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남자는 머리채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빠져나왔다.“얼른 저년을 잡아!”정신이 든 서인수는 아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명령을 내렸다.머리를 공격당한 남자는 얼른 고은서를 쫓아갔다.뒤에서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고은서는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고 죽을힘을 다해 밖으로 달려갔다.그들이 처한 곳은 황량한 숲이라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이곳의 유일한 광원은 달빛뿐이었다.고은서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숲을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산길이 험한 데다가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진 고은서는 발밑이 땅에 제대로 닿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마 도망가지 않아 고은서는 남자에게 목덜미를 잡혔다.“계속 도망쳐 보세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죠!”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고은서를 폐가로 끌고 갔다.약효가 올라와서인지 고은서는 자기 감각과 두뇌가 무뎌진 것만 같았다.얼마 남지 않은 이성은 그녀에게 이렇게 끌려가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만약 폐가에 다시 끌려간다면 그녀는 정말 독 안에 든 쥐가 될 게 분명했다.그래서 고은서는 자신의 혀끝을 꾹 씹으며 거센 통증으로 이성을 조금 되찾으려 했다.폐가 문 앞까지 거의 끌려온 것을 보고 고은서는 뒷발로 남자의 명치를 걷어찼다. 남자는 아파서 허리를 굽혀 다리를 모았고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 했지만, 이 행위에 더 화가 난 남자는 고통을 참으면서 고은서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방안의 불빛을 빌어 고은서는 남자의 이마에 상처가 한 줄 생겨난 것을 보았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빨간 피는 그의 미간과 볼까지 흘러내려 보기에 흉측하고 험악하기 그지없었다.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은서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며 다른 쪽 다리로 남자의 머리를 힘차게 걷어찼다.안타깝게도 남자는 고은서를 놓아주면서 구르기로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신속하게 일어나서 도망가려는 고은서를 붙잡고 백핸드로 그녀를 땅바닥에 엎드리게 했다.“재주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의 팔다리를 묶은 끈이 풀렸다. 그녀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속으로 안겨졌다.“은서야, 너 괜찮아?”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고은서는 얼얼하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미간을 보았다. 게다가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승재 오빠?”고은서는 확신이 들지 않아 입을 열어 물었다.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머리가 부스스하며 홍조를 띤 얼굴에 두 개의 뚜렷한 손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앵두처럼 빨갛고 몸도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지금 그녀의 꼴을 보아하니 고생도 많이 했지만,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먹은 게 분명했다.곽승재는 살기가 올라와 당장에서 서인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감히 은서에게 손을 대다니!’“대표님, 서인수는 틈을 타서 도망쳤습니다.”주민기가 보고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사람을 시켜서 계속 찾으세요. 이 산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사람을 꼭 잡아내세요!”고은서는 놀란 듯 눈을 드리우더니 곽승재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여기는 저에게 맡기시고 대표님은 얼른 사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보세요.”주민기가 말했다.곽승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어질어질한 고은서를 안고 차에 올라타 가장 빠른 속도로 그녀를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 선생님께서는 얼굴의 손바닥 자국과 손목의 결박 자국을 제외하면 다른 외상은 없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를 보아하니 일종의 환각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환자분 지금의 상태로는 순순히 위세척할 것 같지는 않네요. 생고생만 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이런 약물을 복용한 환자는 일반적으로 합병증과 후유증을 겪지 않으니, 치료를 무조건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얌전한 편이니 일단 집에서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지금 있는 곳이 예원 별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곽승재는 고은
