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데?”고은서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손바닥에 한층 더 힘을 주어 조르고, 그녀의 턱에 멎은 손을 그녀의 얼굴로 옮겨서 가볍게 어루만졌다.“한 여자가 남자를 가장 즐겁게 하는 방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해?”고은서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라 잽싸게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생각도 하지 마!”지난번에는 그녀가 약에 중독되어 제정신을 잃어서 그런 일이 생긴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는 곽승재와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을 리 없었다.그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이혼의 어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으니깐.“곽승재, 당신은 그냥 잠시 우리 사이의 일을 처리할 시간상 여유가 없을 뿐이니, 품격 없는 사람처럼 이런 기회조차 이용하여 나한테서 재미 보려고는 하지 마!”곽승재는 그녀의 쌀쌀맞고 거부하는 얼굴을 바라보더니 찬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놀려댔다.“난 그냥 당신이 M 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한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몇 끼 만들어 달라는 것뿐인데... 그러면 내 몸도 빨리 좋아지고 기분도 좋아질 거 아니야? 그런 당신은 뭘 바라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렇다면 직접 밥 챙겨달라고 말하면 되지, 왜 그런 애매한 행동을 해서 오해하게 하는 말을 하게 만드냐 말이야.’“내가 널 안고 올라오느라 진땀을 뺐는데, 혹시 그런 일까지 바라는 건 아니겠지?”곽승재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약 올렸다.“당신은 내가 환자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곽승재는 보라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숨을 헐떡이며 불편함과 허약함을 드러냈다.고은서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당신이 방금 내가 잠든 사이에 나한테 한 짓은 뭔데!”“그건 아까 네가 계속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데, 난들 어떻게 너의 의도를 알 수 있겠어.”곽승재가 쉰 목소리로 그럴 듯 둘러댔다.어쨌든 아까는 그녀가 잠들었으니 그가 제멋대로 꾸며대도 된다.고은서는 그의
보아하니 박지연이 잘못 짚은 것이 아니었다. 망할 곽승재가 여태껏 그녀에게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녀는 두 번씩이나 소파에서 자던 도중에 다시 침대로 이동되어 잔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십중팔구 그의 작품이 분명했다.역시 남자의 몸과 정신은 분리할 수 있다. 분명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을 탐할 수 있으니 말이다.샤워를 끝내고 스킨케어까지 마친 그녀는 미지근한 물과 해열제 두 알을 받쳐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곽승재는 여전히 조금 전의 자세를 유지한 채 잠들어 있었고 미간은 약간 찌푸려져 있었으며 살짝 마른 입술에는 그녀의 립스틱이 묻어있었다.방금 그에게 협박을 받고 강제로 키스 당한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컵 안의 물을 그 얼굴에 확 뿌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곽승재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어서 일어나 약 먹어.”곽승재는 마지못해 눈을 떴는데 아마도 잠에서 덜 깨어난 것인지, 그녀를 보자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고은서, 너 나 보러 온 거니?”고은서는 하마터면 손에 든 물을 떨어뜨릴 뻔했다.“당신 왜 이래, 물 쏟을 뻔했잖아!”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흐리멍덩한 말투로 고민했다. “고은서, 넌 왜 자꾸 나만 보면 얼굴이 차가워져? 언제 나한테 한번 웃어 줄래, 응?”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저녁 프랑스 요리에는 소량의 술이 곁들여지는 몇 가지 메뉴가 있지만 취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설마 이 정도 열이 나서 사람을 헷갈리게 할 수도 있단 말이야?“은서야, 혹시 그날 밤 내가 너를 아프게 했다고 여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거니? 내가 그렇게 미워? 집을 나갈 만큼?”곽승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평소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감정을 읽을 수 없던 검은 눈동자가 지금은 더없이 부드러웠다.“나도 자제하려고 노력할 만큼 했어. 하지만 그때 당신은 너무나도 유연했고 또 고양이처럼 울부짖었어. 그래서...”곽승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황한 그녀는 한
고은서의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에 곽승재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너, 남편을 죽일 셈이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떻게 열이 나는데도 생각이 이렇게 또렷할 수 있는 거지?’“그래, 맞아. 널 죽이면 내가 네 재산을 상속받아서 부자로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고은서는 짜증을 내며 물컵을 그의 입에 갖다 댔다.“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약이나 삼켜.”고은서의 말투가 너무 강했는지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물을 두어 모금 마셨다.고은서는 물컵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좋아, 이제 가서... 아!”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목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눕혀버린 것이었다.“곽... 읍.”고은서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곽승재가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무언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씁쓸한 약이 그녀의 입안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고은서는 그 정체가 방금 자신이 곽승재에게 먹인 해열제라는 것을 깨달았다.‘곽승재, 이 변태 같은 놈! 약을 삼키는 게 아니라 나한테 다시 먹이려고 하다니!’그녀는 필사적으로 약을 입 밖으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고은서는 이를 꽉 물고 있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양 볼을 잡고 그녀로 하여금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게 했다.곽승재는 약을 고은서의 혀끝까지 밀어 넣었고 그녀의 입안에 씁쓸한 맛이 퍼졌다.“너무 써!”고은서는 견딜 수 없어서 온 힘을 다해 곽승재를 옆으로 밀어냈다.곽승재는 그녀에게 밀려서 옆으로 물러섰고 다시 덤비지 않았다.고은서는 그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하게 약을 뱉어내고 침대 옆에 있는 물로 입을 여러 번 헹궜다.‘변태 같은 놈! 자기 입에 넣었던 약을 다시 내 입에 집어넣다니!’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또 침실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열심히 헹궜다.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사라지고 곽승재도 멀어진 다음
