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미 이혼한 마당에 같이 앉는다는 게 말이 돼?’고은서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화장실로 갔다.한참 화장실 안에서 꾸물거리다가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할 때 여자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 봤어? 진짜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 몸매랑 기품도 완전 매력적이지 않아?”“그러니까. 오늘 현장에 온 연예인들보다도 더 멋있다니까.”‘진짜 어디 가나 여자들한테는 인기짱이네.’고은서가 속으로 감탄했다.“파티장에 들어오면서 여씨 가문 아가씨랑 얘기 나누는 거 봤는데 꽤 친해 보이던데? 심지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저녁 식사하던데 혹시 가문끼리 협력관계라도 맺으면서 결혼이라도 하려는 건가?”고은서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다른 여자가 또 입을 열었다.“나도 그 생각 했는데. 그런데 이미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어? 얼마 전에 제삼자에 관한 소문도 났었잖아.”“이혼한 지 오라거든. 내가 얼핏 들었는데 곽 대표님 전처 조건 엄청 별로라던데. 곽 대표님한테 빌붙어 살다가 쫓겨난 거라잖아.”“소식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네요.”고은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화장실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두 여자는 깜짝 놀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반면 고은서는 덤덤하게 손을 씻으면서 말했다.“그쪽들이 말하는 전처가 곽 대표가 싫어서 이혼을 먼저 제기한 거예요.”“지금 무슨 헛소리에요. 어디서 들은 가짜 소식을 가지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예요!”여자는 이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반박했다.“제가 그 조건이 별로인 전처거든요.”고은서는 손을 닦으면서 말했다.두 여자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경악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러나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미친 거 아니야? 어디서 함부로 전처라고 나대는 거야?”“내 말이. 아무리 이쁘장하게 생겨도 곽 대표님 눈에 들지도 못할 사람이 왜 저러는 거야?”두 여자가 서로
경매 가격이 이억에 달한 이상 그녀와 겨룰 사람은 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은서도 브로치가 이억에 낙찰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곽승재가 갑자기 팻말을 들면서 경매에 참여하려고 했다.“사억.”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경매 가격을 듣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대부분 경매 가격을 이천만씩 올리는 게 보편적이었는데 곽승재처럼 가격을 단번에 배로 늘리는 사람은 없었다.“여씨 가문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경매에 참여하는 걸 봐서는 여시은 아가씨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러는 게 분명해.”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고은서의 귀에도 들렸다.“요즘 여씨 가문에서 해성 있는 프로젝트 하나를 눈 여겨두면서 GS그룹이랑 협력하려고 한다던데. 브로치 하나로 환심 사는 게 마땅한 거 아니야?”‘여씨 가문이랑 GS그룹이 협력한다고? 전생에는 없던 일인데.’주인혁은 묵묵히 현장을 지켜보고만 있는 고은서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위안했다.“누나, 다 헛소리야. 내가 보건데는 곽승재 씨가 누나 주려고 경매에 참여한 거 같아.”“위안할 필요 없어. 누굴 주든 곽승재 마음이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주인혁도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문을 전해 듣긴 했으나 그는 곽승재가 아직도 고은서를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찾아와서 자신이 입고 있는 정장을 보며 비아냥거리지 않았을 것이다.“사억, 사억, 사억! 낙찰입니다!”땅 하는 소리와 함께 브로치는 곽승재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일반 경매와 다르게 이번 경매는 경매가 끝나자마자 경매품을 경매자한테 가져다주는 독특한 면이 있었다.곽승재는 브로치를 가져다준 웨이터를 보면서 그에게 무슨 말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이어 웨이터는 트레이를 들고 고은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면서 순간 불안해졌다.아니나 다를까, 웨이터가 브로치를 들고 고은서 앞에 멈춰 섰다.순간, 사람들의 부러운 눈길이 그녀한테로 쏠렸다.무대 위에
그들을 본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반면 육현석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귀국하셨네요? 정말 오랜만에 뵙는데 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네요.”뻔히 보이는 육현석의 아첨에 곽현수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대충 답했다.“현석아, 넌 먼저 나가봐라. 승재랑 할 얘기가 있구나.”육현석은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다.“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간 되시면 제가 환영회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육현석이 자리를 뜨자 곽현수가 사무실로 들어섰다.백유미는 문가에 서서 약간 두려운 표정으로 곽승재를 바라보고 있었다.“유미야, 들어와. 문 앞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곽현수가 말하자 백유미는 그제야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곽현수에게 물었다.“어쩐 일로 귀국하셨어요?”