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다.아마 경찰에 신고해도 별 소용 없을 것이다.김시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모든 줄이 다 풀렸다.직원이 대답했다.“손님, 이제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연도진 님한테 연락 드리겠습니다.”“네.”연도진이 김시연을 부축하며 말했다.“가자.”김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다가 다리가 풀려버려 그만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연도진은 재빨리 그녀를 잡더니 김시연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조심해, 내가 안고 내려갈게.”“응.”김시연은 두 팔을 연도진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두 손목이 빨갛게 눌려있었다.“시연아.”“응?”“밀려서 떨어질 때 무서웠어?”“무서웠어.”“그런데 지금은 엄청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지난번 밀가루 공장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연도진은 김시연이 혹시라도 너무 놀라버려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버티고 있는 거야, 억지로.”김시연은 순식간에 감정을 터뜨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으아아아악, 짜증 나. 도진아, 나 지금 다리에 힘 다 풀렸어.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젠장! 떨어지는데 정말 육체랑 혼이 분리되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유언도 못 남겼는데. 아직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만져봐...”김시연이 어린 마음에 말했다.“난 네가 너무 놀라서 어디 잘못된 줄 알았잖아. 이제 괜찮아. 돌아가서 푹 쉬자.”“넌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누가 나한테 전화를 걸었어.”연도진은 복잡한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일하던 도중 연도진은 앨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윌슨 쪽에 무슨 일이 생긴 줄로만 알고 있던 연도진은 앨런이 불러주는 주소를 들어버렸다. 수화기 너머의 앨런은 이 주소로 김시연은 데리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연도진은 아무것도 물을 겨를 없이 곧장 앨런이 불러준 주소로 달려갔다.김시연은 밀리기 전 남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 여동생을 건드렸
BX 그룹 이사회 사무실.비서가 부승민에게 회사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윌슨 씨가 접견실에 도착하셨답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실까요?”부승민은 손목시계와 옆에 있던 스케줄표를 확인해보더니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10분 뒤에 회의가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전화가 끊기자 비서는 커피 두 잔을 타 자본주의적 미소를 지으며 접견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차분하게 윌슨과 앨런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윌슨 씨, 회장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시라 커피부터 천천히 마시면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윌슨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흘깃 보고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흥, 이 녀석이.앨런이 비꼬기 시작했다.“그렇게 바쁜 와중에 우릴 만날 시간까지 따로 내준 찰스 씨한테 참 고마워해야겠네요.”비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못 알아들은 척 계속 말을 이었다.“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두 분께서 따로 필요하신 게 있다면 그때 불러주십시오.”앨런이 물었다.“회의는 언제 끝납니까?”“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선 회의가 끝나는 대로 곧 오실 겁니다.”앨런은 뭐라 더 말을 얹으려 했지만 윌슨이 비서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인제 그만 나가보세요.”비서는 구원의 손길이라도 만난 듯 빠른 걸음으로 접견실을 빠져나갔다.앨런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찰스 씨가 우릴 대놓고 무시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부승민이 감히 이런 식으로 그들을 무시하는 이유가 설마 여기가 강남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러는 것일까?한국어 속담에 그런 말이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만약 여기가 필라시였다면 부승민은 감히 윌슨에게 절대 이런 짓을 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윌슨은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부승민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태도야. 네가 정말 여기서 나가버린다면, 그건 부승민의
