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연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그녀는 혼자 앉아서 멍을 때리면서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거부했다.고은서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꽃다운 나이에 단 한 번도 활발하게 실컷 놀아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이상하게 여기고 가여워하는 눈빛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졌다.전에 곽승연이 그렸던 수련꽃을 떠올린 고은서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하인에게 수련꽃 몇 송이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곽승연은 수련꽃을 쥔 채 피곤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연정 몸에 기대어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서연정은 가슴 아파하며 그녀를 꼭 끌어안아 줬다.고은서는 더는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곽승재는 문 쪽에 서서 서연정 품에 기대어 있는 곽승연을 빤히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아주 담담해 보였다.서연정은 곽승재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해외로 나간 후로 거의 해성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고 따라서 곽승재도 단 한 번도 서연정과 화목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곽승재의 창백한 얼굴과 씁쓸한 표정을 본 고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위안했다.“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아. 당신 어머니는 그저 당신이랑 가까워지는 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곽승재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상관없어. 난 한 번도 이런 일을 마음에 둔 적이 없으니까.”‘상관없을 리가 없잖아.’그러나 고은서는 더는 그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할머니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난 먼저 가볼게.”곽승재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가여워하는 고은서의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원래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녀의 눈빛을 보자마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날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한다고 해도 여전히 날 관심해 주는구나. 난 왜 이토록 착한 여자를 악랄하다고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을까?’...한 주일 후.민시후는 이미 완쾌되었지만 별로 퇴원하
고은서가 신고한 덕분에 백유미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은 그녀를 찾아갔고 정신질환 감정도 다시 하게 되었다.하지만 백유미가 진짜 정신질환이라도 있는 듯 아주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게다가 몸에 상처도 다 낫지 않은 데다가 정서 기복이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조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백유미가 이 상황에서 순순히 조사에 협조할 리가 없었으니까 말이다.소식을 전해 들은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경찰 측에서 백유미가 정신질환이 없다는 증거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압력을 가하겠다고 얘기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곽현수가 증명을 내놓을 수 있다는 건 이미 백유미가 꼬리를 밟히지 않게끔 깨끗하게 처리했다는 걸 의미한다.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경찰은 T국에 온 사건 처리 결과가 명확하다는 공함과 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를 받았다.경찰 측도 자연스레 T국에서 보내온 각 증거 자료들을 접수했다.백유미는 귀국해서도 형사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고 대신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라고 한다.범가온도 이틀 전에 귀국했는데 백씨 집안에서 마찬가지로 정신질환 진단서가 가짜라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바람에 백유미와 똑같은 정신병원에 갇힐 거라고 한다.해 질 무렵, 고은서는 민시후로부터 백유미가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튀어나온 범가온의 발에 여러 대 차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먼저 예상하고 간병인 여러 명을 불러 자신을 보호하게 했지만 범가온의 힘이 하도 세서 제대로 막지 못한다 데가 하마터면 간병인들까지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한다.“여러 명이 범가온 한 사람을 못 막았다고?”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범가온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엄연히 따지면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여러 명을 제치고 백유미를 발로 찼다고?’“특별한 상황에서 사람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한 법.”민시후가 말했다.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자꾸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아무튼 범가온이
