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모님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예요. 오늘 저를 잘 모셔보세요. 제가 기분이 좋아서 사모님을 풀어줄지도 모르죠!”서인수는 고은서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는 우쭐거리며 말했다.“곽승재 씨가 말을 놨거든요. 저를 도와주는 사람은 곽승재 씨와 맞서는 거라고. 이번에 고아원에서 말을 바꾼 것도 곽승재 씨가 중간에 손을 썼기 때문일 거예요. 사모님은 남편을 잘 못 만난 죄밖에 없어요. 경제적으로 곽승재 씨와 맞설 수 없다면 저는 사모님이랑 자는 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려 곽승재 씨의 체면을 바닥까지 떨어지게 할 거예요!”고은서는 서인수가 이 정도로 미치게 나올지 몰랐다.자신의 죄를 모두 고은서에게 뒤집어씌우지 않는가 하면 이렇게 악랄한 방식으로 곽승재에게 보복하다니.고은서는 속이 점점 쓰리고 머리도 어지럽기 시작했다. 그녀는 혓바닥을 힘써 씹으며 통증으로 환각을 해소하려 했다.“한가지로 부족하니까 조미료를 좀 더 넣어야겠어!”서인수는 말하면서 또 하얀색 알약을 꺼내 고은서에게 먹이려 했다.고은서는 눈앞의 국면을 돌이킬 여지가 없는 것을 알고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 맞출게요. 약을 더 먹지 않아도 돼요...”“벌써 달통한 거예요? 아님. 원래부터 방탕한 사람이었어요?”서인수는 음탕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제가 달통해야죠. 하지만 제가 대표님 한 사람만 모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무래도 곽씨 집안의 사모님인데 체면을 좀 남기고 싶어요. 아무 신분도 없는 사람한테 터치 당하는 건...”서인수는 자신의 신분을 치켜세운 말을 듣자 우쭐거리면서 말했다.“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체면을 챙기는 거예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지 않아요?”“대표님, 제발 이 요구만을 들어주세요. 제가 대표님에게 최대한 맞춰줄게요. 그럼 대표님도 흥이 더 오르지 않겠어요?”이때 고은서는 약효가 올라와 얼굴이 발그레했고 말투도 한껏 부드러워졌다.서인수도 고은서의 나른한 말투에 큰 자극을 받았다
“악!”남자는 머리채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빠져나왔다.“얼른 저년을 잡아!”정신이 든 서인수는 아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명령을 내렸다.머리를 공격당한 남자는 얼른 고은서를 쫓아갔다.뒤에서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고은서는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고 죽을힘을 다해 밖으로 달려갔다.그들이 처한 곳은 황량한 숲이라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이곳의 유일한 광원은 달빛뿐이었다.고은서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숲을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산길이 험한 데다가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진 고은서는 발밑이 땅에 제대로 닿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마 도망가지 않아 고은서는 남자에게 목덜미를 잡혔다.“계속 도망쳐 보세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죠!”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고은서를 폐가로 끌고 갔다.약효가 올라와서인지 고은서는 자기 감각과 두뇌가 무뎌진 것만 같았다.얼마 남지 않은 이성은 그녀에게 이렇게 끌려가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만약 폐가에 다시 끌려간다면 그녀는 정말 독 안에 든 쥐가 될 게 분명했다.그래서 고은서는 자신의 혀끝을 꾹 씹으며 거센 통증으로 이성을 조금 되찾으려 했다.폐가 문 앞까지 거의 끌려온 것을 보고 고은서는 뒷발로 남자의 명치를 걷어찼다. 남자는 아파서 허리를 굽혀 다리를 모았고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 했지만, 이 행위에 더 화가 난 남자는 고통을 참으면서 고은서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방안의 불빛을 빌어 고은서는 남자의 이마에 상처가 한 줄 생겨난 것을 보았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빨간 피는 그의 미간과 볼까지 흘러내려 보기에 흉측하고 험악하기 그지없었다.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은서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며 다른 쪽 다리로 남자의 머리를 힘차게 걷어찼다.안타깝게도 남자는 고은서를 놓아주면서 구르기로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신속하게 일어나서 도망가려는 고은서를 붙잡고 백핸드로 그녀를 땅바닥에 엎드리게 했다.“재주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의 팔다리를 묶은 끈이 풀렸다. 그녀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속으로 안겨졌다.“은서야, 너 괜찮아?”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고은서는 얼얼하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미간을 보았다. 게다가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승재 오빠?”고은서는 확신이 들지 않아 입을 열어 물었다.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머리가 부스스하며 홍조를 띤 얼굴에 두 개의 뚜렷한 손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앵두처럼 빨갛고 몸도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지금 그녀의 꼴을 보아하니 고생도 많이 했지만,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먹은 게 분명했다.곽승재는 살기가 올라와 당장에서 서인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감히 은서에게 손을 대다니!’“대표님, 서인수는 틈을 타서 도망쳤습니다.”주민기가 보고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사람을 시켜서 계속 찾으세요. 이 산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사람을 꼭 잡아내세요!”고은서는 놀란 듯 눈을 드리우더니 곽승재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여기는 저에게 맡기시고 대표님은 얼른 사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보세요.”주민기가 말했다.곽승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어질어질한 고은서를 안고 차에 올라타 가장 빠른 속도로 그녀를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 선생님께서는 얼굴의 손바닥 자국과 손목의 결박 자국을 제외하면 다른 외상은 없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를 보아하니 일종의 환각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환자분 지금의 상태로는 순순히 위세척할 것 같지는 않네요. 생고생만 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이런 약물을 복용한 환자는 일반적으로 합병증과 후유증을 겪지 않으니, 치료를 무조건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얌전한 편이니 일단 집에서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지금 있는 곳이 예원 별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곽승재는 고은
