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하니 박지연이 잘못 짚은 것이 아니었다. 망할 곽승재가 여태껏 그녀에게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녀는 두 번씩이나 소파에서 자던 도중에 다시 침대로 이동되어 잔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십중팔구 그의 작품이 분명했다.역시 남자의 몸과 정신은 분리할 수 있다. 분명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을 탐할 수 있으니 말이다.샤워를 끝내고 스킨케어까지 마친 그녀는 미지근한 물과 해열제 두 알을 받쳐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곽승재는 여전히 조금 전의 자세를 유지한 채 잠들어 있었고 미간은 약간 찌푸려져 있었으며 살짝 마른 입술에는 그녀의 립스틱이 묻어있었다.방금 그에게 협박을 받고 강제로 키스 당한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컵 안의 물을 그 얼굴에 확 뿌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곽승재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어서 일어나 약 먹어.”곽승재는 마지못해 눈을 떴는데 아마도 잠에서 덜 깨어난 것인지, 그녀를 보자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고은서, 너 나 보러 온 거니?”고은서는 하마터면 손에 든 물을 떨어뜨릴 뻔했다.“당신 왜 이래, 물 쏟을 뻔했잖아!”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흐리멍덩한 말투로 고민했다. “고은서, 넌 왜 자꾸 나만 보면 얼굴이 차가워져? 언제 나한테 한번 웃어 줄래, 응?”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저녁 프랑스 요리에는 소량의 술이 곁들여지는 몇 가지 메뉴가 있지만 취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설마 이 정도 열이 나서 사람을 헷갈리게 할 수도 있단 말이야?“은서야, 혹시 그날 밤 내가 너를 아프게 했다고 여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거니? 내가 그렇게 미워? 집을 나갈 만큼?”곽승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평소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감정을 읽을 수 없던 검은 눈동자가 지금은 더없이 부드러웠다.“나도 자제하려고 노력할 만큼 했어. 하지만 그때 당신은 너무나도 유연했고 또 고양이처럼 울부짖었어. 그래서...”곽승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황한 그녀는 한
고은서의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에 곽승재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너, 남편을 죽일 셈이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떻게 열이 나는데도 생각이 이렇게 또렷할 수 있는 거지?’“그래, 맞아. 널 죽이면 내가 네 재산을 상속받아서 부자로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고은서는 짜증을 내며 물컵을 그의 입에 갖다 댔다.“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약이나 삼켜.”고은서의 말투가 너무 강했는지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물을 두어 모금 마셨다.고은서는 물컵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좋아, 이제 가서... 아!”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목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눕혀버린 것이었다.“곽... 읍.”고은서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곽승재가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무언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씁쓸한 약이 그녀의 입안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고은서는 그 정체가 방금 자신이 곽승재에게 먹인 해열제라는 것을 깨달았다.‘곽승재, 이 변태 같은 놈! 약을 삼키는 게 아니라 나한테 다시 먹이려고 하다니!’그녀는 필사적으로 약을 입 밖으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고은서는 이를 꽉 물고 있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양 볼을 잡고 그녀로 하여금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게 했다.곽승재는 약을 고은서의 혀끝까지 밀어 넣었고 그녀의 입안에 씁쓸한 맛이 퍼졌다.“너무 써!”고은서는 견딜 수 없어서 온 힘을 다해 곽승재를 옆으로 밀어냈다.곽승재는 그녀에게 밀려서 옆으로 물러섰고 다시 덤비지 않았다.고은서는 그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하게 약을 뱉어내고 침대 옆에 있는 물로 입을 여러 번 헹궜다.‘변태 같은 놈! 자기 입에 넣었던 약을 다시 내 입에 집어넣다니!’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또 침실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열심히 헹궜다.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사라지고 곽승재도 멀어진 다음
고은서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의 단추가 두 개 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 있는 속옷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고은서는 얼굴이 붉히더니 가슴 쪽을 가리면서 방으로 돌아갔다.‘분명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단추가 풀어지지 않았었는데... 뭐지? 자는 사이에 단추가 풀어지는 경우도 있나?’그녀가 잠옷은 그저 평범한 잠옷이었는데 단추가 저절로 풀릴 리 없었다.설령 곽승재가 풀어놓지 않았다 해도 그가 침대로 안고 가는 사이에 헐렁해진 게 틀림없었다.그런 모습으로 방문을 열었을 생각을 하니 고은서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감쌌다. 창피해서 어디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고은서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후, 화장까지 살짝 하고서야 방문을 조금 열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의사는 진료 도구를 정리하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열은 내렸지만 몸이 여전히 매우 허약한 상태입니다.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약을 복용하는 동안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되고요. 이번에는 다행히 체력이 좋아서 의식이 흐릿하고 졸린 선에서 끝난 거지 다음에는 어떤 반응이 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깜짝 놀랐다.‘그저 열이 난 게 아니라 프랑스 요리 중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 때문에 먹던 약이랑 반응을 일으킨 거야?’고은서는 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곽승재가 열이 세게 나서 혼란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었다.그래도 곽승재에게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미자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곽승재를 보살피라고 특별히 고은서를 보낸 것이었는데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뻔했으니 말이다.그때 의사가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는 의료 상자를 들고 나갔다. 주민기가 그를 배웅해 주었다.“왜 숨어 있어? 나와.”곽승재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는 문을 열고 곽승재 앞에 섰다.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고 얼굴색
