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가 사인한 이혼서류를 저한테 전해주라고 안 하던가요?”“그런 명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주민기는 아주 담담해 보였다.“그럼 직접 구청으로 가겠단 뜻인가요?”고은서가 캐물었다.주민기는 여전히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의 결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느낀 적이 없는 곽승재가 흔쾌히 이혼해줄 리가 없다는 것을 고은서는 이내 깨달았다.“실장님!”고은서가 주민기에게 무언갈 부탁하려고 할 때 간병인 같은 사람 한 명이 달려오면서 그를 찾았다.“백유미 씨께서 상처가 너무 아프다면서 실수로 아침을 엎어버렸어요. 그리고 지금은 진통제를 달라고 하시는데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역시 곽승재가 아줌마한테 내 아침까지 부탁할 리가 없지. 백유미 아침을 준비하면서 겸사겸사 내 아침까지 준비한 거였네.’고은서는 헛웃음을 쳤다.방금전까지 담담하던 주민기가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간병인을 질책하기 시작했다.“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잖아요. 왜 직접 찾아오고 난리세요.”간병인이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실장님. 백유미 씨가 계속 재촉하시고 또 폰 배터리가 다 나가는 바람에 간호사한테 물어보고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요.”“볼 일이 있으시면 먼저 가보세요. 그리고 아침도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세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고은서가 오해했다는 걸 알고 황급히 설명했다.“사모님, 아침은 대표님께서 직접 아주머니한테 부탁하셔서 준비한 거예요. 게다가 다 사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거로...”“알겠으니까 더는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이런 아침을 먹겠어요.”어떤 설명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편히 쉬세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간병인과 함께 병실에서 나갔다....GS 그룹 대표 사무실.주민기는 어두운
“어제저녁에 병원은 왜 안 온 거야? 곽승재가 너한테 아이에 관해서 물어봤어?”고은서가 물었다.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화를 냈다.“나도 너 따라 병원에 가려고 했어. 그런데 곽승재가 사람 시켜서 내 차를 막아서 못 간 거라고. 내가 가서 설명하려고 할 때 어떤 눈치 없는 사람이 우리 둘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주가가 영향받을까 봐 밤새 그 일을 처리하고 왔어.”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우리 둘 소문?”“네가 직접 봐.”민시후는 폰을 고은서에게 던져주면서 말했다.폰 화면에는 “ZY 그룹 민시후가 GS 그룹 사모님을 탐내다”라는 애매한 제목을 가진 기사가 떠 있었다.밑에는 클럽에서 나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찍힌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 속 민시후는 정신을 잃은 고은서를 안고 가는 곽승재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기사를 퍼뜨린 사람은 민시후가 고은서를 빼앗으려다가 곽승재한테 맞았다면서 그의 얼굴에 있는 상처를 특별히 강조했다.더 어이가 없었던 건 전에 민시후랑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사진까지 공개가 되었다. 기사에서는 두 사람이 바람도 당당하게 피울 만큼 다정하다고 지껄였다.민시후가 제때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해성 사람들 전체가 알게 되었을 것이다.‘곽승재가 화를 낸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그리고 호텔에서 있었던 일도 민시후가 말한 게 아니라 기사를 보고 알았던 거네.’“이 기사를 퍼뜨린 사람이 누군지는 찾았어?”고은서가 물었다.클럽에서 찍힌 사진은 우연이라고 해도 호텔에서 찍힌 사진은 무려 두세 주일이나 지났는데 갑자기 함께 퍼뜨렸다는 게 너무 수상했다. 게다가 하필 곽승재가 고은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타이밍에 말이다.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아직 못 찾았어.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퍼뜨린 거라 IP 추적도 불가능해.”고은서는 이 모든 일이 백유미가 꾸민 짓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백유미도 그날 심하게 다친 탓에 이 모든 걸 혼자 했을 리는 없어. 꼭 조력자가 따로 있는 게 분명해.’“송민아한
비록 고은서도 백유미에게 함정을 파놓긴 했지만 그녀가 또 다른 일을 꾸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고은서는 자신의 자유와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간 내에 이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곽승재의 태도를 보아서는 평화롭게 이혼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이혼 소송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곽승재라는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거절했겠지만 민시후는 달랐다.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도와주는 건 되는데 계속 그 조건이야. 나랑 함께 내 혼사를 막아주는 거.”“민시후, 지금 송민아 앞에서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온 해성에 소문 날 정도로 일이 커졌는데 네 혼사까지 책임져 달라고? 지금 내가 덜 비참해 보여서 그러는 거야?”민시후는 피식 웃으면서 반박했다.“설마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와달라는 건 아니지? 곽승재가 그렇게 건드리기 쉬운 사람도 아니고 지금쯤 날 어떻게 엿먹일지 계획 중일 수도 있어.”“두 사람 내가 아니어도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잖아. 변호사 한 명만 소개해달라는데 너한텐 엄청 쉬운 일이잖아. 이번 한 번만 도와줘.”고은서는 사실을 콕 짚어 말했다.“그렇게 쉬운 일이면 네가 직접 찾을 것이지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건데.”민시후가 되물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의 부탁을 쉽게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네 혼사를 막아주는 건 못하겠지만 송민아 앞에서 연기하는 게 노력해서 계속해줄 수 있어.”“고은서, 굳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민시후는 건들건들하게 말했다.“아무튼 지금 네 배 속의 아이가 다 내 아이라고 믿는 있는 상황이잖아. 이 기회를 잡고 윈윈하면 되는 거야.”그러나 고은서는 자신이 이 일에 참여하는 순간 민씨 가문과 송씨 가문의 분노가 자신을 향해 타오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이혼만 하고 싶었을 뿐, 더 큰 곤경에 빠지고는 싶지 않았기에 단연코 거절했다.“못하겠어.”민시후도 따라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나