곽승재는 고은서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가냘픈 고은서가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 곽승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생겼다.“은서야, 나한테 감정이 남아있으면서 왜 굳이 이혼하겠다는 거야?”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이혼?”고은서는 또 그의 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방금 눈물을 흘렸던 탓에 고은서는 눈가와 코끝이 모두 빨개졌고 거기에 홍조를 띤 얼굴을 가하면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저 이혼 안 해요!”고은서는 또 눈물을 흘리며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오빠도 이제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 근데 왜 이혼하려고...”곽승재는 어리둥절해졌다.‘이혼이란 두 글자만 들은 거네.’곽승재는 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와 그날 사무실에서 이혼 합의서를 받았을 때 격동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받들고 입술에 벌칙으로 키스를 퍼부었다.“네가 이혼하겠다고 제기한 거잖아!”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의 말을 듣지 않고 입술을 가린 채 수줍어하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오빠가 나... 나에게 키스했어요! 나에게 키스하다니! 이젠 저를 미워하지 않는 건가요?”“내가 언제 너를 미워한다고 했어?”“우와!”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도로 키스했다.“오빠, 저 너무 기뻐요!”고은서는 정신이 멀쩡할 때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곽승재는 예전에도 고은서에게 키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은서는 크게 화를 냈고 심지어 그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그의 스킨십에 흥분하고 주동적으로 키스를 되돌려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완전히 자기 품에 안겨 있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맞춤도 받았으며 코끝에 온통 그녀의 포근한 향기가 느껴지자 마음속의 욕망은 손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고은서의 날씬한 허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좀 더 기뻐하고 싶지 않아?”고은서의 얼굴은 이미
낯설면서도 과격한 키스에 고은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흥분되기도 했다.곽승재가 커다란 손을 고은서의 등 안으로 넣자, 그녀는 감전된 듯한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은서가 협조적으로 몸을 들어 올리자, 곽승재는 더 제멋대로...욕망이 가득한 밤이었다.꿈속에 빠져 마침내 애인의 호응을 받은 줄 아는 일편단심 한 여자가 있었고 평소에 냉정하고 자제하던 사람이 지금은 지칠 줄 모르는 거친 남자가 되었다.그들은 모두 상대방이 왜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누구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서로 필사적으로 얽매이며 아낌없이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오늘 밤에 모든 열정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창밖의 밤 기온은 차가웠지만, 집 안의 분위기는 불처럼 뜨거웠다. 하늘에 걸린 달마저 부끄러움을 못 이겨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이튿날 고은서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그녀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에서 물컵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만지지 못했다.그리고 그냥 살짝 움직였는데 몸과 팔에서 형용할 수 없는 시큰함이 느껴졌다.고은서는 힘겹게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이 낯선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안의 디자인을 보아하니 호텔 룸인 것 같았다.머릿속에 문뜩 어젯밤 서인수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고은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몸에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벌거벗은 어깨가 드러났다. 고은서는 얼른 이불로 자신을 꽁꽁 감싸고는 경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다행히 카메라나 다른 녹화 도구는 없어 보였다.‘어젯밤에 야산의 폐가에 잡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어쩌다가 호텔로 온 거지? 서인수가 선심을 써서 날 이곳에 버렸을 리 없는데.’드르륵.고은서가 필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할 때 베란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어보니 가운을 입은 곽승재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깼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만족스러운 말투를 들은 것 같았
‘곽승재 정말 영락없는 나쁜 놈이네. 제정신이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런 말을 녹음해서 내 입을 막다니!’“은서야, 어젯밤에 널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널 침대에 내려놓고 쉬라고 하니까 네가 계속 날 안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리고 널 사랑해 주라고 했어.”곽승재는 무슨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젖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얘기했지. 난 신이 아니라 남자라고.”고은서는 서인수가 자신에게 먹인 약이 강력한 환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예전에 박지연한테서 이런 약은 환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마음속에 집념이 있으면 상황이 더 심해진다고 들었었다.고은서는 비록 어젯밤에 병원과 호텔에 들른 기억은 없지만, 어렴풋이 꿈을 꾼 것 같았다.꿈속에서 그녀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갇혀 곽승재가 방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진상을 밝혀낸 뒤 곽승재는 드디어 고은서를 보러 왔다. 그리고 그녀를 안으면서 널 좋아해 주겠다고 말했다.고은서는 격동되어 부끄러움을 마다하고 곽승재에게 키스했다. 심지어 또 그와 더 깊은 스킨십을 하고 싶다고 표현했다.전생에 고은서는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곽승재에 대해 모두 깊은 집념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것은 그녀가 전생에 오매불망 갈망하고 기대했던 것들이었다.만약 일반적인 약물이었다면 그녀는 그저 신체적인 욕망이 있었을 뿐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곽승재를 거절하고 제지했을 것이었다.그러나 하필 환각제를 복용했던 거라 그녀의 집념이 무한대로 확대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본능적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간 것이었다.‘됐어. 이미 벌어진 일이야. 이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재수가 없어서 서인수 같은 쓰레기에 당해 이런 일을 겪은 거기도 해.’비록 곽승재에게 먹혔지만, 만약 서인수의 손에 계속 잡혀 있었다면 고은서는 어떤 고통을 당했을지 모른다.그리고 고은서가 아무리 곽승재에 대한 감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
