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월요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간 성연은 교실에서 송아연을 보게 되었다.교실에 들어온 학우들 대부분이 송아연을 손가락질했다.[송아연이 저런 애일 줄은 정말 몰랐다니깐. 임정용이 아연일 좋아했어도 선을 넘는 짓은 하지 않았잖아. 너무 심했어.][임정용이 좀 멍청하긴 했어도 송아연에게 잘 했지. 요새 남자애들 눈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니까, 정말. 송아연 꽁무니 쫓아다니는 애들, 우리 반에도 몇 명 있지.][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야, 뭐야? 완전 내숭이야. 나는 쟤 옆은 아예 가지도 않을 거야. 너무 구역질 나. 경찰서에도 갔던 애잖아. 저런 재수 덩어리에게 옮으면 안되잖아.]“…….”평소 송아연은 어디를 가든지 공주 대접을 받았고 반에서도 아이들과 잘 지낸 편이었다.이런 저런 상도 많이 타면서 추켜세움만 받던 애가 언제 이런 비난을 받아 보았겠는가.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아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린 채 힘을 주어 말아 쥐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손톱이 살에 파고들 정도였지만 아연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자신에게 향하던 것은 언제나 칭찬과 사랑이었다. 절대 이런 비난이 아니라.곁에 서 있던 추종자가 아연을 위해 애써 변명했다.“모든 건 오해야. 임정용이 깨어나서 말했어. 아연이 음료수를 준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해치려 그랬다고, 완전히 오해라고 말이야. 그러니 너희들 더 이상 이상한 소리하지 마.”죽어라고 자기 손을 꼬집은 아연이 고개를 들며 눈시울을 붉혔다.“누가 내 서랍에 물건을 넣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경찰서에선 정말 무서웠어…….”말을 하던 아연이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린 듯 울음을 터뜨렸다.불쌍하게 책상에 엎드려 우는 모습이 무척이나 억울한 일을 당한 듯이 보여서 또다시 많은 아이들이 속아 넘어갔다.그러자 아연을 편들며 말하는 아이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어쩌면 송아연은 진짜 아무 잘못 없을 지도 모르지. 임
저녁이 되어 학교가 파한 후.수업을 마친 성연은 집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보통 때처럼 학교 뒷문을 통해 골목 쪽으로 나갔다.그런데 막 뒷문을 나선 순간 강씨 집안의 운전기사가 아니라 송종철이 앞에 나타났다.송종철이 이처럼 집요할 줄은 몰랐다.지난번 학교에 왔을 때 충분히 망신 주지 못한 게 짜증났는데, 감히 오늘 또 왔다.“볼 일 있어요?”담담한 모습의 성연이 송종철을 힐끗 쳐다보았다.성연의 저런 태도에 매번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화가 나는 송종철이다.표정이 굳었지만,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해서 잠시 참았다.우는 것보다 못한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성연아, 네가 강씨 집안으로 간 지도 여러 날 되었지 않니?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해서 집에서 같이 밥 먹으려고 널 데리러 왔다.”송종철은 이번에 혼자 오지 않았다.꽤 큰 싸움을 준비한 듯하다. 옆에 모두 네 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었다. 앞, 뒤로 두 명, 좌우로 붙어 선 두 명이 협공을 취하는 자세다. 만약 성연이 반항한다면 바로 붙잡을 수 있도록.성연의 능력으로 이 경호원들 몇 명쯤 해결하는 건 문제도 안된다.송종철은 정말 방법이 없는 사람이다. 데려온 이들마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꽃받침들이다. 경호원이라는 가죽을 덮어쓴 불량배들에 불과한.참, 송종철도 고생이다. 시골에서 온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렇게나 크게 움직이다니, 정말 고마울 지경이다.성연 또한 반항할 생각은 없다. 우선 실력을 숨겨야 했고, 또 송종철이 직접 나선 걸 보니 상당히 급한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릴 작정인지 지켜볼 생각이다.일 없이 찾을 송종철이 아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그런 생각을 하며 성연 역시 능청스럽게 예의상의 인사를 건넸다.“아버지가 이렇게 친절을 보이시다니요. 전화 한 통이면 되는데. 이처럼 과분한 대우에 정말 얼떨떨하네요.”송종철이 조급할수록 성연은 더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마치 고양이가 쥐를 데리고 장난치는 것처럼, 아주 재미있어 하는
