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금여는 몸이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전히 병원에서 지냈다.의료 장비가 잘 구비되어 있는데다 간호사들도 상주 중인 병원에 있는 것이 더 나은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이다.성연은 낮에는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병원에서 할머니 안금여와 함께 지냈다.성연을 볼 수 있어서 그런지 안금여의 기분이 많이 밝아졌다.그날 저녁, 막 하교하던 시각.성연은 할머니가 중얼거리던 간식을 가져다 드려야지, 하는 생각에 골똘해 있었다.아마 보시면 무척 좋아하실 거란 생각도 하면서.교문 앞에서 송종철을 만나게 될 줄은 모른 채.성연의 얼굴이 바로 딱딱하게 굳었다.송종철, 저 사람이 또 무슨 낯으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성연을 본 송종철이 빠른 보폭으로 다가왔다.“거기 서, 할 말 있어 왔으니까. 얘기 좀 하자.”성연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무슨 좋은 말 할 게 남았다고요.”비단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겠는가, 송종철을 보고 있는 자신의 눈이 더러워진 기분이다.성연이 좋은 태도로 나오지 않을 거란 건 오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다.입가에 조소를 걸며 말했다.“아니면, 여기서 그냥 이야기하던지.”이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성연이다. 애초에 자신의 딸을 인정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담임 교사의 연락처에 남겨진 학부모 전화번호도 모두 강무진의 것이었다.처음부터 자신과의 관계를 깨끗이 지우려 했던 송씨 집안 아니었던가?이제서야 일이 생겼다고 자신을 찾아올 생각을 하다니.얼굴에 반항의 표정을 지은 채 성연이 송종철을 따라 비교적 한적한 구석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할 말 있으면 얼른 하세요. 시간 없어요.”성연을 쳐다보니 미움의 감정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송종철이다. 후회스러웠다.이놈의 딸이 자신을 이처럼 괴롭힐 줄 알았다면, 아예 모태에서부터 못 나오게 할 걸.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뗐다.“네 여동생이 그 일로 제적되었다. 지금 어느 학교도 아연일 받아주지
워낙 힘이 실었던 터라,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난 송종철은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은 덕에 간신히 넘어지는 불상사를 면했다.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신의 딸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에 체면을 구긴 것 같았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성연을 가리키며 옆의 남자들에게 명령했다.“너희들, 시작해. 저 애 손 좀 봐라.” 그저 돈을 받고 지시받은 대로 일할 뿐인 경원들에게 무슨 동정심을 기대하겠는가?건장한 경호원들 몇 명이 성연의 맞은편으로 몰려나왔다.구석에 몰린 성연은 대적할 아무런 힘이 없어 보였다.상황을 지켜보던 송종철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시원함을 느꼈다.성연이 말을 안 들으려 해서 그런 게 아닌가 말이다. 감히 아버지를 밀다니.말 안 듣는 아이는 때려야 고분고분해지는 법이다.앞으로는 감히 자신에게 맞서려 하지 않겠지.구석으로 물러나던 성연의 등이 차가운 벽에 닿았다.마음이 얼음장 같이 서늘해졌다.세상 좋은 아버지인 척하던 송종철이 경호원들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지시했다.경호원의 손이 어깨에 닿으려던 순간, 성연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더니 손을 뻗어 경호원의 손을 잡고 뒤로 비틀었다. 순식간이었다. 곧 경호원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손을 감싼 경호원이 뒤로 물러났다.서로 얼굴만 쳐다보던 다른 경호원들이 일제히 성연을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끝내 성연의 옷 한 자락도 건드리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성연이 대단한 실력의 무예인임을 그들도 알아차렸다. 심지어 자신들의 실력보다 뛰어났다.서로 쳐다보기만 한 채 다시 공격해야 할 지 결정을 못하고 있던 찰나.경호원들이 알아차린 사실을 송종철만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성연이 고등학생이라 경호원들이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뒤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지켜보다가 결국 소리를 지르며 재촉했다.“너희들 뭐 하는 거야? 돈 받은 대로 안 해? 할 생각이 없는 거야, 뭐야? 그 많은 돈을 주고 데려왔더니만, 그저 여기 장승처럼 서있기만 할 작정이야?”
