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의 팔다리를 묶은 끈이 풀렸다. 그녀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속으로 안겨졌다.“은서야, 너 괜찮아?”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고은서는 얼얼하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미간을 보았다. 게다가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승재 오빠?”고은서는 확신이 들지 않아 입을 열어 물었다.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머리가 부스스하며 홍조를 띤 얼굴에 두 개의 뚜렷한 손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앵두처럼 빨갛고 몸도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지금 그녀의 꼴을 보아하니 고생도 많이 했지만,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먹은 게 분명했다.곽승재는 살기가 올라와 당장에서 서인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감히 은서에게 손을 대다니!’“대표님, 서인수는 틈을 타서 도망쳤습니다.”주민기가 보고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사람을 시켜서 계속 찾으세요. 이 산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사람을 꼭 잡아내세요!”고은서는 놀란 듯 눈을 드리우더니 곽승재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여기는 저에게 맡기시고 대표님은 얼른 사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보세요.”주민기가 말했다.곽승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어질어질한 고은서를 안고 차에 올라타 가장 빠른 속도로 그녀를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 선생님께서는 얼굴의 손바닥 자국과 손목의 결박 자국을 제외하면 다른 외상은 없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를 보아하니 일종의 환각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환자분 지금의 상태로는 순순히 위세척할 것 같지는 않네요. 생고생만 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이런 약물을 복용한 환자는 일반적으로 합병증과 후유증을 겪지 않으니, 치료를 무조건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얌전한 편이니 일단 집에서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지금 있는 곳이 예원 별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곽승재는 고은
곽승재는 고은서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가냘픈 고은서가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 곽승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생겼다.“은서야, 나한테 감정이 남아있으면서 왜 굳이 이혼하겠다는 거야?”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이혼?”고은서는 또 그의 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방금 눈물을 흘렸던 탓에 고은서는 눈가와 코끝이 모두 빨개졌고 거기에 홍조를 띤 얼굴을 가하면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저 이혼 안 해요!”고은서는 또 눈물을 흘리며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오빠도 이제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 근데 왜 이혼하려고...”곽승재는 어리둥절해졌다.‘이혼이란 두 글자만 들은 거네.’곽승재는 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와 그날 사무실에서 이혼 합의서를 받았을 때 격동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받들고 입술에 벌칙으로 키스를 퍼부었다.“네가 이혼하겠다고 제기한 거잖아!”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의 말을 듣지 않고 입술을 가린 채 수줍어하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오빠가 나... 나에게 키스했어요! 나에게 키스하다니! 이젠 저를 미워하지 않는 건가요?”“내가 언제 너를 미워한다고 했어?”“우와!”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도로 키스했다.“오빠, 저 너무 기뻐요!”고은서는 정신이 멀쩡할 때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곽승재는 예전에도 고은서에게 키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은서는 크게 화를 냈고 심지어 그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그의 스킨십에 흥분하고 주동적으로 키스를 되돌려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완전히 자기 품에 안겨 있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맞춤도 받았으며 코끝에 온통 그녀의 포근한 향기가 느껴지자 마음속의 욕망은 손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고은서의 날씬한 허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좀 더 기뻐하고 싶지 않아?”고은서의 얼굴은 이미
낯설면서도 과격한 키스에 고은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흥분되기도 했다.곽승재가 커다란 손을 고은서의 등 안으로 넣자, 그녀는 감전된 듯한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은서가 협조적으로 몸을 들어 올리자, 곽승재는 더 제멋대로...욕망이 가득한 밤이었다.꿈속에 빠져 마침내 애인의 호응을 받은 줄 아는 일편단심 한 여자가 있었고 평소에 냉정하고 자제하던 사람이 지금은 지칠 줄 모르는 거친 남자가 되었다.그들은 모두 상대방이 왜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누구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서로 필사적으로 얽매이며 아낌없이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오늘 밤에 모든 열정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창밖의 밤 기온은 차가웠지만, 집 안의 분위기는 불처럼 뜨거웠다. 하늘에 걸린 달마저 부끄러움을 못 이겨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이튿날 고은서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그녀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에서 물컵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만지지 못했다.그리고 그냥 살짝 움직였는데 몸과 팔에서 형용할 수 없는 시큰함이 느껴졌다.고은서는 힘겹게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이 낯선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안의 디자인을 보아하니 호텔 룸인 것 같았다.