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고은서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곽승재는 그녀의 붉어진 작은 얼굴과 수건 밑에 보일 듯 말 듯 희고 부드러운 다리를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뇌리에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고은서는 반쯤 수줍어하며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연약한 그것들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 욕망은 그 순간 절정에 달해 그녀가 울면서 용서를 빌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호흡이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한 발을 걷어찼다.“나가라고.”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곽승재를 차지 못했는데 거기다가 민첩하게 그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였다.고은서는 이때 수건만 두른 채 한쪽 발이 곽승재의 손에 잡혀 다리 밑이 거의 드러나는 부끄러운 자세였다.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질 것 같았다.“놓으라고.”곽승재는 손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할 일이 많고 고은서의 몸도 더 이상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손에 넣는 욕망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실력이 없으면 마음대로 손찌검할 생각을 하지 마.”목젖을 몇 번 세게 굴리고 곽승재는 그녀의 다리를 늦추고 몸을 돌려 욕실에서 물러났다.고은서는 즉시 문을 잠그고 자신의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찬물로 세수했다.그녀는 틀림없이 머리가 돌았을 것이다. 자신이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리를 뻗고 그를 걷어차서 자신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었다.방금 곽승재가 그녀의 발을 잡았을 때 눈에서 그녀를 삼키고 싶은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은서는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얼굴의 열이 식자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세면대 거울을 마주 보았다.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없었지만 그녀의 목, 쇄골, 어깨에는 다양한 정도의 키스 마크가 있었다.수건을 풀자 어떤 곳의 붉은 자국이 더 깊어지고 이빨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곽승재, 넌 정말 짐승이나 다름없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문밖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부드럽게 발라 주었다.어젯밤 밧줄에 묶였을 때 생긴 멍 자국인데 지금은 많이 옅어졌다.샤워할 때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곽승재가 어젯밤에도 약을 발라줬다고?’“병원이 바로 옆에 있으니 몸이 아프거나 매우 아프면 약을 먼저 처방받을 수 있어.”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의 얼굴이 또 약간 달아올랐다. 곽승재는 비록 어디가 불편한지 분명히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확실히 약간 붓고 아프고 불편했으며 걷는 것도 약간 아팠지만 이 일로 병원에 가기에는 그럴 낯짝이 없었다.“하나도 아프지 않거든.”말을 마친 고은서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그녀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이는 것을 눈치챘는지 곽승재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반쯤 껴안고 그녀를 호텔 밖으로 안고 나왔다.주차장에서 주민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목에 키스 마크가 보였는지 아니면 곽승재가 그녀를 껴안고 있어서 그런 건지 주천지는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바로 예의를 갖췄다.“대표님, 사모님.”“이 사람은 격투기와 운전 솜씨가 뛰어난 이 군입니다.주민기는 몸이 좋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군이라는 남자는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했다.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 네가 고은서의 운전을 책임져라.”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왜 나에게 운전기사를 배정해 줘?”곽승재는 담담하게 말했다.“너의 출입이 편리해지라고 그랬어. 밖에 나가면 저 사람은 네 경호원도 해줄 수 있고.”고은서는 둘러서 거절했다.“괜찮아, 어젯밤 일은 사고일 뿐이야. 난 경호원과 운전기사가 필요 없어. 필요하더라도 널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알아서 찾을게.”고은서는 또 곽승재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고 곽승재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참다못해 곽승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먼저 쓰고 있다가 사람 찾으면 얘기하자.”외부인 앞에서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고
“아픈 건 아니고 약을 좀 사려고.”“무슨 약을 사려고? 주민기한테 사서 별장으로 보내라고 해.”고은서는 얼굴을 붉히며 기침했다.“불편해. 내가 가서 사면 돼.”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으로 짐작해 냈고 눈을 아래로 뜨면서 기쁜지 화난 지 모른 채 말했다.“객실에 안전용품이 다 준비되어 있어.”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미 조처를 해놓았다는 뜻을 알아차렸다.그러자 고은서는 시름을 놓았다. 어젯밤에 이미 사고가 발생했으니 아무래도 또 다른 사고를 만들어내서는 안 됐다.고은서가 긴장을 푸는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마음속의 분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예전에 나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암시한 적 있지 않아?”고은서는 말했다.“시간대마다 생각이 있으니 과거 얘기는 꺼내지 말자.”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예원 별장에 도착한 고은서는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이어 그는 옆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바로 껴안고 내렸다.“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의아했다.곽승재는 입을 열었다.“너 너무 늦게 가.”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처럼 이런 수단을 써서 접근하는 것에 이제는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곽승재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서 방으로 들어가자 장순이의 얼굴에는 의외로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그러고 나서 눈치껏 자기 일을 했다.고은서는 뻔뻔하게 애써 못 본 척하고 곽승재가 그녀를 안아서 올라가게 하였다.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목 자국을 가린 고은서는 단정한 화장을 하고 스탠드칼라의 치마로 갈아입은 뒤 트위드 자켓을 입으니 사람 자체가 기운이 있어 보였다.얼굴에는 더 이상 초췌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한 것은 오후 한나절이었다.차에서 내릴 때 곽승재는 그녀를 안고 내리려고 했지만 고은서가 막아서며 말했다.“혼자 갈게.”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안겨서 가면 얼마나 큰 관심을 끌까.
