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안 가요, 여기서 말해요!”윤서린은 입술을 꽉 다물고 고집스럽게 말했다.“서린아, 너......”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딸을 본 적이 없어서 김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정미선은 인상을 쓰면서 윤서린이 철없이 군다면서 나무랐다. “너 오늘 대체 왜 이러니, 서린아. 남자 하나 때문에 엄마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고!”“큰엄마가 제멋대로 조태수를 집에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으로 됐겠어요?”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정미선 때문에 늘 나긋하던 유서린도 결국 꿈틀하고 말았다.“서린아, 말 그런 식으로 할래?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지!”정미선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지금 너네 가족이 사는 이 집 좀 봐라. 낡고, 작고. 나랑 네 큰아빤 올 때마다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무서워. 엄마 아빠 짐 좀 덜어드릴 생각 안 하니?”윤서린을 향한 말이었지만 이 말은 윤동호를 크게 자극했다.집안의 가장인 그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져서 주먹을 꽉 쥐었다.본인이 못나서 와이프와 딸을 고생시킨다고 생각했다.김선은 기분이 확 상했지만 정미선의 성격을 알기에 꾹 참았다.이런 데서, 특히 제삼자가 있는 곳에서 형님과 아주버님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적당히 좀 하세요!”하지만, 윤동호도 참았고 김선도 참았지만 윤서린은 결코 참지 않았다. 그녀는 진작에 이 집안사람들한테 진절머리가 났었다.방금 그 말 때문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큰엄마, 우리가 지금 왜 이런 집에서 사는 지 몰라서 그러세요? 아빠가 회사 살려보려고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으니까요, 별장까지도요!”“이 두 달동안 우리 아빠가 뼈 빠지게 회사에 자금 댄 게 아니었으면 윤성 그룹 진작에 망했어요!”“그동안 단 일 푼이라도 보탠 적 있어요?”“당신들은 회사랑 상관없는 사람들이에요?” 과거에, 윤서린네 집도 정원에 풀장까지 다 갖춘 800평이 되는 큰 별장이 있었다. 아빠가 회사의 빚을 갚아보겠다고 모든 걸 팔았지만 돌아오는 건 친척들의 무시뿐이었다!
“얘, 너 그게 무슨 눈이니? 그리고 화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니?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임유환의 눈길에 원래도 불같은 정미선이 바짝 독이 올랐다. 조태수는 놓치지 않고 기름을 부었다. “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저런 사람들은 그냥 무시가 답이에요.”그리고 한껏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 “아까는 뭘 하다가 이제 와서 서린 씨 위로해 주는 척이지? 평소에도 늘 이런 식이었나 보죠? 사람 나약한 틈 타서 입만 대충 놀리고, 연애 참 쉽게 하네요!”“말 다 했니?”임유환은 조태수를 싸늘하게 쳐다봤다.“어이구, 꼴에 불쾌한가 봐? 너는 그냥 옆에 빠져......”“다했으면 좀 닥쳐.”임유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태수의 말을 잘랐다.조태수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 분노가 끓어올랐다.자기한테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하다니!“하, 그렇게 대단하면 입만 놀리지 말고 서린 씨 도와주던가!”조태수는 냉소를 날렸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임유환은 차분하게 말했다.“허.”조태수는 껄렁하게 웃으며 하찮게 바라봤다.정미선은 더 참지 못하고 임유환에게 소리쳤다. “말만 하지 말고 돈을 내놔!”“얼마 필요한데요.”“400억! 400억 있니?!”정미선은 소리치면서 손가락 네 개를 치켜들었다.400억은 약과였다.윤성 그룹이 빚진 돈은 훨씬 더 큰 액수였다.그녀는 그저 임유환이 곤란해하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 숫자나 질렀다.400억이면 임유환이 당연히 나가떨어질 줄 알았다.400억은 고사하고 40억도 보통 사람에겐 천문학적 단위인데 하물며 임유환 같은 백수는 엄두도 못 낼 것이다!“서린아, 정말 빚이 이 정도 돼?”임유환이 윤서린을 바라봤다.“네......”윤서린은 무안해서 고개를 숙였다.“알았어.”임유환은 핸드폰을 꺼냈다.“또 무슨 수작이야? 누구한테 빌리려고?”정미선은 임유환을 보면서 까칠하게 말했다. “잘 들어, 4억 아니고 40억 아니고!”임유환은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왕윤재에게 전