무방비 상태에서 곽승재에게 한 방 맞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지라 민시후는 곽승재에게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얼마 후, 곽승재는 있는 힘껏 민시후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민시후는 뒤걸음을 치다가 끝내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민시후의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는데 곽승재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계속 다가가 민시후를 때리려고 할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고은서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그를 말렸다.“그만해!”그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민시후 앞에 막아섰다.“곽승재, 너 미쳤어? 왜 갑자기 사람을 때리고 난리야!”두 팔을 벌리고 민시후를 지키려고 하는 고은서를 본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가 다칠까 봐 대신 술병을 막아주던 고은서가 그를 두고 민시후를 먼저 지키려고 한다는 걸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술병을 대신 막아준 일로 고은서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었다.비록 고은서가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했었지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가 현재 민시후를 위해 그를 비난하다니. 전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곽승재는 가슴이 큰 돌덩이에 깔리기라도 한 듯 답답하고 숨이 막혀왔다.“고은서, 나랑 이혼하고 이 자식이랑 결혼할 생각인 거야? 꿈도 꾸지 마. 절대 그렇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곽승재는 말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땅에 팽개치고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고은서는 곽승재를 관심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땅에 넘어진 민시후를 일으키며 물었다.“괜찮아?”민시후는 감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파오는 얼굴을 부여잡고 입가의 피를 닦으면서 화를 냈다.“그걸 말이라고 물어보는 거야? 지금 이 모습이 괜찮은 사람 같아? 이번 일 책임은 너희 부부 두 사람 중 누구 몫이야?”고은서는 평소 쉽게 화를 내지 않던 곽승재가 갑자기 뛰어 들어와 민시후를 팰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었다.‘세컨드의 위력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오후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박지연은 깜짝 놀랐다.“곽승재랑 민시후가 싸웠다고? 아내를 보내주기 싫어서 화낸 건가?”“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고은서가 박지연을 째려보면서 말했다.“민시후가 변호사를 찾아준다고 했으니까 요 며칠 필요한 절차를 확인한 후에 정식으로 이혼 소송을 걸 거야.”“진짜 소송까지 가야겠어? 소송을 걸면 법원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잖아.”박지연이 조심스레 물었다.고은서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대답했다.“나도 소송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어. 전에는 얼마 지나지 않으면 쉽게 이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도 이혼서류에 사인해주지 않잖아. 나도 더는 끌고 싶지 않아.”이어 고은서는 출국하려는 결정을 박지연에게 알려줬다.“갑자기 우리 엄마가 이해되더라. 아무튼 재혼할 생각도 없는데 스스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도 딱히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할아버지께선 동의하셔?”박지연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을 들은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엄마가 싱글맘으로 어렵게 살아온 걸 직접 목격한 고준석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손녀딸까지 똑같은 힘든 길을 선택했다고 속상해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해해주실 거야.”고은서는 스스로를 위안하듯 혼자 중얼거렸다.“고은서, 지금이라도 모든 걸 사실대로 곽승재에게 말하면 지금처럼 힘들게 이혼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어. 현재 곽승재도 너에게 감정이 생겼다고 하지, 또 미자 할머니도 널 무척 아끼시잖아. 당당하게 아이를 낳고 키우면 되는 거야.”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이 도리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전미자가 비록 아이를 빨리 가지라고 재촉한 적은 없지만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무척 기뻐할 게 분명했다. 고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이 모든 일이 전생에 일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고은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지연아, 나 더는 주눅이 들어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아무 대답도 얻지 못한 육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형, 나 술 가지러 갔다 올게.”