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몰로 갔다.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액세서리와 가방이 가득해서 고은서의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고은서는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에 신발과 가방까지 고른 후, 박지연이 좋아하는 스킨케어 제품과 그녀에게 선물할 옷도 두 벌 골랐다.그녀는 쇼핑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두세 시간 동안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큰 쇼핑백을 들고 걸어 나왔다.상점 밖의 거리는 그녀가 금방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처럼 떠들썩하지 않고 조용해 보였다. 길가에는 노숙자들이 가득 모여 이불을 덮고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각종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녀는 여러 노숙자들의 눈길을 끌었다.고은서는 국내 치안에 익숙해진 탓에 갑자기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마음이 불안해졌다.앞길에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본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그때 길가에 있던 한 노숙자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길을 재촉하다가 그와 마주친 고은서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왼쪽 거리로 걸어갔다.얼마의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그 노숙자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발견하였다.그녀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현지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가방이 노숙자에게 붙잡혀 버렸다.“아!”고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방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노숙자의 덩치는 고은서의 2배 정도였기에 그녀의 발길질에 두어 걸음 물러섰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그래도 맞은 바람에 화가 난 듯 노숙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내밀어 고은서를 때리려고 했다.놀라서 뒤로 몇 발짝 물러선 고은서는 경찰에 신고할 틈도 없이 돌아서서 바로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이곳의 거리는 지나치게 넓고 인적도 드물었기에 고은서가 큰소리로 몇 번 도움을 청해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숙자와 고은서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노숙자의 손은 그녀에게 닿을락 말락 했다.땅바닥에 벽돌
“내가 저 사람 때리는 걸 봤다고? 그런데 왜 좀 더 일찍 나타나서 날 도와주지 않았어?” 고은서가 울먹이며 물었다.그녀는 거의 죽을 뻔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할 줄 알고 엄청 놀랐는데...고은서의 질문에 민시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곰처럼 생겼잖아.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렸지.”“...”고은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민시후를 노려봤다.“그렇게 눈을 뜨면 눈알이 빠지겠어.” 민시후는 귀찮다는 듯 그녀를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얼른 일어나. 나 바빠.”고은서가 일어나자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도 삐끗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쪽 발에 체중을 실으며 민시후의 팔을 놓았다. “M국에 어떻게 온 거야?”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도 이렇게 우연히 여기서 나타나다니...순간 민시후의 매력적인 눈동자에 흥미가 스쳤다. “당연히 널 쫓아온 거지.”“뭐?”빵빵!그 순간 앞쪽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몸매가 화려한 여자가 스포츠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것에 지친 듯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민시후는 그 여자에게 손을 흔들며 더 이상 고은서를 놀리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송민아가 제때 회사에 입사했고, 그 때문에 숨 쉴 틈도 없어서 M국으로 도망친 것이라고.고은서는 그제야 민시후가 ‘널 쫓아왔다'고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송민아에게는 아니었다.“민시후, 이러다 민아 씨가 나를 원수로 여기겠어.” 고은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는 민시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게 분명했다.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송민아 정신 상태는 아직 멀쩡하니까 널 죽이진 않을 거야.”고은서는 원래 한 발로만 버티고 있었는데 민시후가 어깨를 두드리자 중심을 잃고 거의 넘어질
마침 경찰이 노숙자를 붙잡아 그들을 향해 끌고 왔다. 노숙자의 머리카락에 피가 엉킨 모습을 보자 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곽승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침착하게 경찰에게 말했다. “변호사가 곧 도착할 겁니다. 모든 일은 그분이 처리할 거예요.” 고은서는 경찰에게 사건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고 주민기도 변호사와 함께 도착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머지 일은 그와 변호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고은서와 곽승재는 차 쪽으로 걸어갔다. 고은서가 발목을 삐끗해 절뚝이며 느리게 걷자 곽승재는 결국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고은서는 이미 큰 충격을 받아 곽승재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고, 그가 그녀를 차에 태우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차 안에서 곽승재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도착하니 의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고은서의 발목을 검사한 후, 단순한 염좌일 뿐 골절이나 다른 문제는 없다고 진단했다. 의사가 떠나고 나서 방 안에는 고은서와 곽승재 둘만 남았다. 고은서는 저녁에 곽승재에게 ‘개자식'이라고 욕을 퍼붓고, 이제 서로 남남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겨 호텔 방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원래 쇼핑을 마치고 혼자 방을 잡으려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발 아직 많이 아파?” 드디어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자기 전에 약만 좀 바르면 될 거야.” 고은서가 대답했다.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발을 잡았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 경계하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그녀의 발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약병을 열었다. 고은서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발을 빼려 했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나 곽승재는 말없이 다시 그
