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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0화

작가: 고운
앨런은 사흘 안에 온하랑에게 면접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온하랑은 사무실 건물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번 면접이 꽤 잘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면접 후 온하랑은 첫 번째 면접만큼 편하지 않았다. 이 스튜디오 면접관은 중년 남성으로 항상 그녀를 자세히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화할 때 인종 문제도 언급했다.

온하랑은 자신이 일하는 곳이 자유롭고 편하기를 바랐다. 딱히 친구처럼 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이 스튜디오에서의 면접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이 스튜디오는 배제해 버렸다.

오후에 온하랑은 세 번째 면접에 참석했다. 최동철의 친구 스튜디오로 이름은 사릴이었다. 스튜디오 주소는 시내 중심가의 한 상가에 있었다.

온하랑은 멀리서 사릴의 간판을 보았다. 스튜디오 정면은 유리로 되어 있어 한눈에 내부 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서양식 인테리어와 함께 창문 근처에 세워둔 현대식 옷을 입힌 마네킹, 한복을 입힌 마네킹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스튜디오에서는 옷 대여 사업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온하랑을 면접 본 사람은 현지인 릴리안이라는 여성이었다. 스튜디오 대표가 한국인이라서인지 릴리안은 온하랑에게 매우 친절했고 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릴리안은 직접 온하랑을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바로 그때 동양인 얼굴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웃으며 사진 선택실에서 나왔다.

그 여자는 앞에 있는 온하랑을 흘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낯익은 얼굴이라고 느꼈다. 온하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설핏 눈가에 악의가 번뜩였다.

그녀는 온하랑의 방향으로 턱을 치켜들며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윌리엄,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윌리엄이라는 남자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슈트 차림이었다.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릴리안을 보고야 알았다.

“아마 면접 보러 온 사진작가일 거야.”

“그래...”

여자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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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태로운 제안   제8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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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시에서의 지난 며칠 동안 너무 바쁘고 하루하루가 꽉 차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생각이 들더라도 금세 잊어버렸다. 사람은 누군가를 떠나도 살 수 있었다. 이 진리를 오래전에 깨달았다면 지난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저녁이 되자 온하랑은 격식 있게 차려입었다. 섬세하게 메이크업한 후 차를 타고 벨라의 집으로 향했다. 벨라는 온하랑이 차가 없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사람을 보내 데리러 왔다. 벨라의 가족은 교외의 록펠러 저택에 살고 있었다. 온하랑은 예전 출장이나 여행으로 M국에 온 적이 있었다. 부자의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저택은 안팎으로 웅대하고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 저택은 이미 명소가 되어 가이드까지 있었다.온하랑이 개인 저택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가 도시 외곽에 이르러 갈림길에 들어서자 운전기사는 어렴풋이 보이는 먼 곳에 있는 돌담을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말했다.“저기가 바로 필라시에서 제일 큰 저택 중 하나인 록펠러 저택입니다.”그 돌담은 자연석으로 지어졌는데 각 조각이 모두 다르고, 아주아주 길어서 저택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었다. 저택의 대문 앞에는 주차차단기와 경비실이 있었는데 방문객의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택에 들어서자 자연석으로 포장된 도로가 있었고 도로 양쪽에는 무성하게 자란 다양한 식물이 있었다. 길을 다라 10분 동안 계속 앞으로 나아가 모퉁이를 돌면 주차장이 있었다. 대학교 운동장만큼이나 큰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고급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 주변에는 손님을 로비로 안내하는 도우미들이 있었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본 도우미는 앞으로 다가와 온하랑이 차에서 내리자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회미한 밤에 밝은 조명이 켜진 앞의 건물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우아하고 절묘한 4층짜리 거대한 성 같은 건물이었다. 성 앞에는 녹지로 덮인 두 개의 유럽식 긴 복도가 있었고 그 중앙에는 대형 분수대가 있었는데 색깔이 바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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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웨이터가 초대형 케이크를 밀고 나왔다. 벨라는 스미스의 손을 잡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은 스미스를 둘러싸고 케이크를 자르는 스미스를 축복했다.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매우 활기찼다. 하지만 온하랑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이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낯익은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연도진?자세히 보려고 했을 때 이미 그 인물은 사라진 뒤였다. 그녀가 착각한 걸까, 아니면 연도진이 필라시로 돌아온 걸까?연도진은 최동철의 친구이고 원래 필라시에 있었을 테니 다시 돌아오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온하랑은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케이크를 자른 후 스미스는 그 자리에서 오랜 벗들이 준 선물 몇 개를 열어보았다. 선물을 개봉한 후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스미스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러 가며 벨라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벨라는 일찌감치 연회장에서 빠져나갔다.그녀는 온하랑과 친구들을 데리고 3층 오락실에 갔다. 그제야 온하랑은 3층 전체가 오락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포커, 당구, 게임기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2층은 노래방과 댄스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거기도 많은 손님이 있었고, 4층에는 영화관이 있었다. 즉 이 성 전체가 모두 연회와 여가 활동을 위해 지어졌다는 말이다.벨라와 스미스의 저택은 뒤쪽에 있는 두 개의 작은 건물에 있었다. 또한 저택 안에는 농구장, 볼링장, 수영장, 온실, 스파, 헬기 착륙장 등이 있었다... 이 저택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저녁 11시에 벨라는 사람을 시켜 온하랑을 데려다주라고 했다. 저택에는 객실이 많았고, 사실 벨라는 온하랑이 여기서 하룻밤 묵기를 바랐다.하지만 오늘은 주말이었고 내일 월요일에는 온하랑의 첫 출근일이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서 쉬어야 했다.월요일 아침, 온하랑은 오피스룩을 입고 자신의 카메라를 챙겨 스튜디오로 향했다. 꽤 일찍 도착했고 스튜디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릴리안은 미리 와서 온하랑에게 작업 환경을 보여주고 자리를 마련해 준