곽승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머니에게 그녀와 운전사의 행방을 설명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다.“생신 잔치가 오후에 시작되는데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늦게 가겠다고 했어.”곽승재는 말을 이었다.“경찰서에서 기록을 작성해야 한대. 이따가 내가 같이 가줄게.”“응.”고은서의 가슴 한쪽에 막혀있던 곳이 뻥 뚫렸다.다행히 두 어르신은 놀라지 않으셨고 따라서 걱정도 들지 않게 하였다.“사람을 시켜서 옷 한 벌을 가져오게 해. 대충 씻고 우리는 기록하러 가자.”고은서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부아가 나서 물은 뒤 나중에는 줄곧 냉정하게 비하인드에 관해 물었고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아서 경찰서로 가려 한다. 곽승재는 정말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젯밤과 관련하여 다른 할 말이 없어?”“무슨 할 말?”고은서가 되물었다.“서인수는 붙잡혔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이 사실을 몰랐으니 좋은 일 아냐?”“그래서 내가 너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혼을 하려고 소란을 피웠어?”곽승재는 안색이 나빠졌다.‘이 일을 말하려고 했구나.’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네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어젯밤은 그냥 사고였어. 나도 위기를 기회로 생각해 네 탓을 하지 않을게. 어쨌든 네가 제때 나를 구했으니 서로 퉁치자.”“오늘 할머니 생신이 끝나면 내일 구청에 가서 이혼 절차를 밟자.”“고은서, 너 적당히 해.”곽승재는 발끈했다.“어젯밤 너는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라도 된냥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어?”사람 자체는 바뀌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렸다.고은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당한 건 나인데 어째서 네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네 눈에는 단지 일을 당한 것과 당하지 않는 관계야?”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그러면 아니야?”고은서가 되물었다.곽승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네 말은 어젯밤에 누가 됐든
“꺼져.”고은서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곽승재는 그녀의 붉어진 작은 얼굴과 수건 밑에 보일 듯 말 듯 희고 부드러운 다리를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뇌리에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고은서는 반쯤 수줍어하며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연약한 그것들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 욕망은 그 순간 절정에 달해 그녀가 울면서 용서를 빌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호흡이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한 발을 걷어찼다.“나가라고.”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곽승재를 차지 못했는데 거기다가 민첩하게 그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였다.고은서는 이때 수건만 두른 채 한쪽 발이 곽승재의 손에 잡혀 다리 밑이 거의 드러나는 부끄러운 자세였다.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질 것 같았다.“놓으라고.”곽승재는 손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할 일이 많고 고은서의 몸도 더 이상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손에 넣는 욕망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실력이 없으면 마음대로 손찌검할 생각을 하지 마.”목젖을 몇 번 세게 굴리고 곽승재는 그녀의 다리를 늦추고 몸을 돌려 욕실에서 물러났다.고은서는 즉시 문을 잠그고 자신의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찬물로 세수했다.그녀는 틀림없이 머리가 돌았을 것이다. 자신이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리를 뻗고 그를 걷어차서 자신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었다.방금 곽승재가 그녀의 발을 잡았을 때 눈에서 그녀를 삼키고 싶은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은서는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얼굴의 열이 식자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세면대 거울을 마주 보았다.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없었지만 그녀의 목, 쇄골, 어깨에는 다양한 정도의 키스 마크가 있었다.수건을 풀자 어떤 곳의 붉은 자국이 더 깊어지고 이빨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곽승재, 넌 정말 짐승이나 다름없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문밖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