머릿속에 문뜩 어젯밤 서인수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고은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몸에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벌거벗은 어깨가 드러났다. 고은서는 얼른 이불로 자신을 꽁꽁 감싸고는 경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다행히 카메라나 다른 녹화 도구는 없어 보였다.‘어젯밤에 야산의 폐가에 잡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어쩌다가 호텔로 온 거지? 서인수가 선심을 써서 날 이곳에 버렸을 리 없는데.’드르륵.고은서가 필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할 때 베란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어보니 가운을 입은 곽승재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깼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만족스러운 말투를 들은 것 같았
‘곽승재 정말 영락없는 나쁜 놈이네. 제정신이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런 말을 녹음해서 내 입을 막다니!’“은서야, 어젯밤에 널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널 침대에 내려놓고 쉬라고 하니까 네가 계속 날 안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리고 널 사랑해 주라고 했어.”곽승재는 무슨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젖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얘기했지. 난 신이 아니라 남자라고.”고은서는 서인수가 자신에게 먹인 약이 강력한 환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예전에 박지연한테서 이런 약은 환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마음속에 집념이 있으면 상황이 더 심해진다고 들었었다.고은서는 비록 어젯밤에 병원과 호텔에 들른 기억은 없지만, 어렴풋이 꿈을 꾼 것 같았다.꿈속에서 그녀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갇혀 곽승재가 방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진상을 밝혀낸 뒤 곽승재는 드디어 고은서를 보러 왔다. 그리고 그녀를 안으면서 널 좋아해 주겠다고 말했다.고은서는 격동되어 부끄러움을 마다하고 곽승재에게 키스했다. 심지어 또 그와 더 깊은 스킨십을 하고 싶다고 표현했다.전생에 고은서는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곽승재에 대해 모두 깊은 집념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것은 그녀가 전생에 오매불망 갈망하고 기대했던 것들이었다.만약 일반적인 약물이었다면 그녀는 그저 신체적인 욕망이 있었을 뿐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곽승재를 거절하고 제지했을 것이었다.그러나 하필 환각제를 복용했던 거라 그녀의 집념이 무한대로 확대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본능적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간 것이었다.‘됐어. 이미 벌어진 일이야. 이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재수가 없어서 서인수 같은 쓰레기에 당해 이런 일을 겪은 거기도 해.’비록 곽승재에게 먹혔지만, 만약 서인수의 손에 계속 잡혀 있었다면 고은서는 어떤 고통을 당했을지 모른다.그리고 고은서가 아무리 곽승재에 대한 감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
곽승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머니에게 그녀와 운전사의 행방을 설명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다.“생신 잔치가 오후에 시작되는데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늦게 가겠다고 했어.”곽승재는 말을 이었다.“경찰서에서 기록을 작성해야 한대. 이따가 내가 같이 가줄게.”“응.”고은서의 가슴 한쪽에 막혀있던 곳이 뻥 뚫렸다.다행히 두 어르신은 놀라지 않으셨고 따라서 걱정도 들지 않게 하였다.“사람을 시켜서 옷 한 벌을 가져오게 해. 대충 씻고 우리는 기록하러 가자.”고은서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부아가 나서 물은 뒤 나중에는 줄곧 냉정하게 비하인드에 관해 물었고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아서 경찰서로 가려 한다. 곽승재는 정말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젯밤과 관련하여 다른 할 말이 없어?”“무슨 할 말?”고은서가 되물었다.“서인수는 붙잡혔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이 사실을 몰랐으니 좋은 일 아냐?”“그래서 내가 너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혼을 하려고 소란을 피웠어?”곽승재는 안색이 나빠졌다.‘이 일을 말하려고 했구나.’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네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어젯밤은 그냥 사고였어. 나도 위기를 기회로 생각해 네 탓을 하지 않을게. 어쨌든 네가 제때 나를 구했으니 서로 퉁치자.”“오늘 할머니 생신이 끝나면 내일 구청에 가서 이혼 절차를 밟자.”“고은서, 너 적당히 해.”곽승재는 발끈했다.“어젯밤 너는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라도 된냥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어?”사람 자체는 바뀌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렸다.고은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당한 건 나인데 어째서 네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네 눈에는 단지 일을 당한 것과 당하지 않는 관계야?”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그러면 아니야?”고은서가 되물었다.곽승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네 말은 어젯밤에 누가 됐든
