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됐든 윤재가 어르신 앞에서는 독서를 즐기고 명상을 즐기는 이미지인 터라 채림은 적절한 표현을 골라 대답했다.“웃음이 헤프고 자유분방하거든요.”강숙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고개를 돌려 류옥화를 바라봤다.그러자 류옥화도 진땀을 빼며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다가 강숙자의 귓가에 소곤댔다.“문 대표님이 채림 씨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모양이네요...”‘그럴 수 있지.’강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후도 이렇게 무뚝뚝한 성격으로 변하지 않았을 텐데. 진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을 열 수도 있지.’“그거참 좋네.”강숙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네, 참 좋아. 어쩜 이렇게 참한지. 그런데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라고 해서 많이 속상했지?”“아니요. 속상하지 않아요. 이것도 다 대의를 위한 거잖아요.”‘오히려 계속 숨겼으면 좋겠는데요.’강숙자는 채림이 너무 만족스러웠다.‘문씨 가문에서는 어떻게 딸을 이렇게 이해심 많고 착하고 귀엽게 키웠지? 지후가 그런 일을 당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줄 알았는데 복은 역시 따라오는군.’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숙자는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이 할미가 강원에 집 한 채 마련했는데, 앞으로 둘이 거기서 지내.”아무 생각 없이 거절하려던 채림은 결혼까지 했는데 따로 사는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앞으로 몇 달간 윤재의 스케줄을 몰래 확인해 봤는데, 집에 돌아올 가능성의 거의 없었기에 안심이 되었다.얼마 뒤, 가사도우미 한 명이 들어와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리자마자 강숙자의 표정은 어두워졌다.채림이 밖을 내다봤더니 정원에 거의 소규모 파티를 열어도 될 만한 인원이 모여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휴식하고 싶은 것 같은데, 할머니의 귀국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아부하러 줄지어 왔나 보네. 그러니까 할머니 얼굴이 바로 어두워지지.’강숙자가 손님들을 상대하기 시작하자 지후는 시간 낭비를 하기 싫어 바로 휠체어를 돌렸다. 그러면서
나영의 어머니 최영애는 경멸하는 듯 채림을 바라봤다.“절름발이 주제에 아부해 봤지. 무서워할 거 뭐 있어?”그 말에 안심한 나영은 최영애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엄마 말이 맞아요. 국내에서 강숙자 어르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그중 한 명이 엄마잖아요.”“걱정하지 마. 문 대표님이 효성이 지극한 분이라고 하니 이따가 너만 얌전하게 굴어. 어르신의 동의만 떨어지면 네 아빠 회사도 정상 가동될 거야. 그러면 미스 글로벌 파티에 가게 될 사람도 자연스럽게 네가 될 거고.”최영애는 손을 들어 어깨에 걸친 숄을 정리하며 말했다.그 말에 더욱 자신감이 생겨난 나영은 최영애와 함께 가슴을 편 채 앞으로 걸어갔다....나영 모녀가 밖에서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두 사람을 안으로 모시러 오지 않았다. 결국 짜증이 난 나영은 목표를 돌려 벚꽃 나무 아래에 있는 채림을 찾아갔다.“어머, 이게 누구야? 백씨 가문 아가씨잖아. 문씨 저택에 오면서 예의 갖춰 차려입지 않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오더니, 백씨 가문이 이 정도로 몰락했나?”고개를 돌린 채림의 눈에는 보석을 칭칭 휘감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를 몰아세우는 여자가 들어왔다.‘한나영?’‘한나영도 여기 올 줄이야.’채림은 남의 집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나영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동생한테 약혼자를 뺏겼는데도 슬픈 기색 하나 없네? 게다가 은근히 야망 있네? 곧바로 어르신한테 줄을 대러 달려오다니.”“엄마, 그런 남녀랑 한데 엮여서 사람들 입에 오른 사람의 인성이 어디 가겠어요, 안 그래요?”채림은 싸늘한 눈빛을 내뿜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렇게 죽고 못 사는 베프인 척하더니, 벌써 선을 긋는 거야? 쓸모 없어지니 자기 친구도 버리는 사람은 수준이 얼마나 높을까?”“지금 나 욕했어?”나영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제 발 저리니 바로 인정하네. 그래도 본인 주제는 좀 아나 봐!”“백채림! 아직 좋아하
