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세요.”“승연이 상황에 관해서 너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어. 지금 승연이가 꺼려하지 않으면서도 정서 조절에 도움이 되는 향을 찾아야 하는데 승재 할머니 말씀으로는 네가 퍼퓸 제작에 능하다고 하던데 혹시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해서.”서연정은 국내외에도 많은 퍼퓨머가 있긴 하나 곽승연이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설명을 보태면서 부득이하게 고은서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전에 곽씨 가문 본가에 갔을 때 곽승연 상태와 퍼퓸 제작에 관한 일을 곽승재한테서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때 당시는 곽승연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던지라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거절했었다.“어머니, 제가 한번 해볼게요.”“은서야, 고마워.”서연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가슴이 찡해났다.“하지만 너무 큰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꼭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어요.”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고은서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은서야. 내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걸. 승연이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결과가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정말 고마워.”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시간 내서 승연이가 무얼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할게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원래도 까다로운 퍼퓸 제작이 이번엔 더 힘들 것 같았다.‘천천히 해야지.’“은서야, 잘 부탁해. 기사님한테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기다리라고 할게.”“괜찮아요.”고은서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할 때 서연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넌 승연이를 도와주는 것 외에 일도 해야잖니. 기사님이 데려다주고 하면 너도 차에서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잖아.”그녀의 말에 고은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운전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여재훈은 예의상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반면 곽현수는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녀와 손잡고 있는 곽승연을 보는 순간 눈빛이 싸늘해졌다.“승연아, 낯선 사람과 함부로 손잡고 있으면 어떡해!”깜짝 놀란 곽승연은 눈에 띄게 긴장해 했다.고은서는 황급히 곽승연을 안아주면서 말했다.“곽 대표님,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세요. 승연이가 놀랐잖아요.”“버릇없는 년. 내가 내 딸이랑 얘기하는데 네가 뭔데 끼어들어.”곽현수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곽 대표님, 어린 애들한테 이렇게 엄숙할 필요는 없잖아요.”여재훈이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맞아요, 아저씨. 은서 씨도 그저 승연이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여시은도 옆에서 여재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곽현수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승연아!”바로 이때 서연정이 황급히 달려왔다.그녀는 곽승연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곽현수를 향해 말했다.“승연이 상태가 요즘 불안정하니까 다음부터 말할 때 주의하도록 해요.”“당신이 여긴 왜 있는 거야?”곽현수가 덤덤하게 물었다.서연정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답했다.“은서랑 같이 밥 먹으러 왔어요.”곽현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옆에 있는 여재훈과 여시은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이분은 여재훈 여 대표님이야. 그리고 옆엔 딸 여시은이고.”“제 부인이랑 딸입니다.”그는 다시 몸을 돌려 여씨 부녀에게 서연정과 곽승연을 소개해줬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여시은이 달달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서연정도 단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사모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식사 같이하시죠.”여재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주머니, 해성에 온 지도 꽤 되는데 언젠가 한 번 뵈러 가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맙지만 다음 기회에 같이 식사하도록 하죠. 승연이가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데리고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서연정이
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대부분 사람은 자신과 상관없는 회식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온승준과 함께 고깃집으로 향했다.그러나 함께 술을 마시면서 게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승준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그는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술 게임도 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누구도 그를 끼워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그는 전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온승준에 관해 다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있는 한 계속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져 차마 편히 놀고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온 닥터, 우린 이미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가 익숙해서 괜찮은데 온 닥터는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쉬어.”또 다른 의사 한 명이 말했다.