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석의 말은 듣는 순간부터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문제가 뭔지 알았더라면 굳이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었겠는가? 곽승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육현석은 귀를 비비며 말했다. “형, 지난번 일이 정말 형수님이 저지른 일이라고 믿어?” 곽승재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날의 상황을 다시 설명했다. 약국에 가기 전, 고은서는 백유미 때문에 매우 기분이 나빠 보였다. 약국에서는 그녀가 직접 약을 고르고 계산까지 한 후 갑자기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단팥빵을 먹겠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차에 혼자 남았고 곽승재가 빵을 사러 갔을 때 고은서가 약 봉투를 건드렸다고 했다. “그래서 형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육현석이 물었다. 곽승재는 이 결론을 꺼리며 대답했다. “난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은서랑 관련됐다고 한 적 없어.” 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형, 내가 듣기엔 형은 이미 형수님을 의심하고 있어. 그러니까 형수님이 화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형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기 전 고은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백유미와 관련된 일이면 언제나 백유미를 믿고 나를 믿지 않잖아.” 곽승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고은서가 결백하다는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믿겠지. 하지만 그 약봉투는 고은서 말고는 누구도 손댄 적이 없어. 어떻게 사실을 무시하고 고은서 편만 들 수 있겠어?” “어떻게 형수님밖에 없겠어? 백유미는?” 육현석은 가볍게 반문했다. 곽승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건 고은서도 했던 말이었다. “유미가 거의 쇼크 상태까지 갔는데 정말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백유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고, 왜 형은 형수님을 좀 더 편들어주지 않는 거야?” 육현석은 답답한 듯 말했다. “형수님은 분명히 억울하다고 했잖아. 왜 형은 믿지 않
“자? 우리 얘기 좀 할까?”곽승재의 낮고 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 두 사람은 크게 다툰 상태였다. 고은서는 더 남은 힘도 없는 상태에 곽승재에게 끌려가 한 번 더 그 짓을 해야 할 판이었다.“나 너무 피곤하고 졸려. 말 있으면 내일 해.”고은서는 차가운 음성으로 곽승재를 거절했다.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거절한 순간, 그가 당장 문을 열라고 강요하거나 협박이라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곽승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알겠어. 푹 쉬어.”대화가 끝나자 문밖은 다시 조용해졌다.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침묵에 고은서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곽승재가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됐다, 어차피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다.더 이상 깊게 생각할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버린 고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그렇게 잠이 든 고은서는 다음 날, 날이 밝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어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달린 탓인지 힘을 너무 많이 쓴 다음의 피로감이 몸에 축적되어 있었다.몸이 너무 나른했고, 움직이기도 싫었다.잠시 더 누워 있던 고은서는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짐 정리를 마친 후, 오늘 밤이나 내일 돌아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간단히 외투를 걸치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문을 열고 방을 나선 그녀는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몇 걸음 떼지 않아 반 오픈형으로 되어있던 주방 안에 곽승재가 있는 것이 보였다.아직도 나가지 않은 건가?곽승재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간이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전기밥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죽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곽승재는 숟가락으로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다.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들어온 햇볕은 곽승재의 몸을 비추며 그의 수려한 얼굴 반쪽을 비추고 반쪽 얼굴에
결국, 그 프라이팬이 모든 것을 다 짊어져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곽승재는 또 한 번 헛기침하더니 재촉하듯 말했다.“얼른 먹어, 식기 전에.”고은서는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죽은 그럴싸하니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숟가락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혹시 모를 정체불명의 맛에 두려움이 앞섰던 탓이다.고은서는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묻혔다. 그녀는 곽승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혀를 내밀어 죽을 살짝 핥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한눈을 판 사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너무 뜨거운 것 같아서 달걀부터 먹을게.”그래도 삶은 달걀이면 죽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맛없어봤자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다.