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집안은 남아 도는 게 돈이니, 강무진이 아무리 막 나가도 망하지 않을겁니다. 다들 더 이상 걱정 마세요.”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조카를 괴롭히는 게 눈에 거슬렸던 강운경이 나서서 무진을 비호했다.“운경아, 네 말 참 듣기 거북하구나. 이 자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와 삼촌들 모두 네 아버지, 내 형님을 따라 생사를 함께 했던 형제들이 아니냐? 우리 또한 이 강씨 집안의 일원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 네 말에 삼촌들이 얼마나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겠니?” 강씨 집안 셋째 어른인 강상규가 일어섰다. 그리고 강운경의 시선과 마주했다.입술을 깨문 강운경이 울분에 찬 눈빛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애초에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충성을 다하는 척했던 두 사람이었다.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본색을 드러낸다.“둘째 서방님, 말씀을 참 잘 하셨습니다. WS그룹은 모두의 것입니다. WS그룹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의 공로이지요. 그러나 우리 선대 회장님이 살아 계실 때, 여러분께 결코 박하지 않게 해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오늘 이자리에서 강씨 본가를 곤란하게 하는 건 좀 지나치신 것 같군요” 차가운 음성으로 일갈한 안금여가 매서운 시선으로 둘째 시동생을 쳐다보았다.“형수님, 지나치긴요? 능력 있는 이가 자리에 오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또한 형님이 가르쳐 주셨던 교훈이지요.” 둘째 강상철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에는 냉기를 내뿜었다.회의장에 있는 대부분의 주주들은 모두 강상철과 강상규에게 강요받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세력이 회사에서 점차 강대해지며, 주주들은 자연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주주들은 알아서 두 사람에게 줄을 섰다.그들 말이 틀리진 않다.지금 강씨 본가에는 강무진뿐이다. 그리고 별 도움 안되는 안금여도.줄을 잘못 섰다가, 앞날에 무슨 화가 닥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눈치 빠른 이들은 둘째 강상철과, 셋째 강상규 쪽이 더 가능성 있다고 과감하게 그쪽 라인으로 갈아탔다.그러니 회의장 내
강상철과 강상규는 안금여의 당황한 기색을 보며 내심 통쾌했다.그들은 본가만이 집안의 기업을 장악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했다.‘모두들 회사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왜 본가만 권력을 잡고 휘두르려고 하는 건데?’‘일개 아녀자에게 참 오랜 세월 동안 억눌려 지냈었다…….’이건 강상철과 강상규에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그들도 모두 강씨 집안 사람들이다.게다가 지금의 본가에는 WS 그룹을 이끌만한 인물이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안금여 다음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마땅한 후계자 역시.본가의 유일한 남자인 무진은 모두에게 병신 취급을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느 누구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출가외인 강운경에게 회사를 물려줄 수 없는 법.다시 말해 회사를 강상철과 강상규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그리고 그들만이 WS그룹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회장이 된 뒤로 내내 규정을 들먹이는 안금여는 봉건적 사고방식에 고루하기 그지없었다,지금 앞으로 쭉쭉 뻗어가려는 WS그룹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그런 그들의 눈에 안금여는 자신들의 회장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고 있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다.안금여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얼굴에 혈색을 잃은 상태였지만 등을 곧게 펴고 음성에 힘을 실었다.“네, 몸이 안 좋은 거 인정합니다. 허나 아직 몇 년 더 버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살이있는 한, 회장직에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하신 것은 잘 알겠는데, 아무리 급하더라도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겁니다. 내가 죽고 우리 집 영감 옆에 누으면, 그 때 다시 회장에서 내려오니 마니 논의하시죠?”그녀의 말에는 한껏 조롱기가 다분했다.‘이것들이!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자리에서 내려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다니……. 꿈도 야무져! 누가 자리를 내놓는데?’“형수님,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제가 좋은 병원을 알아봐 드릴 테니 안심하고 치료 먼저 받으세
위에는 강상철과 강상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안금여가 보니 그들이 보유한 주식은 이미 본가에 육박할만한 수치였다.모두 강상철과 강상규가 몰래 인수한 것들이었다.주주들로부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주식을 이만큼 사 모으는 데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을 거다.이번 주총을 위해 회장직을 차지할 계획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철저히 준비해 왔을 터.조금씩 핏기를 잃어가던 안금여의 얼굴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렸다.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집안 사람들 아닌가? 이 정도까지 도가 지나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만약 우리 영감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 두 놈이 여기서 이처럼 날뛸 수 있었을까?’