온승준은 그저 사람과의 교재를 싫어할 뿐 바보는 아니었기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꺼려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박지연을 보았는데 그녀는 동료들과 한창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술 마신 탓에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는데 유독 시선이 자꾸 갔다.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면서 그와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온 닥터, 안 마실 거야?”술을 권하는 사람이 물었다.“그만 권해. 온 닥터 집도의여서 술 함부로 안 마신단 말이야. 24시간 동안 정신이 말짱해야지.”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 대신 설명해줬다.“그러면 여기 계속 있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 여기 계속 있어 보았자 분위기만 망치잖아.”방금전의 의사가 술기운에 저도 모르게 속심말을 내뱉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옳았다.그러나 온승준은 천천히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마실게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렸다.‘그렇게 도도하게 굴던 온 닥터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 술을 마신다고?’“그래,
“여보, 내 여보 맞잖아...”온승준은 박지연의 말을 듣자마자 휘청거리며 다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여보, 나 무시하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해...”술 마신 탓인지 힘이 무척 셌을 뿐만 아니라 몸을 박지연한테 전부 기대는 바람에 그녀는 황급히 옆에 있던 동료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얼른 좀 부축해 봐요. 지금 취했잖아요.”놀라움도 잠시, 동료들은 다가가 함께 온승준을 박지연한테서 떼어냈다.“지연아, 여보, 우리 집 가자...”온승준은 자신을 부축한 남자 의사의 어깨를 잡고 중얼거렸다.“나 무시하지 말아줘...”동료들은 그제야 온승준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는 걸 깨달았다.“교수님이 온 닥터랑 친하잖아. 교수님한테 연락해서 집 주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집 데려다주면 되잖아.”다른 한 의사가 제안했다.교수한테 전화하는 틈에도 온승준은 끊임없이 박지연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보라고 불렀다.“아. 나 알 것 같아요. 온 선생님이 우리 병원으로 이직해 온 게 지연 간호사님한테 반해서 아닐까요? 여보라고 부르는 거 봐서는 지연 간호사님한테 확실하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은데요.”“전에도 몇 번이고 우리 간호사실을 지나다니던데 지연이 보러 온 거 아니야?”다른 간호사가 맞장구를 쳤다.“그렇네. 며칠 전에 온 선생님이 나한테 지연이가 어디 갔는지 물어보던데.”“나도 기억나. 온 선생님이 우리 병원으로 처음 온 날 구내식당에서 지연이한테 인사까지 했었잖아.”간호사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면서 물었다.“수 간호사님, 온 선생님이랑 어떻게 알고 지낸 거예요? 수 간호사님 때문에 우리 병원에 온 거 맞죠?”박지연은 도리 머리를 하면서 부인했다.“그럴 리가요. 제가 이혼까지 했던 사람이라는 거 다들 알잖아요.”박지연이 이혼한 일을 확실히 여러 동료가 알고 있었다.심지어 상대방 탓이라고 같이 욕해준 적도 있었다.이레 병원에서 일한 지 몇 년 되기는 했으나 그녀의 남편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박지연은 남자 의사한테 부축 당하고 있는 온승준한테로 다가갔다.은색 안경 너머에 있는 눈빛에서 짙은 술기운이 느껴졌다.원래부터 얼굴이 각지고 잘생겼는지라 취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박지연은 순간 그를 처음 만날 때 우러러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는 온승준도 자신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결혼하는 거라 믿으면서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그러나 모든 게 그녀의 환상일 뿐이었다.온승준은 그저 조용하고 집안일을 잘하고 가정을 중요시 여기며 그와 그의 가족들을 잘 보살피는 동시에 성욕을 처리해줄 수 있는 여자가 필요했을 뿐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건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남편이었다.서로의 수요가 다른 탓에 시간이 지나면서 모순도 많아지고 서로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사실 구청에서 만났을 때 온승준이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싫어한다는 걸 박지연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녀는 사랑을 위해 많은 일을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온승준이 유혜린을 약 올리기 위해 그녀와 결혼했다는 것만은 용서해줄 수가 없었다.자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결혼생활이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는데 굳이 더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시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온승준을 보며 박지연은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하지만 흔들림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랑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감탄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승준아.”바로 이때, 저 멀리서 익숙한 사람 한 명이 차에 내리면서 온승준을 향해 달려왔다.다름 아닌 유혜린이었다.“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유혜린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까 온 닥터한테 전화했던 분 맞죠?”남자 의사 한 명이 물었다.방금 요란한 환경 속에서 마침 온승준한테 전화를 건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온승준이 취해서 술주정을 부린다고 전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유혜린이었다.별로 희망을 품지 않았는데 진짜
