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제 친구의 능력이 훌륭하다는 것을 말해주죠.”하지환은 티 나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뭐 만들었어요?”윤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가 돌린 화제를 따라 열정적으로 그녀가 만든 것들을 소개했다.밥을 배불리 먹은 후, 하지환은 본인이 나서서 직접 설거지를 한다고 말했고, 윤이서는 컴퓨터를 꺼내 영화 한편을 찾았다.그건 코미디 영화인데, 윤이서는 영화 보는 것에 너무 집중하여 집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하지환이 나오면서 그녀를 보았다.윤이서는 카펫에 앉아 배를 붙잡고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윤씨네 아가씨의 우아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하지환은 문득 윤이서가 하은철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그녀가 하씨 집안 행사에 참석한 사진을 뒤져봤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 장 한 장마다 그녀는 우아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생기를 느낄 순 없었다.근데 지금 이 순간의 그녀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전에 느끼지 못했던 이 조용함과 아늑함을 즐겼다.그러나 전화벨 소리가 이 고요함을 깨뜨렸다.윤이서는 책상 위의 전화를 힐끗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성지영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그날 그들이 한바탕 싸운 이후로 부모님은 다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마치…… 정말 그녀란 딸이 없어진 것처럼.그러나 결국 그들은 부모님이었기에 윤이서가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운명을 인정하고 받았다.“이서야,” 성지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너는 왜 아직도 이혼하러 가지 않았니?!”어제 그녀는 윤수정을 보러 갔다가 마침 하은철을 만났다.하은철은 평소에도 그녀에 대한 태도가 좋지 않았는데, 어제도 만나자마자 욕설을 퍼부었고 그녀에게 딸을 잘못 교육했다고 말했다!성지영은 당시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후에 하은철의 경호원을 통해 며칠 전 하은철이 사무소에서 윤이서가 기혼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자신의 딸을 강요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자신의 실력이나 좀 키워요!”성지영은 하지환의 목소리인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이건 우리 집안의 일이니 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마! 너희들 지금 어디에 있니?”윤이서의 집은 아니겠지?“신경 쓰지 마세요.”하지환은 장모에게 호감 같은 게 없었기에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만약 윤이서 씨가 당신의 딸이라면 앞으로 더 이상 하은철에게 시집가라는 말을 꺼내지 마세요. 윤이서 씨가 싫어할 뿐만 아니라 저도 싫어하니까.”성지영은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은철이랑 비교하는 거야?”하지환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윤이서는 그의 얇은 입술이 굳게 닫힌 것을 보고 또 화가 난 걸 알아차렸다.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졌다.“고마워요.”하지환은 눈을 들어 맑은 눈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들이 목구멍에서 막혔다.“일찍 쉬어요!”“그래요.” 윤이서가 일어섰다. “그럼 하지환 씨는…….”“나 먼저 갈게요.”윤이서는 하지환의 뒤를 따라갔다.“어디 살아요?”“시내에서요.”“방 하나 세낸 거예요?”시내는 다 비싼 땅이라 하지환이 살 수 있는 집이라면 방이 하나밖에 없겠지?하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별장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많이 불편하죠? 아니면……. 나한테로 이사 와서 지내도…….”윤이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고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하지환은 그녀의 머리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아니에요.”그는 그녀와 함께 지내면 오늘 같이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다시 발생할까 봐 두려웠다.“아.”윤이서가 대답 할 때 말투 속에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실망감이 담겼다.이 밤은 불면의 밤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하지환은 도심에 있는 아파트 꼭대기층으로 돌아와 옷을 벗은 뒤 차가운 욕조에 몸을 던졌다.키스의 뒤끝이 심해서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회복되었다.윤이서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
윤이서의 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었다.“회사는 그렇게 오랫동안 성장해 왔는데, 아직도 HS 그룹과 연관이 있다고요?”그녀는 줄곧 GM이 이미 HS의 곁을 벗어났고 그들이 도와주는 건 가끔 프로젝트를 소개해주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윤재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GM 그룹은 하씨 집안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업계의 경쟁이 너무 치열했고, 그들의 도움만 없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적자만 났을 것이다.윤이서는 힘없이 웃었다.어쩐지 나보고 마음 굳게 먹고 그에게 시집가라고 하더니.“이서야, 아빠도 이러고 싶지 않아. 지금 너만이 아빠를 구할 수 있어. 너도 윤씨 집안이 망해서 더 이상 일어설 가능성이 없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윤이서는 눈물을 글썽였다.“가문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하는 건가요?”윤재하는 윤이서의 눈을 보지 못했다.“이서야, 어쩔 수가 없구나. 가문을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만 행동 할 수 없어.”윤이서는 처량한 웃음소리를 내며 눈앞에 자신을 키운 아버지를 보며 고통스럽게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하은철은요?”“그는…… 아마 회사에 있을 거야.”“저를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가요.”“이서야…….”윤이서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가요.”윤재하는 입술을 움직이려다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윤이서를 데리고 하씨 그룹으로 갔다.지금의 윤이서는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HS 그룹 CEO 사무실.하은철은 하지환을 데리고 사무실을 둘러본 뒤 우쭐거렸다.“어때요? 이 사무실은 제가 직접 인테리어를 설계한 건데, 좀 다르죠?”하지환은 입을 열었다.“너 오늘 기분이 좋아보이는군.”하은철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정말 무슨 일이든 작은아버지의 눈을 속일 수 없군요.”“말해봐,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기쁜 거야, 아침 일찍 부터 나를 부르다니.”하은철은 웃음을 띈 채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 할 수는 없으니 둘째 작은아버지와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며칠 전에 제가