박지연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어머니 조수연과 그의 첫사랑 유혜린이었다.조수연은 유혜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서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마치 친모녀 같았다.두 사람은 박지연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조수연은 표정이 거의 썩어 있었고 유혜린은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심지어 그녀는 먼저 박지연을 향해 인사했다.“지연 씨, 여기서 만나네요. 친구랑 쇼핑 중인가요?”박지연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고은서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가자.”“이혼을 협박 수단으로 삼는 여자를 누가 좋아해.”조수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어떤 사람은 진짜 존재하는 것 자체가 화를 불러온다니까. 승준이가 그렇게 취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혜린이가 제때 가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밤새 보살피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을 거야.”박지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옆에 있던 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조수연 씨, 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르게 해야죠. 그날 회식은 지연이 부문 회식이었거든요. 당신이 아들이 기어코 고집부리며 따라간 거예요. 술도 스스로 마신 건데 지연이랑 무슨 상관이에요!”그러나 조수연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비아냥거렸다.“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면서 우리를 가해자로 만드는 게 좋은 사람이야? 승준이가 착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바보처럼 저 애를 쫓아다녀서 그렇지.”“지연이가 없는 말을 했어요?”고은서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연이한테 잘해준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지연이가 온씨 집안에서 언제 한 번 편하게 지낸 적이 있어요?”“승준이한테 시집온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친구로 남편이랑 남편 가족을 잘 챙기라고 타이르기는커녕 승준이랑 이혼하라고 시키고 정말 친구를 사귀어도 하필 이런 애를 사귀고 난리야. 이게 다 네 탓이야!”“나만 욕하면 됐지 왜 은서까지 끌어들이고 난리세요!”박지연이 더는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당신 아들한테 시집간 걸
박지연이 온승준한테 전화를 걸려고 하는 순간 조수연이 갑자기 그녀에게 덮쳐들었다.박지연은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피했다.“아악!”조수연은 비명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더니 하행하는 에스컬레이터 위로 넘어졌다.퉁퉁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수연은 그대로 아래층으로 떨어졌다.“어머님!”유혜린은 소리를 지르면서 조수연을 향해 달려갔다.큰 소란 소리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박지연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박지연은 습관적으로 폰을 고은서한테 건네주고 달려 내려가 조수연의 상태를 확인했다.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고은서는 멍해 있었다.그녀는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조수연은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허리와 다리를 다쳤는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유혜린은 그녀의 상태를 검사하고 있었고 박지연은 그녀의 이마에 있는 상처를 간단히 처치해주고 있었다.그러나 조수연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박지연한테 살인범이라면서 신고하겠다고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고은서는 조수연의 상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렇게 소리 지르는 거 봐서는 내상을 입거나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네.’그녀는 고민 끝에 온승준한테 전화 쳤다.다행히 수술 일정이 없어서인지 그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은서 씨?”“네, 저예요.”고은서는 자초지종을 온승준한테 알려주면서 그를 재촉했다.“지금 119에 전화 했는데 구급차가 곧 도착할 거예요. 얼른 가보세요.”전화를 끊자마자 박지연의 폰이 또 울렸다.발신자는 다름 아닌 육현석이었다.조수연을 보살피는 박지연 대신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다.“육현석 씨, 지연이랑 저한테 지금 급한 일이 발생해서 지연한테 나중에 연락하라고 할게요.”“무슨 일 있어요? 지금 어디예요?”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육현석은 바짝 긴장되었다.자초지종을 다 알려주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쇼핑몰 이름을 알려주면서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다.“금방 갈
조수연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모두가 박지연과 육현석을 바라보았다.“불륜이라뇨! 지연이는 이미 당신 아들이랑 이혼했잖아요. 새 연애를 시작하는 게 무슨 죄라도 되나요?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조금 전 유혜린이 당신 아들에게 깊은 감정을 품어서 아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더니 다른 사람이 지연이한테 관심을 가졌다고 불륜이라고 단정하나요? 이중잣대 아니에요?”주위 사람들은 다시 조수연을 쳐다보며 그녀가 변명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누가 이중잣대란 거야!”조수연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박지연은 승준이랑 이혼하기도 전에 이 남자와 엮였어. 저 남자는 처음부터 지연이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우리 승준이야 순진해서 지연이 말에 넘어갔겠지만...”조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현석의 강렬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육현석의 외모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싸늘한 눈빛은 조수연을 움찔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육현석의 시선에 조수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와 동시에 조수연은 박지연이 이혼 전날 했던 말을 떠올렸다.“저를 모욕하면 저도 이제 더 이상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자기 남편과 아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떠올린 조수연은 그들에게 피해가 갈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내오는 시선에 조수연은 굴복하기 싫어서 아예 머리를 감싸며 울기 시작했다.“아이고. 머리가 너무 아프네. 다리도 아프고... 이러다가 걷지도 못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애먼 사람을 괴롭히네. 경찰은 안 불렀어? 신고할 거야!”이러한 상황에 나서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유혜린은 조수연을 달래며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대표님.”그 순간 정장을 입은 몇몇 회사 임원들이 다가왔다.그들은 육현석에게 공손히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처리할까요?”“우선 이분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세요. 관련된 CCTV와 증인들을 최대한 빠르게 확보해 경찰 조사에 협조하도록 하세요.”“알겠습니다.”육현석의 말을
