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안.임유환은 최서우의 놀란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는 말했다."최 선생님, 그 얘긴 나중에 해요. 할아버님 상태부터 봐야죠."할아버지 얘기에 최서우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침대 가까이 다가가며 최대호를 살폈다."할아버지, 몸은 괜찮아요? 어디 불편한 덴 없어요?""허허, 없다니까. 할아버지 괜찮은데 네가 왜 죽상이야."이 상황에서도 최서우가 걱정할까 애써 웃음을 짓는 최대호의 주름진 눈가에는 자애로움이 피어올랐다."할아버지, 미안해요... 나 때문에..."제가 아니면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 최서우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할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았다."서우야, 이건 네 탓이 아니야. 다 그놈이 너무 비겁한 탓이야. 넌 어디 다친 데 없어?""없어요, 할아버지."최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는 유환 씨가 구해줬어요.""우리 의사 선생이?"최대호는 눈빛을 반짝이며 임유환을 바라봤다."의사 선생, 우리 서우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제가 늙고 병들어 의사 선생과 흑제 어르신께까지 폐를 끼쳤네요.""폐라니요, 어르신. 그런 말씀 마시고 얼른 검사부터 해보죠."말을 마친 임유환은 최대호의 팔을 들어 맥을 짚어보았지만 맥이 충격으로 조금 약해진 것 말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유환 씨, 할아버지 괜찮은 거죠?"한쪽에 서 있던 최서우가 긴장한 듯 물었다."어르신은 괜찮아요. 그냥 충격을 받아서 조금 맥이 약해졌을 뿐이에요. 오늘 밤 잘 쉬고 나면 괜찮으실 겁니다.""후..."괜찮다는 임유환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최서우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최대호는 이 모든 걸 지켜보며 임유환에게 괜한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임유환 정도의 남자라면 손녀의 한평생을 맡겨도 될 만한 믿음직한 사람인 것은 틀림없었다.그럼에도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임유환이 최서우를 성에 차 할지, 그리고 또 최서우의 병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지가 문제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최대호는 임유환에게 최서우의
그 시각, 연경의 서씨 집안에서는 서인아가 프로젝트 기획서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드는 불안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방문이 열리며 수미가 하이힐을 신은 채 뛰어왔다."아가씨, 큰일 났어요!""왜, 무슨 일인데?"보기 드문 수미의 경거망동에 서인아는 쥐고 있던 기획서를 내려놓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임유환 씨에게 큰일이 생긴 것 같아요!"수미는 자신의 아가씨가 S 시를 떠난 뒤에도 내심 임유환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암암리에 임유환을 지켜봐 왔었는데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잘 지내다가 갑자기 강씨 집안과 척을 짓는 탓에 이번에는 강씨 집안에게 제대로 걸려 군대까지 동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임유환한테 큰일이 생겼다고?"임유환과 큰일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에 등장하자 서인아는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정확히 무슨 일이야?""P 시의 강씨 집안과 트러블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임유환 씨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강씨 집안에서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P 시에서 부대까지 동원해서 지금 임유환 씨 집 근처를 포위하고 있답니다.""심지어 부대를 이끄는 분은 안지용 원수님이라고 강씨 집안의 친척이라고 합니다.""안지용?"서인아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표정이 굳어진 채 말했다." 원수씩이나 되시는 분이 일반 시민들 일에 작전 지역이 개입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아가씨, 아무래도 안 원수님께서 소식이 새어나가는 걸 미리 막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안지용, 강씨 집안!"서인아는 날이 선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수미야, 김우현 부팀장한테 가서 내 말을 전해. 그리고 지금 당장 S 시 안지용에게로 가서 전하라고 일러줘.""안지용이 내 말까지 무시한다면..."서인아는 잠시 멈칫하다가 시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김우현이 직접 연경지역 부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하라고 해.""네, 아가씨!"수미는 늘 평온하던 모습과는 달리