곽현수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백씨 가문 산업을 그대로 고은서 손에 넘겨 걔 멋대로 하게 둘 것 같아서 들어왔어.”곽승재가 담담하게 답했다.“아버지, 말씀이 과하시네요. 저는 백씨 가문 산업에 손댄 적 없어요.”“방관이 돕는 거랑 뭐가 달라.”곽현수가 차갑게 쏘아붙였다.“고은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너는 유미 아버지가 병원에 있어도 상관도 하지 않고 심지어 유미가 마음고생하게 만들었잖니!”“저는 아저씨한테 할 만큼 했습니다. 이 이상으로 신경 쓸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유미는...”곽승재는 무심하게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보시는 대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렇게 나왔네요.”곽승재의 말에 백유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승재야,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한 거야. 아버지는 치료 시기를 놓쳐서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 너무 속상해하셔서 혹시 잘못된 선택이라도 하실까 두려워서 아저씨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었어.”곽승재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곽승재, 백승엽은 단지 고은서에게 진실을 요구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굴
곽승재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백유미는 여전히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곽승재의 냉랭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았다.“승재야, 전에도 말했지만 나 혼자서 성씨 일가 일을 조사할 능력도 없고 고씨 가문 사업에 개입할 힘도 없어.”곽승재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백유미를 바라봤고 백유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승재야,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네. 이미 알고 있었어? 하긴... 고은서를 신경 쓰는 걸 보면 조사를 했겠지.”백유미가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진심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는 걸 믿어줄 거로 생각해. 나도 아저씨 부탁을 받은 것뿐이야.”“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했던 거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그런 일을 시킨 거야?”곽승재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백유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정말 몰라. 나도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저씨는 그냥 참견하지 말라고 하셨어. 승재야, 아저씨는 나랑 아버지한테 은혜를 베푸신 분이야. 그런 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랑 아저씨한테 밝히지 않은 건 아저씨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그런 거지?”백유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네 숨겨둔 패가 되어 널 도와줄게.”곽승재는 냉랭한 태도로 말했다.“백유미, 지금 상황에서 내가 널 믿을 거로 생각해?”백유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승재야, 네 마음속에서 나는 정말 그렇게 하찮은 존재야? 곰곰이 생각해 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해를 끼칠만한 일한 적 있어? 아저씨를 도와 너와 고은서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적은 있어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어. 물론 나도 아무런 조건 없이 돕겠다는 건 아니야.”백유미는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했다.“아버지에게 좋은 의사를 구해주고 다리를 고쳐줘. 그리고 아저씨가 백씨 가문에 화풀이하더라도 우리 가족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줘.”그 말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백유미의 질문에 곽승재는 더는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네가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든 간에 결론적으로 그 일은 네가 벌인 거야. 단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모든 걸 덮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곽승재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던 백유미는 눈시울을 붉힌 채 쓴웃음을 지었다.“그래. 맞아. 내가 한 일이야. 하지만 네가 고은서를 좋아했다면 어떻게 남의 몇 말로 미워할 수 있었겠어? 너희 사이가 굳건했다면 내가 깨뜨릴 수 있었을까?”백유미는 조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는 단지 성아연한테 나를 몇 번 모욕하라고 한 것뿐이었어. 하지만 넌 그걸 고은서의 계획이라고 믿었지. 내가 다쳐서 입원했을 때도 네 선택으로 내 곁에 있었던 거였어. 승재야, 고은서를 미워한 건 너고 고은서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것도 너야. 그게 왜 내 탓이야? 내가 한 일은 고은서를 다치게 하지 못했어. 모든 책임과 잘못을 나한테 떠넘긴다고 정말 이 일이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백유미의 날카로운 비판에 곽승재는 심장이 순간 얼어붙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그의 가슴속은 답답함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서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고은서를 다시 찾겠다고 말하며 앞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그때 고은서가 그에게 물었다.