하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독 안 탔어!”말을 마친 그는 고은서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만든 죽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으로 넣었다.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고은서는 마음 놓고 껍질을 다 깐 달걀을 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죽을 몇 번 휘젓다가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 보았다.다행히 먹을만했다.물을 조금 많이 넣은 탓에 죽의 걸쭉함이 조금 부족했고, 소금도 생각보다 많이 넣은 것 같긴 했지만 다른 건 다 괜찮은 것 같았다.고은서가 계속 죽에 신경을 쓰고 있던 그때, 곽승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랑 민시후가 서로 아무 감정 없는 사이라는 건 나도 알아, 내 말은 민시후네 집이 재혼녀를 받아줄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어. 널 무시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어젯밤은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건가?왜 갑자기 이런 걸 해명하고 있지?“나랑 민시후 사이가 안 좋은 건 맞아, 하지만 민시후도 정말 쉬운 인간이 아니야.”곽승재는 달걀 껍데기를 까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난 네가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시후랑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은서는 곽승재를 빤히 쳐다보았다.곽승재의 표정은 꽤 진지했고 눈빛에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곽승재는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고은서에게 먼저 자세를 낮춘 적도 없었고 사과의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고은서의 마음속에서는 이유 모를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녀는 자신이 이제 곽승재가 어떤 말을 하든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곽승재가 진심 어린 사죄를 건네며 후회를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서는 여전히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마치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주고 어루만져주길 원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그리고 성인이 다 된 지금에 와서야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들켜버린 듯한 애틋하고도 씁쓸한 감정이었다.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의 동요가 있을지 몰라도 오랜 시간 동안 치유하지 못한 상처는 이미 딱지가 않고 떨어져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아버렸다.“곽승재,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고은서가 물었다.“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곽승재가 대답했다.“난 이 결혼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우린 이미 1년 넘도록 결혼생활을 했고 나는 너한테 익숙해져 버렸어. 양가 가족들도 우리의 결혼생활을 응원해주고 있잖아. 이런 상황이라면 난 굳이 이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물론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얘기해도 좋아. 사랑 감정 같은 건, 우리가 천천히 키워가면 되는 거고.”곽승재는 미래를 얘기하며 앞으로 잘살아 보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곽승재. 이렇게 말해 줘서.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한때 나는 사랑이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었어.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사랑이라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 놓아버리면 그만이었던 거야. 그리고 난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지금 너무 행복하거든. 드디어 나를 되
해성으로 가는 동안 곽승재는 주민기와 함께 일 얘기만 나눴다.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곽승재는 계속 업무 처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은서와 곽승재는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자연스레 자신만의 자유시간을 얻게 된 고은서는 편하게 비행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기내식으로 나온 식사를 마친 그녀는 좌석 등받이를 내려 편히 잠을 청했다.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만난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자 고은서가 잠에서 깼다.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멀미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고은서는 지금껏 비행기를 타며 멀미를 한 적이 없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옆 좌석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눈을 떠보자 곽승재는 그녀가 잠들기 전과 같은 자세로 서류를 들고 있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침에 금방 일어났을 때 느꼈던 피로와 무기력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다시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여기 따뜻한 물 좀 갖다 주세요.”곽승재가 승무원에게 부탁했다.곧이어 승무원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오더니 예의 바르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손님, 여기 따뜻한 물 나왔습니다.”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승무원은 테이블에 컵을 살며시 올려놓았다.“손님, 비행기 탑승 이후로 계속 서류만 보고 계시던데 흔들리는 기내에서 서류만 보시면 눈에도 안 좋거든요. 적당한 휴식도 취하시는 걸 권장드립니다.”승무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초승달 같은 눈매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곽승재에게 물을 건네줄 때는 매끈한 곡선의 몸매도 더욱 부각되었다.고은서는 빠르게 승무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곽승재는 겉모습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남자였고, 그 특유의 냉정하고도 절제된 분위기는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예전에 많은 여자들이 협업을 빌미로 곽승재에게 접근하려 했었다는 얘기를
