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의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에 곽승재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너, 남편을 죽일 셈이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떻게 열이 나는데도 생각이 이렇게 또렷할 수 있는 거지?’“그래, 맞아. 널 죽이면 내가 네 재산을 상속받아서 부자로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고은서는 짜증을 내며 물컵을 그의 입에 갖다 댔다.“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약이나 삼켜.”고은서의 말투가 너무 강했는지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물을 두어 모금 마셨다.고은서는 물컵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좋아, 이제 가서... 아!”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목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눕혀버린 것이었다.“곽... 읍.”고은서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곽승재가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무언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씁쓸한 약이 그녀의 입안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고은서는 그 정체가 방금 자신이 곽승재에게 먹인 해열제라는 것을 깨달았다.‘곽승재, 이 변태 같은 놈! 약을 삼키는 게 아니라 나한테 다시 먹이려고 하다니!’그녀는 필사적으로 약을 입 밖으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고은서는 이를 꽉 물고 있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양 볼을 잡고 그녀로 하여금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게 했다.곽승재는 약을 고은서의 혀끝까지 밀어 넣었고 그녀의 입안에 씁쓸한 맛이 퍼졌다.“너무 써!”고은서는 견딜 수 없어서 온 힘을 다해 곽승재를 옆으로 밀어냈다.곽승재는 그녀에게 밀려서 옆으로 물러섰고 다시 덤비지 않았다.고은서는 그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하게 약을 뱉어내고 침대 옆에 있는 물로 입을 여러 번 헹궜다.‘변태 같은 놈! 자기 입에 넣었던 약을 다시 내 입에 집어넣다니!’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또 침실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열심히 헹궜다.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사라지고 곽승재도 멀어진 다음
고은서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의 단추가 두 개 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 있는 속옷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고은서는 얼굴이 붉히더니 가슴 쪽을 가리면서 방으로 돌아갔다.‘분명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단추가 풀어지지 않았었는데... 뭐지? 자는 사이에 단추가 풀어지는 경우도 있나?’그녀가 잠옷은 그저 평범한 잠옷이었는데 단추가 저절로 풀릴 리 없었다.설령 곽승재가 풀어놓지 않았다 해도 그가 침대로 안고 가는 사이에 헐렁해진 게 틀림없었다.그런 모습으로 방문을 열었을 생각을 하니 고은서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감쌌다. 창피해서 어디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고은서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후, 화장까지 살짝 하고서야 방문을 조금 열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의사는 진료 도구를 정리하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열은 내렸지만 몸이 여전히 매우 허약한 상태입니다.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약을 복용하는 동안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되고요. 이번에는 다행히 체력이 좋아서 의식이 흐릿하고 졸린 선에서 끝난 거지 다음에는 어떤 반응이 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깜짝 놀랐다.‘그저 열이 난 게 아니라 프랑스 요리 중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 때문에 먹던 약이랑 반응을 일으킨 거야?’고은서는 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곽승재가 열이 세게 나서 혼란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었다.그래도 곽승재에게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미자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곽승재를 보살피라고 특별히 고은서를 보낸 것이었는데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뻔했으니 말이다.그때 의사가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는 의료 상자를 들고 나갔다. 주민기가 그를 배웅해 주었다.“왜 숨어 있어? 나와.”곽승재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는 문을 열고 곽승재 앞에 섰다.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고 얼굴색
곽승재와 고은서가 꽉 안고 있는 모습을 본 주민기는 순간 멍해졌다.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눈치가 빨랐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앗,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의사 선생님께서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예요. 대표님, 의사 선생님 좀 따라가 볼게요!”말을 마친 주민기는 홱 사라져 버렸다.“...”‘이것보다 더 어이없는 변명이 어디 있겠어?’“아직도 손을 놓지 않는 거 보니까 진짜 확인해 보고 싶나 봐?”속으로 불평하던 중, 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곽승재의 목을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의 손이 자기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서둘러 곽승재한테서 손을 떼고 바로 섰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놀라게 하래? 쌀이 다 쏟아질 뻔했잖아.”곽승재는 바닥에 있는 냄비를 보며 더 이상 고은서한테 따지지 않았고 냄비를 집어 들며 물었다.“어떻게 하면 돼? 내가 할게.”곽승재가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는 걸 아는 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쌀을 천천히 으깬 다음에 뜨거운 물을 넣고 끓여. 마지막에 소금과 파를 조금 넣으면 죽이 향긋하고 찰져서 맛있어.”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따라 쌀을 으깨기 시작했다. 지난번 예원 별장에서 면 반죽하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해 보였다.숟가락을 쥔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쌀을 으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손등에는 힘줄이 도드라져 보였으니 말이다.“이 정도면 돼?”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거의 다 됐어. 다 으깨고 나면 죽을 끓여. 나는 마트에 갔다 올게.”쌀을 좀 으깼다고 땀을 흘리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물건 사면서까지 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아프니까 그냥 호텔에 있어”이틀 동안 아팠던 탓에 곽승재는 확실히 힘이 달렸다.“민기 씨랑 같이 가.”조금 전 두 사람이 안고 있는 장면을 주민기가 봤다는
