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채림은 그의 허벅지 사이에 엎드려 있었다. 부딪히는 충격으로 휠체어는 뒤로 기울어졌고, 두 사람의 무게는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강현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강현은 감히 눈 뜨고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지후와 채원이 아주 이상야릇한 자세로 있었으니까. 이걸 더 봤다가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채림은 자기가 부딪힌 사람이 지후라는 걸 깨닫고 그의 다리를 짚으며 휠체어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뒤에서 오경수 경호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서!”“어딜 도망가!”때마침 지후의 경호원 신우현이 앞에 막아섰다.“뒤에 문 대표님이 계신데, 감히 어딜 넘어오려고!”경호원들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신우현 뒤쪽을 살폈다. 그랬더니 지후가 외투를 벗어 자기 다리 사이에 엎드려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세를 본 경호원들은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역시 문 대표님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 흥미가 동하면 어디서든 상관하지 않는다니. 경호원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이해했다. 문지후는 이런 짓을 해도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을 걸 아니까.그때 오경수도 가까스로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부하직원이 얼른 상황을 설명하자 이글이글 불타고 있던 오경수의 눈은 살짝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 문지후와 웬 여자의 옆모습을 보더니 이내 태도가 돌변했다.“문 대표님 바쁘신 거 안 보여? 당장 물러나! 문 대표님 흥 깨지 말고!”말을 마친 오경수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또 절뚝절뚝 돌아갔다.그제야 채림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지후의 다리 사이에서 일어섰다.강현은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채임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지금 여기서 무사히 나가려면 지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채림도 알고 있었다.어색한 분위기가 한참 이어지더니 엘리베이터가 겨우 도착했다.지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서 물었다.“결혼신고서를 받았습니까?”“네.”“문제 있던가요?”지후는 말하면서
“말해요.”지후의 말투에 약간 짜증이 섞여 있었다.“파티가 끝나기 전에 누군가 오경수 회사를 인수했대요. 기존 직원은 그대로 두고 오경수만 쫓아냈다던데, 문 대표님은 혹시 알고 계셨어요?”채림은 넌지시 물으며 지후의 표정을 살폈다.다만 지후의 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문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BM 그룹이 지금 향수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산 라인 파트너를 찾고 있거든요. 그래서 누가 몰래 오경수 공장을 인수했는지 알고 싶어요.”채림은 다시 지후를 떠봤다.지후는 그제야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채림을 바라봤다.“BM 그룹은 이런 것도 직접 조사하지 못하나 봐요? 난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만한 힘이 없어요.”“...”채림은 입을 오므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다른 주제를 꺼냈다.“문 대표님은 혹시 향수 어떤 브랜드 사용하세요?”지후는 채림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에 드리운 짜증은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하지만 채림은 지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대표님 몸에서 용연향, 복수감 그리고 설송 냄새가 나는데, 향수는 비싸다고 다 좋은 게 아니거든요. 본인한테 어울리는 게 중요해요.”채림의 정확한 분석에 지후는 마침내 흥미가 동했다.“지금 이 향수가 나한테 안 어울린다는 말인가요?”채림은 가타부타 말없이 설명을 이어갔다.“용연향은 고급스럽고 유명해서 가격도 거의 금값에 맞먹어요. 복수감과 함께 사용하면 남자의 정력 향상을 도와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대표님께는 어울리지 않아요.”‘내가 성욕이 넘쳐난다는 건가?’“대표님은 몸이 이러니 정신 안정에 좋고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향이 어울려요. 검은색 바질, 제라늄을 주요 향료로 사용한 향수는 비교적 따뜻한 느낌을 주거든요. 특히 상처 입은 몸과 마음에 효과가 뛰어나요.”채림은 지식을 보급했다.채림이 향을 맡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지후는 알고 있다. 지난번 솔로 파티에서 이미 체험했으니까.다만...지후는 가볍게
