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의 어머니 최영애는 경멸하는 듯 채림을 바라봤다.“절름발이 주제에 아부해 봤지. 무서워할 거 뭐 있어?”그 말에 안심한 나영은 최영애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엄마 말이 맞아요. 국내에서 강숙자 어르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그중 한 명이 엄마잖아요.”“걱정하지 마. 문 대표님이 효성이 지극한 분이라고 하니 이따가 너만 얌전하게 굴어. 어르신의 동의만 떨어지면 네 아빠 회사도 정상 가동될 거야. 그러면 미스 글로벌 파티에 가게 될 사람도 자연스럽게 네가 될 거고.”최영애는 손을 들어 어깨에 걸친 숄을 정리하며 말했다.그 말에 더욱 자신감이 생겨난 나영은 최영애와 함께 가슴을 편 채 앞으로 걸어갔다....나영 모녀가 밖에서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두 사람을 안으로 모시러 오지 않았다. 결국 짜증이 난 나영은 목표를 돌려 벚꽃 나무 아래에 있는 채림을 찾아갔다.“어머, 이게 누구야? 백씨 가문 아가씨잖아. 문씨 저택에 오면서 예의 갖춰 차려입지 않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오더니, 백씨 가문이 이 정도로 몰락했나?”고개를 돌린 채림의 눈에는 보석을 칭칭 휘감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를 몰아세우는 여자가 들어왔다.‘한나영?’‘한나영도 여기 올 줄이야.’채림은 남의 집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나영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동생한테 약혼자를 뺏겼는데도 슬픈 기색 하나 없네? 게다가 은근히 야망 있네? 곧바로 어르신한테 줄을 대러 달려오다니.”“엄마, 그런 남녀랑 한데 엮여서 사람들 입에 오른 사람의 인성이 어디 가겠어요, 안 그래요?”채림은 싸늘한 눈빛을 내뿜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렇게 죽고 못 사는 베프인 척하더니, 벌써 선을 긋는 거야? 쓸모 없어지니 자기 친구도 버리는 사람은 수준이 얼마나 높을까?”“지금 나 욕했어?”나영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제 발 저리니 바로 인정하네. 그래도 본인 주제는 좀 아나 봐!”“백채림! 아직 좋아하
“이게 정말인가요? 정말 절름발이를 H시 대표로 선정한 거예요?”옆에 있던 귀부인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크흠.”하지만 강숙자의 헛기침 한방에 귀부인들은 바로 조용해졌다.“혹시 아는 사람인가?”강숙자의 물음에, 나영은 강숙자가 채림한테 화가 났다고 착각해 얼른 부채질했다.“아니요. 몰라요. 하지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 H시에서 저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오늘 오전만 해도 저 여자의 약혼자가 저 여자 사촌 동생이랑 몸을 섞는 영상이 제국 빌딩에 생중계됐거든요...”“저 아가씨가 백씨 가문 아가씨였군요. 하긴, 최근 백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유명해지긴 했죠. 다들 제국 빌딩에서 상영된 영상을 못 보셨나요?”“그럴 리가요. 생방송이라 보고 싶지 않아도 안 볼 수가 없었어요...”귀부인들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더 자신감을 얻은 나영은 이미 어두워진 강숙자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채 부채질 해댔다.“어르신, 너무 우습지 않나요? 집에 그런 추한 일이 벌어졌으면서 어르신께 줄을 대려고 쪼르르 달려오다니요.”“상대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동정하는 게 아니라 비웃는 건가?”쩌렁쩌렁한 강숙자의 목소리에 수군대며 떠들던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나영도 너무 난감해 다급히 핑계를 댔다.“저... 어르신, 개인사는 제쳐 두더라도 절름발이가 H시를 대표하여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하는 걸 두고 보실 건가요? 그러면 백채림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물론, H시까지 웃음거리로 전락할 거라고요!”안으로 들어오던 채림은 마침 나영의 발언을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강숙자에게 다가갔다.채림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나영은 눈을 땡그랗게 뜨며 삿대질했다.“어르신, 이것 보세요. 얼마나 교양 없나. 어르신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들어왔잖아요!”강숙자는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그 순간 강숙자가 자기 의견을 동의했다고 착각한 나영은 다급히 저한테로 뻗어 온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