갑자기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고은서에 곽승재의 마음속에 있던 안 좋은 예감이 더욱 강렬해졌다.“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식당 안 가도 돼.”곽승재가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대답했다,“그래.”말을 마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두 개의 서류를 들고 걸어 나왔다.그 서류가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곽승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고은서, 그날 밤에 말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어? 아니면 내가 요 며칠 동안 너무 바쁜 바람에 너를 잘 챙겨주지 못해서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거야?”‘말도 안 되는 소리.’고은서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곽승재 앞에 놓았다.“곽승재, 난 너랑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 화가 난 것도 아니야. 전에 네가 아팠던 것 때문에 일이 쌓여서 제대로 말을 못 꺼냈을 뿐이지.”고은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그날 말했잖아.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나랑 이혼 절차를 밟겠다고 말이야. 양가 부모님들한테도 차근차근 설명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나도 동의해.”“네가 이런 핑계를 대고 질질 끌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앞으로 더 중요한 프로젝트가 생겨서 또 미루게 될까 봐 그래. 그러니까 우선 서류에 사인부터 해놓자는 거야. 그때가 되면 너한테 바쁜 프로젝트가 있든 없든 간에 수속을 밟을 거라서 말이야.”“꼭 이렇게 서둘러야 해?”곽승재가 물었다.‘열흘 전부터 이미 끝났어야 하는 관계인데 내가 뭘 서두른다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귀국하면 나는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너랑 금실 좋은 부부인 척도 하지 않을 거고.”“어쨌든 사인만 하면 되니까 더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야?”곽승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고은서는 마음속에서 점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뭐가 문제길래, 왜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거야?”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우리가 절차를
고은서는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몰로 갔다.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액세서리와 가방이 가득해서 고은서의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고은서는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에 신발과 가방까지 고른 후, 박지연이 좋아하는 스킨케어 제품과 그녀에게 선물할 옷도 두 벌 골랐다.그녀는 쇼핑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두세 시간 동안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큰 쇼핑백을 들고 걸어 나왔다.상점 밖의 거리는 그녀가 금방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처럼 떠들썩하지 않고 조용해 보였다. 길가에는 노숙자들이 가득 모여 이불을 덮고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각종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녀는 여러 노숙자들의 눈길을 끌었다.고은서는 국내 치안에 익숙해진 탓에 갑자기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마음이 불안해졌다.앞길에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본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그때 길가에 있던 한 노숙자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길을 재촉하다가 그와 마주친 고은서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왼쪽 거리로 걸어갔다.얼마의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그 노숙자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발견하였다.그녀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현지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가방이 노숙자에게 붙잡혀 버렸다.“아!”고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방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노숙자의 덩치는 고은서의 2배 정도였기에 그녀의 발길질에 두어 걸음 물러섰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그래도 맞은 바람에 화가 난 듯 노숙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내밀어 고은서를 때리려고 했다.놀라서 뒤로 몇 발짝 물러선 고은서는 경찰에 신고할 틈도 없이 돌아서서 바로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이곳의 거리는 지나치게 넓고 인적도 드물었기에 고은서가 큰소리로 몇 번 도움을 청해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숙자와 고은서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노숙자의 손은 그녀에게 닿을락 말락 했다.땅바닥에 벽돌