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 어머니도 쉬운 사람이 아닌 데 가면 혼나기만 하는 거 아니야? 가지 말고 온 선생님께 전화해서 상황 물어보고 돈 좀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박지연이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도 본인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내가 안 가면 분명 이 일을 빌미로 병원에 찾아와서 매일 소란을 피울 거야. 조용히 살려면 내가 가야 해.”화가 난 고은서가 답했다.“스스로 일을 벌여 놓고 왜 네게 화내는 거야? 정말 예전 버릇 그대로네! 이전처럼 네가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잖아. 같이 가자. 난 그 여자가 또 소란을 피운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 네 편이 하나라도 있어야지.”“됐어. 네가 가면 또 무슨 모진 말을 할지 몰라. 그런 여자 때문에 네가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박지연이 거절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아. 온 선생님 앞에서 상황을 명확히 설명할 거야. 그래도 계속 억지를 부리면 나도 더는 참지 않을 거야.”“은서야, 너는 돌아가. 내가 같이 갈게.”육현석이 나섰다.“백화점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나한테도 책임이 있어. 그런 만큼 병문안 가서 어떤 속셈인지 묻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제대로 확인해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해.”육현석이 타당한 이유를 덧붙였다.육현석이 동행하면 박지연이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온 선생님에게도 육현석을 보여주면 지연이가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릴 수 있겠지. 일거양득이겠어.’고은서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그럼 잘됐네. 두 사람이 같이 가. 난 외삼촌 선물부터 사야겠어.”박지연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고은서가 떠난 뒤 박지연은 육현석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운전하고 두 사람은 뒷좌석에 앉았다.“오늘은 정말 폐를 끼쳤네. 미안해.”박지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순히 쇼핑하러 나왔을 뿐인데 운 없게도 조수연을 우연히 만나 육현석까지 휘말리게 했어.’육현석이 웃으며 답했다.“별일도 아닌데 뭐. 우
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육현석을 바라보았다.육현석은 그녀가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입을 열었다.“사실 오래전부터 너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어. 막 이혼해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건 알아. 그래서 내 감정을 마음 깊숙이 숨긴다고 숨겼어. 네가 내 고백에 놀라 멀어질까 봐 두려웠거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아.”육현석은 단호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지연아, 좋아해.”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육현석에게 직접 들으니 박지연은 여전히 놀라웠다.조건 좋은 육현석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명문가의 아가씨들도 많았다.‘조건 좋은 아가씨들은 뒤로하고 나를 좋아한다고? 그것도 오래전부터?’“조건이 좋으니 더 좋은 여자가 어울린다는 말로 나를 거절하지는 마. 나도 많은 여자를 만나봤고 새로운 사람에게 끌린 적도 있어. 하지만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너에 대한 내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야. 나는 낙관적이고 자신감 있는 네 모습, 밝고 활기찬 네 모습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좋아. 당연히 너의 그 착한 마음도 좋아.”육현석은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 솔직하게 말했다.“나는 왜 그 사람들이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가끔 너에게서 느껴지는 슬픔이 네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줘.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박지연은 그의 진심 어린 말에 계속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날 좋아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날 보며 마음 아파하며까지 아껴줄 줄은 몰랐네. 육현석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에게 호감을 품었어.’“육현석, 우리...”“지연아, 나 거절하지 말아줘. 나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육현석은 부드럽게 박지연이 하려던 말을 제지했다.“네가 사업적으로 성공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그런 남자가 너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