“이게 정말인가요? 정말 절름발이를 H시 대표로 선정한 거예요?”옆에 있던 귀부인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크흠.”하지만 강숙자의 헛기침 한방에 귀부인들은 바로 조용해졌다.“혹시 아는 사람인가?”강숙자의 물음에, 나영은 강숙자가 채림한테 화가 났다고 착각해 얼른 부채질했다.“아니요. 몰라요. 하지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 H시에서 저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오늘 오전만 해도 저 여자의 약혼자가 저 여자 사촌 동생이랑 몸을 섞는 영상이 제국 빌딩에 생중계됐거든요...”“저 아가씨가 백씨 가문 아가씨였군요. 하긴, 최근 백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유명해지긴 했죠. 다들 제국 빌딩에서 상영된 영상을 못 보셨나요?”“그럴 리가요. 생방송이라 보고 싶지 않아도 안 볼 수가 없었어요...”귀부인들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더 자신감을 얻은 나영은 이미 어두워진 강숙자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채 부채질 해댔다.“어르신, 너무 우습지 않나요? 집에 그런 추한 일이 벌어졌으면서 어르신께 줄을 대려고 쪼르르 달려오다니요.”“상대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동정하는 게 아니라 비웃는 건가?”쩌렁쩌렁한 강숙자의 목소리에 수군대며 떠들던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나영도 너무 난감해 다급히 핑계를 댔다.“저... 어르신, 개인사는 제쳐 두더라도 절름발이가 H시를 대표하여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하는 걸 두고 보실 건가요? 그러면 백채림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물론, H시까지 웃음거리로 전락할 거라고요!”안으로 들어오던 채림은 마침 나영의 발언을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강숙자에게 다가갔다.채림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나영은 눈을 땡그랗게 뜨며 삿대질했다.“어르신, 이것 보세요. 얼마나 교양 없나. 어르신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들어왔잖아요!”강숙자는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그 순간 강숙자가 자기 의견을 동의했다고 착각한 나영은 다급히 저한테로 뻗어 온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
급히 진행된 모임이 끝나자, 강숙자는 특별히 차를 준비해 채림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마침 그 시각은 증권소 거래가 막 마감된 시간이었다. 채림은 서둘러 드림캐슬 주식 상황을 확인했지만, 놀랍게도 주가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백성호와 이철민이 손을 잡고 여론을 막아보려 했지만, 제국 빌딩에서 생중계된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기사 대부분은 사나가 홍보 모델과 드라마, 예능에서 퇴출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심지어 국제적인 유명 브랜드들마저 계약 위반을 빌미로 사나에게 터무니없는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게다가 사나와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과 동료들이 하나둘씩 사나의 인성을 폭로하는 글을 올리면서 여론은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채림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들을 확인하며 입가에 냉소를 띄웠다.‘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그랬나. 얼마나 최악이었으면 편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채림은 집 대신 회사로 향해 향수 라인을 담당하는 동료들과 신제품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가 끝난 후, 폰을 확인해 보니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사나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채림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려 했지만, 마침 또다시 사나의 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채림은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전화를 받았다.[언니.]전화 건너편에서 사나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하.”채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빌어 봐.”[그래, 내가 이렇게 빌게.]사나는 당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교통사고를 꾸며 내 다리를 망가뜨리고, 가짜 약을 복용하게 해 회복하지 못하게 하고, 내 약혼자를 꼬셔 2년 동안이나 나를 바보 취급한 건 너야. 난 오히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채림은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그러자 한참 뒤 건너편에서 사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우리 자매잖아...]“
다음 날 저녁, 사나는 짙은 화장으로 창백한 얼굴을 가리고 갖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섹시한 치마를 골라 입고는 요트에 올라탔다.나영에게 부탁해 알아본 바로, 오경수가 H시에 도착하자마자 H시에서 내로라하는 사업가들이 그를 초대해, 특별히 바다 위에서 화려한 요트파티를 열었다고 한다.이번 기회를 사나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사나는 파티에 참석한 아가씨처럼 치장하고 인파 속에 숨어들어 오경수를 찾았다.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오경수도 이제는 반쯤 취한 상태였다. 주위에 예쁜 아가씨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싫증 난 모습이었다.