“내가 저 사람 때리는 걸 봤다고? 그런데 왜 좀 더 일찍 나타나서 날 도와주지 않았어?” 고은서가 울먹이며 물었다.그녀는 거의 죽을 뻔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할 줄 알고 엄청 놀랐는데...고은서의 질문에 민시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곰처럼 생겼잖아.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렸지.”“...”고은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민시후를 노려봤다.“그렇게 눈을 뜨면 눈알이 빠지겠어.” 민시후는 귀찮다는 듯 그녀를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얼른 일어나. 나 바빠.”고은서가 일어나자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도 삐끗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쪽 발에 체중을 실으며 민시후의 팔을 놓았다. “M국에 어떻게 온 거야?”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도 이렇게 우연히 여기서 나타나다니...순간 민시후의 매력적인 눈동자에 흥미가 스쳤다. “당연히 널 쫓아온 거지.”“뭐?”빵빵!그 순간 앞쪽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몸매가 화려한 여자가 스포츠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것에 지친 듯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민시후는 그 여자에게 손을 흔들며 더 이상 고은서를 놀리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송민아가 제때 회사에 입사했고, 그 때문에 숨 쉴 틈도 없어서 M국으로 도망친 것이라고.고은서는 그제야 민시후가 ‘널 쫓아왔다'고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송민아에게는 아니었다.“민시후, 이러다 민아 씨가 나를 원수로 여기겠어.” 고은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는 민시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게 분명했다.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송민아 정신 상태는 아직 멀쩡하니까 널 죽이진 않을 거야.”고은서는 원래 한 발로만 버티고 있었는데 민시후가 어깨를 두드리자 중심을 잃고 거의 넘어질
마침 경찰이 노숙자를 붙잡아 그들을 향해 끌고 왔다. 노숙자의 머리카락에 피가 엉킨 모습을 보자 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곽승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침착하게 경찰에게 말했다. “변호사가 곧 도착할 겁니다. 모든 일은 그분이 처리할 거예요.” 고은서는 경찰에게 사건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고 주민기도 변호사와 함께 도착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머지 일은 그와 변호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고은서와 곽승재는 차 쪽으로 걸어갔다. 고은서가 발목을 삐끗해 절뚝이며 느리게 걷자 곽승재는 결국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고은서는 이미 큰 충격을 받아 곽승재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고, 그가 그녀를 차에 태우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차 안에서 곽승재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도착하니 의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고은서의 발목을 검사한 후, 단순한 염좌일 뿐 골절이나 다른 문제는 없다고 진단했다. 의사가 떠나고 나서 방 안에는 고은서와 곽승재 둘만 남았다. 고은서는 저녁에 곽승재에게 ‘개자식'이라고 욕을 퍼붓고, 이제 서로 남남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겨 호텔 방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원래 쇼핑을 마치고 혼자 방을 잡으려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발 아직 많이 아파?” 드디어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자기 전에 약만 좀 바르면 될 거야.” 고은서가 대답했다.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발을 잡았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 경계하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그녀의 발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약병을 열었다. 고은서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발을 빼려 했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나 곽승재는 말없이 다시 그
곽승재의 불쾌한 표정과 추궁하는 듯한 말투를 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민 대표를 감싸는 게 왜?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이제 민시후를 좋아하기로 했다고.” 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난번 통화에서 고은서가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돌리겠다고 했었다. 아까 민시후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는 행동도 너무 자연스러웠고 고은서 또한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 그가 그녀에게 손만 대도 마치 성가신 짐승이라도 본 듯이 피하곤 했는데, 민시후에게는 왜 경계하지 않는 걸까? “네가 그렇게 이혼을 서두른 이유가 민시후랑 함께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야?” 곽승재는 얼굴을 찌푸린 채 차갑게 물었다. 그녀의 발을 잡고 있는 손도 힘이 더해졌다. “아야!” 고은서는 급히 발을 빼며 자신의 손으로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분노는 더욱 끓어올랐다. “네가 민시후에게 마음을 돌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널 좋아할 거 같아? 설령 민시후가 널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그 집안은 절대 이혼녀인 널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고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건 내 문제니까 곽 대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곽승재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빨리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게 좋을 거라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야?” 고은서는 그를 일부러 자극했다. 곽승재는 고은서가 다른 남자와 함께할 거라는 생각에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소파에 내리누르고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그의 힘이 너무 강해 고은서는 반항할 틈도 없었다.‘이 개자식, 또 이런 짓이나 하고!’고은서는 화가 나서 그의 혀를 세게 물었다. 분명 피 맛이 입안에 퍼졌는데도 곽승재는 그녀를 놓지 않고 더 강하게 키스하며 그녀의 숨결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탐하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불을 붙였다. 고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곽승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의외네. 내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왜 비아냥거리며 난리야?’엘리베이터는 문이 너무 오래 열려있은 탓에 경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곽승재가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은서도 더는 그와 다투기 싫어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일이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저 참을 생각이었다.이내 곽승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서 경보 소리가 멈추고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층으로 가세요?”