구석에서 걸어 나온 성연은 교문 앞으로 돌아왔다.운전기사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송종철을 만나는 바람에 오늘 기분이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는 성연이다. 인사도 없이 차문을 열고 바로 올라탔다.차에 탄 후에야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강무진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성연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이 대낮에도 강무진은 검은색 정장 차림이네.갑자기 뒷좌석에 나타나서는 진짜 자신의 멘탈을 시험하는 건지 뭔지, 참.성연이 걸어오던 방향을 한 차례 쳐다본 무진이 물었다.“어떻게 저 방향에서 왔지?”그가 기억하기에 저 위치는 앞문 쪽도, 뒷문 쪽도 아니었다.게다가 평소 하교하는 시간에서 30분이 지나서야 왔다.성연이 나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녔어요. 애들이 저쪽 풍경이 꽤 괜찮다고 해서 한 번 둘러봤을 뿐이에요.”진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지 성연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차에 올라탄 성연이 무진 옆에 앉은 채 창가에 기대었다.비록 입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성연의 몸에서는 채 지우지 못한 사나운 기운이 느껴졌다.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지만, 무진은 성연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렸다.무진의 서늘한 음성이 차 안에 울렸다.“누가 괴롭혔어?”보통 이처럼 선명하게 감정을 밖으로 흘리는 일이 없는 성연이다.무진의 말을 듣고 속으로 은근히 놀랐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진은 즉시 알아차렸다.무진이 이처럼 세심한 걸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예민한 그의 감각을 경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송종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 강무진이 알 필요는 없겠지.담담한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아뇨.”그녀가 자신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음을 바로 알아차렸지만 개의치 않았다.“누구든 너를 건드리면 그보다 더 잔인하게 밟아버려. 문제가 생기면 강씨 집안이 책임을 질 테니.”매일 아무 생각 없는 듯이 구는 성연을 보면 마치 무엇도 그녀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
하루 종일 정말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송종철이다.성연에게 호된 맛을 보이려다 외려 당하고 나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집에 도착한 그의 얼굴은 이미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남편의 안색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임수정이 차를 한 잔 따라서 건네주었다.“왜 그래요? 그 촌 것이 뭐라던가요?”드디어 하소연을 할 대상이 생긴 송종철이 미주알고주알 성연의 행동과 자신의 의구심을 모두 털어놓았다.“성연이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한 애가 아닌지도 몰라.”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하지만 아내 임수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말투도 성연을 업신여기는 기색이 완연했다.“시골 계집애가 분명 질이 안 좋은 게 분명해요. 날라리나 일진일지도 몰라요. 자기 아버지도 때리려 하다니, 한 마디로 천륜을 거스르는 거잖아!”다른 방면으로는 전혀 생각지 않는 임수정이었다.성연이 어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어디서 배운 건지도 모르는 주먹질에 잘못 맞았을 뿐이라 여겼다.임수정의 마음에서 송성연은 이미 ‘쓰레기’라고 정의 내려졌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 정의.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 아연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지?강씨 집안의 지참금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끝이다. 자신의 딸 학위도 보장할 수 없고.“난 상관 안 할 테니 아연이 일은 당신이 최대한 방법을 생각해 봐요. 학위가 없으면 아연이 일생이 망하게 돼요!”임수정이 송종철의 팔을 잡아당기며 떼를 썼다.성연을 한 번 찾아가서 성공 못했으면 두 번 찾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성연이 매번 그렇게 운이 좋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아연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학교에 갈 수 없으니 그저 매일 집에 있을 수밖에 없다.온몸에 좀이 슬려고 했다. 성질도 짜증스럽게 변했다.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원흉이 바로 송성연, 그 촌닭 아닌가!송종철과 임수정의 대화를 들은 아연이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성연을 조롱했다.“송성연