성연은 송종철의 명령에 반항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리하게도 강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진은 서재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일하는 데 방해받지 않기 위해 보통 서재에 갈 때는 휴대폰을 지니고 가지 않는 무진이다.그때, 비서 손건호가 휴대폰을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휴대폰 화면이 계속 반짝거렸다.고개를 든 무진이 목을 주무르며 물었다. “왜?”“보스, 사모님의 전화입니다.”“이 시간이면 하교할 때 아니야? 운전기사가 데리러 가지 않았어?”무진의 날카롭게 뻗은 눈썹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손건호는 아무런 대답없이 휴대폰을 무진의 눈앞으로 내밀었다.그 순간 또 언제부터 보스는 사모님의 하교 시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모든 일들이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원래의 궤도를 이탈해서 말이다.휴대폰을 건네어 받은 무진이 수신 버튼을 누르며 귓가에 가져다 댔다.전화가 연결되자, 바로 성연의 음성이 들렸다.“우리 아버지가 무진 씨를 식사에 초대하셨어요. 방금 학교 교문 입구까지 절 데리러 오셨어요. 또 경호원도 같이 왔는데, 와 정말 볼 만했어요. 어찌나 정중한 지 제가 꼭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고요. 무진 씨도 오면 좋겠어요.”성연의 말은 조롱기가 다분했다.어쨌든 성연은 자신의 친딸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은 혈연관계인 것이다.강무진을 불러 내기 위해서 여러 명의 경호원들로 협박을 했는데도.조롱의 말을 못 알아들은 송종철은 성연이 진짜 좋아한다고만 여겼다.정말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애라고 생각하니 속에서 비웃음이 나왔다.물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보아하니 강씨 집안에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강씨 집안으로 간 지 오래 되었는데도, 부자들의 습관 같은 게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하지만, 무진은 송종철의 생각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성연의 음성을 듣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직설적이면서 냉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자기가 뭐라고, 안 만나!
화가 나 씩씩 대며 가슴을 들썩이던 송종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역시 송성연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저런 이용 가치도 없는 애한테 희망을 걸다니.지금 당장 100억이 필요한 상황인데, 강무진이 아니면 어디 가서 구하단 말인가?지금은 수입보다 지출이 월등히 많은 실정이다. 회사는 자금을 필요로 했고, 집, 차 등 생활 곳곳에서 돈이 들었다.이전에 돈이 있을 때는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돈이 없으니, 회사의 구멍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고, 임수정도 잔소리만 해댔다. 그라고 어디 쉬웠겠나?정말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나머지, 성연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던 거지.송종철이 거래를 하듯 성연을 어르기 시작했다.“널 시집보낼 때, 강씨 집안에서 지참금으로 10억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주지 않으려 한다. 만약 네가 이 돈을 받도록 도우면 2억을 떼서 주마.”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제까짓 게’ 하며 성연을 얕잡아보았다.시골 사람이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2억을 준다고 했으니, 이만하면 많이 생각해 준 셈이다.소탐대실 하다 한 푼도 건지지 못할까 봐 눈물을 머금고 2억을 주겠다고 했지만,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다.송성연은 자신의 딸이다. 딸이 시집 가며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을 넘겨주는 건 당연한 일이고.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도 있고.성연이 뭔가를 한다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저 결정적인 순간에 약간의 역할만 해주면 되는 것이지. 그런 생각에 성연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송종철이다.오로지 성연이 가진 모든 것을 뽑아 먹을 생각뿐이다.그리고, 당연히 자신의 속셈을 성연이 모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성연의 눈에는 그 속셈이 투명할 정도로 속속들이 다 보였다.참 가소로울 뿐이다.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작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바보 취급하며 휘두를 생각인 모양이다. 분명 결혼 지참금은 100억인데도, 자신에겐 10억이라고 사기치는 것 좀 보소.‘하, 그 100억, 진짜 한 톨 부담감 없이 다 가져도 되겠네.’