“그럼 조금 이따 집 오는 거지?”온승준이 흥분해 하며 물었다.“응.”박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온승준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고집부리지 않고 유혜린 따라 차에 올랐다.“지연아, 아까 그 여자 온 선생님 좋아하는 거 맞지? 전화 받자마자 달려온 데다가 엄청 걱정하는 것 같던데.”온승준이 가자마자 간호사 한 명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아마도.”박지연은 아주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답했다.“온 선생님은 널 좋아하고 아까 그 여자는 온 선생님을 좋아하고. 이거 삼각연애 아니야?”옆에 있던 간호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지연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답했다.“이게 왜 삼각연애에요? 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거든요.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일로 치세요.”동료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전혀 없던 일로 칠 생각이 없었다.그중 몇몇 동료는 온승준이 취해서 박지연을 안고 여보라고 부르는 장면을 촬영해서 채팅 그룹에 올렸다.그 덕분에 병원 내의 많은 사람이 온승준이 박지연한테 구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러나 당사자 두 명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특히 온승준은 회식 이튿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상적으로 출근했다.인턴을 통해 동영상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예전의 차도남 모습 그대로였다.이튿날 점심, 텅 빈 간호사실.고은서도 박지연 폰에서 그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취중 진담이라는 말도 있잖아. 온 닥터가 너랑 집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거 봐서는 진짜 너랑 재혼할 생각인 것 같은데.”“뭔 소리야. 온승준은 그저 도우미처럼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이러는 것뿐이야.”박지연이 이내 부인했다.“유혜린 아직도 온승준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를 받자마자 온승준한테 달려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어제 온승준이 취했다며? 유혜린이 과연 가만있었을까?”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몰라. 나랑 상관없는 일이
고개를 든 박지연의 눈에 들어온 건 곽승재였다.고은서도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평소와 같이 검은 맞춤 제작 정장에 곤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 포스터에서 걸어 나온 캐릭터처럼 잘생겨 보였다.박지연의 말을 들었는지 그의 눈빛이 약간 차갑게 느껴졌는데 얼굴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그는 두 사람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지연은 T국 병원에서 곽승재를 찾아가 호통친 이후로 그와 만난 적이 없었다.그런데 하필 그의 뒷담화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은서야, 나 금방 회진 돌고 올게.”박지연은 어색해하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또 왜 찾아온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를 쳐다보며 물었다.“어머니한테서 들었어. 오늘 승연이 보러 본가로 간다며. 나도 마침 본가에 들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기사가 일이 있어서 데리러 못 온대. 그래서 너랑 같이 가려고.”고은서가 거절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앞서 말을 보태었다.“고은서, 나도 심하게 다쳤어. 그런데 넌 한 번도 날 보러 온 적이 없고 또 나한테 아프냐고 물은 적도 없잖아. 지금은 그저 네 차에 앉아서 본가로 같이 가겠다는데 이것마저도 거절할 생각이야?”고은서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곽승재가 총상을 입은 게 확실히 그녀 탓이 맞았다.그리고 총상 때문인지 요즘 따라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기사가 못 온다는 게 핑계일 가능성이 컸지만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박지연에게 간다고 인사한 후 곽승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박지연의 동료들을 만났다.“은서 씨, 일 보러 가시는 거예요?”동료 한 명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동료들은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에 관해 조금 알고 있었는데 요즘 따라 고은서가 민시후를 더 돌보는 바람에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짙어졌다.“나오다가 만나서 같이 가는 것뿐이에요.”고은서는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먼저 엘리베
민시후는 그저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을 뿐이다.고은서는 웃으면서 곽씨 가문 본가에 간다면서 저녁이 되어서 시간이 된다면서 말했다.민시후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했다.“나랑 저녁 먹어줄 사람 없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고은서는 웃으면서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콜록콜록.”바로 이때, 곽승재가 사레에 들린 듯 갑자기 기침 소리를 냈다.아니나 다를까 민시후는 기침 소리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곽승재도 차에 같이 있는 거야?”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미안, 갑자기 목이 간질거려서.”“곽승재도 본가에 간다고 해서 같이 가는 것뿐이야.”고은서가 설명했다.“곽승재, GS그룹이 기사 한 명 못 내올 정도로 망해가는 거야? 내가 빌려줄게. 제발 고은서한테서 멀리 떨어져.”민시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저 끊을게. 일 끝나고 다시 연락할게.”영상통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곽승재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적당히 하지 그래?”“목이 정말 간질거려서 그랬던 거야. 다음부터 주의할게.”그는 말로만 사과할 뿐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고은서는 더는 말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피부는 매우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고 속눈썹도 아주 길었으며 눈망울도 아주 맑아 보였다.차창 너머로 비춰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그녀의 얼굴의 미세한 솜털까지 눈에 들어왔다.곽승재는 이 순간이 너무 고요하고 좋았다. 마치 그녀와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러나 이는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현재의 고은서는 그를 만날 때마다 차가운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은서야,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있는 거야?”곽승재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원망