곽승재의 불쾌한 표정과 추궁하는 듯한 말투를 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민 대표를 감싸는 게 왜?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이제 민시후를 좋아하기로 했다고.” 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난번 통화에서 고은서가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돌리겠다고 했었다. 아까 민시후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는 행동도 너무 자연스러웠고 고은서 또한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 그가 그녀에게 손만 대도 마치 성가신 짐승이라도 본 듯이 피하곤 했는데, 민시후에게는 왜 경계하지 않는 걸까? “네가 그렇게 이혼을 서두른 이유가 민시후랑 함께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야?” 곽승재는 얼굴을 찌푸린 채 차갑게 물었다. 그녀의 발을 잡고 있는 손도 힘이 더해졌다. “아야!” 고은서는 급히 발을 빼며 자신의 손으로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분노는 더욱 끓어올랐다. “네가 민시후에게 마음을 돌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널 좋아할 거 같아? 설령 민시후가 널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그 집안은 절대 이혼녀인 널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고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건 내 문제니까 곽 대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곽승재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빨리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게 좋을 거라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야?” 고은서는 그를 일부러 자극했다. 곽승재는 고은서가 다른 남자와 함께할 거라는 생각에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소파에 내리누르고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그의 힘이 너무 강해 고은서는 반항할 틈도 없었다.‘이 개자식, 또 이런 짓이나 하고!’고은서는 화가 나서 그의 혀를 세게 물었다. 분명 피 맛이 입안에 퍼졌는데도 곽승재는 그녀를 놓지 않고 더 강하게 키스하며 그녀의 숨결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탐하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불을 붙였다. 고
백유미의 이름이 나오자 고은서는 분노로 얼굴이 굳었다. “그냥 모두 다 잘못했어!” “어떻게? 구체적으로 말해봐.” 곽승재는 집요하게 물었다. 고은서는 전생에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정신병원에 가게 만든 것도, 사람을 시켜 자신을 고문해 위암까지 걸리게 한 것도, 고씨 집안을 무너뜨리고 외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힌 것도 전부 백유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성아연이었다. 그녀는 백유미에게 매수당했고, 이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성아연과 백유미가 한패야. 내가 조사하라고 했잖아. 넌 조사했어?” 고은서가 차갑게 묻자 곽승재는 잠시 망설였다. “요즘 바빠서 아직 못 했어.” “바쁘다고? 그건 핑계야! 넌 애초에 내 말을 믿지 않았잖아. 네 머릿속엔 내가 백유미를 모함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없지!”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어냈지만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결국 발로 그를 차자, 곽승재는 그녀가 발목을 삔 것을 고려해 마침내 그녀를 풀어주었다. “곽승재, 너는 백유미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항상 백유미를 믿고 날 믿지 않지. 그렇다면 왜 나랑 이렇게 애매하게 굴어? 이혼하면 서로에게 이득이잖아!” 고은서는 그렇게 말하며 홱 돌아서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날 밤을 제외하고, 그 후 며칠 동안 곽승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거실 소파에서 잤다. 이제 서로 마주치지 않고 지내는 듯했다. 곽승재는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음속의 불편함을 억누르고 결국 육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만간 누구 자료 하나 보낼 테니 백유미와 어떤 관계인지 조사해 줘.” 육현석은 기꺼이 승낙했다. “형, 대체 무슨 일이야? 나한테 부탁할 정도라니. 형 휘하에 능력자들이 부족한 거야?” 곽승재는 짧게 대답했다. “그만 물어보고 조사나 해.” “알겠어. 반드시 임무 완수할게!” 육현석은 다시 물었다. “형, 형수님이랑 M국에 갔다고 들었는데
육현석의 말은 듣는 순간부터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문제가 뭔지 알았더라면 굳이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었겠는가? 곽승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육현석은 귀를 비비며 말했다. “형, 지난번 일이 정말 형수님이 저지른 일이라고 믿어?” 곽승재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날의 상황을 다시 설명했다. 약국에 가기 전, 고은서는 백유미 때문에 매우 기분이 나빠 보였다. 약국에서는 그녀가 직접 약을 고르고 계산까지 한 후 갑자기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단팥빵을 먹겠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차에 혼자 남았고 곽승재가 빵을 사러 갔을 때 고은서가 약 봉투를 건드렸다고 했다. “그래서 형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육현석이 물었다. 곽승재는 이 결론을 꺼리며 대답했다. “난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은서랑 관련됐다고 한 적 없어.” 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형, 내가 듣기엔 형은 이미 형수님을 의심하고 있어. 그러니까 형수님이 화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형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기 전 고은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백유미와 관련된 일이면 언제나 백유미를 믿고 나를 믿지 않잖아.” 곽승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고은서가 결백하다는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믿겠지. 하지만 그 약봉투는 고은서 말고는 누구도 손댄 적이 없어. 어떻게 사실을 무시하고 고은서 편만 들 수 있겠어?” “어떻게 형수님밖에 없겠어? 백유미는?” 육현석은 가볍게 반문했다. 곽승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건 고은서도 했던 말이었다. “유미가 거의 쇼크 상태까지 갔는데 정말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백유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고, 왜 형은 형수님을 좀 더 편들어주지 않는 거야?” 육현석은 답답한 듯 말했다. “형수님은 분명히 억울하다고 했잖아. 왜 형은 믿지 않