육현석은 말하고 가만히 구석진 곳에 가서 고은서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박지연에게 연락했다.박지연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 육현석 씨?”“박지연 씨, 혹시 형이랑 형수님 다투었어요? 오늘 형이 같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서 왔는데 형이 엄청 불쾌해 보이는데 또 물어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박지연은 한참 생각하다가 요 며칠 있었던 일을 간단명료하게 그에게 전했다.“그러니까 형수님이 임신했는데 아이 아빠가 형이 아니란 말이에요?”육현석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네,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였던 거 같아요. 곽 대표님 잘 달래보세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면 이혼하면 되는 거고요.”박지연은 당연하게도 고은서를 배신하지 않았다.“...”육현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혼하라고 곽승재를 달랠 담이 없었다.통화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보니 그 짧은 사이에 테이블은 이미 술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그 모습을 육현석이 용기를 내어 그의 술잔을 빼앗으려 했다.“형, 그만 마셔. 이러다 형 쓰러져!”그러나 곽승재는 술잔에 한이라도 맺힌 듯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전혀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육현석도 차마 강제로 술잔을 빼앗을 엄두가 나지 않아 손을 놓았다.그러나 손을 놓는 순간, 팍하는 소리와 함께 곽승재가 손으로 술잔을 깨뜨렸다.“형, 손 괜찮아?”육현석이 황급히 곽승재의 손을 확인해 보니 그의 손바닥은 이미 수많은 유리 조각들이 박혀있었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형, 얼른 병원으로 가자!”육현석이 당황해하며 곽승재를 일으키려고 할 때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새 술잔을 들고 또 술을 마셨다.곽승재의 주변의 분위기가 한 층 더 살벌해진 것 같았다. 육현석은 그를 끌고 병원으로 가기는커녕 그를 설득할 용기도 없었다.한참 고민 끝에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던 걸 하며 후회하는 육현석이었다.특별히 주문 제작한 핸드폰은 곽승재로 인해 폐기되는 결말을 맞이했다.유심 카드를 꺼낸 육현석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형, 아무리 화가 나도 형수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진짜인 줄 오해한단 말이야.”곽승재는 정말 폭발 직전에 놓여 있었다.“내가 한 말 모두 진심이야!”“그래, 그래. 진심이야.”육현석은 더 이상 곽승재에게 따지지 않고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웨이터에게 지혈제와 반창고를 가져오게 했다.다양한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술집답게 기본적인 약물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곽승재의 비협조 속에서 육현석은 그의 손바닥에 지혈제를 발라주고 반창고 몇 개를 겨우 붙여 지혈할 수 있었다.한바탕 고군분투 끝에 곽승재는 드디어 조용해졌다. 그는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어 있었는데 검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손에는 여전히 술잔을 든채 기울이고 있었다.“형, 확실히 조사한 거 맞아? 형수님이 임신한 아이 정말 형 아이는 아니야?”육현석이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그렇게 방탕한 사람은 아니잖아.”곽승재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본인이 인정했어.”육현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내가 직접 민시후가 자신의 아이이니 고은서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말을 들었어!”여기까지 말을 마친 곽승재는 화가 치밀어 올라 고은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내가 민시후와 사이좋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 새끼랑 어울리면서 아이까지 만들다니!’“사람 시켜서 민시후 다리 분질러버려.”곽승재의 눈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남은 생은 휠체어를 타게 만들어야 누굴 건드렸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앞으로 다른 사람도 건드리지 못하겠지.”육현석은 곽승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지금 평소와는 달리 엄격하고 이성적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육현석은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했다.“형, 민시후 다
민시후가 싸늘히 웃으며 답했다.“다른 이유가 있겠어? 송민아를 위해 나서서 나한테 경고하는 거 아니야?”송민준도 웃었다.“너희들을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민아는 그냥 너랑 결혼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우리 가족들도 그걸 고려하지 않을까?”민시후는 송민준의 말에 넋이 나갔다.송민준이 송민아의 결혼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소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송민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송민준은 감추는 게 많았고 평소 일 처리 방식도 독특했다.그는 아무 이유 없이 클럽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공교롭게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송민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철원이 그렇게 빨리 사람을 데리고 복수하고 도망친 건 누가 뒤에서 도와준 거지?’“넌 내가 갑자기 찾아온 게 의아하지 않은 가 보네? 어젯밤 일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고.”민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송민준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나도 관련 게시물을 봤거든. 네가 보면 오해할 것 같았어. 어제 클럽에 간 건 단순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야.