행사 주최 측의 관계자가 다가오자 업계 인사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었다.송민준 역시 곽승재와 여시은을 알아본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곽 대표님까지 참석한 걸 보면 오늘 시상식 규모가 꽤 크네요.”고은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때 곽승재가 여시은과 함께 다가왔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얼마 전까지는 그 인플루언서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나?’온라인에서는 곽승재가 마재경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는 기사까지 돌고 있었다.‘정식적인 자리라서 파트너로 데려오지 않은 건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여시은이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은서야, 송 대표님.”여시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이전에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에 송민준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고은서는 미소를 띠며 맞장구쳤다.“시은 씨.”“우리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잖아. 왜 또 이렇게 거리감 두는 거야?”여시은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은서야, 혹시 내가 곽 대표님이랑 같이 온 걸 보고 오해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답했다.“시... 아니, 시은아.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줘.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알았어. 장난이야.”여시은이 밝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사실 아빠가 시상자로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온 거야. 곽 대표님도 오늘 시상자여서 목적지도 같은 김에 같이 판주 투자은행에서 출발했어.”“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전 가서 민아 좀 보고 올게요.”송민준이 자리를 떠나자 여시은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은서야, 송 대표님도 너 좋아하는 거지? 개업식에서 너 대신 페인트도 맞았잖아. 그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걸 보면 평소에도 너한테 꽤 신경 쓰고 있다는 뜻 아닐까?”민시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날 좋아하는 사람이 뭐 그렇게 많겠어. 송 대표님은 그냥 파
송민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고은서는 송민준을 발견했다.금테 안경을 쓴 그는 연회색 정장에 같은 계열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며 늘씬한 체형에 절제된 기품이 감돌았다.그는 마치 귀족 신사처럼 성숙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도 이 시상식에 초대받은 거야?”송민아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송민준의 주변에는 이미 몇몇 업계 인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송민아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고은서를 발견한 송민준은 곧 송민아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 씨, 해성에서 선정한 젊은 리더상 후보에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축하합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웠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감사합니다.”“오빠, 지난번에 게임 어플 업체 몇 군데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오늘 현장에 와 있어?”송민아는 못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게임사는 보편적으로 핵심 개발진 몇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팀이었기에 자체적으로 테스트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일부 플랫폼에서 사전 테스트를 진행해야 했다.프로젝트의 테스트 업무를 맡고 있는 송민아로서는 출시 전부터 충분한 마케팅과 시장 반응을 끌어내 좋은 시작을 열고 싶었다.송민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오늘따라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구나?”“도와줄 거야, 말 거야?”송민아는 살짝 투덜거렸다.“동생이 부탁하는 데 당연히 도와야지.”송민준은 자연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은서 씨도 같이 가실래요?”시상식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던 터라 고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업체 관계자들은 송민준의 체면을 봐서 적극적으로 협조할 뜻을 밝혔고 송민아는 그들과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며 테스트 관련 사항을 논의했다.고은서와 송민준은 옆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민준 씨,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지난번 저희 삼촌 일도요.”“문제는 해
“육현석 부모님은 언제 만나볼 생각이야?”고은서는 박지연이 이 문제를 너무 오래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예전에 어머님은 한 번 뵌 적 있잖아. 꽤 온화하고 좋은 분이라고 하지 않았어?”“맞아. 부드럽고 친절하셨어.”박지연은 소파에 기대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하지만 그때는 여자 친구 신분으로 간 게 아니었잖아. 어머님 입장에서 나는 그냥 낯선 사람이었다 보니 예의상 친절하셨을 수도 있어. 근데 내가 여자 친구로서 찾아가면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쩌지?”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은서야, 사실 나 좀 무서워. 현실에서 부모님들이 아들의 연인이 이혼녀라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 게다가 육현석처럼 집안 조건이 좋은 경우라면 더하겠지. 더 좋은 선택지도 많은데 겉으로는 허락한다고 해도 정말 진심일까 싶어.”박지연의 걱정도 완전히 기우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동료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그 동료의 시어머니는 밖에서 교양 있고 온화한 분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고부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혼하고 보니 실제로는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겉으로는 며느리를 배려하는 척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괴롭혀 주변 사람들은 모두 시어머니 편만 들었고 결국 동료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만약 육현석 부모님도 그런 사람들이라면 박지연은 앞으로 다시는 연애나 결혼은 거들떠보지 않을지도 몰랐다.“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고은서는 여전히 육현석 부모님이 그런 분들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육현석만 봐도 알잖아. 아들도 바르게 잘 키우셨으니 믿을 만한 분들이실 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자기 눈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조금만 더 기다려볼래. 우리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 너무 서두를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녀의 고민을 이해하며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지연아, 혹시 다른 일 해볼 생각은 없어?”박지연은 그녀의 손을 치