“이쪽입니다. 따라오시죠.”비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웃음을 억눌렀다.윌슨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부시아의 워치로 전화를 걸었다.마침 휴식시간이라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던 부시아는 조용한 자리를 찾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그래, 카롤. 지금 뭐 하고 있니?”“친구랑 시소 놀고 있었어요.”“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보고 싶어서 전화했단다. 카롤은 외할아버지 안 보고 싶니?”“저도 외할아버지 보고 싶어요.”부시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 외할아버지는 정말 매일 매일 시아가 보고 싶단다. 하지만 아쉽게도 너희 아빠가 널 데리고 필라로 가는 걸 허락하지 않더구나.”“괜찮아요. 외할아버지께서 다음에 강남 또 놀러와서 카롤 만나시면 되죠.”부시아가 대답했다.그러자 워치에서는 윌슨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네 아빠 설득하러 BX 본사까지 찾아왔단다. 하지만 너희 아빠가 외할아버지를 만나주지를 않는구나. 할아버지가 손녀랑 좀 가깝게 지내보겠다는데 그걸 막으려고 하다니. 카롤도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 분명 같이 필라로 가고 싶겠지. 너희 아빠가 마음대로 막았을 거야. 흥, 참으로 답답하지 그지없구나!”부시아가 어딘가 불편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외할아버지, 아빠는 그냥 제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괜찮다. 외할아버지가 너희 아빠 꼭 설득할 테니까. 곧 있으면 외할아버지랑 같이 필라로 갈 수 있을 거다.”“... 저기, 외할아버지!”“그럼 얘기 끝난 거로 하고 외할아버지는 아빠 만나러 갔다 오마. 뚜- 뚜-”부시아는 수화기 너머의 통화 종료음을 들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외할아버지가 정말 아빠를 설득해버리면 어떡하지?!!회의가 드디어 끝났다.비서가 다시 접견실로 와 두 사람에게 말했다.“윌슨 씨, 회장님께서 회의 끝나셨답니다. 지금 바로 회장실로 모실게요.”“그래요.”윌슨은 조금 전 통화 부시아와 통화했을 때 손녀의 반응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교하게 잘 조
전날 윌슨은 백화점에서 부승민이 부시아, 온하랑과 함께 쇼핑하는 화목한 모습을 목격했다. 윌슨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부시아를 데려가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그건 안됩니다.”“왜 안 된다는 거야?”“우선 진정하시고요. 몇 가지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따님이신 이엘리아의 성격으로만 따졌을 때 시아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나요? 두 번째, 윌슨 씨께서 시아를 아낀다고 해도 연세가 있으신데 바쁜 일정 속에서 시아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실 수 있으실까요? 세 번째, 업무를 정리하고 시아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신다고 해도 아이와 세대 차이가 있으신데 부모 같은 애정을 쏟아부으실 수 있을까요? 신중히 생각해보신다면 시아에게 뭐가 최선인지 아실 겁니다.”윌슨은 지금 한국어 듣기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마음속에서 반쯤 번역을 해내다 보니 인내심이 바닥 나버렸다.“말이 너무 많군. 카롤에게 선택권을 줘야 하지 않겠나? 일단 필라에서 한동안 지내도록 하고 그때 가서 아이가 다시 돌아오고 싶다 하면 내가 직접 데리고 올게.”“시아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혼자 필라로 가게 된다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 겁니다.”“내가 있지 않은가? 내가 잘 돌봐주면 되는 거지.”부승민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어르신, 혈연으로 따지면 어르신께서는 부시아의 외할아버지가 맞지만, 아이에게는 그저 한 번밖에 못 본 낯선 사람입니다.”“정 걱정된다면 자네도 함께 가세.”윌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내가 카롤을 강제로 필라에 억류해둘까 봐 무섭나? 아니면 카롤이 나와 함께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게 될까 무서운 건가? 자신이 없어?”“어르신, 저를 자극하려 하셔도 소용없으실 겁니다. 그런 수법, 저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그럼 카롤한테 전화해서 직접 선택하게 하면 되겠군! 만약 카롤이 나와 함께 가길 원한다면 자네도 나와 내 손녀의 사이를 가로막을 자격이 있을 것 같나?”“저는 시아 보호자입니다.”“그래서 내가 오늘 직접 협
윌슨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부시아, 정말 가고 싶은 거지? 별로 가고 싶지 않으면 아빠한테 솔직히 얘기해도 돼.”부승민이 다시 한번 물었다.부시아가 듣기에는 부승민이 자신을 보내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이 혹시라도 기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아이가 대답했다.“아빠, 저는 정말 가고 싶어요. 숙모도 필라 같이 가는 거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숙모랑도 같이 놀 수 있을 거예요.”“...”부승민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가기 싫다고 했으면서 애 갑자기 오늘 마음을 바꾼 것인지.일부러 악역을 자처했다가 딸에게 뒤통수라도 맞은 걸까?윌슨은 “아빠”라는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기쁨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자리했다. 부시아가 덧붙인 말은 윌슨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부승민이 뭐라 더 말을 얹으려던 순간, 윌슨이 다급하게 먼저 말을 꺼냈다.“좋아, 카롤. 이제 됐단다. 가서 친구들과 놀거라.”윌슨의 목소리에 부시아가 잠시 멈칫했다.“그럼... 아빠, 이제 끊을게요.”부승민이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수화기에서는 통화 종료를 알리는 음이 “뚜- 뚜-” 흘러나왔다.윌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부 회장, 이제 들었지? 카롤 스스로 필라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나.”잠시 멈칫하던 윌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만약 또 방해하려 든다면, 우리 사이는 끝이야.”“...”상황이 어쩌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부승민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열흘입니다. 열흘 뒤면 제가 직접 시아 데리러 필라로 갈 겁니다.”“열흘이면 너무 짧지. 한 달.”“이번 달 중순에 시아는 외삼촌 결혼식에 참석할 겁니다.”부승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면 더더욱 카롤을 돌려보낼 수 없었다.윌슨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애초부터 반대하던 결혼인데 카롤이 참석할 필요가 있나.”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부시아를 필라에서 2주간 머무르
