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서는 임하나의 상상에 어이 없어 했다.“정말 재벌 집 도련님이라면, 무엇 때문에 나와 계약 결혼을 하는 거지?”임하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참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자, 내가 돌아가서 그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잖아?”임하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작별인사를 한 다음, 윤이서는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어요.”물론 그들은 이미 결혼한 사이지만 여전히 각자의 집에서 지냈다.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들은 제대로 된 밥 한 끼도 같이 먹지 못했다.“좋아요.” 하지환의 입가가 올라갔다.“그럼…… 우리 집으로 와요. 뭘 먹고 싶어요? 내가 장보러 갈게요.”“윤이서 씨가 좋아하는 거 만들면 돼요.”윤이서는 갑자기 하은철이 생각났다.8년 동안, 그녀는 매번 하은철에게 밥을 해 줄 때마다, 그는 마치 메뉴를 읽는 것처럼 한가득 시켰지만, 그녀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마치…… 그녀는 취향이 없다는 것처럼.“그래요.”석양을 맞은 듯한 윤이서의 목소리는 생기가 넘쳤다.하지환의 마음도 움직였는지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럼 집에서 나…… 기다려요.”집에서 기다리라는 이 말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윤이서는 응 하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하지환은 전화를 끊고 사람들의 궁금해하는 눈길을 무시한 채 계속 말했다.“현재 한국의 시장 중심은 화장품에 있다, 이 조사 연구 결과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나?”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방금 본 부드러운 대표님의 모습은 그들의 착각일 뿐이였다고 생각했다.“다른 의견 없으면 퇴근.”하지환은 일어나서 핸드폰과 서류를 들고 회의실을 떠났다.서로 쳐다보며 어쩔 바를 모르는 고위층만 남긴 채로.그리고 고위층 그들은 모두 국외에서 전근되었는데, 하지환을 따라다닌지 10여 년이 지나고 처음으로 하지환이 조퇴하는 것을 본 것이다.그들은
“그건 제 친구의 능력이 훌륭하다는 것을 말해주죠.”하지환은 티 나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뭐 만들었어요?”윤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가 돌린 화제를 따라 열정적으로 그녀가 만든 것들을 소개했다.밥을 배불리 먹은 후, 하지환은 본인이 나서서 직접 설거지를 한다고 말했고, 윤이서는 컴퓨터를 꺼내 영화 한편을 찾았다.그건 코미디 영화인데, 윤이서는 영화 보는 것에 너무 집중하여 집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하지환이 나오면서 그녀를 보았다.윤이서는 카펫에 앉아 배를 붙잡고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윤씨네 아가씨의 우아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하지환은 문득 윤이서가 하은철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그녀가 하씨 집안 행사에 참석한 사진을 뒤져봤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 장 한 장마다 그녀는 우아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생기를 느낄 순 없었다.근데 지금 이 순간의 그녀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전에 느끼지 못했던 이 조용함과 아늑함을 즐겼다.그러나 전화벨 소리가 이 고요함을 깨뜨렸다.윤이서는 책상 위의 전화를 힐끗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성지영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그날 그들이 한바탕 싸운 이후로 부모님은 다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마치…… 정말 그녀란 딸이 없어진 것처럼.그러나 결국 그들은 부모님이었기에 윤이서가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운명을 인정하고 받았다.“이서야,” 성지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너는 왜 아직도 이혼하러 가지 않았니?!”어제 그녀는 윤수정을 보러 갔다가 마침 하은철을 만났다.하은철은 평소에도 그녀에 대한 태도가 좋지 않았는데, 어제도 만나자마자 욕설을 퍼부었고 그녀에게 딸을 잘못 교육했다고 말했다!성지영은 당시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후에 하은철의 경호원을 통해 며칠 전 하은철이 사무소에서 윤이서가 기혼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자신의 딸을 강요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자신의 실력이나 좀 키워요!”성지영은 하지환의 목소리인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이건 우리 집안의 일이니 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마! 너희들 지금 어디에 있니?”윤이서의 집은 아니겠지?“신경 쓰지 마세요.”하지환은 장모에게 호감 같은 게 없었기에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만약 윤이서 씨가 당신의 딸이라면 앞으로 더 이상 하은철에게 시집가라는 말을 꺼내지 마세요. 윤이서 씨가 싫어할 뿐만 아니라 저도 싫어하니까.”성지영은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은철이랑 비교하는 거야?”하지환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윤이서는 그의 얇은 입술이 굳게 닫힌 것을 보고 또 화가 난 걸 알아차렸다.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졌다.“고마워요.”하지환은 눈을 들어 맑은 눈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들이 목구멍에서 막혔다.“일찍 쉬어요!”“그래요.” 윤이서가 일어섰다. “그럼 하지환 씨는…….”“나 먼저 갈게요.”윤이서는 하지환의 뒤를 따라갔다.“어디 살아요?”“시내에서요.”“방 하나 세낸 거예요?”시내는 다 비싼 땅이라 하지환이 살 수 있는 집이라면 방이 하나밖에 없겠지?