“자? 우리 얘기 좀 할까?”곽승재의 낮고 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 두 사람은 크게 다툰 상태였다. 고은서는 더 남은 힘도 없는 상태에 곽승재에게 끌려가 한 번 더 그 짓을 해야 할 판이었다.“나 너무 피곤하고 졸려. 말 있으면 내일 해.”고은서는 차가운 음성으로 곽승재를 거절했다.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거절한 순간, 그가 당장 문을 열라고 강요하거나 협박이라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곽승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알겠어. 푹 쉬어.”대화가 끝나자 문밖은 다시 조용해졌다.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침묵에 고은서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곽승재가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됐다, 어차피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다.더 이상 깊게 생각할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버린 고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그렇게 잠이 든 고은서는 다음 날, 날이 밝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어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달린 탓인지 힘을 너무 많이 쓴 다음의 피로감이 몸에 축적되어 있었다.몸이 너무 나른했고, 움직이기도 싫었다.잠시 더 누워 있던 고은서는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짐 정리를 마친 후, 오늘 밤이나 내일 돌아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간단히 외투를 걸치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문을 열고 방을 나선 그녀는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몇 걸음 떼지 않아 반 오픈형으로 되어있던 주방 안에 곽승재가 있는 것이 보였다.아직도 나가지 않은 건가?곽승재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간이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전기밥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죽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곽승재는 숟가락으로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다.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들어온 햇볕은 곽승재의 몸을 비추며 그의 수려한 얼굴 반쪽을 비추고 반쪽 얼굴에
결국, 그 프라이팬이 모든 것을 다 짊어져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곽승재는 또 한 번 헛기침하더니 재촉하듯 말했다.“얼른 먹어, 식기 전에.”고은서는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죽은 그럴싸하니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숟가락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혹시 모를 정체불명의 맛에 두려움이 앞섰던 탓이다.고은서는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묻혔다. 그녀는 곽승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혀를 내밀어 죽을 살짝 핥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한눈을 판 사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너무 뜨거운 것 같아서 달걀부터 먹을게.”그래도 삶은 달걀이면 죽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맛없어봤자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다.하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독 안 탔어!”말을 마친 그는 고은서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만든 죽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으로 넣었다.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고은서는 마음 놓고 껍질을 다 깐 달걀을 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죽을 몇 번 휘젓다가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 보았다.다행히 먹을만했다.물을 조금 많이 넣은 탓에 죽의 걸쭉함이 조금 부족했고, 소금도 생각보다 많이 넣은 것 같긴 했지만 다른 건 다 괜찮은 것 같았다.고은서가 계속 죽에 신경을 쓰고 있던 그때, 곽승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랑 민시후가 서로 아무 감정 없는 사이라는 건 나도 알아, 내 말은 민시후네 집이 재혼녀를 받아줄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어. 널 무시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어젯밤은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건가?왜 갑자기 이런 걸 해명하고 있지?“나랑 민시후 사이가 안 좋은 건 맞아, 하지만 민시후도 정말 쉬운 인간이 아니야.”곽승재는 달걀 껍데기를 까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난 네가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시후랑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은서가 계속해서 뒤를 보고 있자 민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매번 여시은이 나타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고은서가 민시후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겠냐고 말하다 곧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처음 여시은을 만난 건 고양이 쿠아를 구할 때였다. 그 후 서운에서 여시은의 방에서 불이 났고, 이사 파티에서는 민시후가 함정에 빠졌다.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페인트가 뿌려졌고 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곽현수와 골프를 치던 장우현도 다쳤었다.모든 사건이 여시은이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면 여시은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은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을 만나러 간다며?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면 돼.”민시후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깟 고객 때문에 다친 너를 그냥 두고 가는 사람 같아 보여?”고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왜 혼자 이런 곳에 왔어? 