급히 진행된 모임이 끝나자, 강숙자는 특별히 차를 준비해 채림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마침 그 시각은 증권소 거래가 막 마감된 시간이었다. 채림은 서둘러 드림캐슬 주식 상황을 확인했지만, 놀랍게도 주가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백성호와 이철민이 손을 잡고 여론을 막아보려 했지만, 제국 빌딩에서 생중계된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기사 대부분은 사나가 홍보 모델과 드라마, 예능에서 퇴출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심지어 국제적인 유명 브랜드들마저 계약 위반을 빌미로 사나에게 터무니없는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게다가 사나와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과 동료들이 하나둘씩 사나의 인성을 폭로하는 글을 올리면서 여론은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채림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들을 확인하며 입가에 냉소를 띄웠다.‘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그랬나. 얼마나 최악이었으면 편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채림은 집 대신 회사로 향해 향수 라인을 담당하는 동료들과 신제품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가 끝난 후, 폰을 확인해 보니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사나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채림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려 했지만, 마침 또다시 사나의 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채림은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전화를 받았다.[언니.]전화 건너편에서 사나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하.”채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빌어 봐.”[그래, 내가 이렇게 빌게.]사나는 당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교통사고를 꾸며 내 다리를 망가뜨리고, 가짜 약을 복용하게 해 회복하지 못하게 하고, 내 약혼자를 꼬셔 2년 동안이나 나를 바보 취급한 건 너야. 난 오히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채림은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그러자 한참 뒤 건너편에서 사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우리 자매잖아...]“
다음 날 저녁, 사나는 짙은 화장으로 창백한 얼굴을 가리고 갖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섹시한 치마를 골라 입고는 요트에 올라탔다.나영에게 부탁해 알아본 바로, 오경수가 H시에 도착하자마자 H시에서 내로라하는 사업가들이 그를 초대해, 특별히 바다 위에서 화려한 요트파티를 열었다고 한다.이번 기회를 사나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사나는 파티에 참석한 아가씨처럼 치장하고 인파 속에 숨어들어 오경수를 찾았다.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오경수도 이제는 반쯤 취한 상태였다. 주위에 예쁜 아가씨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싫증 난 모습이었다.사나는 클레오파트라 가면으로 얼굴 반쪽을 가리고 흰색 지팡이를 든 채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게다가 일부러 보란 듯이 오경수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그 덕에 오경수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오경수는 옆에 있는 아가씨들을 밀치고 사나에게 걸어왔다. 하지만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려 할 때, 사나는 쏙 빠져나갔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고 나니 오경수는 사나에게 완전히 홀려 버렸다.사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저 이제 가봐야 해요.”오경수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사나를 뒤쫓았다.“이봐요, 아가씨. 원하는 게 있으면 다 줄 수 있어요. 나랑 함께 가요. 내가 로맨틱한 밤을 약속할게요.”“저는 인연을 따져요.”사나는 빨간 입술을 말아 올리며 싱긋 미소를 날렸다.“인연?”오경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만약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동의할게요.”사나는 간드러지게 돌아서며 한마디를 남겼다.“제 이름 기억해 줘요. 전 백채림이에요.”‘백채림?’요트의 고급 객실 안,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들린 이름에, 안에 있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 자신을 백채림이라고 소개하는 여자는 지팡이를 짚고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절대 백채림이 아니라는 걸 남자는 단번에 알아차렸다.휠체어 뒤에 서 있던 원강현은 자기 대표님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대표님은 오늘 요트에서 사업 얘기를 나누려고 사람
