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세요.”“승연이 상황에 관해서 너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어. 지금 승연이가 꺼려하지 않으면서도 정서 조절에 도움이 되는 향을 찾아야 하는데 승재 할머니 말씀으로는 네가 퍼퓸 제작에 능하다고 하던데 혹시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해서.”서연정은 국내외에도 많은 퍼퓨머가 있긴 하나 곽승연이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설명을 보태면서 부득이하게 고은서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전에 곽씨 가문 본가에 갔을 때 곽승연 상태와 퍼퓸 제작에 관한 일을 곽승재한테서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때 당시는 곽승연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던지라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거절했었다.“어머니, 제가 한번 해볼게요.”“은서야, 고마워.”서연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가슴이 찡해났다.“하지만 너무 큰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꼭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어요.”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고은서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은서야. 내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걸. 승연이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결과가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정말 고마워.”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시간 내서 승연이가 무얼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할게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원래도 까다로운 퍼퓸 제작이 이번엔 더 힘들 것 같았다.‘천천히 해야지.’“은서야, 잘 부탁해. 기사님한테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기다리라고 할게.”“괜찮아요.”고은서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할 때 서연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넌 승연이를 도와주는 것 외에 일도 해야잖니. 기사님이 데려다주고 하면 너도 차에서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잖아.”그녀의 말에 고은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운전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여재훈은 예의상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반면 곽현수는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녀와 손잡고 있는 곽승연을 보는 순간 눈빛이 싸늘해졌다.“승연아, 낯선 사람과 함부로 손잡고 있으면 어떡해!”깜짝 놀란 곽승연은 눈에 띄게 긴장해 했다.고은서는 황급히 곽승연을 안아주면서 말했다.“곽 대표님,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세요. 승연이가 놀랐잖아요.”“버릇없는 년. 내가 내 딸이랑 얘기하는데 네가 뭔데 끼어들어.”곽현수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곽 대표님, 어린 애들한테 이렇게 엄숙할 필요는 없잖아요.”여재훈이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맞아요, 아저씨. 은서 씨도 그저 승연이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여시은도 옆에서 여재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곽현수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승연아!”바로 이때 서연정이 황급히 달려왔다.그녀는 곽승연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곽현수를 향해 말했다.“승연이 상태가 요즘 불안정하니까 다음부터 말할 때 주의하도록 해요.”“당신이 여긴 왜 있는 거야?”곽현수가 덤덤하게 물었다.서연정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답했다.“은서랑 같이 밥 먹으러 왔어요.”곽현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옆에 있는 여재훈과 여시은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이분은 여재훈 여 대표님이야. 그리고 옆엔 딸 여시은이고.”“제 부인이랑 딸입니다.”그는 다시 몸을 돌려 여씨 부녀에게 서연정과 곽승연을 소개해줬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여시은이 달달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서연정도 단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사모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식사 같이하시죠.”여재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주머니, 해성에 온 지도 꽤 되는데 언젠가 한 번 뵈러 가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맙지만 다음 기회에 같이 식사하도록 하죠. 승연이가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데리고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서연정이
