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찾으셨어요?”주민기는 무고한 자신까지 피해를 볼까 봐 머리털이 곤두섰다.곽승재가 그에게 USB를 던졌다.“이 안에 있는 계획서 프린트해서 판주로 보내고, 통과되면 고은서에게 기준에 따라 보너스 주세요.”명운이 특별히 큰 프로젝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GS그룹이 판주를 인수한 이후 첫 번째 프로젝트인 만큼 더 완벽하게 준비해서 명예를 지켜야 했다.하여 최근 투자자들이 열심히 계획서를 만들고 있고 회사에서도 이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 보너스를 책정했다.그런데 고은서가 이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짧은 시간 안에 곽승재마저 인정할 만한 계획서를 만들 줄은 몰랐다.주민기는 마음속으로 몰래 감탄하며 USB를 받아 들었다.“네, 대표님.”...“은서 씨, 먹고 싶은 거나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대로 시켜요, 예의 차리지 말고.”조용하고 고급스러운 프라이빗 클럽, 푹신한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민시후는 긴 다리를 테이블 위에 무심하게 올려놓았고 양옆으로 늘씬한 미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이 느긋한 모습을 남들이 봤으면 업무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호화로운 생활을 자랑하는 줄로 알 것이다.“도련님, 사람들 좀 내보내도 될까요?” 고은서가 물었다.“안 돼요.”민시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은서 씨, 이 여자들이 나가면 우리 둘이 한 방에 남게 되는데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고은서가 말했다. “괜찮아요, 도련님께선 절 동성 친구로 생각하세요.”민시후는 건들거리며 대꾸했다.“안되죠, 어떻게 은서 씨처럼 예쁜 사람을 동성으로 대할 수 있겠어요?”고은서는 말을 멈추고 민시후 옆에 있는 두 미녀를 향해 말했다.“올 때 보니까 여기 스파가 있더라고요. 두 분은 나가서 전신 스파 좀 받고 오세요. 비용은 전부 도련님이 부담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두 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민시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은서 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만 가 봐. 누가 곽승재랑 부부 아니랄까 봐, 조금도
민시후는 고은서를 비웃듯 바라보았다.“판주가 입찰도 안 했는데 명운이 그런 큰 먹잇감을 포기하고 우리랑 같이 일할 것 같아요?”“보통 상황이라면 안 되겠지만 누군가 밀어붙이면 또 모르죠.”“오호?” 민시후는 자세를 고쳐 앉고 흥미롭게 고은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고은서는 휴대폰을 열어 파일 하나를 꺼내 민시후에게 건넸다.“명운의 서인수 대표에요. 여러 경로를 통해 조금 알게 된 정보인데 그가 양조장을 운영할 수 있었던 건 독점 제조법 외에도 처가댁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아내의 말은 무척 잘 듣는다더군요.”“은서 씨 말은 그 사람 아내를 통해 서인수를 설득해서 우리와 함께 일하게 하겠다는 건가요?”민시후의 말투는 한층 담담해졌고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치기 직전이었다.고은서가 먼저 협업을 제안하길래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했는데 고작 이런 수작이라니.그는 고은서의 휴대전화를 밀어내며 말했다.“명운의 미래 상장에 관한 일인데 그 사람 아내도 성급하게 결정하진 않을 거예요.”고은서도 당연히 민시후의 조급함을 눈치채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도련님, 이것 좀 다시 봐요.”그녀는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서인수 부부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이분은 서인수 씨 장모님인데 몇 달 전 심장마비로 돌아가실 뻔했을 때 간호사가 제때 응급조치를 해서 사모님이 무척 고마워하고 계세요.”민시후는 고은서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간호사가 제 친한 친구입니다. 이미 저를 대신해 사모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고 내일 오전에 계획서를 들고 댁으로 찾아뵙기로 했어요.”고은서는 이렇게 말하며 간단한 제안서를 민시후에게 건네주었다.“너무 번거롭지 않게 간단하게 요약한 제안서를 만들었으니 한번 보세요.”민시후는 서류를 받고 조금은 놀란 모습이었다.“아침에 USB를 잃어버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한 거예요?”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 “기회를 잡는 게 쉽지 않으니 당연히 놓칠