그날 저녁 출발 직전 채림은 의자 옆에 놓인 지팡이를 보며 약 2초간 망설였다. 그러다가 끝내 지팡이를 챙기지 않았다.이제 왼발에도 어느 정도 힘이 실린다. 물론 그동안 지팡이에 너무 의지해 지팡이 없이 걷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오늘은 BM 그룹을 대표해 파티에 참석하기에, 이제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새 출발 할 때도 됐다.채림은 지수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가는 길에 채림은 만능 소식통인 지수에게 물었다.“이원후가 백사나를 입원시켰어. 혹시 아이는 어떻게 됐어?”“살아 있을 리가 있나?”지수는 혀를 끌끌 차며 운전했다.“이원후가 때리지 않았어도 백사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거야.”고개를 돌린 지수는 채림의 청초한 얼굴을 흘긋 보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설마, 아니지? 너 지금 그 순진한 척하는 불여우 동정하는 거야? 내가 들은 바로는 백사나 그 계집애가 입원하는 동안에도 가만있지 않았대. 어제는 퇴원하자마자 요트파티에 참석했고.”채림은 고개를 저었다.“난 그저 아이가 불쌍한 것뿐이야. 부모 잘못 만나서.”...오경수가 이번 파티의 주인이었지만 파티가 시작되고 한동안은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채림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파티 홀 분위기는 약간 어수선했다.그러다가 채림이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지수가 그녀를 잡았다.“채림아, 가지 마!”“왜?”“오경수가 술주정 하며 여기저기 너를 찾고 있대.”지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채림은 그 말에 안을 흘긋거리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나를 찾는다고? 난 아직 오경수를 만난적도 없는데?”“응.”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히 말하면 백채림이 누구인지 계속 묻고 다녀. 왠지 수상해.”채림은 입을 오므리고 안쪽을 바라봤다. 비틀거리며 점점 가까이 걸어오던 오경수는 지나가는 여자마다 붙잡아 세우고 물어댔다.“네가 백채림이야? 어?”“나랑 좋은 밤 보내기로 했으면서.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난다고 했잖아.”“백채림! 당장 나와! 왜 숨는 건데?”채림은 너무
오경수는 채림 옆에 찰싹 붙어 굶주린 늙은 여우처럼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물론 채림의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빼어난 미모를 보니 이 자리에서 당장 그녀를 안고 싶었다.“오 대표님, 오늘 향수 개발 협업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BM 그룹 기획안은 확인해 보셨나요?”채림은 저한테로 뻗어오는 피둥피둥한 손을 가볍게 피하며 물었다.“어?”오경수는 큰 손을 채림 앞에 대고 휘휘 저었다.“분위기 깨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약속이나 지켜요. 자, 나랑 같이 올라갑시다.”“오 대표님, 초대장에 분명 협업 건으로 만나자고 적었던데요.”채림은 다시 강조했다.오경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협업은 무슨! 내가 다 조사해봤다고. 백씨 가문도 이제는 딸 팔아 권력자에게 빌붙고 있던데. 오늘저녁 나를 만족하게 하면,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주지!”“하.”채림은 냉소를 흘렸다. ‘협업을 하자고 했더니 잠자리를 가지자고?’“뜻이 다르다면 더 얘기할 것도 없겠네요.”채림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긴 오경수는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확 구겼다.“협업? 좋아. 그러면 저 무대에 올라가 스트립쇼를 하던가! 어릴 때 발레를 배웠다고 들었는데, 그럼 스트립쇼는 껌이겠지?”주위에서 갑자기 경멸 섞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해 봐요!”“스트립쇼가 뭐 어때서? 그게 어렵나? 나 기분 좋게 하면 협업은 물론이고 BM 그룹 향수 사업에 투자도 해주지!”오경수는 사람들의 호응에 더 신이 나서 막 나갔다.채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오 대표님, 지금 찾으시는 사람이 백채림이 확실해요?”오경수가 살짝 의아해하자 채림은 말을 이었다.“그럼 백채림이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요? 지팡이를 짚고 있는.”오경수가 찬성하는 듯하자 채림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백 안에 손을 넣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이윽고 갑자기 오른발을 들어 오경수를 퍽 걷어찼
지후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채림은 그의 허벅지 사이에 엎드려 있었다. 부딪히는 충격으로 휠체어는 뒤로 기울어졌고, 두 사람의 무게는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강현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강현은 감히 눈 뜨고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지후와 채원이 아주 이상야릇한 자세로 있었으니까. 이걸 더 봤다가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채림은 자기가 부딪힌 사람이 지후라는 걸 깨닫고 그의 다리를 짚으며 휠체어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뒤에서 오경수 경호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서!”“어딜 도망가!”때마침 지후의 경호원 신우현이 앞에 막아섰다.“뒤에 문 대표님이 계신데, 감히 어딜 넘어오려고!”경호원들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신우현 뒤쪽을 살폈다. 그랬더니 지후가 외투를 벗어 자기 다리 사이에 엎드려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세를 본 경호원들은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역시 문 대표님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 흥미가 동하면 어디서든 상관하지 않는다니. 