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대부분 사람은 자신과 상관없는 회식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온승준과 함께 고깃집으로 향했다.그러나 함께 술을 마시면서 게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승준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그는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술 게임도 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누구도 그를 끼워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그는 전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온승준에 관해 다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있는 한 계속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져 차마 편히 놀고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온 닥터, 우린 이미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가 익숙해서 괜찮은데 온 닥터는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쉬어.”또 다른 의사 한 명이 말했다.온승준은 그저 사람과의 교재를 싫어할 뿐 바보는 아니었기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꺼려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박지연을 보았는데 그녀는 동료들과 한창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술 마신 탓에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는데 유독 시선이 자꾸 갔다.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면서 그와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온 닥터, 안 마실 거야?”술을 권하는 사람이 물었다.“그만 권해. 온 닥터 집도의여서 술 함부로 안 마신단 말이야. 24시간 동안 정신이 말짱해야지.”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 대신 설명해줬다.“그러면 여기 계속 있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 여기 계속 있어 보았자 분위기만 망치잖아.”방금전의 의사가 술기운에 저도 모르게 속심말을 내뱉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옳았다.그러나 온승준은 천천히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마실게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렸다.‘그렇게 도도하게 굴던 온 닥터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 술을 마신다고?’“그래,
“여보, 내 여보 맞잖아...”온승준은 박지연의 말을 듣자마자 휘청거리며 다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여보, 나 무시하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해...”술 마신 탓인지 힘이 무척 셌을 뿐만 아니라 몸을 박지연한테 전부 기대는 바람에 그녀는 황급히 옆에 있던 동료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얼른 좀 부축해 봐요. 지금 취했잖아요.”놀라움도 잠시, 동료들은 다가가 함께 온승준을 박지연한테서 떼어냈다.“지연아, 여보, 우리 집 가자...”온승준은 자신을 부축한 남자 의사의 어깨를 잡고 중얼거렸다.“나 무시하지 말아줘...”동료들은 그제야 온승준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는 걸 깨달았다.“교수님이 온 닥터랑 친하잖아. 교수님한테 연락해서 집 주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집 데려다주면 되잖아.”다른 한 의사가 제안했다.교수한테 전화하는 틈에도 온승준은 끊임없이 박지연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보라고 불렀다.“아. 나 알 것 같아요. 온 선생님이 우리 병원으로 이직해 온 게 지연 간호사님한테 반해서 아닐까요? 여보라고 부르는 거 봐서는 지연 간호사님한테 확실하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은데요.”“전에도 몇 번이고 우리 간호사실을 지나다니던데 지연이 보러 온 거 아니야?”다른 간호사가 맞장구를 쳤다.“그렇네. 며칠 전에 온 선생님이 나한테 지연이가 어디 갔는지 물어보던데.”“나도 기억나. 온 선생님이 우리 병원으로 처음 온 날 구내식당에서 지연이한테 인사까지 했었잖아.”간호사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면서 물었다.“수 간호사님, 온 선생님이랑 어떻게 알고 지낸 거예요? 수 간호사님 때문에 우리 병원에 온 거 맞죠?”박지연은 도리 머리를 하면서 부인했다.“그럴 리가요. 제가 이혼까지 했던 사람이라는 거 다들 알잖아요.”박지연이 이혼한 일을 확실히 여러 동료가 알고 있었다.심지어 상대방 탓이라고 같이 욕해준 적도 있었다.이레 병원에서 일한 지 몇 년 되기는 했으나 그녀의 남편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박지연은 남자 의사한테 부축 당하고 있는 온승준한테로 다가갔다.은색 안경 너머에 있는 눈빛에서 짙은 술기운이 느껴졌다.원래부터 얼굴이 각지고 잘생겼는지라 취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박지연은 순간 그를 처음 만날 때 우러러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는 온승준도 자신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결혼하는 거라 믿으면서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그러나 모든 게 그녀의 환상일 뿐이었다.온승준은 그저 조용하고 집안일을 잘하고 가정을 중요시 여기며 그와 그의 가족들을 잘 보살피는 동시에 성욕을 처리해줄 수 있는 여자가 필요했을 뿐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건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남편이었다.서로의 수요가 다른 탓에 시간이 지나면서 모순도 많아지고 서로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사실 구청에서 만났을 때 온승준이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싫어한다는 걸 박지연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녀는 사랑을 위해 많은 일을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온승준이 유혜린을 약 올리기 위해 그녀와 결혼했다는 것만은 용서해줄 수가 없었다.자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결혼생활이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는데 굳이 더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시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온승준을 보며 박지연은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하지만 흔들림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랑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감탄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승준아.”바로 이때, 저 멀리서 익숙한 사람 한 명이 차에 내리면서 온승준을 향해 달려왔다.다름 아닌 유혜린이었다.“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유혜린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까 온 닥터한테 전화했던 분 맞죠?”남자 의사 한 명이 물었다.방금 요란한 환경 속에서 마침 온승준한테 전화를 건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온승준이 취해서 술주정을 부린다고 전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유혜린이었다.별로 희망을 품지 않았는데 진짜