“어, 둘째 삼촌.”채림은 어색하게 부르고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가운을 여몄다. 외간 남자 앞에서 노출이라도 하면 안 되니까.지후는 손에 든 태블릿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채림을 바라봤다.‘날 둘째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 되게 좋아하네? 그래, 마음대로 하라지...’지후와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있는 여자는 머리가 아직 젖어 있었고, 얼굴은 민낯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흰 다리가 유난히 눈을 끌었는데, 낮에 화장을 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예뻤다. 비록 저를 도둑놈 보듯 경계하고 있었지만...지후는 목울대를 움직더니 결국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휠체어를 돌렸다. 그리고 손으로 뭘 했는지 등 뒤에서 휙, 하는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채림이 고래를 돌려 봤더니, 등 뒤에 있던 벽이 문처럼 활짝 열렸다.“이건...”채림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하지만 지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휠체어를 조종하며 문 뒤로 사라졌다. 곧이어 문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다시 사라졌다.채림은 순간 당황한 듯 입을 반쯤 벌린 채 얼어붙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서둘러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옆방을 확인한 뒤, 마침 지나가던 김선주를 붙잡고 물었다.“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사모님, 여긴 서재입니다.”긴선주는 예를 갖춰 대답했다.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야? 윤재 씨 서재로 갈 거면 서재 정문으로 들어갈 것이지.’침실로 들어가 제 침대에 누운 채림은 이따금씩 아까 그 비밀문이 있던 벽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으로 고민했다.‘만약 한밤중에 문지후가 저 문을 넘어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떡하지?’잠시 망설이던 채림은 끝내 몸을 일으며 무거운 의자 하나를 잡아 끌었다. 그것으로 문이라도 막아 둘 생각이었다.‘그런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조심할 필요 있나?’채림은 결국 다시 의자를 원래 자리로 옮기고 침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때, 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채림아, 집에는 안전하게 도착했
채림은 컴퓨터를 켜고 향수 연구개발 기획안을 수정했다. 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너무 피곤해 소파에 엎드려 그대로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채림이 깨어나자 김선주가 와서 문 대표님은 아침을 한 뒤 출근하셨다고 보고했다.얼른 세수를 하고 주식시장을 확인한 채림은 새파랗게 변한 드림캐슬 주식 상황을 보더니 만족스럽게 컴퓨터를 닫았다.채림은 이미 이원후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원후는 그걸 상관할 겨를도 없이 능청맞게 달려들어 채림을 어르고 달랬다. 전전긍긍하는 원후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채림은 여유롭게 향수 연구에 몰두했다.BM 그룹에 출근한 채림은 임승철더러 임원 회의를 소집하게 했고, 어젯밤 수정한 기획안에 대해 상의했다.하지만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호가 사나와 함께 나타났다.불쌍해 보이려고 일부러 투명 메이크업을 하고 온 사나는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허리 숙여 사과하며 흐느껴 울었다.“오늘 여러분께 사과드리러 왔어요. 제 사생활 때문에 회사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보네.”채림의 냉정한 목소리가 사나의 말을 끊었다.“넌 BM 그룹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리고, 정말 BM 그룹에 폐 끼치지 않으려면 오늘 같은 자리에 나오면 안 되지.”말을 마친 채림은 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소문 퍼뜨려. 백사나가 지금 BM 그룹에 있어.][오케이!]지수는 바로 답장했다.“언니...”한편, 사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불쌍한 표정으로 채림을 바라봤다.“잘못했어. 내가 정말 미안해. 나를 욕해도 되고 때려도 돼. 난 이미 내가 저지른 짓에 대가를 지불했어. 그러니까 내가 과오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될 수 있게 기회를 줘. 이러지 마, 응?”“네 말 대로라면 사람을 죽이고 묘지 앞에 가서 사과하면 돼?”채림은 끝까지 사나를 몰아세웠다.그때 백성호가 눈치를 주자 누군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대표님, 사나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봐온 애라서 천성