경호원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이해했다. 문지후는 이런 짓을 해도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을 걸 아니까.그때 오경수도 가까스로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부하직원이 얼른 상황을 설명하자 이글이글 불타고 있던 오경수의 눈은 살짝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 문지후와 웬 여자의 옆모습을 보더니 이내 태도가 돌변했다.“문 대표님 바쁘신 거 안 보여? 당장 물러나! 문 대표님 흥 깨지 말고!”말을 마친 오경수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또 절뚝절뚝 돌아갔다.그제야 채림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지후의 다리 사이에서 일어섰다.강현은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채임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지금 여기서 무사히 나가려면 지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채림도 알고 있었다.어색한 분위기가 한참 이어지더니 엘리베이터가 겨우 도착했다.지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서 물었다.“결혼신고서를 받았습니까?”“네.”“문제 있던가요?”지후는 말하면서
“말해요.”지후의 말투에 약간 짜증이 섞여 있었다.“파티가 끝나기 전에 누군가 오경수 회사를 인수했대요. 기존 직원은 그대로 두고 오경수만 쫓아냈다던데, 문 대표님은 혹시 알고 계셨어요?”채림은 넌지시 물으며 지후의 표정을 살폈다.다만 지후의 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문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BM 그룹이 지금 향수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산 라인 파트너를 찾고 있거든요. 그래서 누가 몰래 오경수 공장을 인수했는지 알고 싶어요.”채림은 다시 지후를 떠봤다.지후는 그제야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채림을 바라봤다.“BM 그룹은 이런 것도 직접 조사하지 못하나 봐요? 난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만한 힘이 없어요.”“...”채림은 입을 오므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다른 주제를 꺼냈다.“문 대표님은 혹시 향수 어떤 브랜드 사용하세요?”지후는 채림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에 드리운 짜증은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하지만 채림은 지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대표님 몸에서 용연향, 복수감 그리고 설송 냄새가 나는데, 향수는 비싸다고 다 좋은 게 아니거든요. 본인한테 어울리는 게 중요해요.”채림의 정확한 분석에 지후는 마침내 흥미가 동했다.“지금 이 향수가 나한테 안 어울린다는 말인가요?”채림은 가타부타 말없이 설명을 이어갔다.“용연향은 고급스럽고 유명해서 가격도 거의 금값에 맞먹어요. 복수감과 함께 사용하면 남자의 정력 향상을 도와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대표님께는 어울리지 않아요.”‘내가 성욕이 넘쳐난다는 건가?’“대표님은 몸이 이러니 정신 안정에 좋고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향이 어울려요. 검은색 바질, 제라늄을 주요 향료로 사용한 향수는 비교적 따뜻한 느낌을 주거든요. 특히 상처 입은 몸과 마음에 효과가 뛰어나요.”채림은 지식을 보급했다.채림이 향을 맡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지후는 알고 있다. 지난번 솔로 파티에서 이미 체험했으니까.다만...지후는 가볍게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양아치들입니다.”사립탐정은 간단하게 요약했다.“하지만 백채림 씨 외모나 재산을 보고 노리는 건 아닌 듯합니다. 경매장에서 손쓰는 게 좋은 선택도 아니고요.”“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채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저 사람들의 배후가 누군지 아직 모르니, 당분간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요. 상대가 오히려 경계할 지도 모르니까요. 몰래 저 둘을 감시하면 돼요.”“그런데 저놈들 위치가 하필 백채림 씨와 인접해 있어, 만일의 경우는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사립탐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그럴 거예요.”채림은 확신했다.“저들을 지시한 사람은 내가 망신당하기를 원하니, 경매장에서 악랄한 수법은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암호부터 정해요. 이따 내가 모자를 벗으면 그때 기회를 봐서 움직여요.”“네.”사립탐정은 짤막하게 답하고 뒤돌아서더니 자리에 들어서는 사람들 속에 재빨리 숨었다.채림도 얼른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뒤, 두 남자도 잇따라 그녀 곁에 앉았다.경매가 시작되자마자 공개된 처음 몇 경매품을 채림은 그냥 지나쳤다.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수중에 있는 가이드북만 살폈다. 그때, 경매사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다음 경매품입니다.”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대형 스크린에 아름다운 디자인의 왕관이 펼쳐졌다.