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먼저 갔는데 나도 더 이상 거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지. 시후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송민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민시후는 긴장을 풀고 다른 의자에 다리를 걸치며 답했다.“물을 필요 없어. 고은서가 임신한 건 사실이야.”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애야?”“그럼?”“민아 쪽은 어떻게 할 예정이야?”“어차피 혼사는 너희들이 멋대로 결정한 거니 나랑은 상관없어. 나는 단 한 번도 민아랑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시후 오빠!”송민준이 뭐라 하기도 전에 화가 난 송민아가 찻집 병풍 뒤에서 뛰쳐나왔다.“고은서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 여자 때문에 나랑 파혼하겠다는 거예요?”갑자기 나타난 송민아였음에도 민시후는 그저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되
“안 모인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조금 이따 같이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육현석이 시무룩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그의 말에 응대하지도 않았다.이를 본 육현석은 책상 변두리에 걸터앉으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손으로 가렸다.“형, 내 말 들었어?”곽승재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이 시간에 지연 씨랑 같이 데이트나 하지 그래. 왜 나한테 와서 존재감을 찾는 거야?”“형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그리고 그 인플루언서와는 대체 무슨 사이야? 스캔들이 퍼진지 며칠째인데 아직도 그대로냐고.”곽승재는 차를 마시면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형, 민시후가 이젠 위협이 되진 않지만 형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육현석이 일부러 고은서에 관해 말했다.“지연이한테서 들었는데 사업 파트너 중에 여러 명이 형수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대. 심지어 쉴 새 없이 형수님 회사로 선물까지 보낸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잘생긴 연예인 있잖아. 이틀 후면 해성으로 돌아온다고 형수님한테 만나자고 매일 문자가 온대.”육현석은 이어 자신의 결론을 보태었다.“쓸데없는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진짜 형수님을 빼앗길 수도 있어.”“나랑 무슨 상관인데?”곽승재의 눈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불안하면... 뭐? 방금 뭐라고 했어?”육현석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형, 나 지금 고은서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 형이 재혼하고 싶어 미치는 그 전처 말이야. 그런데 지금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 거야?”육현석은 말하면서 곽승재가 열이라도 나는지 그의 이마를 짚어보려고 했다.곽승재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후로 고은서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아도 돼. 나가. 나 바쁘니까.”“...”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형은 왜 또 자존심을 세우고 난리야? 형수님이랑 재혼하기 싫은 거야?’육현석은 그 영문을 파헤치기 위해 한참 동안 떼를 썼지만
고은서는 고민 끝에 주말에 해야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있다면서 여시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시은도 강요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마침 기사가 도착하면서 고은서는 여시은과 간단히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민아는 민준 씨한테 맡길게요.”고은서는 말하면서 외투를 다시 송민준에게 돌려주었다.“외투 고마워요. 차에 앉으면 별로 춥지 않으니까 도로 가져가세요.”송민준은 그제야 외투를 받으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조심해서 들어가요.”“네.”고은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송민준은 멀어지는 차량을 보면서 외투를 자신의 팔에 걸쳤다.“친절하시네요.”곽승재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준은 그의 날이 선 말을 무시하면서 단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별말씀을요.”곽승재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떠났다.“힘내세요.”여시은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송민준을 보면서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곽승재를 뒤따라갔다....토요일.고은서는 늦잠을 실컷 자고 고준석을 보러 본가로 가려고 했다.그러나 옷을 다 차려입고 집 문을 나서자마자 엘리베이터 쪽에서 익숙한 여자 한 명이 걸어오는 걸 보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랑 스캔들이 난 인풀루언서 마재경이었다.그녀는 몸에 딱 붙고 짧은 옅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볼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고 가녀린 허리도 밖에 드러나 있었다.아래에는 베이지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청순하면서 섹시함을 잃지 않았다.그녀의 옆에는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서 있었다.마재경도 고은서를 보자마자 놀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은서 씨도 이 아파트 주민이세요?”고은서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나도 이곳 주민이냐고 물은 거지? 설마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거야? 심지어 나랑 같은 동 같은 층에 산다고?’“그럼 우리 이웃이겠네요.”마재경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인 듯했다.“며칠 동안 고민 끝에 여기가 환경도 좋고 위치도 좋아서 이곳으로 선