“필요 없어요.” 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친구를 사귄다는 태도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은서 씨, 생각보다 꽤 똑똑하네요.”고개를 든 민시후는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고은서는 칭찬으로 여기고 답했다.“도련님 칭찬 감사합니다.”민시후도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기획서를 고은서게 다시 건넸다.“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다음 날, 고은서는 일찍 일어나 적당히 화장을 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서인수의 집으로 향했다.서씨 가문은 도시의 고급 동네에서 작은 마당과 화단이 있는 별장에 살고 있었다.고은서가 도착했을 때 도아름은 어머니와 함께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있었다.고은서는 당당하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자기소개를 한 후 가져 온 선물을 건넨 다음 서두르지 않고 할머니와 함께 잠시 볕 쪼임을 하고 점심을 함께 먹었다.식사 후에야 고은서는 본론에 들어갔다.“사모님,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명운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여러 군데 있는 걸로 알지만 저희 미래가 가장 좋은 선택지일 겁니다.”고은서는 생각을 전하며 계획서를 건넸다.“투자 금액과 지분율을 보면 저희의 성의를 알 수 있을 겁니다.”도아름도 시장 상황을 이해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자료를 넘겨보았다.“이 문제는 나중에 남편이랑 주주들과 상의해서 이틀 안에 소식 전해드리죠.”거절하지 않은 것 자체가 좋은 출발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고은서는 도아름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맙긴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지연 씨 친구면 당연히 도와야죠.”도아름은 당당하고 유능하며 성격도 솔직했다.사업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고은서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그럼 지연이가 돌아오면 저도 밥 얻어먹으러 올게요!”“좋아요!”도아름과 작별 인사를 나눈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상황을 알리며 관련 서류와 계약서를 제때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일을 마친 고은서는 예원 별장으로 돌아갔다.도아름이 도와준다고 했
스피커 모드였던지 곧이어 반대편에서 할머니의 속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은서야, 승재 그 자식 때문에 화가 나서 할머니랑 시간도 보내기 싫은 거니?”할머니의 그런 말투를 당해내지 못한 고은서가 서둘러 말했다.“전 당연히 할머니랑 있는 게 좋죠.”“그럼 그렇게 해, 내일 너희한테 기사 보내마.”고은서의 다음 말을 할 틈도 없이 전미자는 이미 통화를 끝냈고 그녀의 목소리 톤은 한결 가벼워졌다.“...”다음 날 오후, 고은서는 운전기사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차에 가서 문을 열어보니 곽승재도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서늘한 눈매와 인상적인 분위기가 마치 금융 잡지의 표지 모델처럼 보였다.문을 여는 소리에 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개자식, 분명 자기 기사도 있으면서 굳이 할머니 차를 타겠다고!고은서는 그와 같이 앉고 싶지 않아 문을 닫고 조수석에 앉으려 했다.“심술부리지 마,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어.”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의 말투가 살짝 가라앉았다.분명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생각은 또 어떻게 읽었을까.운전기사가 자신을 돌아보자 고은서는 자신의 행동이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삐죽거리며 뒷좌석에 올라탔다.이동하는 동안 고은서는 곽승재와 말을 섞지 않고 휴대폰만 보았고 곽승재 역시 그녀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컴퓨터만 바라봤다.차는 한참을 달렸고 운전자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자 고은서는 몸이 앞으로 쏠리며 앞좌석에 이마를 부딪칠 뻔했다.“조심해.”곽승재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기자 고은서는 흔들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도련님, 사모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끼어들어서.” 운전기사는 서둘러 사과했다.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은서는 이미 그의 가슴에 반쯤 기대고 있었다.그녀는 오늘 베이지색 프릴이 달린 반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각도에서 그녀의 하얗고 섬세한 쇄골과 특정 부위가 은근히 보였다.“어딜
고은서는 당황했다. 할아버지가 준 200억은 민시후와의 협업에 사용할 예정이었고, 지난번 곽승재의 블랙카드는 한도를 다 써 버린 상태였다.요즘 수중에 현금이 많지 않아서 이 돈만 들어온다면 생활이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어쨌든 그 계획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쓸모가 없으니 판주에서 쓸 테면 쓰라지.하여 고은서는 태연하게 물었다.“2천만 원만 더 주면 안 돼?”“...” 곽승재가 그녀를 올려다봤다.“고은서, 그렇게 돈을 좋아하면서 전에는 왜 고고한 척 재산 한 푼도 필요 없다고 했어?”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곽승재는 그녀에게 카드 한 장을 던졌다. 생활비는 충분히 줄 테니 결혼으로 자신을 묶어두지 말라면서.당시 고은서는 돈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의 카드를 거절했다.그래서 결혼 후부터는 곽승재에게 줄 선물을 사거나 생활비 일부를 자신의 돈으로 충당했다.