“그럼 조금 이따 집 오는 거지?”온승준이 흥분해 하며 물었다.“응.”박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온승준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고집부리지 않고 유혜린 따라 차에 올랐다.“지연아, 아까 그 여자 온 선생님 좋아하는 거 맞지? 전화 받자마자 달려온 데다가 엄청 걱정하는 것 같던데.”온승준이 가자마자 간호사 한 명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아마도.”박지연은 아주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답했다.“온 선생님은 널 좋아하고 아까 그 여자는 온 선생님을 좋아하고. 이거 삼각연애 아니야?”옆에 있던 간호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지연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답했다.“이게 왜 삼각연애에요? 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거든요.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일로 치세요.”동료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전혀 없던 일로 칠 생각이 없었다.그중 몇몇 동료는 온승준이 취해서 박지연을 안고 여보라고 부르는 장면을 촬영해서 채팅 그룹에 올렸다.그 덕분에 병원 내의 많은 사람이 온승준이 박지연한테 구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러나 당사자 두 명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특히 온승준은 회식 이튿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상적으로 출근했다.인턴을 통해 동영상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예전의 차도남 모습 그대로였다.이튿날 점심, 텅 빈 간호사실.고은서도 박지연 폰에서 그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취중 진담이라는 말도 있잖아. 온 닥터가 너랑 집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거 봐서는 진짜 너랑 재혼할 생각인 것 같은데.”“뭔 소리야. 온승준은 그저 도우미처럼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이러는 것뿐이야.”박지연이 이내 부인했다.“유혜린 아직도 온승준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를 받자마자 온승준한테 달려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어제 온승준이 취했다며? 유혜린이 과연 가만있었을까?”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몰라. 나랑 상관없는 일이
고개를 든 박지연의 눈에 들어온 건 곽승재였다.고은서도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평소와 같이 검은 맞춤 제작 정장에 곤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 포스터에서 걸어 나온 캐릭터처럼 잘생겨 보였다.박지연의 말을 들었는지 그의 눈빛이 약간 차갑게 느껴졌는데 얼굴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그는 두 사람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지연은 T국 병원에서 곽승재를 찾아가 호통친 이후로 그와 만난 적이 없었다.그런데 하필 그의 뒷담화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은서야, 나 금방 회진 돌고 올게.”박지연은 어색해하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또 왜 찾아온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를 쳐다보며 물었다.“어머니한테서 들었어. 오늘 승연이 보러 본가로 간다며. 나도 마침 본가에 들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기사가 일이 있어서 데리러 못 온대. 그래서 너랑 같이 가려고.”고은서가 거절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앞서 말을 보태었다.“고은서, 나도 심하게 다쳤어. 그런데 넌 한 번도 날 보러 온 적이 없고 또 나한테 아프냐고 물은 적도 없잖아. 지금은 그저 네 차에 앉아서 본가로 같이 가겠다는데 이것마저도 거절할 생각이야?”고은서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곽승재가 총상을 입은 게 확실히 그녀 탓이 맞았다.그리고 총상 때문인지 요즘 따라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기사가 못 온다는 게 핑계일 가능성이 컸지만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박지연에게 간다고 인사한 후 곽승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박지연의 동료들을 만났다.“은서 씨, 일 보러 가시는 거예요?”동료 한 명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동료들은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에 관해 조금 알고 있었는데 요즘 따라 고은서가 민시후를 더 돌보는 바람에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짙어졌다.“나오다가 만나서 같이 가는 것뿐이에요.”고은서는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먼저 엘리베
