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모님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예요. 오늘 저를 잘 모셔보세요. 제가 기분이 좋아서 사모님을 풀어줄지도 모르죠!”서인수는 고은서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는 우쭐거리며 말했다.“곽승재 씨가 말을 놨거든요. 저를 도와주는 사람은 곽승재 씨와 맞서는 거라고. 이번에 고아원에서 말을 바꾼 것도 곽승재 씨가 중간에 손을 썼기 때문일 거예요. 사모님은 남편을 잘 못 만난 죄밖에 없어요. 경제적으로 곽승재 씨와 맞설 수 없다면 저는 사모님이랑 자는 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려 곽승재 씨의 체면을 바닥까지 떨어지게 할 거예요!”고은서는 서인수가 이 정도로 미치게 나올지 몰랐다.자신의 죄를 모두 고은서에게 뒤집어씌우지 않는가 하면 이렇게 악랄한 방식으로 곽승재에게 보복하다니.고은서는 속이 점점 쓰리고 머리도 어지럽기 시작했다. 그녀는 혓바닥을 힘써 씹으며 통증으로 환각을 해소하려 했다.“한가지로 부족하니까 조미료를 좀 더 넣어야겠어!”서인수는 말하면서 또 하얀색 알약을 꺼내 고은서에게 먹이려 했다.고은서는 눈앞의 국면을 돌이킬 여지가 없는 것을 알고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 맞출게요. 약을 더 먹지 않아도 돼요...”“벌써 달통한 거예요? 아님. 원래부터 방탕한 사람이었어요?”서인수는 음탕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제가 달통해야죠. 하지만 제가 대표님 한 사람만 모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무래도 곽씨 집안의 사모님인데 체면을 좀 남기고 싶어요. 아무 신분도 없는 사람한테 터치 당하는 건...”서인수는 자신의 신분을 치켜세운 말을 듣자 우쭐거리면서 말했다.“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체면을 챙기는 거예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지 않아요?”“대표님, 제발 이 요구만을 들어주세요. 제가 대표님에게 최대한 맞춰줄게요. 그럼 대표님도 흥이 더 오르지 않겠어요?”이때 고은서는 약효가 올라와 얼굴이 발그레했고 말투도 한껏 부드러워졌다.서인수도 고은서의 나른한 말투에 큰 자극을 받았다
“악!”남자는 머리채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빠져나왔다.“얼른 저년을 잡아!”정신이 든 서인수는 아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명령을 내렸다.머리를 공격당한 남자는 얼른 고은서를 쫓아갔다.뒤에서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고은서는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고 죽을힘을 다해 밖으로 달려갔다.그들이 처한 곳은 황량한 숲이라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이곳의 유일한 광원은 달빛뿐이었다.고은서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숲을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산길이 험한 데다가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진 고은서는 발밑이 땅에 제대로 닿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마 도망가지 않아 고은서는 남자에게 목덜미를 잡혔다.“계속 도망쳐 보세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죠!”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고은서를 폐가로 끌고 갔다.약효가 올라와서인지 고은서는 자기 감각과 두뇌가 무뎌진 것만 같았다.얼마 남지 않은 이성은 그녀에게 이렇게 끌려가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만약 폐가에 다시 끌려간다면 그녀는 정말 독 안에 든 쥐가 될 게 분명했다.그래서 고은서는 자신의 혀끝을 꾹 씹으며 거센 통증으로 이성을 조금 되찾으려 했다.폐가 문 앞까지 거의 끌려온 것을 보고 고은서는 뒷발로 남자의 명치를 걷어찼다. 남자는 아파서 허리를 굽혀 다리를 모았고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 했지만, 이 행위에 더 화가 난 남자는 고통을 참으면서 고은서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방안의 불빛을 빌어 고은서는 남자의 이마에 상처가 한 줄 생겨난 것을 보았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빨간 피는 그의 미간과 볼까지 흘러내려 보기에 흉측하고 험악하기 그지없었다.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은서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며 다른 쪽 다리로 남자의 머리를 힘차게 걷어찼다.안타깝게도 남자는 고은서를 놓아주면서 구르기로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신속하게 일어나서 도망가려는 고은서를 붙잡고 백핸드로 그녀를 땅바닥에 엎드리게 했다.“재주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의 팔다리를 묶은 끈이 풀렸다. 그녀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속으로 안겨졌다.“은서야, 너 괜찮아?”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고은서는 얼얼하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미간을 보았다. 게다가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승재 오빠?”고은서는 확신이 들지 않아 입을 열어 물었다.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머리가 부스스하며 홍조를 띤 얼굴에 두 개의 뚜렷한 손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앵두처럼 빨갛고 몸도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지금 그녀의 꼴을 보아하니 고생도 많이 했지만,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먹은 게 분명했다.곽승재는 살기가 올라와 당장에서 서인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감히 은서에게 손을 대다니!’“대표님, 서인수는 틈을 타서 도망쳤습니다.”주민기가 보고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사람을 시켜서 계속 찾으세요. 이 산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사람을 꼭 잡아내세요!”