곽승재는 고은서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가냘픈 고은서가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 곽승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생겼다.“은서야, 나한테 감정이 남아있으면서 왜 굳이 이혼하겠다는 거야?”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이혼?”고은서는 또 그의 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방금 눈물을 흘렸던 탓에 고은서는 눈가와 코끝이 모두 빨개졌고 거기에 홍조를 띤 얼굴을 가하면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저 이혼 안 해요!”고은서는 또 눈물을 흘리며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오빠도 이제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 근데 왜 이혼하려고...”곽승재는 어리둥절해졌다.‘이혼이란 두 글자만 들은 거네.’곽승재는 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와 그날 사무실에서 이혼 합의서를 받았을 때 격동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받들고 입술에 벌칙으로 키스를 퍼부었다.“네가 이혼하겠다고 제기한 거잖아!”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의 말을 듣지 않고 입술을 가린 채 수줍어하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오빠가 나... 나에게 키스했어요! 나에게 키스하다니! 이젠 저를 미워하지 않는 건가요?”“내가 언제 너를 미워한다고 했어?”“우와!”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도로 키스했다.“오빠, 저 너무 기뻐요!”고은서는 정신이 멀쩡할 때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곽승재는 예전에도 고은서에게 키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은서는 크게 화를 냈고 심지어 그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그의 스킨십에 흥분하고 주동적으로 키스를 되돌려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완전히 자기 품에 안겨 있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맞춤도 받았으며 코끝에 온통 그녀의 포근한 향기가 느껴지자 마음속의 욕망은 손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고은서의 날씬한 허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좀 더 기뻐하고 싶지 않아?”고은서의 얼굴은 이미
낯설면서도 과격한 키스에 고은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흥분되기도 했다.곽승재가 커다란 손을 고은서의 등 안으로 넣자, 그녀는 감전된 듯한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은서가 협조적으로 몸을 들어 올리자, 곽승재는 더 제멋대로...욕망이 가득한 밤이었다.꿈속에 빠져 마침내 애인의 호응을 받은 줄 아는 일편단심 한 여자가 있었고 평소에 냉정하고 자제하던 사람이 지금은 지칠 줄 모르는 거친 남자가 되었다.그들은 모두 상대방이 왜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누구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서로 필사적으로 얽매이며 아낌없이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오늘 밤에 모든 열정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창밖의 밤 기온은 차가웠지만, 집 안의 분위기는 불처럼 뜨거웠다. 하늘에 걸린 달마저 부끄러움을 못 이겨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이튿날 고은서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그녀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에서 물컵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만지지 못했다.그리고 그냥 살짝 움직였는데 몸과 팔에서 형용할 수 없는 시큰함이 느껴졌다.고은서는 힘겹게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이 낯선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안의 디자인을 보아하니 호텔 룸인 것 같았다.머릿속에 문뜩 어젯밤 서인수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고은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몸에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벌거벗은 어깨가 드러났다. 고은서는 얼른 이불로 자신을 꽁꽁 감싸고는 경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다행히 카메라나 다른 녹화 도구는 없어 보였다.‘어젯밤에 야산의 폐가에 잡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어쩌다가 호텔로 온 거지? 서인수가 선심을 써서 날 이곳에 버렸을 리 없는데.’드르륵.고은서가 필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할 때 베란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어보니 가운을 입은 곽승재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깼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만족스러운 말투를 들은 것 같았
‘곽승재 정말 영락없는 나쁜 놈이네. 제정신이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런 말을 녹음해서 내 입을 막다니!’“은서야, 어젯밤에 널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널 침대에 내려놓고 쉬라고 하니까 네가 계속 날 안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리고 널 사랑해 주라고 했어.”곽승재는 무슨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젖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얘기했지. 난 신이 아니라 남자라고.”고은서는 서인수가 자신에게 먹인 약이 강력한 환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예전에 박지연한테서 이런 약은 환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마음속에 집념이 있으면 상황이 더 심해진다고 들었었다.고은서는 비록 어젯밤에 병원과 호텔에 들른 기억은 없지만, 어렴풋이 꿈을 꾼 것 같았다.꿈속에서 그녀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갇혀 곽승재가 방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진상을 밝혀낸 뒤 곽승재는 드디어 고은서를 보러 왔다. 그리고 그녀를 안으면서 널 좋아해 주겠다고 말했다.고은서는 격동되어 부끄러움을 마다하고 곽승재에게 키스했다. 심지어 또 그와 더 깊은 스킨십을 하고 싶다고 표현했다.전생에 고은서는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곽승재에 대해 모두 깊은 집념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것은 그녀가 전생에 오매불망 갈망하고 기대했던 것들이었다.만약 일반적인 약물이었다면 그녀는 그저 신체적인 욕망이 있었을 뿐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곽승재를 거절하고 제지했을 것이었다.그러나 하필 환각제를 복용했던 거라 그녀의 집념이 무한대로 확대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본능적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간 것이었다.‘됐어. 이미 벌어진 일이야. 이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재수가 없어서 서인수 같은 쓰레기에 당해 이런 일을 겪은 거기도 해.’비록 곽승재에게 먹혔지만, 만약 서인수의 손에 계속 잡혀 있었다면 고은서는 어떤 고통을 당했을지 모른다.그리고 고은서가 아무리 곽승재에 대한 감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
