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여시은이었다.그녀는 연 핑크색 맞춤 드레스를 입고 드레스와 알맞게 공주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메이크업도 은은하게 귀여운 매력을 돋보이게 했는데 평소보다 더 매력적이었다.그녀의 옆에는 오십 대 좌우로 보이는 아주 품격있는 중년 남성 한 분이 서 있었는데 전통 정장을 입은 그는 몸도 꽤 건장해 보였고 남다른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고은서는 그가 상류계층 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우리 아버지세요. 오늘 자선 파티에 제가 좋아하는 쥬얼리 액세서리가 있어서 강제로 끌고 왔어요.”여시은이 고은서에게 자신의 아버지인 여재훈을 소개해줬다.“아빠, 이분은 고은서 씨에요. 전에 서운에서 저를 엄청 많이 챙겨줬어요.”“시은이를 챙겨줘서 고맙습니다.”여재훈이 웃으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도 따라 대범하게 웃으면서 답했다.“별말씀을요.”“은서 씨, 마음에 드는 쥬얼리가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요.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괜찮아요. 따지고 보면 별로 도움이 된 것도 없는데요 뭐. 게다가 오늘은 쥬얼리 대신 그저 친구 만나러 온 거예요.”고은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게다가 우리 MQ 고객이신데 제가 도리어 선물을 드려야죠.”고은서가 장난삼아 말했다.그러자 여시은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은서 씨, 오늘 향수 샘플을 만들었다고 저한테 문자 했잖아요. 혹시 지금 가지고 있나요? 마침 우리 아빠도 퍼퓸 제작에 관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있으면 한 번 시향하게 하려고요.”고은서도 마침 샘플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샘플을 꺼내 여시은에게 건네주었다.“으음~ 향 엄청 좋은데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아빠도 한 번 맡아봐요.”여시은은 자신이 먼저 시향한 후 여재훈에게 건네주었다.여재훈도 샘플을 들고 아주 진지하게 자세히 맡아보았다.“무화과를 베이스로 하셨나요?”“무화과 향이 느껴지시나요?”고은서가 약간 놀랐다.일반인들은 향수를 평가할 때 짙다
고은서는 조용히 테라스에서 야경을 구경했다.얼마 후, 주인혁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는 방금전 그녀를 혼자 두고 간 일로 사과하려다가 고은서의 괜찮다는 말에 자신의 팀원들이 고은서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서 시간 될 때 같이 밥 먹자고 화제를 돌렸다.고은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알겠어. 마침 널 친구한테 소개해주고 싶었거든. 백주 브랜드 앰버서더 한 번 해보지 않을래?”“명운 주류?”주인혁은 이내 어색해하며 설명했다.“누나 한 번 친구랑 백주 마시다가 실검에 올랐잖아. 그래서 이 브랜드가 갑자기 떠올라서 한 번 물어본 거야.”‘엄청 오래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맞아. 내가 명운 주식을 가지고 있는데 요즘 상장 수속을 밟고 있거든. 그래서 브랜드 이미지에 알맞는 앰버서더로 유명세를 좀 타고 싶어서.”주인혁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제안을 승낙하면서 무상으로 해주겠다고 했다.그러나 고은서가 주인혁을 손해 보게 할 리가 없었다.“줄 건 줘야지. 마음에 걸리면 우리 둘 사이 우정을 보아서 적당하지만 그래도 푼푼하게 넣어줄게.”“누나, 나에게 있어 우정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존재야. 전에도 계속 날 도와주고 했는데 나도 마땅히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지. 게다가 그저 앰버서더일 뿐인데 서먹서먹하게 굴면서 거절하지 마.”고은서는 주인혁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너는 그렇다고 해도 네 주변 다른 사람들은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니야. 게다가 다른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너야말로 거절하지 말고 받아.”“하지만...”“곽 대표님께서 오셨어!”주인혁이 말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로비에서 소리치는 바람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검은색 맞춤 수제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남다른 기품을 뿜내며 걸어들어왔다.고은서는 약간 의아했다.‘곽승재가 이런 자선 파티에 왜 참석한 거지?’“파티 주최 측에서 많은 기업을 향해 요청장을 보냈다고 하던데 곽승재 씨가 온다는
주인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무슨 일 있나요?”“지금 입고 있는 정장, 신상 아닌 것 같은데요?”곽승재가 담담하게 물었다.이젠 주인혁뿐만 아니라 고은서도 약간 어리둥절했다.‘갑자기 사람을 불러세운 이유가 정장에 관해 평가하기 위해서야?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주인혁은 자신의 정장을 아래 우로 훑어보면서 사실대로 말했다.“네, 몇 개월 전에 산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혁이가 의미 있는 정장이라고 고집부리면서 입고 왔는데 혹시 어디 문제라도 있나요? 저희가 다음부터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매니저가 옆에서 대신 입을 열었다.많은 걸 겪어온 매니저는 곽승재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주최 측에서도 신중히 대하는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법. 