곽승재와 고은서가 꽉 안고 있는 모습을 본 주민기는 순간 멍해졌다.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눈치가 빨랐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앗,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의사 선생님께서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예요. 대표님, 의사 선생님 좀 따라가 볼게요!”말을 마친 주민기는 홱 사라져 버렸다.“...”‘이것보다 더 어이없는 변명이 어디 있겠어?’“아직도 손을 놓지 않는 거 보니까 진짜 확인해 보고 싶나 봐?”속으로 불평하던 중, 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곽승재의 목을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의 손이 자기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서둘러 곽승재한테서 손을 떼고 바로 섰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놀라게 하래? 쌀이 다 쏟아질 뻔했잖아.”곽승재는 바닥에 있는 냄비를 보며 더 이상 고은서한테 따지지 않았고 냄비를 집어 들며 물었다.“어떻게 하면 돼? 내가 할게.”곽승재가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는 걸 아는 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쌀을 천천히 으깬 다음에 뜨거운 물을 넣고 끓여. 마지막에 소금과 파를 조금 넣으면 죽이 향긋하고 찰져서 맛있어.”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따라 쌀을 으깨기 시작했다. 지난번 예원 별장에서 면 반죽하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해 보였다.숟가락을 쥔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쌀을 으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손등에는 힘줄이 도드라져 보였으니 말이다.“이 정도면 돼?”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거의 다 됐어. 다 으깨고 나면 죽을 끓여. 나는 마트에 갔다 올게.”쌀을 좀 으깼다고 땀을 흘리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물건 사면서까지 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아프니까 그냥 호텔에 있어”이틀 동안 아팠던 탓에 곽승재는 확실히 힘이 달렸다.“민기 씨랑 같이 가.”조금 전 두 사람이 안고 있는 장면을 주민기가 봤다는
갑자기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고은서에 곽승재의 마음속에 있던 안 좋은 예감이 더욱 강렬해졌다.“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식당 안 가도 돼.”곽승재가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대답했다,“그래.”말을 마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두 개의 서류를 들고 걸어 나왔다.그 서류가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곽승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고은서, 그날 밤에 말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어? 아니면 내가 요 며칠 동안 너무 바쁜 바람에 너를 잘 챙겨주지 못해서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거야?”‘말도 안 되는 소리.’고은서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곽승재 앞에 놓았다.“곽승재, 난 너랑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 화가 난 것도 아니야. 전에 네가 아팠던 것 때문에 일이 쌓여서 제대로 말을 못 꺼냈을 뿐이지.”고은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그날 말했잖아.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나랑 이혼 절차를 밟겠다고 말이야. 양가 부모님들한테도 차근차근 설명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나도 동의해.”“네가 이런 핑계를 대고 질질 끌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앞으로 더 중요한 프로젝트가 생겨서 또 미루게 될까 봐 그래. 그러니까 우선 서류에 사인부터 해놓자는 거야. 그때가 되면 너한테 바쁜 프로젝트가 있든 없든 간에 수속을 밟을 거라서 말이야.”“꼭 이렇게 서둘러야 해?”곽승재가 물었다.‘열흘 전부터 이미 끝났어야 하는 관계인데 내가 뭘 서두른다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귀국하면 나는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너랑 금실 좋은 부부인 척도 하지 않을 거고.”“어쨌든 사인만 하면 되니까 더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야?”곽승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고은서는 마음속에서 점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뭐가 문제길래, 왜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거야?”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우리가 절차를