곽현수의 말에 백유미는 곽승재를 한번 쳐다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친한 사이라고 해도 조심해야죠. 곽 대표님은 지금 결혼하셨으니 저는 곽 부인님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없습니다.”“그것도 기분 나쁘다니. 마음도 좁아라.”곽현수는 꾸짖는 눈빛을 고은서에게 돌렸다.“고은서와 상관없습니다.”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하지만 곽현수는 여전히 불만스러웠다.“여자를 위해 소꿉친구까지 멀리하면 하면 백 아저씨의 마음이 상할까 봐 두렵지 않으냐?”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호칭하나 가지고 소원했다고 말할 수 없죠.”“맞아요, 큰아버지. 승재를 탓하지 마세요. 우리의 정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백유미가 대답했다.백유미가 일부러 곽현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또 정을 언급하는 것은 고은서를 화나게 하여 자기와 말다툼하려는 속셈이었다.고은서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곽 이사님, 저는 유미 씨가 곽승재를 어떻게 부르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마 모르시는 거 같은데 저와 곽승재, 곧 이혼할 겁니다. 그러니 유미 씨 때문에 저와 불평하실 필요 없어요. 아마 곧 새며느리가 될 거니까 당신도 만족하실 거예요.”어차피 이혼해야 하는데 굳이 겉치레할 필요도 없었다. 배짱이 없으면 그만이지, 그녀는 시중을 들 생각도 없었다.“죄송합니다. 전 먼저 할머니를 뵈러 가야 해서 방해하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고은서는 곽승재를 뿌리치고 자신의 어깨를 안은 손을 뿌리치고 곽현수의 어떤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방안으로 향했다.“무슨 태도야? 내가 뭐라고 했길래 이렇게 얼굴을 찡그리며 나한테 그래?”곽현수는 화가 났다.“제가 가볼게요.”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고은서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곽현수는 그를 불러 세웠다.“쟤가 방금 말한 이혼은 어떻게 된 거야?”곽승재는 자신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저희 부부가 갈등을 좀 일으켰는데 그저 홧김에 한 말입니다.”“홧김에 하는 말이라고 해도 나한테 전혀 예의를 차
백유미는 시선을 거두고, 곽현수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큰아버지, 죄송해요. 저는 승재랑 함께 있고 싶지만, 너무 성급하게 굴면 그가 저를 싫어할까 걱정이에요.”“네가 귀국해서 GS 그룹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다 지지했잖아. 근데 지금 와서 승재의 마음도 못 잡아놓고 나더러 프로젝트에 투자해달라고? 말이 돼?”곽현수 매우 불만스러워했다.백유미가 말했다.“큰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제가 못나서 그런 거죠. 승재 일에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드려요. 사실 이런 사소한 일로 큰아버지를 귀국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큰아버지도 보시다시피 승재는 고은서에게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그들을 완전히 떼어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프로젝트는 친척에게 부탁할 건데 그가 잘되어야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아버지의 회사도 큰아버지와 승재의 배려 덕분에 간신히 운영되고 있어서, 이렇게 많은 자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큰아버지께 도움을 청한 겁니다.”곽현수가 차갑게 말했다.“자금은 내가 줄 수 있어. 네가 뭘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여 승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야 해.”“열심히 할게요.”백유미는 대답했지만, 여전히 좀 이해가 안 됐다.“승재는 큰아버지 아들인데 왜 그를 괴롭히시는 거예요?”곽현수가 쌀쌀하게 말했다.“자기 일이나 잘해. 다른 건 네가 간섭할 필요 없어!”백유미는 눈치 있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싸늘한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고은서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낮잠을 못 주무셨는지 전미자의 안색은 다소 피곤해 보였고, 장순이가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다.“할머니!”고은서가 달콤하게 불렀다.“은서 왔어.”전미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할머니한테 와!”“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매년
“이제야 마누라 아까운 거 알겠냐.”전미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자를 노려보았다.“진작에 뭐 했어?”“할머니...”“할머니 말씀 맞아요. 예전에는 내가 잘해주지 못했어요.”고은서가 말하려던 찰나, 곽승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네 탓이 아니야, 내가 너무 무리했어.”이 말을 하고 나서 고은서는 전미자에게 말했다.“외삼촌과 외숙모가 거의 올 때가 된 것 같아요. 할머니, 저 좀 나가볼게요.”그녀는 곽승재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백유미의 말이 자꾸 떠올라 그에게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고은서가 핑계를 댄 걸 알았지만 전미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고은서가 나간 후, 전미자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다.“저리 가, 너는 서툴러서 은서의 반도 못 해!”곽승재는 손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아직도 멍하니 뭐해. 마누라한테 가지 않고!”전미자가 불만스럽게 말했다.곽승재도 거절하지 않고 고은서를 따라갔다.외삼촌과 외숙모는 과연 도착해서 곽 씨 일가족과 친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고은서는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지 않아 조용한 곳에 앉았다.도우미에게 물을 시키려는 순간, 깡마른 팔 하나가 뻗어 나왔다.곽승재가 그녀에게 물잔을 내밀었던 것이다.따끈한 물컵을 보며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왜 왔어?”곽승재는 물잔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내 손이 서툴다고 쫓아냈어.”고은서가 말했다.“그럼 친척들에게 인사하고 와. 난 잠시 조용히 있고 싶어.”곽승재는 그녀 옆에 앉으면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아버지 말씀은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분은 누구에게나 불만이 많으셔. 너에게만 그런 게 아니야.”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백유미에게는 꽤 만족해 보이더라.”곽승재: “백 씨 아저씨는 예전에 호원 저택의 집사였고 아버지는 그를 꽤 신뢰했었어. 그래서 백유미에게도 몇 푼의 애정이 더해진 거야.”곽승재가 그