“조태수, 미친 거야? 임 선생님한테 무슨 짓이야!”전화 너머, 왕윤재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건너가 조태수 이 자식을 한바탕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연기 잘하시네요, 사장님.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세요!”조태수는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전화를 받은 사람이 왕 사장님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았다. 사장님이 평소에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찾아가는 것도 비서를 통해서 예약해야 하는 분이라고. 사장님한테 이렇게 함부로 전화를 해? 웃기시네.게다가, 사장님한테 400억이란다.자기가 뭔데? Y그룹 대표이사라도 되나?“조태수. 경고하는데, 임 선생님한테 깍듯하게 해!”왕윤재가 경고했다.“아이고, 무서워라~ 사장님~ 하하하, 내 연기 어때?”조태수는 크게 웃었다.“그래, 조태수. 딱 기다려. 임 선생님이 부탁하신 거 끝내고 올 테니까 두고 봐!”“죄송합니다. 임 선생님. 이 자식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왕윤재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하하, 들통날까 봐 끊었네!”조태수는 더 득의양양했다.임유환은 그저 흘깃 쳐다볼 뿐이었다.그 눈길이 불쾌했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임유환을 보는 눈에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법이다? 대역 배우까지 구하고. 내가 평소에 사장님이랑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면 깜빡 속을 번 했지 뭐야? 사장님은 특별한 전화 말고는 다 예약해야 한다고!”임유환은 여전히 차분하게 대꾸했다. “잘 아네, 특별한 전화.”“허!”조태수는 더 크게 웃었다. “기가 막힌다, 진짜. 어떤 사람들이 특별한 지 알아? 차관급은 돼야 한다고! 네가 뭔데 입만 열면 400억이야? 아예 Y그룹 통째로 달라지 왜!”“이 자식......”정미선과 윤태호는 더 뭐라 말하기도 입이 아파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윤동호와 김선도 깊은 한숨을 뱉었다.임유환의 이미지는 이미 나락이었다.윤서린은 입술을 깨물며 임유환을 향해 자책으로 가득 찬 눈길을 보냈다.다 자기를 도우려다 당한 일이다.임유환
진짜로, 400억이 입금되었다!윤서린은 떨리는 눈동자를 감출 수 없었다.왕윤재 사장이 정말 자신의 계좌에 400억을 보냈다!정미선은 윤서린의 표정을 보고 머리를 들이댔다.“헉!”너무 놀라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다가왔다.그리고 다들 정미선과 같은 반응이었다.윤서린의 계좌에 400억이 더 들어와있었다!“어...... 어떻게 이러지?”조태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아니야! 절대 아니야!”“이건 가짜야!”“네가 가짜 문자를 보낸 게 분명해!”조태수는 정신을 차리고 임유환을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임유환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연기 한 번 기가 막히네.”조태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게 진짜라고 절대 믿지 않는다!전화 한 통으로 왕윤재의 회사에서 400억을 꺼낼 수 있는 사람, 흑제 어르신 말고는 더 떠오르지 않는다.“태수 말이 맞다, 어딘가 잘못됐다!”정미선도 침착함을 되찾고 임유환을 의심했다.“그러게, 요즘같이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문자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윤태호가 입을 열었다.윤동호와 김선이 서로 마주 봤다.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부정적이었다.아무래도 400억이나 되는 거액이었으니까.400억을 간단히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S시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었다.게다가 그 사람들은 죄다 유명한 사람들이었다!“태수 씨, 그만 좀 해!”윤서린은 또 모함하는 조태수를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이 할 수 없다 해서 다른 사람도 능력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눈 똑바로 뜨고 봐요! 은행에서 온 문자잖아요!”“서린 씨, 제 얘기 들어봐요. 요즘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특히 문자로 사기 치는 건 일도 아니라고요!”조태수는 푸르뎅뎅해서 윤서린에게 변명했다.띵이때, 임유환이 왕윤재의 메시지를 받았다.임유환은 핸드폰을 열었다.[임 선생님, 방금 돈을 이체했습니다. 윤서린 양은 받으셨나요?][받았어.]임유환은 간결
