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삼촌이 직접 나 데리러 온 건가?’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날 때 이엘리아의 눈앞에 나타난 건 낯선 여자였다. 실망한 만큼 기분이 착잡했던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짜증 내며 고개를 돌렸다.김시연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이엘리아는 그 어떤 여자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임가희는 이엘리아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고 문득 옛일이 떠올라 지금 이 순간이 꿈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임가희의 표정을 본 이엘리아는 역겨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임가희는 마음이 심란했지만 애써 차분함을 되찾고 이엘리아의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았다.“아가씨가 이엘리아 윌슨 씨군요.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그쪽이 누구든 관심 없거든요? 그리고 저랑 무슨 상관이죠?”이엘리아는 콧방귀를 뀌더니 밖에 있는 경찰한테 소리쳤다.“이봐요, 누가 이 여자 들여보내라고 했어요?”“이엘리아 씨, 일단 진정하세요.”임가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꺼져요.”결코 물러설 이엘리아가 아니다.“역겨워 죽을 것 같으니까 착한 척 그만해요.”“이엘리아 씨...”“사람말 못 알아들어요? 당장 꺼지라고요.”임가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하랑이랑 다툼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워낙 고집불통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라 예전에도 제가 컨트롤할 수 없었어요. 이엘리아 씨가 절 반기지 않는 걸 알고 있으니 다시는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예요. 단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말을 마친 임가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본 이엘리아는 비꼬며 말했다.“위선자. 온하랑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그쪽이 아니라 온하랑을 이곳에 보내왔어야죠.”‘온하랑 엄마였어? 난 또 김시연 엄마인 줄 알았네. 누구 엄마든 상관없어. 어차피 다 똑같이 역겨우니까.’“어릴 때 제 곁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제 말을 듣지 않더군요.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매일 싸우면서 지내다가 결국에는 사촌 언니를 죽음으로.
임가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는 순간 이엘리아가 불러세웠다.“잠깐만요.”“왜 그러시죠?”임가희는 고개를 돌려 이엘리아를 바라봤다.이엘리아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약속한 일 잊지 마세요.”사실 이엘리아는 온하랑의 임신 소식을 알려 아이를 없애는 방법으로 온하랑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직 정보가 전혀 없는 눈앞의 이 여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온하랑의 엄마이기에 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 충분히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이엘리아는 두 사람이 알아서 싸우길 바라며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경찰서에서 나온 임가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곧이어 비서에게 말했다.“가자.”비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특히 회장님한테. 알아들었지?”임가희는 비서를 흘겨보더니 싸늘한 말투로 무언의 협박을 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재빨리 답했다.“사모님, 저희는 지금 경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면...”계획대로라면 임연지의 일을 처리하고 경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땐 계획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임가희의 말은 어긋나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호텔로 가자. 언제 돌아갈지는 내가 나중에 얘기해줄게. 그리고 온하랑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조사해 봐.”온하랑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는 걸까?“알겠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임가희의 핸드폰이 울렸다.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임가희는 발시자 표시를 보고 한껏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연지야?”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임연지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고모, 신청은 다 하셨어요?”“이미 끝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 필요한 거 있어?”임가희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러웠다.임신 사실을 알고 구치소에서 나온 임연지는 우울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그 어떤 이상함도 발견하지 못했다.충격을 받은 듯 정신 못 차리는 임가희의 표정을 보자 임연지는 한껏 비꼬며 말했다.“고모부가 그 두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잊은 건 아니죠?”임가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지하게 생각했다.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점차 임연지의 말을 믿게 되었다.심지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의혹들도 마침내 답을 얻었다.최국환은 부승민을 만나고 나서부터 갑자기 임연지를 포기하겠다 주장하며 경주에 돌아가자고 설득했다.생각해 보니 어쩌면 부씨 가문과의 다툼을 꺼렸던게 아니라 부승민의 아들이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온하랑을 기어코 최씨 가문에 들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었네. 며느리 될 사람이라서 그랬던 거네?’