비서도 기사도 없이?”“새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야. 그 회사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거든.”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운전기사 부를 시간이 없었고 송민아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빠서 이번엔 그냥 혼자 왔어.”민시후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다만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무언가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의 요청대로 민시후는 그녀를 근처의 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동네 병원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진료도 비교적 간편했다.다행히 고은서의 팔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cm 정도 되는 길이의 상처였고 지금은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주변이 이미 검붉게 부어 있어 보기에 꽤 충격적이었다.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 파상풍 예방주사도 맞혔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시은 씨, 전 괜찮아요.”고은서는 팔이 조금 아팠지만 상처를 보니 긁혔을 뿐 살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약국에 가서 씻고 약만 바르면 돼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여시은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혹시라도 감염되면 큰일이에요! 제 기사님이 앞에 있어요. 그분이 병원에 데려다 줄 거예요. 저가 대신 여기서 경찰을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고은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자기 사를 부르러 갔다.“은서 씨?”도로 옆에서 깜짝 놀란 듯 급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캐주얼 슈트를 입고 차에서 뛰어 내려오는 민시후의 모습이 보였다.개업식 때 민시후가 고은서를 도와 성동욱 일을 처리해 준 후, 그녀와는 거의 연락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두 번 전화를 걸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왔으며 민시후가 최근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살도 빠졌다는 얘기를 했었다.눈앞에서 다가오는 민시후를 보고 고은서는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왜 여기에 있어? 손은 왜 그래?”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물었다.“별거 아니 야.”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숙자들과 싸우다 철판에 긁혔어. 다행히 살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 같아. 시후 씨는 어떻게 여기 있어?”“고객과 약속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야!”그때 여시은의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시후 씨가 계시니 저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 빨리 은서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시은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민시후가 물었다.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여시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의 가정부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민시후는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차가워졌다.여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여기 유명한 동물
게임 회사의 작업실은 다소 오래된 작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단지에는 경비나 순찰을 하는 경비원도 없었다.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해 꽤 외진 곳이었다.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고은서는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남자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두 남자는 하나는 마르고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까무잡잡했다. 그들은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짐 꾸러미에는 많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인 듯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났다.고은서는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그녀는 차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자 차에 기대게 되었다.이제 차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이미 늦었고 두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두 남자의 눈가는 이상하리만치 붉었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점점 더 흥분된 듯 보였다. 그들은 입에서 지저분한 욕설을 뱉으며 다가왔다.“젠장, 오늘 운이 정말 좋아! 이 근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울 수 있을 줄 몰랐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도 만날 줄은!”“그렇지, 도시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이 피부를 보라고. 아주 보드라워! 하하하, 집으로 끌고 가서 잘 놀아보자고!”그때, 악취 나는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더럽게 손을 뻗으려 했고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의 아랫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다.까무잡잡한 남자는 그제야 반응해 고은서를 잡으려 했고 고은서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하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체격을 가졌고 고은서는 서 있는 자세 때문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그러자 남자는 화가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팔을 휘둘러 고은서를 향해 달려왔다.고은서는 민첩하게 몸을 낮추며 땅에 떨어진
