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으면 곱게 죽지, 투신자살은 왜 한대?”혐오감이 잔뜩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들 곱게 죽고 싶지 않...”고은서는 문득 곽승재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그녀가 대체 언제 투신자살했단 말이지?“사모님, 드디어 깼군요.”이때, 도우미 이미숙이 물과 약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머리가 아프시죠? 의사 선생님께서 가벼운 뇌진탕 증상이 있다고 해서 약 처방해주셨는데 지금 드실래요?”고은서는 널찍한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숙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까먹었다.실내 인테리어를 봐서는 예전의 곽씨 일가 별장 같았다.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2년이 넘도록 발길이 끓긴 곳이지 않은가?설마 곽승재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칼로 심장을 찌른 이상 설령 살아있더라도 수술실에 실려 갔을 테니까.고은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가슴을 확인해봤는데 멀쩡하기만 했다.그리고 머리와 손목에는 의료용 거즈가 둘둘 감겨 있었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나중에 투신자살하고 싶으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가.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으니까.”싸늘한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방을 나섰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기 몸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2년 넘게 정신병원에 갇혀 있으면서 안색은 이미 초췌하다 못해 창백했고, 살이 쏙 빠져 장작처럼 삐쩍 말랐지만 지금은 피부가 뽀얗고 매끈하니 탄력까지 넘쳤다.몸과 팔뚝에도 간병인과 환자들 때문에 난 상처와 멍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화가 난 나머지 말을 좀 심하게 했을 뿐이에요.”이미숙은 그녀가 상처받은 줄 알고 조심조심 위로했다.“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이따가 도련님과 잘 얘기...”“아줌마! 오늘 며칠이죠?”고은서는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이미숙의 말을 끊었다.
"고은서, 이제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곽승재가 버럭 화를 내며 타박하자 고은서는 말없이 냉소를 지었다.자기 와이프를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할 수 있단 말인가?“승재야, 화내지 마.”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유미가 먼저 말을 꺼내더니 설명을 보탰다.“은서 씨, 승재가 오늘 내 생일 파티에 참여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야. 사실 우리 아빠가 오랜만에 보고 싶다고 해서 가볍게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집으로 초대했는데 이렇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어. 게다가 은서 씨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걸려 서둘러 해명하러 달려왔거든. 다 내 탓이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과하는 백유미의 모습은 진정성이 가득했다.고은서는 3년 전에도 백유미가 집까지 찾아와서 똑같은 변명을 했던 거로 기억했다.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침실이었다.당시 백유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란히 서 있는 선남선녀를 보자 열이 확 올랐다.이내 악을 쓰며 백유미에게 꺼지라고 했고, 탁자에 놓인 꽃병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꽃병에 머리를 부딪힌 백유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곽승재는 노발대발하면서 곧바로 백유미를 안고 병원으로 데려가 몇 날 며칠이나 돌봐주었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화를 돋우는 말이었지만, 이제 고은서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짓는 여유까지 되찾았다.“유미 씨, 멀리서 해명하러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애썼네. 나 화 안 났어. 아버님께서 승재를 식사에 초대하셨다며? 얼른 가 봐. 연장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백유미는 고은서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당황했다.곽승재도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상황이란 말이지?자신에게 혼났는데 울고불고 떠들기는커녕 백유미와 밥 먹으러 가라고 흔쾌히 보내주기까지 하다니?분명 2시간 전만
그녀를 가장 아끼는 분이지만, 전생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반드시 곁에서 효도하여 외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은서는 몸이 만신창이라 당분간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결국 설렘과 간절함을 애써 억누르고 며칠 후에 찾아뵙기로 약속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고은서는 테라스에 앉아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18살이 되던 해, 사랑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사랑에 빠진 소녀는 체면 불고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자에게 대시했지만, 끝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대학 졸업할 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곽승재의 할머니 전미자가 둘이 혼인신고 하도록 적극 추진한 덕분에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비록 곽승재는 대놓고 그녀를 싫어했지만, 언젠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는 이름다운 환상을 줄곧 품고 있었다.결혼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나자 백유미가 귀국해서 곽승재의 회사에 입사했다.두 사람 사이의 남다른 인연은 그녀에게 어쩌면 곽승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결국 점점 초조해지면서 떼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확인받고 싶었다.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투신자살로 협박하는 바람에 곽승재과 백유미의 사이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절망에 빠진 그녀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미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곽승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출국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하지만 출국 전날, 뜻하지 않게 집에 강도가 들어 불까지 지핀 탓에 백유미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심지어 범인을 붙잡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시켰다고 딱 잡아뗐다.이 사건은 곽승재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입이 아프게 변명해봤자 그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대쪽 같이 밀어붙였다.결국 외할아버지의 설득과 전미자의 도움을 받아 옥살이는 면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어렵게 받아냈다.그