임연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하랑의 훌륭함을 부정하며 자기 멋대로 생각했다.부승민은 자신을 둘러싼 비밀에 대해 모르거나, 이미 알고 있으면서 최씨 가문에 돌아갈 생각이 없어 거절했거나 둘 중 하나다. 뭐가 됐든 부승민과의 관계를 좁히려면 온하랑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임가희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임연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모, 설마 이 일 때문에 절 버리실 건가요?”임연지는 초조하게 바라보며 내심 아니라는 답이 들려오기를 기대했다.최동림은 건강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최동철과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 다른 세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최동철을 이길 수가 없다.온하랑은 최동림의 누나다.만약 임가희가 최씨 가문에 대해 다른 계획이 있다면 얼마든지 온하랑을 받아들여도 된다. 심지어 최국환과 부승민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연스레 부승민과 친해질 수 있다. 나중에 부승민과 손을 잡고 최동철을 맞선다면 본인과 최동림에게 더 많은 이익이 생기니 결코 불가능한 일인 건 아니다.그러나 알다시피 온하랑과 임연지는 절대 한배를 같이 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임연지도 걱정이 앞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임가희는 아련하게 임연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
김시연의 웨딩 촬영을 마친 온하랑은 곧바로 다른 촬영장으로 넘어갔고 그렇게 부지런히 저녁까지 일하다가 간신히 시간을 빼내 부시아를 만나러 병원으로 향했다.온하랑은 침대 반대편에 앉아 간호사가 부시아의 상처를 살펴보는 걸 지켜봤다.“회복이 아주 잘됐어요. 내일 바로 실밥 제거해도 될 것 같아요.”간호사의 말에 부시아는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실밥만 풀면 퇴원할 수 있는 거죠?”“맞아요.”“아싸!”부시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듯 신나게 춤을 추며 온하랑을 바라봤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산책했다.“어휴...”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온하랑은 고개를 숙였고 마침 애어른처럼 수심에 가득 찬 채 표정을 찌푸리고 있는 부시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온하랑은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왜 한숨을 쉬는 거야?”부시아는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봤다.“숙모, 실은 오전에 아저씨가 절 보러 오셨어요.”온하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저씨라는 사람이 이엘리아의 오빠를 가리킨다는 걸 알았다.윌슨 가문에서 강남을 방문했다는 건 이엘리아를 빼내기 위해 서정훈의 도움을 청하러 온 게 분명하다.“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한숨을 쉬는 거야?”온하랑이 물었다.“돈을 엄청 많이 주면서 앞으로 누구랑 살고 싶은지 물어봤어요. 전 고민도 없이 삼촌이랑 살고 싶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이상한 아줌마가 경찰서에서 나오면 다시는 제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쫓아낸대요.”온하랑은 의아했다.“그럼 잘된 일 아니야?”이엘리아의 최측근마저도 그녀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부시아는 초조하게 손톱을 뜯으며 말을 이었다.“그쵸... 사실 처음에는 그 아줌마를 대신해서 부탁하러 온 줄 알고 엄청 쌀쌀맞게 대했거든요.”온하랑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다 이해해 주실 거야. 시아가 퇴원할 때 그분이 아직도 강남에 계신다면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게 어때? 이
딸이 아이를 돌보며 힘들게 사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평생 배우자를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 들었다.말을 이렇게 해도 슬퍼할 딸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미어졌다.의식을 되찾은 서수현은 그 소식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어쩌면 하느님조차도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이제 서수현에게 남은 건 건강을 되찾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꽤 오랜 시간을 기대하고 있어서 그런지 후련한 느낌보다는 뭔가를 잃은 듯한 허탈함과 불편함이 밀려왔다.서석철은 옆에서 끊임없이 질문했으나 서수현은 입만 벙끗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답답함이 밀려왔던 서석철은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아빠한테 얘기해 봐. 도대체 애 아빠가 누구니?”서석철은 딸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잘 남자를 생각하기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다.서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몰라요.”“이런 상황에서도 그 남자를 감싸는 거야?”“정말 몰라요.”서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정말 누구의 아이인지 알지 못했다.설령 안다고 한들 자업자득인 셈이다. 돈을 위해서 경찰에 신고할 기회를 놓쳤으니 말이다.온하랑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서수현이 남들에게 말 못 할 병을 앓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걱정이 되었지만 서수현이 직접 별일 아니라고 했기에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다.온하랑은 부시아와 함께 산책하다가 다시 병실로 돌아왔고 안문희가 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부시아는 실밥을 제거한 후 부랴부랴 화장실로 달려갔다.말없이 뒤따라간 온하랑은 부시아가 세면대 앞의 의자를 밟고 올라서 거울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거울에 온하랑이 비치자 부시아는 자신의 이마를 만지며 걱정스레 물었다.“숙모, 이런 건 흉터가 남겠죠?”“아니야.”온하랑은 부시아에게 다가가 상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자국이 얕아서 몇 년만 지나면 없어질 거야.