정씨 가문 저택 서재.창문 앞에 푸른색 옷을 입고 서 있는 정우빈 뒤로 김우현이 허리를 공손히 숙여 가며 서인아가 자신에게 지시했던 일들을 낱낱이 일러바치고 있었다." 그래서 임유환 그 자식이 지금 강씨 집안에 포위되어 있다고?"정우빈은 차가운 기색이 역력한 눈을 가늘게 뜨며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빈 도련님 뜻은 어떠신가요?"김우현이 정우빈의 지시를 기다리자 정우빈은 뜻밖의 말을 전해왔다." 인아 씨의 뜻이 곧 내 뜻이지."정우빈은 내키지 않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웃음 속에 칼이 있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도련님 정말 그 자식을 구하려 하시는 건가요? 저번에 도련님한테 감히 대들기까지 했잖아요."김우현은 이를 악물며 질투에 가득 차 이간질을 했다.임유환 같은 듣보잡이 서인아 아가씨 눈에 들었다는 사실을 김우현은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그리고 서인아 아가씨 옆에서 몇 년이고 보필한 저는 임유환보다 실력이 더 뛰어남에도 서인아 아가씨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김우현은 당연히 질투가 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김우현은 솔직히 임유환을 구하러 가고 싶지 않았지만 서인아의 명령은 거절할 수 없었기에 일부러 정우빈을 찾아가서 이 일을 고한 것이다."하하, 너는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으로 보였니?"정우빈은 김우현을 향해 웃었지만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웃음이 아닌 입꼬리만 애써 올려 지은 웃음이었다."당연히 아니죠!"김우현은 다급히 부정했다."그럼 됐잖아."정우빈은 입꼬리를 올려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인아 씨의 명령도 있으니 사람은 구하러 가야겠지. 하지만 구한 사람이 죽든 살든, 또 도착하기 전에 죽든 그건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아니잖아.""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도련님!"정우빈의 뜻을 알아들은 김우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됐어, 얼른 가봐. 늦어서 사람 죽으면 어떡해.""아 그리고 뭐 운 좋아서 그놈이 살게 된다면 나 대신 이 말 좀 전해
아파트 단지 아래에는 병사들이 모여 있었고 안지용은 분대 하나를 데리고 302호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문 열어!"밖에서 들리는 병사들의 요란한 소리에 문을 연 윤서린은 눈앞에 보이는 총을 든 병사들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물었다."누... 누구 찾아오셨어요?""당신이 윤서린이야?"먼저 사진으로 윤서린의 얼굴을 확인했던 안지용은 차갑게 물었다."네, 제가 윤서린인데요... 장관님, 저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표정을 굳힌 채 제 앞에 서 있는 안지용을 보며 윤서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잘못? 너희 집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거야?""임유환이 네 남자친구지?""네."목소리를 깔고 물어오는 안지용에 윤서린은 눈빛이 세차게 흔들리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유환... 유환 씨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네 남자친구 맞으면 됐어. 준석아, 이 여자는 너에게 맡길게."안지용이 근엄한 표정으로 손을 저으니 친위 부대 병사 몇 명이 강준석을 태운 휠체어를 밀며 윤서린을 밀쳐버리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때마침 방에서 나오던 김선이 도적 떼처럼 저의 집에 들이닥치는 병사들을 보고는 두려움에 휩싸여 먼저 딸부터 보호하려 큰 소리로 말했다."너! 너희들 내 딸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저 노인네 신경 쓸 필요 없어. 얼른 윤서린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강준석은 이 와중에도 충혈된 눈으로 윤서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예!"친위 부대 병사들은 안지용의 명령에 따라 윤서린의 두 팔을 잡고는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놔! 내 딸 놓으란 말이야!"나와서 말리던 김선은 병사의 손에 뺨을 맞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엄마!"윤서린은 비명을 지르며 병사들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여자의 힘으로 남자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당신들이 강도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 군대면 일반 시민의 집에 이렇게 쳐들어와도 되는 거냐고! 사람까지 다쳤잖아."김선은 머리가 산발이 되게 맞고 나서도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쳤다."경찰?"안지용