고은서는 곽승재를 놓아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상을 받는 건 처음이라 긴장했던 것 같네요.”사회자도 눈치 있게 타이밍에 맞추어 곽승재한테 나이가 제일 어린 수상자인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전해주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곽승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가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할 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축하합니다.”아주 간단한 말 한마디지만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은서는 웃으면서 관중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여시은이 눈이 들어왔는데 그녀는 앞쪽에 있는 좌석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그러나 뜻밖으로 그녀는 박수도 치지 않고 물잔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고은서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여시은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곽승재가 무대 아래로 내려간 후 고은서와 나머지 두 수상자는 각각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송민아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큰 포옹을 하면서 축하해줬다.“정말 너무 멋있어. 축하해!”“너도 충분히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고은서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시상식은 열 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밖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송민아는 기사한테 연락하러 가고 고은서는 사람들과 함께 호텔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저녁 시간이어서인지 바람이 약간 쌀쌀했다.옷을 얇게 입은 고은서가 추위 때문에 팔을 비비고 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에게 옷을 걸쳐주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송민준이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면서 말했다.“민아는 아직 통화 중이에요. 기사가 곧 도착할 거라고 전해달라고 저한테 부탁했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온화했다.그러나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가 외투를 벗어 돌려주려고 했다.“저는 괜찮으니까 외투는 민준 씨가 입고 있으세요.”그러나 송민준은 웃으면서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입고 있어요. 감기라도 걸리면 업무
그 말을 들은 송민아는 더 어리둥절해졌다.“이상형이라면... 고은서, 너 설마 정말 우리 오빠를 좋아하는 거야?”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물었다.“만약 진짜라면 완전 우리 집 경사인데. 우리 엄마 아빠가 오빠를 장가보내는 일로 얼마 골치 아파하는지 알아?”고은서는 흥분한 송민아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먼저 진정해 봐. 나 네 오빠 안 좋아해.”송민아는 이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하긴. 곽승재랑 민시후 같은 남자가 널 따라다니는데 우리 오빠가 어떻게 눈에 들어오겠어.”“...”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송민아의 반응으로부터 송씨 가문에 송민준을 장가보내는 일로 하루 이틀 머리 아파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그저 한 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 송민아는 거침없이 모든 걸 다 알려주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오빠 이상형에 관해서 묻는 거야?”송민아는 흥분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물었다.고은서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답했다.“민시후가 전에 네 오빠가 일밖에 모른다면서 연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얼마 전에 나 대신 페인트를 막아준 것도 있고 또 그 후로도 날 몇 번이고 도왔잖아. 그래서 민시후가 네 오빠가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던 적이 있거든.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까 여시은이 말하니까 나도 확실하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오빠가 설마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송민아는 장난치는 대신 아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오빠가 특별히 어느 여자한테 잘해주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집에서도 여자를 소개해주곤 했는데 정말 일밖에 모르는 기계 사람처럼 굴어서 결국엔 다 수포로 돌아갔거든. 그래서 이상형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민시후랑 관계도 꽤 좋고 해서 걔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너한테 호감을 표시하진 않을 것 같은데.”고은서는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한 번 더하고는 말을 이어갔다.“내가 잘난체한다고 오해하지