고은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곽승재가 승무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고개를 돌려 고은서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그는 손을 뻗어 고은서의 목을 끌어안더니 차가운 눈길로 승무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날 꼬시고 싶으면, 먼저 우리 와이프 허락부터 받으시죠.”승무원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비행기 탑승 이후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례하게 해? 그냥 전화번호를 남기려고 했을 뿐인데 뭘 꼬셔…”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기침이 나올 지경으로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팔에 힘을 조금 푼 곽승재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무장님 불러오세요.”곽승재의 말에 승무원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복숭아꽃처럼 발갛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발 사무장님께는 알리지 말아주세요!”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던 승객을 건드렸던 탓일까, 그 소란은 금방 사무장을 불러들였고 상황파악을 마친 사무장은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이 사안을 엄중히 처리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했다.“따뜻한 물 한 잔 더 갖다 주세요.”곽승재는 여전히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사무장은 곧바로 승무원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다시 그들에게 따뜻한 물을 갖고 온 승무원은 두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맛있게 드십시오, 손님.”말을 마친 승무원은 재빨리 그들에게서 거리를 두었다.곽승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승무원이 건네준 따뜻한 물을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고은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쳐다보며 말했다.“난 물 마시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고, 말투 역시 딱딱했다.“몸 안 좋다며. 물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 혼자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곽승재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밖에 운전기사 대기 시켜놨어. 같이 차 타고 가자.”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아직 8시밖에 아 됐어.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치안 안 좋은 나라도 아닌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네가 M국에서 며칠 동안이나 날 돌봐줬는데, 이렇게 귀국하자마자 널 공항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 할머니께서 아시면 분명 난리 치실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할머니한테 혼나는 게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들을 힐끗거리기 시작했고, 주민기는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투명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고은서 역시 이런 곳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 하지만 난 호텔로 갈 거야.”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없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탓에 고은서는 자신의 짐도 챙기지 못했다.“내 캐리어!”고은서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짐을 챙기려 하던 그때였다. 주민기가 곧장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사모님, 짐은 제가 챙기겠습니다.”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에게 투덜거리며 말했다.“나 발 아픈데, 좀 천천히 걸어줄 수 없…”고은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집중되자 고은서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화가 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 좀 내려줘!”하지만 곽승재는 그런 고은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잔뜩 화 난 듯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들쳐 안고 성큼성큼 공항을 빠져나갔다.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이 강제적인 “공주 대접”을 받아들여야 했다.다행히도 두