하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별장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많이 불편하죠? 아니면……. 나한테로 이사 와서 지내도…….”윤이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고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하지환은 그녀의 머리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아니에요.”그는 그녀와 함께 지내면 오늘 같이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다시 발생할까 봐 두려웠다.“아.”윤이서가 대답 할 때 말투 속에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실망감이 담겼다.이 밤은 불면의 밤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하지환은 도심에 있는 아파트 꼭대기층으로 돌아와 옷을 벗은 뒤 차가운 욕조에 몸을 던졌다.키스의 뒤끝이 심해서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회복되었다.윤이서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
윤이서의 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었다.“회사는 그렇게 오랫동안 성장해 왔는데, 아직도 HS 그룹과 연관이 있다고요?”그녀는 줄곧 GM이 이미 HS의 곁을 벗어났고 그들이 도와주는 건 가끔 프로젝트를 소개해주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윤재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GM 그룹은 하씨 집안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업계의 경쟁이 너무 치열했고, 그들의 도움만 없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적자만 났을 것이다.윤이서는 힘없이 웃었다.어쩐지 나보고 마음 굳게 먹고 그에게 시집가라고 하더니.“이서야, 아빠도 이러고 싶지 않아. 지금 너만이 아빠를 구할 수 있어. 너도 윤씨 집안이 망해서 더 이상 일어설 가능성이 없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윤이서는 눈물을 글썽였다.“가문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하는 건가요?”윤재하는 윤이서의 눈을 보지 못했다.“이서야, 어쩔 수가 없구나. 가문을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만 행동 할 수 없어.”윤이서는 처량한 웃음소리를 내며 눈앞에 자신을 키운 아버지를 보며 고통스럽게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하은철은요?”“그는…… 아마 회사에 있을 거야.”“저를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가요.”“이서야…….”윤이서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가요.”윤재하는 입술을 움직이려다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윤이서를 데리고 하씨 그룹으로 갔다.지금의 윤이서는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HS 그룹 CEO 사무실.하은철은 하지환을 데리고 사무실을 둘러본 뒤 우쭐거렸다.“어때요? 이 사무실은 제가 직접 인테리어를 설계한 건데, 좀 다르죠?”하지환은 입을 열었다.“너 오늘 기분이 좋아보이는군.”하은철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정말 무슨 일이든 작은아버지의 눈을 속일 수 없군요.”“말해봐,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기쁜 거야, 아침 일찍 부터 나를 부르다니.”하은철은 웃음을 띈 채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 할 수는 없으니 둘째 작은아버지와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며칠 전에 제가
하은철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넌 지금 혼인 신고 하고 있어야 하는데.”윤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하은철의 맞은편에 앉았다.“넌 투자를 철수하지 않을거고, 나도 이혼하지 않을 거야.”하은철은 고개를 들어 웃으며 말했다.“윤이서,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니?”“나 아주 잘 알고 있어.”윤이서는 평화롭게 말했다.“나는 오늘에야 우리 집안이 하씨 집안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네가 나의 신장을 원하는 것도 지나친 욕심이 아니긴 해.”여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붉은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하지만 윤수정과 함께 있기 위해 나를 죽이려는 건 너무 했어.”하은철은 눈살을 찌푸렸다.“윤이서, 너 나한테 누명 씌우지 마, 내가 언제 너를 죽였다고…….”윤이서는 손을 흔들며 하은철의 말을 끊었다.“GM 그룹에 투자한 돈은 너의 것이니, 네가 투자를 철수하고 싶다면 나도 막을 수 없지. 그러나 GM 그룹에게 숨돌릴 기회 정도는 주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계산해 봤는데, 회사의 장부에 100억만 있어도 한동안은 운행할 수 있어. 나에게 이 돈을 모을 수 있도록 보름만 시간을 줘.”하은철은 가볍게 키득거렸다.“보름? 100억? 윤이서, 너 정말 성에서 사는 공주님이구나. 정말 온 세상이 너를 위해 도는 줄 알아?”“줄 거야 말 거야?”윤이서는 하은철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고 눈빛은 확고했다.하은철은 이렇게 의지가 강한 그녀를 처음 봤다.그의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윤이서,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사실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없었어. 네가 나한테 시집 오고 신장만 수정이에게 주면 그녀도 건강해지고, 우리의 일에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순순히 우리 집안의 사모님이 되면 평생을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하필이면 가난한 놈과 결혼했으니…….”윤이서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말투도 차가워졌다.“너는 그를 평가할 자격이 없어.”그녀가 이렇게 그