민시후는 그저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을 뿐이다.고은서는 웃으면서 곽씨 가문 본가에 간다면서 저녁이 되어서 시간이 된다면서 말했다.민시후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했다.“나랑 저녁 먹어줄 사람 없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고은서는 웃으면서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콜록콜록.”바로 이때, 곽승재가 사레에 들린 듯 갑자기 기침 소리를 냈다.아니나 다를까 민시후는 기침 소리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곽승재도 차에 같이 있는 거야?”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미안, 갑자기 목이 간질거려서.”“곽승재도 본가에 간다고 해서 같이 가는 것뿐이야.”고은서가 설명했다.“곽승재, GS그룹이 기사 한 명 못 내올 정도로 망해가는 거야? 내가 빌려줄게. 제발 고은서한테서 멀리 떨어져.”민시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저 끊을게. 일 끝나고 다시 연락할게.”영상통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곽승재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적당히 하지 그래?”“목이 정말 간질거려서 그랬던 거야. 다음부터 주의할게.”그는 말로만 사과할 뿐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고은서는 더는 말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피부는 매우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고 속눈썹도 아주 길었으며 눈망울도 아주 맑아 보였다.차창 너머로 비춰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그녀의 얼굴의 미세한 솜털까지 눈에 들어왔다.곽승재는 이 순간이 너무 고요하고 좋았다. 마치 그녀와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러나 이는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현재의 고은서는 그를 만날 때마다 차가운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은서야,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있는 거야?”곽승재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원망
“마실 것 가져다드릴게요.”여시은은 눈치 있게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안 추워? 숄이라도 가져다줄까?”곽승재가 고은서의 얇은 옷차림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의외였다.곽승재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갑자기 그가 자신을 향해 춥냐고 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낮에는 비교적 따뜻해서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됐다.해가 진 후에는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긴 했으나 추울 정도는 또 아니었다.“필요 없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사적으로 여시은 씨와 만난 적이 없어. 날 초대할 때도 네가 온다고 해서 받아들인 거야.”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고은서가 담담하게 답했다.곽승재가 입술을 달싹이면서 무언갈 더 말하려고 할 때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여기 네가 좋아하는 거 있어.”고은서는 이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알겠어. 금방 갈게.”그러자 옆에 있던 곽승재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내가 데려온 거야.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다른 사람들 기분 망치지 말고.”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시후를 향해 걸어갔다.곽승재는 선 자리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여긴 또 왜 온 거야. 기분 나쁘게.”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 고은서를 향해 투덜거렸다.“두 집안끼리 협력하는 사이잖아.”고은서가 그를 달랬다.“협력은 무슨. 널 보러 온 거겠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됐어. 그냥 무시해. 내가 좋아하는 물건 있다며? 뭔데?”“오늘 파티에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밴드가 왔는데 네가 좋아하는 드럼도 있대. 내가 이미 말해뒀으니까 조금 이따 올라가서 한 곡 쳐 봐.”민시후가 흥분해 하며 말했다.드럼 광팬으로서 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방금전 많은 여자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은 그녀는 더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었다.“고마워. 그런데 나 더는 눈에 띄는
고은서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문밖을 향했다.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원에서 곽 대표님, 곽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와 그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여시은이 아닌 그가 진짜 집주인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어머, 곽 도련님께서 오셨나 봐. 시은 씨, 곧 곽 도련님이랑 약혼한다면서요. 오늘 특별히 시은 씨가 새집으로 이사 온 걸 축하해주러 왔나 봐요.”여자 한 명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당연하죠. 시은 씨가 이사했는데 약혼자로서 축하해주러 온 게 당연한 일이 아니에요? 나중에 두 분이 결혼하게 되면 우리랑 점점 멀어지는 건 아니죠?”다른 여자 한 명이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그러게요. 집안 배경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분 엄청 어울리지 않나요? 완전히 천생연분이라니까요.”나머지 사람들도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그만 하세요.”여시은이 난감해하며 말했다.“저랑 곽 대표님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다른 분들이 우연하게 저희 아빠랑 곽 회장님한테 왜 사돈 맺지 않냐고 하면서 장난 삶아 꺼낸 얘기일 뿐인데 곽 회장님께서 좋은 생각이라고 함께 장난치실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 아빤 그저 곽 대표님이 능력이 출중한 인재라고 칭찬만 했는데 날짜까지 잡으라면서 떠들어 대실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니까요.”여시은은 이내 고은서의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어갔다.