“당신들 누구야?”백성호는 사나 앞에 막아서며 딸을 보호하려 했지만, 경호원들에게 팔이 꺾여 꽥꽥 소리 질렀다.“우리는 오 대표님 사람들이야. 당신 딸도 알걸.”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이 험악하게 말했다.“오경수?”백성호와 현장에 있던 BM 그룹 이사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오경수는 최근 BM 그룹 직원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는 화제의 인물이다. 전에 사나가 오경수와 안다는 말은 들은 적 없었는데. 만약 서로 알고 있었다면 그동안 파티 초대장을 얻으려고 그렇게 진땀 뺄 필요도 없었을 거다.다만 상황을 아는 사나만 잔뜩 겁을 먹은 채 백성호 뒤에 숨어들었다.한 경호원이 백성호를 제압하자 뒤에 있던 경호원이 나서서 사나를 문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회의실 안 이사진들과 회의실 밖에서 구경하는 BM 그룹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백사나, 이 계집애가 클럽 아가씨인 척 파티장에 숨어들어 오 대표님을 꼬셨어. 나중에는 오 대표님을 공격까지 하고. 아주 천하고 악독한 계집애야. 오 대표님이 이 계집애를 꼭 잡아오라고 했으니,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가야겠어!”말을 마친 경호원은 사나를 밖으로 끌고 갔다. 뒤에 있던 누군가가 나서서 막으려 했지만 오경수가 고용한 경호원들은 하나같이 멀대 같고 건장해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백성호가 그들을 뒤쫓아가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나한테 무슨 짓 하려고 그래?”“오 대표님이 이 여자더러 10배로 갚으라고 했거든.”백성호는 경호원들에게 막혀 앞으로 가지 못하다가 끝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사나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려 갔다가 아래층 차 안에 던져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누가 가서 사나 좀 구해주게. 오경수가 어떤 사람인데, 사나가 끌려가면 어떤 꼴을 당할 줄 알고?”백성호는 당황한 나머지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 BM 그룹 임원과 주주들에게 부탁했다.그때 채림이 나서서 느긋하게 설득했다.“셋째 삼촌,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사나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증거를 잡아야 우리도 가서 사람을
채림은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피팅룸에 들어갔다. 그녀는 이름이 적힌 드레스와 신발을 들고 안팎을 샅샅이 확인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게다가 옷을 입었는데도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아 채림은 결국 드레스를 입은 채로 문을 나섰다.채림이 드레스를 착용한 모습을 직접 확인한 뒤에야, 구석에 있던 두 여자는 비로소 안심한 듯 귓속말을 해댔다.“드레스에 손을 댔다는 거, 설마 그저 어깨끈만 느슨하게 해둔 건 아니지?”“내가 그렇게 저급한 실수를 저지르겠어?”다른 한 여자가 우쭐대며 피식 웃었다.“신발 밑창에 못을 박아뒀어.”“못? 그러면 금방 알아차리지 않을까? 파티장에 도착하기 전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당연히 단단하게 박아뒀지. 내가 보증하는데 분명 서서히 고통이 느껴질 거야. 춤 출 때쯤이면 못이 밑창을 뚫고 올라올 거고... 백채림이 그때 가서도 저렇게 우쭐댈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여자는 일이 뜻대로 됐다고 좋아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두 여자의 음흉한 계략을 들은 지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방금 전 위층에서 보았던 가냘픈 여자의 뒷모습이 떠오르자, 지후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윤재는 도착했어?”지후가 물었다.윤재는 지금까지 MS 그룹을 대표해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늘 꺼려왔다. 그러나 올해는 지후가 특별히 부탁하며 시간을 내어 반드시 참석하라고 당부했다.등 뒤에 있던 강현이 다급히 대답했다.“윤재 도련님은 이미 도착해서 피팅룸에 계십니다.”“가 보지.”“대표님, 국제 금융 협력을 추진하러 가려면, 지금 공항에 가도 시간이 빠듯하지 않을까요?”강현은 의아한 듯 물었다. 대표님이 방금 어르신을 뵙고 오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해 바로 차를 대기시키라고 했으면서... 왜 또 윤재 도련님까지 만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다시 한번 말할까?”콧소리가 섞인 지후의 목소리는 불쾌함이 역력했다.겁먹은 강현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지후를 데리고 윤재를 찾아 나섰다
“그레이스 씨, 백채림 씨는 초대를 받고 온 레이디입니다. 함부로...”스태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왜? 안돼? 이 여자가 누군데? 전에 본 적도 없는데, 이런 여자 하나 해결 못 해? 해결하지 않으면 난 이대로 돌아갈 거야. 그러면 이번 미스 글로벌 파티도 영혼을 잃는다는 거 알지?”그레이스는 발끈해서 소리쳤다.“...”이제 곧 있으면 파티가 시작할 텐데, 결국 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자 스태프들은 채림에게 부탁했다.“백채림 씨, 정말 죄송하지만... 드레스를 바꿔 입어 주시면 안 될까요?”대기실에 걸려 있는 그레이스의 값비싼 베이지색 드레스를 본 채림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다 한참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동의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절대 이런 요구를 수락하지 않았을 거예요.”