주식 위임동의서는 안금여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강운경이 얼른 안금여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엄마, 괜찮으세요?”무진도 미간을 한군데로 잔뜩 모았다.“할머니…….”“나, 괜찮다.” 강운경의 품에 안긴 안금여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싸쥐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최근 몇 년간 본가에서 눈 감고 참아준 게 한 두 번입니까? 뭘 더 원하세요?” 안금여는 숨을 고르며 강상철과 강상규를 향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우리가 뭘 원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회장직을 내놓으시죠? 우리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강상철의 표정도 싸늘해졌다.주식 위임동의서를 내놓았다는 것은 본가와 등을 돌리겠다는 것과 진배없었다.‘WS그룹이 옛날의 그 WS그룹인 줄 아시나?’큰형님이 돌아가신 후, 본가도 이미 그 힘을 잃었다.큰형이 살이 있을 때는 비위를 맞춰야 했지만, 지금은…… 본가가 자기들에게 빌붙어 살게 할 것이다. 오랫동안 참았던 이 수모도 풀어내면서…….“둘째 숙부님, 우리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숙부님들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기어이 우리 본가의 숨통을 끊으놓으시려는 겁니까?” 강운경의 눈시울이 옅은 빛으로 붉어졌다.‘참아야 한다.
병원에 호송된 안금여는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강무진과 강운경도 함께 응급실 입구까지 따라 갔다.성연은 나중에야 안금여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강무진이 전화로 알려준 것이다.선생님께 말씀드린 후, 수업을 빠지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강운경과 강무진이 응급실 입구에서 지키고 있었다.운경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 붉어진 눈시울, 한숨도 못 잔 듯한 초췌한 얼굴.안금여가 들어간 응급실을 바라보며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무진은 그녀보다 좀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흔들리는 두 눈동자에서 무진의 마음도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왠지 모르게 성연의 마음도 울컥했다.무진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고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아저씨, 할머니는 괜찮으실 거예요.”예전에 외할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그녀도 정말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그 당시 누구 한 사람이라도 곁에서 자신을 다독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랬었다.그러나 그녀는 늘 혼자였다.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런 두려움과 고통을 잘 알았다.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본 무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응급실에 빨간 불이 켜져 있다.그때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남자의 몸에는 오랜 세월의 경험과 진중함이 베어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피곤함도 함께 묻어나왔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운경이 슬픔을 참으며 손수건으로 의사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엄마는 좀 어떠세요?”그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 남자가 운경의 남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흰 가운의 가슴 부근에 새겨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원장, 조승호.’조승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썩 좋지 않아.”최근 몇 년간 안금여의 주치의가 되어 최고의 약과 최신 의료장비 등 모든 것들을 사용해가며 치료를 전담해왔었다.하지만 지금 안금여의 몸은 지금 당장 넘어가도 이상하지
비관적인 진단 결과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운경이 몸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렸다.동작 빠른 성연이 얼른 다가가 자신의 몸으로 운경의 몸을 지탱했다.“고모님, 조심하세요.”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운경이 성연의 목소리를 듣고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성연의 손을 빌려 몸을 바로 세웠다.“고마워, 성연아.”“아니에요.” 무진의 안색도 안 좋았다.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할머니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지금의 안금여는 꺼져가는 불빛 마냥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셈이다.무진의 뒤로 다가간 성연은 생각이 깊어졌다.그녀는 안금여가 좋았다. 아주 많이.마치 자신의 외할머니처럼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성연의 삶에서 따스한 온기를 선사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안금여였다.외할머니 같으신 분이 자신의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차마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강상철과 강상규, 모두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저들이 계속 날뛰는 것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무진과 운경이 잠시 자리를 비우게끔 해야 한다.’‘그리고 당장 할머니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봐야겠다.’어느정도는 자신의 의술에 자신이 있었다잠시 생각을 정리한 성연이 무진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아저씨, 회사에 그 사람들 그냥 그렇게 끝내지 않을 것 같은데, 누가 가서 지켜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할머니가 안 계시니, 그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는 못할 거야.” 성연이 강상철과 강상규가 강압적 수단을 써서 본가를 공격해 올까 봐 걱정하는 줄 알고 무진이 대답했다.그 문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강상철과 강상규가 인성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른 주주들까지 그렇지는 않았다.안금여가 입원까지 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본가를 몰아붙인다면, 여론이 악화되어 뒤집어지는 것까진 바라지 않을 터였다.따라서 속으로는 간절히 원한다 해도 계속 억지로 강행하지는 못할 것이다.무진은 교활한 두 늙은이가 처리하는 방식을 잘