하은철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넌 지금 혼인 신고 하고 있어야 하는데.”윤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하은철의 맞은편에 앉았다.“넌 투자를 철수하지 않을거고, 나도 이혼하지 않을 거야.”하은철은 고개를 들어 웃으며 말했다.“윤이서,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니?”“나 아주 잘 알고 있어.”윤이서는 평화롭게 말했다.“나는 오늘에야 우리 집안이 하씨 집안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네가 나의 신장을 원하는 것도 지나친 욕심이 아니긴 해.”여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붉은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하지만 윤수정과 함께 있기 위해 나를 죽이려는 건 너무 했어.”하은철은 눈살을 찌푸렸다.“윤이서, 너 나한테 누명 씌우지 마, 내가 언제 너를 죽였다고…….”윤이서는 손을 흔들며 하은철의 말을 끊었다.“GM 그룹에 투자한 돈은 너의 것이니, 네가 투자를 철수하고 싶다면 나도 막을 수 없지. 그러나 GM 그룹에게 숨돌릴 기회 정도는 주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계산해 봤는데, 회사의 장부에 100억만 있어도 한동안은 운행할 수 있어. 나에게 이 돈을 모을 수 있도록 보름만 시간을 줘.”하은철은 가볍게 키득거렸다.“보름? 100억? 윤이서, 너 정말 성에서 사는 공주님이구나. 정말 온 세상이 너를 위해 도는 줄 알아?”“줄 거야 말 거야?”윤이서는 하은철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고 눈빛은 확고했다.하은철은 이렇게 의지가 강한 그녀를 처음 봤다.그의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윤이서,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사실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없었어. 네가 나한테 시집 오고 신장만 수정이에게 주면 그녀도 건강해지고, 우리의 일에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순순히 우리 집안의 사모님이 되면 평생을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하필이면 가난한 놈과 결혼했으니…….”윤이서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말투도 차가워졌다.“너는 그를 평가할 자격이 없어.”그녀가 이렇게 그
하은철은 정말 알고 싶었다. 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줄곧 감정에 무관심했던 둘째 큰아버지가 첫눈에 반해 직접 결혼까지 할 수 있었는지.하지환은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하은철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째 작은아버지, 혹시 작은어머니가 너무 예뻐서 집안에 숨기고 우리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가요?”하지환은 부인하지 않았다.하은철은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내가 맞혔군요! 안 돼요, 둘째 작은아버지, 이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잖아요. 가능한 한 빨리 나에게 둘째 작은어머니 만나게 해줘요!”하지환은 고개를 들어 하은철이 흥분하고 기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검은 눈동자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곧 볼 수 있을 거야.”……HS 그룹을 떠난 윤이서는 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주소록을 뒤져 사람을 찾았다.100억은 상류사회에 있어서 단지 몇 끼의 밥값일 수 있지만, 그들이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도록 설득하는건 하늘에 별 따기였다.특히 하은철은 이미 투자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니 그녀가 돈을 빌리러 가면 하씨 집안과 윤씨 집안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그렇다면 사람들은 더욱 더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윤이서는 갑자기 너무 지쳤다.만약 윤씨네 집안이 진작에 하씨네 집안에서 벗어났다면, 이 지경이 됐을까.진정으로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은 부모님의 태도였다.윤씨 집안을 다시 4대 가문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녀의 생사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윤이서는 눈을 깜박거리다 눈을 감았다.때때로 그녀는 예전에 그들이 자신에게 잘 해준 것도 단지 그녀가 미래의 하씨 집안 사모님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윤이서가 눈물을 닦으면 닦을수록 눈물의 양이 많아졌다.결국 그녀는 아예 닦지않은 채 멍하니 앉아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눈물이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뒀다.얼마나 지났을까 문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윤이서는 황급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문을 열었다.문밖에 서 있는 하지환을 보았을