윌슨은 잔뜩 신이 난 채로 별장을 소개하는 부시아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아이가 필라에 가면 무조건 좋아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함께 보낼 시간만 상상해도 윌슨이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온하랑은 두 사람이 수다를 떨고 있으니 무료함에 핸드폰을 꺼냈고 때마침 윌슨이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티켓은 카롤이 갖고 있어? 할아버지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데.”“삼촌한테 있어요. 왜요?”부시아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봤고 그는 마침 맞은편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었다.“우리 카롤이 어디에 앉는지 할아버지가 궁금해서 그래.”윌슨이 말했다.“퍼스트 클래스 A 열이요.”부시아는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제가 직접 창가 자리로 골랐거든요.”윌슨은 미간을 찌푸렸다.‘앨런이 티켓 예매하러 갔을 땐 분명이 퍼스트 클래스가 안 남았다고 했는데...’“민우 삼촌이랑 표 사러 갈 때 마침 세 자리에 남아 있었어요.”“그럼 카롤 옆에는 누가 앉을 거야?”이 항공편의 퍼스트 글래스는 이중 통로로 구성되어 있어 좌석은 2-4-2 배열로 배치되어 있다. 그 말인즉 부시아의 곁에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단 하나뿐이라는 뜻이다.“숙모요.”“아... 그래?”윌슨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봤다.사실 그는 부승민이 앉는 줄 알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당연하게 자리 교체하고 손녀와 함께 앉을 수 있었기에 막무가내로 요구하면 그만이다.옆에 있던 온하랑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윌슨의 의도를 알아채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누가 봐도 그는 부시아와 함께 앉고 싶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윌슨은 온하랑이 자신의 뜻을 이해한 것을 보고 솔선해서 먼저 제안할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온하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시선을 거두고 계속하여 핸드폰을 놀았다.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이 정도로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윌슨은 알 수 없는 느낌에 이상함을 느꼈다.비행기는 30분 연착되었다
얼마 후 비행기 체크인이 시작되었다.약 30시간의 비행 끝에 비행기는 필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현지는 이미 밤이었고 부시아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화려한 불빛이 가득 찬 필라시를 바라봤다.윌슨 가문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일찌감치 차를 보내와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편집장도 온하랑이 늦게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어시스던트를 보낸 건 물론 미리 호텔까지 예약해 줬다.윌슨은 오늘 바로 부시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부승민이 온하랑을 먼저 호텔에 보내야 한다며 다음날에 부시아와 찾아뵐 거라고 했다.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윌슨은 기분이 언짢은지 사악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훑어보고선 차에 올라탔다. 부시아와의 이별이 힘든 듯 떠나기 전에도 신신당부했다.“카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할아버지 만나러 와야 해. 알겠지?”“알겠어요. 할아버지, 조심히 들어가세요.”호텔에 도착한 부승민은 온하랑과 부시아를 소파에서 쉬게 한 후 온하랑의 캐리어를 열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활용품을 꺼내 손에 잡히는 대로 놓은 뒤 챙겨온 옷 몇 벌을 옷장에 걸어두었다.그러고선 텅 빈 캐리어를 벽 수석으로 밀어놓았다.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잔 온하랑은 간단하게 야식을 먹은후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온하랑은 잡지사 관계자의 픽업을 받았고,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윌슨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교외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버금갔는데 엄청 크고 경치마저 아름다웠다.새로운 곳에 도착한 부시아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저택의 도우미들은 일찍이 본부를 받고 공손히 그들은 내부의 본관으로 모셨다.윌슨은 오늘 회사에 가지 않고 아내인 서희수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테라스에서 햇볕은 쬐며 외손녀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윌슨이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자 서희수는 잔뜩 궁금해하며 물었다.“그렇게 사랑스럽나요? 이 정도로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이네요.”윌슨은 살며시 웃더니 확신에 차