고은서가 몸을 홱 돌렸다.“누가 버리라고 했죠? 당장 주워요.”프런트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어차피 대표님은 볼 생각도 없을 텐데 굳이 헛수고할 필요 있어요? 그동안 챙겨온 물건도 다 버리라고 했거든요.”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하는 게 힘들까 봐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며, 옷이며,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마저 가져다주었다.게다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처럼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은 진심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꼴이라니.어떻게 고작 프런트 직원이 감히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냐는 말이다.고은서는 싸늘한 시선으로 프런트 직원을 노려보았다.“대표님이 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리죠? 얼른 챙기지 못해요?”여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알겠어요, 다시 챙기면 되잖아요. 목을 매서 겨우 대표님을 만난 주제에 어디서 사모님 행세를 하는 건지, 참.”“무슨 일이죠?”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내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의 비서 주민기가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주민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프리미엄 맞춤 정장 차림의 곽승재였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비록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지만 비주얼 자체가 워낙 훈훈한지라 오히려 남성미를 한층 더 부각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를 만날 때마다 고은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입도 벙긋하기 싫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주민기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잽싸게 대답하는 예전과 달리 고은서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곽승재가 인정한 아내가 아니었다.남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처세술에 불과했으니까.“무슨 일이지?”고은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곽승재는 프런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펜 이리 줘요.”“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곽승재!”고은서가 뒤쫓아갔다.“저 여자 끌어내.”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고은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전생에 무려 8년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달랑 이혼협의서 한 장, 그리고 백유미와 결혼했다는 소식뿐이지 않은가?그런 남자가 어찌 단 몇 주 만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말이다.“할머니는 만약 승재가 우리 은서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이혼하고 싶냐는 뜻이야.”전미자가 다시 물었다.노부인의 잔뜩 기대하는 눈빛 속에서도 고은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번 생에는 어떻든 간에 곽승재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지긋지긋했고, 곽승재와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맞이할 생각이다....본가 거실을 나서자 고은서는 싸늘한 얼굴로 차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이혼한다고 생난리를 쳤는데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은가?어쩌면 곽승재는 그녀와 전미자가 짜고 치는 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차에 타면 추궁과 모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결국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택시 타고 가려고 했다.“타!”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괜찮아, 어차피 가는 길도 아닌데.”고은서도 매섭게 쏘아 붙었다.이혼을 못 해서 짜증이 난 건 매한가지라 스스로 제 무덤을 파서 곽승재의 화풀이를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곽승재의 말투에 협박이 담겨 있었다.“소리는 왜 질러?! 그렇게 능력 있으면 나한테 따지는 시간에 이혼 수속이나 하지?”고은서가 화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이런 말투로 그를 대한 적은 처음이고, 심지어 반박까지 하다니?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의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는 곽승재를 발견했고,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이미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이거 놔!”결국 다급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그의 팔뚝을 콱 물었다.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목덜미를 잡고 차에 쑤셔 넣었다.“
고서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세요.”“승연이 상황에 관해서 너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어. 지금 승연이가 꺼려하지 않으면서도 정서 조절에 도움이 되는 향을 찾아야 하는데 승재 할머니 말씀으로는 네가 퍼퓸 제작에 능하다고 하던데 혹시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해서.”서연정은 국내외에도 많은 퍼퓨머가 있긴 하나 곽승연이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설명을 보태면서 부득이하게 고은서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전에 곽씨 가문 본가에 갔을 때 곽승연 상태와 퍼퓸 제작에 관한 일을 곽승재한테서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때 당시는 곽승연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던지라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거절했었다.“어머니, 제가 한번 해볼게요.”“은서야, 고마워.”서연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가슴이 찡해났다.“하지만 너무 큰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꼭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어요.”