하은철은 정말 알고 싶었다. 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줄곧 감정에 무관심했던 둘째 큰아버지가 첫눈에 반해 직접 결혼까지 할 수 있었는지.하지환은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하은철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째 작은아버지, 혹시 작은어머니가 너무 예뻐서 집안에 숨기고 우리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가요?”하지환은 부인하지 않았다.하은철은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내가 맞혔군요! 안 돼요, 둘째 작은아버지, 이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잖아요. 가능한 한 빨리 나에게 둘째 작은어머니 만나게 해줘요!”하지환은 고개를 들어 하은철이 흥분하고 기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검은 눈동자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곧 볼 수 있을 거야.”……HS 그룹을 떠난 윤이서는 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주소록을 뒤져 사람을 찾았다.100억은 상류사회에 있어서 단지 몇 끼의 밥값일 수 있지만, 그들이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도록 설득하는건 하늘에 별 따기였다.특히 하은철은 이미 투자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니 그녀가 돈을 빌리러 가면 하씨 집안과 윤씨 집안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그렇다면 사람들은 더욱 더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윤이서는 갑자기 너무 지쳤다.만약 윤씨네 집안이 진작에 하씨네 집안에서 벗어났다면, 이 지경이 됐을까.진정으로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은 부모님의 태도였다.윤씨 집안을 다시 4대 가문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녀의 생사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윤이서는 눈을 깜박거리다 눈을 감았다.때때로 그녀는 예전에 그들이 자신에게 잘 해준 것도 단지 그녀가 미래의 하씨 집안 사모님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윤이서가 눈물을 닦으면 닦을수록 눈물의 양이 많아졌다.결국 그녀는 아예 닦지않은 채 멍하니 앉아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눈물이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뒀다.얼마나 지났을까 문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윤이서는 황급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문을 열었다.문밖에 서 있는 하지환을 보았을
잠기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윤이서로 하여금 자신이 하지환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그녀는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희고 작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미안해요, 난…….”하지환의 가슴이 순식간에 멎었다.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얇은 입술을 가볍게 열었다. “내가 빌려줄 수 있어요.”윤이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의심했다.“뭐라고요?”하지환은 그녀의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랐다.“100억.”윤이서는 미간을 펴고 말했다.“하지환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 일은 내가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난 정말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환은 눈 한 번 깜박이지않고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사실 나는 하씨의…….”“나는 당신이 하씨네 회사의 관리층이고 매년 연봉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100억은 그래도 큰 액수예요.”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하씨네 집안 사람이라면 아마 그만큼의 돈이 있겠죠.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왜요?” 하지환의 눈동자는 먹통을 뒤집어 놓은 듯 새까맸다.“예전의 나는 하은철에게 시집가기 위한 존재였어요. 그때 가족들은 나를 특별하게 대했고, 내가 무엇을 원하든 그들은 나를 만족시켰죠.하늘의 달을 원하더라도.하지만 내가 포기하자 모두가 변했어요.전에 나는 탐욕이라는 두 글자가 사람을 이렇게 추악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믿게 되었고요.그래서 나는 차라리 평범한 사람과 함께 있을지언정 그 어떤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하지환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래서, 만약 내가 하씨네 사람이라면, 윤이서 씨는 나와 이혼할 건가요?”윤이서는 고운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하지환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그러나 윤이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 밥은 먹었어