목석 같은 무진에게는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그럼 강운경 쪽은 더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슬슬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그런데 뜻밖에도 강운경 쪽에서 자신이 먼저 자리를 비우겠다고 한다.회사는 현재 난장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회사의 주축이었던 안금여가 쓰러졌으니 회사 주주들뿐 아니라 직원들도 불안하고 초조해 할 것이다.누군가는 현장을 수습하고 주주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안금여가 쓰러졌으니 지금 회사를 지킬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무진은 아직 최대한 노출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강씨 집안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반드시 버텨내야 했다.두 숙부가 어머니의 병세를 폭로하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을 낸 지금, 회사 주주들도 확실한 답변을 듣고 싶어할 게 분명했다.비록 지금 자기들 편에 선 주주들이 많지는 않겠지만.그러나 표면적인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운경이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촉촉해진 눈가를 훔쳤다.“무진아, 여기서 할머니를 잘 보살펴 드려. 난 먼저 가 볼게. 회사 내에 우리 가족이 없어선 안 돼. 고생해라.”비록 출가외인이라고 하지만 그녀 역시 선대회장의 딸이었다.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생사 고난을 같이한 원로들이기에 분명 어느 정도는 봐줄 것이다.“고모, 제일 힘든 건 고모이지요. 전 아무 도움도 안 돼는 걸요…….” 무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불빛 아래 선 그에게서 외로움과 연약함이 묻어났다.밖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그의 실력이 형편없는 게 아니었지만,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예를 들면, 그의 다리 그리고 할머니 안금여의 병세…….무진의 모습을 본 운경은 마음이 아팠다. 요 몇 년 동안 억울한 일을 많이도 당한 무진이었다. 게다가 무거운 짐까지 지고 있으니.운경이 무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독였다.“네가 무사한 게 할머니께 가장 큰 효도야. 무진아,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무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은
성연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진이 계속 자리를 안 뜨면 어떻게 할머니에게 침을 놓지?’무진 앞에서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자신의 신분이 들통날 수 있으니…….‘내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절대 안 돼.’마침 조승호가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밤새 환자를 돌보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고모부.” 무진이 고모부를 불렀다.“할머니를 뵙고 싶어?”조승호가 물었다.무진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들어가봐도 돼. 다만 지금 할머니께선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 외부의 어떤 자극도 더이상 견뎌낼 수 없으셔. 규정상 중환자실은 30분간 한 명만 가능하니, 들어가봐.”조승호는 안금여의 주치의로서 안금여를 치료하는 것 외에는 강씨 집안에 관한 어떠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집안 일 어디서부터 관심을 가져야하는지도 모르기에 사무적인 태도를 취했다.그는 조카 무진과의 접촉도 거의 없었다. 무진을 담당하는 주치의 또한 따로 있어서 그가 개입할 입장도 아니었다.“고모부,감사합니다.” 무진은 감사의 말을 전한 뒤, 휠체어를 조종해서 중환자실로 들어갔다.이때 성연이 앞으로 가 무진의 휠체어를 잡았다.휠체어가 움직이지 않자 무진이 고개를 들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성연을 바라보았다.“왜?”“제가 다녀올게요. 할머니도 분명 저를 보고 싶어하실 거예요.”성연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지금이 절호의 기회야.’중환자실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금 들어가면 안금여를 치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속으로 ‘아싸!’하고 외쳤다.“그래도 내가 가야지. 할머니를 뵙고 싶어.” 무진이 승낙하지 않았다.지금 이 상황에서 안금여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자신일 테니까.할머니에게는 속으로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비록 집안 권력다툼에 의해 무너졌지만…….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할머니는 그의 혈육이었다. 천성이 좀 차갑긴 하지만 전혀 감정이 없을 만큼 무정하지는 않았다.무진이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성연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옆에