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고은서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은서야. 내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걸. 승연이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결과가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정말 고마워.”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시간 내서 승연이가 무얼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할게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원래도 까다로운 퍼퓸 제작이 이번엔 더 힘들 것 같았다.‘천천히 해야지.’“은서야, 잘 부탁해. 기사님한테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기다리라고 할게.”“괜찮아요.”고은서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할 때 서연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넌 승연이를 도와주는 것 외에 일도 해야잖니. 기사님이 데려다주고 하면 너도 차에서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잖아.”그녀의 말에 고은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운전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육현석이 혼자 추측하기 시작했다.“혹시 뭐 발견한 거라도 있어서 백유미를 이용하려고 놓아준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은 모르고 있는 게 나아.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서류 하나를 들면서 말했다.“...”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전에 약속한 찻집에서 만났다.웨이터를 따라 위로 올라가 보니 은은한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여러 향초도 켜져 있었고 내부는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송민준을 만날 때 갔던 찻집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는데 아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은서야, 왔어?”서연정이 그녀를 보며 인사했다.“어머니.”고은서는 인사하면서 곽승연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열심히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승연이가 요즘 많이 나아졌어. 너한테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했는데 직접 전해주는 게 더 예의인 것 같아서 데리고 왔어.”서연정이 앞서 설명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곽승연은 다도 전문가들이 차를 올려줄 때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미안, 은서야. 승연이 아직 다른 여자애들처럼 너랑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진 못해.”서연정이 웃으면서 사과했다.“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하는데 대부분 사람은 그저 환자로만 보거든. 승연이는 또 그걸 싫어하고. 그래서 애가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지금은 주동적으로 인사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돼.”아이패드를 들고 조용하게 앉아있는 곽승연은 나긋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가녀린 몸매와 창백한 얼굴빛을 외에는 전혀 자폐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저는 승연이가 그저 평범한 여자애처럼 보여요. 조용하고 귀엽잖아요.”“고마워, 은서야.”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승연아, 언니한테 줄 물건이 있다며? 언니 지금 여기 왔어
육현석은 곽승재의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큰 타격을 받은 모양이다.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달랬다.“형, 형수님이 실망한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잖아. 전에 백유미를 감방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어긴 사람이 형이 맞잖아. 심지어 지연이도 화를 내면서 또다시 형이랑 형수님이 재혼하는 걸 도와주면 나랑 절교하겠다고 했단 말이야.”육현석은 무척 난감해했다.한쪽은 제일 친한 형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그에게 있어서 누굴 도와줄지 선택 내리기 너무 어려웠다.“형수님 형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냥 내려놓는 건 어때?”육현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다시 열었다.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너도 민시후가 고은서한테 더 잘 어울린다는 소리 하려고 그러는 거야?”“그럴 리가! 형수님처럼 훌륭한 사람한테 민시후가 뭐야.”육현석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그런데 왜 백유미를 이대로 놓아주는 거야? 혹시 아버님이랑 백승엽이 백유미를 놔주라고 형을 협박한 거야?”육현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현석아, 전에 은서가 임신했던 아이가 내 아이래.”곽승재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바꾸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왜 갑자기 이 말을 꺼내는 건지 약간 의문스럽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의 말에 답했다.“내가 전에도 형수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민시후랑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을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나한테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저 민시후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는 거라고만 생각하면서 믿지 않았어.”곽승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주민기한테 조사하라고 맡기고도 그 결과를 확인해 보지 않았어. 고은서 말이 맞아. 난 근거 없는 자신감만 넘치는 사람이야. 증거 있는 일만 믿으면서 단 한 번도 고은서를 믿어준 적이 없어. 그래서 고은서도 내가 자신을 위해 변할
