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이 말한 것과 같이 김시연은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연도진이 핸드폰을 빼앗아 김시연한테 전달할 때 김시연은 하나도 받고 싶지 않았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서 김시연은 어쩔 수 없이 건네받고는 화면을 닦았다.“고마워.”“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뭘.”연도진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고 금테 안경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김시연이 차갑게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여기가 경치가 좋다길래 와서 산책 좀 하다가 우연히 널 보게 됐어.”김시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연도진은 사람들이 붙잡은 도적을 보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 전화를 끊고 그는 김시연한테 말했다.“경찰 금방 온대.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온하랑은 큰 발걸음으로 걸어왔다.“시연 씨, 괜찮아요?”김시연이 얘기했다.“괜찮아요. 다들 먼저 가서 볼일 봐요. 경찰이 오면 진술하고 나서 찾으러 갈게요.”“연도진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온하랑은 옆에 있는 연도진을 힐끔 쳐다봤다. 김시연은 눈을 흘기고는 옆의 부승민을 힐끔 쳐다봤다.“여기 와서 산책했대요. 누가 알겠어요?”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부승민은 평온한 표정으로 연도진을 힐긋 쳐다봤다. 두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연도진은 시선을 거두고 김시연한테로 시선을 옮겼다. 부승민도 시선을 돌려 품에 안긴 부시아한테 다코야키를 찍어 입에 넣어줬다. 온하랑은 김시연에게 말했다.“괜찮아요. 원래 시간이 부족한데 얼른 탐사해요.”“그럼 일이 끝나면 전화해요.”“네.”온하랑은 부승민한테 말했다.“가자.”두 사람이 곁을 스쳐 지나갈 때 연도진은 힐끔 부승민의 옆모습을 살폈다. 문득 낯에 익은 것이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미묘한 익숙함은 최동철과 닮아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봤던지 떠올릴 수 없었다. 아마 부승민이 해외로 출장 갔을 때 우연히 마주쳤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연도진은 두 사람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물었다.“저 사람
말하며 연도진은 한 방향을 가리켰다. 김시연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두 남자가 그곳에 서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김시연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그래, 못 할 것도 없지.”전화가 연결됐고 수화기 너머에서 온하랑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시연 씨, 일 끝났어요? 우리 지금...”“하랑 씨, 지금 연도진이랑 밥 먹으러 가려고요. 지금 못 갈 것 같아요. 다 먹은 뒤에 얘기하죠.”온하랑은 잠시 멈칫하다 말했다.“당연한 거죠. 그래도 몸조심해요, 뭔 일 있으면 연락해요.”“안심해요.”전화를 끊은 뒤 온하랑은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카메라를 집어 들고는 몇 미터밖에 서있는 부승민과 부시아를 향해 말했다.“조금 더 붙어... 오케이. 그 상태로 웃자... 좋아!”부승민은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부시아가 하도 같이 찍자길래 어쩔 수 없이 같이 찍었다. 부승민이 걸어와 온하랑 카메라의 사진을 보면서 물었다.“아까는 김시연 씨 전화야?”“응. 잠시 못 온대.”온하랑은 진지하게 카메라의 사진들을 살피며 대답했다.“전 남자 친구 혼혈이야?”온하랑은 잠시 이해가 안 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눈이랑 얼굴 골격이.”“글쎄 시연 씨가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온하랑이 대답했다. 그녀는 부승민이 제멋대로 추측한 거로 생각했다. 연도진의 오관이 뚜렷하긴 해도 한 번 봐서 혼혈이란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연도진은 사전에 맛집을 알아보고 현지 특색을 잘 반영한 샤브샤브집을 골랐다. 두 사람이 마주 앉고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서 말했다.“두 분 뭐 드실 건가요?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와서 저희 가게에서 커플 세트 요리를 런칭했답니다. 가성비가 짱인데 드셔보실래요?”“됐어요.”“그거로 주세요.”김시연과 연도진은 동시에 대답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고 김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 그냥 주문하면 돼. 내가 돈을 못 낼 형편도 아니고.”연도진이 입꼬리를
