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이제 만족해?”“뭐, 괜찮네.”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여기 일 다 끝났으면 나랑 어디 좀 가지.”“어디?”“나가서 얘기해.”민시후는 겉옷을 정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도 도아름과 작별인사를 하고는 민시후를 따라 나갔다.아까 민시후가 내뱉은 전형적인 자본가다운 말에 기분이 나빴던 고은서도 일부러 도도한 척 말했다.“말도 안 해주고 도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야? 나 너랑 사적으로 뭐 할 생각 없으니까 일 아니면 갈 거야.”“누군 너랑 사적으로 엮이고 싶은 줄 알아?”민시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은서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새 프로젝트 알아봤는데 같이 가서 봐달라고 부른 거야.”아직 고은서가 ZY 그룹에 취직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부려먹으려고 하는 민시후에 고은서는 악덕 사장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너 지금 속으로 내 욕했지?”“계약하자고 나 꼬실 때는 이런 표정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눈썹을 치켜세우며 묻는 민시후에 고은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프로젝트 알아보는 것도 내 성과로 쳐주는 거야?”“고은서, GS그룹 대표 사모씩이나 돼서 그런 것부터 따져야겠어?”비아냥대는 민시후에 고은서도 같은 조롱조로 대꾸했다.“차 한번 만졌다고 2만 억이나 배상하라던 너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그 말에 민시후는 화도 내지 않고 고은서의 가장 아픈 부분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곽승재가 널 버린 건 다 그 입 때문일 거야. 말은 가려서 해야지.”고은서 역시 화를 내지 않고 받아쳤다.“네 말대로면 네 약혼자가 너한테 질척거리는 건 네 입이 좋아서야?”“...”약혼자 얘기를 꺼내자 바로 표정이 어두워진 민시후가 차 키를 고은서에게 던져주며 말했다.“운전 네가 해.”조금 있다 회식 자리가 있는지 저를 기사로 쓰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고은서는 파트너이자 미래의 대표님인 민시후의 말에 따라주기로 했다.운전을 시작하고 민시후에게 목적지를 물으니 사람
고은서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있던 민시후가 웃음을 터뜨리자 여자는 화가 난 듯 고은서를 향해 따지기 시작했다.“운전이나 하는 주제에 왜 자꾸 나대!”“아, 너 지금 네 반반한 얼굴 믿고 민시후 씨랑 어떻게 해보려는 거지, 꿈은 야무지네.”고은서는 어이없다는 듯 뒤에 앉은 민시후를 보며 말했다.“넌 왜 이런 바보 같은 것들이 자꾸 꼬이는 거야?”“너!”화가 난 여자가 고은서를 향해 화를 내려 하자 민시후가 귀찮다는 듯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창문 올리고 그냥 가.”그 말에 따라 창문을 올리고 액셀을 밟는 고은서 탓에 넘어질 뻔했던 여자는 얼른 멀어져가는 차에 대고 소리쳤다.“민시후 도련님, 차 배상도 못 했는데 연락처라도...”아직도 포기를 못 하고 쫓아오는 여자를 보던 고은서가 말했다.“민시후 씨 좋아하는 사람 많네.”그 말에 민시후는 고은서를 한번 쓱 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너도 내 차 친 적 있지 않나? 그럼 너도 나 좋아하는 거야?”“... 그건 진짜 실수야.”고은서는 이제야 민시후의 운전기사가 왜 그렇게 능숙하게 사진을 찍고 교통사고를 처리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런 식으로 민시후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한둘이 아니어서 본의 아니게 능숙해진 것 같았다.“그러니까 이렇게 튀는 차 말고 평범한 차를 타고 다녀. 계속 이런 식이면 차 수리비도 만만치 않게 나오겠네.”“내가 왜 다른 사람 때문에 여유로운 생활을 포기해야 하지?”코웃음을 친 민시후는 비서에게 연락해 영상자료를 얻어서 교통사고 건을 처리하라고 일러주었다.그냥 재수 없게 생각하고 넘기려나 보다 했는데 민시후는 그냥 시간 낭비가 싫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뒤처리는 다 아랫사람 몫이지.하지만 민시후의 생각에는 고은서도 동의하는 바였다.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 예전의 고은서는 그 도리를 몰라서 그렇게 비굴하게 살았던 것 같다.그렇게 삼십 분을 넘게 달려 고은서는 민시후가 말한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호텔처럼 크고 웅장하