고은서는 놀란 듯 눈을 드리우더니 곽승재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여기는 저에게 맡기시고 대표님은 얼른 사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보세요.”주민기가 말했다.곽승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어질어질한 고은서를 안고 차에 올라타 가장 빠른 속도로 그녀를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 선생님께서는 얼굴의 손바닥 자국과 손목의 결박 자국을 제외하면 다른 외상은 없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를 보아하니 일종의 환각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환자분 지금의 상태로는 순순히 위세척할 것 같지는 않네요. 생고생만 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이런 약물을 복용한 환자는 일반적으로 합병증과 후유증을 겪지 않으니, 치료를 무조건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얌전한 편이니 일단 집에서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지금 있는 곳이 예원 별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곽승재는 고은
곽승재는 고은서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가냘픈 고은서가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 곽승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생겼다.“은서야, 나한테 감정이 남아있으면서 왜 굳이 이혼하겠다는 거야?”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이혼?”고은서는 또 그의 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방금 눈물을 흘렸던 탓에 고은서는 눈가와 코끝이 모두 빨개졌고 거기에 홍조를 띤 얼굴을 가하면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저 이혼 안 해요!”고은서는 또 눈물을 흘리며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오빠도 이제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 근데 왜 이혼하려고...”곽승재는 어리둥절해졌다.‘이혼이란 두 글자만 들은 거네.’곽승재는 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와 그날 사무실에서 이혼 합의서를 받았을 때 격동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받들고 입술에 벌칙으로 키스를 퍼부었다.“네가 이혼하겠다고 제기한 거잖아!”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의 말을 듣지 않고 입술을 가린 채 수줍어하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오빠가 나... 나에게 키스했어요! 나에게 키스하다니! 이젠 저를 미워하지 않는 건가요?”“내가 언제 너를 미워한다고 했어?”“우와!”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도로 키스했다.“오빠, 저 너무 기뻐요!”고은서는 정신이 멀쩡할 때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곽승재는 예전에도 고은서에게 키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은서는 크게 화를 냈고 심지어 그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그의 스킨십에 흥분하고 주동적으로 키스를 되돌려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완전히 자기 품에 안겨 있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맞춤도 받았으며 코끝에 온통 그녀의 포근한 향기가 느껴지자 마음속의 욕망은 손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고은서의 날씬한 허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좀 더 기뻐하고 싶지 않아?”고은서의 얼굴은 이미
낯설면서도 과격한 키스에 고은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흥분되기도 했다.곽승재가 커다란 손을 고은서의 등 안으로 넣자, 그녀는 감전된 듯한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은서가 협조적으로 몸을 들어 올리자, 곽승재는 더 제멋대로...욕망이 가득한 밤이었다.꿈속에 빠져 마침내 애인의 호응을 받은 줄 아는 일편단심 한 여자가 있었고 평소에 냉정하고 자제하던 사람이 지금은 지칠 줄 모르는 거친 남자가 되었다.그들은 모두 상대방이 왜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누구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서로 필사적으로 얽매이며 아낌없이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오늘 밤에 모든 열정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창밖의 밤 기온은 차가웠지만, 집 안의 분위기는 불처럼 뜨거웠다. 하늘에 걸린 달마저 부끄러움을 못 이겨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이튿날 고은서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그녀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에서 물컵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만지지 못했다.그리고 그냥 살짝 움직였는데 몸과 팔에서 형용할 수 없는 시큰함이 느껴졌다.고은서는 힘겹게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이 낯선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안의 디자인을 보아하니 호텔 룸인 것 같았다.머릿속에 문뜩 어젯밤 서인수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고은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몸에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벌거벗은 어깨가 드러났다. 고은서는 얼른 이불로 자신을 꽁꽁 감싸고는 경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다행히 카메라나 다른 녹화 도구는 없어 보였다.‘어젯밤에 야산의 폐가에 잡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어쩌다가 호텔로 온 거지? 서인수가 선심을 써서 날 이곳에 버렸을 리 없는데.’드르륵.고은서가 필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할 때 베란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어보니 가운을 입은 곽승재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깼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만족스러운 말투를 들은 것 같았
