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못하는 말이 없구나.”장명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제가 경솔했습니다.”소은이 바로 잘못을 인정했고 그제야 장명희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조용히 말하였다.“너의 외조모께서도 이 서신을 받으신다면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옹주는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은 탓인지 한 달이 넘도록 한진 장공주의 답신은 올지 않았다.그보다 먼저 궁술 시험 날이 코 앞에 다가왔다.소은은 궁술을 나름 익힌 편이었으나, 시험 전부터는 과자 한 조각도 입에 대지 못할 정도로 긴장이 엄습해왔다.시험 당일, 아직 동이 트기 전
“소은 낭자와 그러한 접촉은 없었습니다.” 강준은 담담히 대답했다.양관 선생은 그를 의심치 않았다. 강준이 소은과 관계가 있었다면, 소국공부에서 이미 찾아와 책임을 묻고도 남았을 것이다.“실로 기이한 일이로다.” 그 역시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한 듯 고개를 저었다.허나 강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어디까지나 모두 사람의 짓일 뿐, 그저 상대가 한 수 위였을 따름입니다.”상대의 목적을 밝혀내기만 하면, 소은이 어찌하여 활쏘기 실력을 갖추게 되었는지도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학당으로 돌아온 소은이 차를 마시며
그 여인은 그와 특별히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았다.경화거를 거리낌 없이 차지하고,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을 여기저기 흩뿌려놓아 본래 단정하던 경화거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그럼에도 강준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침소를 내어주고 자신은 서재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고, 손에는 신나라 명장 신도 장군이 쓰던 ‘작요’라 불리는 명궁을 들고 있었다.사내들이 너나없이 탐내던 바로 그것이었다.여인은 실로 경국지색이 따로 없었다. 살결은 곱고 매끄러워 삼월에
장명희가 마다하니 고금란 역시 억지로 강요하진 못했다.소은은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국공부 살림을 도와드리는 것을 극구 사양할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소은은 소국공부가 큰어머니 손에서 계속 적자를 보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재물을 손에 쥔다는 것은 곧 권력을 쥐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차남인 아버지는 관직이 높아 외부에서 대접을 받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큰아버지 아래였다. 형제간의 사이가 좋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그 우애가 평생토록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었다. 만일 국공부의 살림
고금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번졌다.“잘난 체하는 꼴을 좀 보거라. 난 그저 의논하려 한 것뿐인데 마치 이미 그자 발 아래에 소은이 짓밟힌 것처럼 구는구나.”“소은이 이리도 고운 데다, 이제 활쏘기까지 나라 안 으뜸이니, 대연의 사내들 중 누구든 고르기만 하면 될 터인데 굳이 선왕부를 택할 필요는 없죠.”체면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고금란이였기에 이 일로 선왕부와 혼사를 엮을 생각을 단념하게 되었고, 반면 위씨는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 선왕부가 소윤이를 마다했듯 소은이라 하여 눈에 들 리 만무하다 여긴 것이다.소은이
공주부 출신의 어머니가 있으니 창고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그래서 작요를 찾는데도 한참 걸렸다.단향목으로 제작된 작요는 보통의 활보다 많이 무거웠지만 활시위의 탄력이 더 뛰어났다. 온통 검붉은 색으로 된 손잡이 쪽에 질감이 투명한 흑옥을 박았다. 보통의 옥석은 호수처럼 색감이 투명하거나 한여름의 태양처럼 붉은빛을 띄는데 흑색의 옥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활에 박은 이 옥석만 해도 가치가 어마어마했다.소은은 아무리 찾아도 부부 합방에 관한 책을 찾을 수 없었다.회귀하고 돌아와서 그걸 감상하고 괜찮은 부분에는 평론까지 옆에 적
“할머니께서도 네가 활 대결에서 일등을 해서 선왕이 널 눈여겨보지 않을까 기대한 모양인데, 어휴….”말을 마친 소윤은 한숨을 내쉬었다.소은은 둘째언니의 이런 점이 싫었다. 잘난 척하고 누가 자신을 초월할까 봐 초조해 하고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기분 나빠하는 부류였다. 겉으로는 안쓰럽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아마 지금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작은 어머니는 요즘 뭐 하고 지내니?”소윤이 물었다.소은은 경계심부터 들었다. 평소대로라면 어머니에 대해 관심도 없던 소윤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꺼냈다는 건 분
나중에 소은이 항상 홀로 다니자 위청도 이유를 알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그때 강준과 혼인했다고 의기양양했던 소은의 자부심도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진명우를 만나러 가는 날, 소은은 정성들여 고른 살구색 치마를 입었다. 가벼운 재질이라 한겨울에 입어도 뚱뚱해 보이지 않고 가는 허리가 강조되었다. 은은한 살구색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겉에는 하얀색 여우털 망토를 입었는데 안에 입은 살구색이 비치면서 우아하고 청순한 자태를 뽐냈다.소은은 진영주의 초대를 받고 간 거라 한동안 못 만났던 소희와도 마주치게 되었다.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길 수밖에요.”혹시나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면 혼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소은은 짐짓 골치 아픈 척 말했다.소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위씨 가문 웃어른들을 만나 뵈었다.소윤의 시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연을 날리고 싶다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제가 갈게요.”마침 바람을 쐬고 싶었던 소은이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할게.”소윤의 시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 누나. 어서 가요.”위림이 소은을 이끌었다.