"조태수, 오늘 뭐 잘못 먹었어?! 방금 임 선생님과 전화로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한번 말해봐!""와…왕 사장님, 방금...통화하고 있던 사람이 정말 사장님이셨습니까?” 조태수는 몹시 당황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너 이 새끼, 임 선생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왕윤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꿀꺽.” 조태수는 침을 삼켰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그래, 알겠네.” 조태수가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않자 왕윤재는 자신의 의혹을 확신하며 곧장 말을 꺼냈다."오늘 휴가지? 내일 아침 출근 후에 바로 퇴직 절차를 밟도록 해.” 두둥! 그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고, 조태수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왕...왕 사장님, 농담하시는 거죠?” 조태수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농담? 내가 너랑 농담할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해! 경고하는데, 임 선생님에게 예의를 갖추라고.그렇지 않으면 네가 Y 그룹의 직원이 아니더라도 난 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왕윤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뚜, 뚜, 뚜.전화 연결음이 끊기는 소리가 울리자 조태수는 화들짝 놀랐고, 휴대폰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휴대폰의 액정이 깨져버렸지만, 조태수는 휴대폰 따위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꿀꺽."정미선과 윤태호도 넋을 잃었고, 조용한 거실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여보, 이게…” 김선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윤동호를 바라보았고, 윤동호 역시 넋을 잃은 채로 손을 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니! "내가 유환 씨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잖아요, 이제야 믿으시겠어요!” 모두의 놀란 반응을 본 윤서린은 조용히 코웃음을 쳤고, 마침내 속으로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미안하다, 딸아…” 윤동호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딸에게 사과를 한 뒤 임유환에게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미안해요, 총각. 아까는 아저씨랑 아줌마가 총각을 오해했어
"흥, 짜증 나는 자식, 드디어 갔네!"윤서린은 조태수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안도감을 느꼈다.“됐다 서린아, 넌 유환 씨랑 같이 티브이를 보러 가, 엄마가 밥이 다 되면 부를 테니까.”김선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알았어요, 엄마."윤서린은 임유환을 데리고 소파에 앉았고, 상황을 지켜본 정미선은 즉시 그녀를 따라가 임유환에게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총각, 총각 이름이 임유환이지. 이제부터 나도 총각을 유환 씨라고 부를게. 서린이랑 결혼하면 한 가족이니까 말이야.”“네.”그러자 임유환이 가볍게 대답했다.방금 전 그녀가 윤서린을 대한 태도를 그는 다 지켜보고 있었고, 이에 대해 정미선은 전혀 짜증을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더 살갑게 말했다.“유환 씨, 이전 일은 모두 오해였으니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해. 결국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될 거잖아? 그럼 서린아, 유환 씨랑 이야기를 잘 나눠, 더 이상 두 사람 방해하지 않을게. 난 베란다에 가서 햇볕을 쬐어야겠다.”말을 마친 그녀는 현명하게 윤태호를 베란다로 데려갔고, 임유환과 윤서린만 남겨 두었다.해가 다 졌는데 무슨 햇볕을 쬐러 간다는 건지…"휴."윤서린은 힘없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환 씨, 우리 이모는 이런 전형적인 속물이니까 그냥 무시하세요.""나도 알아.”임유환은 미소를 지으며 윤서린을 바라보았다."기분은 좀 나아졌어?”걱정스러운 임유환의 시선에 윤서린은 갑자기 부끄러운 듯했지만 이내 대답했다.“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그래, 그러면 됐어.”임유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윤서린은 다시 마음이 떨렸고, 계속해서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재빨리 리모컨을 꺼내 TV를 켜고 예능 채널을 틀었다."하하!"임유환은 TV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윤서린은 정신이 딴 데 있는 것 같았다.TV를 보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유환 씨, 서린아, 큰 아버님, 형수님, 저녁 준비 다 됐어요!”김선은 모두를 불러 모았다."알겠어요!”모두가 소리를 듣고 식탁