“어딜 가?”민시후는 고개를 들고 강압적으로 말했다.“네가 그렇게 쉽게 잊는 일이면 중요한 일이 아니란 거야. 앉아서 주문해.”그 말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직원이 건네준 얇은 메뉴판을 받아들었다.“나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고은서는 자리를 비우는 민시후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주문을 마쳤다.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이 제일 중요하니까 고은서는 다른 건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고은서가 주문을 마치자 마침 민시후도 자리로 돌아왔다.민시후는 메뉴판을 들어 음식을 몇 개 고르더니 고은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주방 가서 천자 1번 방 메뉴 이걸로 바꿔 달라고 해.”메뉴판을 건네받은 고은서가 고른 것들을 보니 전부 다 초록색 야채들이었다.오이 볶음, 오이무침, 오이소박이, 오이 껍질, 오이 겨자, 오이 달걀 볶음, 그리고 과일까지 모두 오이로 통일인 메뉴는 한눈에 봐도 사람 하나 놀리려는 것 같아 보였다.이 메뉴들을 보고도 눈치 못 채는 바보는 없을 것 같아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고 이러는 거야? 그냥 알려주면 안 돼?”“뭘 그렇게 놀래, 메뉴 몇 개 바꾸는 게 어때서, 그냥 반응 보고 인성이나 테스트해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만 말하고 빨리 가.”“안가.”고은서는 민시후의 요구를 단번에 거절하며 말했다.“아무 이유도 없이 왜 다른 사람들의 메뉴를 바꿔, 주방에서도 내 말대로 안 해줄 거야.”그에 민시후는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이 정도 일도 못 하면서 나보고 어떻게 네 능력을 믿으라는 거야. 넌 그냥 갖다 주기만 하면 돼. 주방에서는 시키는 대로 할 거야.”“걱정하지 마, 넌 아직 ZY 그룹 사람도 아니니 화를 내도 나한테 내지 너한테 아무 영향 없을 거야.”민시후가 달래듯 말하자 고은서가 바로 되물었다.“그럼 왜 직접 안 가고 날 시키는데?”“내가 너 데려왔는데, 쓸모는 있어야지.”“내가 다 덮어쓰라고?”“잘 아네, 빨리 가.”민시후 말대로
이어서 직원 두 명이 음식들을 내왔는데 그게 식을까 봐 걱정한 건지 음식마다 뚜껑을 씌워 내왔다.주민기는 직원들이 음식들을 올리는 걸 보며 허 교수라는 사람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허 교수님과 비서분들도 다 배고프시죠, 얼른 드세요. 집밥 반찬 위주로 고른 거라 조금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잘 봐주세요.”“음식들 다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말을 마친 직원들이 뚜껑을 하나둘 열어주니 눈앞에는 오이가 한 상 가득 펼쳐졌다.갑자기 벌어진 오이 파티에 허 교수와 두 비서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왜 갑자기 메뉴가 바뀐 건지 알 수 없었던 주민기 역시 어안이 벙벙해서 굳어있었다.그러다 제 보스의 따가운 눈초리에 주민기는 다급히 직원을 잡고 물었다.“이게 뭡니까? 이건 저희가 주문한 게 아닌데요.”그냥 주는 대로 서빙했을 뿐이라는 직원에 그들은 매니저를 찾아 물었다.그리고 홀에 앉은 사모님이라는 분이 주방에 와서 메뉴를 바꿨다는 말을 듣자 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사모님이 보스에게 무슨 화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에서 일부러 벌인 일이라고 밝혀지자 잠시나마 제가 미쳐서 주문을 막한 건지를 의심하던 주민기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서둘러 허 교수 일행에게 사과하고 매니저에게는 새로운 메뉴를 내와달라고 부탁했다.허 교수 일행도 놀라긴 했지만 그 이유를 알았기에 더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하지만 곽승재는 그럴 수 없었는지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홀로 향했다.그리고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홀의 구석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을 때 곽승재의 미간은 어느 때보다도 구겨졌다.뒤로 머리를 질끈 묶은 고은서는 지금 갈비를 쥐어 잡고 뜯어대고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 앉은 남자는 민시후였는데 민시후는 고은서처럼 식욕이 강하지 않은지 핸드폰을 슬쩍슬쩍 보며 이따금 고은서를 더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곽승재는 표정을 굳히고 바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둘이 왜 같이 있어?”한창 맛있는 식사를 하던 고은서가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면서 이런 저급한 방법을 택한 민시후에게 어이가 없었다.이런 악취미와 유치한 작전에 함께했다고 인정하기도 뭐해 고은서는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런데 곽승재가 민시후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바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넌 나랑 같이 천자 1번 방에 가자.”