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의 팔다리를 묶은 끈이 풀렸다. 그녀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속으로 안겨졌다.“은서야, 너 괜찮아?”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고은서는 얼얼하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미간을 보았다. 게다가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승재 오빠?”고은서는 확신이 들지 않아 입을 열어 물었다.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머리가 부스스하며 홍조를 띤 얼굴에 두 개의 뚜렷한 손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앵두처럼 빨갛고 몸도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지금 그녀의 꼴을 보아하니 고생도 많이 했지만,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먹은 게 분명했다.곽승재는 살기가 올라와 당장에서 서인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감히 은서에게 손을 대다니!’“대표님, 서인수는 틈을 타서 도망쳤습니다.”주민기가 보고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사람을 시켜서 계속 찾으세요. 이 산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사람을 꼭 잡아내세요!”고은서는 놀란 듯 눈을 드리우더니 곽승재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여기는 저에게 맡기시고 대표님은 얼른 사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보세요.”주민기가 말했다.곽승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어질어질한 고은서를 안고 차에 올라타 가장 빠른 속도로 그녀를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 선생님께서는 얼굴의 손바닥 자국과 손목의 결박 자국을 제외하면 다른 외상은 없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를 보아하니 일종의 환각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환자분 지금의 상태로는 순순히 위세척할 것 같지는 않네요. 생고생만 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이런 약물을 복용한 환자는 일반적으로 합병증과 후유증을 겪지 않으니, 치료를 무조건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얌전한 편이니 일단 집에서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지금 있는 곳이 예원 별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곽승재는 고은
곽승재는 고은서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가냘픈 고은서가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 곽승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생겼다.“은서야, 나한테 감정이 남아있으면서 왜 굳이 이혼하겠다는 거야?”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이혼?”고은서는 또 그의 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방금 눈물을 흘렸던 탓에 고은서는 눈가와 코끝이 모두 빨개졌고 거기에 홍조를 띤 얼굴을 가하면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저 이혼 안 해요!”고은서는 또 눈물을 흘리며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오빠도 이제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 근데 왜 이혼하려고...”곽승재는 어리둥절해졌다.‘이혼이란 두 글자만 들은 거네.’곽승재는 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와 그날 사무실에서 이혼 합의서를 받았을 때 격동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받들고 입술에 벌칙으로 키스를 퍼부었다.“네가 이혼하겠다고 제기한 거잖아!”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의 말을 듣지 않고 입술을 가린 채 수줍어하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오빠가 나... 나에게 키스했어요! 나에게 키스하다니! 이젠 저를 미워하지 않는 건가요?”“내가 언제 너를 미워한다고 했어?”“우와!”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도로 키스했다.“오빠, 저 너무 기뻐요!”고은서는 정신이 멀쩡할 때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곽승재는 예전에도 고은서에게 키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은서는 크게 화를 냈고 심지어 그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그의 스킨십에 흥분하고 주동적으로 키스를 되돌려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완전히 자기 품에 안겨 있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맞춤도 받았으며 코끝에 온통 그녀의 포근한 향기가 느껴지자 마음속의 욕망은 손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고은서의 날씬한 허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좀 더 기뻐하고 싶지 않아?”고은서의 얼굴은 이미
낯설면서도 과격한 키스에 고은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흥분되기도 했다.곽승재가 커다란 손을 고은서의 등 안으로 넣자, 그녀는 감전된 듯한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은서가 협조적으로 몸을 들어 올리자, 곽승재는 더 제멋대로...욕망이 가득한 밤이었다.꿈속에 빠져 마침내 애인의 호응을 받은 줄 아는 일편단심 한 여자가 있었고 평소에 냉정하고 자제하던 사람이 지금은 지칠 줄 모르는 거친 남자가 되었다.그들은 모두 상대방이 왜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누구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서로 필사적으로 얽매이며 아낌없이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오늘 밤에 모든 열정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창밖의 밤 기온은 차가웠지만, 집 안의 분위기는 불처럼 뜨거웠다. 하늘에 걸린 달마저 부끄러움을 못 이겨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이튿날 고은서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그녀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에서 물컵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만지지 못했다.그리고 그냥 살짝 움직였는데 몸과 팔에서 형용할 수 없는 시큰함이 느껴졌다.고은서는 힘겹게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이 낯선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안의 디자인을 보아하니 호텔 룸인 것 같았다.머릿속에 문뜩 어젯밤 서인수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고은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몸에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벌거벗은 어깨가 드러났다. 고은서는 얼른 이불로 자신을 꽁꽁 감싸고는 경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다행히 카메라나 다른 녹화 도구는 없어 보였다.‘어젯밤에 야산의 폐가에 잡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어쩌다가 호텔로 온 거지? 서인수가 선심을 써서 날 이곳에 버렸을 리 없는데.’드르륵.고은서가 필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할 때 베란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어보니 가운을 입은 곽승재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깼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만족스러운 말투를 들은 것 같았