‘곽승재 정말 영락없는 나쁜 놈이네. 제정신이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런 말을 녹음해서 내 입을 막다니!’“은서야, 어젯밤에 널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널 침대에 내려놓고 쉬라고 하니까 네가 계속 날 안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리고 널 사랑해 주라고 했어.”곽승재는 무슨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젖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얘기했지. 난 신이 아니라 남자라고.”고은서는 서인수가 자신에게 먹인 약이 강력한 환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예전에 박지연한테서 이런 약은 환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마음속에 집념이 있으면 상황이 더 심해진다고 들었었다.고은서는 비록 어젯밤에 병원과 호텔에 들른 기억은 없지만, 어렴풋이 꿈을 꾼 것 같았다.꿈속에서 그녀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갇혀 곽승재가 방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진상을 밝혀낸 뒤 곽승재는 드디어 고은서를 보러 왔다. 그리고 그녀를 안으면서 널 좋아해 주겠다고 말했다.고은서는 격동되어 부끄러움을 마다하고 곽승재에게 키스했다. 심지어 또 그와 더 깊은 스킨십을 하고 싶다고 표현했다.전생에 고은서는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곽승재에 대해 모두 깊은 집념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것은 그녀가 전생에 오매불망 갈망하고 기대했던 것들이었다.만약 일반적인 약물이었다면 그녀는 그저 신체적인 욕망이 있었을 뿐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곽승재를 거절하고 제지했을 것이었다.그러나 하필 환각제를 복용했던 거라 그녀의 집념이 무한대로 확대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본능적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간 것이었다.‘됐어. 이미 벌어진 일이야. 이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재수가 없어서 서인수 같은 쓰레기에 당해 이런 일을 겪은 거기도 해.’비록 곽승재에게 먹혔지만, 만약 서인수의 손에 계속 잡혀 있었다면 고은서는 어떤 고통을 당했을지 모른다.그리고 고은서가 아무리 곽승재에 대한 감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
곽승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머니에게 그녀와 운전사의 행방을 설명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다.“생신 잔치가 오후에 시작되는데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늦게 가겠다고 했어.”곽승재는 말을 이었다.“경찰서에서 기록을 작성해야 한대. 이따가 내가 같이 가줄게.”“응.”고은서의 가슴 한쪽에 막혀있던 곳이 뻥 뚫렸다.다행히 두 어르신은 놀라지 않으셨고 따라서 걱정도 들지 않게 하였다.“사람을 시켜서 옷 한 벌을 가져오게 해. 대충 씻고 우리는 기록하러 가자.”고은서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부아가 나서 물은 뒤 나중에는 줄곧 냉정하게 비하인드에 관해 물었고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아서 경찰서로 가려 한다. 곽승재는 정말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젯밤과 관련하여 다른 할 말이 없어?”“무슨 할 말?”고은서가 되물었다.“서인수는 붙잡혔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이 사실을 몰랐으니 좋은 일 아냐?”“그래서 내가 너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혼을 하려고 소란을 피웠어?”곽승재는 안색이 나빠졌다.‘이 일을 말하려고 했구나.’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네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어젯밤은 그냥 사고였어. 나도 위기를 기회로 생각해 네 탓을 하지 않을게. 어쨌든 네가 제때 나를 구했으니 서로 퉁치자.”“오늘 할머니 생신이 끝나면 내일 구청에 가서 이혼 절차를 밟자.”“고은서, 너 적당히 해.”곽승재는 발끈했다.“어젯밤 너는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라도 된냥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어?”사람 자체는 바뀌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렸다.고은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당한 건 나인데 어째서 네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네 눈에는 단지 일을 당한 것과 당하지 않는 관계야?”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그러면 아니야?”고은서가 되물었다.곽승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네 말은 어젯밤에 누가 됐든
“꺼져.”고은서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곽승재는 그녀의 붉어진 작은 얼굴과 수건 밑에 보일 듯 말 듯 희고 부드러운 다리를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뇌리에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고은서는 반쯤 수줍어하며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연약한 그것들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 욕망은 그 순간 절정에 달해 그녀가 울면서 용서를 빌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호흡이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한 발을 걷어찼다.“나가라고.”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곽승재를 차지 못했는데 거기다가 민첩하게 그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였다.