곽승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머니에게 그녀와 운전사의 행방을 설명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다.“생신 잔치가 오후에 시작되는데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늦게 가겠다고 했어.”곽승재는 말을 이었다.“경찰서에서 기록을 작성해야 한대. 이따가 내가 같이 가줄게.”“응.”고은서의 가슴 한쪽에 막혀있던 곳이 뻥 뚫렸다.다행히 두 어르신은 놀라지 않으셨고 따라서 걱정도 들지 않게 하였다.“사람을 시켜서 옷 한 벌을 가져오게 해. 대충 씻고 우리는 기록하러 가자.”고은서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부아가 나서 물은 뒤 나중에는 줄곧 냉정하게 비하인드에 관해 물었고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아서 경찰서로 가려 한다. 곽승재는 정말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젯밤과 관련하여 다른 할 말이 없어?”“무슨 할 말?”고은서가 되물었다.“서인수는 붙잡혔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이 사실을 몰랐으니 좋은 일 아냐?”“그래서 내가 너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혼을 하려고 소란을 피웠어?”곽승재는 안색이 나빠졌다.‘이 일을 말하려고 했구나.’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네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어젯밤은 그냥 사고였어. 나도 위기를 기회로 생각해 네 탓을 하지 않을게. 어쨌든 네가 제때 나를 구했으니 서로 퉁치자.”“오늘 할머니 생신이 끝나면 내일 구청에 가서 이혼 절차를 밟자.”“고은서, 너 적당히 해.”곽승재는 발끈했다.“어젯밤 너는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라도 된냥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어?”사람 자체는 바뀌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렸다.고은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당한 건 나인데 어째서 네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네 눈에는 단지 일을 당한 것과 당하지 않는 관계야?”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그러면 아니야?”고은서가 되물었다.곽승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네 말은 어젯밤에 누가 됐든
“꺼져.”고은서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곽승재는 그녀의 붉어진 작은 얼굴과 수건 밑에 보일 듯 말 듯 희고 부드러운 다리를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뇌리에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고은서는 반쯤 수줍어하며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연약한 그것들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 욕망은 그 순간 절정에 달해 그녀가 울면서 용서를 빌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호흡이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한 발을 걷어찼다.“나가라고.”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곽승재를 차지 못했는데 거기다가 민첩하게 그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였다.고은서는 이때 수건만 두른 채 한쪽 발이 곽승재의 손에 잡혀 다리 밑이 거의 드러나는 부끄러운 자세였다.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질 것 같았다.“놓으라고.”곽승재는 손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할 일이 많고 고은서의 몸도 더 이상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손에 넣는 욕망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실력이 없으면 마음대로 손찌검할 생각을 하지 마.”목젖을 몇 번 세게 굴리고 곽승재는 그녀의 다리를 늦추고 몸을 돌려 욕실에서 물러났다.고은서는 즉시 문을 잠그고 자신의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찬물로 세수했다.그녀는 틀림없이 머리가 돌았을 것이다. 자신이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리를 뻗고 그를 걷어차서 자신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었다.방금 곽승재가 그녀의 발을 잡았을 때 눈에서 그녀를 삼키고 싶은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은서는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얼굴의 열이 식자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세면대 거울을 마주 보았다.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없었지만 그녀의 목, 쇄골, 어깨에는 다양한 정도의 키스 마크가 있었다.수건을 풀자 어떤 곳의 붉은 자국이 더 깊어지고 이빨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곽승재, 넌 정말 짐승이나 다름없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문밖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부드럽게 발라 주었다.어젯밤 밧줄에 묶였을 때 생긴 멍 자국인데 지금은 많이 옅어졌다.샤워할 때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곽승재가 어젯밤에도 약을 발라줬다고?’“병원이 바로 옆에 있으니 몸이 아프거나 매우 아프면 약을 먼저 처방받을 수 있어.”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의 얼굴이 또 약간 달아올랐다. 