“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나 그 옷 꼭 가져야겠으니까 당장 벗어!”그레이스는 또다시 닦달했다. 그때 그녀 옆에 서 있던 집사 레이먼이 슬그머니 그레이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아가씨, 좀 적게 말하세요. 지금은 저 여자 드레스를 손에 넣는 게 중요하잖아요.”그레이스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듯했으나 레이먼의 말에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채림과 그레이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사실을 스태프들은 몰래 핸드폰에 기록했다. 그러면서 다들 은연중에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 초대를 받고 파티에 참석한 분들이지만, 그레이스는 고귀한 출신에 비해 너무 교양 없었다. 고귀한 혈통이라는 게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오히려 H시를 대표해 파티에 참석한 백채림이 아량이 넓고 이해심이 많았다.채림은 더 이상 논쟁하지 않고 그레이스의 피팅룸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이윽고 입고 있던 드레스와 신발을 벗고 그레이를 위해 준비한 드레스를 입었다. 잠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채림의 얼굴은 단번에 확 살아났다.주최측이 그레이스를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다만 그레이스가
그때, 사회자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 윤재 도련님께서 도착하셨네요. 미스 글로벌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파티장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쩍 벌어진 어깨와 좁은 골반, 멀리서도 느껴지는 강렬한 카리스마. 맞춤 제작한 고급 정장은 남자의 몸에 딱 맞아 완벽한 슈트 핏을 자랑했다.MS 그룹을 일궈 세운 문씨 가문은 국제적으로도 손꼽히는 재벌가다. 게다가 ‘대비마마’로 통하는 문씨 가문 어르신 강숙자는 더욱이 미스 글루벌 파티 주최자이자 정신적 지주다. 다만 문씨 가문은 지금껏 파티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는데, 윤재가 직접 왔으니 뭇여성들에게는 서프라이즈나 다름없었다.파티에 참석한 여성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심지어 이미 파트너를 선택한 여성들마저 제 파트너를 따돌리고 윤재에게 말을 걸었다.하지만 윤재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뒤로 하고 채림에게 걸어갔다. 이윽고 손을 내밀더니 매너 있게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백채림 씨, 저와 춤 한 곡 추실래요?”“와!”현장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적잖이 충격에 빠졌다. 윤재가 곤경에 처한 채림을 도와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MS 그룹은 H시에 세워져 점점 몸집을 키웠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게다가 국제적으로 윌리엄 가문에 대적할 수 있는 가문은 문씨 가문밖에 없다.하지만 채림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망설였다.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허공에 멈춰 있는 윤재의 손을 바라봤다. 그들도 윤재와 함께 채림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채림도 공공장소에서 윤재를 난처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의 윤재는 평소의 윤재 같지 않았다.물론 옷차림, 머리 스타일, 걸음걸이까지 모두 변함없었지만, 남자의 눈매나 눈빛, 그리고 표정까지 오히려 제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 윤재의 둘째 삼촌을 연상케 했다. 비록 문지후가 장애인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말이다.“응?”윤재는 고개를
“채림 씨, 또 만났네요.”먼저 입을 연 건 건욱이었다.그러자 그레이스가 곧이어 비아냥거렸다.“그러게. 또 만났네. 참 인연이 깊어.”채림은 입꼬리를 움찔거렸다.“인연인지 아닌지는 그쪽이 더 잘 알 텐데.”감독과 PD는 차 안에서 촬영 절차를 설명했고 채림은 스태프들과 세부 사항을 논했다. 건욱도 그 사이에 끼고 싶었으나 끼지 못해 그레이스가 옆에서 눈짓을 하는 것도 무시했다.“채림 씨, 이번에 C시 소개 멘트는 원래 채림 씨가 하기로 했는데 그레이스 씨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인문 경관의 해설은 그레시스 씨가 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그 부분은 그레이스 씨한테 나눠주세요.” PD는 살짝 난감한 듯 말했다.“소개는 저희가 이미 써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중에 경관 선택은 채림 씨가 먼저 할 거예요.”채림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먼저 선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번에 미스 글로벌 파티 주최 측에서 도시 홍보 영상을 찍는 건 순전히 공익성 활동이다. 때문에 채림은 각 지역의 인문경관과 민속 습관을 더 통속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싶은 마음이지 절대 노이즈마케팅 할 생각이 없었다.한참 뒤, 차는 어느새 C시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그레이스는 겨우 기회를 잡아 채림에게 다가갔다.