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대답도 얻지 못한 육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형, 나 술 가지러 갔다 올게.”육현석은 말하고 가만히 구석진 곳에 가서 고은서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박지연에게 연락했다.박지연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 육현석 씨?”“박지연 씨, 혹시 형이랑 형수님 다투었어요? 오늘 형이 같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서 왔는데 형이 엄청 불쾌해 보이는데 또 물어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박지연은 한참 생각하다가 요 며칠 있었던 일을 간단명료하게 그에게 전했다.“그러니까 형수님이 임신했는데 아이 아빠가 형이 아니란 말이에요?”육현석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네,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였던 거 같아요. 곽 대표님 잘 달래보세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면 이혼하면 되는 거고요.”박지연은 당연하게도 고은서를 배신하지 않았다.“...”육현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혼하라고 곽승재를 달랠 담이 없었다.통화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보니 그 짧은 사이에 테이블은 이미 술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그 모습을 육현석이 용기를 내어 그의 술잔을 빼앗으려 했다.“형, 그만 마셔. 이러다 형 쓰러져!”그러나 곽승재는 술잔에 한이라도 맺힌 듯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전혀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육현석도 차마 강제로 술잔을 빼앗을 엄두가 나지 않아 손을 놓았다.그러나 손을 놓는 순간, 팍하는 소리와 함께 곽승재가 손으로 술잔을 깨뜨렸다.“형, 손 괜찮아?”육현석이 황급히 곽승재의 손을 확인해 보니 그의 손바닥은 이미 수많은 유리 조각들이 박혀있었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형, 얼른 병원으로 가자!”육현석이 당황해하며 곽승재를 일으키려고 할 때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새 술잔을 들고 또 술을 마셨다.곽승재의 주변의 분위기가 한 층 더 살벌해진 것 같았다. 육현석은 그를 끌고 병원으로 가기는커녕 그를 설득할 용기도 없었다.한참 고민 끝에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던 걸 하며 후회하는 육현석이었다.특별히 주문 제작한 핸드폰은 곽승재로 인해 폐기되는 결말을 맞이했다.유심 카드를 꺼낸 육현석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형, 아무리 화가 나도 형수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진짜인 줄 오해한단 말이야.”곽승재는 정말 폭발 직전에 놓여 있었다.“내가 한 말 모두 진심이야!”“그래, 그래. 진심이야.”육현석은 더 이상 곽승재에게 따지지 않고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웨이터에게 지혈제와 반창고를 가져오게 했다.다양한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술집답게 기본적인 약물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곽승재의 비협조 속에서 육현석은 그의 손바닥에 지혈제를 발라주고 반창고 몇 개를 겨우 붙여 지혈할 수 있었다.한바탕 고군분투 끝에 곽승재는 드디어 조용해졌다. 그는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어 있었는데 검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손에는 여전히 술잔을 든채 기울이고 있었다.“형, 확실히 조사한 거 맞아? 형수님이 임신한 아이 정말 형 아이는 아니야?”육현석이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그렇게 방탕한 사람은 아니잖아.”곽승재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본인이 인정했어.”육현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내가 직접 민시후가 자신의 아이이니 고은서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말을 들었어!”여기까지 말을 마친 곽승재는 화가 치밀어 올라 고은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내가 민시후와 사이좋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 새끼랑 어울리면서 아이까지 만들다니!’“사람 시켜서 민시후 다리 분질러버려.”곽승재의 눈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남은 생은 휠체어를 타게 만들어야 누굴 건드렸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앞으로 다른 사람도 건드리지 못하겠지.”육현석은 곽승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지금 평소와는 달리 엄격하고 이성적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육현석은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했다.“형, 민시후 다
