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육현석이 제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몸을 움츠리며 웃었다.“아니, 형 마음은 좋은데 그냥 방법이 잘못됐다는 거지.”“입장 바꿔 생각해봐, 형수님이 밤에 다른 남자 병문안 갔다가 다른 사람 주려던 거 선물이라면서 형한테 주면 형은 기분 좋겠어?”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전에도 나한테 선물 달라고 한 적 있어. 그래서 이번에 가져다주면 나 좀 그만 귀찮게 할까 해서 그랬던 거지.”“그래도 이렇게 대충 넘기는 건 아니지. 형수님이 다른 남자가 사준 물건을 형한테 선물이라고 주면 형은 화 안 나?”“말 할 줄 모르면 그냥 입을 다물어.”육현석의 말에 곽승재는 짜증 난다는 듯 대꾸했다.“걔가 어디서 남자를 만난다고 다른 남자가 있어!”조심한다는 게 그만 또 말을 직설적으로 해버린 육현석은 제 입을 손으로 때리며 말했다.“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봐, 형은 비유하는 것만 들어도 이렇게 기분 나빠하는데 형수님은 어떻겠어.”“백유미랑 나 사이를 은서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유미가 쓰러졌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곽승재는 갑자기 회를 내며 말했다.“걔가 평소에 몇 번씩이나 유미를 못살게 굴지만 않았어도 유미가 나한테 선물을 전해달라고는 하지 않았을 거야.”육현석은 여전히 곽승재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아직도 짚어주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렇게 화를 내는 곽승재를 보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대충 맞춰주며 말했다.“그러게 형, 형수님도 뭘 참 모르신다. 형이 유미 씨랑 만났으면 형수님이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걔가 뭘 알든 모르든 그걸 왜 네가 평가해.”곽승재는 육현석의 기획안을 내팽개치며 말했다.“가서 다시 해와!”육현석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어떻게 매번 곽승재가 기분이 나쁠 때만 골라서 기획안을 전달하는지, 저의 지지리도 없는 운에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형, 아니면 형이 나 좀 가르쳐줘. 나 이거 진짜 최선을 다한 거란 말이
기사회생한 명운이 이런 시기에 식품안전에 관한 검사는 몇 번이나 진행했을 테니 이번 일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꾸민 일임이 틀림없었다.도아름은 눈을 치켜뜨며 차갑게 말했다.“찾을 필요 없어, 서인수 짓이야.”“헤어질 때도 개쓰레기 짓을 하더니, 기술만 빼가면 내가 명운을 못 이끌 줄 알고 그때 본인이 헐값에 사 가려고 했겠지.”“출품 전 제작, 마케팅 쪽은 다 우리 아버지 때부터 같이 일해오시던 믿음직한 분들이라 거기서 손을 못 쓰니까 허위사실을 퍼뜨린 거야.”“중독이라는 그 사람 상태는 어때요? 사람은 보내봤어요?”도아름은 사람을 보내봤으나 환자가 만나기를 거절하고 적반하장으로 2억의 배상금을 주지 않으면 일을 계속 키우겠다고 협박했다고 전했다.“배상은 절대 하면 안 돼요, 얼마가 됐든 간에 배상하면 명운의 술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잖아요.”“나도 알지, 그래서 거절을 하긴 했는데 이 상태로 계속 시비하다가 재판까지 가게 되면 명운 이미지도 안 좋아지잖아.”서인수도 이런 사실들을 뻔히 다 알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음모를 꾸밀 수 있었던 것이다.도아름이 이 알코올중독이라 우기는 환자를 잘 설득해서 해결한다 쳐도 서인수는 다른 알코올 중독자들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그래서 도아름은 이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민 대표는 좋은 방법 있어?”고은서는 말없이 듣기만 하던 민시후를 향해 물었다.“명운에 투자하기로 한 사람으로서 이미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는데, 뭐 좋은 방법 없어?”고은서의 질문에 민시후는 전형적인 자본가의 대답을 내놓았다.“은서 씨, 당신 말대로 우린 그냥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만 했지, 투자한다고는 안 했어. 명운이 이 정도 일도 해결 못 하면 내가 어떻게 투자를 하지?”민시후의 말은 직설적이었지만 투자자로서 할법한 말이었다.그래서 자리에 있던 명운 관계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도아름이 나서서 말했다.“걱정 마세요, 민 대표님. 저희가 책임지고 이번 일 해결해서 거래에는 절대
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이제 만족해?”“뭐, 괜찮네.”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여기 일 다 끝났으면 나랑 어디 좀 가지.”“어디?”“나가서 얘기해.”민시후는 겉옷을 정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도 도아름과 작별인사를 하고는 민시후를 따라 나갔다.아까 민시후가 내뱉은 전형적인 자본가다운 말에 기분이 나빴던 고은서도 일부러 도도한 척 말했다.“말도 안 해주고 도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야? 나 너랑 사적으로 뭐 할 생각 없으니까 일 아니면 갈 거야.”“누군 너랑 사적으로 엮이고 싶은 줄 알아?”민시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은서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새 프로젝트 알아봤는데 같이 가서 봐달라고 부른 거야.”