“내가 왜?”정말 저한테 책임을 물으려는 듯 보이는 곽승재에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때 민시후가 나서더니 도와주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도 모를 말을 해댔다.“쟤 오늘은 내 기사로 온 거야, 쟤한테 따지는 건 괜찮은 데 데려가는 건 안 돼.”그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민시후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네 형이 곧 진급한다지, 이때 네가 사고를 치면 널 가만둘까?”“네가 그런 것까지 상관해?”가소롭다는 듯 웃는 민시후에 곽승재가 담담히 말했다.“네 형이 운성에 있긴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상업자본행사에 우리 GS그룹도 초대됐더라고.”“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진급 못 하면 가서 민씨 집안 사업하면 되지.”“네 형 일은 상관없을 수 있지, 근데 네 아버지도 상관없어?”그 말에 민시후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민시후가 형의 일을 망쳤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해성에 숨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그래, 이런 게 네가 잘하는 일이지. 이번 한 번은 내가 넘어갈게. 부부끼리 잘 해결하고, 난 이만 가볼게.”민시후가 어찌나 빨리 일어났는지 고은서가 계산하라는 말도 못 했는데 밖으로 쌩 나가버렸다.“오빠도 이제 가.”자신에게도 가라고 하는 고은서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고은서, 너희들이 매니저와 연락해서 우리 방 음식 다 바꿔놓는 바람에 내가 허 교수님 볼 면목이 없잖아.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겠다고?”매니저 말로는 사모님이 지시한 거라는데 고은서의 반응을 보니 저절로 신분을 밝히진 않은 것 같았기에 그렇다면 민시후가 매니저를 매수한 게 분명했다.하지만 곽승재가 화난 건 그런 게 아니라 고은서가 민시후가 좋은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곽승재의 손등이 붉게 데어있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그에 깜짝 놀란 직원은 연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제가 아까 잘 피하지 못해서...”“괜찮아요, 주방 가서 수프 다시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돈은 제방에서 같이 낼게요.”그 말에 감격한 직원이 떠나고 고은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올뻔한 관심의 말을 참아내고는 담담히 말했다.“찬물로 좀 씻어.”말투는 담담했지만 눈에 가득한 걱정을 보아낸 곽승재가 검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응시하며 말했다.“네가 도와줘.”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세면대로 가 물을 틀었다.혹시나 물의 세기가 셀까 싶어 손으로 물을 받아 곽승재의 손등에 뿌려주는 고은서의 얼굴에 복도의 따뜻한 조명이 비치니 평소와 달리 더 아름다워 보였다.“넌 뭐 좋아해?”곽승재의 질문에 고개를 드는 고은서의 물기 어린 눈도 조명에 비쳐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그에 곽승재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선물 주기 전에 네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며.”곽승재의 말을 듣자 어젯밤의 실랑이가 떠올랐던 고은서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예전 같았으면 곽승재의 이런 질문에 아주 기뻐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걸 다 알려주고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말까지 덧붙였을 테지만 지금의 고은서는 이런 질문이 웃기기만 했다.“필요 없어. 오빠도 좋은 마음에서 한 일이겠지만 난 이제 오빠가 주는 선물은 필요 없어.”고은서 얼굴에 훤히 드러난 조소와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에 곽승재는 화가 잔잔히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애써 참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삼촌이랑 숙모님이 계속 FY 그룹 대표랑 밥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며칠 뒤에 나 마침 시간 있으니까 삼촌한테 GS로 오셔서 같이 가자고 전해 드려.”고은서는 눈을 내리깔고 물을 손등 위로 뿌려주며 말했다.“내가 전에 말했지, 우리 집안일에 관여하지 말아 달라고. 그거 그냥 홧김에 한 말 아니야.”