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불쾌한 표정과 추궁하는 듯한 말투를 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민 대표를 감싸는 게 왜?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이제 민시후를 좋아하기로 했다고.” 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난번 통화에서 고은서가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돌리겠다고 했었다. 아까 민시후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는 행동도 너무 자연스러웠고 고은서 또한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 그가 그녀에게 손만 대도 마치 성가신 짐승이라도 본 듯이 피하곤 했는데, 민시후에게는 왜 경계하지 않는 걸까? “네가 그렇게 이혼을 서두른 이유가 민시후랑 함께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야?” 곽승재는 얼굴을 찌푸린 채 차갑게 물었다. 그녀의 발을 잡고 있는 손도 힘이 더해졌다. “아야!” 고은서는 급히 발을 빼며 자신의 손으로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분노는 더욱 끓어올랐다. “네가 민시후에게 마음을 돌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널 좋아할 거 같아? 설령 민시후가 널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그 집안은 절대 이혼녀인 널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고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건 내 문제니까 곽 대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곽승재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빨리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게 좋을 거라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야?” 고은서는 그를 일부러 자극했다. 곽승재는 고은서가 다른 남자와 함께할 거라는 생각에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소파에 내리누르고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그의 힘이 너무 강해 고은서는 반항할 틈도 없었다.‘이 개자식, 또 이런 짓이나 하고!’고은서는 화가 나서 그의 혀를 세게 물었다. 분명 피 맛이 입안에 퍼졌는데도 곽승재는 그녀를 놓지 않고 더 강하게 키스하며 그녀의 숨결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탐하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불을 붙였다. 고
백유미의 이름이 나오자 고은서는 분노로 얼굴이 굳었다. “그냥 모두 다 잘못했어!” “어떻게? 구체적으로 말해봐.” 곽승재는 집요하게 물었다. 고은서는 전생에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정신병원에 가게 만든 것도, 사람을 시켜 자신을 고문해 위암까지 걸리게 한 것도, 고씨 집안을 무너뜨리고 외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힌 것도 전부 백유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성아연이었다. 그녀는 백유미에게 매수당했고, 이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성아연과 백유미가 한패야. 내가 조사하라고 했잖아. 넌 조사했어?” 고은서가 차갑게 묻자 곽승재는 잠시 망설였다. “요즘 바빠서 아직 못 했어.” “바쁘다고? 그건 핑계야! 넌 애초에 내 말을 믿지 않았잖아. 네 머릿속엔 내가 백유미를 모함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없지!”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어냈지만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결국 발로 그를 차자, 곽승재는 그녀가 발목을 삔 것을 고려해 마침내 그녀를 풀어주었다. “곽승재, 너는 백유미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항상 백유미를 믿고 날 믿지 않지. 그렇다면 왜 나랑 이렇게 애매하게 굴어? 이혼하면 서로에게 이득이잖아!” 고은서는 그렇게 말하며 홱 돌아서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날 밤을 제외하고, 그 후 며칠 동안 곽승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거실 소파에서 잤다. 이제 서로 마주치지 않고 지내는 듯했다. 곽승재는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음속의 불편함을 억누르고 결국 육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만간 누구 자료 하나 보낼 테니 백유미와 어떤 관계인지 조사해 줘.” 육현석은 기꺼이 승낙했다. “형, 대체 무슨 일이야? 나한테 부탁할 정도라니. 형 휘하에 능력자들이 부족한 거야?” 곽승재는 짧게 대답했다. “그만 물어보고 조사나 해.” “알겠어. 반드시 임무 완수할게!” 육현석은 다시 물었다. “형, 형수님이랑 M국에 갔다고 들었는데
육현석의 말은 듣는 순간부터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문제가 뭔지 알았더라면 굳이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었겠는가? 곽승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육현석은 귀를 비비며 말했다. “형, 지난번 일이 정말 형수님이 저지른 일이라고 믿어?” 곽승재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날의 상황을 다시 설명했다. 약국에 가기 전, 고은서는 백유미 때문에 매우 기분이 나빠 보였다. 약국에서는 그녀가 직접 약을 고르고 계산까지 한 후 갑자기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단팥빵을 먹겠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차에 혼자 남았고 곽승재가 빵을 사러 갔을 때 고은서가 약 봉투를 건드렸다고 했다. “그래서 형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육현석이 물었다. 곽승재는 이 결론을 꺼리며 대답했다. “난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은서랑 관련됐다고 한 적 없어.” 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형, 내가 듣기엔 형은 이미 형수님을 의심하고 있어. 그러니까 형수님이 화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형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기 전 고은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백유미와 관련된 일이면 언제나 백유미를 믿고 나를 믿지 않잖아.” 곽승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고은서가 결백하다는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믿겠지. 하지만 그 약봉투는 고은서 말고는 누구도 손댄 적이 없어. 어떻게 사실을 무시하고 고은서 편만 들 수 있겠어?” “어떻게 형수님밖에 없겠어? 백유미는?” 육현석은 가볍게 반문했다. 곽승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건 고은서도 했던 말이었다. “유미가 거의 쇼크 상태까지 갔는데 정말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백유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고, 왜 형은 형수님을 좀 더 편들어주지 않는 거야?” 육현석은 답답한 듯 말했다. “형수님은 분명히 억울하다고 했잖아. 왜 형은 믿지 않