임수정의 말을 듣던 송종철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요즘 들리는 소문에 강씨 집안 WS그룹의 회장님이 아파서 그룹의 주인이 바뀐다는 말이 있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 가서 회장님을 면회하면서 상황을 알아봐야 되겠어.”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찌라시 같은 정보였다.사실 뜬소문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사실이 어떻는지는 외부에 알려진 게 전혀 없으니까.그러나 송종철은 믿지 않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는가? WS그룹 쪽에서 정말 회장을 바꿀지도 모르지.하지만 모두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들이다.당장의 급선무는 눈앞에 벌어진 일을 해결하는 것이니.성연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강씨 집안에서 뭔가 소득을 얻기를 바랄 수밖에는.“아빠, 저쪽 집안에 가시면 제 얘기하는 거 잊지 마세요. 학교에 가고 싶어요. 집에 있기 싫어요.”아연의 목소리에는 짙은 원망이 배어 있었다.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예전의 학우들에게 연락해서 상황을 물어보려고 했었지만, 모두들 마치 홍수나 맹수가 뒤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피했다.아무도 자신의 메시지에 반응하지 않았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해킹까지 했다.뭐 때문에? 저들이 무슨 자격으로?예전엔 하루 종일 자기 뒤꽁무니나 쫓으며 아양 떨기 바쁘던 것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하나같이 벙어리 시늉만 하니.밀려오는 좌절감에 화가 나면서도 당혹스러웠다.정말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자신은 방법이 없으니 아빠가 대신 어떻게 해 주기만을 기댈 수밖에 없다.“네가 말할 자격이나 있느냐?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해 가지고, 응?”아연이 저 아이 때문에 두 번이나 고개를 숙인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송성연, 걔가 두 분을 화나게 했잖아요? 나는 교훈을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걔가 날 도로 물어뜯을 줄 누가 알았냐구요?”아연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임수정이 목소리를 키웠다.“당신
옷 매무새를 다시 한번 가다듬고 살핀 다음, 송종철이 병실 문을 노크했다.안에서 대답이 들리자 문을 밀고 들어갔다.병실로 들어서는 송종철을 본 안금여는 상당히 놀랐다.그러나 곧바로 표정을 정리하며 인사했다.“사돈, 어떻게 예까지 오셨습니까? 운경아, 사돈 앉으시도록 의자 좀 갖다 드리렴.”운경이 바로 옆에 있던 의자를 송종철 쪽으로 밀며 권했다.송종철이 과일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말했다.“회장님께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계속 병문을 오려 했으나 집안에 이런 저런 일들이 많다 보니, 이제야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래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늙으니 고장나는 데도 많네요.”안금여도 송종철을 따라 예의상의 인사를 건넸다.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이지만, 한 명은 위에 앉았고 또 한 명은 아래쪽에 앉은 것이 꼭 지위 상의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는 듯했다. 회장을 힐끗 쳐다본 송종철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회사의 상황을 생각하며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회장님, 지난번에 저에게 말씀하셨던 그 일 말입니다. 사실 무진 군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도 하며 잘 말해 볼 참이었는데, 무진 군 성격이 좀 까다로워서 장인인 제 초대에도 응하질 않네요.”말을 하면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안금여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무진의 성격에 송종철에게 과실을 내줄 리 없다는 것을 안금여는 일찌감치 예상했었다.하지만 몰랐다는 듯 놀라는 모습을 연출했다.“아니, 설마 우리 손자가 아직 주지 않은 겁니까?”이어 또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제가 나중에 혼을 내주겠습니다. 정말 아직도 저리 철이 안 들어서야, 원.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지요. 응당 드려야 할 돈인데, 제가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 며칠 손자 얼굴을 못 봤네요. 나중에 몸이 좋아지면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지금 성연을 무척이나 아끼는 안금여
“회장님, 성연이가 참 고집스럽게도 말을 잘 안 듣습니다. 학교에서 그렇게나 큰 사단을 만드는 바람에 제 작은 딸을 받아주려는 학교가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 회장님께서 좀 도움을 주시면 없겠습니까?”기대 어린 눈빛으로 안금여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성연이는 학교에서 학업에도 그리 충실하지가 않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수업도 잘 안 듣는다고 하더군요. 이번 일은 분명 아연이 성적이 좋은 걸 질투해서 일으킨 겁니다. 아마도 우리 아연일 꼬드겨 시켰겠죠. 우리 불쌍한 아연이가 제 언니를 돕다가 결국 탈이 나 버렸습니다. 매일 학교에 가고 싶다고 웁니다. 공부하는 걸 제일 좋아하던 우리 아연인데, 이렇게 시간을 끌다 교과 과정을 못 따라가게 되면 상심해 죽을 지도 모르겠습니다.”성연을 헐뜯으면서 동시에 아연을 띄워, 둘 사이의 우열을 드러내려는 수작이었다.