장명희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소철수도 인맥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다.소철주가 부인을 아껴 분가를 요구한 뒤로 장명희의 생활은 점점 평온하고 순조로워지고 있었다. 큰집도 그렇고 시어머니도 그렇고 어쨌거나 그녀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다.“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장명희는 차 한 잔만 마시고 바로 심원을 나섰다.위씨는 소은을 보며 한마디 했다.“소윤이가 많이 심심한가 보더라. 너 불러서 얘기라도 하고 싶은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얘기를 안 꺼냈다네.”소은은 잠시 고민
진명우가 산적을 토벌하러 가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강준은 이 산적들을 이용해서 량주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불리한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이상, 그는 산적들을 토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진명우는 강준의 사람이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분명했다.소은은 강준의 이름으로 서신을 써서 량주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적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소철주가 유배를 떠난지도 반달이 지났다. 소국공 소철수는 정사품 태상에서 종삼품 태수로 승진했다. 큰 집은 경사
“어찌 자신을 어리석다 말합니까. 낭자의 재능은 대연을 통틀어도 따라올 자가 몇 없는걸요. 낭자가 어리석으면 이 천하에 똑똑한 여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낭자에게 선왕부 살림을 맡겨도 잘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강준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잔재주일 뿐이고 어디 내놓을 정도는 아닙니다.”소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그가 비록 선왕부에 대해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강준은 그녀의 걱정을 알아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꿇고 있으면 편합니까?”
강준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소은은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자신의 말이 예의가 없었던 점이 있는지 짚어본 뒤에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급한 일이 있다면 제게 사람을 보내셔도 됩니다. 제 능력이 닿는 한, 어떻게든 세자께 도움은 드릴 테니까요.”그와 안전하게 거래하고 싶었기에 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그녀는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만남을 청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그런데 지금 강준의
소은은 경계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윤비를 빤히 바라보았다.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눈동자에 맺힌 장난기와 느긋함은 거짓이 아니었다.그녀는 피식 웃고는 답했다.“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부군이라고 하더라도 꼭 잠자리를 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어쩌면 그 방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윤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를 잘 아는 신변의 부장군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북부에서 오랑캐 놈들과 밀서를 주고받은
“가자.”소은은 부채를 챙기며 말했다.두 사람은 익숙하게 영롱대로 찾아갔다. 마중을 나온 여인은 소은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하인에게 말했다.“어서 가서 모시는 공자님이 오셨다고 윤비를 불러와.”잠시 후, 윤비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저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윤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지난번의 싸늘했던 인상에 비해 눈앞의 이 사람은 한결 인상이 부드러웠다. 소은은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어쩌면 윤비가 인기가 많아 영롱대에 많은 돈을 벌어다주니 수많은 ‘윤비’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책들을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역사 서적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지금 상황과 겹쳐 보이더군요.”소은이 웃으며 말했다.소은의 이런 제안은 전생의 경험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유배를 갔을 시에 그 지역에서 꽤 큰 공을 세웠고 그래서 경문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그들 일가족이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전생에서는 공로로 죄를 사면 받은 경우지만 이번 생은 확실히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떠나는 게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소철수의 예상대로 다음 날, 형부 사람들이 소국공부로 들이닥쳐 수색
그녀는 그 일은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송 각로 뇌물수수 사건의 조사가 빠르게 진전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준이 경성을 나갔다면 아마 이 일 때문에 갔을 가능성이 컸다.6개월만에 드디어 이 사건이 끝나가고 있었다.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온 소철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소은에게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그날 밤, 저택의 편전에 불이 나서 송 각로와의 밀서가 전부 불에 탔다. 소철수는 이미 재가 된 서신들을 호수에 버렸다.“오늘 일을 외부에 발설하는 자가 있다면 혀를 잘라낼 것이다!”소철수는 싸늘한 얼굴로 하인들에게 으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