다음 순간, 스크린이 어두워지더니 잠시 후에 다시 밝아졌다.진수는 화면을 살짝 보았는데,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그는 바로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고 공손하게 말했다.“도련님.”이 말이 나오자 떠들썩한 룸은 조용해졌다.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진수의 표정은 시종일관 공손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전에는 분명…… 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저쪽에서 전화를 끊은 후에야 그는 윤이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윤이서 아가씨 맞죠? 방금 회의 중이라 전화 못 봤어요. 볼일 있다고요? 그래요, 그럼 우리 만나서 얘기 해요. 그래요, 내일 저녁에 봐요.”……윤이서는 전화를 끊고 온몸은 한결 홀가분해졌다.하지환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좋은 소식 있어요?”윤이서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맞아요, 내일 약속 하나 잡았어요.”“남자예요, 여자예요?”윤이서는 하지환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남자요.”하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그에게 돈을 빌릴 작정인가요?”“네,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 있거든요. 그래서 시도해보고 싶어요.”윤이서도 큰 희망을 가지지는 못했다.하지환은 숙연한 얼굴로 윤이서 맞은편에 앉았다.그가 이러는 것을 보고 윤이서는 왠지 긴장했다.“왜요?”하지환은 잠시 침묵하다 질문을 했다.“윤이서 씨, 결과가 정해져 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이서는 턱을 짚으며 영문 모른 채 하지환을 바라보았고, 한참 뒤, 어렵게 입술을 움직였다.“그러게요, 내가 왜 그 생각도 못했지. 여기는 북성, 하씨 집안의 천하죠. 하은철이 내가 지기를 원하면 난 질 수밖에 없고, 내가 이기기를 원하면 난 이길 수 있죠. 그러니 내가 돈을 빌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두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어요.”그녀가 바로 깨닫는 것을 보고 하지환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숨기고 있었다.“그래요, 그래서 하은철이 원하는 것은 어떤 결과라고 생각하죠?”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그야 당연히 내가 지기를 바라겠죠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거야?’‘맞는 말이었잖아.’‘당신들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고!’한편, 차에 오른 이서가 지환에게 물었다.“소희 씨한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까요?” 지환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안 늦었어.”“안 늦었다고요? 하지만 나는...” 차가 갑자기 멈추자,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왜 그래요?”“도착했어.” 이서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집을 보고는 멍해졌다.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여긴... 우리가 전에 살던 곳이잖아?’이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익숙한 감정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여기서...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냈었지.’“어서 들어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냈다.하지만 옷에 묻은 핏자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참, 이 집에도 옷이 있을 텐데...’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욕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지환 씨는... 거실에 없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까치발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하지만 계단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지환과 맞닥뜨렸다.이서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목욕 수건만 두른 상태였고, 한 손은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던 지환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지자, 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비... 비켜요. 옷 가지러 갈 거라고요...!”지환은 힘겹게 시선을 돌려 2층을 바라보았다.“내가 가져다줄게. 너는 욕실로 돌아가.”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욕실로 돌아갔다.그녀는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느라, 이후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한창 샤워하던 이서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문
운전기사는 놀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이서는 잠시나마 그 남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날 노리는 거구나.’ 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뼈를 깎는 고통이 밀려오자, 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서의 눈을 가렸다.“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도 너처럼 보기 드문 미인을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깝거든?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임무인걸. 임무는...”이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선혈이 자기 얼굴과 목, 그리고 온몸에 튀는 것을 느꼈다. 그 선혈은 뜨겁고 끈적거리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분명히 이서의 피는 아니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쿵!잠시 후, 그 남자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에 쓰러졌다. 