이리 말하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할 지 누구라도 알 것이다.또 아연이에 대해 좀 더 좋은 이미지를 안금여에게 심어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래야 안금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겠는가?그리고 동시에 안금여가 성연을 썩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두어 마디 더 비방을 해도 상관없겠지.어쩌면 안금여의 마음에 맞는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그러면 이 늙은이가 자신의 말에 흔쾌히 동의해 줄까?자신들이 성연을 좋아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을 거고 생각하는 송종철.그의 말을 듣는 즉시 화가 난 안금여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이 일은 당신 딸의 자업자득이 아닙니까? 왜 내 손녀며느리에게 덮어씌우려는 거지요? 당신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 아닙니까? 동생이 사사건건 언니와 맞서려 들더니 이제는 감히 내 앞에 와서 내 손자며느리를 비방하다니요? 이건 일부러 나를 욕보이려는 게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안금여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은 이 모든 일의 경위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한 번만 그랬으면 괜찮았을 터.한 번쯤은 성연이가 잘못했을 수도 있으니까.하
안금여에게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자 애가 탄 송종철이 염치 불구하고 재차 물었다.“저기, 그럼…… 학위 회복만이라도?”강씨 집안이 발만 한 번 굴러도 북성 전체가 몇 차례나 흔들릴 것이다.한 마디 언질이면 누구든 강씨 집안의 체면을 봐서라도 들어줄 것이다.막다른 골목에 내몰리지만 않았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안금여의 얼굴을 쳐다볼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딸 운경이 건네어 준 차를 한 모금 마신 안금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뭐, 안 되는 건 아니지. 어찌 되었든 어린 나이에 공부하지 않으면 인생 망칠 수도 있으니.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구구절절 듣기 민망한 그의 말들 중에 성연에 대한 좋은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그렇게 쉽게 도와주지는 않을 생각인 안금여다.강씨 집안에는 확실히 소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봐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나. 송씨 집안은 도와주어야 할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는 치들이다.도와줘 봤자 손해 보는 장사인 셈이다.송씨 일가가 합심으로 성연의 피를 빨아먹으려 한다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챘다. 이 변변찮은 집안은 애초에 글러먹었다.또 무슨 낯짝으로 자꾸 시골 사람을 업신여기는지, 저들이야말로 시골 사람들보다 못난 것들이 아닌가 말이다.낯부끄럽게도 어찌 그런 말들을 하는지.성연이 오랫동안 시골에서 지냈던 것 역시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가 아닌가.직접 키운 아이는 보배이고, 자신이 키우지 않았다고 잡초가 되다니.그의 이런 태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네, 회장님, 말씀하십시오.”마침내 안금여의 입이 열리자 송종철의 눈이 확 밝아졌다.지금 한 가지를 요구해도 열 가지도 넘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아연이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 가기만 한다면, 그 재능과 성적으로 다시 학교에서 그들 집안을 위해 영예를 떨칠 수도 있을 터.그러면 더 이상 체면을 잃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어쨌든 아연이는 자신을 걱정시킨 적이 없는 아이였다.오직 이 두 번의 일만 예외일
이튿날 오후, 가게문을 닫은 뒤 유채연은 성연의 안내로 그래함을 만났다.이번에는 유채연의 수줍은 성격을 고려해서, 밀크티 가게가 아니라 칸막이가 있는 식당을 골랐다.엉성한 칸막이지만 그래도 모두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는 잘생긴 그래함을 보자, 유채연의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유채연이 그래함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없었다면 그 옥노리개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채연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함이 유채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나는, 다 괜찮아.” 유채연은 그래함을 똑바로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래함은 이렇게 멋스러운데, 나는 진흙밭의 진흙일 뿐이야.’요 몇 년 동안 유채연은 전혀 자신을 꾸미지도 않았다.날마다 그럭저럭 지냈을 뿐이다.지금은 그래함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래함에게 어울릴 수 있겠어?’그래함이 종업원을 불러서 가정식 요리를 몇 개 시켰다.모두 유채연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다.그래함이 시키는 요리 이름을 들으면서, 유채연은 놀라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그래함이 유채연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어?”“당신...”그래함이 자상하게 대할수록 유채연은 더 열등감을 느꼈다.‘나한테 무슨 덕과 능력이 있어서 이런 사람에게 어울리겠어?’“애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음식부터 먹자.” 그래함의 마음은 더 긴장하면서 안절부절 못했다.이번에 또다시 거절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성연은 턱을 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그다지 먹고 싶은 것 같지 않았다. 그래함은 수시로 유채연에게 음식을 집어 줬지만, 식사하는 내내 유채연을 쳐다보느라 음식도 그다지 먹지 않았다.안타까움이 가득한 식사였다.가까스로 식사를 마친 뒤, 그래함은 종업원에게 앞의 음식을 치우고 주스와 과일을 내오도록 했다.그래함이 유채