서희수는 낯선 곳에서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 부시아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난 너의 외할머니야.”“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카롤이라고 합니다.”부시아는 뒤 돌아보며 부승민의 손을 잡아당겼다.“이분은 제 아빠예요.”서희수는 시선을 돌려 뒤에 있는 부승민을 보고선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지금처럼 따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우연히 강성의 연회에서 만났을 수도 있고, 오빠인 서정훈을 통해 들었을 수도 있는데 서희수는 예전부터 부승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BX 그룹 대표를 취임한 후 현재는 회장으로 지낸다고 한다.기억 속의 부승민은 그야말로 엄친아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손녀의 아버지인 건 맞지만 사위가 아니라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희수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방을 잘못 찾은 이엘리아가 인사불성이 된 부승민과 잠자리를 가졌고, 그 후 부선월의 속임수에 속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끝내 아이를 낳았다.사실 부승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된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서정훈에게 이미 수차례 진심을 표했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딸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서희수는 부승민에게 썩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부승민은 예의 삼아 서희수에게 인사하였다. 곧이어 윌슨 부부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굳이 왕래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시아가 잘 도착했으니 전 일 때문에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캐리어에는 시아의 옷과 장난감이 들어있고 평소 습관 같은 건 제가 메모를 하였으니 확인해 보세요. 그럼 시아 잘 부탁드립니다. 보름 뒤에 데리러 올게요.”눈치는 빠른 편이었다.“그럼 멀리 안 나갈게요.”윌슨이 말했다.“아빠, 잘 가요.”부시아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하자 부승민은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 말 잘듣어. 적응 안 되면 언제든지 아빠한테 연락해. 데리러 올게.”부시
어두운 조명과 검은색 자동차가 어우러져 최동철의 실루엣이 희미해졌고, 거기에 부승민이 거의 다 왔다고 메시지를 보낸 터라, 온하랑은 무심코 그가 부승민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하필 이때 최동철이 올 줄은 말이다.“너 내 차가 온 걸 보고서도 그 사람한테서 안 떨어지고 오히려 머리를 돌려서 못 본 척하더라.”그는 최동철이 일부러 그와 비슷한 차를 몰고, 비슷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 온 걸 보면 내일 출장을 핑계로 별장에 묵으려는 게 뻔했다.“...!”온하랑은 난감해서 울상 지었다.“못 본 척한 게 아니라 진짜 못 봤어...”눈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이 쫙 비친 순간 온하랑은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냥 지나가는 이웃 차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내가 경적 안 울렸으면, 넌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그 사람이랑 얘기했겠네?”“아니거든.... 사람 잘못 본 걸 발견하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네 차를 알아봤어.”온하랑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변명하듯 말했다.부승민이 말없이 그녀만 지그시 바라보자 온하랑은 눈을 깜빡였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내가 그 사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렇다면?”온하랑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바로 널 차버렸지. 뭐 하러 여기 앉아서 연기하겠어?”“...”온하랑은 문득 차창 밖을 보다가 여전히 차 옆에 서 있는 최동철을 발견했다. 그를 보는 순간 다시 민망해져서 부승민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우리 이제 가자.”부승민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온하랑 뺨에 입을 맞췄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몸을 살짝 뒤로 빼고 투명한 창문 너머로 최동철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가속 페달을 밟아 단지 밖으로 차를 몰았다.차 안에는 난방이 빵빵하게 돌아서 훈훈했다.온하랑은 얼굴이 달아올라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뒷자리에 던졌다. 그러곤 바깥 풍경을 힐끗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우리 어디 가서 밥 먹을 거야?”부승민은 대답 대신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웠다.“왜 멈춰?”
온하랑은 하루 종일 메이슨과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해 질 무렵이 돼서야 돌아왔다.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메이슨은 이미 잠이 들었다.도착하자 도우미가 저녁 식사를 먼저 할 거냐고 물었다. 온하랑은 메이슨이 잠에서 깨면 같이 먹겠다고 했다.오후 늦게쯤, 메이슨이 조금 출출해해서 온하랑이 그를 데리고 디저트 가게에 갔고 같이 케이크를 먹었기에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온하랑은 노트북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테이블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창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온하랑이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휴대폰이 두 번 울렸다. 확인해 보니 부승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금 데리러 갈게. 야식 먹자. 거의 다 왔어.]