사나는 클레오파트라 가면으로 얼굴 반쪽을 가리고 흰색 지팡이를 든 채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게다가 일부러 보란 듯이 오경수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그 덕에 오경수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오경수는 옆에 있는 아가씨들을 밀치고 사나에게 걸어왔다. 하지만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려 할 때, 사나는 쏙 빠져나갔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고 나니 오경수는 사나에게 완전히 홀려 버렸다.사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저 이제 가봐야 해요.”오경수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사나를 뒤쫓았다.“이봐요, 아가씨. 원하는 게 있으면 다 줄 수 있어요. 나랑 함께 가요. 내가 로맨틱한 밤을 약속할게요.”“저는 인연을 따져요.”사나는 빨간 입술을 말아 올리며 싱긋 미소를 날렸다.“인연?”오경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만약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동의할게요.”사나는 간드러지게 돌아서며 한마디를 남겼다.“제 이름 기억해 줘요. 전 백채림이에요.”‘백채림?’요트의 고급 객실 안,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들린 이름에, 안에 있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 자신을 백채림이라고 소개하는 여자는 지팡이를 짚고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절대 백채림이 아니라는 걸 남자는 단번에 알아차렸다.휠체어 뒤에 서 있던 원강현은 자기 대표님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대표님은 오늘 요트에서 사업 얘기를 나누려고 사람
그날 저녁 출발 직전 채림은 의자 옆에 놓인 지팡이를 보며 약 2초간 망설였다. 그러다가 끝내 지팡이를 챙기지 않았다.이제 왼발에도 어느 정도 힘이 실린다. 물론 그동안 지팡이에 너무 의지해 지팡이 없이 걷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오늘은 BM 그룹을 대표해 파티에 참석하기에, 이제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새 출발 할 때도 됐다.채림은 지수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가는 길에 채림은 만능 소식통인 지수에게 물었다.“이원후가 백사나를 입원시켰어. 혹시 아이는 어떻게 됐어?”“살아 있을 리가 있나?”지수는 혀를 끌끌 차며 운전했다.“이원후가 때리지 않았어도 백사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거야.”고개를 돌린 지수는 채림의 청초한 얼굴을 흘긋 보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설마, 아니지? 너 지금 그 순진한 척하는 불여우 동정하는 거야? 내가 들은 바로는 백사나 그 계집애가 입원하는 동안에도 가만있지 않았대. 어제는 퇴원하자마자 요트파티에 참석했고.”채림은 고개를 저었다.“난 그저 아이가 불쌍한 것뿐이야. 부모 잘못 만나서.”...오경수가 이번 파티의 주인이었지만 파티가 시작되고 한동안은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채림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파티 홀 분위기는 약간 어수선했다.그러다가 채림이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지수가 그녀를 잡았다.“채림아, 가지 마!”“왜?”“오경수가 술주정 하며 여기저기 너를 찾고 있대.”지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채림은 그 말에 안을 흘긋거리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나를 찾는다고? 난 아직 오경수를 만난적도 없는데?”“응.”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히 말하면 백채림이 누구인지 계속 묻고 다녀. 왠지 수상해.”채림은 입을 오므리고 안쪽을 바라봤다. 비틀거리며 점점 가까이 걸어오던 오경수는 지나가는 여자마다 붙잡아 세우고 물어댔다.“네가 백채림이야? 어?”“나랑 좋은 밤 보내기로 했으면서.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난다고 했잖아.”“백채림! 당장 나와! 왜 숨는 건데?”채림은 너무
오경수는 채림 옆에 찰싹 붙어 굶주린 늙은 여우처럼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물론 채림의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빼어난 미모를 보니 이 자리에서 당장 그녀를 안고 싶었다.“오 대표님, 오늘 향수 개발 협업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BM 그룹 기획안은 확인해 보셨나요?”채림은 저한테로 뻗어오는 피둥피둥한 손을 가볍게 피하며 물었다.“어?”오경수는 큰 손을 채림 앞에 대고 휘휘 저었다.“분위기 깨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약속이나 지켜요. 자, 나랑 같이 올라갑시다.”“오 대표님, 초대장에 분명 협업 건으로 만나자고 적었던데요.”채림은 다시 강조했다.오경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협업은 무슨! 내가 다 조사해봤다고. 백씨 가문도 이제는 딸 팔아 권력자에게 빌붙고 있던데. 오늘저녁 나를 만족하게 하면,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주지!”“하.”채림은 냉소를 흘렸다. ‘협업을 하자고 했더니 잠자리를 가지자고?’“뜻이 다르다면 더 얘기할 것도 없겠네요.”