아직 고은서가 ZY 그룹에 취직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부려먹으려고 하는 민시후에 고은서는 악덕 사장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너 지금 속으로 내 욕했지?”“계약하자고 나 꼬실 때는 이런 표정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눈썹을 치켜세우며 묻는 민시후에 고은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프로젝트 알아보는 것도 내 성과로 쳐주는 거야?”“고은서, GS그룹 대표 사모씩이나 돼서 그런 것부터 따져야겠어?”비아냥대는 민시후에 고은서도 같은 조롱조로 대꾸했다.“차 한번 만졌다고 2만 억이나 배상하라던 너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그 말에 민시후는 화도 내지 않고 고은서의 가장 아픈 부분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곽승재가 널 버린 건 다 그 입 때문일 거야. 말은 가려서 해야지.”고은서 역시 화를 내지 않고 받아쳤다.“네 말대로면 네 약혼자가 너한테 질척거리는 건 네 입이 좋아서야?”“...”약혼자 얘기를 꺼내자 바로 표정이 어두워진 민시후가 차 키를 고은서에게 던져주며 말했다.“운전 네가 해.”조금 있다 회식 자리가 있는지 저를 기사로 쓰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고은서는 파트너이자 미래의 대표님인 민시후의 말에 따라주기로 했다.운전을 시작하고 민시후에게 목적지를 물으니 사람
고은서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있던 민시후가 웃음을 터뜨리자 여자는 화가 난 듯 고은서를 향해 따지기 시작했다.“운전이나 하는 주제에 왜 자꾸 나대!”“아, 너 지금 네 반반한 얼굴 믿고 민시후 씨랑 어떻게 해보려는 거지, 꿈은 야무지네.”고은서는 어이없다는 듯 뒤에 앉은 민시후를 보며 말했다.“넌 왜 이런 바보 같은 것들이 자꾸 꼬이는 거야?”“너!”화가 난 여자가 고은서를 향해 화를 내려 하자 민시후가 귀찮다는 듯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창문 올리고 그냥 가.”그 말에 따라 창문을 올리고 액셀을 밟는 고은서 탓에 넘어질 뻔했던 여자는 얼른 멀어져가는 차에 대고 소리쳤다.“민시후 도련님, 차 배상도 못 했는데 연락처라도...”아직도 포기를 못 하고 쫓아오는 여자를 보던 고은서가 말했다.“민시후 씨 좋아하는 사람 많네.”그 말에 민시후는 고은서를 한번 쓱 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너도 내 차 친 적 있지 않나? 그럼 너도 나 좋아하는 거야?”“... 그건 진짜 실수야.”고은서는 이제야 민시후의 운전기사가 왜 그렇게 능숙하게 사진을 찍고 교통사고를 처리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런 식으로 민시후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한둘이 아니어서 본의 아니게 능숙해진 것 같았다.“그러니까 이렇게 튀는 차 말고 평범한 차를 타고 다녀. 계속 이런 식이면 차 수리비도 만만치 않게 나오겠네.”“내가 왜 다른 사람 때문에 여유로운 생활을 포기해야 하지?”코웃음을 친 민시후는 비서에게 연락해 영상자료를 얻어서 교통사고 건을 처리하라고 일러주었다.그냥 재수 없게 생각하고 넘기려나 보다 했는데 민시후는 그냥 시간 낭비가 싫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뒤처리는 다 아랫사람 몫이지.하지만 민시후의 생각에는 고은서도 동의하는 바였다.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 예전의 고은서는 그 도리를 몰라서 그렇게 비굴하게 살았던 것 같다.그렇게 삼십 분을 넘게 달려 고은서는 민시후가 말한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호텔처럼 크고 웅장하
“어딜 가?”민시후는 고개를 들고 강압적으로 말했다.“네가 그렇게 쉽게 잊는 일이면 중요한 일이 아니란 거야. 앉아서 주문해.”그 말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직원이 건네준 얇은 메뉴판을 받아들었다.“나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고은서는 자리를 비우는 민시후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주문을 마쳤다.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이 제일 중요하니까 고은서는 다른 건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고은서가 주문을 마치자 마침 민시후도 자리로 돌아왔다.민시후는 메뉴판을 들어 음식을 몇 개 고르더니 고은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주방 가서 천자 1번 방 메뉴 이걸로 바꿔 달라고 해.”메뉴판을 건네받은 고은서가 고른 것들을 보니 전부 다 초록색 야채들이었다.오이 볶음, 오이무침, 오이소박이, 오이 껍질, 오이 겨자, 오이 달걀 볶음, 그리고 과일까지 모두 오이로 통일인 메뉴는 한눈에 봐도 사람 하나 놀리려는 것 같아 보였다.이 메뉴들을 보고도 눈치 못 채는 바보는 없을 것 같아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고 이러는 거야? 그냥 알려주면 안 돼?”“뭘 그렇게 놀래, 메뉴 몇 개 바꾸는 게 어때서, 그냥 반응 보고 인성이나 테스트해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만 말하고 빨리 가.”“안가.”고은서는 민시후의 요구를 단번에 거절하며 말했다.“아무 이유도 없이 왜 다른 사람들의 메뉴를 바꿔, 주방에서도 내 말대로 안 해줄 거야.”그에 민시후는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이 정도 일도 못 하면서 나보고 어떻게 네 능력을 믿으라는 거야. 넌 그냥 갖다 주기만 하면 돼. 주방에서는 시키는 대로 할 거야.”“걱정하지 마, 넌 아직 ZY 그룹 사람도 아니니 화를 내도 나한테 내지 너한테 아무 영향 없을 거야.”민시후가 달래듯 말하자 고은서가 바로 되물었다.“그럼 왜 직접 안 가고 날 시키는데?”“내가 너 데려왔는데, 쓸모는 있어야지.”“내가 다 덮어쓰라고?”“잘 아네, 빨리 가.”민시후 말대로