민시후가 싸늘히 웃으며 답했다.“다른 이유가 있겠어? 송민아를 위해 나서서 나한테 경고하는 거 아니야?”송민준도 웃었다.“너희들을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민아는 그냥 너랑 결혼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우리 가족들도 그걸 고려하지 않을까?”민시후는 송민준의 말에 넋이 나갔다.송민준이 송민아의 결혼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소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송민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송민준은 감추는 게 많았고 평소 일 처리 방식도 독특했다.그는 아무 이유 없이 클럽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공교롭게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송민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철원이 그렇게 빨리 사람을 데리고 복수하고 도망친 건 누가 뒤에서 도와준 거지?’“넌 내가 갑자기 찾아온 게 의아하지 않은 가 보네? 어젯밤 일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고.”민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송민준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나도 관련 게시물을 봤거든. 네가 보면 오해할 것 같았어. 어제 클럽에 간 건 단순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야.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먼저 갔는데 나도 더 이상 거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지. 시후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송민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민시후는 긴장을 풀고 다른 의자에 다리를 걸치며 답했다.“물을 필요 없어. 고은서가 임신한 건 사실이야.”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애야?”“그럼?”“민아 쪽은 어떻게 할 예정이야?”“어차피 혼사는 너희들이 멋대로 결정한 거니 나랑은 상관없어. 나는 단 한 번도 민아랑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시후 오빠!”송민준이 뭐라 하기도 전에 화가 난 송민아가 찻집 병풍 뒤에서 뛰쳐나왔다.“고은서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 여자 때문에 나랑 파혼하겠다는 거예요?”갑자기 나타난 송민아였음에도 민시후는 그저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되
민시후는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민아가 스스로 혼나기를 자초한다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집 문으로 향하며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렸다.“시후야, 고은서 씨의 아이가 너랑 관련이 있든 없든 무리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아저씨 쪽에서는 나만큼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거야.”“지금 협박하는 거야?”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송민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그저 충고야.”말을 마친 송민준이 긴 다리로 자리를 떴다.민시후는 멀어지는 송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늦은 밤 간병인을 돌려보낸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병실은 아무리 좋아도 병실이었다.지워지지 않는 소독약 냄새는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했다.동영상을 보고 있을 때 고은서는 주인혁이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편집한 영상에는 인기 많은 멤버가 몇 명 있었는데 주인혁도 그중에 포함되었다.주인혁은 제작인이 일률로 나눠준 훈련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남들보다 훨씬 더 밝고 멋져 보였다.노래할 때 주인혁의 우월한 비주얼과 독특한 무대 매너는 더 눈에 띄었다.댓글에서도 주인혁의 정보를 묻는 사람이 많았고 또한 순정 만화 주인공과 같은 동시에 묘한 야성미가 느껴져 설렌다는 댓글들도 보였다.그러한 댓글에 고은서는 진심으로 주인혁을 위해 기뻐했다. 마치 친동생이 철들고 출세해서 느끼는 자부심과 우월감도 느꼈다.요즘 주인혁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아마 훈련으로 바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30위 안에 든 사람들을 위해 주최 측에서 축하 파티를 한다더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고은서는 굳이 주인혁에게 메시지를 보내 방해하지 않고 앱에 들어가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전생에도 핫했던 오디션 프로그램답게 화질과 편집은 확실히 좋았고 참여자들도 저마다의 특색이 있었다.연속 두 편
오후에 화가 나서 떠나고 저녁에 했던 통화에서도 매서웠던 곽승재의 기세에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지금 와서 따지려는 건 아니겠지?’고은서 혼자서는 곽승재를 이길 수 없었다.졸음에서 거의 깨어난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불러 곽승재를 쫓아내려고 했다.하지만 손을 다 뻗기도 전에 곽승재가 정확히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취한 것 같은데 왜 동작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거야?’“뭐 하려고?”곽승재가 싸늘히 웃으며 물었다.술에 취했는지 그의 말은 평소보다 느렸고 눈빛은 평소보다 더 제멋대로였고 평소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고은서는 모르는 척 합리적인 핑계를 댔다.“목말라서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곽승재가 긴 팔을 뻗어 침대맡에 놓여있던 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마셔.”곽승재에게 강하게 잡힌 고은서는 힘껏 발버둥 치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이건 식었잖아. 따듯한 걸 마시고 싶어.”그 말을 들은 곽승재의 입가에 불현듯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곽승재는 컵에 든 물을 마시고 고은서의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싫어!”곽승재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고은서는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성깔이 올라온 곽승재는 입을 가린 고은서의 손을 잡더니 기어코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목 안 말라!”