아까워 죽겠네!“이제라도 보상해 주는 게 어때?” 고은서가 떠보듯 묻자 역시나 곽승재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나랑 이혼할 건데, 내가 왜 너한테 생활비를 줘?”사업가에겐 천성적으로 이익이 중요했기에 고은서도 더 따지지 않았다.“그냥 2억으로 해.”곽승재가 요구를 제기했다.“앞으로 프로젝트 진행에 참여하고 계획서와 관련된 데이터 수정도 책임져.”“곽승재, 나한테 돈 주기 싫은 거지?” 고은서가 화를 냈다.“난 판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어. 판주 일에도 관여하지도 않을 거야!”곽승재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규정을 어겨서라도 널 이 프로젝트에 투자자로 참여시킬 수 있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포기하면 나중에 할머니한테 부탁해도 소용없어.”“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끼워준다니, 넓은 아량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곽승재의 분노에 찬 서늘한 표정에 고은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성의는 도로 집어넣어. 내가 할머니한테 가는 건 고사하고, 당신이 애원하러 와도 판주에 안 들어갈 거니까!”곽승재는 더
전미자는 구식 나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주위로 화려한 차림의 여성 여러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할머니!” 고은서가 힘차게 외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고 그녀를 본 전미자는 표정이 환해졌다.“은서 왔구나!”고은서와 곽승재가 함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할머니, 고모님들 안녕하세요.”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승재야, 넌 정말 효자구나. 항상 바쁘다고 하면서 안 오는 우리 집안 불효자들과 달리 매번 할머니를 찾아와주니!”“그래, 아무리 바빠도 승재보다 더 바쁠 수는 없지. 그렇게 큰 GS그룹을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시간을 내는데 그냥 우리 늙은이들이 싫은 거야!”“역시 승재야. 능력도 있고 효성도 지극하고, 할머니는 복이 많으셔!”고모들의 칭찬을 들으며 곽승재는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었고 고은서를 흘깃 쳐다보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과찬이십니다. 저도 평소에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대부분 은서가 곁에 있어 드리죠.”‘은서’라는 두 글자가 곽승재 입에서 나오자 고은서는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아무리 겉치레일 뿐이라도 한번도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은 아무런 동요 없이 태연한 표정이었다.할머니는 조용히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은서가 좋은 애라는 걸 아니까 다행이네.”“그래, 은서도 효녀지! 예쁘기도 해서 승재랑 천생연분이네!”여자들은 고은서를 칭찬하기 시작했고 칭찬이 쏟아지는 가운데 저쪽에 있던 당숙이 곽승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곽승재는 배려심 많은 남편처럼 고은서에게 말했다.“할머니랑 잠깐만 있어, 다녀올게.”이 정도 연기쯤이야, 고은서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은서랑 승재는 갈수록 사이가 좋은 것 같네!”고모 중 한 명이 고은서에게 말했다.“너랑 승재는 언제 아기 낳을 거야, 그래야 우리도 기운 좀 받지! 그렇죠 여사님?”전미자는 웃으
고은서는 전미자의 말뜻을 알았지만 스스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할머니, 저를 위로해 주실 필요 없어요. 곽승재의 마음은 제가 잘 알아요.”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마음을 바꾼다고 해도 더 이상 그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는 없었다.그와 백유미 사이의 암묵적인 이해와 감정, 이번 생에서는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고은서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그녀가 저렇게 단호할 만큼 슬픔과 실망이 쌓였을 테니까.부디 그 망할 놈이 빨리 정신을 차리고 은서의 마음을 되돌려야 할 텐데....라운지에서는 몇몇 여성들이 자식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우리 아들 생일이 곧 다가오는데 여기서 제작한 옷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브랜드 사이트에 사진이 몇 장 있는데 다들 한번 골라주세요!”그중 한 명이 아이패드를 꺼내자 여러 사람이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곽승재도 화면을 흘깃 쳐다보았다.“승재 너는 옷도 잘 입고 눈썰미도 좋으니까 고모 좀 도와줄래?”여자가 먼저 제안했고 곽승재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아이패드를 집어 들었다.그는 첫 페이지에 있는 신상을 훑어보다가 6천만 원 이하의 옷들 중 스크롤을 내려 5760만 원짜리 검은색 캐주얼 정장을 찾았다. “승재야, 너만큼은 아니어도 고모네 집안 형편으로 이 정도 가격대 옷을 살 필요는 없어.”여자가 웃으며 말하자 곽승재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홈페이지 상단의 2억짜리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인적으로 이게 괜찮은 것 같네요.”“그래, 예쁘네! 우아하면서도 트렌디해. 여러분도 와서 보세요!”여자들이 다가오자 곽승재는 아이패드를 돌려주고 정원으로 향했다.할머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있고 고은서는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그렇게 계속 웃으세요, 좋아요, 할머니 너무 아름다우셔!”할머니는 칭찬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은서의 말에 따라 좌우로 머리를 움직였다.곽승재는 고은서가 평소 사탕 발린 말로 할머
