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백유미는 여전히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곽승재의 냉랭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았다.“승재야, 전에도 말했지만 나 혼자서 성씨 일가 일을 조사할 능력도 없고 고씨 가문 사업에 개입할 힘도 없어.”곽승재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백유미를 바라봤고 백유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승재야,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네. 이미 알고 있었어? 하긴... 고은서를 신경 쓰는 걸 보면 조사를 했겠지.”백유미가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진심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는 걸 믿어줄 거로 생각해. 나도 아저씨 부탁을 받은 것뿐이야.”“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했던 거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그런 일을 시킨 거야?”곽승재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백유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정말 몰라. 나도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저씨는 그냥 참견하지 말라고 하셨어. 승재야, 아저씨는 나랑 아버지한테 은혜를 베푸신 분이야. 그런 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랑 아저씨한테 밝히지 않은 건 아저씨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그런 거지?”백유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네 숨겨둔 패가 되어 널 도와줄게.”곽승재는 냉랭한 태도로 말했다.“백유미, 지금 상황에서 내가 널 믿을 거로 생각해?”백유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승재야, 네 마음속에서 나는 정말 그렇게 하찮은 존재야? 곰곰이 생각해 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해를 끼칠만한 일한 적 있어? 아저씨를 도와 너와 고은서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적은 있어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어. 물론 나도 아무런 조건 없이 돕겠다는 건 아니야.”백유미는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했다.“아버지에게 좋은 의사를 구해주고 다리를 고쳐줘. 그리고 아저씨가 백씨 가문에 화풀이하더라도 우리 가족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줘.”그 말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백유미의 질문에 곽승재는 더는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네가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든 간에 결론적으로 그 일은 네가 벌인 거야. 단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모든 걸 덮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곽승재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던 백유미는 눈시울을 붉힌 채 쓴웃음을 지었다.“그래. 맞아. 내가 한 일이야. 하지만 네가 고은서를 좋아했다면 어떻게 남의 몇 말로 미워할 수 있었겠어? 너희 사이가 굳건했다면 내가 깨뜨릴 수 있었을까?”백유미는 조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는 단지 성아연한테 나를 몇 번 모욕하라고 한 것뿐이었어. 하지만 넌 그걸 고은서의 계획이라고 믿었지. 내가 다쳐서 입원했을 때도 네 선택으로 내 곁에 있었던 거였어. 승재야, 고은서를 미워한 건 너고 고은서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것도 너야. 그게 왜 내 탓이야? 내가 한 일은 고은서를 다치게 하지 못했어. 모든 책임과 잘못을 나한테 떠넘긴다고 정말 이 일이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백유미의 날카로운 비판에 곽승재는 심장이 순간 얼어붙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그의 가슴속은 답답함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서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고은서를 다시 찾겠다고 말하며 앞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그때 고은서가 그에게 물었다.“정말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그는 망설임 없이 안다고 답하며 그녀에게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고은서는 비웃으며 냉소적으로 웃을 뿐이었다.그는 그 당시 고은서의 상처가 전부 백유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백유미가 저지른 일을 밝혀내고 그녀가 대가를 치르게 만들면 그것이 고은서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했고 또한 고은서의 상처도 치유될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백유미의 질책과 비아냥을 들은 지금, 곽승재는 자신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크나큰 착각이었고 뼈아픈 실수였다.‘은서에게 상처를 준 건 백유미가 아닌 나였어.’“승재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단 한
“누나, 백승엽 병문안 왔는데 다리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정신은 멀쩡하더라고요. 심지어 곽승재의 아버지가 돌아와서 이제 아무도 백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더라고요.”원지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백씨 가문이 이 기회를 타서 다시 세력을 되찾지 않을까요?”고은서는 그의 말에서 그가 당장이라도 백씨 일가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이제 곧 소원을 성취할 차례인데 갑자기 곽현수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고은서가 그를 달래며 물었다.“해외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도입했어?”“최근 백승엽이 사고를 당하고 백유미도 조사 때문에 구치소에 들어가 있어서 프로젝트 책임자가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 공식적인 승인은 받지 못했어요.”“상황이 안정되었으니 적극적으로 추진해 봐.”백유미가 고씨 가문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고은서도 같은 방법으로 백가를 무너뜨릴 계획이었다.