“꺼져.”고은서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곽승재는 그녀의 붉어진 작은 얼굴과 수건 밑에 보일 듯 말 듯 희고 부드러운 다리를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뇌리에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고은서는 반쯤 수줍어하며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연약한 그것들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 욕망은 그 순간 절정에 달해 그녀가 울면서 용서를 빌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호흡이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한 발을 걷어찼다.“나가라고.”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곽승재를 차지 못했는데 거기다가 민첩하게 그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였다.고은서는 이때 수건만 두른 채 한쪽 발이 곽승재의 손에 잡혀 다리 밑이 거의 드러나는 부끄러운 자세였다.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질 것 같았다.“놓으라고.”곽승재는 손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할 일이 많고 고은서의 몸도 더 이상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손에 넣는 욕망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실력이 없으면 마음대로 손찌검할 생각을 하지 마.”목젖을 몇 번 세게 굴리고 곽승재는 그녀의 다리를 늦추고 몸을 돌려 욕실에서 물러났다.고은서는 즉시 문을 잠그고 자신의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찬물로 세수했다.그녀는 틀림없이 머리가 돌았을 것이다. 자신이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리를 뻗고 그를 걷어차서 자신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었다.방금 곽승재가 그녀의 발을 잡았을 때 눈에서 그녀를 삼키고 싶은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은서는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얼굴의 열이 식자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세면대 거울을 마주 보았다.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없었지만 그녀의 목, 쇄골, 어깨에는 다양한 정도의 키스 마크가 있었다.수건을 풀자 어떤 곳의 붉은 자국이 더 깊어지고 이빨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곽승재, 넌 정말 짐승이나 다름없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문밖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부드럽게 발라 주었다.어젯밤 밧줄에 묶였을 때 생긴 멍 자국인데 지금은 많이 옅어졌다.샤워할 때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곽승재가 어젯밤에도 약을 발라줬다고?’“병원이 바로 옆에 있으니 몸이 아프거나 매우 아프면 약을 먼저 처방받을 수 있어.”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의 얼굴이 또 약간 달아올랐다. 곽승재는 비록 어디가 불편한지 분명히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확실히 약간 붓고 아프고 불편했으며 걷는 것도 약간 아팠지만 이 일로 병원에 가기에는 그럴 낯짝이 없었다.“하나도 아프지 않거든.”말을 마친 고은서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그녀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이는 것을 눈치챘는지 곽승재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반쯤 껴안고 그녀를 호텔 밖으로 안고 나왔다.주차장에서 주민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목에 키스 마크가 보였는지 아니면 곽승재가 그녀를 껴안고 있어서 그런 건지 주천지는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바로 예의를 갖췄다.“대표님, 사모님.”“이 사람은 격투기와 운전 솜씨가 뛰어난 이 군입니다.주민기는 몸이 좋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군이라는 남자는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했다.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 네가 고은서의 운전을 책임져라.”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왜 나에게 운전기사를 배정해 줘?”곽승재는 담담하게 말했다.“너의 출입이 편리해지라고 그랬어. 밖에 나가면 저 사람은 네 경호원도 해줄 수 있고.”고은서는 둘러서 거절했다.“괜찮아, 어젯밤 일은 사고일 뿐이야. 난 경호원과 운전기사가 필요 없어. 필요하더라도 널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알아서 찾을게.”고은서는 또 곽승재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고 곽승재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참다못해 곽승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먼저 쓰고 있다가 사람 찾으면 얘기하자.”외부인 앞에서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고
“아픈 건 아니고 약을 좀 사려고.”“무슨 약을 사려고? 주민기한테 사서 별장으로 보내라고 해.”고은서는 얼굴을 붉히며 기침했다.“불편해. 내가 가서 사면 돼.”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으로 짐작해 냈고 눈을 아래로 뜨면서 기쁜지 화난 지 모른 채 말했다.“객실에 안전용품이 다 준비되어 있어.”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미 조처를 해놓았다는 뜻을 알아차렸다.그러자 고은서는 시름을 놓았다. 어젯밤에 이미 사고가 발생했으니 아무래도 또 다른 사고를 만들어내서는 안 됐다.고은서가 긴장을 푸는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마음속의 분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예전에 나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암시한 적 있지 않아?”고은서는 말했다.“시간대마다 생각이 있으니 과거 얘기는 꺼내지 말자.”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예원 별장에 도착한 고은서는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이어 그는 옆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바로 껴안고 내렸다.“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의아했다.곽승재는 입을 열었다.“너 너무 늦게 가.”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처럼 이런 수단을 써서 접근하는 것에 이제는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곽승재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서 방으로 들어가자 장순이의 얼굴에는 의외로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그러고 나서 눈치껏 자기 일을 했다.고은서는 뻔뻔하게 애써 못 본 척하고 곽승재가 그녀를 안아서 올라가게 하였다.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목 자국을 가린 고은서는 단정한 화장을 하고 스탠드칼라의 치마로 갈아입은 뒤 트위드 자켓을 입으니 사람 자체가 기운이 있어 보였다.얼굴에는 더 이상 초췌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한 것은 오후 한나절이었다.차에서 내릴 때 곽승재는 그녀를 안고 내리려고 했지만 고은서가 막아서며 말했다.“혼자 갈게.”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안겨서 가면 얼마나 큰 관심을 끌까.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