그러나 박지연은 실패했다.그 후로 박지연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두려워졌다.하지만 지금 육현석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었다.그는 그녀의 모든 걱정을 고려하고 해결책까지 내놓았다.심지어 그녀가 성공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하기까지 했다.이런 진심 어린 마음에 어떤 여자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박지연은 드물게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육현석, 나는 네가 이렇게까지 좋아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육현석이 낮게 웃으며 답했다.“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널 좋아한 건 내 선택이야. 넌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고 다른 사람이랑 널 비교할 필요도 없어. 지연아, 너는 이미 그 자체로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한 번의 실패한 결혼 때문에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육현석의 말에 박지연은 다시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감동하게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육현석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답게 능숙한 말솜씨로 현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지연은 그저 그에게 감사했다.박지연도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육현석, 고마워. 네 말처럼 나는 방금 실패한 결혼에서 벗어난 상태라 이렇게 빨리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용기가 없어. 네가 한 말들은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나 때문에 너를 바꾸지는 마. 사업하기 싫으면 굳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성공적인 사업가라는 이미지가 남자의 매력을 더해주는 건 맞지만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네가 무리하면 오히려 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육현석이 웃으며 답했다.“사실 꼭 너 때문에 변하려는 건 아니야. 우리 아버지도 이제 곧 환갑이잖아.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셨어. 그동안은 좀 더 놀고 싶어서 미뤘던 건데 이제는 놀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고 드러머의 타격은 천둥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가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끌어냈다.그 순간, 고은서는 완전히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 마치 처음 밴드를 만났을 때의 설렘이 되살아난 듯, 음악의 리듬에 맞춰 형광봉을 흔들며 몸을 흔들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여유 속에서 고은서는 그저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콘서트의 분위기보다 민시후를 더 즐겁게 한 건 고은서가 온전히 음악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은서가 주위 관중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민시후는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공연이 끝나자 고은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민시후가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배고프지? 간장게장 맛집이 있어. 한번 가볼래?”세 시간 가까이 노래를 따라 부른 고은서는 배가 고팠고 간장게장 얘기만 듣고도 침이 고여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사람들이 많아 출입이 불편할까 봐 민시후는 차를 경기장 뒤쪽의 한적한 주차장에 세웠다.밤하늘 아래, 도시의 네온 불빛이 부드럽게 깜빡였고 오래된 수상한 SUV 한 대가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 그 차는 그림자 속에 숨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은서와 민시후가 차에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부신 차 불빛이 켜졌다.두 사람이 반응할 시간도 없이 SUV가 미친 듯이 그들에게 돌진해 왔다!빠른 엔진 소리에 공기까지 진동하는 듯했고 고은서가 피하려는 순간, 차는 이미 눈앞까지 다가왔다!“조심해!”민시후가 소리치며 고은서를 힘껏 옆으로 밀쳤다.고은서는 민시후의 힘에 밀려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민시후는 공중으로 떠오르다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민시후의 머리가 시멘트 기둥에 부딪혔다.“시후 씨!”고은서가 놀란 얼굴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하얀 후드티의 모자를 빨갛게 물들였다.그때, SUV의 차주는 도망치지 않고 후진한 뒤 다시 악셀을 힘껏 밟아 두 사람을 향해
민시후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다는 말에 고은서는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민시후는 오늘 좀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흰색 후드티와 편안한 바지를 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고은서도 편안함을 위해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이거 커플 룩 아니야?”민시후의 장난에 고은서가 그를 흘겼다.“말이라도 못 하면.”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근처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은 후 해성 공연장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고은서가 어젯밤에 민시현이 그를 찾아간 일에 대해 묻자 민시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했다.“전에 했던 얘기랑 똑같아. 내가 반응 없으니까 형도 지루해져서 그냥 갔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민시현은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고 민시후는 아마도 형한테 큰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민시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바꿀 수 없었고 민시후에게 자신에 대한 감정을 접으라고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곧 공연장에 도착했다.밴드의 팬층은 유명 가수들에 비해 적었지만 여전히 많은 젊은 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포스터를 들거나 형광봉을 흔들며 들떠 있었고 어떤 팬들은 얼굴에 밴드 이름까지 그려 넣었다. 