이어서 직원 두 명이 음식들을 내왔는데 그게 식을까 봐 걱정한 건지 음식마다 뚜껑을 씌워 내왔다.주민기는 직원들이 음식들을 올리는 걸 보며 허 교수라는 사람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허 교수님과 비서분들도 다 배고프시죠, 얼른 드세요. 집밥 반찬 위주로 고른 거라 조금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잘 봐주세요.”“음식들 다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말을 마친 직원들이 뚜껑을 하나둘 열어주니 눈앞에는 오이가 한 상 가득 펼쳐졌다.갑자기 벌어진 오이 파티에 허 교수와 두 비서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왜 갑자기 메뉴가 바뀐 건지 알 수 없었던 주민기 역시 어안이 벙벙해서 굳어있었다.그러다 제 보스의 따가운 눈초리에 주민기는 다급히 직원을 잡고 물었다.“이게 뭡니까? 이건 저희가 주문한 게 아닌데요.”그냥 주는 대로 서빙했을 뿐이라는 직원에 그들은 매니저를 찾아 물었다.그리고 홀에 앉은 사모님이라는 분이 주방에 와서 메뉴를 바꿨다는 말을 듣자 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사모님이 보스에게 무슨 화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에서 일부러 벌인 일이라고 밝혀지자 잠시나마 제가 미쳐서 주문을 막한 건지를 의심하던 주민기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서둘러 허 교수 일행에게 사과하고 매니저에게는 새로운 메뉴를 내와달라고 부탁했다.허 교수 일행도 놀라긴 했지만 그 이유를 알았기에 더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하지만 곽승재는 그럴 수 없었는지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홀로 향했다.그리고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홀의 구석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을 때 곽승재의 미간은 어느 때보다도 구겨졌다.뒤로 머리를 질끈 묶은 고은서는 지금 갈비를 쥐어 잡고 뜯어대고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 앉은 남자는 민시후였는데 민시후는 고은서처럼 식욕이 강하지 않은지 핸드폰을 슬쩍슬쩍 보며 이따금 고은서를 더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곽승재는 표정을 굳히고 바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둘이 왜 같이 있어?”한창 맛있는 식사를 하던 고은서가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면서 이런 저급한 방법을 택한 민시후에게 어이가 없었다.이런 악취미와 유치한 작전에 함께했다고 인정하기도 뭐해 고은서는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런데 곽승재가 민시후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바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넌 나랑 같이 천자 1번 방에 가자.”“내가 왜?”정말 저한테 책임을 물으려는 듯 보이는 곽승재에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때 민시후가 나서더니 도와주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도 모를 말을 해댔다.“쟤 오늘은 내 기사로 온 거야, 쟤한테 따지는 건 괜찮은 데 데려가는 건 안 돼.”그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민시후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네 형이 곧 진급한다지, 이때 네가 사고를 치면 널 가만둘까?”“네가 그런 것까지 상관해?”가소롭다는 듯 웃는 민시후에 곽승재가 담담히 말했다.“네 형이 운성에 있긴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상업자본행사에 우리 GS그룹도 초대됐더라고.”“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진급 못 하면 가서 민씨 집안 사업하면 되지.”“네 형 일은 상관없을 수 있지, 근데 네 아버지도 상관없어?”그 말에 민시후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민시후가 형의 일을 망쳤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해성에 숨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그래, 이런 게 네가 잘하는 일이지. 이번 한 번은 내가 넘어갈게. 부부끼리 잘 해결하고, 난 이만 가볼게.”민시후가 어찌나 빨리 일어났는지 고은서가 계산하라는 말도 못 했는데 밖으로 쌩 나가버렸다.“오빠도 이제 가.”자신에게도 가라고 하는 고은서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고은서, 너희들이 매니저와 연락해서 우리 방 음식 다 바꿔놓는 바람에 내가 허 교수님 볼 면목이 없잖아.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겠다고?”매니저 말로는 사모님이 지시한 거라는데 고은서의 반응을 보니 저절로 신분을 밝히진 않은 것 같았기에 그렇다면 민시후가 매니저를 매수한 게 분명했다.하지만 곽승재가 화난 건 그런 게 아니라 고은서가 민시후가 좋은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곽승재의 손등이 붉게 데어있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그에 깜짝 놀란 직원은 연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제가 아까 잘 피하지 못해서...”