행사 주최 측의 관계자가 다가오자 업계 인사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었다.송민준 역시 곽승재와 여시은을 알아본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곽 대표님까지 참석한 걸 보면 오늘 시상식 규모가 꽤 크네요.”고은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때 곽승재가 여시은과 함께 다가왔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얼마 전까지는 그 인플루언서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나?’온라인에서는 곽승재가 마재경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는 기사까지 돌고 있었다.‘정식적인 자리라서 파트너로 데려오지 않은 건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여시은이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은서야, 송 대표님.”여시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이전에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에 송민준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고은서는 미소를 띠며 맞장구쳤다.“시은 씨.”“우리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잖아. 왜 또 이렇게 거리감 두는 거야?”여시은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은서야, 혹시 내가 곽 대표님이랑 같이 온 걸 보고 오해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답했다.“시... 아니, 시은아.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줘.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알았어. 장난이야.”여시은이 밝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사실 아빠가 시상자로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온 거야. 곽 대표님도 오늘 시상자여서 목적지도 같은 김에 같이 판주 투자은행에서 출발했어.”“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전 가서 민아 좀 보고 올게요.”송민준이 자리를 떠나자 여시은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은서야, 송 대표님도 너 좋아하는 거지? 개업식에서 너 대신 페인트도 맞았잖아. 그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걸 보면 평소에도 너한테 꽤 신경 쓰고 있다는 뜻 아닐까?”민시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날 좋아하는 사람이 뭐 그렇게 많겠어. 송 대표님은 그냥 파
송민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고은서는 송민준을 발견했다.금테 안경을 쓴 그는 연회색 정장에 같은 계열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며 늘씬한 체형에 절제된 기품이 감돌았다.그는 마치 귀족 신사처럼 성숙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도 이 시상식에 초대받은 거야?”송민아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송민준의 주변에는 이미 몇몇 업계 인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송민아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고은서를 발견한 송민준은 곧 송민아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 씨, 해성에서 선정한 젊은 리더상 후보에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축하합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웠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감사합니다.”“오빠, 지난번에 게임 어플 업체 몇 군데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오늘 현장에 와 있어?”송민아는 못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게임사는 보편적으로 핵심 개발진 몇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팀이었기에 자체적으로 테스트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일부 플랫폼에서 사전 테스트를 진행해야 했다.프로젝트의 테스트 업무를 맡고 있는 송민아로서는 출시 전부터 충분한 마케팅과 시장 반응을 끌어내 좋은 시작을 열고 싶었다.송민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오늘따라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구나?”“도와줄 거야, 말 거야?”송민아는 살짝 투덜거렸다.“동생이 부탁하는 데 당연히 도와야지.”송민준은 자연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은서 씨도 같이 가실래요?”시상식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던 터라 고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업체 관계자들은 송민준의 체면을 봐서 적극적으로 협조할 뜻을 밝혔고 송민아는 그들과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며 테스트 관련 사항을 논의했다.고은서와 송민준은 옆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민준 씨,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지난번 저희 삼촌 일도요.”“문제는 해
“육현석 부모님은 언제 만나볼 생각이야?”고은서는 박지연이 이 문제를 너무 오래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예전에 어머님은 한 번 뵌 적 있잖아. 꽤 온화하고 좋은 분이라고 하지 않았어?”“맞아. 부드럽고 친절하셨어.”박지연은 소파에 기대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하지만 그때는 여자 친구 신분으로 간 게 아니었잖아. 어머님 입장에서 나는 그냥 낯선 사람이었다 보니 예의상 친절하셨을 수도 있어. 근데 내가 여자 친구로서 찾아가면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쩌지?”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은서야, 사실 나 좀 무서워. 현실에서 부모님들이 아들의 연인이 이혼녀라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 게다가 육현석처럼 집안 조건이 좋은 경우라면 더하겠지. 더 좋은 선택지도 많은데 겉으로는 허락한다고 해도 정말 진심일까 싶어.”박지연의 걱정도 완전히 기우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동료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그 동료의 시어머니는 밖에서 교양 있고 온화한 분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고부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혼하고 보니 실제로는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겉으로는 며느리를 배려하는 척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괴롭혀 주변 사람들은 모두 시어머니 편만 들었고 결국 동료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만약 육현석 부모님도 그런 사람들이라면 박지연은 앞으로 다시는 연애나 결혼은 거들떠보지 않을지도 몰랐다.“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고은서는 여전히 육현석 부모님이 그런 분들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육현석만 봐도 알잖아. 아들도 바르게 잘 키우셨으니 믿을 만한 분들이실 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자기 눈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조금만 더 기다려볼래. 우리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 너무 서두를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녀의 고민을 이해하며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지연아, 혹시 다른 일 해볼 생각은 없어?”박지연은 그녀의 손을 치