“나도 모르겠어.” 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이 옥노리개를 보고 유채연은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그러나 여전히 모든 걸 맡길 용기를 내지 못했다.“언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언니가 사형을 믿지 않는다면, 먼저 사형을 좀 지켜보다가 적당할 때 다시 승낙하면 돼요.” 성연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유채연을 너무 팽팽하게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언니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할 수밖에 없어.’“하지만...”유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별거 아니에요, 이건 언니하고 사형 두 사람의 일이잖아요.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겠지만, 그래도 사형을 한번 만나보세요.” 성연은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 언제 유채연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느꼈다.합쳐진 옥노리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채연이 마침내 용기를 냈다.“알았어. 그래함과 얘기해 볼게.”유채연도 그래함이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말만 하는 거니까 별거 아니야.’마침내 이 말을 듣자 성연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드디어 유채연을 설득한 것이다.“그래요. 언니에게 기회를 주고 그래함 사형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만 그래도 고려해 봐야겠지요.” 성연은 드디어 해냈다고 생각했다.‘오늘 헛걸음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야.’“고마워.” 유채연은 손에 든 옥노리개를 꼭 쥐었다.‘만약 성연이가 내게 그렇게 많이 권하지 않았다면.’‘아마 그래함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하지만 이렇게 비참해진 나한테 더이상 비참한 일은 없을 거야.’‘그러니 나도 한번 노력해보겠어.’“언니, 자신의 마음을 존중하고 선택하면 좋겠어요.” ‘채연 언니가 사형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건 아니야.’“그럴게.” 유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채연이 성연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성연은 그래함 때문에 사양했다.유채연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호텔로 돌아온 성연이 문을 열자, 그래함이 옆방에서 걸어 나왔다.‘사형이 계속 이쪽의
성연이 보니 이제 때가 된 듯했다.그래서 유채연에게 그래함 얘기를 꺼냈다.“채연 언니, 사형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바로 언니 때문이에요. 사형은 바로 언니를 찾으려고 온 거죠. 사형이 언니한테 어떻게 너에게 대하는지 언니도 봤을 거예요. 사형은 정말 언니를 좋아해서 언니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언니도 앞으로 결혼하겠죠, 그렇죠? 그런데 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아요?”성연이 한 말도 일리가 있지만 유채연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그동안 자신의 모든 것이 소멸되다시피 했다.유채연에게는 전혀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유채연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래함에게 어울리지 않아.”말을 마친 유채연이 또 눈물을 흘렸다.그래함의 찾아와서 유채연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그러나 유채연은 자신과 그래함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자신은 이미 감히 그래함을 원할 수 없었다.성연은 유채연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감정의 일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어.’‘좋아하는데 그냥 함께 하면 돼잖아.’‘게다가 두 사람은 너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어.’‘하지만 지금 채연 언니에게는 사형의 신분이 큰 문제야.’성연도 이해할 수 있었다.‘미래가 정말 너무 막막할 거야.’성연이 갑자기 반쪽짜리 옥노리개를 꺼냈다.옥노리개를 본 유채연은 깜짝 놀라면서 뭔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이 옥노리개를 뜻밖에도 그래함이 여전히 가지고 있었어.’성연이 옆에서 말했다.“그래함 사형은 줄곧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여자친구도 없이 줄곧 언니를 기다린 거예요.”유채연이 목에 차고 있던 다른 반쪽의 옥노리개를 이어 붙이자, 완전한 옥노리개가 되었다.흥분한 유채연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나는 원래 그리움에 이 옥노리개를 남겨 두었을 뿐이야.’‘그동안 그래함도 나와 같은 생각일 줄은 전혀 몰랐어.’“그동안 그래함에게 정말 여자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 유채연