무진을 설득하느라 성연은 입이 닳는 줄 알았다.무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성연은 바로 중환자실로 향했다.성연이 들어가자 조승호는 중환자실 출입문을 닫았다.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안금여의 몸에는 다양한 의료용 기기와 호스가 꽂혀 있었고,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빈약하고 초췌한 모습에서 지난 날의 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성연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로 돌아간 듯 심장이 아려왔다.눈을 감은 채 조금씩 떨리는 손을 내밀며 옛날의 가슴 아팠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서서히 냉정을 되찾은 뒤, 안금여 손목에 손을 얹었다.진맥이 끝내고 대략적인 치료 계획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먼저 혈자리를 정확히 찾은 다음, 가방에서 은침을 꺼내 안금여의 혈 자리에 가볍게 찔러 넣았다.안금여는 연세가 많은데다 몸도 허약해서 무진같은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시침할 때처럼 해서는 안 되었다. 침을 놓는 성연의 동작이 하나하나가 가벼운 듯 조심스러웠다.몇 군데에 침을 놓은 후, 옆에서 조용히 그리고 세밀히 관찰해다.몇 분 후 할머니의 손가락이 아주 미미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했다.할머니가 반응을 보이자 성연이 겨우 후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은침을 챙겨 넣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할머니, 빨리 나으세요. 부디 그런 나쁜 사람들이 활개치지 못하게 해주세요.’할머니는 곧 정신이 들 것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다 면회 시간이 다 되어가자, 일어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중환자실을 나섰다.그날 밤, 무진과 성연은 안금여가 걱정되어 병원에 계속 머무르기로 했다.고모부 조승호가 두 사람에게 할머니를 지켜보며 지낼 수 있도록 병실 하나를 내어 주었다.공간은 널찍하였다.침대에 기대어 앉은 성연은 무심하게 휴대폰을 넘겨보고 있었고, 무진은 소파 옆의 휠체어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할머니의 병세를 알고 난 뒤부터 무진은 줄곧 무표정이었다.할머니에 관한 얘기 외에는 그 누구와의 대화도 거부했다.마치 외부와 차단된 자신만의
두 아이를 보면서 예민주는 더욱 초조했다.마음속에 잘 기억해 놓은 뒤, 예민주의 노기는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이미 이전의 온화한 모습을 회복했다.“사진아, 너희들은 이전에 외국에서 잘 살았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마치 큰 언니가 아이들을 배려하는 듯 예민주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지금 두 아이는 이미 이 여자의 목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의 집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엄마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돌아왔어요.”목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해맑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사진의 대답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아까까지만 해도 술술 잘 말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빈틈이 없어진 거야?’예민주는 기분이 좀 꿀꿀했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낯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니? 너희들이 오늘 이곳에 와서 아빠를 찾는 것 같은데, 누가 너희들에게 뭔가 말한 거 아니야?”예민주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무진이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진에게 등을 진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사진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예민주를 쳐다보았다.“아줌마, 우리하고 함께 여기서 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거만 물어봐요?”“맞다. 아줌마, 우리 엄마 알지요? 우리 엄마한테 지금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오늘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을 엄마가 꼭 혼내 주게요!”“맞아요, 맞아요! 누가 우리를 괴롭힌 걸 알면, 엄마가 반드시 호되게 혼을 내줄 거예요.”두 아이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 마디씩 하는데, 호흡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예민주는 표정이 붉어졌다는 것도, 심지어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이 두 녀석의 말을 들으니, 송성연이 이 두 녀석을 아주 진지하게 단
예민주가 무진을 보러 매일 회사에 올 수는 없는 노릇.그러나 자신이 잘 쓰는 방법을 사용해서 WS그룹에 자기 부하를 하나 심었다.매일 무진의 스케줄을 예민주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오늘 아침 전화한 사람은 두 아이가 몰래 대표실에 들어갔는데, 줄곧 대표님을 아빠라고 불렀다고 말했다.평소 기발한 행동을 해서 명문가에 시집가려는 여자들도 적지 않다.운성 경제의 명맥을 쥐고 있는 무진과 누가 관계를 맺고 싶지 않겠는가!매일 프런트에서 자칭 ‘강무진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들을 몇 명이나 상대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거의 대부분은 프론트에서 차단되지.’‘그런데 오늘 대표 집무실로 직접 들어온 아이들이 있다니.’원래 예민주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머릿속에 문득 성연의 모습이 번뜩였다.‘결국 당황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급히 회사로 달려왔는데.’‘뜻밖에도 정말 송성연과 관계가 있었어!’예민주는 다시 눈앞의 이 두 아이에게 눈길을 돌렸다.예민주의 눈빛에 음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너희들은 평소에 엄마하고 같이 있지 않니?”사진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요, 매일 엄마하고만 같이 있어요. 그래서 아빠가 보고싶어요.”아이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예민주는 내친 김에 계속 캐물었다.