고은서는 이때 수건만 두른 채 한쪽 발이 곽승재의 손에 잡혀 다리 밑이 거의 드러나는 부끄러운 자세였다.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개질 것 같았다.“놓으라고.”곽승재는 손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할 일이 많고 고은서의 몸도 더 이상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손에 넣는 욕망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실력이 없으면 마음대로 손찌검할 생각을 하지 마.”목젖을 몇 번 세게 굴리고 곽승재는 그녀의 다리를 늦추고 몸을 돌려 욕실에서 물러났다.고은서는 즉시 문을 잠그고 자신의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찬물로 세수했다.그녀는 틀림없이 머리가 돌았을 것이다. 자신이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리를 뻗고 그를 걷어차서 자신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었다.방금 곽승재가 그녀의 발을 잡았을 때 눈에서 그녀를 삼키고 싶은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은서는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얼굴의 열이 식자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세면대 거울을 마주 보았다.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없었지만 그녀의 목, 쇄골, 어깨에는 다양한 정도의 키스 마크가 있었다.수건을 풀자 어떤 곳의 붉은 자국이 더 깊어지고 이빨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곽승재, 넌 정말 짐승이나 다름없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문밖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박지연의 물음을 들은 고은서는 그녀를 힐끗 째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물음 바꿔볼게. 깨어났을 때 민시후에 관해 먼저 물어봤잖아. 곽승재는 걱정되지 않았어?”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굳이 피곤하게 걱정할 필요가 있나.’그녀는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박지연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 그냥 민시후랑 곽승재 중에서 누가 더 그쪽 마음에 드는지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죠.”“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미련 남지 않았다면 민시후랑 사귀어 봐도 괜찮지 않아?”박지연이 헤헤거리며 말했다.“안 돼! 민시후랑 사귀면 안 된다고!”박지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실 밖에서 육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내 그가 병실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여긴 어쩐 일이야?”“승재 형이랑 형수님한테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당연히 보러 와야지. 지연아, 넌 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 알려줬으면 같이 왔을 텐데.”“미안, 나도 너무 급해서 미처 생각 못 했어.”비록 박지연이 자신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게 정상이긴 했지만 육현석은 저도 모르게 약간 속상했다.“형수님, 괜찮아요? 크게 다치진 않았죠?”“계속 형수님이라 부를 거면 나가요. 진짜 형수님은 다른 병실에 있으니까.”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런데 고은서 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서먹해 보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두 살 더 많은데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또 너무 오글거리잖아요. 그럼 그냥 말 놓으면서 은서라고 부를까요?”고은서는 형수님만 아니라면 호칭에 관해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그냥 형수님만 아니면 돼요.”‘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엄청 집착했는데 이젠 형수님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진저리치네. 승재 형은 대체 형수님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거야.’“은서야, 승재 형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그러니까 승재 형한테 한
고은서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러 번이고 말했는데 왜 자꾸 끼어들지 못해서 안달이나 하는 건데?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이 백유미라는 걸 믿기는 하는 거야? 원지훈을 교사한 사람도 백유미고 T국에 갑자기 나타난 저 사람들도 다 백유미가 안배한 사람들이야. 백유미는 처음부터 날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고!”고은서는 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비아냥거렸다.“믿을 리가. 백유미는 T국에 프로젝트에 관해 협상하러 온 거고 또 하필 여기에 와서 성폭행을 당했는데 당신이 믿을 리가 없지.”“믿어.”고은서의 말을 듣고 있던 곽승재의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졌다.“내가 어떻게서든 다 조사해낼게.”“곽승재, 진짜 조사하려는 거 맞아? 당신 생명의 은인이잖아.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오면서 백유미가 눈물만 흘리면 마음이 약해지면서 뭘 조사하겠다는 거야?”고은서는 날이 선 말투로 계속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그녀는 곽승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곽승재는 순간 마음이 아파왔다.“은서야, 널 해치려던 사람이 누구든 내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래. 기다릴게. 날 실망시키지만 않았으면 좋겠네.”고은서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대표님, 백유미 씨께서 깨어났습니다.”바로 이때, 그의 부하가 보고하러 왔다.“알겠어.”비웃음으로 가득한 고은서의 눈빛에 곽승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서야, 내가 다 처리하고 다시 설명해줄게.”곽승재가 나간 후 박지연이 병실로 들어왔다.“내가 알아봤는데 어젯밤에 죽은 하국 남성이 원지훈이 맞대. 듣기로는 원지훈이 먼저 백유미를 죽이려고 했는데 백유미가 정당방위를 하면서 도로 원지훈을 죽여버렸대. 그런데 백유미도 크게 다친 모양이야.”박지연은 말하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그런데 왠지 모르게 백유미가 정당방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화풀이할 겸 원지훈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 아무튼 사람은 이미 죽었고 목격자도 없는데 백유미가 뭐라 하면 뭐가 사실이 되는 거