곽승재는 여시은을 흘끗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말 그대로예요.”여시은은 대화가 재밌는 듯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설마 인터넷에서 떠도는 그 소문들이 사실이었던 거예요? 곽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생겼다던데요?”곽승재는 얼마 전 여시은과 한 번 만나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직접 물었었다.여시은은 담담하게 인정하며 예전에 Y국에서 열린 연회에서 여재훈이 일부러 자신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밝혔다.원래는 여재훈이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여시은이 실수로 곽승재에게 술을 쏟아버리는 바람에 연락처를 달라고 하지 못했다고 했다.이후 서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아직도 부모님들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사이로 남았을지도 몰랐다.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십을 캐묻는 여시은을 보며 곽승재는 더 이상 대화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도착했네요. 회의실로 가죠.”여시은은 보통 부잣집 아가씨들처럼 까탈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상황을 잘 파악하는 편이라 곽승재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채자 곧바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알겠습니다. 대표님.”...고은서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박지연은 이미 집에 와 있었다.그녀를 본 박지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왜 나보다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곽승재를 데려다준 일을 이야기했다.“도대체 왜 그래? 곽승재랑 거리 두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왜 또 굳이 먼저 나서서 데려다줬어?”박지연은 말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고은서, 설마 곽승재가 다른 여자랑 있는 걸 보고 질투라도 한 거야? 아직도 곽승재를 못 잊은 거 아니야?”고은서는 바로 박지연에게 눈을 흘겼다.“제발 상상은 멈춰줘.”“그럼 왜 그랬는데?”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고은서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곽승재가 곽현수랑 주주들에게 약점을 잡힌 것도 결국 우리 삼촌 때문이잖아
“뻔뻔한 건 너지.”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용서한다고 해?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잖아. 그냥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내니 갑자기 사랑에 빠진 척 후회하는 척하면서 나를 붙잡고 늘어진 거잖아. 네가 그렇게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했겠어!”“너...”“곽 대표님, 은서야.”곽승재가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할 때 갑자기 밖에서 여시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리자 서류를 품에 안은 여시은이 차 밖에 서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복장 대신 정장에 가까운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고 여전히 검은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고은서가 바라보자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빠가 나를 판주 투자은행 쪽에 보내서 곽 대표님 비서를 하게 됐어. 보고 배우라고 보내신 거지. 오늘도 회의가 있어서 내려와서 일정 조율하려고 곽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할 얘기가 남았으면 먼저 올라가서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릴게.”여시은은 배려 깊은 척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일이 우선이죠. 좌천된 몸인데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죠.”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가 판주 투자은행으로 온 건가?’판주 투자은행은 GS 그룹에서 인수한 투자은행에 불과했다.그룹 대표였던 그가 여기로 왔다는 건 단순한 강등이 아니라 사실상 유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방금까지 곽승재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가라앉고 죄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GS 그룹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그런데 이제 본사에 남을 수도 없게 됐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차에서 내려 로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여시은은 바로 따라가지 않고 고은서를 향해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은서야, 우리도 오래 못 봤네. 요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오늘은 일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