“너희들은 이전에 줄곧 외국에 있었는데, 아빠 가족들이 너희들을 찾지 않았어?”“아빠 가족들요?” 뭔가를 눈치챈 듯, 사진이 고개를 돌려서 옆에 있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눈빛을 교환한 두 아이는 자신들만 알 수 있는 작은 신호들을 사용했다.‘이 여자는 그냥 회사를 좀 구경하게 해 주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사무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작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아주머니, 이게 잘 안 들어가는데요? 좀 도와 주실래요?”갑자기 사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레고 블록을 든 채.예민주는 계속 묻고 싶었지만, 사무가 성깔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남자는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약간 쉰듯한 목소리에서는 차가운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예민주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이 두 아이 귀엽지 않아요? 오히려 오빠가 그렇게 쫓아냈는데, 만약 누군가 영상이라도 찍었다면, 회사의 명성에 영향을 주지 않겠어요?”“누가 감히 우리 WS그룹을 함부로 보도할 수 있겠어?”무진의 말에는 힘찬 기세가 담겨 있었다.무진이 결코 지나치게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강경할 수 있는 것이다.무진이 이렇게 말하자 예민주는 잠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잠시일 뿐!다시 무진에게 다가간 예민주가 작은 소리로 무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사실 쟤들은 이 참에 오빠하고 잠시 함께 있기 위한 핑계였어요.”예민주가 다가오자, 순간 그윽한 향기가 무진의 코에 스며들었다.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무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막 좁혀졌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다.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근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접근해서 기회를 틈타 상류층으로 오르려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심지어 한 번만 만나려고 머리를 쥐어짜내는 사람들도 있다.그런 사람들은 이미 습관이 되었다.매번 비서진이 쉽게 대처했지만,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은 예민주다.자신의 여자 친구인.무진의 이런 습관을 예민주도 사실 잘 알고 있다. 평소에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예민주는 절대로 이렇게 짙은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그래야 무진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무진이 이렇게 배척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예민주는 이 ‘금기’를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방금 무진의 동작은 지금 예민주의 눈에는 적나라한 거부이자 분명한 소외감이었다.그러나 예민주는 감히 이 억눌린 마음을 마음속에 묻어두어야 했다.겉으로는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했다.입가에 줄곧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애들하고 얘기를 해 볼게요. 애들이 왜 대표실을
“감탄할 수밖에 없어! 저 아가씨가 사랑 앞에서 저렇게 자신을 낮출 수 있다니!”“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대표님 여자친구는 정말 총명하다는 거야!”“뭔데? 뭔데? 나만 모르는 거야?”“...”회사에서는 업무 시간에 뒷담화를 하지 못하도록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없을까?어떻게 다 금지할 수 있을까?지금 회사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여전히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오히려 당사자들은 그렇게 호들갑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아이들을 데리고 이미 회사 식당에 온 예민주는 룸에 도착했다.평소에 무진은 사실 사실 이쪽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손건호가 식사를 가지고 오면 늘 대표 집무실에서 식사를 했다.하지만 여전히 무진을 위한 개인 공간이 갖춰져 있었다.바깥의 인테리어도 좋지만, 내부 공간은 여전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바로 돈이 있어서 좋은 점!단지 식사를 하는 공간이지만, 룸 안에는 대형TV와 편안하고 넓은 가죽 소파가 갖춰져 있었다. 또 각종 커피 메이커, 정수기, 그리고 국외에서 수입한 첨단 설비들이 갖춰져 있어서 그야말로 작은 휴게실이나 다름없었다.“아줌마, 회사 구경을 시켜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방에는 왜 왔어요?”사진은 자신의 작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면서 무진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하지만 남자들이 이동하는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빠, 나 아빠 옆에 있고 싶어.”무진의 행동이 이렇게 소원하자, 사진은 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으려고 했다.여동생을 힐끗 본 사무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나도 어쩔 수가 없어.”“엉엉. 사진이한테는 너무 어려워!” 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슬피 우는 소녀의 울음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예민주는 들어오기 전에 미리 장난감과 먹을 걸 준비해 달라고 시켰다.지금 이미 예민주가 시킨 물건들을 보내왔다.이쪽을 보니 무진은 옆에 있는 아이의 마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얘들아, 너희들은 어느 집 아이들인데 지금 회사에 있는 거니?”온화한 모습으로 살짝 몸을 숙인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민주의 모습에는 어떤 허세도 보이지 않았다.