채림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긴 오경수는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확 구겼다.“협업? 좋아. 그러면 저 무대에 올라가 스트립쇼를 하던가! 어릴 때 발레를 배웠다고 들었는데, 그럼 스트립쇼는 껌이겠지?”주위에서 갑자기 경멸 섞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해 봐요!”“스트립쇼가 뭐 어때서? 그게 어렵나? 나 기분 좋게 하면 협업은 물론이고 BM 그룹 향수 사업에 투자도 해주지!”오경수는 사람들의 호응에 더 신이 나서 막 나갔다.채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오 대표님, 지금 찾으시는 사람이 백채림이 확실해요?”오경수가 살짝 의아해하자 채림은 말을 이었다.“그럼 백채림이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요? 지팡이를 짚고 있는.”오경수가 찬성하는 듯하자 채림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백 안에 손을 넣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이윽고 갑자기 오른발을 들어 오경수를 퍽 걷어찼
지후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채림은 그의 허벅지 사이에 엎드려 있었다. 부딪히는 충격으로 휠체어는 뒤로 기울어졌고, 두 사람의 무게는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강현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강현은 감히 눈 뜨고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지후와 채원이 아주 이상야릇한 자세로 있었으니까. 이걸 더 봤다가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채림은 자기가 부딪힌 사람이 지후라는 걸 깨닫고 그의 다리를 짚으며 휠체어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뒤에서 오경수 경호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서!”“어딜 도망가!”때마침 지후의 경호원 신우현이 앞에 막아섰다.“뒤에 문 대표님이 계신데, 감히 어딜 넘어오려고!”경호원들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신우현 뒤쪽을 살폈다. 그랬더니 지후가 외투를 벗어 자기 다리 사이에 엎드려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세를 본 경호원들은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역시 문 대표님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 흥미가 동하면 어디서든 상관하지 않는다니. 경호원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이해했다. 문지후는 이런 짓을 해도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을 걸 아니까.그때 오경수도 가까스로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부하직원이 얼른 상황을 설명하자 이글이글 불타고 있던 오경수의 눈은 살짝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 문지후와 웬 여자의 옆모습을 보더니 이내 태도가 돌변했다.“문 대표님 바쁘신 거 안 보여? 당장 물러나! 문 대표님 흥 깨지 말고!”말을 마친 오경수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또 절뚝절뚝 돌아갔다.그제야 채림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지후의 다리 사이에서 일어섰다.강현은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채임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지금 여기서 무사히 나가려면 지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채림도 알고 있었다.어색한 분위기가 한참 이어지더니 엘리베이터가 겨우 도착했다.지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서 물었다.“결혼신고서를 받았습니까?”“네.”“문제 있던가요?”지후는 말하면서
“채림 씨, 또 만났네요.”먼저 입을 연 건 건욱이었다.그러자 그레이스가 곧이어 비아냥거렸다.“그러게. 또 만났네. 참 인연이 깊어.”채림은 입꼬리를 움찔거렸다.“인연인지 아닌지는 그쪽이 더 잘 알 텐데.”감독과 PD는 차 안에서 촬영 절차를 설명했고 채림은 스태프들과 세부 사항을 논했다. 건욱도 그 사이에 끼고 싶었으나 끼지 못해 그레이스가 옆에서 눈짓을 하는 것도 무시했다.“채림 씨, 이번에 C시 소개 멘트는 원래 채림 씨가 하기로 했는데 그레이스 씨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인문 경관의 해설은 그레시스 씨가 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그 부분은 그레이스 씨한테 나눠주세요.” PD는 살짝 난감한 듯 말했다.“소개는 저희가 이미 써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중에 경관 선택은 채림 씨가 먼저 할 거예요.”채림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먼저 선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번에 미스 글로벌 파티 주최 측에서 도시 홍보 영상을 찍는 건 순전히 공익성 활동이다. 때문에 채림은 각 지역의 인문경관과 민속 습관을 더 통속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싶은 마음이지 절대 노이즈마케팅 할 생각이 없었다.한참 뒤, 차는 어느새 C시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그레이스는 겨우 기회를 잡아 채림에게 다가갔다.