김시연의 표정이 평온하고 질투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연도진은 입술을 다물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이엘리아는 혜안을 갖고 있다고 늘 사람들한테서 칭찬받아.”“흥, 그래봤자지.”“...”웨이터가 하나둘 음식을 올렸는데 그중에는 비싼 고량주도 한 병 있었다. 김시연은 술을 따 자기한테 한 잔 붓고는 연도진한테 한 잔 부었다. 연도진은 마시지 않았고 김시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잔을 비워버렸다. 김시연이 계속 자신의 잔에 들이붓는 걸 보고 연도진은 주의를 주었다.“너무 많이 마시지 마.”“너랑 뭔 상관인데?”김시연은 예의 차리지 않고 맞받아치고는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웠다. 마셔버리려는데 연도진이 웃을락 말락 한 표정으로 놀리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너 혹시 내가 여자 친구가 있어서 질투하는 건 아니지?”김시연은 멈칫하고는 웃긴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내가? 내가 왜 질투를 해? 웃겨 진짜. 꿈 깨!”“그럼 왜 갑자기 술을 그렇게 많이 먹는 건데?”“안 좋은 일이 떠올라서, 안 돼?”“내가 보기엔 너 질투하는 거야.”“아니라니까!”“맞는데 뭘.”김시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안 먹어. 안 먹는다고. 됐지?”“아휴, 난 또 네가 나 못 잊은 줄 알았지.”“하!”...시간이 쫓기던 터라 온하랑 일행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밖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운 뒤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했다. 온 하루 고되게 걸었던 터라 온하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곤했고 발바닥은 시큰시큰 아파졌다. 중간에 부승민이 업긴 했어도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호텔에 돌아온 뒤 온하랑은 침대에 널브러져 하나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김시연은 식사를 마치고 바로 호텔로 돌아왔고 휴식을 조금 취한 뒤 시내에 나가서 쇼핑을 즐기다 이내 돌아왔다. 녹초가 된 온하랑과 주현을 보면서 그녀는 주동적으로 배달 음식 4인분을 시켰다. 배달 음식이 도착할 때쯤, 온하랑은 기력을 조금 되찾았고 김시연에게 물었다.“점심에 연도
안에서 위엄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들어와.”최동철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아버지, 찾으셨어요?”최동철의 아버지, 최국환의 나이는 예순을 넘었다. 원래는 신체가 건강한 편이었지만, 얼마 전에 갑자기 큰 병에 걸리며 기력이 몹시 쇠해졌다. 그러나 근엄한 외모와 살짝 주름이 잡힌 미간, 또렷한 눈동자를 비롯한 온몸 곳곳에서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고위층의 권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최국환의 용모는 최동철과 매우 닮아 있었다. 젊었을 때 그도 조각 미남이었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내가 듣기로 너 최근에 쭉 강남에 있었다며?”최국환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네.”“너 강남에 가서 대체 뭐하고 돌아다닌 거야?”멈칫하던 최동철이 눈을 들자 아버지의 시선과 마주쳤다.“아시잖아요. 아니면 왜 저를 불렀어요?”최국환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바로 명령했다.“프로젝트를 따냈으면 경영에나 신경 쓸 것이지. 당장 경주로 돌아와. 앞으로 부씨 일가를 겨냥하는 일은 그만 둬.”최동철이 웃으며 말했다.“아버지, 전 부씨 일가를 겨냥한 적이 없어요. 그저 엄격하게 회사 미래 발전 계획에 따라 비즈니스적으로 행동했을 뿐이에요. 아마 그 계획이 부씨 일가의 계획과 충돌이 있어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최국환이 냉소를 흘렸다.“미래 발전 계획? 너 지금 내가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는 거야? 이제 감히 이 아비까지 기만하려고 드는 게야?”“아닌데요.”최동철은 곧바로 부인했다.“그럼 얌전히 경주에 있어. 내가 너한테 최씨 일가를 맡긴 건 네가 사업을 더 발전시켜 한층 위로 끌어올리게 하길 바라서지, 네 알량한 복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최씨 가문을 아무 때나 위험에 빠트리게 하라는 게 아니야!” 최동철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최씨 가문을 위험에 빠트린다고요? 최씨 가문이 걱정돼서 이러시는 건지 아니면 그 모자가 마음 아파 이러시는 건지 아버지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겠죠!”최국환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달싹였다.“물