곽승재는 여시은을 흘끗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말 그대로예요.”여시은은 대화가 재밌는 듯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설마 인터넷에서 떠도는 그 소문들이 사실이었던 거예요? 곽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생겼다던데요?”곽승재는 얼마 전 여시은과 한 번 만나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직접 물었었다.여시은은 담담하게 인정하며 예전에 Y국에서 열린 연회에서 여재훈이 일부러 자신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밝혔다.원래는 여재훈이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여시은이 실수로 곽승재에게 술을 쏟아버리는 바람에 연락처를 달라고 하지 못했다고 했다.이후 서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아직도 부모님들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사이로 남았을지도 몰랐다.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십을 캐묻는 여시은을 보며 곽승재는 더 이상 대화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도착했네요. 회의실로 가죠.”여시은은 보통 부잣집 아가씨들처럼 까탈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상황을 잘 파악하는 편이라 곽승재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채자 곧바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알겠습니다. 대표님.”...고은서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박지연은 이미 집에 와 있었다.그녀를 본 박지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왜 나보다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곽승재를 데려다준 일을 이야기했다.“도대체 왜 그래? 곽승재랑 거리 두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왜 또 굳이 먼저 나서서 데려다줬어?”박지연은 말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고은서, 설마 곽승재가 다른 여자랑 있는 걸 보고 질투라도 한 거야? 아직도 곽승재를 못 잊은 거 아니야?”고은서는 바로 박지연에게 눈을 흘겼다.“제발 상상은 멈춰줘.”“그럼 왜 그랬는데?”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고은서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곽승재가 곽현수랑 주주들에게 약점을 잡힌 것도 결국 우리 삼촌 때문이잖아
“뻔뻔한 건 너지.”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용서한다고 해?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잖아. 그냥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내니 갑자기 사랑에 빠진 척 후회하는 척하면서 나를 붙잡고 늘어진 거잖아. 네가 그렇게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했겠어!”“너...”“곽 대표님, 은서야.”곽승재가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할 때 갑자기 밖에서 여시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리자 서류를 품에 안은 여시은이 차 밖에 서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복장 대신 정장에 가까운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고 여전히 검은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고은서가 바라보자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빠가 나를 판주 투자은행 쪽에 보내서 곽 대표님 비서를 하게 됐어. 보고 배우라고 보내신 거지. 오늘도 회의가 있어서 내려와서 일정 조율하려고 곽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할 얘기가 남았으면 먼저 올라가서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릴게.”여시은은 배려 깊은 척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일이 우선이죠. 좌천된 몸인데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죠.”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가 판주 투자은행으로 온 건가?’판주 투자은행은 GS 그룹에서 인수한 투자은행에 불과했다.그룹 대표였던 그가 여기로 왔다는 건 단순한 강등이 아니라 사실상 유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방금까지 곽승재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가라앉고 죄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GS 그룹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그런데 이제 본사에 남을 수도 없게 됐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차에서 내려 로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여시은은 바로 따라가지 않고 고은서를 향해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은서야, 우리도 오래 못 봤네. 요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오늘은 일이 있어