이윽고 현장 스태프가 경매품을 무대 위로 가져왔다. 오래된 왕관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유백색 진주들이 박혀 있어,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냈다.“여러분이 기대하셨던 왕관입니다. 왕자와 왕비의 50년 넘는 사랑을 증명한 물건이죠. 게스트분들 모두 이 왕관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거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열정적으로 경매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진주 왕관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경매사가 무대 위에서 나무망치를 두드렸다.“경매가 4억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번호판을 들 때마다 2,000만 원씩 올라갑니다.”경매사의 목소리는
“사나야, 그동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편히 몸조리해. 오경수의 화가 가라앉으면 이 일도 지나갈 거야.”진옥경도 딸을 위로했다.“우선 마음을 가라앉혀. 너도 다시 백씨 가문 아가씨 신분을 되찾아야지. 나와 네 아버지도 퇴로를 찾고, 새로운 백을 찾으면, 더 이상 백채림 모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정말이에요?”그 말을 들은 사나의 눈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당연하지, 엄마 아빠가 나서는데, 뭔들 못 하겠어?”진옥경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한가족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그때, 병실 티비에서 갑자기 BM 그룹 의료팀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다.그런데 맨 처음에 BM 그룹을 손가락질해대던 국면은 채림이 나타난 뒤 180도로 뒤바뀌었다. 백승호 부부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와 대책을 논의했다.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BM 그룹에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DL 그룹에 아부하려고 생각했던 계략도 채림한테 완전히 간파 당할 줄은 몰랐다. 물론 CS 바이오 일은 아직 진옥경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DL 그룹과 계속 손을 잡는 건 이미 물 건너 갔다. 때문에 백승호는 DL 그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계략을 생각해야 했다.병상에 누워 있던 사나는 뉴스를 보면서 리모컨을 들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채림이 대중 앞에서 우쭐대는 꼴을 눈으로 직접 보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더욱이 인터넷에는 백채림과 BM 그룹 칭찬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대중들은 백채림이 BM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마저 예쁜 데다 마음씨까지 착하고, 지혜롭기까지 하다며, H시가 이런 훌륭한 여성 후계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나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얼른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 마침 지금 방송되고 있는 현지 뉴스를 보게 되었다. 오늘 H시 전시회장에서 마침 그 진주 왕관을 경매품으로 내놓았다.채림이 그 왕관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던 사나는 머리를 굴
추종현은 격분한 듯 말하고는 뒤돌아 민해란에게 말했다.“민 회장님, 가시죠.”“교수님, 먼저 가시면 제가 뒤따르겠습니다.”민해란은 경호원들에게 눈치를 주어 추종현을 모셔가게 하고는 대뜸 돌아서서 채림에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던 건 또 뭔 소리고? 너 어디 다쳤어? 또 엄마한테 뭐 속이는 거 없어?”“엄마.”채림은 을른 웃으며 어머니를 달랬다.“봐요,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확실히 말해.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민해란은 채림을 차에 태웠다. 차가 출발한 뒤 채림은 의료팀이 산지에서 겪었던 일을 대충 말해주었다.물론 산사태가 벌어진 상황을 조금 약화시켰지만, 민해란은 여전히 걱정되어 몇 번이고 캐묻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임 실장 얘기를 들어보니 네가 직접 산지에 약을 날랐다던데. 산길이 위험한 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위험할 줄은...”민해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네가 총명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추 교수님을 그냥 빼앗겼을 거야. 우리 채림이 많이 컸네.”채림은 활짝 웃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러니까 엄마를 도와 부담을 덜어주는 건 당연하잖아요.”“이미 충분해.”민해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미스 글로벌 파티에서 우승을 따낸 뒤로, BM 그룹이 해외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몰라. 최근에 엄마가 사업을 두 건 추진했는데, 상대가 글쎄 네 덕분에 BM 그룹을 알았대.”“그래요?”채림은 눈웃음을 쳤다.“그런데 명성이 높을수록 시기와 공격을 받을 거야.”민해란은 소중한 듯 제 딸의 손을 꼭 잡았다.“네가 BM 그룹에 가져다주는 이익이 많을수록 질투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니까 조심해.”“걱정하지 마요. 엄마 딸 총명해요.”채림은 턱을 살짝 쳐들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약혼식에서 그런 해프닝이 벌어지고 난 뒤, 채림은 이원후를 떠나고 백사나의 얼굴을 진짜 얼굴을 알아봤으며 다친 발도 고쳤다. 그것도 모자라 혼자서 향수