방 안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했고, 임유환이 윤서린의 침실에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핑크빛 분위기가 방을 장식했고, 침대 위에는 커다란 인형 두 개가 놓여 있었다.여기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에 임유환의 머릿속은 하얘졌다.“유환 씨, 일단…먼저 앉아요.”윤서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했고, 그녀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그녀가 자신의 침실에 이성을 데려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심지어 오늘 밤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자야 했다."그래……”임유환의 말투는 약간 굳어졌고, 방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그러자 침실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똑똑똑.이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유환 씨, 서린아, 잠깐 들어가도 될까?”김선이었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윤서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엄마가 유환 씨 주려고 깨끗한 목욕가운을 가져왔어, 씻은 뒤에 갈아입으라고.”김선이 말했다."알았어요 엄마, 들어와요.”그러자 김선이 문을 밀고 들어왔고, 쩔쩔매고 있는 두 사람을 마주하자 미소를 지은 뒤 목욕가운을 침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유환 씨, 너무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요,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요.”“서린아, 너도 유환 씨를 잘 챙겨 주어야지, 처음 우리 집에 왔잖니.”“그럼 엄마는 더 방해하지 않으마, 푹 쉬어~”그녀는 말을 마친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알았어요 엄마, 어서 나가요~”윤서린은 재빨리 엄마를 쫓아내고 문을 잠갔다."후~”그녀는 문에 등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고, 그녀의 예쁜 얼굴이 달아올랐다.엄마도 참, 딸을 이렇게 다급하게 시집을 보내고 싶어 하실까…만약 엄마가 임유환이 조태수를 쫓아내기 위한 임시 남자친구였다는 것을 안다면 아마도 불같이 화를 내겠지.하지만 앞으로도 엄마가 매번 임유환에게 이렇게 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어휴.”이 생각을 하자 윤서린은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무슨 일이야, 서린아. 왜
쏴아아-욕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자 임유환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후.”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임유환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억눌렀다.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10분쯤 지나자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순간 멈췄고 임유환의 마음도 따라 움직였다.또 거의 5분이 흐른 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열렸다.욕실 안에서 자욱한 수증기가 세어 나왔고, 윤서린은 머리를 닦으며 나왔다.임유환이 고개를 올려 보자, 그의 마음은 더욱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윤서린은 샤워를 마친 뒤 흰색 실크 잠옷만 입고 있었고, 젖은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긴 채 샤워 후 뜨거운 열기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그리고 더 아래를 내려다보자……임유환은 순식간에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쭉 뻗은 우아한 곡선, 특히 흠잡을 데 없이 하얀 긴 다리는 윤서린이 발을 뗄 때마다 흔들리며 완벽한 곡선을 그렸다. 임유환은 눈에 뜨거운 불꽃이 튀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윤서린도 임유환의 눈을 마주하자 그녀의 얼굴도 순간적으로 붉어졌다.“유환 씨, 자…잠시만 돌아서 있어봐요.” 임유환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윤서린은 재빨리 화장대로 다가가 헤어드라이어를 꺼내 머리를 말렸다. 몇 분 뒤,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멈추자 윤서린은 곧바로 침대에 누웠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한순간에 가려졌다. "이제 돌아봐도 돼요.” 윤서린이 말했다."알겠어."임유환은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윤서린이 작은 머리만 드러낸 채 침대에 들어간 것을 보고 안도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왜 웃어요?"윤서린이 뺨에 바람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네 지금 모습이 너무 멍청하고 귀여워서.” "흥, 유환 씨야말로 멍청해요.”윤서린은 코를 찡그리며 대꾸했다. "어...그럼 멍청한 게 아니라, 똑똑하다고 해줄게.” “흥, 줏대 없는 남자네.” 윤서린은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임유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됐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