송종철이 손을 휘두르는 순간, 성연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챘다.미미한 통증과 함께 팔이 흔들리며 저렸다.송종철이 얼마나 힘을 줬는지.성연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차가운 비수를 품은 듯한 눈동자가 곧바로 송종철을 찔러왔다.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송종철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무섭도록 매서운 기세에 꼼짝 할 수가 없었다.그저 놀라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제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그러나 한순간 뭔가 휙 지나간 듯 성연은 금세 원래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몸으로 확실하게 느끼지 않았다면 착각이라고 생각할 뻔했다.‘송성연, 이 아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불현듯 이 딸의 속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송종철이다.시골에서 올라온 성연을 쉽게 휘두를 수 있다고 줄곧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몇 차례의 계략에도 한 번을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설마 운이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그가 볼 때,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송종철의 마음속에서 점점 의심이 커져갔다.이때 차가운 시선으로 송종철을 바라보던 성연이 입을 열었다.“진짜 때리실려고요? 아무리 그래도 잠시간이지만 강씨 집안의 며느리예요. 제 뺨을 치는 건 강씨 집안의 뺨을 친 것이나 다름없어요. 저는 보잘것없지만, 강씨 집안은 다르지요. 아버지, 잘 생각하세요.”조금 전 성연의 눈빛을 떠올리며 또 강씨 집안과의 여러 관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결론은, 누구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돈을 요구하려던 계획은 이렇게 또 다시 허사가 되고 말았다.성연을 쳐다보니 화가 더 치미는지, 송종철이 연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얼른 가, 가, 빨리.”성연이 차문을 열고 내리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은 듯 송종철은 운전기사를 재촉해서 떠나버렸다.이때, 강무진이 보낸 차가 서서히 성연의 앞으로 와서 섰다.아까 전부터 계속 송종철의 차를 뒤쫓았던 차다.경거망동 말라는 강무진의 지시를 받았던 터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계속해서 그렇게 맞춰 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이 10억이라고 거짓말을 하시네요.”성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으쓱 어깨를 들어올렸다.집안의 허물은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법. 성연 또한 원래는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달려들어 뺨을 때리려는 판국이니,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무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지참금이 그 정도밖에 안된다는 말이 나가면,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 망신스럽다고 질색할 것이다.손건호는 또 참지 못하고 속으로 궁시렁댔다.‘송종철, 참 인물은 인물이다. 10억이라고 딸을 속여?’‘북성 제일의 유력 가문 강씨 집안에서 10억이면 껌 값도 안 되는구만.’‘강씨 집안 장손의 결혼 지참금이 10억이라는 건 말도 안되지.’저런 아버지를 둔 사모님에게 동정심이 이는 건 어쩔 수 없다.‘정말 사람도 아니야, 어떻게 딸한테?’하지만 성연은 외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뭐 어쨌든, 100억이 성연의 손에 들어온 이상 송씨 일가는 더 이상 이 돈에 손대지 못할 것이다.‘땡전 한 푼도 줄 수 없어.’송종철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임수정이 득달같이 달려와 다그쳤다.“성연이는?”“그 계집애 얘기는 하지도 마! 재수없어!”송종철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었다.“아니 어떻게 된 거야?” 임수정은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일이 잘못되었구나 싶으니, 자연 말투도 날카로워졌다.성연과 무진이 했던 말을 송종철이 그대로 들려주었다.잔뜩 성이 난 임수정이 성질을 부리며 송종철을 닦아세웠다.“정말 하나 도움이 안돼. 어떻게 어린 여자애 하나 못 데려와요? 강씨 미치광이가 사람을 괄시해도 유분수지 말이야. 그래도 명색이 자기 장인이잖아?”강무진이 제아무리 대단한 신분이라 한들 겨우 절름발이, 미친 놈일 뿐이야,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면서 누가 누굴 업신여긴다는 건지.송종철 역시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할머니의 비호 아래에서 제마음대로 구는 저 미치광이를 상대로는.강씨 집안