곽승재는 비록 어디가 불편한지 분명히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확실히 약간 붓고 아프고 불편했으며 걷는 것도 약간 아팠지만 이 일로 병원에 가기에는 그럴 낯짝이 없었다.“하나도 아프지 않거든.”말을 마친 고은서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그녀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이는 것을 눈치챘는지 곽승재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반쯤 껴안고 그녀를 호텔 밖으로 안고 나왔다.주차장에서 주민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목에 키스 마크가 보였는지 아니면 곽승재가 그녀를 껴안고 있어서 그런 건지 주천지는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바로 예의를 갖췄다.“대표님, 사모님.”“이 사람은 격투기와 운전 솜씨가 뛰어난 이 군입니다.주민기는 몸이 좋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군이라는 남자는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했다.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 네가 고은서의 운전을 책임져라.”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왜 나에게 운전기사를 배정해 줘?”곽승재는 담담하게 말했다.“너의 출입이 편리해지라고 그랬어. 밖에 나가면 저 사람은 네 경호원도 해줄 수 있고.”고은서는 둘러서 거절했다.“괜찮아, 어젯밤 일은 사고일 뿐이야. 난 경호원과 운전기사가 필요 없어. 필요하더라도 널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알아서 찾을게.”고은서는 또 곽승재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고 곽승재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참다못해 곽승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먼저 쓰고 있다가 사람 찾으면 얘기하자.”외부인 앞에서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고
고은서가 계속해서 뒤를 보고 있자 민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매번 여시은이 나타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고은서가 민시후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겠냐고 말하다 곧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처음 여시은을 만난 건 고양이 쿠아를 구할 때였다. 그 후 서운에서 여시은의 방에서 불이 났고, 이사 파티에서는 민시후가 함정에 빠졌다.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페인트가 뿌려졌고 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곽현수와 골프를 치던 장우현도 다쳤었다.모든 사건이 여시은이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면 여시은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은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을 만나러 간다며?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면 돼.”민시후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깟 고객 때문에 다친 너를 그냥 두고 가는 사람 같아 보여?”고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왜 혼자 이런 곳에 왔어? 비서도 기사도 없이?”“새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야. 그 회사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거든.”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운전기사 부를 시간이 없었고 송민아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빠서 이번엔 그냥 혼자 왔어.”민시후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다만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무언가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의 요청대로 민시후는 그녀를 근처의 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동네 병원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진료도 비교적 간편했다.다행히 고은서의 팔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cm 정도 되는 길이의 상처였고 지금은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주변이 이미 검붉게 부어 있어 보기에 꽤 충격적이었다.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 파상풍 예방주사도 맞혔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시은 씨, 전 괜찮아요.”고은서는 팔이 조금 아팠지만 상처를 보니 긁혔을 뿐 살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약국에 가서 씻고 약만 바르면 돼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여시은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혹시라도 감염되면 큰일이에요! 제 기사님이 앞에 있어요. 그분이 병원에 데려다 줄 거예요. 저가 대신 여기서 경찰을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고은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자기 사를 부르러 갔다.“은서 씨?”도로 옆에서 깜짝 놀란 듯 급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캐주얼 슈트를 입고 차에서 뛰어 내려오는 민시후의 모습이 보였다.개업식 때 민시후가 고은서를 도와 성동욱 일을 처리해 준 후, 그녀와는 거의 연락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두 번 전화를 걸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왔으며 민시후가 최근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살도 빠졌다는 얘기를 했었다.눈앞에서 다가오는 민시후를 보고 고은서는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왜 여기에 있어? 손은 왜 그래?”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물었다.“별거 아니 야.”