한편, 스크린 속.기자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인터뷰에 열기를 더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은 오히려 놀라우리만치 냉정했고, 심지어 뜬금없이 피식 웃었다.결국 기자는 마지 못해 산지 주민이 손에 든 약을 카메라에 담았다.약병이 점점 확대되자 티비와 컴퓨터 앞에서 생방송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하지만...약병에 적힌 생산 날짜와 마감 날짜는 아무 문제 없었다.공상에서 민해란과 추종현을 둘러싼 기자들은 본인이 잘못 봤을까 봐 안경을 밀어 올리는가 하면, 눈을 비비댔다.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도 당황한 듯 물었다.“어르신, 이 약이 혹시 BM 그룹 의료팀이 나눠준 건가요?”어르신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이런 약을 얻겠어요?”“여기에 외부인이 전혀 없는데, 누가 우리를 위해 병을 고쳐주겠어요?”기자는 살짝 당황했다. 사실 그들은 DL 그룹 제보를 받고 BM 그룹이 유통 기한이 지난 약물을 사용한다는 소식을 취재하러 나왔다. 그런데 취재 도중 이런 반전이 숨어 있어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다른 매체 기자가 나서서 말했다.“저희 측에서 방금 현지에 남아 있는 BM 그룹 의료팀 담당자와 연락이 닿아 그동안 의료팀이 현지 주민을 위해 진찰하고 처방한 영상과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저와 동료들이 비교해본 결과, BM 그룹이 이번에 주민들에게 나눠준 약품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유통기한 마감일은 2년 뒤였습니다.”“권 박사님, 한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기자는 마이크를 권경민에게 건넸다.그러자 경민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산지 주민들이 방금 두 가지 고혈압약을 드시고 기침을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셨는데, 이건 정상 반응입니다. 캡토프릴을 복용 시 나타나는 부작용이거든요. 현재 의학적으로 이런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가끔 하는 기침은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H시 국제공항.민해란이 추종현을 모시고 공항을 나올 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지 모를 기자들이 갑자기 몰려와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추 교수님, 4년 만에 귀국하시는데 BM 그룹 회장님과 함께 귀국하신 건, 앞으로 BM 그룹을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까?”“네.”민해란이 추종현 대신 대답했다.“추 교수님은 BM 그룹 약물 연구팀 고문을 맡아 BM 그룹의 발전을 도울 겁니다.”“일전에 DL 그룹도 교수님께 도움을 청했다고 들었는데, 왜 결국 BM 그룹을 선택했나요?”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추종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BM 그룹의 발전 계획에 마음이 동했습니다. 저와 BM 그룹의 이념 역시 일치하고요.”“혹시 DL 그룹과는 이념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기자들은 말끝마다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이에 민해란이 나서서 추종현을 도왔다.“죄송하지만, 추 교수님은 말주변이 뛰어나지 않습니다.”경호원더러 길을 트라는 눈짓을 보낸 민해란은 추종현을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그때 변형빈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 앞에 막아섰다. 이윽고 그는 추종현의 옆에 다가가 말했다.“추 교수님, BM 그룹의 위선적인 모습에 속으면 안 됩니다. 저희 DL 그룹은 비록 노이즈 마케팅에 능하지 않지만 절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변 대표, 그게 무슨 말이죠?”민해란은 불쾌한 듯 따져 물었다.“BM 그룹 의료팀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설마 몰라서 그래요?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변형빈은 자신만만한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기자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한 기자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민해란을 바라보더니 결국 추종현에게 따져 물었다.“추 교수님, BM 그룹 의료팀이 가난한 산지 주민들에게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을 사용한 소식이 터졌습니다. 본인 이익을 위해 남의 목숨을 마음대로 짓밟은 BM 그룹이 추구하는 이념이 정녕 추 교수님 이념과 일치한가요?”“뭐요?”