‘곽승재 정말 영락없는 나쁜 놈이네. 제정신이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런 말을 녹음해서 내 입을 막다니!’“은서야, 어젯밤에 널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널 침대에 내려놓고 쉬라고 하니까 네가 계속 날 안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리고 널 사랑해 주라고 했어.”곽승재는 무슨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젖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얘기했지. 난 신이 아니라 남자라고.”고은서는 서인수가 자신에게 먹인 약이 강력한 환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예전에 박지연한테서 이런 약은 환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마음속에 집념이 있으면 상황이 더 심해진다고 들었었다.고은서는 비록 어젯밤에 병원과 호텔에 들른 기억은 없지만, 어렴풋이 꿈을 꾼 것 같았다.꿈속에서 그녀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갇혀 곽승재가 방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진상을 밝혀낸 뒤 곽승재는 드디어 고은서를 보러 왔다. 그리고 그녀를 안으면서 널 좋아해 주겠다고 말했다.고은서는 격동되어 부끄러움을 마다하고 곽승재에게 키스했다. 심지어 또 그와 더 깊은 스킨십을 하고 싶다고 표현했다.전생에 고은서는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곽승재에 대해 모두 깊은 집념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것은 그녀가 전생에 오매불망 갈망하고 기대했던 것들이었다.만약 일반적인 약물이었다면 그녀는 그저 신체적인 욕망이 있었을 뿐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곽승재를 거절하고 제지했을 것이었다.그러나 하필 환각제를 복용했던 거라 그녀의 집념이 무한대로 확대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본능적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간 것이었다.‘됐어. 이미 벌어진 일이야. 이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재수가 없어서 서인수 같은 쓰레기에 당해 이런 일을 겪은 거기도 해.’비록 곽승재에게 먹혔지만, 만약 서인수의 손에 계속 잡혀 있었다면 고은서는 어떤 고통을 당했을지 모른다.그리고 고은서가 아무리 곽승재에 대한 감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
곽승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머니에게 그녀와 운전사의 행방을 설명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다.“생신 잔치가 오후에 시작되는데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늦게 가겠다고 했어.”곽승재는 말을 이었다.“경찰서에서 기록을 작성해야 한대. 이따가 내가 같이 가줄게.”“응.”고은서의 가슴 한쪽에 막혀있던 곳이 뻥 뚫렸다.다행히 두 어르신은 놀라지 않으셨고 따라서 걱정도 들지 않게 하였다.“사람을 시켜서 옷 한 벌을 가져오게 해. 대충 씻고 우리는 기록하러 가자.”고은서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부아가 나서 물은 뒤 나중에는 줄곧 냉정하게 비하인드에 관해 물었고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아서 경찰서로 가려 한다. 곽승재는 정말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젯밤과 관련하여 다른 할 말이 없어?”“무슨 할 말?”고은서가 되물었다.“서인수는 붙잡혔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이 사실을 몰랐으니 좋은 일 아냐?”“그래서 내가 너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혼을 하려고 소란을 피웠어?”곽승재는 안색이 나빠졌다.‘이 일을 말하려고 했구나.’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네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어젯밤은 그냥 사고였어. 나도 위기를 기회로 생각해 네 탓을 하지 않을게. 어쨌든 네가 제때 나를 구했으니 서로 퉁치자.”“오늘 할머니 생신이 끝나면 내일 구청에 가서 이혼 절차를 밟자.”“고은서, 너 적당히 해.”곽승재는 발끈했다.“어젯밤 너는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라도 된냥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어?”사람 자체는 바뀌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렸다.고은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당한 건 나인데 어째서 네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네 눈에는 단지 일을 당한 것과 당하지 않는 관계야?”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그러면 아니야?”고은서가 되물었다.곽승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네 말은 어젯밤에 누가 됐든
“꺼져.”고은서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곽승재는 그녀의 붉어진 작은 얼굴과 수건 밑에 보일 듯 말 듯 희고 부드러운 다리를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뇌리에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고은서는 반쯤 수줍어하며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연약한 그것들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 욕망은 그 순간 절정에 달해 그녀가 울면서 용서를 빌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호흡이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한 발을 걷어찼다.“나가라고.”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곽승재를 차지 못했는데 거기다가 민첩하게 그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였다.고은서는 이때 수건만 두른 채 한쪽 발이 곽승재의 손에 잡혀 다리 밑이 거의 드러나는 부끄러운 자세였다.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질 것 같았다.“놓으라고.”곽승재는 손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할 일이 많고 고은서의 몸도 더 이상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손에 넣는 욕망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실력이 없으면 마음대로 손찌검할 생각을 하지 마.”목젖을 몇 번 세게 굴리고 곽승재는 그녀의 다리를 늦추고 몸을 돌려 욕실에서 물러났다.고은서는 즉시 문을 잠그고 자신의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찬물로 세수했다.그녀는 틀림없이 머리가 돌았을 것이다. 자신이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리를 뻗고 그를 걷어차서 자신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었다.방금 곽승재가 그녀의 발을 잡았을 때 눈에서 그녀를 삼키고 싶은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은서는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얼굴의 열이 식자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세면대 거울을 마주 보았다.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없었지만 그녀의 목, 쇄골, 어깨에는 다양한 정도의 키스 마크가 있었다.수건을 풀자 어떤 곳의 붉은 자국이 더 깊어지고 이빨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곽승재, 넌 정말 짐승이나 다름없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문밖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부드럽게 발라 주었다.어젯밤 밧줄에 묶였을 때 생긴 멍 자국인데 지금은 많이 옅어졌다.