“그저 술자리에서 한 농담일 뿐인데 이렇게 소문이 퍼질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곽 대표님께서 좋아하시는 분은 여기 있는 은서 씨에요. 그러니까 다들 소문만 믿고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요.”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고은서한테로 쏠렸다.마치 다들 옷차림이 수수한 데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퍼퓸 제작까지 직접 도맡아 하는 여자가 곽승재의 마음을 빼앗아 간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고은서도 여시은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곽승재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줄은 생각 못 했다.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고은서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
고은서는 민시후의 얼굴을 밀어내면서 답했다.“아직 더 고찰이 필요해.”“들었죠. 이게 지금 저의 상황이에요.”민시후가 여시은을 향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시은이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곽 대표님이 많이 상심해 하겠네요.”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왜 아직도 내가 곽승재랑 재결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곽씨 가문이랑 사돈 관계를 맺기로 한 거 아니었어? 곽현수 태도를 보아서는 여씨 집안에서도 이미 동의한 것 같던데. 곽승재만 동의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딸바보 여재훈이 여시은을 강요할 일은 없을 테고. 그런데 여시은도 동의한 일이라면 지금 이 태도가 말이 안 되는데.’민시후는 고은서가 대답하기 난감해하는 줄 알고 콧방귀를 뀌면서 대신 대답해줬다.“곽승재 그 인간이 상심할 만도 하죠.”여시은과 별로 친하지 않았기에 굳이 그녀의 앞에서 세 사람 사이의 원한 관계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는지라 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면서 입을 다물라고 눈짓했다.“알겠어. 안 말하면 되잖아.”민시후는 이내 사그라들었다.“먼저 들어가서 돌아보고 있어. 나 시은 씨랑 얘기 좀 나누다가 갈게.”고은서가 민시후를 쫓았다.“정자에 민시후 씨랑 비슷한 남자 손님들이 계시는데 가서 얘기 나눠 보세요.”여시은이 웃으면서 민시후에게 길을 안내해줄 하인 한 명을 붙여주면서 말했다.“전에는 곽 대표님이 이길 줄 알았는데 민시후 씨가 은서 씨 마음에 더 들었나 봐요?”민시후가 하인 따라 떠난 후 여시은이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말을 걸었다.“인테리어가 너무 이뻐요.”고은서는 나긋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우리 아빠랑 제가 다 이런 고풍적인 인테리어를 좋아하는데 해성에 꽤 오래 머물 것 같아서 이 별장으로 선택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나중에 또 해성에 와도 지낼 곳이 있게 되잖아요.”여시은이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 말했다.“그런데 오늘 집들이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제 친구들이랑 그 친구들
곽승연이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향해 언니라고 불렀다.고은서는 이곳에서 곽승연과 마주칠 줄을 생각 못 했는지 약간 의아해했다.곽승연 옆에는 서연정도 함께 있었는데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모습을 본 듯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곽승재와 민시후가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그녀는 민시후를 따로 소개하지 않고 곽승연과 서연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어머니, 동물원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승연이가 아기 동물들을 보고싶어 해서 바람도 쐴 겸 온 거야.”서연정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오늘 친구랑 함께 와서 같이 돌진 못할 것 같아요. 여기 환경도 꽤 괜찮고 한데 승연이랑 좋은 시간 보내다 가세요.”고은서가 뒤돌아 민시후를 한 번 보고는 서연정에게 말했다.“알겠어.”서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승연아, 언니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며칠 후에 향도 갖다 줄 겸 본가에 들를 건데 그때 다시 게임하면서 같이 놀자.”“응.”곽승연은 아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는 며칠 전에 산 옥토끼를 꺼내 건네주면서 그녀를 달랬다.“이건 언니가 너한테 주려고 산 선물이야.”곽승연은 이내 옥토끼를 쥐고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좋아했다.“은서야, 얼른 친구한테로 가 봐. 승연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옆에 있던 서연정이 입을 열었다.“네.”고은서는 그제서야 민시후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나 아무 사람한테 화낼 정도로 옹졸한 사람이 아니야.”민시후가 찌뿌둥해 하며 말했다.‘설마 어머니랑 승연이한테 자신을 소개해주지 않았다고 삐진 거야?’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데 굳이 소개해줄 필요 있어?”“의미가 다르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소개시켜줄게.”“됐어. 나중에 신분이 더 레벨업 되면 널 데리고 직접 곽씨 가문에 방문하러 갈 거야.”고은서는 그 광경이 차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온승준이 황급히 답했다.“어머니 정서가 안정되면 너한테 사과하라고 내가 잘 얘기해볼게.”“필요 없어.”박지연이 사양했다.“온승준, 내가 원하는 건 너와 너희 가족들이랑 거리를 두면서 조용히 지내는 거야.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걸 원한 게 아니라고. 내가 했던 여러 가지 행동들 때문에 다들 네가 재혼하겠다고 말만 꺼내면 내가 쉽게 돌아설 거라고 오해한 것 같은데 난 너에게 목맬 생각이 없어.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난 한 번 결정 내리면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아. 