모두 오늘 밤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형광봉을 보고 있던 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물었다.“우리도 저런 거 하나 살까?”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렇게 흥분되거나 설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좋아!”두 사람은 형광봉과 손목띠를 고른 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LED 미키 머리띠를 골라줬다.“이건 너무 유치하지 않아?”고은서가 질색하며 거절했지만 민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띠를 그녀의 머리에 씌워버렸다.“유치하긴, 내 눈엔 예쁜데!”“정말? 그럼 시후 씨가 한번 써볼래?”고은서가 머리띠를 그에게 건넸다.민시후는 당연히 써볼 생각이 없었고 고은서는 강제로 그에게 씌우려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웃으며 장난
퀸이 케이지를 할퀴자 고은서는 퀸을 안아 올려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돌볼 시간이 없으면 승연이에게 줘. 마침 심리 상담사가 승연이한테 온순한 반려동물을 키우라고 권했어.”“승연이한테는 다른 애를 선물할 거야. 퀸은 내 것이니까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곽승재가 내 것이라고 말할 때 묘하게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퀸을 다시 케이지 안에 넣으며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이야?”곽승재가 공연 티켓을 내밀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청풍 밴드 좋아한다면서? 내일 해성에서 공연이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보러 갈래?”그가 내민 티켓을 본 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전생에서도 그녀는 청풍 밴드의 공연 티켓을 산 적이 있었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와 곽승재의 관계가 질투나 자주 울고 떼를 쓰며 곽승재를 다그쳤고 그로 인해 둘 사이는 점점 냉랭해졌다.청풍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할 때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곽승재를 보지 못해 몹시 그리워했다.마침 두 사람이 할머니 댁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생겨 그녀는 먼저 사과하며 공연을 함께 보러 가자고 제안했었다.전미자가 자리에 있어서일까, 곽승재는 예상과 달리 거절하지 않고 그날 밤 그녀와 함께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들뜬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공연 볼 준비에 열을 올리며 입을 옷을 골랐고 응원용 스티커와 도구도 샀으며 세심하게 물과 간식까지 준비했다.마침내 저녁이 되었고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회의가 있다며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그녀는 곽승재가 바쁘다는 것을 알았기에 신이 나서 먼저 공연장으로 향해 그를 기다렸다.저녁 6시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입장이 마감될 때까지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곽승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집으로
범가온은 원래 이기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아들을 잃고 희망이 사라진 그녀가 이제는 손자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미쳐 날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은서가 박지연에게 물었다.“백유미 지금 상태는 어때?”“유산도 했고 가위에 찔려서 과다 출혈로 응급실로 실려 갔어. 치료가 늦어지면 목숨도 위험할 거야. 백승엽이 곽승재한테 찾아가 백유미를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고 의사도 바꿔 달라고 부탁했는데 곽승재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대. 아마 곽승재 아버지한테 가서도 부탁하겠지. 그쪽에서 신경 써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곽현수는 백유미가 자기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적이 있으니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게다가 백승엽과의 오랜 신뢰 관계도 있으니 백유미가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아마 백유미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박지연과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민시후는 백유미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백유미가 비참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기에 그는 따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대신 그는 고은서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너 전에 청풍이라는 밴드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 그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한데. 같이 보러 가자.”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형 만나야 하잖아. 내일도 나랑 연락할 수 있을까?”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형이라도 나를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어. 맨날 상사처럼 나한테 훈계질이야. 듣기 싫어 죽겠어. 그러니까 그냥 내일 저녁 같이 밥 먹고 공연 보러 가는 걸로 하자.”“네 형은 더더욱 내가 너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확신하겠네.”“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민시후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을 빨리 인정하면 내 연애를 막아보겠다는 헛된 꿈도 빨리 포기하겠지.”“나 거절해도 돼?”“안 돼!”결국 고은서는 민시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한편으로는 민시후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