임유환이 전화를 거는 탓에 안방 침대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했다.하지만 두려움에 휩싸인 채 눈앞에 앉아있는 강준석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치는 윤서린은 차마 울리는 핸드폰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왜 이러냐고?"강준석은 휠체어에 앉은 채 두려움에 떠는 윤서린을 바라보며 분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임유환이 네 남자친구니까 네가 남자친구 대신 내 한 좀 풀어줘야지.""유환 씨 대신해서 한을 풀어달라고요?"윤서린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그녀가 임유환을 향한 걱정은 점점 더 커져갔다."유환 씨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건데요? 유환 씨는 지금 어딨어요? 혹시 어떻게 한 건 아니죠, 벌써.""너 지금 그 자식 걱정하는 거야?"강준석은 이를 악물며 구겨진 표정으로 윤서린을 향해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지금은 네 걱정이나 해. 내가 오늘 직접 널 망가뜨리면 그 자식이 엄청 힘들어하겠지?""하지 마요..."강준석의 의도를 알아차린 윤서린은 몸을 파르르 떨며 애원했다. "하하하!"강준석이 그런 윤서린을 지켜보며 소름 끼치게 웃자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안지용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준석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복수 마음껏 해. 네가 분이 풀리면 그때 다시 올게.""고마워요, 삼촌."강준석의 비열한 웃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강준석에게 이제 더 이상의 인내심은 없었다.강준석의 안전을 확보한 안지용은 현장을 봉쇄하고 대부분을 강씨 집안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임유환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아무리 그래도 원수의 신분으로 큰 소란을 일으켜 좋을 게 없었기에 안지용은 최소한의 인력만 남겨두었다." 야, 이 여자 잡아. 그리고 나 좀 부축해줘. 사냥감을 잡아 왔으면 맛이라도 봐야겠지?"안지용이 떠나자 강준석은 더는 숨길 게 없다는 듯 제 본 모습을 드러내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하하, 맡겨만 주십시오, 도련님."그 병사들은 모두 안지용의 부하들이었으므로 당연히 강준석의 명령에 따
" 임유환 그 자식이 너 찾네."핸드폰 화면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강준석에 윤서린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제 핸드폰 화면이 밝아져 있었고 발신자는 바로 임유환이었다."있잖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네가 나한테 당하는 거 라이브 생중계로 임유환한테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 어떤 반응 일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강준석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지며 그는 이 상황을 아주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임유환에게 가장 큰 복수가 될까 고민하던 와중에 이렇게 제 발로 굴러들어온 기회를 강준석이 놓쳐버릴 리 없었다."하지 말라고!"절대 임유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생각한 윤서린은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애써 감추려 하며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싫다고? 아닌데, 네 표정은 엄청 좋은 것 같은데?"강준석은 소름 끼치게 웃으며 침대 테이블에 놓인 윤서린의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하지만 카톡 페이스톡을 통해서 온 전화라 윤서린이 지문인식을 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야, 이거 풀어.""제발요... 이러지 마요..."제 명령에 죽기 살기로 고개를 저으며 애원하는 윤서린이었지만 강준석은 일말의 동 정심도 없는지 윤서린의 손을 잡아 지문 인식을 하려 했다.그 순간 다신 없을 기회라고 여긴 윤서린이 강준석의 손가락을 확 깨물어 버렸다."아!!"그리고 강준석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틈을 타 윤서린은 몸을 일으켜 강준석의 밑에서 빠져나왔다."X발, 이리 안 와! X발 년!"제대로 열이 받은 강준석은 윤서린의 머리채를 잡아 침대 위로 던져 버리고는 손을 들어 윤서린의 뺨을 올려붙였다. 맑은 파열음 소리와 함께 윤서린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고 그 통증에 윤서린은 금방이라도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다.그리고 윤서린의 손을 들어 잠금 화면까지 해제한 강준석은 다시 구겨진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서린아, 왜 이제 전화 받아."통화가 연결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임유환이 그제