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고은서, 왜 모든 일에 유미를 끌어들이는 거야? 이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조사하는 이유는 네가 진실을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야.”고은서는 코웃음 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에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전에 몇 번이나 엉뚱한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갔는데, 방금 아버지 앞에서도 또 그런 말을 하더라. 내가 무슨 행동을 했길래 너에게 유미와 결혼할 거라는 착각을 준 거야?”고은서는 속으로 말했다.‘착각이 아니야. 전생에서도 너는 백유미 때문에 나와 이혼했어. 그리고 내가 너희들의 결혼식을 망칠까 봐 나를 정신병원에서 못 나가게 했잖아.이번 생에서는 내가 방해하지 않아서 네가 아직 그녀에 대한 감정을 깨닫지 못한 것뿐이야.’이 말을 당연히 곽승재에게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은서는 며칠 전의 일을 꺼냈다.“지난번에 할머니가 보내주신 약을 넣은 해삼탕을 네가 마셨잖아. 내가 널 거절한 후 너 백유미를 찾아간 거 아니었어?”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고은서, 네 마음속에서 나는 그렇게 도덕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냐? 와이프가 있는데 왜 다른 여자를 찾아?”정상적인 남자는 그럴 리 없겠지만, 그는 애초에 그녀에게 감정이 없는 데다 약까지 먹었으니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어쨌든 그 이틀 동안 그는 아무 소식이 없었고, 그 후에 고은서는 백유미의 인스타에서 식사 모임 사진을 보았다.곽승재는 그녀의 생각을 읽고, 참지 못하고 그녀의 섬세한 턱을 살짝 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그때 나는 병원에 갔어. 진료 기록을 보여줘?”고은서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럴 필요 없어. 난 이미 전에 말했잖아. 네 일에 관심 없다고.”곽승재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고은서, 그때 네가 성아연을 보내 소란을 피우게 한 것도 내가 그 며칠 계속 유미한테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그날 유미는 아저씨가 나에게 고맙다고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어. 그런데 내가
내일 순조롭게 이혼할 수 있으려나?“형부랑 무슨 얘기 한 거야? 싸웠어?”이때 고은혜가 다가왔다.고은서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넌 왜 여기 있어?”고은혜는 옆에 앉으면서 귀찮은 듯 말했다. “엄마한테 끌려온 거야. 오늘 온 사람 중에 괜찮은 남자가 있는지 보라잖아.”외숙모는 고은혜에게 부잣집 신랑감을 소개해 줄 기회만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나한테 무슨 볼일이야?”고은서가 물었다.그냥 수다 떨려고 온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그 정도로 좋지는 않았으니까.고은혜가 말했다.“지난번 형부가 파리에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형부가 먼저 그 친구한테 얘기 좀 해놓고 나한테 연락처를 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고시은: “너 방금 승재를 봤잖아. 왜 직접 말 안 해?”고은혜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화장실에서 고시은과 함께 곽승재에 대해 그렇게 말해놓고 어떻게 다시 부탁할 수 있겠는가.“넌 그의 와이프니까, 당연히 네가 말해야지. 또 내가 그에게 접근하려고 한다고 오해하지 말고!”고은혜는 약간 짜증이 난 듯 말했다.“도대체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지난번에는 내가 해외로 나가길 바란다고 하더니 그냥 해본 말이었어?”고시은은 고은혜를 흘겨보더니 말했다.“상대방 연락처를 가져서 무슨 소용 있어? 외숙모가 너 해외 가는 걸 허락했어?”“아직 허락은 못 받았지만, 아빠는 거의 설득했어. 지금 며칠 동안 기분 좋을 때 계속 설득하면 엄마도 허락하실지 몰라.”고은혜는 이 말을 하면서 얼굴에 기쁜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되든 간에, 나도 파리 쪽 상황을 미리 알고 싶어. 마음의 준비도 있어야지.”고은혜가 주동적으로 외삼촌을 설득하고 또 미리 학교 상황을 알아보려는 걸 보니 그 결심이 꽤 굳은 것 같았다.“이따가 기회가 되면 물어볼게. 하지만 그가 꼭 도와줄지는 보장할 수 없어.”고은서가 말했다.아까 곽승재가 갈 때 안색이 안 좋았는데, 그가 혹시라도 꽁하게 기억하고 있으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그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한 말로 자존심이 상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로 했다.엘리베이터가 이내 1층에 도착했다로비에 도착하자 주민기가 일행과 함께 곽승재에게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연락받고 바로 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괜찮으세요?”곽승재가 쌀쌀하게 대꾸했다.“아직 위층에 있으니 경찰서로 데려가서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어깨는 왜 그러십니까?”주민기가 곽승재의 상처를 보고 놀라 물었다.“호텔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어쩌다 이렇게 다치신 거죠?”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하기 싫다는 기색을 풍겼다.