“정말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그는 망설임 없이 안다고 답하며 그녀에게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고은서는 비웃으며 냉소적으로 웃을 뿐이었다.그는 그 당시 고은서의 상처가 전부 백유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백유미가 저지른 일을 밝혀내고 그녀가 대가를 치르게 만들면 그것이 고은서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했고 또한 고은서의 상처도 치유될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백유미의 질책과 비아냥을 들은 지금, 곽승재는 자신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크나큰 착각이었고 뼈아픈 실수였다.‘은서에게 상처를 준 건 백유미가 아닌 나였어.’“승재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단 한
“누나, 백승엽 병문안 왔는데 다리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정신은 멀쩡하더라고요. 심지어 곽승재의 아버지가 돌아와서 이제 아무도 백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더라고요.”원지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백씨 가문이 이 기회를 타서 다시 세력을 되찾지 않을까요?”고은서는 그의 말에서 그가 당장이라도 백씨 일가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이제 곧 소원을 성취할 차례인데 갑자기 곽현수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고은서가 그를 달래며 물었다.“해외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도입했어?”“최근 백승엽이 사고를 당하고 백유미도 조사 때문에 구치소에 들어가 있어서 프로젝트 책임자가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 공식적인 승인은 받지 못했어요.”“상황이 안정되었으니 적극적으로 추진해 봐.”백유미가 고씨 가문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고은서도 같은 방법으로 백가를 무너뜨릴 계획이었다.원지훈과 통화를 끝낸 고은서가 체육관으로 향했다.단순 친선 경기일 뿐이었지만 관중은 생각보다 많았다.관람석은 이미 절반 이상 차 있었고 각 병원의 대표 선수들은 경기 준비로 분주했다.응원단이 구호를 연습하는 모습도 보여서 분위기가 꽤 떠들썩했다.고은서는 좋은 자리를 찾아 박지연과 그녀의 팀원들을 응원하려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그녀는 한쪽 구석에서 온승준을 닮은 남자를 발견했다.구석진 곳에 서 있고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그녀는 온승준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고은서는 그가 온승준이든 아니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박지연과 온승준이 이혼했으니 그녀에게는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고은서는 굳이 시간을 낭비해 가며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온승준은 확실히 현장에 있었다.원래 그는 이런 경기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전날 구내식당에서 동료들이 어느 병원 팀이 우승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온승준은 그런 얘기에 관심이 없어 식판을 들고 자리를 뜨려고
온승준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유 선생도 말했잖아요. 저희는 그저 동료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재혼할 계획 없습니다.”조수연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혜린이 있는 자리에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다.식사가 끝나고 유혜린이 떠나자 조수연은 온승준은 잡고 물었다.“승준아, 왜 그렇게 말한 거야?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평생 혼자 살 생각이야? 너 정말 혜린이가 널 좋아하고 다시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르는 거야?”온승준이 차분히 답했다.“몰랐어요. 그리고 저랑 유 선생은 단순한 동료지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너 정말 나 속 터지는 거 보려고 그래? 혜린이랑 헤어지고 나서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본 적 없잖아. 혜린이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 이제 혜린이가 너 때문에 일부러 병원까지 옮겨 왔는데 대체 왜 그리 무심하게 구는 거야!”온승준은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저는 한 번도 혜린이를 기다린 적 없어요. 학업과 미래를 위해 헤어졌고 그 이후 연애를 하지 않았던 건 단지 시간이 없었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그럼 왜 혜린이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지연이랑 갑작스럽게 결혼한 거야!”온승준은 조수연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제가 지연이랑 결혼한 게 유혜린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라고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조수연도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그때 혜린이가 인스타에 글 올렸다고 내가 말했잖아. 너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 뒤에 바로 지연이랑 혼인신고 했어.”온승준은 조수연의 말이 황당했다.조수연은 늘 집안일이나 주변 이야기를 떠들기 좋아했다.그는 대부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생각에 몰두하곤 했다.그로 인해 조수연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동안 내가 너한테 소개팅도 몇 번이나 주선했지만 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박지연은 집안도 별로고 직장도 별로고 학력도 평범하잖아.