부승민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답했다.“나보다 낫네.”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부시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결혼한 지 얼마 안 지났는데 어떻게 벌써 아이를 낳은 거죠?”“결혼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생긴 거야. 이런 걸 속도위반이라고 해.”온하랑이 친절하게 설명하자 부시아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승민은 걱정이 되어 재빨리 입을 열었다.“시아는 어른이 되어도 절대 이러면 안 돼. 알았지?”벌써부터 딸 걱정하는 부승민을 보니 온하랑은 웃음이 나왔다.부시아는 고개를 들더니 순진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런데 삼촌이랑 숙모도 재혼 안 했잖아요.”부승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나랑 하랑이는 다른 사람이랑 달라.”“뭐가 다른데요?”부승민은 온하랑을 힐끗 보고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시아야, 남동생 생겨서 기쁘지 않아? 우리 저번에 같이 동생 보러 갔잖아.”부시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좋아요.”부시아는 온하랑 품에 안기더니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그래도 전 숙모가 낳은 남동생이 더 좋아요.”“숙모가 여동생을 낳으면?”“여동생도 좋아요.”미용실에 도착한 부시아는 헤어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일자 앞머리를 갖게 되었다.이마를 덮으니 자연스레 시선은 아래로 쏠렸고 부시아의 크고 똘망한 두 눈동자가 더욱 강조되었다.오똑한 콧날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까지 더해지니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지경이었다.옆에서 울고 떼쓰는 아이에 비하면 부시아는 말도 잘 듣고 너무 순했기에 헤어디자이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미용실에서 나온 세 사람은 곧장 KFC로 향했고 부시아는 먹고 싶은 메뉴를 전부 다 시켰다.음식을 기다리던 온하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숙모는 화장실 갈던데 시아도 갈래?”부시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했다.“저도 갈래요.”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부시아는 온하랑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KFC에는 화장실이 없었기에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표지판을 따
부시아와 눈이 마주친 외국인 할아버지는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깜짝 놀란 부시아는 재빨리 시선을 거둔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이상한 사람이네.’낯선 나라에 오면 모든 게 어색할 법도 한데 외국인 할아버지는 마치 이곳이 익숙한 듯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고 그 어떤 긴장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낯선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면 무섭기 마련인데 마치 부시아가 겁을 먹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심지어 이름을 얘기했을 땐 처음 듣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기에 뭔가 예전부터 부시아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하지만 부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자신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을 회상하자 부시아는 순간 알 수 없는 추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KFC를 먹은 후, 온하랑과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쇼핑했고 저녁은 더원파크힐로 돌아가서 먹었다.그곳의 모든 건 변함이 없었고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과 똑같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세 사람은 함께 동네를 산책했다.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시계를 확인한 온하랑이 대뜸 입을 열었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제 돌아가야겠어.”“아니면... 오늘 밤 자고 갈래?”부승민은 기대하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봤다.그러나 온하랑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온하랑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에 부승민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별장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입구에서 부승민을 기다렸다.그 시각 부승민은 부시아를 안까지 데려다주고선 차 키를 챙겨 나온 뒤 곧바로 조수석 쪽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얼른 타.”온하랑이 차에 오르려던 순간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점점 가까이 다가가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갈 거야?”온하랑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숨기려는 듯 재빨리 몸을 뒤로 기대며 피했다.부승민의 시선이 느껴질수록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 온하랑은 애써 시선을 돌린 채 답했다.“응. 갈 거야.”
온하랑은 앵두처럼 빨개진 입술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제 그만 비켜봐.”“하랑아, 무조건 내 말대로 하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데 시간을 정해줘. 얼마면 되는지.”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서는 온하랑을 향한 애틋함과 확고함이 느껴졌고 허리를 쓰다듬는 손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온하랑도 그 열기가 느껴지는 듯 온몸의 신경이 허리에 집중되어 안절부절못했다.차마 부승민의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일단... 나 좀 놔줘.”“싫어.”부승민은 뻔뻔하게 더 가까이 다가가 밀착했고 마치 온하랑을 몸속으로 넣으려는 듯 꽉 껴안았다.“대답하면 놓아줄게. 시간 얼마 정도 줄까?”온하랑은 화를 내며 부승민을 째려봤다.“알았어. 10년이야. 됐지? 이제 나 좀 풀어줘.”현재 이엘리아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인 건 맞지만 다시는 강남에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게다가 부시아가 부승민의 아이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 아무런 걱정없이 긍정적으로 이 일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했다.온하랑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지낼 때 자연스레 여러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 당시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따님이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남과 결혼했다. 남자와 전처 사이에는 서너 살된 아들이 있었는데 양육권이 남자 쪽에 있어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아이가 아직 어리기에 잘 챙겨주고 보살펴주면 친모자보다 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전처는 아이와 놀러 간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고 엄마를 만날 때마다 흔들렸던 아이는 결국 두 사람의 재결합을 원하며 떼를 썼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따님이 현실을 알아차렸을 땐 세 식구는 이미 이혼하기 전으로 돌아가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있었다.물론 그 남자는 부승민이 아니고 그 아이도 부시아가 아니었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불안함을 느꼈다. 부승민이 이엘리아에게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