그의 입이 닿은 순간 고은서는 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곽승재의 입술은 그녀의 귓불에 닿았고 차갑고 물기 있는 입술이 귓가에 떨어지자 고은서는 전율을 참을 수 없었다.곽승재는 무언가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한 듯 차가운 입술로 그녀의 귓바퀴, 목, 쇄골을 훑으며 고은서를 자극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끊임없이 몸부림을 쳤다.“곽승재! 꺼져! 나쁜 놈!”수치심을 느낀 고은서가 분노에 차 외쳤다.그녀의 불편함을 느꼈는지 곽승재는 정말 움직임을 멈췄다.하지만 고은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뜨거운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침대 위로 누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고 고은서는 아파서 오열했다.그에 반해 곽승재는 평소보다 더 흥분하여 그녀의 긴 목덜미를 미친 듯이 유린했다.귓가에서 들려오는 곽승재의 숨결은 거칠고도 뜨거워 고은서는 자기가 호랑이 굴에 떨어진 약한 먹잇감처럼 느껴졌다. 굶주린 맹수에게 한입에 핥이고 삼켜질 것만 같았다.이때의 곽승재는 평소의 냉철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입술과 손은 뜨거웠고 몸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고은서는 더 깊게 잠든 야성을 불러올까 두려워 감히 몸부림칠 생각도 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이내 곽승재는 키스에 만족하지 않고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약간 거친 손가락이 여린 피부를 스치자 고은서는 온 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간지럽고 저릿했다. 곽승재는 두 팔로 그녀를 꼭 껴안았는데 마치 그녀를 품속에 가두고 싶은 듯한 모양새였다.단단히 붙들린 고은서의 체온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아직 몸이 허약한 그녀는 이런 자극을 견딜 수 없었다.강한 태도로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은서는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짜내며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려 애썼다. 고은서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승재 씨, 아파. 놔줘.”안쓰러운 그녀의 어조 때문인지 곽승재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눈꼬리가 붉어지고 눈빛이 뜨거워진 곽승재에게는 여전히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는데 그걸 본 고은서도 너무 뜨거워 뜨끔해졌다.“오빠....”고은서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어 말했다.“나 놔주면 안 돼?”곽승재의 눈빛이 반짝이며 더없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라고 부른 거야?”그의 손바닥이 더 이상 아래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고은서가 가볍게 대꾸했다.“승재 오빠...”이 호칭을 들은 곽승재는 두 손으로 그녀를 더 꽉 껴안으며 기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은서야, 나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허락하지
고은서는 곽승재의 광기와 집념을 엿보고는 소리쳤다.“지금 나를 만진다면 정말 평생 미워하고 원망할 거야!”“미워할 거면 그렇게 해. 어차피 나랑 평생 살 생각 없잖아.”곽승재는 차가운 눈초리로 벨트를 내던지고 서슴없이 다가왔다.갑작스럽고 낯선 통증에 고은서는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곽승재의 팔뚝을 물었다. 마치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말이다.곽승재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쥐어 고은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풀게 했다.“곽승재,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랑 같이 죽을 거야.”고은서가 눈물을 머금은 채 원망과 결심이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자식 아이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차갑게 말한 곽승재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고 그는 고은서의 두 다리를 더 꽉 조였다.병실 안은 순식간에 곽승재의 거친 숨결과 고은서의 오열로 가득 찼고 몇 마디의 질책도 뒤섞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곽승재의 눈동자는 더욱 붉게 변했고 그는 몸을 숙여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고은서, 아이는 지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말할 힘까지 다 빠져버린 고은서는 눈물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고은서는 갈증이 나서 잠에서 깼다.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물을 마시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움직이지 마.”박지연의 소리에 겨우 눈을 뜬 고은서는 비로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박지연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로 보건대 이미 대낮이었다.어젯밤 곽승재에게 들들 볶여 숨이 막혔던 고은서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곽승재가 언제 갔는지 그녀는 몰랐고 박지연이 온 사실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물 마시려고? 따라줄게.”박지연은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그녀를 일으켜줬다.갈증이 났던 고은서는 물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더 마실래?”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늘 당직 아니잖아. 어쩐 일이야?”“곽승재가 불러서 왔어.