이혼이라는 사건조차 온승준의 일상을 어지럽히지 못했다. 그는 이혼 이후에도 평온한 일상을 유지해 왔다.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정해진 시간에 휴식을 취했다하지만 전날 조수연과의 말다툼에서 박지연을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소리쳤을 때부터 그의 내면은 흔들리기 시작했다.마치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거세게 외치는 것 같았다.추첨 결과 박지연이 속한 병원이 첫 번째 경기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병원 팀과 맞붙게 되었다.경기장에서 박지연은 땀을 흘리며 팀원들과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한 잘생긴 남성과의 호흡은 남다른 수준이었다.득점할 때마다 두 사람은 환호하며 하이 파이브로 서로를 격려했다.온승준은 처음으로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빛나는 박지연의 모습을 보았다.그에게 박지연은 경기장에서 제일 빛나는 존재였고 어쩌면 유일한 존재였을 지도 몰랐다.30분 후 박지연이 속한 팀은 근소한 점수 차로 첫 경기를 승리로 마쳤다.고은서가 환호하며 박지연에게 달려갔다.“지연이 최고! 지연이가 제일 멋있어!”박지연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활짝 웃었다.“그럼! 내가 누군데!”“지연아, 땀 닦아.”이때 육현석이 다가와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었다.박지연이 땀을 닦을 때 육현석이 또 물 한 병을 따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목마르지? 좀 마셔. 금방 운동했으니 너무 급하게 마시지는 말고.”“고마워. 하지만 내가 간호사라는 건 잊지 마. 그런 상식 정도는 있다고.”박지연이 웃으며 답했다.육현석도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죄송합니다. 수간호사님. 괜히 아는 척했네요.”“음, 태도가 좋네요. 이번만은 봐 드릴게요.”박지연은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그녀를 보며 고은서는 문득 육현석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그가 이렇게 박지연을 챙기는 모습은 너무도 진실되어 보였다.“지연아.”바로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를 돌아본 박지연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그곳에는 온승
박지연은 남자 의사한테 부축 당하고 있는 온승준한테로 다가갔다.은색 안경 너머에 있는 눈빛에서 짙은 술기운이 느껴졌다.원래부터 얼굴이 각지고 잘생겼는지라 취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박지연은 순간 그를 처음 만날 때 우러러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는 온승준도 자신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결혼하는 거라 믿으면서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그러나 모든 게 그녀의 환상일 뿐이었다.온승준은 그저 조용하고 집안일을 잘하고 가정을 중요시 여기며 그와 그의 가족들을 잘 보살피는 동시에 성욕을 처리해줄 수 있는 여자가 필요했을 뿐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건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남편이었다.서로의 수요가 다른 탓에 시간이 지나면서 모순도 많아지고 서로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사실 구청에서 만났을 때 온승준이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싫어한다는 걸 박지연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녀는 사랑을 위해 많은 일을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온승준이 유혜린을 약 올리기 위해 그녀와 결혼했다는 것만은 용서해줄 수가 없었다.자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결혼생활이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는데 굳이 더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시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온승준을 보며 박지연은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하지만 흔들림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랑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감탄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승준아.”바로 이때, 저 멀리서 익숙한 사람 한 명이 차에 내리면서 온승준을 향해 달려왔다.다름 아닌 유혜린이었다.“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유혜린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까 온 닥터한테 전화했던 분 맞죠?”남자 의사 한 명이 물었다.방금 요란한 환경 속에서 마침 온승준한테 전화를 건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온승준이 취해서 술주정을 부린다고 전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유혜린이었다.별로 희망을 품지 않았는데 진짜
“여보, 내 여보 맞잖아...”온승준은 박지연의 말을 듣자마자 휘청거리며 다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여보, 나 무시하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해...”술 마신 탓인지 힘이 무척 셌을 뿐만 아니라 몸을 박지연한테 전부 기대는 바람에 그녀는 황급히 옆에 있던 동료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얼른 좀 부축해 봐요. 지금 취했잖아요.”놀라움도 잠시, 동료들은 다가가 함께 온승준을 박지연한테서 떼어냈다.“지연아, 여보, 우리 집 가자...”온승준은 자신을 부축한 남자 의사의 어깨를 잡고 중얼거렸다.“나 무시하지 말아줘...”동료들은 그제야 온승준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는 걸 깨달았다.“교수님이 온 닥터랑 친하잖아. 교수님한테 연락해서 집 주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집 데려다주면 되잖아.”다른 한 의사가 제안했다.교수한테 전화하는 틈에도 온승준은 끊임없이 박지연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보라고 불렀다.“아. 나 알 것 같아요. 온 선생님이 우리 병원으로 이직해 온 게 지연 간호사님한테 반해서 아닐까요? 