가기도 전에 길가에 피어 있는 난초에 이끌려 몸을 숙이고 냄새를 맡았다. 고은서는 꽃향기가 너무 좋아서인지 순식간에 이마가 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그 순간 그녀의 머리와 주변은 햇살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녀린 작은 얼굴이 하얀 난초 앞에 가까이 가자 곽승재는 꽃과 사람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순간 분간할 수 없었다.저도 모르게 멍하니 자신의 휴대폰으로 그 모습을 찍었다.오후 반나절의 자유 시간이 지난 후 연회가 시작되었고 20여 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전미자와 숙부님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라 참석한 청년, 중장년층에 비해 기력이 떨어지셔서 일찍 자리를 뜨셔야 했다.곽승재는 삼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고은서는 할머니가 차에 타는 것을 도왔다.차가 사라지는 것을 본 고은서는 돌아가서 곽승재와 다정한 척 연기하기 싫어서 주위를 돌아다녔다.장막이 깃들고 정원 잔디밭에는 형형색색의 조명이 켜져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고은서는 방 근처 작은 대나무 숲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쪽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은 방 바깥에 경호원 같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고은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던 중 마른 체구의 남자가 젊고 앳되어 보이는 여자 몇 명과 함께 방 쪽으로 걸어오며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오늘 거물급 손님이 오셨으니 잘 모셔야 해. 안 그러면 너희들 가만 안 둬!”그중에 몸매 좋은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몸이 좀 안 좋은데 술은 안 마시면 안 될까요?”“헛소리 집어치워! 술 마시는 게 뭐가 어때서? 너희들이 이렇게 비싼 휴대폰을 쓰고 이렇게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는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 서 대표님께 잘 보이면 앞으로 팔자가 핀다고!”‘서 대표’라는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들어선 방을 바라보았다.마침 문이 열렸고 방 안에는 두세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모두 상석에 앉은 살집이 있는 남자에게 술을 따르며 공손한 모습이었다.어딘가 낯이 익은 그 남자는 그가 최근
“고은서, 이게 그렇게 난감해할 문제야?”고은서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비록 어이없는 요구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선물 가격에는 요구가 있어?”고은서가 다시 확인했다.‘너무 비싸면 주기 싫은데.’“없어. 성의 없는 선물만 아니면 돼. 고은서, 너도 고씨 집안 아가씨잖아. 왜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인색한 게 뭐가 어때서? 전생에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손에 돈만 있었으면 그렇게 하찮게 남은 인생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그녀는 이번 생만큼은 돈을 아끼며 살 생각이었다.그런데 이런 말을 민시후한테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알겠어. 내가 진짜 진심을 다해서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할게.”“당연히 그래야지.”민시후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답했다.고은서는 이 틈을 타 원지훈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서 자신의 의문스러움을 말했다.그녀가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해서일까, 민시후는 아주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걱정하지마. 내가 조사해볼게.”고은서는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 같았다.저녁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지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너 민시후한테 남다른 감정 품고 있는 것 같은데.”“남다른 감정?”“문제가 생기면 민시후한테 다 얘기해주잖아. 민시후를 엄청 신임하고 있는 것 같은데.”“사업 파트너로서 서로 신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곽승재를 이렇게 신임해 본 적 있어? 이 일을 곽승재한테도 알려줄 거야?”“아니!”고은서가 단호하게 부인하며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 곽승재랑 백유미 사이 관계만 생각해도 이런 일을 곽승재한테 얘기할 리가 없잖아. 전에 여러 번 내 편을 들어줬다고 해도 백유미는 여전히 잘살고 있잖아.’“이거 봐. 이렇게 중요한 일을 곽승재한테는 안 알려주면서 민시후 하나만은 엄청 굳게 믿고 있잖아. 이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도 있다는 표현이지.”박
