것 같았다.잠시 후 한진이 답장을 보냈다.[진짜 예쁘네! 처음 나왔을 때부터 딱 꽂혔는데 네가 준다니까 사양 안 할게.][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 쪽에 맡겨뒀다가 네가 귀국할 때 가져갈래, 아니면 누가 대신 가져다주게 할까?][며칠 뒤에 우리 오빠가 갈 거야. 나 대신 가져다줄 수 있어. 너 언제 시간 돼? 시간 맞춰서 오빠를 보낼게.][난 지금도 괜찮아. 나 센트럴 백화점 4층 커피숍에 있어.][좋아, 내가 오빠한테 전화해 볼게.]몇 분 뒤, 한진이 다시 연락했다.[오빠가 지금은 바쁘대. 그래서 오빠 비서가 대신 갈 거야. 거기서 좀 기다려 줘. 곧 도착할 거야.][알겠어.]임연지는 커피를 시켜 천천히 마시면서 한진과 채팅을 이어갔다.[진아, 근데 네 방법 진짜 효과 좋아. 내가 이틀 정도 오재*을 냉대했더니 바로 전처럼 나한테 잘하려고 해.][그 사람 몰래 귀국해서 부모나 친구들한테도 알리지 못하고 호텔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 결국 너밖에 연락할 데가 없잖아? 계속 차갑게만 대하면 안 돼. 가끔 잘해주기도 하면서 밀당해 봐. 그래야 헷갈릴 거야.][알겠어.]카페에서 20분쯤 기다리자,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깔끔한 청년이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장 임연지에게 다가왔다.임연지는 그 청년이 비서임을 확인한 뒤 가방을 건네주고 커피숍을 나왔다....간하림은 임가희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지만 속으로는 난감해졌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