샤워할 때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곽승재가 어젯밤에도 약을 발라줬다고?’“병원이 바로 옆에 있으니 몸이 아프거나 매우 아프면 약을 먼저 처방받을 수 있어.”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의 얼굴이 또 약간 달아올랐다. 곽승재는 비록 어디가 불편한지 분명히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확실히 약간 붓고 아프고 불편했으며 걷는 것도 약간 아팠지만 이 일로 병원에 가기에는 그럴 낯짝이 없었다.“하나도 아프지 않거든.”말을 마친 고은서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그녀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이는 것을 눈치챘는지 곽승재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반쯤 껴안고 그녀를 호텔 밖으로 안고 나왔다.주차장에서 주민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목에 키스 마크가 보였는지 아니면 곽승재가 그녀를 껴안고 있어서 그런 건지 주천지는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바로 예의를 갖췄다.“대표님, 사모님.”“이 사람은 격투기와 운전 솜씨가 뛰어난 이 군입니다.주민기는 몸이 좋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군이라는 남자는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했다.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 네가 고은서의 운전을 책임져라.”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왜 나에게 운전기사를 배정해 줘?”곽승재는 담담하게 말했다.“너의 출입이 편리해지라고 그랬어. 밖에 나가면 저 사람은 네 경호원도 해줄 수 있고.”고은서는 둘러서 거절했다.“괜찮아, 어젯밤 일은 사고일 뿐이야. 난 경호원과 운전기사가 필요 없어. 필요하더라도 널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알아서 찾을게.”고은서는 또 곽승재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고 곽승재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참다못해 곽승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먼저 쓰고 있다가 사람 찾으면 얘기하자.”외부인 앞에서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고
“아픈 건 아니고 약을 좀 사려고.”“무슨 약을 사려고? 주민기한테 사서 별장으로 보내라고 해.”고은서는 얼굴을 붉히며 기침했다.“불편해. 내가 가서 사면 돼.”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으로 짐작해 냈고 눈을 아래로 뜨면서 기쁜지 화난 지 모른 채 말했다.“객실에 안전용품이 다 준비되어 있어.”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미 조처를 해놓았다는 뜻을 알아차렸다.그러자 고은서는 시름을 놓았다. 어젯밤에 이미 사고가 발생했으니 아무래도 또 다른 사고를 만들어내서는 안 됐다.고은서가 긴장을 푸는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마음속의 분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예전에 나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암시한 적 있지 않아?”고은서는 말했다.“시간대마다 생각이 있으니 과거 얘기는 꺼내지 말자.”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예원 별장에 도착한 고은서는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이어 그는 옆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바로 껴안고 내렸다.“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의아했다.곽승재는 입을 열었다.“너 너무 늦게 가.”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처럼 이런 수단을 써서 접근하는 것에 이제는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곽승재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서 방으로 들어가자 장순이의 얼굴에는 의외로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그러고 나서 눈치껏 자기 일을 했다.고은서는 뻔뻔하게 애써 못 본 척하고 곽승재가 그녀를 안아서 올라가게 하였다.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목 자국을 가린 고은서는 단정한 화장을 하고 스탠드칼라의 치마로 갈아입은 뒤 트위드 자켓을 입으니 사람 자체가 기운이 있어 보였다.얼굴에는 더 이상 초췌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한 것은 오후 한나절이었다.차에서 내릴 때 곽승재는 그녀를 안고 내리려고 했지만 고은서가 막아서며 말했다.“혼자 갈게.”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안겨서 가면 얼마나 큰 관심을 끌까.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
진형서가 말했다.“민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여시은이 해성에 오기 전의 상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현재 대표님은 해외에 계시고 여시은이 누군지 기억도 못 하고 계십니다. 해성의 일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이 조사 결과를 전해드리지 않았습니다. 고 대표님, 비록 저희 대표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이 자료는 고 대표님을 위해 조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 서류를 고대표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렸다.두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민시후는 정말로 여시은을 계속 조사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고은서는 민시후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최근에 다른 머리 아픈 일들로 인해 여시은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그녀는 민시후가 조사를 시작하고 진형서가 그 자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대표님, 이렇게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진형서가 사과의 말을 전했다.“제 처지도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고은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형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진형서는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고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다.사무실로 올라가려던 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민아를 만났다.“너 출장 가지 않았어? 오늘 돌아온 거야?”송민아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팔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닫은 송민아는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야? 곽 대표님이 인플루언서와 밤을 보내고 이제는 결혼하려고 한다던데?”곽승재와 인플루언서의 스캔들이 알려진 후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고 GS 그룹에서도 소문을 막지 않았다.네티즌들은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에게 반해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최근 인터넷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이미 여러 날 된 소식인데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나왔겠어