고은서가 계속해서 뒤를 보고 있자 민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매번 여시은이 나타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고은서가 민시후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겠냐고 말하다 곧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처음 여시은을 만난 건 고양이 쿠아를 구할 때였다. 그 후 서운에서 여시은의 방에서 불이 났고, 이사 파티에서는 민시후가 함정에 빠졌다.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페인트가 뿌려졌고 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곽현수와 골프를 치던 장우현도 다쳤었다.모든 사건이 여시은이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면 여시은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은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을 만나러 간다며?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면 돼.”민시후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깟 고객 때문에 다친 너를 그냥 두고 가는 사람 같아 보여?”고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왜 혼자 이런 곳에 왔어? 비서도 기사도 없이?”“새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야. 그 회사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거든.”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운전기사 부를 시간이 없었고 송민아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빠서 이번엔 그냥 혼자 왔어.”민시후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다만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무언가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의 요청대로 민시후는 그녀를 근처의 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동네 병원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진료도 비교적 간편했다.다행히 고은서의 팔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cm 정도 되는 길이의 상처였고 지금은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주변이 이미 검붉게 부어 있어 보기에 꽤 충격적이었다.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 파상풍 예방주사도 맞혔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시은 씨, 전 괜찮아요.”고은서는 팔이 조금 아팠지만 상처를 보니 긁혔을 뿐 살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약국에 가서 씻고 약만 바르면 돼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여시은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혹시라도 감염되면 큰일이에요! 제 기사님이 앞에 있어요. 그분이 병원에 데려다 줄 거예요. 저가 대신 여기서 경찰을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고은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자기 사를 부르러 갔다.“은서 씨?”도로 옆에서 깜짝 놀란 듯 급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캐주얼 슈트를 입고 차에서 뛰어 내려오는 민시후의 모습이 보였다.개업식 때 민시후가 고은서를 도와 성동욱 일을 처리해 준 후, 그녀와는 거의 연락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두 번 전화를 걸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왔으며 민시후가 최근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살도 빠졌다는 얘기를 했었다.눈앞에서 다가오는 민시후를 보고 고은서는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왜 여기에 있어? 손은 왜 그래?”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물었다.“별거 아니 야.”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숙자들과 싸우다 철판에 긁혔어. 다행히 살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 같아. 시후 씨는 어떻게 여기 있어?”“고객과 약속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야!”그때 여시은의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시후 씨가 계시니 저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 빨리 은서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시은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민시후가 물었다.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여시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의 가정부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민시후는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차가워졌다.여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여기 유명한 동물
게임 회사의 작업실은 다소 오래된 작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단지에는 경비나 순찰을 하는 경비원도 없었다.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해 꽤 외진 곳이었다.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고은서는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남자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두 남자는 하나는 마르고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까무잡잡했다. 그들은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짐 꾸러미에는 많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인 듯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났다.고은서는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그녀는 차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자 차에 기대게 되었다.이제 차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이미 늦었고 두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두 남자의 눈가는 이상하리만치 붉었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점점 더 흥분된 듯 보였다. 그들은 입에서 지저분한 욕설을 뱉으며 다가왔다.“젠장, 오늘 운이 정말 좋아! 이 근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울 수 있을 줄 몰랐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도 만날 줄은!”“그렇지, 도시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이 피부를 보라고. 아주 보드라워! 하하하, 집으로 끌고 가서 잘 놀아보자고!”그때, 악취 나는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더럽게 손을 뻗으려 했고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의 아랫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다.까무잡잡한 남자는 그제야 반응해 고은서를 잡으려 했고 고은서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하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체격을 가졌고 고은서는 서 있는 자세 때문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그러자 남자는 화가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팔을 휘둘러 고은서를 향해 달려왔다.고은서는 민첩하게 몸을 낮추며 땅에 떨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