추종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채림은 희고도 깨끗한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제야 채림은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이곳 의료 시설은 그 시골 마을 조건으로 갖출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살짝 움직여보니 사지가 쑤시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옆 병실에 앉아 있던 경민은 그 인기척을 듣고 달려오더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이제 정신이 들어요? 어때요? 몸은 좀 괜찮아요?”채림은 제 느낌을 대충 말했다. 그러자 경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문제없네요. 머리가 어지러운 건 너무 오래 자고 오래 굶어서 그런 거예요.”“우리 안 죽었어요?”채림이 다급히 물었다.“당연하죠. 설마 지금 우리가 천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경민은 농담조로 말하며 피식 웃었다.“여기 천당이 아니라 병원이에요.”“그럼 문... 제 둘째 삼촌은요?”채림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그분은 어제 가셨어요.”“안 다쳤어요?”“채림 씨와 비슷하게 가벼운 부상이에요. 그분은 더 빨리 회복했어요.”경민이 말했다.채림은 그제야 한시름 놓더니 한참 생각고는 다시 물었다.“그때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어요? 기억아 하나도 없어서 이미 죽은 줄 알았어요.”“말하자면 참 운이 따라줬어요.”경민은 감개했다.“사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우리를 구해준 마을 주민이 말해줬어요. 저희가 도망칠 때 마침 큰 구덩이를 지났었잖아요, 먼저 굴러 떨어진 바위가 그 구덩이에 들어가면서 나중에 멈춰서 뒤에서 굴러 내린 돌멩이를 막아줬대요. 만약 그런 우연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바위에 깔려 죽었을 거예요.”“그럼 다친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걱정 섞인 채림의 물음에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채림 씨 둘째 삼촌의 부하 두 명이 좀 심하게 다쳤어요. 다리가 골절됐거든요. 그것도 그나마 다행이에요. 채림 씨 둘째 삼촌이 이미 그 두 분을 큰 병원으로 옮겼어요.”“아.”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시름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우리가 입원해 있으면 의료팀은 일을 어떻게 해요?”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채림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지후와 강현은 먼저 깨어나 채림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채림은 그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기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얼마 걷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맨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경민이었고, 그의 뒤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백 대표님!”“여긴 어떻게 왔어요?”채림은 사람들과 가까워진 뒤 물었다.“이틀 동안 돌아오지 않아 현지 주민들이 찾아왔었어요. 하루 전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이 일대는 산사태가 쉽게 일어나는 곳이라 지난 2년간 수차례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요. 그 말에 다들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경민의 설명에 채림은 싱긋 웃으며 그와 그 뒤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고마워요.”“이분은 누구세요?”경민은 채림 옆에 서 있는 지후를 보며 물었다. 그저께 소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카리스마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미처 누구인지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이 분은...”채림은 고개를 들어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채림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경민은 아무래도 연예인 덕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니, 당연히 윤재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채림 역시 지후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한참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제 둘째 삼촌이에요.”“아, 둘째 삼촌. 안녕하세요.”지후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팔로 허리를 짚은 채 한참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등 뒤에 서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실수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연말 보너스라도 깎일까 봐 참느라 애를 먹었다.“우선 나가서 얘기해요.”채림은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깼다.경민도 뒤에 있던 현지 주민들에게 말했다.