임유환의 명령 한 마디에 대하의 P 시, J 시, H 시, 연경 등 24개 작전 지역의 육, 해, 공 병사들이 지금 한 곳으로 집결하고 있었다.한 대 한 대의 녹색 중형 장갑차가 작전 지역 대문을 지나고 있었고 회색의 군함이 망망대해를 가로지르고 있었으며 최신형 초음파 엔진을 장착한 분무형 전투기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이 모든 것들의 목적은 단 하나, S 시에서 집결하는 것이었다.띠띠띠-경보경보, 전투기가 S 시 구역을 넘어왔음을 알립니다!띠띠띠-경보경보, 군함이 S 시 해역을 넘어왔음을 알립니다!띠띠띠-경보경보, 중형 장갑차가 S 시 경계선을 넘어왔음을 알립니다!경보경보...순식간에 수많은 경보가 S 시 작전구역 총지휘 부에서 울려 나왔고 지휘관들은 다들 경황실색 하여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기 시작하였다.군함, 장갑차, 전투기는 모두 대하의 중요한 작전 지역에서 온 것인데 그 어떠한 정보도 없이, 아무런 전달 사항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건 연습 따위가 아니라 실전이라는 뜻이었다."장... 장관님, 전투기가 지금 우리 영역 경계선까지 와 있습니다, 막아야 할까요?"부하 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묻자 지휘관은 호통을 치며 말했다." 막긴 뭘 막아, 대하에서 S 시가 사라지길 원하는 거야?""장관님,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지휘관도 별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일단 명령부터 내렸다."일단 지금 들어오는 부대 전부 막지 마. 그리고 당장 상급에 상황 보고해.""예, 장관님!"지휘관은 바로 상급에 보고했고 상급도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별다른 수가 없자 또 그 위의 상급자에게 보고하며 이렇게 한 차례 한 차례 보고를 거쳐 이 정보는 연경 총 작전 지역의 총사령관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저 사령관님, 누가 호패를 움직여 스물네 개 작전 지역의 전부 병력을 S 시에 집결시키고 있다고 합니다.""이유가 뭔진 알아냈어?""아직... 그것까지 알아보진 못 했습니다. 막을까요?"" 됐어, 그냥 둬. 그놈은 내가 알아.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흑제는 호패를 손에 들고 호통을 쳤다."예..."병사들은 그제야 깜짝 놀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호패는 대하의 대통령과도 같은 대하의 병권력을 포함한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다.그러니 모두들 호패를 보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것이 대하의 법도였다."주인님, 들어가시죠."흑제는 호패를 거두고 공손하게 임유환을 아파트 단지 내로 안내했다.임유환은 표정을 차갑게 굳힌 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그 시각 아파트 단지 302호에서는 강준석이 윤서린의 머리채를 잡은 채 코를 그녀의 몸 곳곳에 가져다 대며 그녀의 체향을 맡고 있었다. 그 향기를 맡으면 맡을수록 강준석 눈에 드러난 남자의 본능적인 욕구는 점점 더 짙어졌다.이런 여자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은 전부 임유환 그놈 때문이었다. 그놈이 하필 그곳을 밟아 버리는 탓에 지금 강준석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X발 년!"짜악!강준석은 임유환에 대한 분노를 그의 여자인 윤서린에게 풀고 있었다.이미 얼마나 얻어맞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서린의 입은 다 터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준석은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는지 주먹을 들어 윤서린의 배로 내리꽂았다."아!!"윤서린은 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강준석의 오 분 남짓한 괴롭힘 탓에 윤서린은 이미 맥이 빠질 대로 빠져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이제는 반항할 힘이 없어 병사들의 제압도 필요 없었다.제 순결을 잃어버린 윤서린은 당장이라도 자살하고 싶었지만 강준석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임유환..."고통이 극에 달한 윤서린은 그나마 남아 있는 정신으로 임유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아직도 그놈 생각이 나?"강준석은 자기가 지금껏 만난 모든 예쁜 여자들이 전부 다 임유환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눈썹까지 흔들렸다.서인아, 최서우 그리고 조명주, 지금 눈앞의 저한테 얻어맞아 의식까지 흐려진 이 여자까지도 머릿속은 온통 임유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