곽승재의 눈에는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찼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이준은 차를 출발시키며 눈치껏 운전석과 뒷좌석의 가림막을 올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코웃음을 흘렸다.“곽 대표님, 말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언제 당신한테 신경 안 쓴 적이 있기는 해요?”곽승재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인 아내라면, 다른 여자가 남편한테 들이대로 있는데 아무 반응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친구였어도 곤란할까 봐 어떻게든 도와주겠어!”아, 역시 그 일 때문에 기분이 계속 안 좋았던 거구나.“누가 너한테 들이대는 게 싫으면 그냥 무시하고 쫓아내면 될 거 아니야!”고은서가 대답했다.“근데 넌 쫓아내긴커녕 오히려 계속 대답해줬잖아. 그러니까 그 여자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 네가 먼저 그렇게 여지를 줘놓고 나한테 화풀이는 왜 하는 건데?”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그 눈빛에 고은서도 지지 않고 곽승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곽승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을 감았다.고은서도 더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그 후로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은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웠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곽승재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할머니께서 오늘 오후에 나한테 문자를 보내셨어. 내일 우리 본가로 오라고.”고은서는 M국에 있던 때에도 할머니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계속 그녀에게 귀국하는 대로 집에 들르라는 말을 하곤 했다.출가한 지 열흘이나 지났으니 할머니가 자신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일단 오늘 푹 자고 내일 바로 갈게.”곽승재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급히 차에서 내리려는 고
여시은은 흰색 운동복을 벗고 귀여운 스타일의 치마를 입고 있었고 덕분에 한층 더 상큼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곽승재를 본 여시은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곽 대표님, 은서 씨 보러 오신 건가요?”“은서 씨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다니! 오후에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에...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으셨을 텐데요?”곽승재는 여시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돌아갈 때 내가 태워 줄까?”“괜찮아.”고은서가 정중히 거절하며 대답했다.“고객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 그럼 이만.”곽승재는 계속 시간을 확인하는 고은서를 보며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가.”곽승재가 다정하게 말했다.그의 다정함에 고은서는 약간 어색함을 느끼며 그를 무시한 채 여시은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탈의실로 향했다.곽승재의 시선이 여전히 고은서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는 걸 발견하고 여시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곽 대표님, 이렇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시니 은서 씨도 언젠가는 감동할 거예요.”곽승재는 말없이 조용히 있었다. 사실, 고은서가 예전처럼 그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아직 감동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여시은이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아버지께 두 가문의 협력 문제를 해결하자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저를 놀리시면서 ‘너랑 곽씨 가문이 무슨 관계가 있냐? 왜 그렇게 급하게 도와주려 하느냐?’고 하셨어요.”여시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아버지는 또 곽씨 가문이 해성에서나 국내에서나 저희 집안보다 실력이 부족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제가 이런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곽 대표님...”여시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급하게 핸드폰을 열었다.“은서야, 무슨 일이야?”상대방의 말에 곽승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알았어. 기다릴게.”그 뒤, 곽승재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여시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죄송해요. 방금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
고은서는 이상하다고 느꼈다.‘건장한 중년 남자가 골프 같은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다칠 수 있을까?’사람들에게 물어본 후, 고은서는 남자가 탄 골프카트에 문제가 생겨 운전 중 갑자기 밑에 있는 인공 호수로 돌진했다고 알게 되었다.중년 남자는 차가 부딪치는 충격으로 머리와 다리가 꽤 심하게 다친 것으로 보였다.유명하고 오래된 골프장이라 이런 사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하며 골프장의 안전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은서는 중년 남자의 부상에 대해 계속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히 무엇이 이상한지 꼬집을 수 없었다.직원들은 현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고 고은서는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고객들에게 저녁을 제안했다.고객은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고 고은서를 따라 골프카트를 타고 잔디밭을 떠나 휴게실로 돌아갔다.고은서가 휴대폰을 꺼내자 마침 게임 회사 대표가 전화를 걸어왔다.그녀는 직원에게 고객을 남자 탈의실로 안내하라고 눈짓하고 송민아와 다른 직원들은 여자 탈의실로 갔다.고은서는 전화를 받자 게임 회사에서는 고은서와 유일 투자은행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협력하고 싶다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고은서는 상대방에게 게임 프로젝트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와 투자 예상 금액 등을 검토한 후 나중에 세부 사항을 논의하자고 말했다.상대방은 기쁜 마음으로 최대한 빨리 보고서를 완성하겠다고 약속했다.“은서야.”전화를 마친 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곽승재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정장과 넥타이를 잘 갖춰 입고 마치 중요한 자리를 마친 듯한 모습이었다.“괜찮아?”곽승재가 급하게 고은서를 살폈고 그녀는 의아해하며 말했다.“괜찮아. 왜 그렇게 물어?”곽승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골프카가 고장 나서 다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혹시 다친 건 아닌지 걱정했어.”고은서는 휴대