육현석은 박지연의 말을 듣고 눈이 반짝였다.“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줘!”박지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그를 바라보며 더 분명하게 말했다.“말했잖아, 현석 씨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만약 빨리 돌아올 수 없다면 내가 당장 현석 씨를 찾아갈 거야!”육현석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듯, 바로 대답했다.“정말? 그럼 내가 비행기 표 예약해 줄게! 짐 싸고 있어, 내가 기사 불러서 병원으로 데리러 갈게!”“응!”박지연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미처 멀리서 혼자 서 있는 온승준을 보지 못했다.박지연이 남자 친구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온승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예전에, 그녀도 그렇게 그를 바라봤었고 그를 볼 때마다 눈이 반짝였었다.그는 그를 위해 L 국까지 갔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른 남자에게로 돌아갔고 박지연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그 순간, 온승준은 박지연을 완전히 잃었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게 차가웠고 무관심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박지연이 원한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복도에 서 있는 온승준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서리 맞은 배추처럼 기운이 빠져서 문을 붙잡고 있었다.“괜찮아? 의사 불러줄까?”박지연은 그가 몸이 불편해 보여 물었다.온승준은 그녀의 촉촉한 눈과 입가의 미소를 보며 가슴이 더 아파졌다.“지연아, 미안해.”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박지연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그러니 더 이상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길 바라.”그 말을 끝으로 박지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급히 떠났다.저녁 무렵, 게임 회사에서 나온 고은서는 박지연의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해주시로 간 박지연이 육현석과 이모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이제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단
박지연은 온승준이 휴대폰을 꺼내 드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봤다. 화면에 나타난 발신자는 온승준의 어머니였고 박지연은 유혜린과 관련된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온승준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우리 부모님이 약속하셨어. 내가 유 닥터랑 결혼만 하면 더 이상 너한테 연락하지 않겠다고.”그는 간절히 부탁했다.“나도 이제 곧 이 병원을 떠날 거고, 그러면 우리는 만날 기회가 없을 거야. 그냥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정말 안 받을 거야?”“응, 받을 수 없어.”박지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든,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고 잘 살아. 나에게 상처를 줬으니 이제 다른 여자에게는 더 이상 상처 주지 말았으면 해.”온승준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사실 그가 할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한 건 그 자신이었다. 박지연과 재혼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타협했던 것이었다.그때, 안소희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지연 언니,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안소희의 얼굴에 떠오른 흥분을 본 박지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안소희는 온승준을 한 번 쳐다본 뒤 박지연을 문밖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저쪽이요. 배달원이 본인 사인이 필요하다 해서요. 전화가 무음이라서 연결이 안 되길래 제가 배달원 데리고 왔어요!”“여기요! 여기로 가져다주세요!”안소희가 말을 마치자 배달원이 큰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박지연 씨, 본인 맞으시죠? 육 대표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여기다 사인해 주세요.”박지연은 서명을 마친 후 꽃다발을 받았다. 그 안에는 푸른 장미가 들어 있었고, 그 속에 길고 정교한 보석 상자가 들어 있었다.“빨리 열어보세요!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요!”안소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육현석과 박지연의 연애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보는 걸 좋아했다.박지연은 천천히 상자를 열
박지연은 순간 온승준이 술에 취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 유혜린은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밤새 그를 돌봐주었다.‘그날 밤, 무언가 일이 생겼던 걸까?’“그날, 나는 유 닥터가 단순히 나를 돌봐준 거라고만 생각했어.”온승준은 마치 박지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근데 유 닥터 말로는 내가 유 닥터를 너로 착각했다고 하더라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기를 방으로 끌고 갔다고...”“나는 술에 취해본 적이 없어서 술 취한 후 행동이 어떤지 몰라. 그런데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설민희 씨가 내가 술에 취해 너를 끌어안고 집에 데려가겠다고 하는 영상을 보여줬어. 그래서 내가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긴 해.”온승준은 이미 이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고 그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차분했다.“유 닥터는 원래 그 일을 없었던 걸로 하려고 했대. 나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는데 며칠 전에 자기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거야.”“유 닥터가 그 소식을 보냈을 때 나는 병원에서 어머니 퇴원 수속을 돕고 있었어. 그때 마침 어머니가 그 메시지를 봤고 그 후 나한테 유 닥터랑 결혼하라고 하셨어...”온승준은 박지연에게 설명하는 동안,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박지연은 그가 반항하려 했을 수도 있었지만 손주를 원하는 부모님을 이기기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이혼했잖아. 결혼이든 재혼이든 그건 자유야. 게다가 나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남자 친구’라는 말에 온승준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박지연 앞에 놓았다.“이거 주고 싶었어.”박지연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어제 악세서리 가게에서 봤던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목걸이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하나하나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조명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진열장에 전시된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는 건, 그 가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박지연은 온승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승준은 박지연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박지연은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두 분 결혼 축하해요. 