고은서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의 단추가 두 개 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 있는 속옷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고은서는 얼굴이 붉히더니 가슴 쪽을 가리면서 방으로 돌아갔다.‘분명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단추가 풀어지지 않았었는데... 뭐지? 자는 사이에 단추가 풀어지는 경우도 있나?’그녀가 잠옷은 그저 평범한 잠옷이었는데 단추가 저절로 풀릴 리 없었다.설령 곽승재가 풀어놓지 않았다 해도 그가 침대로 안고 가는 사이에 헐렁해진 게 틀림없었다.그런 모습으로 방문을 열었을 생각을 하니 고은서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감쌌다. 창피해서 어디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고은서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후, 화장까지 살짝 하고서야 방문을 조금 열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의사는 진료 도구를 정리하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열은 내렸지만 몸이 여전히 매우 허약한 상태입니다.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약을 복용하는 동안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되고요. 이번에는 다행히 체력이 좋아서 의식이 흐릿하고 졸린 선에서 끝난 거지 다음에는 어떤 반응이 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깜짝 놀랐다.‘그저 열이 난 게 아니라 프랑스 요리 중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 때문에 먹던 약이랑 반응을 일으킨 거야?’고은서는 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곽승재가 열이 세게 나서 혼란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었다.그래도 곽승재에게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미자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곽승재를 보살피라고 특별히 고은서를 보낸 것이었는데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뻔했으니 말이다.그때 의사가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는 의료 상자를 들고 나갔다. 주민기가 그를 배웅해 주었다.“왜 숨어 있어? 나와.”곽승재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는 문을 열고 곽승재 앞에 섰다.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고 얼굴색
곽승재와 고은서가 꽉 안고 있는 모습을 본 주민기는 순간 멍해졌다.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눈치가 빨랐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앗,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의사 선생님께서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예요. 대표님, 의사 선생님 좀 따라가 볼게요!”말을 마친 주민기는 홱 사라져 버렸다.“...”‘이것보다 더 어이없는 변명이 어디 있겠어?’“아직도 손을 놓지 않는 거 보니까 진짜 확인해 보고 싶나 봐?”속으로 불평하던 중, 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곽승재의 목을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의 손이 자기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서둘러 곽승재한테서 손을 떼고 바로 섰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놀라게 하래? 쌀이 다 쏟아질 뻔했잖아.”곽승재는 바닥에 있는 냄비를 보며 더 이상 고은서한테 따지지 않았고 냄비를 집어 들며 물었다.“어떻게 하면 돼? 내가 할게.”곽승재가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는 걸 아는 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쌀을 천천히 으깬 다음에 뜨거운 물을 넣고 끓여. 마지막에 소금과 파를 조금 넣으면 죽이 향긋하고 찰져서 맛있어.”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따라 쌀을 으깨기 시작했다. 지난번 예원 별장에서 면 반죽하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해 보였다.숟가락을 쥔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쌀을 으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손등에는 힘줄이 도드라져 보였으니 말이다.“이 정도면 돼?”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거의 다 됐어. 다 으깨고 나면 죽을 끓여. 나는 마트에 갔다 올게.”쌀을 좀 으깼다고 땀을 흘리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물건 사면서까지 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아프니까 그냥 호텔에 있어”이틀 동안 아팠던 탓에 곽승재는 확실히 힘이 달렸다.“민기 씨랑 같이 가.”조금 전 두 사람이 안고 있는 장면을 주민기가 봤다는
갑자기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고은서에 곽승재의 마음속에 있던 안 좋은 예감이 더욱 강렬해졌다.“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식당 안 가도 돼.”곽승재가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대답했다,“그래.”말을 마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두 개의 서류를 들고 걸어 나왔다.그 서류가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곽승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고은서, 그날 밤에 말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어? 아니면 내가 요 며칠 동안 너무 바쁜 바람에 너를 잘 챙겨주지 못해서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거야?”‘말도 안 되는 소리.’고은서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곽승재 앞에 놓았다.