“C시는 정말 좋은 곳이야. 사람들 인심은 후하고 경치는 아름답고. 네티즌들도 C시 홍보 영상에 기대가 커. 그러니 네가 여기에 촬영 온 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뭐?”채림은 헛웃음이 나왔다.“본인이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퀸이 되었다고 후원사가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인터넷에 우리의 불화설이 떠도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일부러 우리를 같은 조에 배정했고, 그 덕에 너도 C시에 오게 된 거야.”“아하.”채림은 두 손을 들어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뒤 차갑게 웃었다.“그 자신감에 박수를 보내. 하지만 한 가지 잘못 말한 게 있어.”“뭔데?”그레이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불화설이 아니라 우리는 진짜 안 맞는 거
채림은 순간 가슴이 멎는 기분이었다. 지후가 사람들 앞에서 저를 희롱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주위 사람들은 지후가 채림을 협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채림은 한마디만 듣고 고개를 푹 숙였으니까.지후의 입가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현장 스태프들을 바라볼 때 눈빛은 다시 싸늘해졌다.“어떻게 된 일이죠?”“문 대표님, 그게 사실은 제가 기획안이 별로인 것 같아... 의견을 조금 냈거든요...”지후 앞에서 미아는 순한 양이 되어 누구보다 예의를 차렸다.“지후는 차가운 눈빛을 보내더니 불만 투로 물었다.“그쪽은 누구죠?”주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삐 눈알을 굴렸다. 지후가 미나를 아예 모른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전에 미나는 분명 자기를 MS 그룹이 띄워주는 연예인이라고 소개했다. 게다가 문지후 여자 친구라는 스캔들도 터졌었고.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니...미나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못 들은 척 무시한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이번이야말로 자기를 소개할 좋은 기회였다.“문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지후는 미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얼굴로 명령했다.“기획안에 어떻게 나왔으면 그대로 촬영해요. MS 그룹 소속 연예인은 많아요. 미나 씨가 정말 독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지후는 성큼성큼 채림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따라와요.”채림은 잠깐 망설이다가 얼른 지후를 따라 나갔다.“기획안은 수정할 거 없으니 나랑 같이 집에 가요.”지후는 문을 나서자마자 말했다.“전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따로 갈게요.”“가면서 데려다줄게요.”지후는 채림에게 바짝 다가가면서 그녀의 맑은 두 눈에 질투가 드리웠는지 자세히 보려고 했다.하지만 채림은 오히려 고개를 더 숙이며 입술을 오므린 채 여전히 거절했다.“문 대표님 회사에 여자 연예인도 많을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미나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자 쪽팔렸는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아니요, 사실을 서술한 것뿐입니다.”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이번 기획안은 계약하기 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촬영 중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면 저희 측 문제는 아닌 거죠.”미나는 여우 같은 눈매를 치켜 올리며 채림을 날카롭게 째려봤다.“지금 계약서로 날 압박하겠다는 거야?”“만약 미나 씨는 계약서도 안중에 없다면, 계속 협력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채림은 상대의 협박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안 찍으면 안 찍었지!”미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내가 촬영 안 하면 당신들 일정에 차질이 생기잖아!”막무가내로 나오는 미나를 보고 유미를 포함한 기타 BM그룹 직원들은 모두 초조해 났다. 하지만 채림은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자기한테 방법이 있다고 눈빛을 보냈다.“미나 씨가 촬영 안 하면 우리 일정에만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니라 윤재 씨 일정에도 차질이 생겨요.”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윤재 선배 들먹이지 마! 나 윤재 선배님 직속 후배야. 우리 사이가 설마 스캔들을 조작해 엮인 두 사람보다 못할까?”미나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우리 회사가 계약한 상대가 윤재 씨인데, 윤재 씨를 들먹이지 않으면 누구를 들먹이겠어요?”채림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 씨와 친하다니 더 잘됐네요. 미나 씨가 대신 말 좀 전해줘요. 이따 윤재 씨 스케줄 뒤로 미뤄졌다고.”“뭐?”미나는 순간 허리를 곧게 폈다.“윤재 씨 촬영은 미나 씨 촬영 마치고 나서 시작할 거거든요. 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했으면서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윤재 씨 곧 도착해요.”채림은 고개를 숙인 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시간 다 됐네요.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미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채림이 이토록 말주변이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물러서지