“우리 삼촌이랑 외숙모가 아직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곽 대표님, 아내분이 이렇게 사랑스러우신데 왜 화나게 해요,나중에 가서 제대로 사과하셔야겠어요.”곽승재는 정말 아내를 화나게 한 남편마냥 자연스럽게 대답했다.“그래야죠.”그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아까 국물을 쏟은 직원이 화상연고를 들고 들어와 곽승재에게 사과를 했다.다들 그제서야 빨갛게 데인 곽승재의 손등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곽 대표님 손등이 많이 대이신 것 같아요.”“아까 아내가 물로 씻어 줬어요, 괜찮아요 지금은.”주민기는 아내라는 호칭이 날이 갈수록 입에 붙는 제 상사를 보며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저번에 해선 호텔에서의 미팅도 주민기 혼자 가서 간단히 얼굴만 비치고 오기로 얘기가 다 돼 있었는데 주민기가 거의 도착할 때쯤 곽승재에게서 같이 가겠다는 연락이 왔었다.그리 중요한 자리도 아닌데 같이 가겠다고 생각을 바꾼 곽승재가 주민기도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호텔에서 고은서를 봤을 때 주민기는 그제야 곽승재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래서 이번에도 제 상사의 사랑을 돕기 위해 주민기는 곽승재 손에 들린 연고를 보며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사모님, 대표님 손에 연고 좀 발라주세요. 왼손으로 하면 불편하시잖아요.”“그래요, 약은 바로 발라야죠, 안 그럼 흉 져요.”허 교수까지 거들자 고은서는 금실 좋은 부부 사이를 연기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곽승재 손에서 연고를 건네받아 손가락에 조금씩 짜서 손등에 펴 발라 주었다.연고의 효과인지 아니면 고은서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풍기는 향기 때문인지 곽승재의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됐어요.”고은서가 약을 다 바르고 손을 떼자 곽승재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화장실 갔다 올게요.”그렇게 화장실 앞에 선 고은서는 아까 저를 품에 넣던 곽승재의 긴박함과 사람들한테 저를 아내라고 소개하던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곽승재의 관심을 그렇게 원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의 신분을 인정해주길 바랄 때는 그런 맘을 모른 척하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백미러로 그를 보며 물었다.“내가 민시후랑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잖아.”곽승재는 아까보다 조금 냉랭해진 얼굴을 하고 대꾸했다.“내가 민시후랑 사이가 안 좋은 걸 알고 일부러 날 자극하려고 붙어 다니는 거야?”고은서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그럼 자극은 받았다는 거네?”“꿈 깨. 네가 어떻게 난리를 치든 그건 네 맘인데 그러다 네가 민시후한테 당한다 해도 나는 너 동정 안 해.”“내 일에 신경 끄고 시간 남으면 네 오랜 친구나 신경 써.”조소를 흘리며 말을 마친 고은서는 곽승재를 더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그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그에 곽승재도 더는 말 하지 않고 둘은 정적 속에서 예원 별장까지 도착했다.먼저 별장으로 들어간 고은서는 옷장에서 이불부터 찾아냈다.앞으로 한 열흘 남짓 남았으니 괜히 이사한다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곽승재가 여기서 자든 말든 신경 끄고 고은서는 게스트룸에 들어가서 자기로 했다.그런데 방문 앞까지 가니 곽승재의 큰 몸이 고은서를 막아 나섰다.“어디 가?”“게스트룸.”“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고은서는 곽승재를 한번 보고는 말했다.“너랑 정상적인 부부인 척 연기할 생각 없으니까 비켜.”“연기는 안 해도 되는데.”곽승재는 할머니의 번호를 누르며 말했다.“할머니한테 말은 해야지, 내가 널 게스트룸으로 쫓아낸 게 아니라고.”“...”삼촌과 외숙모가 다녀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고은서는 이 일로 또 할머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만 참기로 했다.열 며칠 정도는 금방이니까.“이불은 나눠 덮어.”씻고 나온 고은서는 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음에도 이렇게 멀쩡한 상태에서 곽승재와 한 침대에 누워야 한다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나마 다행인 건 곽승재가 서재에서 업무를 보느라 바로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렇게 경계만 하다가 고은서가 잠에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