원지훈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백씨 기업 책임자도 누나랑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상대방 측에서 계약서를 수정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내더라도 계약을 실행하지 않겠다면서 아무튼 손해를 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면서 막무가내로 나오고 있다니까요.”고은서는 이 계약을 이대로 망치는 걸 원치 않았다. 계약이 성사되어야만 백씨 기업을 제대로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상대방에서는 대체 왜 그러는 거지?’원지훈은 자신도 모른다면서 요즘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또 행여나 백유미한테 들키기라도 할까봐 부사장을 함부로 설득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지금 유일한 방법은 직접 상대방을 찾아가서 이러는 원인을 캐내는 거예요. 그래야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어요.”원지훈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내가 더 고려해보고 이틀 후에 정확한 답을 줄게.”“저도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에요. 상대방이 너무 강하게 나와서 저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게다가 중요한 건 더 끌다가 백유미한테 들킬까 봐 걱정이에요.”원지훈이 조급해하며 말했다.“저 백씨 가문을 빨리 망가뜨리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잃게 되면 또 다른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알겠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정말 이 일 때문에 이상하게 군 거라고?’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민시후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 동물원 수속이 거의 다 완성되었는데 지금 시간 있어? 네 사인이 필요한데 내가 데리러 갈게.”이 일에 관해 고은서는 이미 대책을 생각해냈다.“내가 생각해 봤는데 동물원을 나 혼자 경영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그래서 안전하게 ZY 그룹 명의로 하는 건 어때?”고은서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럼 내가 부담 가질 필요도 없잖아. 행여나 망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
‘전에 은혜를 넘보지 말라고 경고한 이후로 쓸데없는 생각은 이미 접은 줄 알았는데 왜 또 구질구질하게 은혜한테 들러붙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고은서는 고은혜를 위안하면서 더는 원지훈이랑 애인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시끄러우면 그저 무시하라고 말했다.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최근 원지훈이랑 두 번 정도 통화했는데 별로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백승엽도 해외 전문가한테서 치료를 받는다고 하지만 골든 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기나긴 치료료정을 거치고도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남은 인생을 휠체어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백유미는 회사 징벌을 받고 원래 자리는 내놓았지만 여전히 판주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범가온 말로는 요즘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보낸다고 한다.백씨 기업에서 밀고 있는 프로젝트도 아직까지는 흠을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서는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원지훈이 예상 밖으로 일을 너무 쉽게 해결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백유미도 자신을 엿먹인 사람이 민시후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있는다고? 원지훈은 그렇다 쳐도 적어도 나한테는 반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원지훈한테 연락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원지훈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원지훈이 긴장해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 뻔뻔한 성격을 가진 그는 고은서와 대화할 때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지만 그의 말투로부터 항상 거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얼마 전에 전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왜 긴장하고 있는 거지? 