채림은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H시로 돌아갔다.윤재의 1분기 광고 촬영도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채림은 사전에 윤재의 매니저먼트팀과 소통하고, 암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향수 기획팀 직원 두 명더러 촬영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그러고 본인은 사무실에서 조향 대회를 준비했다.저녁 무렵.강원의 자사도우미, 김선주한테서 전화가 왔다.“사모님, 오늘 저녁 집에 돌아와 식사하실 겁니까?”채림은 약 1초간 반응하고는 물었다.“둘째 삼촌은 집에 있나요?”“네, 돌아오셨습니다. 만약 사모님도 돌아오신다면 문 대표님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김선주는 재빨리 대답했다.채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이런 말을 들어 본지도 참 오래된다. 집에서... 누군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고...채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한테 선물한 진주 왕관이 떠올라, 집에 돌아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하려고 결심했다.“그래요. 이따 바로 갈게요.”채림이 대답했다.한편, 전화를 끊은 김선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인어른의 머리 위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단번에 가시고 강원에 다시 봄바람이 부는 듯한 분위기가 찾아왔으니까.채림의 마음도 가벼웠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고는 문을 닫고 퇴근했다.하지만 그때, 핸드폰이 울리면서 향수팀 직원 소유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백 대표님, 한번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쪽에서 촬영 진행이 안 되고 있어요...”“다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요? 윤지 씨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채림은 의아했다.“윤재 씨가 아니라 같은 소속사 윤미나 씨가 문제예요... 상대는 문지후 대표님 여자 친구라고 소문난 스캔들 상대인데 우리를 계속 괴롭혀요. 저희도 더 이상 시중들기 힘들어요...”소유미가 억울한 듯 말했다.‘하.’채림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면서 흔들림 없는 눈을 깜빡거렸다. ‘스캔들 상대도 있었어?’“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채림은 전
사실 백성호는 J시에 온 지 며칠이 된다. BM 그룹에서의 지위를 잃은 그는 변씨 가문에 빌붙으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다른 살길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찾은 목표가 바로 방민수다. 하지만 여러 번 방문 요청을 드렸지만 한 번도 얼굴을 만나지는 못했다.결국 그는 큰돈을 들여 파티 초대장 한 장을 구했고, 그 파티에서 겨우 방민수를 만나 안부 좀 전하고 명함을 건넸다. 그게 끝이다.“마침 잘됐네. 그럼 우리 아빠 앞에서 그렇게 말해 봐. 아빠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궁금하니까.”은솔은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발버둥치던 백성호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멍한 눈으로 은솔을 바라봤다.이 작고 여린 여자애가 방 회장 따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미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방씨 가문 경호원에게 끌려 나갔다.변형빈은 밖으로 끌려 나가는 백성호를 보자마자 모든 더러운 물을 그에게 뿌렸다.“협회장님, 보세요. 백성호는 궁지에 빠지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입니다. 프롬프트도 분명 백성호가 사람을 시켜 망가뜨린 게 틀림없어요. 그랬으면서 나를 모함하다니...”“변형빈! 이 사람도 아닌 놈! 내가 네놈이 한 파렴치한 짓을 모두 까발릴 거야!”백성호는 이미 나갔으면서도 형빈의 목소리를 듣고 고래고래 소리쳤다.그 순간 형빈은 눈동자가 축소되면서 겁을 먹었다.“하...”고강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변형빈은 역시 싹수가 노래서 약이 없었다. 그래도 공을 세워 잘못을 덮을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이토록 식견이 짧으니 채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고강섭은 몸을 돌려 채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백 대표님, 위급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모습 잘 봤습니다. 제 주변 교수님들이 백 대표님 칭찬뿐이에요.”“과찬이십니다.”채림은 대범하게 말했다.고강섭은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이번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선 증거를 찾고 조사해 봐야 한다.협회에 DL그룹을 지지하는 세력