저녁 무렵에 성연이 다시 왔다.두 사람이 이번에 온 목적이 유채연을 데려가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그래함도 오고 싶었지만, 유채연의 감정이 너무 격해질까 봐 성연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메로나 두 개요.” 카운터 앞으로 바로 간 성연이 유채연을 향해 말했다.성연의 출현에 유채연의 마음도 흔들렸다.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본 성연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유채연은 말없이 묵묵히 냉장고에서 메로나 두 개를 꺼냈다.“여기 있어. 돈은 필요 없어.”성연은 미소를 지었다. ‘채연 언니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언니 마음은 항상 착해.’성연도 계산을 하지 않고 포장을 뜯고 먹으면서 나머지 한 개는 유채연에게 주었다.“채연 언니, 여기요.”성연이 자신에게 줄 줄은 몰랐기에 유채연은 놀라서 성연을 바라보았다. 성연이 웃으면서 말했다.“예전에 언니도 우리에게 하드를 많이 사줬잖아요.”유채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과거의 기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사람이든 일이든 다 똑같아.’유채연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성연이 주는 하드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성연이 고개를 돌려 유채연을 보면서 감탄했다.“채연 언니, 언니는 이전보다 더 예뻐졌어요.”‘채연 언니는 정말 예뻐.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여전히 부드럽고 아름다워.’‘이전과 달리 언니의 미모가 세월 속에 쌓였어.’유채연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이렇게 거친 얼굴이 어디가 예쁘겠어.”‘내가 좀 더 나은 모습이라면 그래함과 함께 할 용기가 있을 텐데.’‘그러나 세상 일은 종종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피부 관리만 잘하면 돼요. 화장만 하면 천상의 선녀보다 더 예뻐요.” 성연은 유채연의 바로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때때로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오거나 손님이 많은데 유채연이 바쁠 때면, 성연도 옆에서 도와주었
이때 산책하고 돌아오던 외삼촌이 성연을 보고는 불만을 표시했다.“걔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지, 왜 또 강요하는 거야? 나는 성질 좋은 사람이 아니야. 채연이를 괴롭히지 마.”외삼촌의 말을 들은 성연은 유채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성연도 중재자일 뿐이기에 유채연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지금 유채연의 외삼촌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가 더 불편했기에,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성연이 나간 뒤 외삼촌을 보면서 유채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그 자리에 선 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없이 가슴 아프게 했다.유채연의 이런 모습을 본 외삼촌은 크게 화를 냈다.바로 유채연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너 왜 그래? 아까 그 남자가 바로 네 사진 속에 있던 걔가 맞지? 그 사진을 몇 년이나 보고 있었는데,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 그럼 나가. 이 작은 가게는 나 혼자서도 관리할 수 있어.”예쁘고 부지런한 유채연이 요 몇 년 동안 일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유채연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채연은 응하지 않았다.맞선을 볼 때마다 유채연은 자기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언젠가 문을 잠그는 걸 깜빡했을 때, 외삼촌이 무심코 유채연의 손에 든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유채연은 마치 보물을 대하듯이 사진을 보고 있었다.그때 외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 사람이 정말 나타났는데 조건도 아주 좋아 보여.’‘채연이가 그 남자와 함께 한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거야.’외삼촌의 말에 유채연은 순간 멍해졌다.유채연은 자신이 나간다고 하면 외삼촌이 제일 먼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자신이 떠나면 외삼촌을 챙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유채연의 눈에 외삼촌은 줄곧 나쁜 사람의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래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삼촌이 자신을 돌보고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다.‘외삼촌이 가끔씩 말을 거칠게 해도 속마음은 부드러워.’