마침, 며칠 후면 북성남고의 월례고사가 돌아온다.송성연, 송아연 모두 올해 졸업 예정이었다.시험은 당연히 매우 엄격하게 치러졌다.학생들의 인성을 중시하는 학교는 어떤 부정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설령 백지를 내는 한이 있어도 성적 위조도 있을 수 없었다.아연은 바로 이 점을 파고 들어 송성연의 부정행위를 조작할 생각이다.부정행위는 퇴학 처분이 내려질 정도의 아주 심각한 문제로 취급될 터.이 기회를 빌려 송성연이라는 눈엣가시를 제거할 계획이다!그날 저녁, 깊은 밤.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남지 않은 학교.검은 그림자 하나가 담벼락 모퉁이의 벽돌을 빼낸 후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신중하게 CCTV를 피해 가며 교무실로 몰래 숨어 들었다.잠긴 서랍을 따고 안에 들어있던 시험지를 훔칠 것이다.그런데 서랍 안에 시험지가 너무 많아 목적하던 시험지를 한 번에 바로 찾을 수가 없었다.휴대폰의 손전등을 켜고 다시 서랍 안을 헤집었다.한참을 뒤졌는데도 원하던 시험지가 보이지 않는다.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며, 설마 선생님이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갔나 싶던 순간.서랍 한 귀퉁이에서 ‘월례고사’라는 글자가 불쑥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반짝 눈을 빛내며 손을 뻗어 시험지를 꺼냈다.‘바로 이거야.’시험지를 접어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막 몸을 움츠린 채 서랍을 닫고 나가려 할 때, 갑자기 복도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누구야?”한 줄기 강렬한 불빛이 교무실 방향으로 쏘아졌다.당황한 그림자는 얼른 지퍼를 잡아당긴 후 뒷문을 열고 달아났다.순찰을 돌고 있던 보안 요원이 교무실 앞문 쪽으로 다가서는 순간 뒤에서 뭔가 휙, 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바로 뒤 돌아선 보안요원이 뒤쫓아 복도를 달리며 소리쳤다.“거기 서, 얼른 서지 못해!”대담하게도 교무실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보안요원이 끝까지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학교 뒷문까지 쫓아가 거의 다 잡을 뻔한 순간, 결국 놓쳐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시험지를 훔쳤다면 학생의 소행일 테니까.학력에 대한 북성남고의 요구가 너무 높다 보니, 선생님들이 출제한 문제의 난이도 또한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았다. 결국 좋은 점수를 받고 싶은 누군가가 시험지를 훔친 모양이다.이번 사태는 무척 심각했다.이 시험지가 이미 유포되었는지 어떤 지도 알 수 없는 상황.만약 말이 새어 나가 문제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라면, 적어도 많은 학생들의 성적이 가짜가 되는 것이다.다른 학생들에게도 당연히 불공평한 일.이 문제 때문에 북성남고의 모든 선생님들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냉정하고 야박하다는 평을 받는 이윤하이지만, 시험과 성적에 있어서만큼은 늘 엄격하고 진지한 태도를 보여왔다.또 시험지를 도난당한 당사자인 까닭에 제일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월례고사를 연기할 것을 제안합니다.”“이 선생님, 지금 다시 문제를 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번 월례고사는 무척 중요해요. 학생들의 학습성과를 테스트할 절호의 타이밍이란 말이죠. 후속 학습을 위해 학생들의 수준에 따른 학습진도와 계획을 세우기도 좋구요. 이제 고3입니다. 모두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할 수는 없어요.”다른 선생 하나가 이윤하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맞아요, 이 선생님. 어젯밤에 분실됐어요. 그 문제들 모두 우리가 직접 낸 것들이라, 인터넷에서 정답 찾을 시간도 없었을 거예요. 어쩔 수 없지요, 뭐.” 시험문제를 재 출제하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들도 있었다.오로지 월례고사를 위해 몇 날 며칠을 밤 새운 선생들이다.이번 사고가 생기고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그렇다고 원래 일정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시험지가 분실되었는데, 다시 시험을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시험을 쳐봤자 가짜 성적 아닌가요? 근본적으로 학생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가 없잖습니까? 선생님들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지금 학생들은 예전과 다릅니다. 아주 똑똑해요. 하룻밤이 뭡니까? 반나절이면 정답 찾아냅니다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