두 사람은 음식을 주문한 후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요리가 나오자 두 사람은 식사를 즐겼고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민시후가 입을 열었다.“이번 출장에서 유일 투자은행을 대신해 백씨 가문 산업에 있던 고객들과 접촉했어. 유일 투자은행이 가진 능력을 확인한 후 그쪽에서 협력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으니까 직원들에게 후속 조치를 하라고 하면 돼.”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순간 얼어붙었다.‘출장을 다녀온 게 나를 돕기 위해서였어?’“그냥 겸사겸사 진행한 거야. 미래 투자은행에도 진행할 프로젝트가 있었거든.”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그리고 백유미 말인데. 우리 쪽에서 한 의사를 찾아냈어. 그 사람이 당시 정신 감정이 조작된 거라고 증언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을 거야. 그러니까 이 증거는 당장 쓰지 말고 필요할 때 꺼내 써.”고은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왔다.“민시후, 고마워.”“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민시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겉으로 보면 내가 널 돕는 것 같지만 사실 나를 돕는 거야. 네가 돈을 많이 벌어야 나랑 제대로 연애할 생각이 들지.”고은서는 그런 민시후를 바라보았다.평소에 보내오는 시선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되지 않았는데 눈동자까지 반짝이며 말하는 그를 보자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그래도 고마워.”고은서가 말을 마치자 핸드폰이 울렸다.박지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박지연은 다른 도시에 다녀오느라 휴가를 냈었는데 요즘 그 휴가로 인한 당직을 서느라 바빴다.시간이 나도 육현석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렇게 연락 오는 일은 드물었다.“지연아, 무슨 일이야?”“은서야, 방금 육현석이 알려줬는데 백유미가 애를 지웠대!”박지연의 목소리가 컸던 탓에 옆에 있던 민시후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민시후와 시선을 마주한 고은서가 다시 박지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송민준은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두 형제를 바라보며 적절히 나서서 민시현을 말렸다.“형, 같은 가족끼리 싸우지 말고 시후랑 따로 시간 잡아서 얘기 나누시는 게 좋겠어요.”민시현도 지금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민시후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으로 갈게.”하지만 민시후는 그를 무시한 채 고은서의 손을 잡고 곧장 그들 앞을 지나쳤다.주차장으로 돌아와서도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괜히 기분만 잡쳤네. 멀쩡히 잘 있다가 저 두 사람을 만날 줄이야...”반면 고은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민씨 일가 사람들이 원래부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니 말이다.“저녁에 형이 찾아온다는데 제발 싸우지 좀 마. 네 형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잖아.”그녀는 오히려 민시후를 위로하듯 장난스럽게 말했다.“재벌 집 도련님이 주변에 수많은 훌륭한 여자들을 두고 굳이 곽승재의 전처를 좋아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반대했을걸?”“넌 왜 너를 그렇게 낮춰서 말해?”민시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날 낮추는 건 아니야. 다만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지. 난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신분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은서야, 그만해.”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 얘기는 수도 없이 했어. 넌 날 설득 못 해. 네가 날 덜 좋아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더 많이 좋아하면 되니까. 자, 밥 먹으러 가자.”가는 길에 민시후는 여시은을 떠봤던 결과를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 소득 없었어. 여시은이 곽승재를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여자들 직감이 그렇게 예리하다면서 너는 직감이 고장 난 거 아냐?”민시후가 놀리듯 말했다.고은서도 자신이 둔감해졌다고 느꼈다. 예전의 그녀라면 곽승재 주변에 작은 변화만 있어도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췄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그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마음뿐
노을의 황금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으며 물결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장난기가 발동한 고은서가 두 손을 벋어 저 멀리 호수 위의 부서진 다이아몬드 조각과 햇살을 한데 모아 손안에 담으려는 듯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차에서 내리던 민시후가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은서는 고풍스러운 회랑 위에 흰색 니트에 연한 색의 롱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가녀린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잡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저녁노을이 드리운 호수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주황빛 석양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물들여 그녀의 존재 자체가 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그 순간 민시후는 먼 훗날 이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여전히 설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민시후, 거기서 뭐 해?”앞쪽에서 들려온 고은서의 청아한 목소리에 민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미안, 늦었지.”“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은서야, 손을 뻗어서 잡은 게 뭐야? 나도 좀 나눠 줄래?”