문밖에는 곽승재가 있었다.그는 휠체어에 앉아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민시후처럼 창백한 얼굴에 검은 눈동자에는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후회, 두려움, 흥분이 한꺼번에 뒤섞인 듯한 눈빛에 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순간 두 사람 모두 다쳤다는 박지연의 말이 떠올랐다.‘민시후가 총알에 스친 거면 곽승재가 총에 맞은 건가? 지연이가 얘기하려던 게 이거였을까?’“환영하지 않으니까 내가 있는 곳 공기 더럽히지 마.”민시후는 곽승재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T 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은서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곽승재는 고은서의 행방을 알고 있음에도 민시후에게 알리지 않았다.민시후가 급히 단서를 찾아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곽승재는 이미 현장에 있었다.더욱 민시후를 화나게 했던 것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곽승재는 민시후의 핀잔에 화내지 않고 먹먹한 눈동자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녀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곽승재의 모습에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좀 쉬고 있어. 나중에 다시 올게.”“나중에 언제?”민시후가 약간 서운한 듯 물었다.고은서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은서도 다쳤으니 푹 쉬어야 해. 도움이 필요하면 간병인 붙여줄게.”“난 은서랑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민시후가 곽승재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너는 고은서랑 간병인이 비슷한 모양이지?”곽승재는 민시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입담에서 곽승재는 민시후의 상대가 아니었다.“한 시간 내로 올게.”고은서는 두 사람이 또 싸울까 봐 걱정하며 얼른 답했다.“먹고 싶은 거 있어? 좀 사다 줄까?”민시후는 고은서의 말에 기분이 풀린 듯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네가 가져다주는 거면 뭐든 좋아.”고은서가 병실을 나서자 경호원이 휠체어를 끌며 그녀를 따라왔다.복도에는 박지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서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휴식을 취하기 전 박지연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지쳐 보이는 고은서의 모습에 그녀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다시 깨어나니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고은서는 어지러움이 좀 나아진 것을 느끼고 저녁을 조금 먹은 후 민시후를 보러 가기로 했다.민시후는 병실 안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불은 그의 가슴까지 덮여 있었고 흰 붕대가 살짝 보였다.잘생긴 그의 얼굴에 평소와 같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라지고 창백한 입술이 더해지니 전체적으로 생기가 없어 보였다.그 모습을 본 고은서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의식을 잃기 전 느껴졌던 피 냄새는 민시후의 것이었을까?’고은서의 기척이 컸던 것인지 민시후가 바로 눈을 떴다.“고...”“말하지 마. 몸은 좀 어때?”고은서는 그의 앞에 가서 죄책감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민시후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며 약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아파...”“잠깐만 기다려. 의사 불러올게.”고은서가 급히 나가려 하자 민시후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가지 마. 의사가 와도 소용없어. 내 상처는 신도 못 고치니까 내 옆에 좀 더 있어줘.”‘신도 못 고친다고? 지연이 말로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고은서는 죄책감이 밀려와 미칠 것 같았다.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입을 열었다.“지금은 의술이 발달해서 총상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민시후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고은서.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슬퍼할 거야?”“아니. 민시후, 너 정말 미쳤어? 왜 나 대신 총을 맞아!”고은서가 갑자기 화내며 말했다.“너 목숨이 몇 개라도 돼? 네 가족들이 너 다쳤다는 거 알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 봤어?”잠시 멈칫한 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야?”상처가 심했던 탓에 그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다.고은서는 더 깊은 죄책감에 휩싸였다.“민시후, 난 널 좋아하지 않으니 네 마음은 받아들일