온하랑은 답장을 보냈다.[좋아, 나도 아직 저녁 못 먹었어.]그리고 노트북을 덮고 도우미에게 말했다.[잠깐 밖에 나갈 건데 언제 들어올지 몰라요. 30분 뒤쯤에 메이슨 깨워서 밥 먹여 주세요.]도우미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방으로 올라가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방에서 나오며 베란다를 지나칠 때 무심코 밖을 내다봤다.부승민의 차가 이미 별장 입구에 와 있었다.차 옆에는 듬직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한 손을 차 문 위에 올리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였다. 불빛이 빨갛게 깜빡이고 있었다.온하랑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왔다.부승민이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자, 온하랑은 조용히 다가가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서프라이즈!”남자는 온몸이 움찔했다. 뜨거운 손이 온하랑이 교차한 두 손을 덮었고, 다른 손에서 담배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담배꽁초를 발로 짓눌렀다.마침 그때, 앞쪽 코너에서 자동차 한 대가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비추며 다가왔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남자 등 뒤에 얼굴을 묻은 채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게 꿈인 것 같아.”낯설지
“그러면 이젠...”“네가 기회를 봐서 사모님을 도발해 봐. 사모님이 열받아서 너를 미워하게 만들어야 해.”간하림이 말했다.그 말이 떨어지자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간하림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윤이 내 의도를 알아챈 거 아니야?’“내가 임신한 척해서 사모님을 자극하고 사모님이 열받아서 나를 밀면 유산한 척한다... 이런 걸 말하는 거야?”“맞아.”간하림이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바로 그거야!”‘때가 되면 사모님이 널 밀기는커녕 오히려 네 거짓 임신을 들춰내 버릴걸.’“근데...”“왜?”“나, 진짜 임신했어.”“진짜 임... 뭐라고? 네가 진짜로 임신했다고?”간하림이 깜짝 놀랐다.“응.”설윤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어제 집에 돌아왔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매스꺼워서 문득 생리가 밀린 게 떠올라 임신 테스트기를 사 봤거든. 근데... 정말로 임신이라고 나오더라.”간하림은 속이 쓰린 듯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나이도 많은 최국환이 그녀를 임신시킬 줄도 몰랐다.‘운도 참 좋지.’만약 아이를 낳아서 최씨 가문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물려받게 되면 설윤은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늦둥이는 더 귀여움을 받기 마련이다.“맞다.”설윤은 혼잣말하듯 계속했다.“아직 병원에는 안 가 봤어. 언제 가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너 임신한 거 회장님한테 말했어?”간하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병원에서 검사받은 다음에 보고서 들고 가서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려고.”“그렇구나... 음, 윤아. 네가 임신했다면 아까 그 방법은 쓰면 안 돼. 네 몸 상하면 안 되지. 내가 좀 더 고민해 볼게.”‘사모님께 한번 물어보고 나서 다시 얘기해야겠다.’“하림아,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면 회장님한테도 양육 의무가 생기지 않아? 그럼 사모님도 날 쉽게 쫓아내지 못할 텐데 굳이 지금 상대할 필요가 있나?”“...”전화를 끊고 나서, 간하림의 마음속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견딜
임연지도 임가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임가희는 그녀가 너무 성급했다고 나무랐다.임연지는 입으로는 잘못을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그녀는 일부러 설윤의 정체를 드러내서 가방을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오후가 되자, 임연지는 예상대로 점원에게서 설윤이 환불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녀는 곧바로 가방을 예약하고 직접 가게에 가서 찾아왔다.가방을 손에 넣은 임연지는 후련한 기분으로 예쁜 사진을 찍어 한진에게 보냈다.[나 가방 받았어.]시간을 보니 이때쯤 한진은 막 일어났을 것 같았다.잠시 후 한진이 답장을 보냈다.[진짜 예쁘네! 처음 나왔을 때부터 딱 꽂혔는데 네가 준다니까 사양 안 할게.][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 쪽에 맡겨뒀다가 네가 귀국할 때 가져갈래, 아니면 누가 대신 가져다주게 할까?][며칠 뒤에 우리 오빠가 갈 거야. 나 대신 가져다줄 수 있어. 너 언제 시간 돼? 시간 맞춰서 오빠를 보낼게.][난 지금도 괜찮아. 나 센트럴 백화점 4층 커피숍에 있어.][좋아, 내가 오빠한테 전화해 볼게.]몇 분 뒤, 한진이 다시 연락했다.[오빠가 지금은 바쁘대. 그래서 오빠 비서가 대신 갈 거야. 거기서 좀 기다려 줘. 곧 도착할 거야.][알겠어.]임연지는 커피를 시켜 천천히 마시면서 한진과 채팅을 이어갔다.[진아, 근데 네 방법 진짜 효과 좋아. 내가 이틀 정도 오재*을 냉대했더니 바로 전처럼 나한테 잘하려고 해.][그 사람 몰래 귀국해서 부모나 친구들한테도 알리지 못하고 호텔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 결국 너밖에 연락할 데가 없잖아? 계속 차갑게만 대하면 안 돼. 가끔 잘해주기도 하면서 밀당해 봐. 그래야 헷갈릴 거야.][알겠어.]카페에서 20분쯤 기다리자,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깔끔한 청년이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장 임연지에게 다가왔다.임연지는 그 청년이 비서임을 확인한 뒤 가방을 건네주고 커피숍을 나왔다....간하림은 임가희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지만 속으로는 난감해졌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