고은서는 민시후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아까 허공에 손을 뻗었던 모습을 떠올렸다.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눈을 흘겼다.“공기야. 줄까?”그러자 민시후는 두 손을 공손히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고은서는 어이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시후야, 은서 씨?”그 순간 회랑 너머에서 익숙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자 송민준의 옆에는 강한 위압감을 풍기는 민시현도 함께 있었다.그들 뒤로는 레스토랑 직원들과 비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고은서가 반응할 틈도 없이 민시후는 재빠르게 고은서를 등 뒤로 감쌌다.“여긴 무슨 일이야?”민시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레스토랑으로 예약할걸. 좋던 분위기 다 깨졌네.’민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민준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뜨라고 제스처를 보낸 뒤
서연정의 질문에 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어제 그 남자는 분명 서연정을 향해 호감을 보였고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 장면을 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죄송해요, 어머니.”서연정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넌 착한 아이니 나랑 승재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혹시 불필요한 오해로 갈등이 깊어질까 봐 말하지 않은 거겠지.”서연정이 말을 이었다.“어제 그 친구와는 꽤 오랜 인연이 있어. 예전에 Y 국에서 일했는데 최근에야 귀국했어.”서연정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 남자가 서연정 때문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눈치챘다.담담하면서도 온화한 서연정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그분 혹시 어머니 좋아하시나요?”서연정은 가볍게 웃었다.“우리 나이쯤 되면 좋아한다는 감정에 그리 열정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아. 그 사람은 젊을 때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오랜 세월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 왔어.”고은서는 순간 곽현수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또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묻고 싶었지만 고은서는 궁금증을 꾹 참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서연정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승재 아버지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어.”고은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단순한 오해나 제삼자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깊고 복잡한 문제 같았다.그때 곽승연이 다가오며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전시회 관람을 마치자 이미 오후였다.서연정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할 때 마침 고은서의 전화가 울렸다.민시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은서야, 나 출장 끝나고 돌아왔어.”민시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리고 네게 전할 소식이 하나 있어.”“무슨 소식인데?”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궁금하면 시간 내서 이 도련님이랑 밥이
그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담담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다음 날 일요일 아침 고은서는 서연정의 연락을 받았다.그녀는 해성에서 그림 전시회가 열리는데 곽승연을 데려가 보고 싶다며 함께 갈 시간이 있는지 물어왔다.서연정이 곽승연을 데리고 호원 저택으로 옮긴 이후로 고은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서연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여서 고은서는 함께 가기로 했다.고은서가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정과 곽승연은 이미 와 있었다.“언니!”오랜만에 만난 곽승연은 그녀를 보자 기뻐했다.“승연아, 어머니.”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언니!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인데 선물로 줄게요.”곽승연은 그림을 내밀었다.고은서가 받아 보니 그것은 지난번 본가에서 자신이 드럼을 치던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비록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당당한 그녀의 자태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고마워, 승연아. 정말 잘 그렸네. 너무 마음에 들어.”고은서는 그림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언니가 사줄게.”곽승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그냥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언니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승연아, 금방 좋아질 거야. 우리 들어가서 전시회 보자.”그림을 좋아하는 곽승연은 난해해 보이는 예술 작품도 깊이 빠져들어 감상했다.그녀가 몰입해서 감상하는 동안 고은서와 서연정은 휴게 공간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은서야, 승재 통해 보낸 캔들 잘 받았어. 고마워.”서연정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어.”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어머니, 방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두 사람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고은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은서야, 혹시 지난번 고양이 행사에 갔었어?”서연정이 갑자기 묻자 고은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