두 아이는 이전에 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빠와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본 데다가,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인 걸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우호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흥분한 표정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면서 사진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저희는 여기를 구경하고 싶어요.”사진은 여린 목소리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고개를 살짝 끄덕인 예민주는 고개를 돌려서 무진을 한 번 보았다. 무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그래, 그럼 아줌마가 너희들 회사 구경을 시켜줄까?”“이제 곧 점심 시간이야. 너희들도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어. 아줌마가 맛있는 걸 사줄까?”예민주의 제안은 시원시원하고 아주 열정적이라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어느새 다가온 무진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민주야, 이 두 아이는 내력이 분명하지 않아. 그렇게 애들을 여기 남겨두고 놀게 하다가, 무슨 일에 엮일 지도 몰라.”“괜찮아요. 이 두 아이가 무슨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겠어요. 그저 단지 여기를 지나다가 궁금해서 좀 더 구경하고 싶을 뿐일 거예요.”예민주가 시간을 보니 마침 12시가 다 되었다.“같이 한 바퀴 돌아볼래요? 오빠도 한참동안 나하고 함께 있지 못했잖아요.”철이 든 모습의 예민주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결국 무진의 마음속 예민주에 대한 미안함이 이성에 승리를 거두었다.두 아이는 지금도 무진에 대해서 희망을 품고 있었다.‘사무실에 있을 때는 우리한테 냉담했지만, 결국 우리 친아빠야.’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잘못했던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모두 처음 겪은 일이기에, 잠시 동안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던 아이들도 마음을 놓았다.‘어렵게 왔는데, 아빠하고 좀 더 있을
그렇게 친했던 두 사람이기에, 낯선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었다....손건호는 지난 5년 동안 여전히 무진의 곁을 따랐다.당연히 무진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 ‘지금 만약 아이들이 여기에 더 오래 머무른다면, 일을 수습하기가 곤란해질 거야.’결국 손건호는 서한기의 눈빛을 피해서 다른 곳을 보면서, 그들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빨리 가지 않고 뭐 해? 잠시 후에 경비원이 오면 처리하기 곤란하단 말이야.”약간 떨어져 있는 무진을 바라보는 서한기의 그윽한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과 더불어 여전한 존경심도 담겨 있었다.‘지금은 일을 크게 해서는 안 돼. 지금 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여전히 억울한 표정의 두 아이를 바라보자, 서한기는 자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결국 감정을 억누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위로했다.“사진아, 사무야, 우리 가자.”세 사람은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무진 오빠, 저 두 아이는 누구에요?”바로 그때, 서한기와 아이들이 막 떠나려고 했을 때, 다른 한쪽에서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무진의 곁에 와서 서한기를 바라보면서, 아리따운 여자는 자연스럽게 무진의 팔짱을 꼈다.요염한 눈길로 두 아이를 바라보던 여자는, 두 아이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변의 공기마저 순식간에 싸늘해진 듯했다.‘저, 저 두 새끼는 무진 씨하고 똑같이 생겼어. 완전히 무진 씨 판박이야!’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예민주의 머릿속도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지금 예민주는 표정을 전혀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분노와 당황스러움, 증오와 초조함이 교차했다.‘왜?’‘송성연은 그렇게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왜 여전히 이 두 아이를 낳는 걸 선택했지?’‘강무진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포기한 뒤로는 더 이상 아무 접촉도 없었던 게 분명해.’‘애초에 그렇게 단호하게 헤어졌기 때문에, 송성연은 당연히 절망 속에 빠졌어야 해. 더 이상 강무진에게
말을 마친 사무는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뚱뚱한 남자를 재빠르게 발견했다.“아저씨, 바로 저 사람이 사진이를 이렇게 다치게 했어요!”사무는 우렁찬 목소리로 방금 엘리베이터를 나온 남자를 가리켰다.팍!쿵!서한기가 재빨리 깔끔하게 손을 쓰자, 남자의 커다란 몸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지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남자는 온몸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아이들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꺼져!”피에 굶주린 듯 핏발선 눈으로 쏘아보면서, 서한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쓰러져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통증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나려던 남자는 등줄기의 시큰한 통증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다시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결국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다른 쪽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무진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동에 시선이 향했다.