박지연은 고은서의 질문에 놀라고 있었다.‘고은서가 깨어나자마자 민시후에 관해 묻는다고?’박지연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농담을 하는 대신 진지하게 답했다.“민시후는 검사를 받고 있을 거야.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민시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녀는 평생 자책했을 것이다.“얼른 약 먹어. 조금 있다 병실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박지연은 고은서를 침대에 눕히고 약을 먹이며 이전에 계성진이 먹였던 약은 의식이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강한 수면제였고 이미 열 몇 시간 자고 깨난 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의식은 없었어.”“약에 의존성은 없겠지?”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의존성은 없지만 약간의 후유증은 있을 거야. 한동안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박지연이 고은서를 걱정하며 말했다.“그리고 다친 어깨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마른하늘에 닥친 날벼락에 억울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고은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유린당하고 유흥가에 팔려 가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지연아, 우리 지금 어디 있는 거야?”갑자기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T 국 병원이야. 경찰이 사건을 조사 중이라 며칠 동안은 귀국하기 어려울 거야.”아무리 치안이 안 좋은 나라라고 해도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다.“너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부랴부랴 달려왔지. 어제 너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돼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비행기에서 내리면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도 없고 먼저 연락해도 받지 않으니 속이 타들어 갔어. 곽승재한테는 내가 연락한 거야. 너도 연락 안 되고 민시후도 연락이 안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곽승재한테 한 거야. 은서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곽
계성진은 곽승재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희 나라 사람들 말은 믿을 수 없잖아. 내가 이 여자를 놓아주면 너희는 바로 나를 잡으려고 할 거야. 오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이 여자를 방패로 삼아야겠어.”곽승재는 재빨리 답했다.“그럼 나랑 바꿔. 내가 인질이 될게.”계성진은 비웃으며 말했다.“넌 키도 키고 보니까 몸도 좋더라. 이 여자 대신 널 쓸 필요는 없지. 내가 멍청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막지 않겠다. 밖에 있는 차 아무거나 타고 가. 은서를 다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놔주겠다.”곽승재가 이내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말을 마친 곽승재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하며 계성진과 그의 동료들이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다.계성진은 고은서를 끌고 천천히 창고 밖까지 나갔다.경찰들이 총을 들고 있었지만 계성진이 인질을 잡고 있어 누구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목이 꽉 조였던 고은서는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머리에는 여전히 총이 겨눠져 있었다.오늘 하루 너무 많은 공포를 겪은 탓인지 고은서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그녀는 질식사가 더 괴로운지 아니면 총알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게 더 괴로운지 생각하고 있었다.이내 계성진은 고은서를 데리고 차 앞까지 왔다.“악! 악! 아악!”그때 창고 안에서 백유미의 비명이 들렸다.무언가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그녀의 비명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안쪽 상황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오로지 계성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사람들은 곽승재가 데려온 사람들에 의해 모두 제압당했다.상황을 눈치챈 계성진의 얼굴에는 살기가 더 짙게 피어올랐다.그는 고은서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그녀의 턱을 쥐고 강제로 삼키게 했다. 그러면서 옆의 동료에게 차 문을 열라고 명하며 고은서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고은서!”그때 앞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바로 고은서가 기다리던 민시후였다.그는 지친 모습으로 뒤에 총을 든 현지 경찰들을 대동하고
거칠게 다가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고은서는 놀라서 옆으로 몇 걸음 피했다.벽 끝에 닿은 그녀에게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고은서는 맞더라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남자들이 경찰봉을 휘두르는 순간 고은서는 눈을 꼭 감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남은 방어용 스프레이를 그들에게 향해 필사적으로 뿌렸다.“악!”“멈춰!”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비명이 들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의 목소리였다.비록 경찰봉은 빗나갔지만 여전히 어깨를 맞은 고은서는 고통스럽게 눈을 떴다.문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서 있었다.정장을 입고 급히 어디서 달려온 듯한 모습을 한 곽승재의 얼굴에는 급박함이 드러났다.그의 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몇 명의 근육질 남자들과 몇 명의 현지 경찰들이 함께 있었다.경찰들이 오자 고은서를 공격했던 두 남자는 눈을 가리며 피하기에 바빴고 백유미에게 올라타 있던 남자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일어나 무기를 집어 들며 반격하려고 했다.“은서야!”곽승재는 고은서가 다친 걸 보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그때 백유미는 누구의 옷가지에서 칼을 빼낸 건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자기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멈춰!”곽승재의 머릿속에 갑자기 익숙한 장면들이 스치며 강한 불안과 혼란이 밀려왔다.그는 몇 걸음 달려가 칼을 걷어찼다.팅하는 소리와 함께 백유미의 손목에서 힘이 빠지며 칼이 떨어졌다.백유미가 처량하게 울부짖으며 외쳤다.“왜 막았어! 왜! 죽게 놔두지 왜 막은 거야! 승재야...”백유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몸은 온통 멍 자국과 붉은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몸은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곽승재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백유미가 자살하려 한 순간 곽승재는 강한 공포감을 느꼈다.마치 이전에 누군가가 그 앞에서 자살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지금 이 상황을 막지 않으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