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숙자들과 싸우다 철판에 긁혔어. 다행히 살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 같아. 시후 씨는 어떻게 여기 있어?”“고객과 약속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야!”그때 여시은의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시후 씨가 계시니 저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 빨리 은서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시은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민시후가 물었다.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여시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의 가정부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민시후는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차가워졌다.여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여기 유명한 동물
게임 회사의 작업실은 다소 오래된 작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단지에는 경비나 순찰을 하는 경비원도 없었다.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해 꽤 외진 곳이었다.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고은서는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남자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두 남자는 하나는 마르고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까무잡잡했다. 그들은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짐 꾸러미에는 많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인 듯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났다.고은서는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그녀는 차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자 차에 기대게 되었다.이제 차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이미 늦었고 두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두 남자의 눈가는 이상하리만치 붉었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점점 더 흥분된 듯 보였다. 그들은 입에서 지저분한 욕설을 뱉으며 다가왔다.“젠장, 오늘 운이 정말 좋아! 이 근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울 수 있을 줄 몰랐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도 만날 줄은!”“그렇지, 도시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이 피부를 보라고. 아주 보드라워! 하하하, 집으로 끌고 가서 잘 놀아보자고!”그때, 악취 나는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더럽게 손을 뻗으려 했고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의 아랫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다.까무잡잡한 남자는 그제야 반응해 고은서를 잡으려 했고 고은서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하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체격을 가졌고 고은서는 서 있는 자세 때문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그러자 남자는 화가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팔을 휘둘러 고은서를 향해 달려왔다.고은서는 민첩하게 몸을 낮추며 땅에 떨어진
육현석은 박지연의 말을 듣고 눈이 반짝였다.“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줘!”박지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그를 바라보며 더 분명하게 말했다.“말했잖아, 현석 씨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만약 빨리 돌아올 수 없다면 내가 당장 현석 씨를 찾아갈 거야!”육현석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듯, 바로 대답했다.“정말? 그럼 내가 비행기 표 예약해 줄게! 짐 싸고 있어, 내가 기사 불러서 병원으로 데리러 갈게!”“응!”박지연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미처 멀리서 혼자 서 있는 온승준을 보지 못했다.박지연이 남자 친구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온승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예전에, 그녀도 그렇게 그를 바라봤었고 그를 볼 때마다 눈이 반짝였었다.그는 그를 위해 L 국까지 갔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른 남자에게로 돌아갔고 박지연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그 순간, 온승준은 박지연을 완전히 잃었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게 차가웠고 무관심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박지연이 원한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복도에 서 있는 온승준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서리 맞은 배추처럼 기운이 빠져서 문을 붙잡고 있었다.“괜찮아? 의사 불러줄까?”박지연은 그가 몸이 불편해 보여 물었다.온승준은 그녀의 촉촉한 눈과 입가의 미소를 보며 가슴이 더 아파졌다.“지연아, 미안해.”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박지연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그러니 더 이상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길 바라.”그 말을 끝으로 박지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급히 떠났다.저녁 무렵, 게임 회사에서 나온 고은서는 박지연의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해주시로 간 박지연이 육현석과 이모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이제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단