곽승재가 무슨 의미로 그런 물음을 제기했든 사과부터 하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그러나 곽승재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일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주인혁이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곽 대표님한테 무슨 태도야?”매니저가 주인혁을 꾸짖고는 이내 곽승재한테 다시 설명했다.“친구분이 선물한 정장이어서 오늘 같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할 때 입은 겁니다.”곽승재는 눈빛이 약간 차가워졌다. 그러나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매니저는 곽승재의 속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자신이 책임진 아티스트한테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다.더 오래 남았다가 모순이 점점 더 격화될 것 같아 보이자 매니저는 이내 빨리 공연 준비하러 가야 한다면서 주인혁을 끌고 자리를 떴다.“곽승재, 뭐 하자는 거야? 왜 갑자기 주인혁한테 시비 걸고 난리야?”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주인혁 편드는 거야?”곽승재가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주인혁이 당신 심기라도 건드렸어?”고은서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곽승재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고은서, 주
“이혼하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한테 선물도 못 준단 법이 어디 있어?”고은서가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그럼 당신은 백유미한테 선물 주기 전에 내 허락받았어?”“내가 백유미한테 무슨 선물을 줬다고 그래?”“생일 꽃다발, 풍부한 이윤을 거두어드릴 수 있는 프로젝트 계약서, 다이아몬드 귀걸이. 설마 다 잊은 건 아니지?”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데 나 몰래 준 선물은 더 많겠지?”“프로젝트 계약서는 네가 백유미 목을 조른 보상으로 주민기한테 보상으로 전해주라고 한 거야. 그리고 꽃다발과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나도 모르는 일이야.”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모른다고? 곽승재, 과거를 부인한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고은서는 그의 말이 너무도 우스웠다.“우리 오 주년 기념일 때 백유미 생일 축하해주러 가면서 꽃다발 선물했잖아. 그리고 백유미가 샹들리에에 깔려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밤중에 백유미 보러 가며 다이아몬드 귀걸이 두 세트 사서 백유미한테 하나 주고 나머지 하나를 나한테 줬잖아.”“그날 승엽 아저씨가 불러서 간 거야. 나도 처음엔 백유미 생일인 줄 몰랐다고. 그런데 내가 왜 꽃다발을 선물하겠어.”곽승재도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그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산 적도 없어. 다 백유미가 준 거라고. 백유미가 준 물건을 받은 내 탓이라고 해. 그런데 그날 네가 꿀꿀해 하기에 선물이라도 받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너한테 준 거야.”고은서는 억울하다는 듯 화내면서 말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약간 어리둥절해졌다.‘그러니까 내가 인스타에서 본 그 꽃다발 사진이 다 백유미가 날 자극하려고 일부러 올린 거란 말이야? 그럼 그 귀걸이도 나를 자극하려고 작정하고 두 세트를 사서 그중 한 세트를 곽승재한테 줬단 말이야? 그때 분명 마음에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이천만 원을 계좌 이체해주며 곽승재한테 연락하지 못하게 한 게 다 이유가 있어서였어. 왜냐면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산 사람이 애초부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미 이혼한 마당에 같이 앉는다는 게 말이 돼?’고은서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화장실로 갔다.한참 화장실 안에서 꾸물거리다가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할 때 여자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 봤어? 진짜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 몸매랑 기품도 완전 매력적이지 않아?”“그러니까. 오늘 현장에 온 연예인들보다도 더 멋있다니까.”‘진짜 어디 가나 여자들한테는 인기짱이네.’고은서가 속으로 감탄했다.“파티장에 들어오면서 여씨 가문 아가씨랑 얘기 나누는 거 봤는데 꽤 친해 보이던데? 심지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저녁 식사하던데 혹시 가문끼리 협력관계라도 맺으면서 결혼이라도 하려는 건가?”고은서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다른 여자가 또 입을 열었다.“나도 그 생각 했는데. 그런데 이미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어? 얼마 전에 제삼자에 관한 소문도 났었잖아.”“이혼한 지 오라거든. 내가 얼핏 들었는데 곽 대표님 전처 조건 엄청 별로라던데. 곽 대표님한테 빌붙어 살다가 쫓겨난 거라잖아.”“소식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네요.”고은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화장실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두 여자는 깜짝 놀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반면 고은서는 덤덤하게 손을 씻으면서 말했다.“그쪽들이 말하는 전처가 곽 대표가 싫어서 이혼을 먼저 제기한 거예요.”“지금 무슨 헛소리에요. 어디서 들은 가짜 소식을 가지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예요!”여자는 이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반박했다.“제가 그 조건이 별로인 전처거든요.”고은서는 손을 닦으면서 말했다.두 여자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경악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러나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미친 거 아니야? 어디서 함부로 전처라고 나대는 거야?”“내 말이. 아무리 이쁘장하게 생겨도 곽 대표님 눈에 들지도 못할 사람이 왜 저러는 거야?”두 여자가 서로