고은서는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몰로 갔다.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액세서리와 가방이 가득해서 고은서의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고은서는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에 신발과 가방까지 고른 후, 박지연이 좋아하는 스킨케어 제품과 그녀에게 선물할 옷도 두 벌 골랐다.그녀는 쇼핑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두세 시간 동안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큰 쇼핑백을 들고 걸어 나왔다.상점 밖의 거리는 그녀가 금방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처럼 떠들썩하지 않고 조용해 보였다. 길가에는 노숙자들이 가득 모여 이불을 덮고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각종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녀는 여러 노숙자들의 눈길을 끌었다.고은서는 국내 치안에 익숙해진 탓에 갑자기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마음이 불안해졌다.앞길에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본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그때 길가에 있던 한 노숙자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길을 재촉하다가 그와 마주친 고은서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왼쪽 거리로 걸어갔다.얼마의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그 노숙자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발견하였다.그녀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현지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가방이 노숙자에게 붙잡혀 버렸다.“아!”고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방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노숙자의 덩치는 고은서의 2배 정도였기에 그녀의 발길질에 두어 걸음 물러섰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그래도 맞은 바람에 화가 난 듯 노숙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내밀어 고은서를 때리려고 했다.놀라서 뒤로 몇 발짝 물러선 고은서는 경찰에 신고할 틈도 없이 돌아서서 바로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이곳의 거리는 지나치게 넓고 인적도 드물었기에 고은서가 큰소리로 몇 번 도움을 청해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숙자와 고은서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노숙자의 손은 그녀에게 닿을락 말락 했다.땅바닥에 벽돌
“내가 저 사람 때리는 걸 봤다고? 그런데 왜 좀 더 일찍 나타나서 날 도와주지 않았어?” 고은서가 울먹이며 물었다.그녀는 거의 죽을 뻔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할 줄 알고 엄청 놀랐는데...고은서의 질문에 민시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곰처럼 생겼잖아.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렸지.”“...”고은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민시후를 노려봤다.“그렇게 눈을 뜨면 눈알이 빠지겠어.” 민시후는 귀찮다는 듯 그녀를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얼른 일어나. 나 바빠.”고은서가 일어나자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도 삐끗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쪽 발에 체중을 실으며 민시후의 팔을 놓았다. “M국에 어떻게 온 거야?”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도 이렇게 우연히 여기서 나타나다니...순간 민시후의 매력적인 눈동자에 흥미가 스쳤다. “당연히 널 쫓아온 거지.”“뭐?”빵빵!그 순간 앞쪽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몸매가 화려한 여자가 스포츠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것에 지친 듯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민시후는 그 여자에게 손을 흔들며 더 이상 고은서를 놀리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송민아가 제때 회사에 입사했고, 그 때문에 숨 쉴 틈도 없어서 M국으로 도망친 것이라고.고은서는 그제야 민시후가 ‘널 쫓아왔다'고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송민아에게는 아니었다.“민시후, 이러다 민아 씨가 나를 원수로 여기겠어.” 고은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는 민시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게 분명했다.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송민아 정신 상태는 아직 멀쩡하니까 널 죽이진 않을 거야.”고은서는 원래 한 발로만 버티고 있었는데 민시후가 어깨를 두드리자 중심을 잃고 거의 넘어질
마침 경찰이 노숙자를 붙잡아 그들을 향해 끌고 왔다. 노숙자의 머리카락에 피가 엉킨 모습을 보자 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곽승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침착하게 경찰에게 말했다. “변호사가 곧 도착할 겁니다. 모든 일은 그분이 처리할 거예요.” 고은서는 경찰에게 사건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고 주민기도 변호사와 함께 도착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머지 일은 그와 변호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고은서와 곽승재는 차 쪽으로 걸어갔다. 고은서가 발목을 삐끗해 절뚝이며 느리게 걷자 곽승재는 결국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고은서는 이미 큰 충격을 받아 곽승재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고, 그가 그녀를 차에 태우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차 안에서 곽승재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도착하니 의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고은서의 발목을 검사한 후, 단순한 염좌일 뿐 골절이나 다른 문제는 없다고 진단했다. 의사가 떠나고 나서 방 안에는 고은서와 곽승재 둘만 남았다. 고은서는 저녁에 곽승재에게 ‘개자식'이라고 욕을 퍼붓고, 이제 서로 남남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겨 호텔 방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원래 쇼핑을 마치고 혼자 방을 잡으려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발 아직 많이 아파?” 드디어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자기 전에 약만 좀 바르면 될 거야.” 고은서가 대답했다.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발을 잡았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 경계하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그녀의 발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약병을 열었다. 고은서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발을 빼려 했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나 곽승재는 말없이 다시 그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