박지연은 온승준이 휴대폰을 꺼내 드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봤다. 화면에 나타난 발신자는 온승준의 어머니였고 박지연은 유혜린과 관련된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온승준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우리 부모님이 약속하셨어. 내가 유 닥터랑 결혼만 하면 더 이상 너한테 연락하지 않겠다고.”그는 간절히 부탁했다.“나도 이제 곧 이 병원을 떠날 거고, 그러면 우리는 만날 기회가 없을 거야. 그냥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정말 안 받을 거야?”“응, 받을 수 없어.”박지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든,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고 잘 살아. 나에게 상처를 줬으니 이제 다른 여자에게는 더 이상 상처 주지 말았으면 해.”온승준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사실 그가 할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한 건 그 자신이었다. 박지연과 재혼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타협했던 것이었다.그때, 안소희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지연 언니,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안소희의 얼굴에 떠오른 흥분을 본 박지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안소희는 온승준을 한 번 쳐다본 뒤 박지연을 문밖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저쪽이요. 배달원이 본인 사인이 필요하다 해서요. 전화가 무음이라서 연결이 안 되길래 제가 배달원 데리고 왔어요!”“여기요! 여기로 가져다주세요!”안소희가 말을 마치자 배달원이 큰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박지연 씨, 본인 맞으시죠? 육 대표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여기다 사인해 주세요.”박지연은 서명을 마친 후 꽃다발을 받았다. 그 안에는 푸른 장미가 들어 있었고, 그 속에 길고 정교한 보석 상자가 들어 있었다.“빨리 열어보세요!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요!”안소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육현석과 박지연의 연애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보는 걸 좋아했다.박지연은 천천히 상자를 열
박지연은 순간 온승준이 술에 취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 유혜린은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밤새 그를 돌봐주었다.‘그날 밤, 무언가 일이 생겼던 걸까?’“그날, 나는 유 닥터가 단순히 나를 돌봐준 거라고만 생각했어.”온승준은 마치 박지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근데 유 닥터 말로는 내가 유 닥터를 너로 착각했다고 하더라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기를 방으로 끌고 갔다고...”“나는 술에 취해본 적이 없어서 술 취한 후 행동이 어떤지 몰라. 그런데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설민희 씨가 내가 술에 취해 너를 끌어안고 집에 데려가겠다고 하는 영상을 보여줬어. 그래서 내가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긴 해.”온승준은 이미 이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고 그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차분했다.“유 닥터는 원래 그 일을 없었던 걸로 하려고 했대. 나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는데 며칠 전에 자기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거야.”“유 닥터가 그 소식을 보냈을 때 나는 병원에서 어머니 퇴원 수속을 돕고 있었어. 그때 마침 어머니가 그 메시지를 봤고 그 후 나한테 유 닥터랑 결혼하라고 하셨어...”온승준은 박지연에게 설명하는 동안,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박지연은 그가 반항하려 했을 수도 있었지만 손주를 원하는 부모님을 이기기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이혼했잖아. 결혼이든 재혼이든 그건 자유야. 게다가 나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남자 친구’라는 말에 온승준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박지연 앞에 놓았다.“이거 주고 싶었어.”박지연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어제 악세서리 가게에서 봤던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목걸이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하나하나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조명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진열장에 전시된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는 건, 그 가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박지연은 온승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승준은 박지연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박지연은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두 분 결혼 축하해요. 행복하시길 바랄게요.”예상치 못한 말에 온승준은 말문이 막혔고 유혜린은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지연 씨, 축하해 주셔서 고마워요.”박지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와 함께 가게를 떠났다.차에 타자 박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말해. 난 괜찮아.”고은서는 그제야 불만을 터뜨렸다.“온 닥터 뭐야? 해외로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갑자기 유혜린이랑 결혼한다고 할 수 있지?”박지연은 차분히 대답했다.“아마 그 사람 부모님이 원해서 하는 결혼일 거야. 