이서는 그제야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차량 지붕에는 굽은 칼을 현란하게 돌리고 있는 어둠의 호리병이 있었다. 그가 쥔 칼에 검붉은 선혈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이서는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개의치 않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왜요, 문제 있어요?” 이서는 재빨리 좌우를 살폈는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호리병을 보며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의외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이서가 말했다.“그럴 리가요.”“아주 능숙해 보이는데요?”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라는 말, 정말입니까?”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다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 연결음이 이어지던 찰나
점심부터 마음이 흐트러져 있던 이서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사무실을 나섰다.부하 직원들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윤 대표님이요,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그러게요, 데이트 가시는 건 아니겠죠?”“데이트는 무슨요, 대표님은 이미 결혼하셨잖아요.” “결혼이라뇨, 이미 이혼한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않으면, 윤 대표님의 남편분이 이렇게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을 리 없잖아요.” “참, 요즘 윤 대표님의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아 보였잖아요. 어쩌면 정말 이혼을 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지 않을까요? 윤 대표님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지셨잖아요.” “지금도 평범한 직장인과 어울리는 건, 윤 대표님께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말도 마세요.”“생각 좀 해보세요, 누가 대표님의 남편분이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비아냥댄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한창 열띤 이야기가 오가던 찰나,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뭐가 기분 나쁘다는 거죠? 어차피 윤 대표님은 조만간 그분을 본인과 같은 위치로 올려놓으실 텐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고이서였는데,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고 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표님께서 남편 분을 도와 회사를 차리게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고이서는 영문을 모르는 바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부러워하기 시작했다.“와, 윤 대표님의 남편분이 정말 부러워요. 가진 것도 없이 돈줄과 결혼해서 인생이 편 거잖아요.” “그러게요, 윤 대표님께서 회사를 차려주신다니,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네요!”“저도 그런 와이프를 얻고 싶습니다!” “...”고이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욱 우스워졌고, 이미 차에 오른 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곧 숨길 수 없는 광기가 드러났다.‘다 내가 가져야 했던 것들이야!’ ‘네 것이 아닌 내 것!’‘저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고이서를 바라보았다.“저는 단지... 고 팀장님, 아무래도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넋이 나간 고이서는 그제야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급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면 다행이네요. 외국에서 만난 대부분의 상사분은 개인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거든요.”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에는 반감을 보이기도 하셨어요.”“죄송합니다. 윤 대표님, 제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신다면, 언제든지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저는 고 팀장님이 다정히 대해주시는 게 정말 좋다고 생각해요. 인간미 있어 보이잖아요.”이서의 표정에 확실히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고이서는 그제야 몰래 한숨을 돌리고 살짝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나섰다.하지만 이서는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생각에 잠겼고,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 다시금 고이서의 자료를 살폈다.하지만 그 어떠한 문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까 그 표정은...’‘그 당황한 표정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거였어.’‘왜 그렇게 당황한 거지?’ 이서는 하루 종일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느라 소희가 걸어온 전화를 못 받을 뻔했다.“나한테 밥을 사주겠다고?”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심 대표님이 윤씨 그룹의 대표인 나와 결탁했다고 오해할까 봐 두렵진 않아? 다른 심씨 가문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 사람들은 형부가 YS 그룹의 대표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절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매일 같이 언니가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고요.][게다가 저희 아빠는 언니가 우리를 도와줬다고, 언니와 형부가 아니었으면 제가 얄짤없이 심씨 가문에서 쫓겨났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두 분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으시대요.]“이제야 호칭을 바꿨구나.”이서가 웃으며 물었다.“어때, 새 부모님을 받아들인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소희는 다소 쑥스러워했다.[예전에는 왜 저를 잃어버렸는지 원망했었는데, 지금