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저를 도우려다가 범인들의 칼에 베였어요.”“칼까지 썼단 말입니까?”주민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사모님, 기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을 병원으로 모셔주세요. 여기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이 상황에서 고은서도 호칭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와 함께 로비 출입구로 향하던 고은서는 밖에서 빛나는 스포츠카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고은서!”민시후였다.그는 차에 시동을 끌 여유도 없이 바로 고은서 앞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이야? 아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핸드폰은 어디 갔어?”민시후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고은서와 통화 중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급히 온 모양이었다.“나는 괜찮아. 핸드폰은 위에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곽승재가 다쳐서 일단 함께 병원에 가려던 참이야.”민시후는 그제야 곽승재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 대표, 우연이네. 여기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을 들은 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너랑 무슨 상관인데?”“쯧.”민시후는 곽승재의 다친 어깨를 보고 혀를 찼다.그는 비아냥거리는
그때 온몸에 흰 분말이 묻어 유령 같은 두 남자가 다시 그녀 앞에 다가왔다.“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누가 너희를 보낸 거지?”고은서가 다급하게 물었다.“여기는 호텔이야. 곳곳에 CCTV가 있어 도망치기 힘들 거야. 지금 포기하면 너희 책임을 묻지 않겠어!”“같잖은 말은 집어치워!”양한겸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돈을 받았으니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상황 파악이 됐으면 순순히 따라와.”양한겸은 말하며 고은서를 잡으려 다가왔다.“악!”“멈춰!”고은서가 다리를 들어 양한겸을 차는 동시에 위쪽 계단에서 차가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두 남자도 자연스레 빼어난 옷차림에 차가운 눈빛을 한 곽승재를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하지만 싸움 실력이 있고 두 사람이다 보니 곽승재의 출현에 두 사람은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양한겸이 위협하며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고은서에게로 주의를 돌렸다.“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신현준이 고은서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고은서도 몇 가지 호신술을 배웠기에 위급한 순간에 재빨리 몸을 아래로 굴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악!”고은서가 몸을 숙이자마자 머리 위에서 신현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곽승재가 그를 발로 차 쓰러뜨린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일으켜 자신 뒤에 숨기고 양한겸을 향해 발을 뻗었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양한겸은 곽승재의 공격을 피하며 곽승재에게 손을 뻗어 공격해 왔다.쓰러져있던 신현준도 다시 일어나 싸움에 가세했다.비록 2대 1의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이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다.곽승재의 공격은 정교하고 매서웠으며 훈련된 자의 실력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봤던 터라 그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고은서가 위층으로 올라가 도움을 청할지 고민하던 중 양한겸이 주머니에서 스프링 나이프를 꺼내 곽승
탁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서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고개를 들자 놀란 고은서는 자신을 덮친 사람이 모자와 마스크를 쓴 깡마른 남자임을 알아차렸다.그 옆에는 같은 복장을 한 키가 크고 마른 동료가 서 있었다.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깡마른 남자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키 큰 남자는 빠르게 방문을 닫고 동료와 함께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두 남자의 행동은 빠르고도 다급했다.고은서는 목이 조여 매우 괴로웠지만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두 남자를 공격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비상구에 다다랐을 때 고은서는 복도에서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읍! 읍!”고은서가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이미 두 남자는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벨은 이미 멈췄고 직원들이 상황을 점검하러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상함을 눈치챌 때쯤이면 나는 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겠지.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이 두 사람인가? 대체 누가 보낸 거지?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두 남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은서를 끌고 가는 것이 불편했는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테이프를 꺼내 그녀의 입을 막았다.양한겸은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피가 머리로 쏠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입이 막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은서는 지난번 서인수 일당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1층까지 내려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방법을 찾아야 해. 호텔을 벗어나면 위험해.’고은서가 머물던 층은 높지 않았고 양한겸과 신현준은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에 도달할 것이다.고은서는 매달려 있는 동안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으며 양한겸이 코너 쪽 난간으로 다가갔을 때 발끝으로 힘껏 난간을 걸었다.방심한 양한겸은 무게에 이끌려 뒤로 무게 중심이 쏠리며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었다.고은서는 어지러