“C시는 정말 좋은 곳이야. 사람들 인심은 후하고 경치는 아름답고. 네티즌들도 C시 홍보 영상에 기대가 커. 그러니 네가 여기에 촬영 온 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뭐?”채림은 헛웃음이 나왔다.“본인이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퀸이 되었다고 후원사가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인터넷에 우리의 불화설이 떠도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일부러 우리를 같은 조에 배정했고, 그 덕에 너도 C시에 오게 된 거야.”“아하.”채림은 두 손을 들어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뒤 차갑게 웃었다.“그 자신감에 박수를 보내. 하지만 한 가지 잘못 말한 게 있어.”“뭔데?”그레이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불화설이 아니라 우리는 진짜 안 맞는 거
채림은 순간 가슴이 멎는 기분이었다. 지후가 사람들 앞에서 저를 희롱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주위 사람들은 지후가 채림을 협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채림은 한마디만 듣고 고개를 푹 숙였으니까.지후의 입가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현장 스태프들을 바라볼 때 눈빛은 다시 싸늘해졌다.“어떻게 된 일이죠?”“문 대표님, 그게 사실은 제가 기획안이 별로인 것 같아... 의견을 조금 냈거든요...”지후 앞에서 미아는 순한 양이 되어 누구보다 예의를 차렸다.“지후는 차가운 눈빛을 보내더니 불만 투로 물었다.“그쪽은 누구죠?”주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삐 눈알을 굴렸다. 지후가 미나를 아예 모른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전에 미나는 분명 자기를 MS 그룹이 띄워주는 연예인이라고 소개했다. 게다가 문지후 여자 친구라는 스캔들도 터졌었고.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니...미나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못 들은 척 무시한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이번이야말로 자기를 소개할 좋은 기회였다.“문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지후는 미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얼굴로 명령했다.“기획안에 어떻게 나왔으면 그대로 촬영해요. MS 그룹 소속 연예인은 많아요. 미나 씨가 정말 독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지후는 성큼성큼 채림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따라와요.”채림은 잠깐 망설이다가 얼른 지후를 따라 나갔다.“기획안은 수정할 거 없으니 나랑 같이 집에 가요.”지후는 문을 나서자마자 말했다.“전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따로 갈게요.”“가면서 데려다줄게요.”지후는 채림에게 바짝 다가가면서 그녀의 맑은 두 눈에 질투가 드리웠는지 자세히 보려고 했다.하지만 채림은 오히려 고개를 더 숙이며 입술을 오므린 채 여전히 거절했다.“문 대표님 회사에 여자 연예인도 많을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미나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자 쪽팔렸는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아니요, 사실을 서술한 것뿐입니다.”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이번 기획안은 계약하기 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촬영 중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면 저희 측 문제는 아닌 거죠.”미나는 여우 같은 눈매를 치켜 올리며 채림을 날카롭게 째려봤다.“지금 계약서로 날 압박하겠다는 거야?”“만약 미나 씨는 계약서도 안중에 없다면, 계속 협력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채림은 상대의 협박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안 찍으면 안 찍었지!”미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내가 촬영 안 하면 당신들 일정에 차질이 생기잖아!”막무가내로 나오는 미나를 보고 유미를 포함한 기타 BM그룹 직원들은 모두 초조해 났다. 하지만 채림은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자기한테 방법이 있다고 눈빛을 보냈다.“미나 씨가 촬영 안 하면 우리 일정에만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니라 윤재 씨 일정에도 차질이 생겨요.”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윤재 선배 들먹이지 마! 나 윤재 선배님 직속 후배야. 우리 사이가 설마 스캔들을 조작해 엮인 두 사람보다 못할까?”미나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우리 회사가 계약한 상대가 윤재 씨인데, 윤재 씨를 들먹이지 않으면 누구를 들먹이겠어요?”채림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 씨와 친하다니 더 잘됐네요. 미나 씨가 대신 말 좀 전해줘요. 이따 윤재 씨 스케줄 뒤로 미뤄졌다고.”“뭐?”미나는 순간 허리를 곧게 폈다.“윤재 씨 촬영은 미나 씨 촬영 마치고 나서 시작할 거거든요. 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했으면서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윤재 씨 곧 도착해요.”채림은 고개를 숙인 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시간 다 됐네요.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미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채림이 이토록 말주변이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물러서지