고은서는 더욱 이를 갈며 말했다.“정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다면 강간죄로 신고했을 거야! 근데 너는 우리가 안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고은서가 의문스럽게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곽승재가 혹시라도 내가 상황을 모르고 전신 검진을 받게 할까 봐 숨기지 못하더라고.”‘그랬구나.’지금 고은서의 모습은 검진을 받기 적합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널 신경 쓴다고 하기에는 한밤중에 와서 네가 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롭히고... 그렇다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약 발라주고 날 불러서 너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하고...”박지연이 계속 투덜댔다.어젯밤 미친 듯이 행동한 곽승재를 떠올린 고은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는 통제 불능인 짐승처럼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어 하는 듯했다.특히 그녀의 목을 문 순간, 고은서는 정말 물려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곽승재가 받은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무슨 일 있어?”박지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아침에 봤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갈등을 품고 있는 것 같았어. 뭐가 고민일까? 네가 깨어날 때까지 직접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더라고. 남의 아이를 임신했는데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가?”어젯밤 곽승재가 그녀의 귓가에 했던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아이는 지워. 다시 시작하자.”곽승재의 성격상 이혼하지 않는 건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인데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침에 서둘러 자리를 뜬 건 어쩌면 그런 말을 후회해서 그럴지도 몰랐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소송으로 갈 거야.”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변호사를 찾아달라고 한 부탁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은서야, 곽승재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송으로도 이기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거야?”박지연이 물었다.이 말은 민시후도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내가 왜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것 같아?”고은서는 더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이 광경을 주민기는 황급히 벨을 누르며 의사를 불렀다.“의사 선생님...”...고은서의 병실로 다시 돌아간 박지연은 방금전 씩씩거리며 나가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거봐,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고은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위안했다.“화 풀고 나랑 내일 귀국할 준비 하자. 돌아가고 나서 나 밥 사줘. 그리고 SPA도 하고 싶은데 네가 쏠 거지?”박지연은 한참 동안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목매지 말고 우리 다른 남자 찾아보자. 넌 곽승재가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박지연은 평소에 이런 오글거리는 행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곽승재한테 찾아가더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알겠어.”고은서가 박지연의 등을 토닥이며 웃으면서 답했다.민시후도 어느새 백유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해보라고 사람 시켰어. 민시현한테도 원지훈 사망 사건에 관해 다시 조사하게끔 당지 경찰 측에 말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괜찮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서 큰 변화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조사해달라고 형을 귀찮게 굴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답했다.“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 데 써먹을 수 있을 때 써야지.”민시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난 네 형한테 불리워 가서 밥 먹기 싫어.”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싸움을 했다.“민시후, 비록 네 선택이기는 하지만 다신 이런 일에 끼어들지 마.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일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민시후는 이번 일로 며칠 동안 병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그녀가 보기에도 엄청 안쓰러운데 그의 가족들은 오죽할까.“네가 다치는 일이 없는 한 이건 약속 못 하겠는데.”
곽승재는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박지연은 콧방귀를 뀌면서 곽승재한테 고은서가 유산한 날 동료한테 부탁해서 그가 썼던 수건에 있던 머리카락으로 유전자검사를 했다면서 알려줬다.“고은서가 계속 마음에 못을 박는 소리를 해왔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요. 원래는 당신이 고은서의 마음을 되돌리고 두 사람이 재혼하게 되는 그날에 이 모든 걸 알려주면서 은서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진짜 구제불능인 것 같네요. 어떻게 자기 아내랑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을 이대로 놓아줄 수가 있죠? 당신은 은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박지연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고은서가 유산했을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떠올린 박지연은 지금이라도 곽승재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은서가 그 아이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애가 행복하게 클 수 있는지를 얼마나 고민해왔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백유미 그 악독한 여자가 이 모든 걸 망쳐버렸잖아요.”박지연은 말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당신이 은서를 굳게 믿었다면 굳이 이혼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이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곽승재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은서가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부터 아주 큰 착오였어. 당신은 단 한 번도 은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잖아요. 단 한 번도 은서 입장에 서서 고려해본 적이 없잖아요! 민시후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고 했죠? 그런데 민시후가 당신보다 백 배는 나아요. 적어도 은서를 웃게 하려고 노력하고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고은서가 무슨 일이 있든 항상 발 벗고 나서주잖아요.”박지연은 계속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그의 마음에 칼을 꽂았다.“고은서가 백유미한테 반격하려는 일을 민시후한테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