백유미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미리 말해주면 협조할게.”말을 마친 고은서가 싸늘하게 덧붙였다.“양쪽에서 이득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날 속이고 양쪽에서 이득을 보려 한다면 지훈 씨는 솟아날 구멍조차 없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은 흠칫했다.‘내 생각을 눈치챘나 보네. 내가 고은서를 너무 얕봤어. 돈 많고 외로운 귀부인 타입은 아니야.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야.’통화를 마친 원지훈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범가온이 물었다.“지훈아, 믿을만한 사람이야? 네가 말했잖아. 회사에 문제 생긴 것도 그 여자 때문이라고. 또 우리를 끌어드리려는 게 결국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야?”원지훈이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며 답했다.“고은서가 미워하는 건 백유미지 우리가 아니야. 어차피 백유미 밑에서 총알받이 취급을 받으면서 백유미 눈치를 봐야 하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이 기회에 물 흐리면서 고은서랑 백유미가 싸우는 걸 보자고. 나는 그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고. 좋은 기회잖아.”말은 그럴듯했지만 범가온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하지만 백유미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 고은서가 실패하고 백유미가 우리가 도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지훈도 백유미의 수완을 잘 알고 있었다.이번 스마트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백유미는 백씨 가문의 자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쉽게 외부 자금을 유치해 프로젝트를 성사했다.만약 고은서가 정말로 백유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었다.원지훈은 담배를 비벼 끄며 결심을 굳혔다.“달콤한 보답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지.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어.”고은서 역시 원지훈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백유미를 견제할 가장 좋은 무기였다.그의 결심을 더욱 굳히기 위해 고은서는 원지훈에게 돈을 추가로 송금했다.이내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백유미도 진행하던
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다정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등에서 땀이 났다.“나가서 밥 먹어.”“좋네. 같이 가자. 배고파 죽겠어.”민시후가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고은서가 살짝 피하며 말했다.“미안, 약속 있어.”민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누구랑? 하루 종일 못 봤는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민시후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가끔은 민시후가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옆에 있던 송민아의 쓸쓸한 모습을 힐끔 본 고은서는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아 씨는 시간 있대. 민아 씨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민시후가 발끈했다.“고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송민아와 파혼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 진짜 약속 있어. 먼저 갈게.”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민시후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직 집 보러 안 갔지? 내일 같이 가서 보자.”송민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고은서는 미안하면서도 난감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식당이라기보단 관광지 같았다.넓은 식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는 작은 다리와 정자들이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가득했다.얼마 가지 않아 고은서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성준을 발견했다.유성준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모습은 시크함과 더불어 온화함도 느껴졌다.“성준 오빠, 오래 기다렸죠?”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유성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회사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괜찮아요. 운전하면 금방이던데요.”“이거 받아.”유성준은 마술처럼 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내밀었다.고은서는 귀여운 인형을 건네받으면서도 정신이 멍해졌다.유성준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어릴
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