채림은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H시로 돌아갔다.윤재의 1분기 광고 촬영도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채림은 사전에 윤재의 매니저먼트팀과 소통하고, 암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향수 기획팀 직원 두 명더러 촬영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그러고 본인은 사무실에서 조향 대회를 준비했다.저녁 무렵.강원의 자사도우미, 김선주한테서 전화가 왔다.“사모님, 오늘 저녁 집에 돌아와 식사하실 겁니까?”채림은 약 1초간 반응하고는 물었다.“둘째 삼촌은 집에 있나요?”“네, 돌아오셨습니다. 만약 사모님도 돌아오신다면 문 대표님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김선주는 재빨리 대답했다.채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이런 말을 들어 본지도 참 오래된다. 집에서... 누군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고...채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한테 선물한 진주 왕관이 떠올라, 집에 돌아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하려고 결심했다.“그래요. 이따 바로 갈게요.”채림이 대답했다.한편, 전화를 끊은 김선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인어른의 머리 위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단번에 가시고 강원에 다시 봄바람이 부는 듯한 분위기가 찾아왔으니까.채림의 마음도 가벼웠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고는 문을 닫고 퇴근했다.하지만 그때, 핸드폰이 울리면서 향수팀 직원 소유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백 대표님, 한번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쪽에서 촬영 진행이 안 되고 있어요...”“다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요? 윤지 씨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채림은 의아했다.“윤재 씨가 아니라 같은 소속사 윤미나 씨가 문제예요... 상대는 문지후 대표님 여자 친구라고 소문난 스캔들 상대인데 우리를 계속 괴롭혀요. 저희도 더 이상 시중들기 힘들어요...”소유미가 억울한 듯 말했다.‘하.’채림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면서 흔들림 없는 눈을 깜빡거렸다. ‘스캔들 상대도 있었어?’“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채림은 전
사실 백성호는 J시에 온 지 며칠이 된다. BM 그룹에서의 지위를 잃은 그는 변씨 가문에 빌붙으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다른 살길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찾은 목표가 바로 방민수다. 하지만 여러 번 방문 요청을 드렸지만 한 번도 얼굴을 만나지는 못했다.결국 그는 큰돈을 들여 파티 초대장 한 장을 구했고, 그 파티에서 겨우 방민수를 만나 안부 좀 전하고 명함을 건넸다. 그게 끝이다.“마침 잘됐네. 그럼 우리 아빠 앞에서 그렇게 말해 봐. 아빠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궁금하니까.”은솔은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발버둥치던 백성호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멍한 눈으로 은솔을 바라봤다.이 작고 여린 여자애가 방 회장 따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미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방씨 가문 경호원에게 끌려 나갔다.변형빈은 밖으로 끌려 나가는 백성호를 보자마자 모든 더러운 물을 그에게 뿌렸다.“협회장님, 보세요. 백성호는 궁지에 빠지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입니다. 프롬프트도 분명 백성호가 사람을 시켜 망가뜨린 게 틀림없어요. 그랬으면서 나를 모함하다니...”“변형빈! 이 사람도 아닌 놈! 내가 네놈이 한 파렴치한 짓을 모두 까발릴 거야!”백성호는 이미 나갔으면서도 형빈의 목소리를 듣고 고래고래 소리쳤다.그 순간 형빈은 눈동자가 축소되면서 겁을 먹었다.“하...”고강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변형빈은 역시 싹수가 노래서 약이 없었다. 그래도 공을 세워 잘못을 덮을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이토록 식견이 짧으니 채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고강섭은 몸을 돌려 채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백 대표님, 위급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모습 잘 봤습니다. 제 주변 교수님들이 백 대표님 칭찬뿐이에요.”“과찬이십니다.”채림은 대범하게 말했다.고강섭은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이번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선 증거를 찾고 조사해 봐야 한다.협회에 DL그룹을 지지하는 세력