다음 날 아침 일찍 성연이 왔다.성연은 바로 가게에서 유채연과 이야기하고 싶었다.“채연 언니.”어제 두 사람에 대한 유채연의 태도는 좋았다.그러나 오늘 유채연은 냉담하게 거부하는 모습이었다.성연을 보고 정색을 하면서 미소도 전혀 짓지 않았다.“성연아, 물건을 사지 않으면 나가. 우리 가게는 작으니까 여기에 있지 마.” 축객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그런 유채연을 보면서 성연은 단지 가슴이 아팠을 뿐이다.‘두 사람에게는 분명히 좋은 미래가 있어.’‘그러나 채연 언니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해.’“채연 언니,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 사이에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잘 이야기하면 오해도 잘 해결될 거예요.” 성연도 두 사람이 잘 지내면서 행복하게 함께 있기를 바랐다.하지만 매번 뜻대로 되지 않았다.“우리 사이에 무슨 이야기할 만한 게 있겠어. 나를 찾아온 거라면 돌아가. 만약 나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면, 여기서 즐기면서 나한테는 더 이상 오지 마.”이렇게 말하면서, 유채연은 마음속으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그러나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그래함과 성연만 여기서 나가면 돼.’‘이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을 거야.’‘예전의 꿈만 기억하면 돼.’‘나는 다시 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어.’“언니, 언니는 지금 사형에게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성연은 유채연이 그래함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걸 믿지 않았다. 유채연의 눈빛이 반짝거렸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성연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느꼈다.더욱 분발해서 열심히 권유했다.“채연 언니, 언니의 생각이 어떤 지를 떠나서 나는 단지 언니가 사형하고 잘 얘기하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해결하기를 바랄 뿐이에요.”유채연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자신과 맺어질 수 없는 그 사람을 지나치게 원하지 않기 위해서, 아예 생각을 끊으려는 것이다.“나는 여기에 남아서 가게를 봐야 해. 성연아, 네
외삼촌에게 밥을 차려준 뒤 유채연은 혼자 가게를 지켰다.손님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면서.오늘 밤, 유채연은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을 좀 연장했다.외삼촌이 의심할까 봐 유채연도 너무 오래 끌지는 못했다.마침내 작은 슈퍼마켓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유채연은 혼자 길모퉁이까지 걸어가 보았다.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더없이 서글퍼지자, 유채연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그래함은 납득했겠지.’‘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데, 또 어떻게 그래함을 연루시킬 수 있어?’‘나도 너무 뜬구름 잡는 생각만 한 거야.’유채연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하긴, 그래함이 왜 내게 반했겠어?’‘지금의 내게 그래함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겠어.’유채연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방 문을 잠근 뒤 이불 속에 눕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모든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마음은 그래도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그때 어머니의 병이 아니었다면 집안이 망하지는 않았을 거야.’‘아마도 나도 대학에 갔을 거고, 그래함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겠지.’‘어쩌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몰라.’‘그런데 지금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나와 그래함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이제 나는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하고 살아가면 돼.’‘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헛된 망상을 할 자격도 없어.’‘현실로 돌아가는 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유채연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똑똑똑- 넓은 방안에 문 밖의 노크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유채연은 이런 장면에 익숙한 듯 눈물을 닦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외삼촌, 무슨 일이세요?”약간 갈라진 듯한 유채연의 목소리는 특히 표시가 났다.하지만 유채연은 그렇게 많은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맘대로 하면 돼.’“너 오늘 저녁 안 먹었지?” 밖에서 외삼촌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먹을래요.” 생각할수록 슬퍼서 유채연은
