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교통사고로 기억의 일부를 잃었고, 귀국한 후 벨라와 연락이 완전히 끊긴 것은 물론 지금은 벨라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벨라는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기도 했고 온하랑이 그녀를 너무 낯설게 대해서 쉽사리 아는 척하지 못했다.온하랑 또한 이 점을 생각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단 말인가?온하랑은 벨라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그 친구의 한국 이름을 알아요?”예전 친한 한국인 친구도 있었고, 지금은 한국인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는 벨라는 한국어를 몇 마디 할 수 있었는데 꽤 표준적이었다. 벨라는 한국어로 대답했다.“온하랑이었어요.”온하랑은 입이 떡 벌어진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설마... 진짜 온하랑이야?”벨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내 이름은 맞는데.”온하랑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날 못 알아보겠어? 너 처음 펜베니아 대학교에 왔을 때 강의실을 못 찾아서 내가 데려다줬잖아. 그리고 너 도서 대여증을 못 만들어서 책 빌릴 때도 내 대여증으로 빌렸잖아! 제임스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실 때마다 내가 네 과제를 표절했는데...”벨라는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단숨에 토해냈는데 말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너 돌아가면 나한테 연락한다며. 시간 나면 필라시에 놀러 온다고 약속까지 했었는데, 그 후로 아예 연락이 끊겨 버렸어!”이런저런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털어놓던 벨라는 속상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많은 감정이 뒤섞이며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역시나 예쁜 얼굴이 어디 가지 않았다.미녀를 이렇게 슬프고 화나게 하다니, 온하랑의 잘못이었다. 온하랑은 해명하느라 바빴다.“정말 미안해. 일부러 연락 안 한 게 아니야. 그때 교통사고를 당하며 일부분 기억을 잃어버렸어.”진도원이 끼어들었다.“맞아, 내가 증언할 수 있어. 귀국 후에 알렉스한테도 연락하지 않았대. 우연히 알렉스 사진 수업
진도원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옆에 무력하게 앉아 벨라의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말하던 도중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벨라가 물었다.“너 이제 몸은 괜찮아?”“아주 좋은데.”온하랑은 생각 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가 왠지 벨라의 말이 신경 쓰여 다시 물었다.“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괜찮으면 다행이고. 그때 네가 호르몬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어. 체중도 많이 늘었다가 졸업을 앞두고 많이 회복한 것으로 기억하거든.” “아, 그랬구나. 최근 몇 년 동안은 아주 건강해졌어.”온하랑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부 질병은 글루코코르티코이드를 복용해야 하는데, 이는 신체의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치고 체중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이제 건강해졌다니 정말 다행이야.”벨라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물었다.“이번에는 계속 공부하러 왔어?”“아니, 일하러 왔어.”“이제 쭉 여기서 살려고?”“뭐 그런 셈이지.”그러자 벨라가 말했다.“우리 아빠 회사에 널 추천해줄까?”온하랑은 웃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내 현재 직업은 사진작가야.”“사진작가?”벨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럼 한복입은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안 돼? 전부터 찍어보고 싶었거든.” “당연히 되지.”온하랑은 흔쾌히 대답했다.“네가 사진작가가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어! 그때 너 전공 성적이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공부에 관한 한 벨라는 조금 게으른 편이었다. 아버지를 믿고 항상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래도 순리롭게 졸업했다.“강남에 있을 때 직업이 바로 전공에 관한 거였는데 오래 일하다 보니 새로운 직업에 도전해 보고 싶었어.”온하랑이 설명했다.“그럼 지난 몇 년 동안 강남에 있으며 남자 친구는 사귀었어?”벨라가 흥미진진해서 묻자 온하랑은 담담하게 웃었다.“솔직히 말하면 결혼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필라시로 온 이유는 전남편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서야.”벨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호기심에