원지훈과 통화를 끝낸 고은서가 체육관으로 향했다.단순 친선 경기일 뿐이었지만 관중은 생각보다 많았다.관람석은 이미 절반 이상 차 있었고 각 병원의 대표 선수들은 경기 준비로 분주했다.응원단이 구호를 연습하는 모습도 보여서 분위기가 꽤 떠들썩했다.고은서는 좋은 자리를 찾아 박지연과 그녀의 팀원들을 응원하려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그녀는 한쪽 구석에서 온승준을 닮은 남자를 발견했다.구석진 곳에 서 있고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그녀는 온승준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고은서는 그가 온승준이든 아니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박지연과 온승준이 이혼했으니 그녀에게는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고은서는 굳이 시간을 낭비해 가며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온승준은 확실히 현장에 있었다.원래 그는 이런 경기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전날 구내식당에서 동료들이 어느 병원 팀이 우승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온승준은 그런 얘기에 관심이 없어 식판을 들고 자리를 뜨려고
온승준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유 선생도 말했잖아요. 저희는 그저 동료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재혼할 계획 없습니다.”조수연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혜린이 있는 자리에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다.식사가 끝나고 유혜린이 떠나자 조수연은 온승준은 잡고 물었다.“승준아, 왜 그렇게 말한 거야?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평생 혼자 살 생각이야? 너 정말 혜린이가 널 좋아하고 다시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르는 거야?”온승준이 차분히 답했다.“몰랐어요. 그리고 저랑 유 선생은 단순한 동료지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너 정말 나 속 터지는 거 보려고 그래? 혜린이랑 헤어지고 나서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본 적 없잖아. 혜린이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 이제 혜린이가 너 때문에 일부러 병원까지 옮겨 왔는데 대체 왜 그리 무심하게 구는 거야!”온승준은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저는 한 번도 혜린이를 기다린 적 없어요. 학업과 미래를 위해 헤어졌고 그 이후 연애를 하지 않았던 건 단지 시간이 없었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그럼 왜 혜린이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지연이랑 갑작스럽게 결혼한 거야!”온승준은 조수연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제가 지연이랑 결혼한 게 유혜린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라고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조수연도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그때 혜린이가 인스타에 글 올렸다고 내가 말했잖아. 너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 뒤에 바로 지연이랑 혼인신고 했어.”온승준은 조수연의 말이 황당했다.조수연은 늘 집안일이나 주변 이야기를 떠들기 좋아했다.그는 대부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생각에 몰두하곤 했다.그로 인해 조수연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동안 내가 너한테 소개팅도 몇 번이나 주선했지만 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박지연은 집안도 별로고 직장도 별로고 학력도 평범하잖아.
이혼이라는 사건조차 온승준의 일상을 어지럽히지 못했다. 그는 이혼 이후에도 평온한 일상을 유지해 왔다.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정해진 시간에 휴식을 취했다하지만 전날 조수연과의 말다툼에서 박지연을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소리쳤을 때부터 그의 내면은 흔들리기 시작했다.마치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거세게 외치는 것 같았다.추첨 결과 박지연이 속한 병원이 첫 번째 경기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병원 팀과 맞붙게 되었다.경기장에서 박지연은 땀을 흘리며 팀원들과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한 잘생긴 남성과의 호흡은 남다른 수준이었다.득점할 때마다 두 사람은 환호하며 하이 파이브로 서로를 격려했다.온승준은 처음으로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빛나는 박지연의 모습을 보았다.그에게 박지연은 경기장에서 제일 빛나는 존재였고 어쩌면 유일한 존재였을 지도 몰랐다.30분 후 박지연이 속한 팀은 근소한 점수 차로 첫 경기를 승리로 마쳤다.고은서가 환호하며 박지연에게 달려갔다.“지연이 최고! 지연이가 제일 멋있어!”박지연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활짝 웃었다.“그럼! 내가 누군데!”“지연아, 땀 닦아.”이때 육현석이 다가와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었다.박지연이 땀을 닦을 때 육현석이 또 물 한 병을 따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목마르지? 좀 마셔. 금방 운동했으니 너무 급하게 마시지는 말고.”“고마워. 하지만 내가 간호사라는 건 잊지 마. 그런 상식 정도는 있다고.”박지연이 웃으며 답했다.육현석도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죄송합니다. 수간호사님. 괜히 아는 척했네요.”“음, 태도가 좋네요. 이번만은 봐 드릴게요.”박지연은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그녀를 보며 고은서는 문득 육현석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그가 이렇게 박지연을 챙기는 모습은 너무도 진실되어 보였다.“지연아.”바로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를 돌아본 박지연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그곳에는 온승