사람들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마케팅팀 팀장과, 그 앞에 서서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아이들이 아직 안 갔어?”그리고 무진이 엘리베이터 문을 나설 때, 손건호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서한기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들 두 사람은 예전 진성 조직의 공동 대장이었다. 여러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지난 일 때문에 서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느낌도 그들 두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왜인지는 모르지만 서한기의 망설임이 느껴지자,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아직도 안 가보고 뭐 해?”‘저 두 아이는 뭔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머릿속에서 어떤
아직도 물린 곳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마케팅팀 팀장은, 갑자기 사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심적으로 위축되었다.‘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방금 전에 행동은 치밀하게 생각하고 한 건가?’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마케팅팀 팀장은 곧 한숨을 돌렸다.‘내가 뭘 무서워하는 거야? 기껏해야 아이일 뿐인데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렇게 버릇없게 말이지!”사무는 코웃음을 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이 버릇없는 새끼가 감히 욕을 해! 보아하니 너는 혼나는 걸로도 부족하겠어!”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줄곧 말을 하지 않던 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됐어, 너희 두 아이는 빨리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때문에 너희 엄마가 회사의 징계를 받게 돼.”사무는 무진의 얘기하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전혀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볼 뿐.‘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보면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이런 아버지라니! 얼마나 마음이 독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겠어.’‘오늘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사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팀 팀장을 흘겨보기만 했다. ‘얼마나 더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 조금 있다가 한기 아저씨가 시원하게 혼내 줄 테니까!’조심스럽게 여동생을 일으켜 세운 사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사진아, 가자!”사진도 지금은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문 채 오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입구로 걸어가던 사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무진도 마침 사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린 사진은 오빠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마침내 소동이 마무리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아이는 쌍동이겠지. 한 네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아이들 나이와 지금 상황을 보면...’‘혹시 이 두 아이가 정말 보스와 사모님 사이의 아이인 거야?’‘사모님이 낙태한 뒤 출국한 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아이들을 낳은 건가?’너무나 엄청난 상상이라서, 손건호는 곧 뭔가 큰일이 닥칠 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지금은 원래 마케팅팀 팀장이 보고하면서 무진의 눈에 들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그러나 오늘 보고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저기압인 대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상태였다.‘지금 대표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면 칭찬을 받겠지.’눈빛을 빛내던 남자는 손을 비비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해!”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마케팅팀 팀장이 사진의 여린 팔을 꽉 쥐었다.“어린 애들이 함부로 아빠라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도대체 부모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장난인지 알기나 해?”마케팅팀 팀장은 거칠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방비 상태였던 사진은 그저 팔이 꽉 잡힌 채 끌려갈 뿐이다.사진은 본능정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사진의 발버둥은 결국 전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오빠, 오빠, 사진이 너무 아파!”“아아, 아파...”팔의 통증에 몸부림치던 사진은 기어이 기회를 틈타서 남자의 팔을 물었다.갑작스럽게 팔에 통증을 느끼자, 남자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뒹굴었다“아!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었어!”잔뜩 살이 찐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갑자기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섰다.하지만 팔을 물린 남자는 사진을 떨쳐내려고 거칠게 밀쳤다.결국 힘에 밀린 사진은 의자에 이마와 팔을 부딪혔다. 부딪친 곳은 바로 빨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