“그럼 저희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그들은 현지 주민들을 따라 푹 꺼진 땅과 흔들리지는 출렁다리를 지나 옆 마을로 향했다.하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마침 도착한 이춘덕은 명훈네 집 마당에 들어와 소리쳤다.“이게 다 뭐 하는 겁니까? 백채림 씨는 우리 마을 은인의 따님입니다. 자선 활동하러 이곳에 온 분한테 무슨 무례입니까!”“그런데 저 여자가 명훈의 새색시를 풀어줬어요.”성훈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백 대표님이 없었더라면 새색시를 살 돈이나 있었겠어요?”이춘덕의 말은 힘이 있었다.현장 사람들은 모두 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니 이장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낫과 호미를 들고 달려들던 사람들은 손에 든 도구를 모두 내려놨다.“사람이 도망쳤으면 쫓아가서 찾아와야지, 여기서 왜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요? 가만히 손 놓고 있다고 사람이 돌아오겠어요?”이춘덕이 말했다.“이장님 말이 맞아요.”성훈도 어느새 진정했는지 얼른 이웃을 불러 손전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이장님, 고마워요.”채림은 앞으로 다가가 진심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들 좋은 일 하는 건데요.”이춘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요. 저 사람들이 이따가 사람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또 시비를 걸 거예요.”채림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지후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밖에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얼른 두 사람을 엄호하며 산계 마을을 떠났다.이제 막 마을을 빠져나왔을 때, 채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후에게 말했다.“둘째 삼촌,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 혹시 삼촌 부하더러 사람을 끝까지 도와주라고 할 수 있어요?”“또 뭘 하려는 겁니까?”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채림은 얼른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새색시를 다시 찾아오는 건 불가능할 거고, 그 집안 사람들도 우리를 찾지 못하면 결국 또 인신매매를 할 거예요. 이런 악랄한 집단은 뿌리 채 뽑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요.”“우리 문씨 가문에서 아주 부처님을 들였군요.”지후는 불호령을 내리더니 손을 저으며 이 일을 강현에게 맡겼다.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이어서 그 명령을 다른 경호원들에게 전달한 뒤, 조용히 채림
“음, 힘이 없다면 내가 도와주지.”부인은 인내심 있게 말하면서 채림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채림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상대가 저를 마음대로 다루도록 가만히 있었다.지금은 그저 옷장 안에 있는 사람의 인성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알아서 눈을 감았으리라고...옷을 갈아입은 채림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이미 발그르슴해졌다.부인은 채림을 거울 앞에 앉히더니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또 처음 보네. 명훈이 물론 바보라지만, 바보에게도 복은 있나 보네!”여자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낡은 싸구려 화장품을 채림의 얼굴에 펴 발랐다. 파우더를 바른 뒤 블러셔를 바르고, 풀어진 채림의 머리를 얹더니 싸구려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모양을 고정했다. 결국 부인의 손길을 거친 채림은 빛 바랜 벽화 속 도자기 인형처럼 변했다.약 30분 뒤,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화장품 상자를 닫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신부 준비 끝났어. 명훈아, 첫날밤 보내야지.”바깥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던 명훈을 끌고 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바보 같은 웃음을 짓던 명훈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저 여자가 네 새색시야. 얼른 봐. 예쁘지?”부인이 조롱하듯 물었다.“예뻐요! 예뻐요!”명훈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채림을 덮쳤다.“어머머, 우리는 이만 가자고.”부인은 주위 구경꾼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명훈은 방 안에 있던 남자의 발에 걷어차여 멀리 내동댕이쳐졌다.“내 색시! 새색시!”명훈은 끊임없이 반복하며 채림을 덮치려고 했다.지후는 명훈을 또다시 발로 찼다. 명훈은 지후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후는 얼른 채림을 제 뒤에 보호했다.그때 문밖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듣고 다시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역시 얌전하게 있지 않을 줄 알았어! 약 더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