경매 가격이 이억에 달한 이상 그녀와 겨룰 사람은 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은서도 브로치가 이억에 낙찰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곽승재가 갑자기 팻말을 들면서 경매에 참여하려고 했다.“사억.”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경매 가격을 듣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대부분 경매 가격을 이천만씩 올리는 게 보편적이었는데 곽승재처럼 가격을 단번에 배로 늘리는 사람은 없었다.“여씨 가문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경매에 참여하는 걸 봐서는 여시은 아가씨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러는 게 분명해.”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고은서의 귀에도 들렸다.“요즘 여씨 가문에서 해성 있는 프로젝트 하나를 눈 여겨두면서 GS그룹이랑 협력하려고 한다던데. 브로치 하나로 환심 사는 게 마땅한 거 아니야?”‘여씨 가문이랑 GS그룹이 협력한다고? 전생에는 없던 일인데.’주인혁은 묵묵히 현장을 지켜보고만 있는 고은서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위안했다.“누나, 다 헛소리야. 내가 보건데는 곽승재 씨가 누나 주려고 경매에 참여한 거 같아.”“위안할 필요 없어. 누굴 주든 곽승재 마음이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주인혁도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문을 전해 듣긴 했으나 그는 곽승재가 아직도 고은서를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찾아와서 자신이 입고 있는 정장을 보며 비아냥거리지 않았을 것이다.“사억, 사억, 사억! 낙찰입니다!”땅 하는 소리와 함께 브로치는 곽승재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일반 경매와 다르게 이번 경매는 경매가 끝나자마자 경매품을 경매자한테 가져다주는 독특한 면이 있었다.곽승재는 브로치를 가져다준 웨이터를 보면서 그에게 무슨 말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이어 웨이터는 트레이를 들고 고은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면서 순간 불안해졌다.아니나 다를까, 웨이터가 브로치를 들고 고은서 앞에 멈춰 섰다.순간, 사람들의 부러운 눈길이 그녀한테로 쏠렸다.무대 위에
그들을 본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반면 육현석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귀국하셨네요? 정말 오랜만에 뵙는데 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네요.”뻔히 보이는 육현석의 아첨에 곽현수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대충 답했다.“현석아, 넌 먼저 나가봐라. 승재랑 할 얘기가 있구나.”육현석은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다.“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간 되시면 제가 환영회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육현석이 자리를 뜨자 곽현수가 사무실로 들어섰다.백유미는 문가에 서서 약간 두려운 표정으로 곽승재를 바라보고 있었다.“유미야, 들어와. 문 앞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곽현수가 말하자 백유미는 그제야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곽현수에게 물었다.“어쩐 일로 귀국하셨어요?”곽현수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백씨 가문 산업을 그대로 고은서 손에 넘겨 걔 멋대로 하게 둘 것 같아서 들어왔어.”곽승재가 담담하게 답했다.“아버지, 말씀이 과하시네요. 저는 백씨 가문 산업에 손댄 적 없어요.”“방관이 돕는 거랑 뭐가 달라.”곽현수가 차갑게 쏘아붙였다.“고은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너는 유미 아버지가 병원에 있어도 상관도 하지 않고 심지어 유미가 마음고생하게 만들었잖니!”“저는 아저씨한테 할 만큼 했습니다. 이 이상으로 신경 쓸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유미는...”곽승재는 무심하게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보시는 대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렇게 나왔네요.”곽승재의 말에 백유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승재야,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한 거야. 아버지는 치료 시기를 놓쳐서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 너무 속상해하셔서 혹시 잘못된 선택이라도 하실까 두려워서 아저씨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었어.”곽승재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곽승재, 백승엽은 단지 고은서에게 진실을 요구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굴