박지연이 고개를 들어 온승준을 바라보았다“아직 용건 있나?”박지연의 표정은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담담했다.예전 그를 볼 때의 설렘과 기대의 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온승준은 가슴이 답답했다.“며칠 전에 손을 다쳐서 휴가 중인데 시간 괜찮으면 같이 도성에 있는 극장에 가서 오페라 볼래?”박지연은 다친 이유는 묻지도 않고 곧장 답했다.“바빠서 안 될 것 같아.”온승준은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서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박지연이 그냥 가버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말을 덧붙였다.“네가 좋아하는 라 트라비아타인데. 배우도 유명한 국가급 아티스트고...”“온 선생님.”박지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사실 난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아. 같이 오페라를 보며 관심 있는 척했던 건 당신에게 맞춰주기 위해서였어. 극장에서 몇 시간 앉아 있는 것보다 등산을 가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게 더 좋아. 그러니 당신 어머님이 하신 말씀도 맞아. 나는 취미도 거칠고 천박한 사람이니 당신은 당신과 격이 잘 맞는 공주님을 찾아서 함께 오페라를 즐겨.”말을 마친 박지연은 더 이상 온승준을 신경 쓰지 않고 육현석과 함께 병원 배구팀 쪽으로 걸어갔다.온승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멍하니 서 있는 온승준의 모습을 보고 속이 다 시원했다.‘평소면 관심도 없을 배구 경기를 보러 온 걸 보니 이혼을 후회하기 시작했나 보네. 흥! 쭉 후회하라지! 전에 지연이 얼마나 아껴주고 잘해줬는데. 자기가 화나도 먼저 온승준을 생각해 줬던 사람인데 있을 때 잘했어야지. 이제 지연이의 가치를 깨닫다니 늦었어! 근데 남자들은 다 그런가? 잃고 나서야 소중한 걸 알지. 곽승재도, 온승준도 다 똑같아.’친선 경기는 반나절이나 이어졌고 박지연이 속한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병원은 명예와 상을 받았고 박지연과 다른 참가자들을 병원에서부터 상금을 받았다.그날 저녁 고은서는 박지연과 육현석 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라
박지연이 답했다.“그런 셈이지. 부장님이 무심코 흘린 말이긴 한데 특별한 일 없으면 승진할 것 같아.”“정말 축하해! 이혼도 하고 승진도 하고 겹경사네! 정말 부러워.”박지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부러워할 필요 없어. 너도 원하기만 하면 누구보다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잖아. 미래 투자은행 대표 사모님으로 말이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라이트문 아파트에 도착했다.주차한 고은서는 아파트 아래에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현관 입구 쪽 가로등 아래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의심할 필요도 없이 곽승재 절친한 친구 육현석이 우리 일정을 알려줬을 거야.”박지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아까 나한테 온승준을 마주친 소감을 물었지? 이제는 네 소감을 얘기해줄 차례네.”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나도 너랑 같아. 다시 진흙탕에 내 발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그럼 난 먼저 올라갈게. 얘기하고 와.”박지연은 곽승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하고 집으로 향했다.곽승재를 전화를 끊고 긴 다리로 고은서를 향해 걸어갔다.“무슨 일이야?”고은서가 물었다.“아버지가 귀국하시고 백유미도 경찰서에서 나왔어.”고은서가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래.”곽승재는 고은서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그녀가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그녀를 만나러 오기 전 곽승재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그는 고은서에게 지금까지 그녀가 겪어왔던 슬픔과 아픔을 알게 되었다고 그에 응하는 보상을 하겠다고 말하려고 했다.또한 백승엽에게 의사를 붙여준 건 백유미에게 진 은혜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싶었다.하지만 아무런 동요도 없는 고은서를 바라보자 곽승재는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그는 간신히 한 마디를 뱉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백유미를 다시 그룹에 돌아오게 하고 백승엽에게 의사를 붙여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10살 때 원한을 품은 도우미가 내게 약을 먹인 후 물속에 밀어 넣은 일이 있었어. 그때 백유미가 나를 구해줬어.”“알아. 널 이렇게 오래 좋아했는데 그런 일도 몰랐겠어?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무슨 일이든 이유와 근거가 확실하니까 굳이 상관없는 사람한테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고은서가 비웃듯 말했다.“넌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잖아.”“그만해. 곽승재. 네가 이러는 거 정말 역겨워.”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끊었다.고은서의 입에서 역겹다는 말이 나오자 곽승재는 상처받은 듯 해 보였고 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은근한 분노가 드러났다.고은서는 곽승재가 늘 우월한 위치에서 칭송받는 데 익숙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누구도 대놓고 역겹다는 말을 한 적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의 이런 행동이 너무나 싫었다.곽승재는 모든 일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며 자신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되찾아주겠다고 장담했다.하지만 뒤에서 그는 백승엽에게 의사를 찾아주고 백유미가 판주 투자은행으로 복귀하는 것을 용인했다.모든 과정에 곽현수가 개입했다는 걸 알지만 곽승재가 묵인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손을 피하며 단호히 걸음을 옮겼다....월요일 아침 고은서가 미래 투자은행에 도착했다.송민아는 그녀에게 두 집안 부모님에게 약혼을 깨겠다고 알린 일을 전했다.“부모님들도 동의하신대?”“우리 부모님은 처음에 반대하셨지. 그런데 내가 울고 떼쓰며 애교부리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어. 하지만 아저씨는 반대하시며 오빠를 불러 혼내셨어. 심하게 꾸짖으며 나한테 다시는 속상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사과하라고 하셨지. 하지만 오빠는 굴하지 않고 처음부터 약혼을 받아들인 적도 없고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말하며 씁쓸함을 드러낸 송민아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나도 아저씨한테 더 이상 오빠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