  • 위태로운 제안   제805화

    고객은 현대적인 스타일을 원했기에 디자인이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옷을 선택했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인물 사진 촬영에 온하랑은 제일 자신이 있었는데, 고객의 얼굴형과 골격을 관찰하고 가장 적합한 각도를 분석하여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과 느낌을 살리며 숨겨진 매력을 극대화하는 데 아주 능숙했다. 고객이 들어오자 온하랑은 그녀를 배경 앞에 가서 서라고 말했다. 먼저 한 장을 촬영한 후 조명과 카메라 세팅을 확인하려고 했다. 고객은 그 모습을 보고 휴대폰을 꺼내 갤러리를 넘기며 말했다.“배경을 바꿀 수 있나요? 어제 깜빡하고 못 보냈는데 전 이런 배경을 원해요.”그녀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온하랑에게 보여주었다. 깔끔한 고층빌딩과 불빛이 점점이 박힌 아름다운 도시 야경 사진이었는데 번화한 도시의 아름다움이 돋보였다.온하랑은 서류를 읽으며 스튜디오에서 이러한 배경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이런 사진은 따로 볼 때는 아름답지만 배경으로 사용하여 사람을 추가하면 오히려 시각적 중심을 잃을 뿐만 아니라 고객이 고른 옷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온하랑은 고객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시스턴트더러 세팅하라고 할게요. 먼저 여기서 몇 장 찍으며 카메라와 조명 세팅을 확인하고 각도부터 찾아볼까요?”온하랑이 친절하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자 고객은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준비된 배경 앞에 서서 온하랑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포즈를 취했다.온하랑은 사진을 찍고 확대해서 보며 직접 조명을 조정하고 계속해서 사진을 촬영했다. 촬영 초반이라 진행 속도가 느렸지만 다행히도 손님은 매우 협조적이었다.여러 각도에서 촬영해 보며 온하랑은 고객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했고 점점 더 자신의 노련함을 발휘했다. 온하랑은 잠시 멈추고 방금 촬영한 사진 몇 장을 고객에게 보여주었다. 고객은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보며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꽤 괜찮아 보이는데 저쪽 배경은 언제쯤