한편, 온하랑은 내일 추서윤의 회사로 가서 보고해야 하기에 부시아를 부승민한테 맡기려고 생각했다.야외 촬영이 끝나면 부선월은 분명 부시아를 로스앤에 데려가려고 할 거지만, 부승민이 부시아를 국내에 남겨두려고 할지 아니면 한발 물러서서 내버려둘지 알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부승민에게 문자를 보낸 후 온하랑은 주현에게 말했다.“주현 씨, 앞에서 세워줘요. 나랑 시아는 여기서 내릴게요.”“기다릴까요?”“아니요. 부승민에게 할 말이 있어요.”주현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차를 세웠다. 온하랑과 부시아가 차에서 내리고 주현이 떠나자마자 부승민의 차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온하랑은 뒷문을 열고 부시아와 함께 뒷좌석에 올라탔다. 부승민은 커다란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손목에는 값비싼 메탈 시계를 차고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낸 부승민은 백미러를 통해 온하랑을 보며 물었다.“저녁 뭐 먹을래?”“난 아무거나 상관없어.”“시아는 뭐 먹고 싶어?”부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오리 로스구이 먹고 싶어요.”“좋아, 그럼 오리 로스구이 먹으러 가자.”먹보 부시아는 입 주위에 기름을 가득 바르며 야무지게 먹었다. 온하랑은 기회를 틈타서 부시아에게 물었다.“시아야, 오늘 삼촌이랑 돌아갈래?”부시아는 머뭇거리더니 부승민과 온하랑을 번갈아 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왜요?”“고모가 며칠 동안 할 일이 있어서 시아를 돌봐 줄 시간이 없어.”부시아가 묻기도 전에 부승민이 먼저 물었다.“무슨 일이야?”온하랑은 그를 무시하고 계속 부시아를 달랬다.“아주 중요한 일이야. 고모가 일이 끝나면 다시 시아랑 놀아 줄게. 돼?”부시아는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숙모 일 빨리 끝내고 시아 데리러 와야 해요. 시아가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그래, 빨리 끝내고 시아 데리러 갈게.”어린아이를 달래고 난 후, 온하랑은 부승민의 호기심 어린 표정을 흘끗 보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차분한 얼굴로 밥을 먹었다.아랫입
그녀는 그렇게 그가 미덥지 못해 선을 그으려고 하는 건가?화가 치미는 동시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온강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도대체 무슨 심정이었을까?온하랑은 매우 진지한 사람이며 매사에 진중하고 열정적이다. 그녀는 절대 한눈을 파는 사람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생활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기억 속의 사람을 계속 되새긴다.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온강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보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온강호와 같은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텨왔다.전화를 끊은 부승민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서야 룸으로 돌아갔다. 온하랑과 부시아는 한창 게가 왜 옆으로 걷는지 열렬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부승민은 그녀의 하얗고 예쁜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아직 저녁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부시아는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승민은 꼬마를 안아 뒷좌석에 앉히고 시동을 걸었다. 어느덧 저녁 9시가 되어 차창 밖 가로등이 어렴풋이 밝아졌다. 때때로 자동차가 지나가며 울리는 경적이 들려왔다.차 안은 매우 조용하여 숨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부승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동안 무슨 할 일이 있는데?”온하랑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야외 촬영이 끝나면 고모가 시아를 데려갈 거라고 하시던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동의할 거야?”“아니, 시아를 데려가지 못해.”“고모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텐데.”“내가 알아서 할 게.”부승민은 백미러로 온하랑을 보며 말했다.“너 아직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어.”“내 사적인 일이야. 굳이 오빠한테 보고할 의무가 없잖아.”온하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꿀게. 그날 음식점에서 추서윤이 널 계단 아래로 밀어트리고 때렸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부승민은 낭천에서 운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부승민은 백미러에 비친 온하랑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이를 악물고 물었다.“나랑 상관없다고?”그는 이미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녀는 보복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에게 숨기려고 했다.