사람을 부르려던 곽승재가 고은서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곽승재의 새까만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고 날렵한 얼굴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은서는 갑자기 사과할 용기가 사라졌다.“못 들은...”“판주 투자은행.”못 들은 걸로 하라던 고은서의 말에 목구멍에서 맴도는 사이 곽승재는 무심한 어조로 목적지를 말했다.이미 태워주겠다고 말한 이상 고은서도 이제 와서 무를 수 없었다.“타.”고은서는 운전석에 탔고 곽승재는 뒷좌석에 탔다.‘날 대놓고 기사 취급하네?’고은서는 앵두 같은 입술을 꼭 다물고 차를 출발시켰다.차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고은서는 운전에 집중했고 곽승재는 핸드폰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뀐 순간 고은서는 무심코 백미러를 바라보았다가 마침 곽승재의 시선과 맞닥뜨렸다.그의 눈동자 속에는 뭔가 반짝이고 있는 듯했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흐린 조명 덕분에 그의 이목구비가 더욱 깊고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의 모습은 마치 신이 직접 조각한 완벽한 작품 같았다.그런 곽승재를 오래 봤던 탓에 고은서는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볼 때마다 신의 불공평함을 새삼 느끼곤 했다.빵!신호등이 바뀌었고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고은서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액셀을 밟았다.“회사 일은 지연에게서 들었어. 미안해.”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고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곽승재는 코웃음을 흘리듯 낮고 냉소적인 소리를 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차 안의 공기는 다시 싸늘해졌다.그렇게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판주 투자은행 빌딩 앞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차를 건물 앞에 세웠다.“재경이가 비록 인플루언서이긴 하지만 계략 있는 애는 아니야. 생각하는 대로 내뱉는 것뿐이니 지연 씨한테 괜히 건드리지 말라고 해줘.”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고은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곽승재를 돌아보았다.“지연이가 왜 재경 씨를 곤란하게 해?”곽
도아름은 씩 웃으며 말했다.“그만큼 진지해졌다는 뜻이겠지. 지연이 육현석 부모님 만나본 적 있어?”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현석이는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지연이가 자꾸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안 가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지연이가 육현석 부모님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요.”도아름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생각이 많은가 보네. 이럴 때는 누가 설득해도 소용없을 거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자신감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야.”고은서는 도아름의 말에 공감했다.박지연은 이미 한 번 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결혼을 경험한 적이 있어 육현석이 아무리 안심시켜도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확실히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은서야, 곽 대표랑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뭔가 평소랑 다르네.”도아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잠시 침묵하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아름 언니, 이유는 말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곽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난 건 나 때문이에요.”곽승재와 관련된 일은 도아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너무 자책하지 마. 곽 대표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나름의 계획이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걸 믿어.”도아름의 말에 고은서는 오히려 더 죄책감을 느꼈다.사실 고국성의 일은 그리 급한 상황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루라도 미루면 더 큰 문제가 생길까 봐 곽현수의 계획을 따른 것이었다.결론적으로 곽승재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건 그녀였다.“물론 마음이 정 불편하면 곽 대표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며 오해 풀어.”고은서는 고민스러웠다.사과는 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녀가 직접 함정을 만들고 약까지 먹인 후 여자를 들여보냈으니 오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박지연이 육현석에게 연락했던 탓인지 자리를 마칠 때쯤 육현석이 데리러 왔다.고은서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박지연과 육현석만 남겨두고 떠났다.도아름도 기사가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알죠. 곽 대표님 전 부인이 아주 아름답다는 소문은 늘 들었는데 오늘 직접 뵈니 그 말이 헛되지 않았네요.”고은서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마재경은 말을 마친 후 조금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곽 대표님의 습관과 취향을 좀 더 알고 싶어서요. 은서 씨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고은서는 여자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이고 적극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곽승재가 가만히 놔두니까 자신감을 얻은 걸까?’“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네요.”고은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도 곽 대표님의 습관이나 취향을 잘 모르거든요.”여자는 난처한 기색을 표했고 곽승재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돼.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곽승재의 말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시 생기가 되살아났다.“정말요? 곽 대표님, 저한테 너무 다정하신 거 아니에요?”그녀의 목소리는 애교가 넘쳤고 딱 적당한 정도의 달콤함이 섞여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곽승재도 예외는 아니듯 그의 시선이 마재경을 향했다.“넌 착하고 얌전하잖아.”여자는 더욱 부끄러워하며 웃었다.반면 고은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진짜 구역질 나네.”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여긴 여성 요가 회원 클럽인데 저 역겨운 남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박지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마재경은 바로 곽승재를 감싸며 말했다.“곽 대표님은 저 때문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게다가 예약할 때 이미 물어봤고 남성 동반도 가능하다고 했어요.”박지연이 반박하려 하자 고은서가 급히 그녀를 말렸다.“지연아, 우리 그냥 가자.”도아름도 적절한 타이밍에 곽승재에게 실례할게요라고 한 마디 남긴 후 세 사람은 화단 근처 테이블로 이동했다.곽승재는 마재경을 데리고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