고은서는 옅게 미소 지으며 여시은과 더 깊이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 여재훈을 데려와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여재훈이 참석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유일 투자은행의 실력을 다시금 평가하게 되었고 개업식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이제 몇 개의 프로젝트만 더 따낸다면 유일 투자은행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터였다.여시은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친구잖아요.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당연히 도와야죠! 아빠도 마침 시간 되길래 같이 가자고 했어요.”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시은의 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그녀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했다.“정말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며칠 더 쉬게 한 후에 제가 데리러 갈게요.”통화를 마친 여시은은 먼저 고은서에게 쿠아가 다쳤다는 사실을 설명했다.“며칠 전 쿠아가 위층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앞다리가 골절되고 이빨도 하나 부러졌어요. 방금 수의사가 추가 검진을 마치고 다친 다리도 붕대로 잘 감싸 놓았다고 연락하셨어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쿠아가 다쳤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었다.사진 속 쿠아는 대리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입 주변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엉망이 된 털, 몸을 웅크린 앞발, 반쯤 감긴 눈에는 공포와 경계심이 가득 차 있었다.고은서는 사진만 봐도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은서 씨 개업식 날 저녁에 떨어졌어요. 제가 그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르실 거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다행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여시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쿠아가 그렇게 말썽꾸러기였어요?”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녀도 쿠아를 여러 번 안아봤지만 쿠아는 겁이 많고 심지어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그런 녀석이 활발하게 뛰어다니다가 위층에서 떨어졌다고? 고양이들은 유연성이 좋아서 웬만해선 크게 다칠 일이 없을 텐데...’여시은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죠. 미리 케이지에 넣어놔
여재훈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중년 남자는 다시 한번 감탄하며 말했다.“특히 이 눈썹과 눈매. 마치 똑같은 틀에서 찍어낸 것 같네.”고은서는 여재훈의 날카로운 눈매를 바라보았다.그는 이미 중년이 되었지만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이목구비에서 강한 기품이 느껴졌다. 젊었을 때는 분명 완벽한 미남이었을 것이다.자신도 외모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두 사람을 부녀로 착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은서가 당황해하며 해명하려던 찰나 앞쪽에서 되돌아오는 여시은이 보였다.아마도 중년 남자의 말을 들었는지 여시은의 얼굴이 잠깐 굳어진 듯했다.“장 대표, 내 딸은 저쪽에 있네.”여재훈이 여시은을 바라보며 손짓했다.여시은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늘 그렇듯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아빠!”여재훈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개했다.“전에 말한 적 있지? 한라 그룹 장 대표야. 조금 늦게 왔어.”여시은이 달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장우현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아하! 여기가 우리 조카였네. 내가 착각했어. 우리 조카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네. 분위기만 봐도 명문가 아가씨라는 게 티 나네.”여시은도 웃으며 말했다.“제가 엄마를 더 닮았어요. 아저씨는 전에 저를 만난 적이 없으니 착각하실 만도 하죠.”그러고는 다정하게 고은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여기는 제 친구예요. 은서 씨는 능력 있는 친구예요. 직접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아저씨도 관련된 업무 있으시면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장우현이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그럼, 그럼. 조카의 친구인데 당연히 잘 챙겨야지.”그렇게 답한 장우현은 실수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여시은을 한참 동안 칭찬했다.“아저씨, 아빠랑 가서 라운딩하세요. 아버님도 저쪽에 계세요.”여시은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여재훈을 향해 말했다.“아빠, 저는 은서 씨랑 얘기 좀 나눌 테니까 아빠는 가서 아버님이랑 있어 주세요.”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서가 먼저 투자의사를 비추자 상대방은 당연히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동시에 몇 가지 의문도 품고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서 다음 단계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명운 주류의 상장 일정이 확정되고 판매 상황도 안정적이었다.