곽승재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백유미는 여전히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곽승재의 냉랭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았다.“승재야, 전에도 말했지만 나 혼자서 성씨 일가 일을 조사할 능력도 없고 고씨 가문 사업에 개입할 힘도 없어.”곽승재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백유미를 바라봤고 백유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승재야,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네. 이미 알고 있었어? 하긴... 고은서를 신경 쓰는 걸 보면 조사를 했겠지.”백유미가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진심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는 걸 믿어줄 거로 생각해. 나도 아저씨 부탁을 받은 것뿐이야.”“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했던 거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그런 일을 시킨 거야?”곽승재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백유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정말 몰라. 나도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저씨는 그냥 참견하지 말라고 하셨어. 승재야, 아저씨는 나랑 아버지한테 은혜를 베푸신 분이야. 그런 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랑 아저씨한테 밝히지 않은 건 아저씨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그런 거지?”백유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네 숨겨둔 패가 되어 널 도와줄게.”곽승재는 냉랭한 태도로 말했다.“백유미, 지금 상황에서 내가 널 믿을 거로 생각해?”백유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승재야, 네 마음속에서 나는 정말 그렇게 하찮은 존재야? 곰곰이 생각해 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해를 끼칠만한 일한 적 있어? 아저씨를 도와 너와 고은서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적은 있어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어. 물론 나도 아무런 조건 없이 돕겠다는 건 아니야.”백유미는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했다.“아버지에게 좋은 의사를 구해주고 다리를 고쳐줘. 그리고 아저씨가 백씨 가문에 화풀이하더라도 우리 가족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줘.”그 말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노을의 황금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으며 물결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장난기가 발동한 고은서가 두 손을 벋어 저 멀리 호수 위의 부서진 다이아몬드 조각과 햇살을 한데 모아 손안에 담으려는 듯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차에서 내리던 민시후가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은서는 고풍스러운 회랑 위에 흰색 니트에 연한 색의 롱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가녀린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잡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저녁노을이 드리운 호수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주황빛 석양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물들여 그녀의 존재 자체가 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그 순간 민시후는 먼 훗날 이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여전히 설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민시후, 거기서 뭐 해?”앞쪽에서 들려온 고은서의 청아한 목소리에 민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미안, 늦었지.”“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은서야, 손을 뻗어서 잡은 게 뭐야? 나도 좀 나눠 줄래?”고은서는 민시후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아까 허공에 손을 뻗었던 모습을 떠올렸다.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눈을 흘겼다.“공기야. 줄까?”그러자 민시후는 두 손을 공손히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고은서는 어이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시후야, 은서 씨?”그 순간 회랑 너머에서 익숙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자 송민준의 옆에는 강한 위압감을 풍기는 민시현도 함께 있었다.그들 뒤로는 레스토랑 직원들과 비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고은서가 반응할 틈도 없이 민시후는 재빠르게 고은서를 등 뒤로 감쌌다.“여긴 무슨 일이야?”민시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레스토랑으로 예약할걸. 좋던 분위기 다 깨졌네.’민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민준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뜨라고 제스처를 보낸 뒤