“곽승재, 난 너랑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 화가 난 것도 아니야. 전에 네가 아팠던 것 때문에 일이 쌓여서 제대로 말을 못 꺼냈을 뿐이지.”고은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그날 말했잖아.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나랑 이혼 절차를 밟겠다고 말이야. 양가 부모님들한테도 차근차근 설명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나도 동의해.”“네가 이런 핑계를 대고 질질 끌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앞으로 더 중요한 프로젝트가 생겨서 또 미루게 될까 봐 그래. 그러니까 우선 서류에 사인부터 해놓자는 거야. 그때가 되면 너한테 바쁜 프로젝트가 있든 없든 간에 수속을 밟을 거라서 말이야.”“꼭 이렇게 서둘러야 해?”곽승재가 물었다.‘열흘 전부터 이미 끝났어야 하는 관계인데 내가 뭘 서두른다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귀국하면 나는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너랑 금실 좋은 부부인 척도 하지 않을 거고.”“어쨌든 사인만 하면 되니까 더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야?”곽승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고은서는 마음속에서 점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뭐가 문제길래, 왜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거야?”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우리가 절차를
고은서는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몰로 갔다.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액세서리와 가방이 가득해서 고은서의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고은서는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에 신발과 가방까지 고른 후, 박지연이 좋아하는 스킨케어 제품과 그녀에게 선물할 옷도 두 벌 골랐다.그녀는 쇼핑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두세 시간 동안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큰 쇼핑백을 들고 걸어 나왔다.상점 밖의 거리는 그녀가 금방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처럼 떠들썩하지 않고 조용해 보였다. 길가에는 노숙자들이 가득 모여 이불을 덮고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각종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녀는 여러 노숙자들의 눈길을 끌었다.고은서는 국내 치안에 익숙해진 탓에 갑자기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마음이 불안해졌다.앞길에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본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그때 길가에 있던 한 노숙자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길을 재촉하다가 그와 마주친 고은서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왼쪽 거리로 걸어갔다.얼마의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그 노숙자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발견하였다.그녀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현지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가방이 노숙자에게 붙잡혀 버렸다.“아!”고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방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노숙자의 덩치는 고은서의 2배 정도였기에 그녀의 발길질에 두어 걸음 물러섰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그래도 맞은 바람에 화가 난 듯 노숙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내밀어 고은서를 때리려고 했다.놀라서 뒤로 몇 발짝 물러선 고은서는 경찰에 신고할 틈도 없이 돌아서서 바로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이곳의 거리는 지나치게 넓고 인적도 드물었기에 고은서가 큰소리로 몇 번 도움을 청해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숙자와 고은서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노숙자의 손은 그녀에게 닿을락 말락 했다.땅바닥에 벽돌
“내가 저 사람 때리는 걸 봤다고? 그런데 왜 좀 더 일찍 나타나서 날 도와주지 않았어?” 고은서가 울먹이며 물었다.그녀는 거의 죽을 뻔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할 줄 알고 엄청 놀랐는데...고은서의 질문에 민시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곰처럼 생겼잖아.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렸지.”“...”고은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민시후를 노려봤다.“그렇게 눈을 뜨면 눈알이 빠지겠어.” 민시후는 귀찮다는 듯 그녀를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얼른 일어나. 나 바빠.”고은서가 일어나자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도 삐끗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쪽 발에 체중을 실으며 민시후의 팔을 놓았다. “M국에 어떻게 온 거야?”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도 이렇게 우연히 여기서 나타나다니...순간 민시후의 매력적인 눈동자에 흥미가 스쳤다. “당연히 널 쫓아온 거지.”“뭐?”빵빵!그 순간 앞쪽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몸매가 화려한 여자가 스포츠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것에 지친 듯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민시후는 그 여자에게 손을 흔들며 더 이상 고은서를 놀리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송민아가 제때 회사에 입사했고, 그 때문에 숨 쉴 틈도 없어서 M국으로 도망친 것이라고.고은서는 그제야 민시후가 ‘널 쫓아왔다'고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송민아에게는 아니었다.“민시후, 이러다 민아 씨가 나를 원수로 여기겠어.” 고은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는 민시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게 분명했다.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송민아 정신 상태는 아직 멀쩡하니까 널 죽이진 않을 거야.”고은서는 원래 한 발로만 버티고 있었는데 민시후가 어깨를 두드리자 중심을 잃고 거의 넘어질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