“하지만, 1위와 2위는 오랫동안 주문을 받지 못했어.”지환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이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녀는 모처럼 지환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지환은 이 기회를 틈타 허튼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 사람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 이서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요? 하지환 씨는 다른 사람의 소문을 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요.” 지환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어쨌든 전설적인 인물들이잖아. 어때, 들어볼래?” 이서도 지환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환은 표정을 풀고 이야기를 엮기 시작했다.“다크웹의 1등과 2등은 부부 사이이고, 어린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냈대. 하지만 어렸을 때 집안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결국은 도둑질에 발을 들인 거야.”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고, 남자는 반죽음이 되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대.”“그 후에 강해져야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훈련을 시작한 거래.” “결국은 다크웹의 거물급 인물이 돼서 소문만으로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게 된 거지.”이서가 이 말을 듣고 잠이 밀려오는 듯했다.“아, 그래요? 진부한 무협 이야기 같은데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 지환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미안해.”“사실 내가 지어낸 이야기야. 이서야,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어.” 그 순간,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은 고개를 한쪽으로 치우친 채 두 눈을 꼭 감은 이서를 보자, 긴장된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손을 들어 이서의 뺨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럼에도 이서가 눈을 뜨지 않자, 그제야 안심한 지환은 그녀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익숙한 촉감에 지환은 심장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다음날.잠에서 깨어난 이서는 자신이 병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서가 말했다.“저야 모르죠. 오빠가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상언은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역시 훌륭한 여동생이라니까.”상언이 떠나자, 어둠의 호리병이 말했다.“저도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네요. 이미 약속한 이상, 의사를 번복하진 않을게요.”의문을 표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마주한 어둠의 호리병은 조급해했다.“약속한 건 지킬 건데, 그 표정은 뭡니까? 과연 부부답네요. 표정까지 똑같으니까요.” 이서와 지환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어둠의 호리병이 비아냥대기 시작했다.“보세요, 얼굴색은 물론이고, 표정까지 똑같잖아요.” “됐어요, 됐어.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네요. 여기에 더 있다가는 눈칫밥만 먹을 것 같다고요.” “저희는...”이서가 막 입을 열었는데, 어둠의 호리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참, 하 대표님, 보수는 두둑이 챙겨주실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한 값을 드릴 테니까요.”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어둠의 호리병은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하며 떠났다.별장 안에는 이제 이서와 지환만 남았다. 이서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무엇이든 말하지 않고 가버리면 지환에게 항복하는 것 같아서 계속 망설였다. “먼... 먼저 가볼게요.”이서가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이서야.”지환이 이서를 부르자,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날의 일은 내가 잘못했어.”지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용서해 줘.”이서는 고개를 돌렸으나, 지환을 쳐다보지는 못했다.“언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네가 소지태를 만났던 날 말이야. 내 질투로 네가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 나는 몇 번이고 너한테 내 진짜 신분을 말할 기회가 있었어. 내가 올바른 판단을 했다면, 우리 사이도 오늘처럼 되진 않았을 거야.”“하지만...” “내 분노마저 너한테 풀었으니, 나는 용서받을 수 없겠지.” 그 순간, 이서가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게다가 그 일에는 하지환 씨뿐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