사랑할 땐 내 전부를 퍼줄 수 있지만 손 놓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지연아...”“자책할 필요 없어. 적어도 난 후회 없이 널 사랑했었으니까.”‘비록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한 거지만.’박지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온승준, 이런 의미 없는 일은 더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너랑 재혼할 생각 없어. 너랑 더는 엮이고도 싶지 않아. 넌 좋은 의사가 맞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어.”“지연아, 이후로 선물도 사주고 네 친구들과 함께 밥도 먹고 이모 집도 같이 가줄게. 또 따로 요구하는 게 있어? 얼마든지 말해. 내가 다 고칠게.”온승준이 다급하게 말했다.종래로 자신의 감정을 표달하지 않던 온승준치고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없어. 날 위해 고칠 필요도 없어.”박지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네 성격 자체가 사랑에 대해 큰 욕망이 없고 담담한 편이잖아. 하지만 난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고 슬퍼해 줄 사람이 필요해. 네가 아무리 고친다고 해도 내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단 말이야. 난 너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해 가기 위해 내 모든 열정과 진심을 퍼부었어. 더는 네가 개변할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 없어. 네 가족들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도 없고.”“그럴 필요 없어. 우리끼리 지내면서 더는 우리 부모님 눈치 보지 않아 돼. 만나기 싫으면 만나지 않아도 돼. 응?”온승준
박지연이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온승준한테서 온 문자였다.[지연아, 나 전에 만났던 카페에 있는데. 우리 얘기 좀 나누면 안 될까?]옆에 있던 고은서도 그 문자를 보았다.“만나러 갈 거야?”박지연은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얘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온승준한테 확실하게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더는 온씨 집안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해줘야지.’“내가 같이 가줄까?”고은서가 걱정하면서 물었다.“혼자 가도 괜찮아.”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온승준은 워낙 성격이 냉담한 편이어서 먼저 시비를 걸면서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박지연은 외투를 하나 걸치고 온승준이 말한 카페로 갔는데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지연아.”온승준이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했다.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커피랑 디저트 시켰는데 얼른 먹어 봐.”온승준이 어색해하며 말했다.박지연은 전과 똑같은 커피와 디저트를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자세한 부분을 관찰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보살필 줄도 모르는 게 아니었어. 그저 나한테 시간 낭비하기 싫었던 거야.’“지연아, 오늘에 있었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또 너랑 다툴 줄은 생각 못 했어...”온승준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온범준은 분명히 그에게 박지연한테 사과하려고 그녀를 부른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그녀와 재혼하는 걸 더는 막지 않겠다고 했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박지연이 고개를 들고 온승준을 살펴보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구깃구깃해진 데다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이토록 낭패한 그의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평소의 그는 옷차림을 아주 신경 쓰면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인상을 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타락한 천사 같은 면모를 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과거의 박지연이라면 아마 마음 아
박지연은 육현석의 말에 기분이 은근히 좋았다.그는 그녀의 어떤 모습도 마다하지 않고 다 좋게 봐주곤 했다.“고마워.”박지연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우리도 언젠가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육현석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박지연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인사치레를 하지 않는 사이라면 친구보다 더 친밀한 사이여야 했다.갑갑해 난 박지연은 차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박지연한테서 병원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고은서는 노발대발했다.“진짜 자아 감각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분명히 너한테 비는 입장이면서도 왜 그렇게 거만하게 구는 거래? 파렴치해도 정도껏 해야지! 지연아, 정말 일찌감치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와서 다행이야. 그런 사람들이랑은 같이 사는 게 아니야.”박지연도 고은서와 똑같은 생각이었다.‘정말 다행이야.’“오늘 육현석 어머니랑 만났다며. 어때? 좋은 분이신 것 같아?”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전생에는 육현석 어머니와 만날 일이 없었던 고은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그냥 간단히 인사만 했는데 엄청 온화하시고 친절하신 분 같아. 아주 단아해 보였는데 너무 큰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어.”박지연이 이실직고했다.“와. 그럼 뭘 더 고민하는 거야. 얼른 육현석 고백을 받아들이고 사귀어!”고은서가 재촉했다.그러나 박지연은 따라 장난치는 대신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육현석이 엄청 좋은 건 사실인데 내가 함부로 넘볼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박지연은 진심이었다.사실 병원 앞에서 그녀는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저도 모르게 자비감이 생겼다.온승준도 꽤 훌륭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와 있으면서 박지연은 단 한 번도 자비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은서는 약간 의아해했다.‘박지연이 자비감을 느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너 지금 사귀고 난 후에 또 이별하게 될까 봐 그러는 거지? 지연아, 이게