낮에 진도원은 온하랑을 데리고 현지 번호를 개통하러 갔다. 온하랑은 새 번호를 받고 김시연과 할머니에게 보냈다. 국내에서 사용하던 번호는 계속 보류해 두고 패키지만 변경해 기본적인 통화만 가능하게 했다.아침이 되자, 온하랑은 흰색 카디건을 입고 엉덩이를 감싸는 짧은 갈색 치마 밑에 속바지를 입었다. 거기에 갈색 가죽 부츠를 신어 다리가 늘씬해 보이고 아주 매력적이었다.벨라의 전화를 받고 온하랑은 가방과 카메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아름다운 미모의 벨라가 모델이 될 수 있었다.벨라는 아쉬워하며 말했다.“카메라를 가져올 줄 미리 알았더라면 더 예쁜 옷으로 갈아입었을 텐데.”“이 옷도 잘 어울려. 넌 아마 포댓자루를 입어도 어울릴 거야.”“하하하.”온하랑의 말에 벨라는 호탕하게 웃었다.“벨라, 너 전보다 더 재밌어졌어.”“내가 전에는 지루했었어?”“아무튼 지금보다는 행보해 보이지 않았어. 그땐 매일 공부만 하고 수업이 없는 날에도 도서관에 갔거든. 가끔 쉴 겸 밖에 나가 놀자고 하면 거의 안 나갔잖아. 난 네가 전공 수업을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어.”온하랑은 한숨을 쉬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때의 마음가짐이 이해되었는데 한마디로 후회뿐이었다. 어리고 단순해서 부승민에게 콩깍지가 씌어 있었다.어제 진도원이 그녀를 데리고 펜베니아 대학을 돌아다닐 때 길에서 아주 잘생긴 남자 몇 명을 보았다. 그리고 벨라의 말을 들으니 그녀를 좋아하던 케빈도 키가 크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심지어 그녀와 친해지려고 일부러 한국 문화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이렇게 성의 있고 잘생긴 남자를 거절하다니 그때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었다. 벨라는 먼저 온하랑을 호텔에서 멀지 않은 시내 중심가에 있는 시청으로 데려갔다. 필라시의 시청은 20세기 초에 완공된 대규모 건축물로서 100년의 역사가 있었다. 정부 기관일 뿐만 아니라 명소이기도 했다. 근처에 도착했을 때 실제로 주변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시청을 떠난 후 벨라는 온하랑과 함께 리딩 터미널 마켓으로 갔다. 이곳은 채소와 과일, 고기와 계란, 고급 페이스트리, 꽃, 해산물, 조제 식품, 스낵, 수공예품, 모든 종류의 물건을 판매하는 활발한 종합 시장으로 국내 재래시장과 비슷하지만 제품의 품질, 위생, 상품의 풍부함 같은 면에서 수준이 조금 높았다. 이곳에는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엄청난 인파가 들끓었다.이곳에 왔으니 필라시의 대표 음식인 치즈 스테이크와 소고기 치즈샌드위치는 빠질 수 없었다. 벨라는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정통 현지 레스토랑에서 온하랑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이 레스토랑에 깊은 인상을 받은 벨라는 온하랑에게도 소개해 주었다.식사를 하는 도중 온하랑은 지나가는 말로 벨라에게 필라시에 있는 사진 스튜디오 몇 군데에 관해 물어보았다.최동철이 한 곳을 추천해 주긴 했지만 온하랑은 다른 곳도 둘러보고 자신에게 맞는 곳을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벨라는 스튜디오에 대해 잘 몰랐기에 온하랑을 도와줄 수 없었다.점심 식사 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시내를 돌아다녔다. 저녁이 되어 헤어질 무렵 온하랑은 이미 녹초가 되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에 한참을 누워있다가 오늘의 전리품인 사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은 메모리 카드를 노트북에 연결하고 벨라를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몇 장을 골라 포토샵으로 간단히 보정한 다음 왓츠앱을 이용해 벨라에게 보냈다.솔직히 말하면 온하랑은 벨라의 열정에 응답하는 것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진도원과 벨라의 대화를 통해 온하랑은 벨라의 아버지가 여러 회사의 주주이자 감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벨라 가족은 필라시에서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온하랑이 처음 도착했을 때 벨라와 친구가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곧 벨라는 답장을 보냈다.[페이, 정말 대단해. 넌 내가 본 최고의 사진작가야!][Uhhhh... 그렇게 말하면 자만할 수 있어. 참, 네 사진을 내 작품으로 소셜 미디어에 올려도 돼