“누가 얌생이라는 거야?”“T국에 있을 때 분명히 나도 고은서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소식을 숨겼잖아. 이게 얌생이가 아니고 할 짓이야?”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내 아내에 관한 소식을 왜 너한테 알려줘야 하는데?”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두 사람이 이혼한 지 언젠데 아직도 아내 타령이야. 곽승재, 아내라는 호칭 적당하게 부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 대신 창피해지려고 하니까.”민시후가 비아냥거리며 반박했다.“너!”곽승재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시후, 네가 환자라고 내가 널 못 팰 것 같아?”“당신이 뭔데 민시후를 패?”바로 이때, 고은서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그녀는 민시후 앞에 막아서며 한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곽승재, 여기 블랙박스 있는 거 안 보여? 함부로 행동하지 마.”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곽승재의 마음을 찔렀다.그는 순간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옆에 보고 있던 주민기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나 고은서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주민기 씨, 건망증이세요? 뇌 건강에 신경 좀 쓰시는 게 좋겠네요. 곽승재한테서 돈 받으면서 편드는 건 이해하겠지만 저도 스스로 볼 줄 알거든요. 그러니까 대신 설명해줄 필요 없어요.”주민기는 억울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그냥 사무실에 계시면 될 걸 왜 굳이 나와서 사모님을 기다리려는 거야. 난 부득이하게 따라 나온 것뿐인데. 게다가 사모님한테 잘 보이기는커녕 민시후 때문에 도리어 화내는 모습만 보이게 되었잖아.’그에게 있어 더 절망적인 건 고은서가 민시후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주민기는 미래의 속상해하는 곽승재의 모습과 힘든 자신의 앞날이 벌써부터 무서워 났다.‘대표님이 기분 나빠하면 내 일상도 함께 힘들어지는데. 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인데 왜 하늘은 계속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야. 벌써부터 힘이 빠져.’주민기가 한창 생각
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해외에서 혼자 지내며 꽤 많은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고은서는 민시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비록 지난 생에서 앞으로 그가 이루어낼 성과가 작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고은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그냥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고은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이 없어. 이제 알게 되었으니 날 책임 져야 해.”민시후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답했다.“져야 할 책임이 너무 커서 감당 안 되겠는데?”“그럼 내가 너 책임질까?”민시후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어머니의 묘비 앞에 데려간 이유를 알았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며 자신에게 진지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고은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구애받았지만 그녀는 곽승재에게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곽승재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고 살았었다.잠시 생각하던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다음 주 우리 삼촌 생일인데 부상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민시후는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두 바퀴 뛰어서 보여줄까?”말을 마친 민시후가 날뛰려 했지만 고은서가 얼른 제지했다.“됐어. 얼른 앉아.”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민시후, 여기서 몇 바퀴 돌다가는 구급차 불러야 할 거야.”민시후는 고은서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래. 알았어. 얌전히 앉아 있을게.”병동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고은서는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민시후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고
다급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농담이야.”그 말을 들은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고은서, 너는 진짜 예쁘면서 마음도 착해.”“야... 그러지 마.”고은서가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민 도련님, 정상적으로 돌아올 순 없을까? 그렇게 웃지도 말고 닭살 돋는 말 하지도 마. 아니면 뭔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잖아.”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역시 장난은 그만 쳐야겠어. 전에 방탕하게 행동했더니 이제 이미지 회복은 글렀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재밌는 곳이나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에 데려갈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민시후는 그녀를 묘지로 데려왔다.고은서는 민시후의 지시에 따라 한 묘비 앞에 섰다.묘비 사진에는 온화하고 단정한 표정의 중년 여성이 웃고 있었다.“우리 어머니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여긴 외가 쪽 집안 묘지야. 비록 어머니가 북성으로 시집갔지만 외로울까 봐 여기에서 묘비를 세웠어.”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평소 민시후는 세상만사에 무심한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드물게 부드럽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민시후는 휠체어에서 내려 준비한 꽃을 조심스럽게 묘비 앞에 놓고 묘비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정성껏 정리했다.“왜 곽승재를 그렇게 미워하냐고 물었었지?”고은서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여러 번 물었었지만 지난번 서운에서 조금 얘기해줬을 뿐 전부는 얘기해 주지 않았다.묘비 앞에 앉아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는 민시후의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조심스레 짐작했다.“설마 경찰서에 끌려갔던 그날 밤 어머니께서 사고를 당하신 거야?”민시후의 눈에 슬픈 감정이 서렸다.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날 밤 내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급하게 해성으로 오시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어. 이튿날 북성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 난 어머니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