온 닥터도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고 시부모와 관계 좋은 아내라면 그도 나쁘지 않으니까.”박지연은 자신의 전 시부모를 잘 알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아들을 붙잡으려고 했고 그런 술책과 애처로운 연극은 계속될 거였다.온승준이 양보하는 건 그다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유혜린은 그의 첫사랑이었으니까. 고은서는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여전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전에 네가 상심해서 떠났을 때도 그 여자와 재혼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분명히 얼마 전에 너와 합치려 하다 거절당하자 그 길로 첫사랑과 결혼하게 틀림없어. 너무한 거 아니야?”박지연의 2년 넘은 연애와 헌신이 우스울 정도였다.하지만 박지연은 오히려 별다른 감정 없이 말했다.“그 두 사람 결혼하는 것도 잘된 일이지. 적어도 그 사람 부모님이 만족할 거고 그가 평온을 찾을 수 있으면 나도 더 편해질 거니까.”고은서는 이 부분에서는 동의했다.“그 집은 진짜 지옥이야. 일찍 빠져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냥 좀 화가 나서 그래. 온 닥터
박지연은 육현석이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충분한 안전감을 주겠다고 다짐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고은서가 기분 좋은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너 이모가 해주시에 계신다고 하지 않았어? 현석 씨랑 같이 가서 이모에게 소개해 주지 그래?”박지연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조금 더 지켜보려고. 급한 건 아니니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아직 온 닥터를 잊지 못한 거야?”“그럴 리가!”박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현석 씨랑 함께하기로 결심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다만 현석 씨가 너무 완벽해서 가끔은 지금의 행복이 다시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해서 그래.”고은서가 박지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그만! 그 사람 정말 괜찮지만 너도 꿀리지 않아!”“응, 알겠어!”두 사람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먼저 쇼핑몰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쇼핑을 즐기다가, 박지연의 시선은 보석 가게 진열창에 놓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고정되었다.“한번 들어가서 볼까?”고은서가 물었다.“좋아!”박지연이 흔쾌히 대답했다.예전의 박지연은 이런 비싼 물건을 사는 걸 아까워하며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을 더 아끼고 싶었고 사지 않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판매 직원이 목걸이를 꺼내자 박지연은 주저하지 않고 착용해 보았다. 고은서에게 어울리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승준 씨, 이 반지 정말 예쁘지 않아? 우리 들어가서 보자.”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유혜린이었고 그 옆에는 온승준이 서 있었다.오랜만에 본 유혜린은 조금 더 풍만해진 모습이었고 다정하게 온승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유혜린은 박지연을 발견하자 더욱 밝게 웃으며 말했다.“지연 씨, 정말 우연이네요. 친구분과 같이 악세서리 보러 오셨나 봐요?”그리고 박지연이 착용한 목걸이를 보고 덧붙였다.“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정말
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중요한 회의가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가봐.”곽승재는 고은서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죠.”남자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곽승재가 떠난 후, 남자는 이전의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고은서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식사 중에도 그녀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협력 제안을 적극적으로 했다.고은서는 그가 태도를 바꾼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연 대표님의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최대한 빠르게 실행 가능한 투자 계획서를 준비해 귀사에 전달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보시고 저희의 능력과 실력에 확신이 생기시면 그때 확답을 주셔도 됩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연 대표님께서 단지 곽 대표님의 체면을 봐서 협력을 고려하셨다면 저희와의 협력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와 곽 대표님은 그다지 특별한 관계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실망을 드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고은서의 직설적인 말에 연중서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는 처음에 고은서를 단지 외모만 반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자신의 가치를 높여 재벌 가문에 시집가기 위한 수단일 거라고 여겼다.그리고 방금 곽승재가 그녀에게 보여준 배려를 보며 연중서는 자기 생각을 굳혔다.그는 곽승재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고은서와의 협력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고은서가 그 모든 것을 직접 언급하며 대놓고 말했다.“고 대표님도 정말 농담을 잘하시네요. 방금 곽 대표님의 태도를 보세요. 고 대표님 말씀대로 고분고분 회의하러 가시던데요? 그런데 관계가 별로라니요?”연중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저는 그냥 곽 대표님과 친구가 되고 싶은 것뿐이에요. 고 대표님께서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고은서는 미소를 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