비록 고은서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계심과 불신으로 가득 차 그녀를 향해 경찰봉을 휘두르며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고은서도 이를 잘 이해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돈이 있으니 그들에게 두 배의 돈을 줄 수 있다고 했다.“네가 돈이 있다고 하면 있는 거야?”그때 기름지게 다듬은 머리를 한 중년의 남자가 주차장에서 걸어왔다.경찰봉을 쥔 두 남자는 즉시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보스라고 불렀다.기름진 머리를 한 남자는 고은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국어로 말했다.“너희처럼 예쁜 여자의 말은 믿을 수 없어.”그는 날카로운 눈을 한 채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장 몇천억 내놓을 수 있으면 믿을지도 모르지.”남자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렀다.그만한 금액은 당연히 내놓을 수 없었다.카드가 있다고 해도 유동 자금이 부족해 그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웁!”백유미도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구조 신호를 보냈다.기름진 머리를 한 계성진은 잠시 안을 훔쳐보고 다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예쁜 여자일수록 수단이 범상치 않아. 이렇게 쉽게 남자들을 자기편으로 돌리잖아. 그냥 사람 하나 데려가는 간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고은서가 눈썹을 찡그렸다.‘백유미가 원지훈에게 30분을 준다고 한 게 이 남자 때문인가? 이 남자를 통해 나를 유흥가로 팔려고 한 건가?’“당신 목적도 결국 돈이죠? 몇천억은 줄 수 없지만 100억 정도는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보내드릴 수 있어요. 사람을 원하신다면 저 안에 있는 여자도 그냥 덤으로 드릴게요.”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하하하.”고은서의 말에 계성진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예쁜 아가씨, 내가 너를 데려가면 모든 남자가 당신한테 푹 빠질 거야.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놓치겠어? 돈도 사람도 다 가질 거야. 국내에서 유명한 곽씨 가문 대표 전 부인인데 그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겠어?”고은서
옆에서 손을 거들던 장정들도 그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백유미를 희롱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이내 백유미의 입에 물려있던 수건이 떨어졌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른 것으로 입이 가득 차 버렸다.남자들의 음탕한 신음과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순식간에 창고를 채웠다.모든 일든 불과 일이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은서는 구석에 숨어서 원지훈이 차버린 쇠막대기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떨리는 심장은 평온을 되찾을 수 없었다.몇 명의 남자들이 각 방향에서 백유미를 희롱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내가 원지훈을 회유하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누워있는 건 나였겠지.’백유미는 동정받을 처지가 아니었다.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비록 돈으로 매수했다고는 하나 약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또한 밖에 백유미가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뭔가 이상함이라도 눈치채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고은서는 자신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고은서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백유미의 핸드폰을 켜려고 했지만 땅에 부딪히며 떨어질 때 전원이 나가버렸다.그녀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핸드폰을 켤 수 있었지만 비밀번호에 막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의 생일, 곽승재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비밀번호는 맞지 않았다.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남자들이었기에 고은서는 소리를 내어 그들의 시선을 끌 수조차 없었고 백유미에게 비밀번호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고은서는 긴급버튼을 눌렀지만 백유미는 긴급 연락망을 따로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의 비상 번호는 해외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어떡하지?’고은서가 원지훈을 불러 도박하려고 할 때 백유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핸드폰에는 알파벳 C만 떠 있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한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핸드폰을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