다시 유채연이 고함을 치자 외삼촌은 크게 놀랐다.‘요 몇 년 동안 채연이는 내 앞에서 줄곧 순종했어.’‘지금 뜻밖에도 두 명의 외부인 때문에 감히 말대꾸를 하고 있어.’갑자기 외삼촌이 또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보니까 네가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내가 그동안 너를 거뒀는데, 너는 전부 너는 짖어라 라는 식이야?”“나 아니면 누가 너를 신경이나 쓰겠어. 그 사람들은 돈이 있잖아. 진작에 갔다가 왜 이제야 온 거야?”“만약 또 내게 이렇게 말할 거면, 앞으로 너를 상관하지 않아도 탓하지 마.”외삼촌은 유채연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서 심하게 말을 했다.유채연은 그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온통 그래함을 생각하고 있었다.‘예전에 나와 그래함은 죽마고우여서 다른 사람에겐 하지 않았던 일도 많았지.’‘그래함이 병이 났을 때 내가 그래함을 돌보았어.’‘그때 사랑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그래함에게 감정이 생겼어.’‘그래함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내가 맞은편 마을로 가지도 않았을 거야.’‘심지어 그래함은 나중에 나하고 결혼할 거라고 예전에 말하기도 했어.’나중에 일어난 그 일들이 오히려 유채연을 심연 속으로 매섭게 끌고 갔다.만약 유채연의 집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유채연도 그래함과 함께 하는 걸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래함은 내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럴 리가 없어.’‘그래함은 단지 일시적으로 감정이 복받쳤을 뿐이야.’‘곧 후회할지도 몰라.’그들의 처지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에.유채연은 감히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할 수 없었다.일을 너무 좋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다.‘빛나는 보석이 된 그래함은 가장 높은 위치에 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거야.’‘그러나 지금 진흙투성이인 유채연은 그저 서민들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어.’‘지금까지 그렇게 좋지 않았던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어.’‘예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포자기하기도
유채연은 넋이 나간 채 슈퍼마켓으로 돌아왔다.머릿속에 맴도는 건 그래함의 자신에 대한 태도와 자신에게 했던 말뿐이다.슈퍼마켓을 지키던 외삼촌은 유채연이 오는 것을 보고는 가게에서 나가며 야단쳤다.“누구를 만났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집안 일은 할 필요가 없어?”“이 정도로 시간을 잡아먹을 거면 차라리 집에 잘 있는 게 낫겠어.”유채연은 반박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다.유채연이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뜻밖에도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어.’‘지금은 확실히 시간이 좀 늦었어.’평소에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주 엄격했다. 유채연은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은 채 매일 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유채연이 감히 항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 외삼촌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너를 찾아왔던 그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야?”유채연은 건성으로 대답했다.“그저 고향 사람일 뿐이에요.”“고향 사람이 왜 너를 찾아왔어?” 외삼촌은 여전히 예민했다.유채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너무 오랫동안 나를 보지 못했으니까 나를 찾아왔지요.”“너는 지금 류씨 집안에 사는 게 아니야. 너를 찾아오려면 시간이 더 걸렸을 텐데, 그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한가해서 너를 찾아온 거야?” 외삼촌은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다.유채연의 상태가 아직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외삼촌이 그렇게 묻는 말을 듣자 외삼촌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평소에 외삼촌은 자신의 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렇게 세세하게 물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그때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들이 구태여 알아볼 필요도 없이 조금만 물어봐도 알 수 있지요. 외삼촌, 그걸 왜 물어보세요?” 유채연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외삼촌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들이 정말 호사스럽게 손을 쓰던데, 부자인 모양이야. 그 사람들한테서 돈을 좀 구할 수 없을까?”방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