상장만 하면 도아름의 가치는 더욱 상승할 것이 분명했다.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도아름에게 아첨하려고 했고 그녀가 유일 투자은행에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교육 관련 프로젝트를 소개해 주었다.교육 관련 프로젝트는 상당히 성숙한 분야 이를 추진하려는 회사들도 많았기에 좋은 프로젝트로 평가받았다.고은서는 도아름에게 연락처를 받은 후 대표와 골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후가 되어 고은서는 송민아와 전문 투자 분석가와 함께 해성에 있는 유명한 골프장으로 향했다.만나자마자 양측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형식적인 대화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협력을 요청했었는지 상대방은 고은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차가운 태도를 보였고 그들이 새로 시작한 회사라는 사실을 알자 협력 의사가 전혀 없는 듯해 보였다.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상대방이 골프를 좋아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비즈니스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고은서도 골프를 할 줄 알았지만 오랜만이라 약간 서툴렀다.송민아는 자진해서 골프를 잘한다며 몇 게임 함께 치자고 제안했다.상대방도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열고 함께 골프 코스로 향했다.“우와, 내가 이겼어!”그때 멀리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역시나 여시은이 있었다.그녀는 흰색 골프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기뻐하며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다.“은서 씨!”여시은도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여시은이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 여재훈을 데리고 왔다는 생각에 고은서는 감사 인사를 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송민아와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시은에게 다가갔다.고은서가
고은서는 잠시 생각한 후 거절했다.“고맙지만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돌볼 시간이 없을 것 같네.”곽승재가 차분히 답했다.“그럼 아주머니가 계속 여기 남아서 돌봐주면 되겠네.”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좋아한다고 해서 꼭 소유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가끔 보는 걸로 만족할게.”곽승재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이미숙이 차를 가져와 고은서와 곽승재에게 각각 한 잔씩 건넸다.고은서는 작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이미숙에게 말했다.“며칠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 나았으니 짐 정리하셔서 승재랑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셔도 돼요.”그 말을 들은 이미숙이 급히 말했다.“사모님,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예원 별장에는 이미 가정부가 많이 있어서 제가 없어도 괜찮아요. 예전에도 말씀하셨잖아요. 같이 나와서 돌봐달라고. 저 여기 남아도 괜찮을까요?”고은서는 예원 별장을 나오기 전 이미숙을 설득한 적이 있었다.그녀는 신중하고 음식도 잘하고 나쁜 습관도 없었다.하지만 이미숙은 그녀가 곽승재를 사랑한 과거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 집에 남긴다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고 어쩌면 그녀의 행방을 곽승재에게 이를지도 몰랐다.“네 일정 알기는 쉬워.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알아낼 방법은 많아.”고은서의 생각을 눈치챈 곽승재가 담담히 말했다.“잘 생각해 봐. 아주머니를 남기고 싶으면 앞으로 네가 월급을 주면 돼. 주 비서에게 계약 해지 하라고 통보할게.”곽승재는 공사를 구분해서 말했다.“사모님, 사모님과 지연 아가씨 두 분 모두 출근해야 하잖아요. 스스로 돌보기도 어려우니 제가 남으면 두 분 잘 도와드릴 수 있어요.”이미숙의 말에 고은서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지금까지 밥은 항상 박지연이 하고 있어 그녀도 부담스러운 참이었다.적당한 가정부를 찾고 싶었던 차에 이미숙이 자발적으로 남고 싶다고 하니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아주머니가 수고해 주세요.”“감사합니다. 사모님!”이미숙은 기뻐
곽승재가 태연히 답했다.“목적지가 같은 데 왜 같이 안 가? 너랑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잖아.”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결국 운전대는 곽승재의 손으로 넘어갔다.그가 내세운 이유는 고은서가 하루 종일 피곤하게 돌아다녔으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운전하는 건 피로 운전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다.차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주인혁의 연락을 받았다.주인혁이 명운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나서 두 사람의 연락은 줄어들었다.주인혁의 매니저가 좋은 배역을 따내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전생에서 주인혁은 가요계에서만 발전하고 영화계거나 드라마계에는 들어가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왜 마음을 바꿨는지는 몰라도 고은서는 그를 응원했다.“인혁 씨, 촬영은 다 끝났어요?”고은서가 물었다.“아니요. 아직 촬영 중이에요.”주인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부드러웠다.“누나, 오늘 회사 개업했다면서요? 죄송해요. 이제야 소식을 들어서 축하 화환도 보내지 못했네요.”고은서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괜찮아요. 촬영이 중요하죠.”“며칠 뒤에 해성에 돌아가는데 밥이라도 한 끼 살게요.”고은서가 장난스럽게 답했다.“팬도 많은 가요계 왕자인데 함부로 밥을 어떻게 먹어요. 혹시나 팬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히는 날에는 팬들이 저를 괴롭힐지도 몰라요.”“누나, 놀리지 마세요.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도 직업일 뿐이에요. 사생활까지 다 빼앗길 순 없죠.”주인혁은 마음이 급했다.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농담이에요. 촬영 잘하고 해성으로 오면 연락해요.”“네.”주인혁은 전화를 끊기 아쉬운 듯 다시 말했다.“누나, 바빠도 몸 잘 챙기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요.”“내가 누나인데 그런 건 동생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고은서가 장난스럽게 답했다.“걱정하지 마요. 신경 쓸게요.”주인혁이 잠시 멈칫하여 말했다.“누나, 지금은 제가 크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그래요. 인혁 씨도 몸 잘 챙겨요.”전화를