여보라고 부르는 거 봐서는 지연 간호사님한테 확실하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은데요.”“전에도 몇 번이고 우리 간호사실을 지나다니던데 지연이 보러 온 거 아니야?”다른 간호사가 맞장구를 쳤다.“그렇네. 며칠 전에 온 선생님이 나한테 지연이가 어디 갔는지 물어보던데.”“나도 기억나. 온 선생님이 우리 병원으로 처음 온 날 구내식당에서 지연이한테 인사까지 했었잖아.”간호사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면서 물었다.“수 간호사님, 온 선생님이랑 어떻게 알고 지낸 거예요? 수 간호사님 때문에 우리 병원에 온 거 맞죠?”박지연은 도리 머리를 하면서 부인했다.“그럴 리가요. 제가 이혼까지 했던 사람이라는 거 다들 알잖아요.”박지연이 이혼한 일을 확실히 여러 동료가 알고 있었다.심지어 상대방 탓이라고 같이 욕해준 적도 있었다.이레 병원에서 일한 지 몇 년 되기는 했으나 그녀의 남편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대부분 사람은 자신과 상관없는 회식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온승준과 함께 고깃집으로 향했다.그러나 함께 술을 마시면서 게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승준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그는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술 게임도 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누구도 그를 끼워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그는 전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온승준에 관해 다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있는 한 계속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져 차마 편히 놀고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온 닥터, 우린 이미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가 익숙해서 괜찮은데 온 닥터는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쉬어.”또 다른 의사 한 명이 말했다.온승준은 그저 사람과의 교재를 싫어할 뿐 바보는 아니었기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꺼려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박지연을 보았는데 그녀는 동료들과 한창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술 마신 탓에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는데 유독 시선이 자꾸 갔다.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면서 그와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온 닥터, 안 마실 거야?”술을 권하는 사람이 물었다.“그만 권해. 온 닥터 집도의여서 술 함부로 안 마신단 말이야. 24시간 동안 정신이 말짱해야지.”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 대신 설명해줬다.“그러면 여기 계속 있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 여기 계속 있어 보았자 분위기만 망치잖아.”방금전의 의사가 술기운에 저도 모르게 속심말을 내뱉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옳았다.그러나 온승준은 천천히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마실게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렸다.‘그렇게 도도하게 굴던 온 닥터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 술을 마신다고?’“그래,
여재훈은 예의상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반면 곽현수는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녀와 손잡고 있는 곽승연을 보는 순간 눈빛이 싸늘해졌다.“승연아, 낯선 사람과 함부로 손잡고 있으면 어떡해!”깜짝 놀란 곽승연은 눈에 띄게 긴장해 했다.고은서는 황급히 곽승연을 안아주면서 말했다.“곽 대표님,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세요. 승연이가 놀랐잖아요.”“버릇없는 년. 내가 내 딸이랑 얘기하는데 네가 뭔데 끼어들어.”곽현수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곽 대표님, 어린 애들한테 이렇게 엄숙할 필요는 없잖아요.”여재훈이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맞아요, 아저씨. 은서 씨도 그저 승연이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여시은도 옆에서 여재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곽현수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승연아!”바로 이때 서연정이 황급히 달려왔다.그녀는 곽승연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곽현수를 향해 말했다.“승연이 상태가 요즘 불안정하니까 다음부터 말할 때 주의하도록 해요.”“당신이 여긴 왜 있는 거야?”곽현수가 덤덤하게 물었다.서연정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답했다.“은서랑 같이 밥 먹으러 왔어요.”곽현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옆에 있는 여재훈과 여시은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이분은 여재훈 여 대표님이야. 그리고 옆엔 딸 여시은이고.”“제 부인이랑 딸입니다.”그는 다시 몸을 돌려 여씨 부녀에게 서연정과 곽승연을 소개해줬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여시은이 달달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서연정도 단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사모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식사 같이하시죠.”여재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주머니, 해성에 온 지도 꽤 되는데 언젠가 한 번 뵈러 가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맙지만 다음 기회에 같이 식사하도록 하죠. 승연이가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데리고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서연정이