협회장은 ‘고맙다’는 단어를 강조하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뒤돌아 형빈을 꾸짖었다.“변 대표님, 남을 모함하기 전에 머리를 쓸 수는 없나요?”“협회장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형빈은 뜬금없이 꾸지람을 들어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가 원했던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무슨 말이냐고?”고강섭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세미나 시작 전, 내 비서가 분명 여러 번 강조했을 텐데요? 내 연설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연설문은 그동안 우리 업계에 도움을 준 제조 업체와 해외 업체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하필 중요한 시간에 프롬프트조차 없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게 세미나를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장담한 결과인가요?”“그럴 리가 없어요.”형빈은 조급한 나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프롬프트는 분명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쳐 놨어요.”“그러니까 프롬프트는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 고장 났다는 거네요?”채림은 형빈의 말실수를 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형빈은 멍해졌다. 그제야 본인이 함정에 빠졌다는 게 실감 났다.고강섭은 연신 한숨을 쉬며 뒷짐을 쥔 채 형빈을 비난했다.“변 대표님, 내가 세미나 주최 권한을 변 대표님께 맡기면서 연신 강조했을 텐데요? 동종 업계 사이 경쟁이 필요하긴 하다지만 건전하게 경쟁해야죠. 어쩜 매번 이렇게 남의 등에 칼 꽂는 짓을 할 수 있죠?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이네요.”그때 형빈의 비서 엄태식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귀에 아까 전 발생한 일을 설명했다. 프롬프트는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치지 못했다고.”“아까는 어디 갔었어? 왜 그걸 바로 보고하지 않았어?”형빈은 쪽팔리는 한편 화가 났다.“저도 그동안 잡혀 있어서 올 수 없었어요...”태식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백 대표님이 결단을 내려 협회장님 연설문을 무대 위에 준비해 두어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어요.”고강섭의 비서가 옆에서 말했다.“변 대표님, 이번 일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고강
협회장이 해야 할 멘트는 무척 길기에 프롬프트도 없이 멘트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본인이 아무리 상투적인 말로 억지로 짜 집기 해서 지어낸다고 해도, 오늘 현장에 수많은 파트너가 와 한 분 한 분 감사 인사드리려면 회사 이름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을 모두 외울 리는 만무했다.‘DL그룹!’며칠 전 DL그룹 회장이 직접 고강섭을 찾아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사정했었다. 결국 마음 약해진 그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하지만 DL그룹이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고강섭은 난처하기도 하고 화도 나 얼굴이 자줏빛을 띄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채림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협회장님, 저를 따라 세컨드 스테이지로 갑시다.”고강섭 눈에는 혼란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채림이 계속 웃는 바람에 그는 마지 못해 채림을 따라 나섰다.그러다 세컨드 스테이지 위에 도착했을 때, 고강섭은 무대 바닥에 자신이 해야 할 멘트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고강섭은 카메라 뒤에서 눈을 반짝이더니 자신만만하게 무대를 내려가는 채림을 대견스러운 듯 바라봤다.잠시 당황했던 고강섭은 무사히 연설을 마치며 세미나의 막바지를 알렸다.채림이 백스테이지에 도착하자 변형빈이 부르는 것처럼 다가와 버럭 소리쳤다.“백채림, 뭐 하는 거야? 왜 협회장님을 데리고 빙빙 돌았어? 협회장님이 너 때문에 어지러워하셨잖아!”“내가 왜 협회장님을 모시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채림은 침착하게 반격했다.은솔의 경호원이 일을 깔끔히 처리했는지 형빈은 아직도 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모른 채 어릿광대처럼 채림을 비난했다.“어디서 변명이야!”형빈은 사나운 말투로 윽박지르더니 뭔가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그만!”그때 노기가 담긴 나지막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형빈은 뒤돌아서서 잔뜩 화가 난 고강섭을 바라보더니 얼른 다가가