고은서가 곽승재랑 함께 온 여자에게 물었다.여자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자랑이라도 하는 듯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그쪽이랑 같은 층이에요.”‘나랑 같은 층이라고? 진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엘리베이터 각 면에 거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곽승재와 여자의 행동을 엿볼 수 있었다.여자는 곽승재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대표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곽승재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고 그에게 애교부리기 시작했다.“대표님, 이 호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으신데 웨이터한테 우리 룸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곽승재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하고 싶은 대로 해.”“그럼 저 와인도 같이 주문해도 될까요?”여자는 곽승재의 대답에 점점 더 담이 커졌다.“오늘 대표님 대신 운전하느라고 연회 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단 말이에요. 보상은 해줄 거죠?”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응.”그의 대답을 얻은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더 애교스러워졌다.“고마워요, 대표님.”‘우웩, 토할 것 같아.’고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린 탓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왜, 의견이라도 있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자기애가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내가 이혼까지 했던 너를 왜 좋아해?”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함께 연기하면서 이미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진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지금보다 더 많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서는 더는 사랑이란 단어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내리지 말라고 말했다.“나 혼자 들어가면 돼.”“확실해?”“응.”민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서 박지연에게 연락했다.그러나 전화가 통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이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손에는 명품백을 들고 있었고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몸매도 우월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 같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지? 내가 이 호텔에 있는 걸 알면서도 굳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성에 다른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닌데.’“은서야, 괜찮아?”전화 너머로 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답했다.“응. 너 온 닥터랑 얘기 나눠봤어? 왜 그 여자랑 함께 카페로 갔는지는 물어봤고?”“물어봤지. 다른 친구가 유혜린이 귀국한 거 알고 같이 밥 먹자고 했대. 그런데 종일 수술하면서 피곤해서 그저 같이 커피 사러 간 거라고 했어.”“그게 다야?”고은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응.”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물었다.“다친 손이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고?”“연고 가져다줬어. 병원으로 새로 개발한 건데 흉터 없애는 데 좋다면서 주던데.”“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캐물었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고은서가 되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백씨 집안 프로젝트를 산통 깨는 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고 송민준한테 부탁한 거야? 목적이 분명하잖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그냥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우리 둘 사이에 무슨 빚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 널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유지하라고 한 사람은 너잖아.”민시후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송민준도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거네.”“알아차리라지 뭐. 게다가 송민준 집안 도우미가 그런 짓을 했는데 네가 의심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아? 걔도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의무가 있잖아.”민시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이 정도로 지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그런데 그 도우미가 수상하긴 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안고 갈 생각이었으면 숨을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왜 송민아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송민준한테는 저렇게 쉽게 걸려든 거지?”민시후는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이번에는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거야. 그런데 다시는 송민준 앞에서 꼼수 부릴 생각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감히 못 건드리는 존재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제발 총명한 척 그만해줄래?”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보다는 총명하지. 게다가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면 날 찾아와서 협력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잖아.”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겸손한 것도 일종 미덕이에요.”“이미 충분히 우수해서 그 어떤 미덕도 나에겐 금상첨화일 뿐이야. 딱히 너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두 사람은 곧장 ZY 그룹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정식으로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전에 입사 활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데다가 그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