온하랑은 오늘날 인터넷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프리랜서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었다.일부 사람들은 흥미롭거나 부를 과시하는 영상을 촬영해 조회수와 광고료를 통해 돈을 버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매력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어필하는 영상을 촬영해 인터넷으로 홍보하여 고객을 받았다.온하랑은 동영상을 제작한 적은 없지만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고객의 요구 사항을 파악한 후 고객과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견적을 작성했다.이곳으로 유학을 온 학생의 집에는 기본적으로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게다가 일부러 온하랑을 찾아왔기 때문에 즉시 예약금을 지급하고 다음 주말로 촬영 날짜를 잡았다.온하랑은 구직 웹사이트에서 여러 사진 스튜디오를 살펴본 후 마음에 드는 몇 군데를 골라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중에는 최동철의 친구 스튜디오도 있었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친 후 새벽이 다 되어서야 온하랑은 씻고 휴식을 취했다.다음 날 외출할 계획이 없었던 온하랑은 자연스럽게 잠에서 깰 때까지 실컷 자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전화벨 때문에 잠에서 깨게될 줄이야.무거운 눈꺼풀을 뜨자 커튼 틈새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베개 위로 떨어졌다. 기지개를 켜고 몸을 뒤척이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을 때는 아침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발신자 번호는 낯선 지역 번호였다. 온하랑은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Hello, Who is that?”(여보세요, 누구시죠?)수화기 너머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페이 씨 맞으세요?”“네, 맞는데요.”“여기는 케이틀란 사진 스튜디오입니다. 전 스튜디오 매니저 앨런이라고 해요. 벨라 씨 이력서를 확인했는데 아주 훌륭하신 것 같아요. 면접 때문에 전화했는데 언제 시간이 가능하시죠?”온하랑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시간이 충분해서 언제든지 가능해요.”“그럼... 오늘 오후 2시에 가능할까요?”“네.”“좋아요. 스튜디오 주소는... 제시간에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앨런은 사흘 안에 온하랑에게 면접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온하랑은 사무실 건물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번 면접이 꽤 잘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면접 후 온하랑은 첫 번째 면접만큼 편하지 않았다. 이 스튜디오 면접관은 중년 남성으로 항상 그녀를 자세히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화할 때 인종 문제도 언급했다.온하랑은 자신이 일하는 곳이 자유롭고 편하기를 바랐다. 딱히 친구처럼 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이 스튜디오에서의 면접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이 스튜디오는 배제해 버렸다.오후에 온하랑은 세 번째 면접에 참석했다. 최동철의 친구 스튜디오로 이름은 사릴이었다. 스튜디오 주소는 시내 중심가의 한 상가에 있었다.온하랑은 멀리서 사릴의 간판을 보았다. 스튜디오 정면은 유리로 되어 있어 한눈에 내부 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서양식 인테리어와 함께 창문 근처에 세워둔 현대식 옷을 입힌 마네킹, 한복을 입힌 마네킹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스튜디오에서는 옷 대여 사업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온하랑을 면접 본 사람은 현지인 릴리안이라는 여성이었다. 스튜디오 대표가 한국인이라서인지 릴리안은 온하랑에게 매우 친절했고 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릴리안은 직접 온하랑을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바로 그때 동양인 얼굴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웃으며 사진 선택실에서 나왔다. 그 여자는 앞에 있는 온하랑을 흘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낯익은 얼굴이라고 느꼈다. 온하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설핏 눈가에 악의가 번뜩였다.그녀는 온하랑의 방향으로 턱을 치켜들며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윌리엄,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윌리엄이라는 남자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슈트 차림이었다.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릴리안을 보고야 알았다.“아마 면접 보러 온 사진작가일 거야.”“그래...”여자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