서연정의 질문에 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어제 그 남자는 분명 서연정을 향해 호감을 보였고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 장면을 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죄송해요, 어머니.”서연정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넌 착한 아이니 나랑 승재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혹시 불필요한 오해로 갈등이 깊어질까 봐 말하지 않은 거겠지.”서연정이 말을 이었다.“어제 그 친구와는 꽤 오랜 인연이 있어. 예전에 Y 국에서 일했는데 최근에야 귀국했어.”서연정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 남자가 서연정 때문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눈치챘다.담담하면서도 온화한 서연정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그분 혹시 어머니 좋아하시나요?”서연정은 가볍게 웃었다.“우리 나이쯤 되면 좋아한다는 감정에 그리 열정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아. 그 사람은 젊을 때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오랜 세월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 왔어.”고은서는 순간 곽현수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또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묻고 싶었지만 고은서는 궁금증을 꾹 참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서연정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승재 아버지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어.”고은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단순한 오해나 제삼자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깊고 복잡한 문제 같았다.그때 곽승연이 다가오며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전시회 관람을 마치자 이미 오후였다.서연정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할 때 마침 고은서의 전화가 울렸다.민시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은서야, 나 출장 끝나고 돌아왔어.”민시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리고 네게 전할 소식이 하나 있어.”“무슨 소식인데?”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궁금하면 시간 내서 이 도련님이랑 밥이
그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담담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다음 날 일요일 아침 고은서는 서연정의 연락을 받았다.그녀는 해성에서 그림 전시회가 열리는데 곽승연을 데려가 보고 싶다며 함께 갈 시간이 있는지 물어왔다.서연정이 곽승연을 데리고 호원 저택으로 옮긴 이후로 고은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서연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여서 고은서는 함께 가기로 했다.고은서가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정과 곽승연은 이미 와 있었다.“언니!”오랜만에 만난 곽승연은 그녀를 보자 기뻐했다.“승연아, 어머니.”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언니!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인데 선물로 줄게요.”곽승연은 그림을 내밀었다.고은서가 받아 보니 그것은 지난번 본가에서 자신이 드럼을 치던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비록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당당한 그녀의 자태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고마워, 승연아. 정말 잘 그렸네. 너무 마음에 들어.”고은서는 그림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언니가 사줄게.”곽승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그냥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언니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승연아, 금방 좋아질 거야. 우리 들어가서 전시회 보자.”그림을 좋아하는 곽승연은 난해해 보이는 예술 작품도 깊이 빠져들어 감상했다.그녀가 몰입해서 감상하는 동안 고은서와 서연정은 휴게 공간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은서야, 승재 통해 보낸 캔들 잘 받았어. 고마워.”서연정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어.”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어머니, 방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두 사람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고은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은서야, 혹시 지난번 고양이 행사에 갔었어?”서연정이 갑자기 묻자 고은서는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