  • 위태로운 제안   제806화

    물론 그건 나중의 얘기였다.온하랑이 열심히 사진을 보정하고 있을 때, 벨라가 사릴 스튜디오에 왔다.이때, 프런트 데스크 옆에 서 있던 한 남성은 데스크 뒤에서 접대를 맡은 두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손님이 들어온 걸 보고 남자는 벨라를 한번 쳐다보더니 멈칫했다.두 접대 아가씨 중의 한 명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벨라를 로비 한쪽의 회의실로 안내했다.남자는 계속 다른 한 명의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눴다.프런트 아가씨는 열심히 벨라에게 스튜디오의 업무와 모든 촬영 세트를 상세하게 소개하고는 스튜디오의 마스터 급 사진작가들이 찍었던 수많은 사진을 벨라에게 보여주었다.벨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일 비싼 가격대의 한복 촬영을 선택하고는 바로 예약금을 지불했다.프런트 아가씨는 곧바로 벨라를 예약 시스템에 입력하며 말했다.“저희 마스터 급 사진작가님께서 6월20일 전까지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태라서 지금 제일 빨라서 6월 21일부터 예약해 드릴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벨라가 말했다.“사진작가님을 지정할 수 있나요?”프런트 아가씨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나 요즘 모든 마스터 급 사진작가들의 예약이 이미 다 차 있어서 사진작가를 지정한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새치기할 수 없고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벨라가 말했다.“저는 페이 사진작가님이 저를 촬영해 주길 원해요.”“페이?”프런트 아가씨는 이 이름을 듣고 낯설어서 몇 초 동안 멍해 있다가 그제야 페이가 며칠 전 새로 입사한 사진작가라는 것이 떠올랐다.그러나 프런트 아가씨는 바로 반응했다. 페이가 사릴 스튜디오에 새로 들어온 건 맞지만 이 업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페이는 스물다섯, 여섯이지만 이미 몇 년 동안 사진작가로 일해 왔을지도 모르며 자신만의 단골이 있고 촬영을 받으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프런트 아가씨가 말했다.“네. 현재 페이 사진작가님의 예약 가능한 날짜는 다음 주

  • 위태로운 제안   제807화

    저녁 퇴근 전, 이반은 특별히 시스템에 들어가 보았다.스튜디오는 자신만의 시스템 사이트가 있었고 매니저, 프런트 데스크, 메이크업실, 비서 등 사람마다 자신의 계정이 있었다.프런트 데스크는 책임지고 예약금을 지불한 고객의 정보를 시스템에 올렸다.릴리안 매니저에게 모든 고객의 정보가 집계되고 저녁 퇴근 전에 릴리안은 주문을 각 사진작가와 그들의 비서에게 배정했다.화면이 로드되었지만, 이반은 자신의 계정 아래 21일의 일정표가 텅텅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설마 릴리안이 아직 주문을 배정하지 않은 건가?’이튿날 아침이 되어 이반은 다시 시스템에 들어가 보았지만, 21일에는 여전히 아무런 일정도 배정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마침, 이반 옆자리의 동료도 자기 자리에 앉아 있어서 이반은 그 동료한테 물었다.“자네의 일정은 업데이트되었어요?”이반 옆자리의 동료도 마스터 급 사진작가였고 필라시에서 잘 알려진 사진작가로서 많은 고객이 특별히 그를 지정하여 그에게 촬영 받기에 그의 일정은 이미 25일까지 예약이 찬 상태였다.이반이 묻자, 동료는 곧바로 자신의 계정에 로그인해 일정을 한번 확인했다.“업데이트되었어요.”주문 2개가 또 그에게 배정되어 그의 예약은 27일까지 찬 상태였다.이반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벨라 아가씨도 이 친구가 더 유명하다는 걸 알고 그를 지정해서 나한테 아가씨가 배정이 안 된 건가?’이반은 일어서서 동료의 의자에 한 손을 얹고 몸을 기울여 동료의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동료한테 일정이 2개 새로 추가되었지만, 새로운 고객의 이름은 모두 벨라 스미스가 아니었다.‘보아하니 벨라 아가씨께서 다른 마스터 급 사진작가를 지정한 모양이네.’이번이 벨라를 가까이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이반은 몹시 아쉬웠다.그러나 릴리안이 이미 주문을 배정했고, 사진작가가 일이 생겨 촬영을 못 하게 되지 않는 한 이 배정은 변경되지 않을 것이다.‘사진작가가 일이 생겨 촬영을 못 한다...’이 생각이 떠오르

  • 위태로운 제안   제8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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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태로운 제안   제1383화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 위태로운 제안   제1382화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 위태로운 제안   제1381화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위태로운 제안   제1380화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 위태로운 제안   제1379화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 위태로운 제안   제1378화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 위태로운 제안   제1377화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 위태로운 제안   제1376화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 위태로운 제안   제1375화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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