박지연과 육현석이 나간 후 고은서는 민시후가 계속 마음에 걸려 그의 병실로 갔다.하지만 병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박지연의 말대로 목숨 바쳐 자신을 구한 민시후의 마음이 가식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고은서에게 있어 이건 하나의 부담과도 같았다.그녀는 민시후가 단지 자신을 놀리게 재밌어서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집착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곽승재를 엿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단 한 번도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고은서?”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문밖에 있지?”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내가 밖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의사와 간호사들은 문을 지키는 습관이 없거든.”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그런데 안 들어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민시후가 무언갈 눈치챈 듯 물었다.고은서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병상 옆으로 다가가 되물었다.“분명히 심하게 다쳤으면서 왜 거짓말한 거야?”‘아니지. 그저 스치면서 상한 거라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심하게 다치지 않았으면 병상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민시후의 성격으로 내 병실로 찾아오지 않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았어. 적어도 곽승재보다는 심하지 않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이런 것까지 비기는 거야?’민시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고은서를 보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내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그리 쉽게 죽을 인간이 아니야. 너한테 오랫동안 붙어 다닐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헛소리 좀 그만 쳐!”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알았어. 안 말하면 될 거 아니야.”민시후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먹을 거 가져왔다며. 뭘 가져왔는데?”“이거.”고은서가 손에 있는 사과를 들어 보
곽승재의 차갑고 결연한 표정을 본 백유미는 순간 불안해졌다.‘어느 부분에서 문제라도 생긴 건가? 고은서는 원지훈이 직접 T국으로 데려온 거고 프로젝트도 확실히 존재하는 거여서 내가 T국에 온 것도 아주 마땅한 일일 텐데. 심지어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도 이미 죽었는데 곽승재는 왜 자꾸 이 모든 게 다 내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면 고은서의 말이라면 이젠 굳게 믿는다는 건가?’백유미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있을 때 곽승재는 폰을 꺼내 녹음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T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고은서한테 들켜서는 안 돼. 이번 일까지 망치면 너랑 네 엄마 진짜 감방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다름 아닌 그녀와 원지훈의 대화 내용이었다.백유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등골이 오싹해 나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이건 어디서 난 거야... 누군가 날 모함하려고 하는 거야! 이거 합성한 거야. 승재야, 다시 한번 조사해봐. 난 억울하다고!”백유미가 소리쳤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른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그녀가 T국에 있는 사람과 협상한 내용부터 그녀가 짠 상세한 계획까지 다 녹음되어 있었다.그녀의 섬뜩한 목소리가 병실에서 유난히 잘 들렸다.“똑똑히 들었어? 다신 한 번 더 재생해줄까?”곽승재가 물었다.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진 그녀는 더는 새로운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승재야, 난... 난 그저 은서 씨를 간단하게 겁만 주려고 했어. 진짜 해칠 생각은 없었어.”“온갖 방법으로 은서를 속이면서 T국으로 데려간 것도 모자라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찾아놓고서 그저 겁만 주려고 했다고?”곽승재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승재야,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백유미는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병상에서 일어나 곽승재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내가 거짓말을 했어. 난 지금도 널 사랑하고 있어. 네가 고은서랑 이혼하면 나
고은서는 서로 물러서지 않으며 계속 다투려 하는 두 사람을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두 분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시지 그래요? 저 환자예요.”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그제야 방금전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깨달았다.“지연아,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육현석이 먼저 사과했다.“나 급하게 오느라고 밥도 못 먹었는데 넌 안 배고파? 같이 나가서 밥이라도 먹고 들어올래?”박지연은 갑작스레 바뀐 육현석의 태도에 약간 어색해졌다.“난...”그녀가 거절하려고 할 때 옆에 있던 고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둘이 같이 가서 먹고 와. 나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박지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다른 병실.백유미는 혼자 병상에 누워있었다.그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제일 심한 상처는 가슴 부근에 있는 자상이었는데 수술하면서 여러 바늘을 꿰맸다고 한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병실로 들어왔다.백유미가 눈을 뜨고 확인해보니 곽승재가 휠체어에 앉은 채 차가운 표정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고 허약하고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승재야...”