박지연은 진지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보면서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고은서 외에 이처럼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육현석이 처음이었다.“쇼핑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날 부른 거 아니야.”박지연은 오늘 온승준 부모님이 자신을 병원으로 부른 이유와 방금전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육현석에게 알려줬다.육현석은 이내 박지연의 말에서 중점을 짚어냈다.“그러니까 너랑 온승준을 재혼시키기 위해 널 병원으로 부른 거란 말이지?”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온승준이 아까 널 쫓아왔다면 진짜 재혼할 생각이었어?”육현석이 긴장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박지연은 단호하게 부인했다.“아니.”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어갔다.“나를 선택해주지 않아서 속상해하는 게 아니야. 그저 이 년 동안 내가 온씨 집안 사람들에게 퍼부은 진심이 수포로 돌아갔다는게 우스우면서도 속상해서 그러는 거야.”육현석은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연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손해를 본 건 그쪽 사람들이니까.”‘내가 널 더 잘 아껴줄게.’육현석이 속으로 한 마디 더 보태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애매한 말을 해보았자 역효과가 일어날 거라는 걸 육현석은 잘 알고 있었다.박지연은 감동을 받은 동시에 저도 모르게 겁이 났다.그래서 그녀는 하소연 대신 육현석을 김세라한테로 가보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아주머니께서 기다리시겠어. 얼른 가 봐. 난 먼저 돌아갈게.”“내가 데려다줄게.”“아니. 나 진짜 괜찮아. 혼자 돌아갈 수 있어. 얼른 볼일 봐.”박지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쇼핑몰에서 있었던 일로 널 나무란 건 아니지만 태도가 악렬한 걸 봐서는 인품이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인 것 같은데 굳이 엄마랑 병문안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내일 변호사를 보내서 상응한 배상금만 주면 돼. 지연아, 잠깐만 기다려줘.”육현석은 이내 로비로 들어가 김세라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차키를 들고 다시 나왔다.“엄마는 다른 기사한테 부탁했으니까 우린 이만 가자.”“안
온승준이 박지연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그녀는 이미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그는 더는 그녀를 쫓아갈 수 없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병실에서부터 복도까지의 거리만이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박지연이 병원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고 각양각색의 불빛들이 도시 전체를 빛내고 있었다.병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도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다.그녀 또한 자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 줄 가족을 갈망했었다.온승준과 결혼한 이후로 그녀는 시부모님을 자신의 친부모님처럼 생각하고 모셨다.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이 또한 어릴 적 느껴보지 못한 부모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시부모님이 그녀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대한다면 언젠간 자신을 받아들일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따뜻한 인심을 기대했었다.그러나 모든 게 다 그녀의 갈망뿐이었다.방금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짓누르려는 조수연을 보며 박지연은 깜짝 놀랐다.심지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득의양양한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졌다.아까 그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박지연은 등골이 오싹해났다.‘이 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며느리 역할을 했는데도 내가 단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던 거야? 어떻게 날 저 정도로 미워할 수가 있지...’박지연은 고개를 들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지연아.”바로 이때,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육현석이었다.그의 옆에는 아주 단아한 귀부인 한 명과 선물 박스를 들고 있는 기사가 있었다.육현석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이분은 내 어머니셔.”그리고 뒤돌아 자신의 어머니인 김세라를 향해 박지연을 소개했다.“엄마, 이분은 박지연이야.”“안녕하세요, 아주머니.”박지연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김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온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만나서 반가워, 지연아. 현석이가 네 얘기를 많이 했었거든.”옆에 있던 육현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