잠기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윤이서로 하여금 자신이 하지환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그녀는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희고 작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미안해요, 난…….”하지환의 가슴이 순식간에 멎었다.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얇은 입술을 가볍게 열었다. “내가 빌려줄 수 있어요.”윤이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의심했다.“뭐라고요?”하지환은 그녀의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랐다.“100억.”윤이서는 미간을 펴고 말했다.“하지환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 일은 내가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난 정말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환은 눈 한 번 깜박이지않고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사실 나는 하씨의…….”“나는 당신이 하씨네 회사의 관리층이고 매년 연봉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100억은 그래도 큰 액수예요.”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하씨네 집안 사람이라면 아마 그만큼의 돈이 있겠죠.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왜요?” 하지환의 눈동자는 먹통을 뒤집어 놓은 듯 새까맸다.“예전의 나는 하은철에게 시집가기 위한 존재였어요. 그때 가족들은 나를 특별하게 대했고, 내가 무엇을 원하든 그들은 나를 만족시켰죠.하늘의 달을 원하더라도.하지만 내가 포기하자 모두가 변했어요.전에 나는 탐욕이라는 두 글자가 사람을 이렇게 추악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믿게 되었고요.그래서 나는 차라리 평범한 사람과 함께 있을지언정 그 어떤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하지환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래서, 만약 내가 하씨네 사람이라면, 윤이서 씨는 나와 이혼할 건가요?”윤이서는 고운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하지환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그러나 윤이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 밥은 먹었어
다음 순간, 스크린이 어두워지더니 잠시 후에 다시 밝아졌다.진수는 화면을 살짝 보았는데,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그는 바로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고 공손하게 말했다.“도련님.”이 말이 나오자 떠들썩한 룸은 조용해졌다.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진수의 표정은 시종일관 공손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전에는 분명…… 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저쪽에서 전화를 끊은 후에야 그는 윤이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윤이서 아가씨 맞죠? 방금 회의 중이라 전화 못 봤어요. 볼일 있다고요? 그래요, 그럼 우리 만나서 얘기 해요. 그래요, 내일 저녁에 봐요.”……윤이서는 전화를 끊고 온몸은 한결 홀가분해졌다.하지환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좋은 소식 있어요?”윤이서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맞아요, 내일 약속 하나 잡았어요.”“남자예요, 여자예요?”윤이서는 하지환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남자요.”하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그에게 돈을 빌릴 작정인가요?”“네,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 있거든요. 그래서 시도해보고 싶어요.”윤이서도 큰 희망을 가지지는 못했다.하지환은 숙연한 얼굴로 윤이서 맞은편에 앉았다.그가 이러는 것을 보고 윤이서는 왠지 긴장했다.“왜요?”하지환은 잠시 침묵하다 질문을 했다.“윤이서 씨, 결과가 정해져 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이서는 턱을 짚으며 영문 모른 채 하지환을 바라보았고, 한참 뒤, 어렵게 입술을 움직였다.“그러게요, 내가 왜 그 생각도 못했지. 여기는 북성, 하씨 집안의 천하죠. 하은철이 내가 지기를 원하면 난 질 수밖에 없고, 내가 이기기를 원하면 난 이길 수 있죠. 그러니 내가 돈을 빌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두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어요.”그녀가 바로 깨닫는 것을 보고 하지환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숨기고 있었다.“그래요, 그래서 하은철이 원하는 것은 어떤 결과라고 생각하죠?”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그야 당연히 내가 지기를 바라겠죠
“내가 오늘 부탁할 게 있어서…….”진수는 손을 흔들었다.“에이, 윤이서 아가씨는 저랑 처음으로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죠? 우리의 규칙은 먼저 술을 마시고 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말이 끝나자 그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웨이터,가장 좋은 와인 한 병 가져오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술 한 병을 들고 올라왔다.진수는 받자마자 직접 윤이서에게 술을 따랐다.“윤이서 아가씨,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와인인데, 자, 마셔봐요.”윤이서는 가뜩 따른 와인 잔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싫은 거예요?” 진수는 얼굴을 붉혔다.윤이서는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마셨다.진수의 얼굴은 순간 보기 흉하게 변했다.“보아하니, 윤이서 아가씨는 성의가 없군요. 기왕 이렇게 된 이상, 가봐요.”윤이서는 황급히 말했다.“아니요, 단지 내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요…….”진수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윤이서는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들고 단숨에 마셨다.진수는 그제야 다시 웃음을 얼굴에 띈 채 말했다.“그래요. 자, 다시 윤이서 아가씨에게 술을 따라줘.”이번에도 술을 가득 따랐다.윤이서는 억지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술을 마시자 그녀는 나른하게 의자에 쓰러졌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다.“안 돼, 진 사장님, 저…… 전 마실 수 없을 거 같아요.”진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음흉한 눈빛으로 탐욕스럽게 윤이서를 쳐다보았다.“그래요? 한 잔 더 하면 100억 빌려줄게요.”윤이서는 어렵게 고개를 들었지만 눈동자는 반짝였다.“정말이요?”진수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서 윤이서의 잔을 가득 채웠다.“그럼 성의를 보여줘야죠.”윤이서는 애를 쓰며 술잔을 들어 올렸고, 붉은 입술이 컵에 닿자마자 발밑이 미끄러지더니 비틀거리며 땅에 넘어졌고 와인도 바닥에 쏟아졌다.그녀는 땅에 엎드려 일어서지 못했다.진수는 이 상황을 보고 윤이서의 곁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었다.“취했어요?”윤이서는 어렴풋하게 눈을 부릅뜨며 말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