“괜찮아요, 주방 가서 수프 다시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돈은 제방에서 같이 낼게요.”그 말에 감격한 직원이 떠나고 고은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올뻔한 관심의 말을 참아내고는 담담히 말했다.“찬물로 좀 씻어.”말투는 담담했지만 눈에 가득한 걱정을 보아낸 곽승재가 검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응시하며 말했다.“네가 도와줘.”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세면대로 가 물을 틀었다.혹시나 물의 세기가 셀까 싶어 손으로 물을 받아 곽승재의 손등에 뿌려주는 고은서의 얼굴에 복도의 따뜻한 조명이 비치니 평소와 달리 더 아름다워 보였다.“넌 뭐 좋아해?”곽승재의 질문에 고개를 드는 고은서의 물기 어린 눈도 조명에 비쳐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그에 곽승재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선물 주기 전에 네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며.”곽승재의 말을 듣자 어젯밤의 실랑이가 떠올랐던 고은서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예전 같았으면 곽승재의 이런 질문에 아주 기뻐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걸 다 알려주고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말까지 덧붙였을 테지만 지금의 고은서는 이런 질문이 웃기기만 했다.“필요 없어. 오빠도 좋은 마음에서 한 일이겠지만 난 이제 오빠가 주는 선물은 필요 없어.”고은서 얼굴에 훤히 드러난 조소와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에 곽승재는 화가 잔잔히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애써 참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삼촌이랑 숙모님이 계속 FY 그룹 대표랑 밥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며칠 뒤에 나 마침 시간 있으니까 삼촌한테 GS로 오셔서 같이 가자고 전해 드려.”고은서는 눈을 내리깔고 물을 손등 위로 뿌려주며 말했다.“내가 전에 말했지, 우리 집안일에 관여하지 말아 달라고. 그거 그냥 홧김에 한 말 아니야.”“우리 삼촌이랑 외숙모가 아직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
곽승재는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리에 덮을만한 담요 하나를 가져오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해성이 기후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초겨울엔 날씨가 으스스했다.히터를 켜놓은 동시에 통풍을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기에 행여나 고은서가 추워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의사 선생님께서 따뜻하게 하고 다니랬잖아.”곽승재가 덤덤한 얼굴로 설명했다.‘그건 생리할 때 따뜻하게 하고 다니란 뜻이었는데.’고은서는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겉으론 티 내지 않고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곽승재는 이내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좀 마셔.”그러나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괜찮아. 목이 별로 마르지 않아서. 얼른 할 얘기나 해.”“그럼 따뜻하게 손에 쥐고 있어.”곽승재는 물잔을 강제로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서야 소파에 앉았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물을 손에 쥔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손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 하나 있지?”고은서는 그의 물음을 듣자마자 표정이 엄숙해졌다.“응. 왜? 문제라도 있어?“여시은이 요즘 들어 유사한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지 연관 분야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어.”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이 그럴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여시은이 회사를 설립한 목적 자체가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기에 유일 투자 은행과 경쟁하려 드는 게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같은 업계에 있는 한 경쟁은 피할 수 없잖아. 예상했던 바야.”그러나 곽승재가 덤덤하게 설명을 보태었다.“투자한 게임 회사가 규모도 크지 않고 팀 내에 집안 배경이 뛰어난 사람도 없다며?”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그의 뜻을 깨달았다.“지금 그 사람들이 여시은한테 수매 당해 우리 회사와의 계약을 해제하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투자 업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지 너도 알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 현재 게임 회사가 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은서야, 데려다줄게.”육현석이 차창 너머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사양했다.