협회장은 ‘고맙다’는 단어를 강조하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뒤돌아 형빈을 꾸짖었다.“변 대표님, 남을 모함하기 전에 머리를 쓸 수는 없나요?”“협회장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형빈은 뜬금없이 꾸지람을 들어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가 원했던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무슨 말이냐고?”고강섭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세미나 시작 전, 내 비서가 분명 여러 번 강조했을 텐데요? 내 연설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연설문은 그동안 우리 업계에 도움을 준 제조 업체와 해외 업체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하필 중요한 시간에 프롬프트조차 없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게 세미나를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장담한 결과인가요?”“그럴 리가 없어요.”형빈은 조급한 나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프롬프트는 분명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쳐 놨어요.”“그러니까 프롬프트는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 고장 났다는 거네요?”채림은 형빈의 말실수를 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형빈은 멍해졌다. 그제야 본인이 함정에 빠졌다는 게 실감 났다.고강섭은 연신 한숨을 쉬며 뒷짐을 쥔 채 형빈을 비난했다.“변 대표님, 내가 세미나 주최 권한을 변 대표님께 맡기면서 연신 강조했을 텐데요? 동종 업계 사이 경쟁이 필요하긴 하다지만 건전하게 경쟁해야죠. 어쩜 매번 이렇게 남의 등에 칼 꽂는 짓을 할 수 있죠?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이네요.”그때 형빈의 비서 엄태식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귀에 아까 전 발생한 일을 설명했다. 프롬프트는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치지 못했다고.”“아까는 어디 갔었어? 왜 그걸 바로 보고하지 않았어?”형빈은 쪽팔리는 한편 화가 났다.“저도 그동안 잡혀 있어서 올 수 없었어요...”태식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백 대표님이 결단을 내려 협회장님 연설문을 무대 위에 준비해 두어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어요.”고강섭의 비서가 옆에서 말했다.“변 대표님, 이번 일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고강
협회장이 해야 할 멘트는 무척 길기에 프롬프트도 없이 멘트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본인이 아무리 상투적인 말로 억지로 짜 집기 해서 지어낸다고 해도, 오늘 현장에 수많은 파트너가 와 한 분 한 분 감사 인사드리려면 회사 이름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을 모두 외울 리는 만무했다.‘DL그룹!’며칠 전 DL그룹 회장이 직접 고강섭을 찾아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사정했었다. 결국 마음 약해진 그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하지만 DL그룹이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고강섭은 난처하기도 하고 화도 나 얼굴이 자줏빛을 띄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채림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협회장님, 저를 따라 세컨드 스테이지로 갑시다.”고강섭 눈에는 혼란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채림이 계속 웃는 바람에 그는 마지 못해 채림을 따라 나섰다.그러다 세컨드 스테이지 위에 도착했을 때, 고강섭은 무대 바닥에 자신이 해야 할 멘트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고강섭은 카메라 뒤에서 눈을 반짝이더니 자신만만하게 무대를 내려가는 채림을 대견스러운 듯 바라봤다.잠시 당황했던 고강섭은 무사히 연설을 마치며 세미나의 막바지를 알렸다.채림이 백스테이지에 도착하자 변형빈이 부르는 것처럼 다가와 버럭 소리쳤다.“백채림, 뭐 하는 거야? 왜 협회장님을 데리고 빙빙 돌았어? 협회장님이 너 때문에 어지러워하셨잖아!”“내가 왜 협회장님을 모시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채림은 침착하게 반격했다.은솔의 경호원이 일을 깔끔히 처리했는지 형빈은 아직도 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모른 채 어릿광대처럼 채림을 비난했다.“어디서 변명이야!”형빈은 사나운 말투로 윽박지르더니 뭔가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그만!”그때 노기가 담긴 나지막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형빈은 뒤돌아서서 잔뜩 화가 난 고강섭을 바라보더니 얼른 다가가