고서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세요.”“승연이 상황에 관해서 너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어. 지금 승연이가 꺼려하지 않으면서도 정서 조절에 도움이 되는 향을 찾아야 하는데 승재 할머니 말씀으로는 네가 퍼퓸 제작에 능하다고 하던데 혹시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해서.”서연정은 국내외에도 많은 퍼퓨머가 있긴 하나 곽승연이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설명을 보태면서 부득이하게 고은서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전에 곽씨 가문 본가에 갔을 때 곽승연 상태와 퍼퓸 제작에 관한 일을 곽승재한테서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때 당시는 곽승연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던지라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거절했었다.“어머니, 제가 한번 해볼게요.”“은서야, 고마워.”서연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가슴이 찡해났다.“하지만 너무 큰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꼭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어요.”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고은서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은서야. 내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걸. 승연이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결과가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정말 고마워.”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시간 내서 승연이가 무얼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할게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원래도 까다로운 퍼퓸 제작이 이번엔 더 힘들 것 같았다.‘천천히 해야지.’“은서야, 잘 부탁해. 기사님한테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기다리라고 할게.”“괜찮아요.”고은서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할 때 서연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넌 승연이를 도와주는 것 외에 일도 해야잖니. 기사님이 데려다주고 하면 너도 차에서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잖아.”그녀의 말에 고은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운전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육현석이 혼자 추측하기 시작했다.“혹시 뭐 발견한 거라도 있어서 백유미를 이용하려고 놓아준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은 모르고 있는 게 나아.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서류 하나를 들면서 말했다.“...”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전에 약속한 찻집에서 만났다.웨이터를 따라 위로 올라가 보니 은은한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여러 향초도 켜져 있었고 내부는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송민준을 만날 때 갔던 찻집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는데 아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은서야, 왔어?”서연정이 그녀를 보며 인사했다.“어머니.”고은서는 인사하면서 곽승연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열심히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승연이가 요즘 많이 나아졌어. 너한테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했는데 직접 전해주는 게 더 예의인 것 같아서 데리고 왔어.”서연정이 앞서 설명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곽승연은 다도 전문가들이 차를 올려줄 때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미안, 은서야. 승연이 아직 다른 여자애들처럼 너랑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진 못해.”서연정이 웃으면서 사과했다.“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하는데 대부분 사람은 그저 환자로만 보거든. 승연이는 또 그걸 싫어하고. 그래서 애가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지금은 주동적으로 인사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돼.”아이패드를 들고 조용하게 앉아있는 곽승연은 나긋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가녀린 몸매와 창백한 얼굴빛을 외에는 전혀 자폐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저는 승연이가 그저 평범한 여자애처럼 보여요. 조용하고 귀엽잖아요.”“고마워, 은서야.”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승연아, 언니한테 줄 물건이 있다며? 언니 지금 여기 왔어
육현석은 곽승재의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큰 타격을 받은 모양이다.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달랬다.“형, 형수님이 실망한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잖아. 전에 백유미를 감방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어긴 사람이 형이 맞잖아. 심지어 지연이도 화를 내면서 또다시 형이랑 형수님이 재혼하는 걸 도와주면 나랑 절교하겠다고 했단 말이야.”육현석은 무척 난감해했다.한쪽은 제일 친한 형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그에게 있어서 누굴 도와줄지 선택 내리기 너무 어려웠다.“형수님 형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냥 내려놓는 건 어때?”육현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다시 열었다.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너도 민시후가 고은서한테 더 잘 어울린다는 소리 하려고 그러는 거야?”