“은서야, 지금 곽승재 편을 든 거야?”박지연은 뒤늦게 반응하며 물었다.“육현석 말로는 엊그제 같이 곽승재를 만나러 갔었다며? 걔는 네가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더라. 아니다.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와 호텔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 미련은 없겠다.”박지연은 바로 스스로 부정했다.박지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볼일 봐. 퇴근 후에 다시 얘기하자.”박지연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고은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지연아.”“왜?”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아니야. 그냥 밖에 나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 시간 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가자.”“그게 다야? 깜짝 놀랐잖아.”박지연이 투덜댔다.“됐어. 가서 일해.”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동네 약국에서 긴급 피임약을 주문했다.비록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라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번으로 충분해.’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약품들도 몇 가지 골랐다.약을 고르던 중 이미숙이 노크했다.“사모님,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만들어 드릴까요?”고은서는 승낙했다.세수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고국성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미나가 수술비와 위자료를 요구하며 돈만 주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더구나.”‘그래도 약속은 지키네.’“은서야, 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났다던데 사실이야?”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를 좋아하던 고국성은 곽승재의 상황을 알고 걱정했다.고은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삼촌, 사실이든 아니든 저랑 다시는 곽승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 어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예요.”고국성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국성은 고은서가 능력도 갖추고 오미나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해결했으니 이제 그녀의
곽승재의 손아귀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고 그의 표정도 매우 차가웠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뚜렷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그녀의 눈앞을 스쳤던 것도 이렇게 광적이고 핏빛이 감도는 눈이었던 것 같다“왜 말이 없어?”곽승재는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은서는 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알고 싶은 건 다 알았잖아. 내가 뭘 더 말해야 해?”“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게 날 함정에 빠뜨리고 여자를 침대에 보내려고 그랬던 거야?”곽승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턱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맞아.”“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고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냉소를 지었다.“아니면?”그녀의 대답에 곽승재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그의 눈가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쓸쓸함이 차올랐다.곽현수에게 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녀는 이미 곽승재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만약 곽승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꾸몄다면 그녀 역시 충격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을 것이었다.“곽승재, 여러 번 말했잖아. 난 이미 너를 내려놓았다고. 이쯤이면 그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부었다.‘끝내려면 완전히 끝내야 해. 이러면 곽현수도 더 안심하겠지.’곽승재는 싸늘하게 웃었고 눈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은서까지 태워버릴 듯했다.“알았어. 고은서, 후회하지 마.”말을 마친 곽승재는 그녀를 내팽개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제자리에 멈춰선 고은서는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은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누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직원은 그녀의 객실 문은 밤새 열리지 않았다고 확답했다.‘곽승재는 취한 상태에서 약까지 먹었으니 이 방에 올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물에다 약을 너무 많이 타서 약효가 강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목에 남은 자국은 병 자국에 눌린 흔적일까? 사지의 뻐근함은 단순한 숙취의 후유증?’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고은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몸의 감각은 확실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정말 꿈이라고? 아니면... 그 남자는 곽승재였을까?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갈 때는 어떻게 나가고? 줄곧 날 잡고 싶다고 말했으니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머리가 복잡해진 고은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고은서는 재빨리 옷을 걸쳐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수많은 연예부 기자가 곽승재의 객실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들은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부으며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주민기가 경호원들과 함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그 혼란 속에서 어두운 표정을 한 곽승재가 고은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가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곽승재는 이미 어젯밤 일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은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곽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원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세요.]답장은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어떻게 곽승재를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고은서는 지금까지 극도의 긴장 속에 있었기에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긴장이 풀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이 바짝 마르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감각이 몰려왔다.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고은서는 휘청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낸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자자. 