“고맙지만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서 사양할게요. 그리고 저도 차 가지고 왔어요.”그러자 육현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운전 조심하고 집 들어가면 지연이한테 문자해.”“알겠어요. 절대 지연이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할 테니까 시름 놓으세요.”육현석과 박지연은 고은서의 재촉 하에 더는 머무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은서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폰을 확인해 보았는데 곽승재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전화한 걸 발견했다.마침 박지연과 함께 폰을 사물함에 넣은 채 한창 스파를 즐기고 있을 때라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곽승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바쁜지 한참이 지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녀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마침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곽승재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방금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여시은 투자 은행에 관해 얘기해줄 게 있어서 전화했어. 라이트문에 왔는데 네가 집에 없다고 해서 전화를 했던 거야.”“알겠어. 내가 당신 집으로 갈게.”고은서는 말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이내 두 사람이 사는 층에 멈춰 섰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이내 일상복을 입은 곽승재가 문을 열어주었다.금방 샤워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먼지가 좀 묻어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었어.”곽승재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자신의 현재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그는 전에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원 별장에 있을 때도 몸에 먼지가 묻거나 이상한 냄새가 배면 꼭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실로 걸어갔다.집 구조가 그녀의 집과 조금 달랐는데 거실이 좀 더 넓어 보였다.소파에 앉은 고은서는 갑자기 집에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부엌에서 요리라도 했어? 뭔가 탄 것 같은데.
곽승재가 요 며칠 바쁜 건 사실이었다.여시은의 투자은행이 곧 개업할 거라 준비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여재훈이 믿음직한 비서를 붙여줬지만, 사업에 생소했던 여시은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했다.곽현수는 이 틈을 타 곽승재에게 당분간 여시은의 회사에 가서 자리를 지켜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탁대로만 해주면 GS 그룹 본사 복귀도 고려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GS그룹으로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고은서와 함께 C선생을 잡아내고 여시은에 관해 조사하려거든 많은 시간과 수단이 필요했기에 곽현수와 다투면서 필요 없는 손해를 보는 걸 최대한 피면 하는 게 좋았다.곽현수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게다가 여시은을 도우면서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나쁠 것도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한테서 미리 소식을 접한 덕분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 모든 내막을 그대로 박지연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곽승재가 제안을 수락한 건 혹시 곽현수가 또 고씨 가문에 무슨 일을 꾸밀까 우려해서일지도 모른다고만 했다.“또라니? 고씨 가문에 해가 되는 조짐이 보였어?”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지금까지 고국성 일을 꾸민 사람이 곽현수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앞으로 곽승재와 자주 연락할 일이 생길 테고,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엔 솔직히 털어놓았다.“곽승재의 아버지가 우리 둘이 재결합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우리 삼촌을 해친 거야.”“그럼 곽승재가 너랑 거리를 둔 것도 네 삼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겠네?”비록 박지연 말처럼 쉽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그렇게 보면 돼.”박지연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그 스캔들도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고 일부러 수습하지 않은 거야?”‘눈치 백단이네.’고은서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모든 스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