찔리는 곳이라도 있나?’고은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별일은 아니고 너 은혜한테 고백했다며?”“저도 그럴 자격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여자애 중에서 제일 좋은 거 어떡해요. 그저 기회라고 달라고 그런 거예요. 게다가 누나도 저에 관해 거의 꿰뚫고 있잖아요. 저 은혜한테 진짜 진심이에요. 절대 전처럼 이상한 생각 품고 그러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게 있다던 건 뭔데?”고은서가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전에 네 어머니가 엄청 훌륭한 퍼퓨머라고 하시면서 너도 네 어머니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하시던데 혹시 비슷한 사례를 들어본 적 있냐 해서. 승연이를 안정시킬 향을 제작해줄 수 있을까?”그러나 고은서는 이런 일을 오늘 처음 듣는 것이었다.퍼퓸 제작도 상응한 난도가 있는 법. 보편적인 커스텀 향수라면 고객들이 말해주는 요구에 따라 시도해보겠지만 곽승연의 상황은 어찌 손을 댈래야 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곽승연 씨에 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무얼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약간 곤란할 것 같아.”고은서가 사실대로 말했다.“알겠어.”고은서는 아쉬워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위안해주려고 하다가 이내 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을 도로 삼켰다.“별다른 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응.”고은서는 자신의 차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곽승재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전미자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은서는 갔어?”전미자의 물음에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일부러 시간까지 짜내서 돌아와서는 왜 또 그렇게 덤덤하게 구는 거야? 그리고 브로치는 왜 주민기가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 건데?”전미자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할머니, 저한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대요. 심지어 제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싫어해요. 제 모든 행동이 고은서 눈에는 그저 집착일 뿐이라고요.”곽승재가 답했다.“그러니까 전에 잘해주라고 할 때 잘해줄 것이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지금 둘 사이가 이렇게 된 게 알고 보면 다 네 탓...어휴.”전미자는 풀이 죽은 곽승재를 보면서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네 아버지가 며칠 전에 사람도 집안도 다 괜찮은 여자애 한 명이 있다고 나한테 널 대신 설득해 달라고 하던데 진짜 더는 기회가 없다 싶으면 한 번 만나봐.”“저 절대 다른 사람이랑 결혼 안 해요! 정략결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거고요.”곽승재가 결연한 태
고은서가 누군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전미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네. 은서야, 승재가 너한테 준 건데 그냥 가져. 아무튼 전에도 선물 한 번 사주지 않았잖아. 그저 너한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그녀의 말에 고은서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아니에요, 할머니. 전에도 많이 받았어요. 액세서리도 포함해서요.”비록 그녀가 직접 산 것들이지만 곽승재의 카드를 긁었으니 어찌 보면 그가 선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서운에서도 그녀에게 판다 팔찌를 선물한 적이 있다.“하나라도 더 가지면 뭐 어때.”그러나 전미자는 이내 무언갈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물었다.“승재한테 직접 돌려주는 대신 왜 나한테 가져온 거야? 승재가 또 널 화나게 했어?”“아니요. 그저 우리 사이에 이런 귀중한 선물을 받는 게 알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고은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이 한창 얘기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그 엔진 소리 곽승재 차 엔진 소리였어?’그날 저녁 곽승재가 그녀에게 뺨을 맞은 후로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이 시간에 할머니 집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곽승재가 거실로 들어왔다.그는 평소처럼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남다른 매력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고 고은서를 무시한 채 전미자한테만 인사했다.“할머니.”“너 이 자식! 넌 은서가 안 보여? 인사할 줄도 몰라?”전미가 그를 비난했다.곽승재는 그제서야 고은서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브로치 돌려주러 온 거야. 네 선물 받는 게 난처하대.”전미자가 고은서 대신 대답했다.“넌 선물을 은서한테 직접 줄 것이지 왜 택배를 보내고 난리야.”“저도 잘 몰랐어요. 그냥 경매가 끝난 후 주민기한테 맡겼어요.”전미자는 덤덤한 곽승재를 보면서 순간 말