자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폭풍은 내일 다시 맞서면 돼.’자신을 그렇게 세뇌하듯 다독인 고은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녀는 더위에 시달렸다.그 뜨거움은 단순한 체온 상승이 아닌 몸속 혈액에서부터 느껴지는 타오르는 듯한 열기였다.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하고 심지어 차가운 물병을 목에 대어 보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피부의 모든 세포가 시원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열기 속에서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존재가 자신의 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무게감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가왔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호흡을 앗아갔다.남자의 낮고 거친 숨소리가 술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그리고 익숙한 남성의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그 향기는 고은서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호흡이 교차하고 서로의 몸이 닿자 고은서는 더 뜨거워졌고 마음속에서부터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그녀는 지금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별할 여유도 정력도 없었다.약과 술의 작용하에 고은서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손을 뻗었다.객실 안 에어컨 바람이 천천히 방안을 맴돌았다.낮은 온도로 설정된 냉기 속에서도 방 안의 온도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은은한 조명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단단히 엉켜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을 비췄다.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열기에 가득 찬 입맞춤을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목으로 옮겨갔다.방 안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다.그 향기는 마치 봄의 미풍에 섞인 향처럼 감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밤은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곽승재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재빨리 가방에서 숨겨둔 약을 꺼내어 물에 녹였다.긴장감 속에서 약은 빠르게 물속에 녹아들었고 고은서는 조심스럽게 그 물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큰 키를 가진 곽승재가 침대에 평평히 누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있었고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은 방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고은서가 조심스럽게 곽승재의 뺨을 건드리자 곽승재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은서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울림은 그대로 고은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고은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술 많이 마셔서 목마르지? 물 좀 마셔.”곽승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은서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고은서는 술에 취한 곽승재가 얼마나 고집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괜히 반박하는 것보다는 빨리 물을 마시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안 마실 거야?”“마실 거야.”곽승재는 요구를 덧붙였다.“근데 네가 직접 먹여 줘.”고은서는 긴장하며 최대한 빨리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조심스레 컵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만 곽승재는 한 모금 마시더니 뜨겁다며 굳이 고은서도 마셔보라고 했다.술에 취한 채 그녀가 안 마시면 자신도 안 마시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고은서는 순간 물을 그대로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꾹 참고 단순히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대충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컵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이제 됐지?”곽승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그리고 그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커다란 늑대처럼 그녀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은서야, 나 등 아파. 약 좀 발라줘.”고은서는 빨리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계
고국성은 이내 다가가 그와 악수하면서 인사했고 단은숙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유독 고은혜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곽승재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눈길을 고은서 쪽으로 돌렸다.그는 무언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승재야, 네 자리 남겨뒀으니까 얼른 앉아.”고국성은 고은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여서 앉을 수 있는 곳이 남아돌았는데 고국성은 하 곽승재를 고은서 옆에 앉히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속셈이 너무 선명했다.아무튼 고은서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낸 거였기에 그가 어디에 앉든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을 한 채 고은서 옆에 앉았다.너무 가까운 탓인지 그의 특유한 설송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이어 차를 따라주는 웨이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찻잔을 대신 들어주면서 슬쩍 옆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곽승재도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그의 체온이 피부결을 통해 뜨겁게 느껴지면서 고은서는 손을 확 거두어들였다.반면 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고은혜는 두 사람이 행여나 어색해할까 봐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음식이 다 오른 후 고국성은 자신이 소장해 둔 진귀한 술을 가져오라고 웨이터를 시켰다.고은서는 레스토랑에 오기 전부터 고국성한테 밥만 먹으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술이라도 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암시했었다.아니나 다를까 고국성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말대로 행동했다.“승재야, 평소에 너무 바빠서 별로 모일 시간도 없었는데 이 좋은 기회에 우리 실컷 마셔보자고.”고국성은 웨이터를 다시 내보내고 직접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기쁜 날인데 다 같이 마셔야죠.”곽승재가 제안했다.고국성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그래. 가족끼리 떠들썩하게 재밌게 보내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