곽승재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속에 있는 실망감을 감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널 돕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고은서는 갑자기 짜증 내며 답했다.“곽승재, 정말 이럴 필요 없어. 난 당신한테 감정이 식었어.”곽승재는 잠시 침묵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알아. 네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말했잖아. 네 결정에도 간섭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를 좋아하고 널 위해 움직이는 건 내 선택이고 내 권리야. 그걸 네가 막을 수는 없어.”고은서는 말로 다 하지 못할 느낌을 받았다.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곽승재는 근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직원들은 음식을 보고 고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대표님 정말 통이 크시네.”직원들은 모두 큰 책상에 둘러 앉아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곽승재도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앉았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곽승재를 알고 있었고 고은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고은서 옆자리를 그에게 양보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많이 빠졌더라.”고은서가 그를 경고하듯이 바라보자 곽승재는 더 이상 음식을 집지 않고 대신 고은서에게 물과 휴지를 건넸다.“대표님, 곽 대표님 정말 다정하시네요.”한 직원이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정말 너무 보기 좋으세요. 저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네요.”곽승재의 외모도 자신감 있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렵게 했다.하지만 그런 사람이 고은서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은서가 말한 여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보는 사람마다 응원하다가는 큰코다칠 거예요.”“몰라요. 너무 보기 좋은 걸 어떡해요! 곽 대표님, 힘내세요! 저희가 열심히 응원해 드릴게요.”곽승재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노력할게요.”“와!”곽승재의 대답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고은서의 반응을 기대했다.“다들 그만 떠들고 밥이나 먹어요.”고은서는 직원들의 호들갑을
고은서가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곽승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러나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처리하지 못한 메시지가 담긴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고된 일정을 나타내듯 미간은 찌푸려지고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고은서는 육현석에게서 곽승재가 제인 제약 프로젝트로 인해 주주들의 압박을 받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GS 그룹 다음 분기 실적의 상승을 약속했다고 들었다.그로 인해 최근 거의 매일 같이 야근하고 있다고 했다.“은서야, 볼일은 다 끝났어?”고은서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곽승재가 눈을 떴다.시선이 마주치자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에 또렷한 눈이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낮고 유혹적인 톤이 섞여 있었다.고은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왜 아직 안 갔어? 할 말이라도 있어?”“저녁 안 먹었지? 옆에 가서 뭐라도 좀 먹을래?”곽승재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고은서도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밖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괜찮아. 배 안 고파.”하지만 곽승재는 굽히지 않았다.“그럼 음식 좀 배달시킬게.”곽승재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을 많이 보내라고 지시했다.“직원들도 아직 저녁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다 같이 먹자.”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이미 주문된 음식이었으므로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얼마야? 송금해 줄게.”곽승재가 깊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나랑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나눌 건 나눠야지. 우리가 무슨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네게 빚질 수는 없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목소리에서 불쾌함과 짜증을 느꼈다.하지만 곽승재는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게 좋은 신호라 생각했다.그는 고은서가 그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정도 불만을 가지는 것이 더 나았다고 느꼈다.하여 곽승재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현금으로 줘. 지난번에 준 치료비랑 합쳐서 적금하면 되겠다.”고은서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