곽승재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그는 두 사람 사이가 이대로 끝났다는 걸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고은서를 한참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뒤돌아 떠났다....그 후로 거의 두 주일 동안 곽승재는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민시후도 회사 일로 바삐 보내면서 그녀를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그사이 고은서는 송민아를 데리고 제인 제약 투자 계약서를 완성했고 자세한 부분도 여러 담판을 거쳐 수정했다.이젠 정식으로 사인하고 계약을 체결만 하면 됐다.주인혁은 백주 앰버서더에 관한 계약서를 체결하기 위해 명운에 왔다가 그녀와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다.쌍방은 목적이 아주 명확했고 계약도 순리롭게 체결되었다.고은서는 주인혁과 밥 먹으러 가면서 도아름과 주인혁의 매니저까지 함께 가자고 불렀다.밥 먹을 때 매니저는 요즘 들어 주인혁한테 엄청 많은 요청이 들어온다면서 팬덤도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한창 상승기라서 스캔들만 나지 않는다면 엄청 대박 날 애예요.”고은서는 매니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자선 파티 때 주인혁이 그녀를 엄청 많이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준 정장까지 입었는데 매니저도 은근슬쩍 눈치를 챈 모양인 것 같았다.그는 행여나 두 사람에 관한 스캔들이 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저도 주인혁이 자신의 꿈을 꼭 실현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게다가 머리도 좋아서 사리 분별도 잘할 거예요.”고은서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주인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꼭 정상에 오르겠다고 약속했다.“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게요.”레스토랑에서 나오면서 도아름이 고은서를 보며 장난삼아 입을 열었다.“은서 씨, 저 남자애가 지키고 싶다고 한 사람이 은서 씨 맞죠?”고은서도 주인혁이 자신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전에 한 번 도와줬었는데 그 일로 제 이미지에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밖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고은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딱 봐도 민시후에 관해 물으려고 찾아온 거겠지.’그러나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일까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모르는 척 그를 무시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이내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웃 사람들이 소음 소리를 참지 못하고 신고를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관리 인원이 찾아와서 그를 제지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일부러 그들 앞에서 불쌍한 척했다.“제 아내가 저한테 화나서 저를 쫓아냈거든요.”그의 속임수에 넘어간 관리 인원들은 그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사모님, 대화로 푸시고 얼른 문 여세요. 이웃 주민들도 휴식해야지 않겠습니까.”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아파트 관리 인원 두 명과 셔츠만 입은 채 외투를 손에 들고 있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곽승재는 피곤한 기색을 하고 서 있었는데 턱에 있는 상처까지 더하니 얼핏 보면 진짜 아내랑 싸우다 집에서 쫓겨난 남편 같았다.‘밥 먹을 때까진 괜찮더니 아까 아파트 단지 밑에서 둘이 또 싸운 거야?’“제 남편 아니에요. 일을 처리하기 전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요? 그리고 보안 좀 강화하세요.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막 들여서 되겠어요?”고은서가 관리 인원들을 향해 말했다.관리 인원 두 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세요. 제가 담당자한테 얘기해 놓을게요.”원래도 곽승재를 보자마자 그의 범상치 않은 기품에 주눅이 들었던 관리 인원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내가 아주 확실하게 말한 것 같은데. 날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고은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고은서, 너 정말 민시후 좋아하는 거야?”곽승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역시나 또 민시후였어.’“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우린 이미 이혼한 사이야.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우읍!”그러나