곽승재는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단순히 바람 쐬러 나온 건지 아니면 볼일이 있어 나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민시후를 휠체어에 태운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평소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한 눈빛을 보였지만 그 안에는 아픔도 서려 있었다.“아이고, 곽 대표. 여기서 입원 중이었어? 우연이네.”민시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그에게 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였다.고은서가 물었다.“할 말이라도 있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몇 분이면 되는데 병실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고은서는 차분하게 답했다.“여기서 얘기해.”곽승재는 민시후를 한번 보고 다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사적인 일이라서 다른 사람이 듣는 건 곤란해.”“그럼 미안하지만 시간이 안 되겠네. 저녁에 시간 되면 다시 얘기해.”고은서가 그렇게 말하자 곽승재의 가슴 속에서 무거운 통증이 밀려왔다.이제 고은서는 몇 분이라도 자신에게 할애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지나가게 좀 비켜줄래?”고은서가 곽승재에게 길을 비키라고 재촉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나중에 시간을 낸다는 말을 핑계로 그저 대화를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결국 입을 열었다.“어제 승연이가 네가 준 캔들을 사용했더니 밤새 잠을 설치지 않고 잤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 승연이가 그림 한 장 그렸는데 너한테 주고 싶대.”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승연이랑은 한번 마주친 게 다인데? 날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그림을 선물로 준다고?’“외할아버지 댁에 아직 오일이 조금 남아 있어. 만약 승연이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 가져다줄게.”고은서가 여전히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은서야, 어머니가 직접 승연이 그림을 너한테 전달하고 싶대. 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내가 장소를 정해서 알려줄게.”고은서가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도 어머니 연락처 있으니 나중
고은서가 민시후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민시후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서려 하자 민시후는 전화를 끊고 백유미에게 정신 진단서를 발급한 병원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병원은 곽현수가 개인적으로 지분을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관련 증거는 경찰서에 보내놨고 백유미가 돌아오면 재검사 신청할 거야. 원지훈의 사망 원인은 T 국 쪽 부검 보고서에서 군도로 목을 그었다고 나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건지 실수로 찔린 건지는 알 수 없어. 상식적으로 백유미가 그 상태에서 성인 남성을 죽일 힘이 남아있을 리는 없지만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타날 수도 있지. 하지만 이 부분은 증거로 삼을 수 없어. 폐기된 창고에는 CCTV가 없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너에게 향해 있었으니 그 누구도 안쪽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았어. 새로운 증거가 없으면 사건 재조사는 힘들 거야.”민시후의 설명을 듣자 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시후는 대충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T 국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고마워.”고은서는 진심으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감사한 마음을 알아채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마우면 행동으로 표현해 줘.”고은서는 경계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뭐 하려는 거야?”그 모습을 본 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은서, 지금 누구랑 벽을 세우는 거야? 밥 챙겨왔다며? 어디 있어? 배고파 죽겠어!”고은서는 그제야 도시락을 열어 보여줬다.“특별히 찾아온 맛집이야. 얼른 드세요, 민 도련님.”민시후는 젓가락으로 몇 입 맛보고선 불만을 표했다.“특색이 하나도 안 살았잖아. 다음엔 내가 직접 요리해서 진짜 맛있는 음식이 뭔지 보여줄게.”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요리할 줄 알아?”민시후가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무슨 반응이야? 내가 요리할 줄 아는 게 이상해?”‘이상하고말고. 부잣집 도련님이 의식주에 대해 까다롭게 굴면서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생활이 익숙할 텐데 왜 스스로 요리를 배운 거지?’“혹시 어떤 여자
고은서가 여시은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며 미소를 지었다.“시은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요.”여시은은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곽 대표님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같이 가면 제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여시은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병실로 이끌었다.여시은의 비서는 문을 두드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예기치 않게 곽승재의 병실에 들어섰다.곽승재는 VIP 스위트룸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실과 오픈형 주방 작은 재활실이 있었으며 병상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주민기에게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고은서를 바라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은서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사모님, 시은 씨.”주민기는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시은은 상냥하게 말했다.“주 비서님께서도 계셨네요.”여시은은 곧장 곽승재에게 말을 건넸다.“곽 대표님,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대신 제가 왔어요. 마침 은서 씨를 마주쳐서 같이 왔지 뭐예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귀여웠다.“곽 대표님, 너무 감사하죠?”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감사합니다. 여시은 씨. 아저씨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럼요.”여시은은 눈빛으로 비서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과일 좀 준비했어요.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하진 말아주세요.”곽승재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고은서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중에 들린 도시락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게 말하는 대신 여시은에게 말을 건넸다.“시은 씨. 얘기 나눠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떤 여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부탁했다.“은서 씨, 저도 대표님이랑 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