행복하시길 바랄게요.”예상치 못한 말에 온승준은 말문이 막혔고 유혜린은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지연 씨, 축하해 주셔서 고마워요.”박지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와 함께 가게를 떠났다.차에 타자 박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말해. 난 괜찮아.”고은서는 그제야 불만을 터뜨렸다.“온 닥터 뭐야? 해외로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갑자기 유혜린이랑 결혼한다고 할 수 있지?”박지연은 차분히 대답했다.“아마 그 사람 부모님이 원해서 하는 결혼일 거야. 온 닥터도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고 시부모와 관계 좋은 아내라면 그도 나쁘지 않으니까.”박지연은 자신의 전 시부모를 잘 알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아들을 붙잡으려고 했고 그런 술책과 애처로운 연극은 계속될 거였다.온승준이 양보하는 건 그다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유혜린은 그의 첫사랑이었으니까. 고은서는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여전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전에 네가 상심해서 떠났을 때도 그 여자와 재혼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분명히 얼마 전에 너와 합치려 하다 거절당하자 그 길로 첫사랑과 결혼하게 틀림없어. 너무한 거 아니야?”박지연의 2년 넘은 연애와 헌신이 우스울 정도였다.하지만 박지연은 오히려 별다른 감정 없이 말했다.“그 두 사람 결혼하는 것도 잘된 일이지. 적어도 그 사람 부모님이 만족할 거고 그가 평온을 찾을 수 있으면 나도 더 편해질 거니까.”고은서는 이 부분에서는 동의했다.“그 집은 진짜 지옥이야. 일찍 빠져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냥 좀 화가 나서 그래. 온 닥터
박지연은 육현석이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충분한 안전감을 주겠다고 다짐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고은서가 기분 좋은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너 이모가 해주시에 계신다고 하지 않았어? 현석 씨랑 같이 가서 이모에게 소개해 주지 그래?”박지연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조금 더 지켜보려고. 급한 건 아니니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아직 온 닥터를 잊지 못한 거야?”“그럴 리가!”박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현석 씨랑 함께하기로 결심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다만 현석 씨가 너무 완벽해서 가끔은 지금의 행복이 다시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해서 그래.”고은서가 박지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그만! 그 사람 정말 괜찮지만 너도 꿀리지 않아!”“응, 알겠어!”두 사람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먼저 쇼핑몰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쇼핑을 즐기다가, 박지연의 시선은 보석 가게 진열창에 놓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고정되었다.“한번 들어가서 볼까?”고은서가 물었다.“좋아!”박지연이 흔쾌히 대답했다.예전의 박지연은 이런 비싼 물건을 사는 걸 아까워하며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을 더 아끼고 싶었고 사지 않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판매 직원이 목걸이를 꺼내자 박지연은 주저하지 않고 착용해 보았다. 고은서에게 어울리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승준 씨, 이 반지 정말 예쁘지 않아? 우리 들어가서 보자.”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유혜린이었고 그 옆에는 온승준이 서 있었다.오랜만에 본 유혜린은 조금 더 풍만해진 모습이었고 다정하게 온승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유혜린은 박지연을 발견하자 더욱 밝게 웃으며 말했다.“지연 씨, 정말 우연이네요. 친구분과 같이 악세서리 보러 오셨나 봐요?”그리고 박지연이 착용한 목걸이를 보고 덧붙였다.“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정말
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중요한 회의가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가봐.”곽승재는 고은서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죠.”남자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곽승재가 떠난 후, 남자는 이전의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고은서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식사 중에도 그녀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협력 제안을 적극적으로 했다.고은서는 그가 태도를 바꾼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연 대표님의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최대한 빠르게 실행 가능한 투자 계획서를 준비해 귀사에 전달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보시고 저희의 능력과 실력에 확신이 생기시면 그때 확답을 주셔도 됩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연 대표님께서 단지 곽 대표님의 체면을 봐서 협력을 고려하셨다면 저희와의 협력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와 곽 대표님은 그다지 특별한 관계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실망을 드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고은서의 직설적인 말에 연중서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는 처음에 고은서를 단지 외모만 반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자신의 가치를 높여 재벌 가문에 시집가기 위한 수단일 거라고 여겼다.그리고 방금 곽승재가 그녀에게 보여준 배려를 보며 연중서는 자기 생각을 굳혔다.그는 곽승재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고은서와의 협력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고은서가 그 모든 것을 직접 언급하며 대놓고 말했다.“고 대표님도 정말 농담을 잘하시네요. 방금 곽 대표님의 태도를 보세요. 고 대표님 말씀대로 고분고분 회의하러 가시던데요? 그런데 관계가 별로라니요?”연중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저는 그냥 곽 대표님과 친구가 되고 싶은 것뿐이에요. 고 대표님께서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고은서는 미소를 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