백유미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움직일 때마다 밀려오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백유미는 포기하고 병상에 누운 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재야, 지금 내 죄를 물으러 온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원지훈이 날 죽이려고 할 때 반항하지 말았던 거...”“원지훈이 널 죽이려 했는지 아니면 네가 원지훈을 죽이려 했는지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백유미는 눈이 휘둥그레서 의아해하며 물었다.“승재야,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살기 위해서 실수로 원지훈을 찌른 거야.”“그건 경찰 측에서 알아서 판단하겠지.”곽승재의 얼굴빛이 더 어두워졌다.“T국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 다 네가 꾸민 거잖아. 왜 은
박지연의 물음을 들은 고은서는 그녀를 힐끗 째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물음 바꿔볼게. 깨어났을 때 민시후에 관해 먼저 물어봤잖아. 곽승재는 걱정되지 않았어?”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굳이 피곤하게 걱정할 필요가 있나.’그녀는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박지연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 그냥 민시후랑 곽승재 중에서 누가 더 그쪽 마음에 드는지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죠.”“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미련 남지 않았다면 민시후랑 사귀어 봐도 괜찮지 않아?”박지연이 헤헤거리며 말했다.“안 돼! 민시후랑 사귀면 안 된다고!”박지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실 밖에서 육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내 그가 병실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여긴 어쩐 일이야?”“승재 형이랑 형수님한테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당연히 보러 와야지. 지연아, 넌 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 알려줬으면 같이 왔을 텐데.”“미안, 나도 너무 급해서 미처 생각 못 했어.”비록 박지연이 자신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게 정상이긴 했지만 육현석은 저도 모르게 약간 속상했다.“형수님, 괜찮아요? 크게 다치진 않았죠?”“계속 형수님이라 부를 거면 나가요. 진짜 형수님은 다른 병실에 있으니까.”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런데 고은서 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서먹해 보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두 살 더 많은데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또 너무 오글거리잖아요. 그럼 그냥 말 놓으면서 은서라고 부를까요?”고은서는 형수님만 아니라면 호칭에 관해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그냥 형수님만 아니면 돼요.”‘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엄청 집착했는데 이젠 형수님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진저리치네. 승재 형은 대체 형수님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거야.’“은서야, 승재 형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그러니까 승재 형한테 한
고은서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러 번이고 말했는데 왜 자꾸 끼어들지 못해서 안달이나 하는 건데?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이 백유미라는 걸 믿기는 하는 거야? 원지훈을 교사한 사람도 백유미고 T국에 갑자기 나타난 저 사람들도 다 백유미가 안배한 사람들이야. 백유미는 처음부터 날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고!”고은서는 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비아냥거렸다.“믿을 리가. 백유미는 T국에 프로젝트에 관해 협상하러 온 거고 또 하필 여기에 와서 성폭행을 당했는데 당신이 믿을 리가 없지.”“믿어.”고은서의 말을 듣고 있던 곽승재의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졌다.“내가 어떻게서든 다 조사해낼게.”“곽승재, 진짜 조사하려는 거 맞아? 당신 생명의 은인이잖아.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오면서 백유미가 눈물만 흘리면 마음이 약해지면서 뭘 조사하겠다는 거야?”고은서는 날이 선 말투로 계속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그녀는 곽승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곽승재는 순간 마음이 아파왔다.“은서야, 널 해치려던 사람이 누구든 내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래. 기다릴게. 날 실망시키지만 않았으면 좋겠네.”고은서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대표님, 백유미 씨께서 깨어났습니다.”바로 이때, 그의 부하가 보고하러 왔다.“알겠어.”비웃음으로 가득한 고은서의 눈빛에 곽승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서야, 내가 다 처리하고 다시 설명해줄게.”곽승재가 나간 후 박지연이 병실로 들어왔다.“내가 알아봤는데 어젯밤에 죽은 하국 남성이 원지훈이 맞대. 듣기로는 원지훈이 먼저 백유미를 죽이려고 했는데 백유미가 정당방위를 하면서 도로 원지훈을 죽여버렸대. 그런데 백유미도 크게 다친 모양이야.”박지연은 말하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그런데 왠지 모르게 백유미가 정당방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화풀이할 겸 원지훈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 아무튼 사람은 이미 죽었고 목격자도 없는데 백유미가 뭐라 하면 뭐가 사실이 되는 거