“자? 우리 얘기 좀 할까?”곽승재의 낮고 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 두 사람은 크게 다툰 상태였다. 고은서는 더 남은 힘도 없는 상태에 곽승재에게 끌려가 한 번 더 그 짓을 해야 할 판이었다.“나 너무 피곤하고 졸려. 말 있으면 내일 해.”고은서는 차가운 음성으로 곽승재를 거절했다.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거절한 순간, 그가 당장 문을 열라고 강요하거나 협박이라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곽승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알겠어. 푹 쉬어.”대화가 끝나자 문밖은 다시 조용해졌다.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침묵에 고은서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곽승재가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됐다, 어차피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다.더 이상 깊게 생각할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버린 고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그렇게 잠이 든 고은서는 다음 날, 날이 밝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어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달린 탓인지 힘을 너무 많이 쓴 다음의 피로감이 몸에 축적되어 있었다.몸이 너무 나른했고, 움직이기도 싫었다.잠시 더 누워 있던 고은서는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짐 정리를 마친 후, 오늘 밤이나 내일 돌아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간단히 외투를 걸치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문을 열고 방을 나선 그녀는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몇 걸음 떼지 않아 반 오픈형으로 되어있던 주방 안에 곽승재가 있는 것이 보였다.아직도 나가지 않은 건가?곽승재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간이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전기밥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죽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곽승재는 숟가락으로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다.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들어온 햇볕은 곽승재의 몸을 비추며 그의 수려한 얼굴 반쪽을 비추고 반쪽 얼굴에
결국, 그 프라이팬이 모든 것을 다 짊어져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곽승재는 또 한 번 헛기침하더니 재촉하듯 말했다.“얼른 먹어, 식기 전에.”고은서는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죽은 그럴싸하니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숟가락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혹시 모를 정체불명의 맛에 두려움이 앞섰던 탓이다.고은서는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묻혔다. 그녀는 곽승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혀를 내밀어 죽을 살짝 핥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한눈을 판 사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너무 뜨거운 것 같아서 달걀부터 먹을게.”그래도 삶은 달걀이면 죽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맛없어봤자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다.하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독 안 탔어!”말을 마친 그는 고은서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만든 죽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으로 넣었다.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고은서는 마음 놓고 껍질을 다 깐 달걀을 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죽을 몇 번 휘젓다가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 보았다.다행히 먹을만했다.물을 조금 많이 넣은 탓에 죽의 걸쭉함이 조금 부족했고, 소금도 생각보다 많이 넣은 것 같긴 했지만 다른 건 다 괜찮은 것 같았다.고은서가 계속 죽에 신경을 쓰고 있던 그때, 곽승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랑 민시후가 서로 아무 감정 없는 사이라는 건 나도 알아, 내 말은 민시후네 집이 재혼녀를 받아줄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어. 널 무시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어젯밤은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건가?왜 갑자기 이런 걸 해명하고 있지?“나랑 민시후 사이가 안 좋은 건 맞아, 하지만 민시후도 정말 쉬운 인간이 아니야.”곽승재는 달걀 껍데기를 까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난 네가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시후랑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은서는 곽승재를 빤히 쳐다보았다.곽승재의 표정은 꽤 진지했고 눈빛에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곽승재는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고은서에게 먼저 자세를 낮춘 적도 없었고 사과의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고은서의 마음속에서는 이유 모를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녀는 자신이 이제 곽승재가 어떤 말을 하든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곽승재가 진심 어린 사죄를 건네며 후회를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서는 여전히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마치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주고 어루만져주길 원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그리고 성인이 다 된 지금에 와서야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들켜버린 듯한 애틋하고도 씁쓸한 감정이었다.