민시후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하면서 약간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마음이 약해졌다.‘송민아와의 약혼을 무효로 하면서 각종 시끄러운 일이 생긴 게 알고 보면 내 탓도 있는데.’“민시후, 나...”“쯧, 고은서, 이거 봐. 끝내는 나랑 말을 걸 거면서.”민시후가 장난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민시후, 너 진짜!”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한때 격투기를 배웠는지라 주먹의 힘이 꽤 셌는데 그녀는 민시후가 당연히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민시후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너 괜찮아?”고은서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아직도 화 안 풀렸어?”민시후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제발 이상한 짓 좀 그만해.”“고은서, 왜 자꾸 내가 장난친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편견 버리고 나 좋아해 주면 안 돼?”민시후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은서야!”바로 이때, 곽승재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곽승재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더는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얼른 돌아가.”그녀는 민시후한테 한마디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가 그녀를 따라가려고 할 때 민시후가 그의 앞에 막아섰다.“곽승재, 고은서가 널 싫어하는 거 몰라서 이러는 거야? 이미 이혼한 주제에 그만 좀 집착해.”“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곽승재의 얼굴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적어도 고은서는 날 싫어하지 않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하지 않...스읍!”민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의 주먹이 먼저 날려왔다.곽승재는 방금전에 민시후가 룸에서 고은서한테 자신에게 기대라 할 때부터 그를 패고 싶었다.그런데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떠는 것도 모자라 이젠 그한테 시비까지 걸다니.
고은서는 민시후와 곽승재가 건넨 음식을 먹는 대신 야채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민시후는 살짝 불만을 표했다.“고은서, 처음으로 여자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그러자 민시후는 금방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알았어. 그만할 테니까 많이 먹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민시현은 그 장면을 지켜보며 무표정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식사가 끝날 때까지 민시현은 민시후와 그녀의 사이를 묻지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현이 이미 그녀의 상황을 알아보고 민시후와의 관계도 얼마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늘 이 자리는 커플이라고 생각되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우회적으로 민시후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자리네.’어차피 정말 민시후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민시현이 어떤 행동을 하던 고은서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 고은서는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는데 종업원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민시현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은서 씨, 시간도 아직 이른데 차 한 잔 하시면서 입가심하시죠.”“됐어! 그만 해! 저녁 내내 가면 쓰고 있는 거 답답하지도 않아?”고은서가 뭐라 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민시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 그냥 고은서랑 곽승재 사이를 나한테 다시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거잖아. 미리 얘기하는데 난 그런 것들 신경 안 써. 나는 고은서가 좋아.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랑은 상관없어.”“너!”하지만 민시후는 민시현이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고은서의 가방을 들고 입을 열었다.“가자.”건물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고은서는 숨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이번 식사는 정말 숨 막힐 뻔했다.“배 안 불렀지? 네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다시 먹으러 갈까?” 민시후가 차 문을 열며 물었다.“배불러!”고은서가 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