채림과 같은 줄에 앉은 변형빈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도발하는 듯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따 또 그녀에게 덫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하지만 지금 채림은 밝은 곳에 있고 상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기에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조심을 다하는 수밖에.채림이 경계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림 씨! 뭘 그렇게 걱정해요?”채림은 고개를 돌려 흘긋 바라봤다.“은솔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채림 씨가 연설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죠.”은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보탰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저 오늘 혼자 온 거 아니에요.”은솔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보니 시선 끝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몇 명 서 있었다. 심지어는 모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모양인지 분위기가 남달랐다.채림은 입꼬리를 말아 올랐다.“오늘 정말 은솔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너무 잘됐네요!”은솔은 기대되어 미칠 지경이었다.채림은 어처구니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뭔 일을 당하는 게 그렇게 기대되나?’채림이 은솔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당부하자 은솔은 이내 옆에 앉은 변형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이내 흉악한 얼굴을 한 백성호를 보더니 호언장담했다.“걱정하지 마요. 제가 오늘 이 두 사람 죽어라 감시할게요! 만약 두 사람이 채림 씨한테 뭔 짓을 하려 한다면 오늘 내 손에 죽었어요!”채림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뭐 깡패도 아니고, 적당히 해요.”“그래요. 채림 씨 말대로 할게요.”은솔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채림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대 아래에 조용히 앉아 청중이 되었다.세미나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상 순서가 되자 채림을 포함한 몇몇 기업 대표는 함께 무대에 올라 업계 청년 공로상을 수상했다.수상을 마친 뒤 바로 채림의 연설이 시작되었다.사회자의 짧은 멘트가 끝나자, 은솔은
[우리 참 안 맞아. 어쩜 내가 도착하자마 H시를 떠났어?]건너편 상대는 계속 농담조로 말했다.“왜 돌아왔어?”문지후는 방금 풀었던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산사태 때 본인 목숨도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를 구했다던데? 상대한테 홀리기라도 했어? 오히려 바위 아래로 밀어야 하는 거 아니야?]상대의 목소리는 음흉하고 섬뜩했다.“정말 그 여자가 죽길 바라는 거야?”지후는 차갑게 되물었다.“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예진과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인데?’[예지는 예지고 그 여자는 그 여자야! 그 계집이 예지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내가 왜 그 여자를 살려 둬야 해?]상대는 조급해졌는지 소리 질렀다.하지만 지후는 귓가에 들려오는 으르렁거림을 무시한 채 냉정을 되찾았다.“우리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달랐어. 난 그때의 진실을 알아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게 할 거야!”[하하!]전화 건너편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칼 같은 문 대표가 언제부터 이렇게 꾸물대는 성격이 된 거야?]“내가 칼 같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까지 베어 버리는 건 아니야!”지후는 차가운 말투로 위협했다.[정말 그 여자한테 푹 빠지기라도 했어? 계속 계획을 미룬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어디 그래 봐!”지후의 몸은 순간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더니 협박과 경고를 날렸다.“내가 귀국을 결심한 날부터 그 여자는 내 사람이었어!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가 결정해. 만약 내 계획을 망치면 그게 당신이라도 가만 안 둬!”지후는 말을 마친 뒤 전화를 팍 끊었다. 그러다 한참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 2분 뒤, 강현은 그의 방에 나타났다.“차 대기시켜. H시로 돌아갈 거야.”지후가 대답했다.“하지만, 대표님...”강현은 말을 더듬다가 지후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 입을 열었다.“방금 소식을 접했는데, 사모님께서 내일 향수 업계 세미나에 참석한답니다. 주최 측이 DL그룹이라 사모님께 불리할 것 같습니다.”지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동방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