그가 그렇게도 미덥지 못하고 의지할 가치가 없단 말인가?그녀는 자기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단 말인가?눈을 들어 분노를 억제하는 부승민의 눈빛을 마주한 온하랑은 그의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내 일이야. 애초에 오빠와 상관없잖아. 게다가 내가 납치 사건을 조사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또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거야? 낭천까지 날 따라온 일도 아직 따지지 않았어!”온하랑이 단호한 얼굴로 대꾸하자 부승민은 화가 치밀어 올라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더니 손등의 핏줄이 튀어나왔다.“내가 네 뒷조사를 한 건 네가 위협을 받아서고, 널 따라 낭천에 간 건 네가 전날 밤 다쳐서 걱정돼서 그랬어. 지금도 그저 널 도와주고 싶어서일 뿐이야!”온하랑은 피식 웃었다.“오빠의 관심과 도움은 목적성이 뚜렷하잖아. 내 보답을 바라겠지. 난 오빠가 원하는 보답을 해줄 수 없어. 그러니까 오빠의 도움 따위 필요 없어.”온하랑을 가만히 바라보던 부승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넌 날 그렇게밖에 생각 안 하는 거야?”그녀는 그가 도와주려고 하는 이유가 은혜를 핑계 삼아 강제적으로 그녀와 같이 있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보복을 당하더라도, 온강호처럼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는 같이 살기 싫다는 말인 건가?온하랑이 되물었다.“그럼 아니야?”눈빛이 어두워진 부승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온몸에서 침울하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기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온하랑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등을 기댄 채 지루하다는 듯이 창밖을 내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문을 열어 차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고개를 돌려 백미러에 비친 부승민의 눈빛을 보았지만,
젊은 여자가 알려준 장소로 찾아가는 길에 온하랑은 겸사겸사 정보를 찾아보았다. 추서윤은 현재 판타지 사극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부승민의 도움 없이는 추서윤은 자원이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 위치가 예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격하되었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단역으로 출연시간도 매우 짧았지만, 더운밥 찬밥 가릴 형편이 못 됐다.촬영장에 도착한 온하랑은 추서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몇 분 뒤 목에 명찰을 건 스태프가 나와서 그녀를 안으로 데려갔다. 추서윤은 촬영 복장을 하고 겉에는 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한 손에 대본을 들고 감독과 얘기하며 때때로 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온하랑이 들어오자 추서윤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더니 온하랑에게 손짓했다.“송 감독님, 소개할게요. 이분은 제 매니저겸 대역입니다. 제가 못 찍는 다음 장면은 이분이 대신 찍을 거예요.”미소를 지으며 송재열에게 인사를 건넨 온하랑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추서윤을 쳐다보았다. 언제는 그녀더러 매니저를 하라며 왜 또 대역 배우를 하라고 하는 걸까?추서윤은 씩 미소를 지으며 온하랑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송재열이 말할 때 온하랑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가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틈을 타 추서윤에게 속삭였다.“나더러 매니저 하라며 왜 또 대역 배우를 하라는 거야? 난 연기 못해!”추거윤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올렸다.“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 아니면 언제든 가도 돼.”아랫입술을 깨문 온하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를 억누르며 추서윤을 노려보았다.추서윤은 온하랑이 참을 줄 알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추서윤은 손에 들린 대본을 온하랑에게 건넸다.“들고 있어.”이곳에 오기 전에 온하랑은 연예인 매니저의 업무에 대해 알아보았다. 대부분의 태도가 겸손한 연예인은 매니저에게 대본을 들고 있으라고 시키지 않지만, 그렇게 하는 까칠한 연예인들도 적지 않았다.추서윤은 일부러 온하랑을 괴롭힐 게 뻔했기에 대본을 들게 하는 일 따위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본을 펼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