“그럴 리가! 형수님처럼 훌륭한 사람한테 민시후가 뭐야.”육현석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그런데 왜 백유미를 이대로 놓아주는 거야? 혹시 아버님이랑 백승엽이 백유미를 놔주라고 형을 협박한 거야?”육현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현석아, 전에 은서가 임신했던 아이가 내 아이래.”곽승재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바꾸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왜 갑자기 이 말을 꺼내는 건지 약간 의문스럽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의 말에 답했다.“내가 전에도 형수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민시후랑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을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나한테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저 민시후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는 거라고만 생각하면서 믿지 않았어.”곽승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주민기한테 조사하라고 맡기고도 그 결과를 확인해 보지 않았어. 고은서 말이 맞아. 난 근거 없는 자신감만 넘치는 사람이야. 증거 있는 일만 믿으면서 단 한 번도 고은서를 믿어준 적이 없어. 그래서 고은서도 내가 자신을 위해 변할
“누가 얌생이라는 거야?”“T국에 있을 때 분명히 나도 고은서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소식을 숨겼잖아. 이게 얌생이가 아니고 할 짓이야?”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내 아내에 관한 소식을 왜 너한테 알려줘야 하는데?”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두 사람이 이혼한 지 언젠데 아직도 아내 타령이야. 곽승재, 아내라는 호칭 적당하게 부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 대신 창피해지려고 하니까.”민시후가 비아냥거리며 반박했다.“너!”곽승재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시후, 네가 환자라고 내가 널 못 팰 것 같아?”“당신이 뭔데 민시후를 패?”바로 이때, 고은서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그녀는 민시후 앞에 막아서며 한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곽승재, 여기 블랙박스 있는 거 안 보여? 함부로 행동하지 마.”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곽승재의 마음을 찔렀다.그는 순간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옆에 보고 있던 주민기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나 고은서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주민기 씨, 건망증이세요? 뇌 건강에 신경 좀 쓰시는 게 좋겠네요. 곽승재한테서 돈 받으면서 편드는 건 이해하겠지만 저도 스스로 볼 줄 알거든요. 그러니까 대신 설명해줄 필요 없어요.”주민기는 억울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그냥 사무실에 계시면 될 걸 왜 굳이 나와서 사모님을 기다리려는 거야. 난 부득이하게 따라 나온 것뿐인데. 게다가 사모님한테 잘 보이기는커녕 민시후 때문에 도리어 화내는 모습만 보이게 되었잖아.’그에게 있어 더 절망적인 건 고은서가 민시후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주민기는 미래의 속상해하는 곽승재의 모습과 힘든 자신의 앞날이 벌써부터 무서워 났다.‘대표님이 기분 나빠하면 내 일상도 함께 힘들어지는데. 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인데 왜 하늘은 계속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야. 벌써부터 힘이 빠져.’주민기가 한창 생각
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해외에서 혼자 지내며 꽤 많은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고은서는 민시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비록 지난 생에서 앞으로 그가 이루어낼 성과가 작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고은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그냥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고은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이 없어. 이제 알게 되었으니 날 책임 져야 해.”민시후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답했다.“져야 할 책임이 너무 커서 감당 안 되겠는데?”“그럼 내가 너 책임질까?”민시후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어머니의 묘비 앞에 데려간 이유를 알았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며 자신에게 진지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고은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구애받았지만 그녀는 곽승재에게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곽승재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고 살았었다.잠시 생각하던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다음 주 우리 삼촌 생일인데 부상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민시후는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두 바퀴 뛰어서 보여줄까?”말을 마친 민시후가 날뛰려 했지만 고은서가 얼른 제지했다.“됐어. 얼른 앉아.”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민시후, 여기서 몇 바퀴 돌다가는 구급차 불러야 할 거야.”민시후는 고은서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래. 알았어. 얌전히 앉아 있을게.”병동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고은서는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민시후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