채림과 같은 줄에 앉은 변형빈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도발하는 듯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따 또 그녀에게 덫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하지만 지금 채림은 밝은 곳에 있고 상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기에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조심을 다하는 수밖에.채림이 경계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림 씨! 뭘 그렇게 걱정해요?”채림은 고개를 돌려 흘긋 바라봤다.“은솔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채림 씨가 연설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죠.”은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보탰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저 오늘 혼자 온 거 아니에요.”은솔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보니 시선 끝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몇 명 서 있었다. 심지어는 모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모양인지 분위기가 남달랐다.채림은 입꼬리를 말아 올랐다.“오늘 정말 은솔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너무 잘됐네요!”은솔은 기대되어 미칠 지경이었다.채림은 어처구니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뭔 일을 당하는 게 그렇게 기대되나?’채림이 은솔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당부하자 은솔은 이내 옆에 앉은 변형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이내 흉악한 얼굴을 한 백성호를 보더니 호언장담했다.“걱정하지 마요. 제가 오늘 이 두 사람 죽어라 감시할게요! 만약 두 사람이 채림 씨한테 뭔 짓을 하려 한다면 오늘 내 손에 죽었어요!”채림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뭐 깡패도 아니고, 적당히 해요.”“그래요. 채림 씨 말대로 할게요.”은솔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채림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대 아래에 조용히 앉아 청중이 되었다.세미나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상 순서가 되자 채림을 포함한 몇몇 기업 대표는 함께 무대에 올라 업계 청년 공로상을 수상했다.수상을 마친 뒤 바로 채림의 연설이 시작되었다.사회자의 짧은 멘트가 끝나자, 은솔은
[우리 참 안 맞아. 어쩜 내가 도착하자마 H시를 떠났어?]건너편 상대는 계속 농담조로 말했다.“왜 돌아왔어?”문지후는 방금 풀었던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산사태 때 본인 목숨도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를 구했다던데? 상대한테 홀리기라도 했어? 오히려 바위 아래로 밀어야 하는 거 아니야?]상대의 목소리는 음흉하고 섬뜩했다.“정말 그 여자가 죽길 바라는 거야?”지후는 차갑게 되물었다.“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예진과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인데?’[예지는 예지고 그 여자는 그 여자야! 그 계집이 예지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내가 왜 그 여자를 살려 둬야 해?]상대는 조급해졌는지 소리 질렀다.하지만 지후는 귓가에 들려오는 으르렁거림을 무시한 채 냉정을 되찾았다.“우리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달랐어. 난 그때의 진실을 알아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게 할 거야!”[하하!]전화 건너편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칼 같은 문 대표가 언제부터 이렇게 꾸물대는 성격이 된 거야?]“내가 칼 같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까지 베어 버리는 건 아니야!”지후는 차가운 말투로 위협했다.[정말 그 여자한테 푹 빠지기라도 했어? 계속 계획을 미룬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어디 그래 봐!”지후의 몸은 순간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더니 협박과 경고를 날렸다.“내가 귀국을 결심한 날부터 그 여자는 내 사람이었어!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가 결정해. 만약 내 계획을 망치면 그게 당신이라도 가만 안 둬!”지후는 말을 마친 뒤 전화를 팍 끊었다. 그러다 한참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 2분 뒤, 강현은 그의 방에 나타났다.“차 대기시켜. H시로 돌아갈 거야.”지후가 대답했다.“하지만, 대표님...”강현은 말을 더듬다가 지후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 입을 열었다.“방금 소식을 접했는데, 사모님께서 내일 향수 업계 세미나에 참석한답니다. 주최 측이 DL그룹이라 사모님께 불리할 것 같습니다.”지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동방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