문밖에는 곽승재가 있었다.그는 휠체어에 앉아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민시후처럼 창백한 얼굴에 검은 눈동자에는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후회, 두려움, 흥분이 한꺼번에 뒤섞인 듯한 눈빛에 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순간 두 사람 모두 다쳤다는 박지연의 말이 떠올랐다.‘민시후가 총알에 스친 거면 곽승재가 총에 맞은 건가? 지연이가 얘기하려던 게 이거였을까?’“환영하지 않으니까 내가 있는 곳 공기 더럽히지 마.”민시후는 곽승재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T 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은서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곽승재는 고은서의 행방을 알고 있음에도 민시후에게 알리지 않았다.민시후가 급히 단서를 찾아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곽승재는 이미 현장에 있었다.더욱 민시후를 화나게 했던 것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곽승재는 민시후의 핀잔에 화내지 않고 먹먹한 눈동자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녀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곽승재의 모습에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좀 쉬고 있어. 나중에 다시 올게.”“나중에 언제?”민시후가 약간 서운한 듯 물었다.고은서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은서도 다쳤으니 푹 쉬어야 해. 도움이 필요하면 간병인 붙여줄게.”“난 은서랑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민시후가 곽승재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너는 고은서랑 간병인이 비슷한 모양이지?”곽승재는 민시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입담에서 곽승재는 민시후의 상대가 아니었다.“한 시간 내로 올게.”고은서는 두 사람이 또 싸울까 봐 걱정하며 얼른 답했다.“먹고 싶은 거 있어? 좀 사다 줄까?”민시후는 고은서의 말에 기분이 풀린 듯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네가 가져다주는 거면 뭐든 좋아.”고은서가 병실을 나서자 경호원이 휠체어를 끌며 그녀를 따라왔다.복도에는 박지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서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휴식을 취하기 전 박지연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지쳐 보이는 고은서의 모습에 그녀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다시 깨어나니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고은서는 어지러움이 좀 나아진 것을 느끼고 저녁을 조금 먹은 후 민시후를 보러 가기로 했다.민시후는 병실 안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불은 그의 가슴까지 덮여 있었고 흰 붕대가 살짝 보였다.잘생긴 그의 얼굴에 평소와 같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라지고 창백한 입술이 더해지니 전체적으로 생기가 없어 보였다.그 모습을 본 고은서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의식을 잃기 전 느껴졌던 피 냄새는 민시후의 것이었을까?’고은서의 기척이 컸던 것인지 민시후가 바로 눈을 떴다.“고...”“말하지 마. 몸은 좀 어때?”고은서는 그의 앞에 가서 죄책감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민시후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며 약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아파...”“잠깐만 기다려. 의사 불러올게.”고은서가 급히 나가려 하자 민시후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가지 마. 의사가 와도 소용없어. 내 상처는 신도 못 고치니까 내 옆에 좀 더 있어줘.”‘신도 못 고친다고? 지연이 말로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고은서는 죄책감이 밀려와 미칠 것 같았다.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입을 열었다.“지금은 의술이 발달해서 총상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민시후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고은서.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슬퍼할 거야?”“아니. 민시후, 너 정말 미쳤어? 왜 나 대신 총을 맞아!”고은서가 갑자기 화내며 말했다.“너 목숨이 몇 개라도 돼? 네 가족들이 너 다쳤다는 거 알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 봤어?”잠시 멈칫한 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야?”상처가 심했던 탓에 그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다.고은서는 더 깊은 죄책감에 휩싸였다.“민시후, 난 널 좋아하지 않으니 네 마음은 받아들일
박지연은 고은서의 질문에 놀라고 있었다.‘고은서가 깨어나자마자 민시후에 관해 묻는다고?’박지연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농담을 하는 대신 진지하게 답했다.“민시후는 검사를 받고 있을 거야.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민시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녀는 평생 자책했을 것이다.“얼른 약 먹어. 조금 있다 병실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박지연은 고은서를 침대에 눕히고 약을 먹이며 이전에 계성진이 먹였던 약은 의식이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강한 수면제였고 이미 열 몇 시간 자고 깨난 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의식은 없었어.”“약에 의존성은 없겠지?”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의존성은 없지만 약간의 후유증은 있을 거야. 한동안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박지연이 고은서를 걱정하며 말했다.“그리고 다친 어깨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마른하늘에 닥친 날벼락에 억울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고은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유린당하고 유흥가에 팔려 가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지연아, 우리 지금 어디 있는 거야?”갑자기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T 국 병원이야. 경찰이 사건을 조사 중이라 며칠 동안은 귀국하기 어려울 거야.”아무리 치안이 안 좋은 나라라고 해도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다.“너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부랴부랴 달려왔지. 어제 너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돼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비행기에서 내리면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도 없고 먼저 연락해도 받지 않으니 속이 타들어 갔어. 곽승재한테는 내가 연락한 거야. 너도 연락 안 되고 민시후도 연락이 안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곽승재한테 한 거야. 은서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