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의 동요가 있을지 몰라도 오랜 시간 동안 치유하지 못한 상처는 이미 딱지가 않고 떨어져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아버렸다.“곽승재,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고은서가 물었다.“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곽승재가 대답했다.“난 이 결혼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우린 이미 1년 넘도록 결혼생활을 했고 나는 너한테 익숙해져 버렸어. 양가 가족들도 우리의 결혼생활을 응원해주고 있잖아. 이런 상황이라면 난 굳이 이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물론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얘기해도 좋아. 사랑 감정 같은 건, 우리가 천천히 키워가면 되는 거고.”곽승재는 미래를 얘기하며 앞으로 잘살아 보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곽승재. 이렇게 말해 줘서.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한때 나는 사랑이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었어.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사랑이라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 놓아버리면 그만이었던 거야. 그리고 난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지금 너무 행복하거든. 드디어 나를 되
해성으로 가는 동안 곽승재는 주민기와 함께 일 얘기만 나눴다.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곽승재는 계속 업무 처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은서와 곽승재는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자연스레 자신만의 자유시간을 얻게 된 고은서는 편하게 비행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기내식으로 나온 식사를 마친 그녀는 좌석 등받이를 내려 편히 잠을 청했다.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만난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자 고은서가 잠에서 깼다.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멀미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고은서는 지금껏 비행기를 타며 멀미를 한 적이 없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옆 좌석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눈을 떠보자 곽승재는 그녀가 잠들기 전과 같은 자세로 서류를 들고 있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침에 금방 일어났을 때 느꼈던 피로와 무기력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다시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여기 따뜻한 물 좀 갖다 주세요.”곽승재가 승무원에게 부탁했다.곧이어 승무원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오더니 예의 바르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손님, 여기 따뜻한 물 나왔습니다.”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승무원은 테이블에 컵을 살며시 올려놓았다.“손님, 비행기 탑승 이후로 계속 서류만 보고 계시던데 흔들리는 기내에서 서류만 보시면 눈에도 안 좋거든요. 적당한 휴식도 취하시는 걸 권장드립니다.”승무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초승달 같은 눈매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곽승재에게 물을 건네줄 때는 매끈한 곡선의 몸매도 더욱 부각되었다.고은서는 빠르게 승무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곽승재는 겉모습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남자였고, 그 특유의 냉정하고도 절제된 분위기는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예전에 많은 여자들이 협업을 빌미로 곽승재에게 접근하려 했었다는 얘기를
고은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곽승재가 승무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고개를 돌려 고은서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그는 손을 뻗어 고은서의 목을 끌어안더니 차가운 눈길로 승무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날 꼬시고 싶으면, 먼저 우리 와이프 허락부터 받으시죠.”승무원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비행기 탑승 이후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례하게 해? 그냥 전화번호를 남기려고 했을 뿐인데 뭘 꼬셔…”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기침이 나올 지경으로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팔에 힘을 조금 푼 곽승재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무장님 불러오세요.”곽승재의 말에 승무원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복숭아꽃처럼 발갛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발 사무장님께는 알리지 말아주세요!”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던 승객을 건드렸던 탓일까, 그 소란은 금방 사무장을 불러들였고 상황파악을 마친 사무장은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이 사안을 엄중히 처리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했다.“따뜻한 물 한 잔 더 갖다 주세요.”곽승재는 여전히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사무장은 곧바로 승무원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다시 그들에게 따뜻한 물을 갖고 온 승무원은 두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맛있게 드십시오, 손님.”말을 마친 승무원은 재빨리 그들에게서 거리를 두었다.곽승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승무원이 건네준 따뜻한 물을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고은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쳐다보며 말했다.“난 물 마시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고, 말투 역시 딱딱했다.“몸 안 좋다며. 물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