직업 문제를 해결한 후 온하랑은 거주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어느 정도 모아둔 돈이 있었지만 아직 여기서 집을 살 계획은 없었고, 근무지 근처에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임대할 생각이었다.아침 8시에 진도원과 벨라는 온하랑과 함께 집을 보러 갔다. 온하랑이 사진 스튜디오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벨라는 함께 기뻐했다.“정말 잘됐네. 페이, 얼마 전에 네가 찍어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몇몇 친구들이 내가 스튜디오를 찾아 화보를 찍은 줄 알고 사진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봤어.”온하랑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워낙 예뻐서 대충 찍어도 잘 나올 뿐이야.”“페이, 넌 너무 겸손해. 전에도 개인 화보를 많이 찍어봤지만, 네가 찍어준 캐주얼 스냅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어.”“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내가 일하는 스튜디오에 마침 한복 컨셉 촬영이 있는데 와서 한 번 체험해 봐.”면접 중에 온하랑은 릴리안으로부터 스튜디오의 사진작가가 여러 등급으로 나뉘며 각각 다른 패키지의 고객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튜디오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온하랑과 같은 초보 사진작가는 가장 낮은 등급의 고객을 맡았다. 매개 주문을 완료한 후 스튜디오는 고객에게 평가 양식을 작성하도록 하고, 3개월에 한 번씩 결과를 요약하여 긍정적인 피드백이 85% 이상이면 사진작가는 한 단계 승급하여 더 높은 등급의 고객을 담당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평가가 60% 미만이면 사진작가 등급이 한 단계 낮아진다.사진작가의 등급은 급여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며, 등급이 높을수록 사진작가의 인센티브가 더 높아진다.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예를 들어 고객이 해당 사진작가의 스타일을 좋아하고 그 사진작가가 촬영하기를 원하는 경우, 고객이 순서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스튜디오는 고객의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켜 준다.“꼭 갈 거야. 그런데 널 지명할 수 있어?” “그래.” “좋아. 그건 그렇고, 페이. 내일 우리 아빠 생일 파티에 오지 않을래? 아도니스도 올 거고, 너한테 다른 친구들
필라시에서의 지난 며칠 동안 너무 바쁘고 하루하루가 꽉 차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생각이 들더라도 금세 잊어버렸다. 사람은 누군가를 떠나도 살 수 있었다. 이 진리를 오래전에 깨달았다면 지난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저녁이 되자 온하랑은 격식 있게 차려입었다. 섬세하게 메이크업한 후 차를 타고 벨라의 집으로 향했다. 벨라는 온하랑이 차가 없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사람을 보내 데리러 왔다. 벨라의 가족은 교외의 록펠러 저택에 살고 있었다. 온하랑은 예전 출장이나 여행으로 M국에 온 적이 있었다. 부자의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저택은 안팎으로 웅대하고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 저택은 이미 명소가 되어 가이드까지 있었다.온하랑이 개인 저택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가 도시 외곽에 이르러 갈림길에 들어서자 운전기사는 어렴풋이 보이는 먼 곳에 있는 돌담을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말했다.“저기가 바로 필라시에서 제일 큰 저택 중 하나인 록펠러 저택입니다.”그 돌담은 자연석으로 지어졌는데 각 조각이 모두 다르고, 아주아주 길어서 저택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었다. 저택의 대문 앞에는 주차차단기와 경비실이 있었는데 방문객의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택에 들어서자 자연석으로 포장된 도로가 있었고 도로 양쪽에는 무성하게 자란 다양한 식물이 있었다. 길을 다라 10분 동안 계속 앞으로 나아가 모퉁이를 돌면 주차장이 있었다. 대학교 운동장만큼이나 큰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고급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 주변에는 손님을 로비로 안내하는 도우미들이 있었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본 도우미는 앞으로 다가와 온하랑이 차에서 내리자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회미한 밤에 밝은 조명이 켜진 앞의 건물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우아하고 절묘한 4층짜리 거대한 성 같은 건물이었다. 성 앞에는 녹지로 덮인 두 개의 유럽식 긴 복도가 있었고 그 중앙에는 대형 분수대가 있었는데 색깔이 바뀌는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