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대표님, 아내분이 이렇게 사랑스러우신데 왜 화나게 해요,나중에 가서 제대로 사과하셔야겠어요.”곽승재는 정말 아내를 화나게 한 남편마냥 자연스럽게 대답했다.“그래야죠.”그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아까 국물을 쏟은 직원이 화상연고를 들고 들어와 곽승재에게 사과를 했다.다들 그제서야 빨갛게 데인 곽승재의 손등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곽 대표님 손등이 많이 대이신 것 같아요.”“아까 아내가 물로 씻어 줬어요, 괜찮아요 지금은.”주민기는 아내라는 호칭이 날이 갈수록 입에 붙는 제 상사를 보며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저번에 해선 호텔에서의 미팅도 주민기 혼자 가서 간단히 얼굴만 비치고 오기로 얘기가 다 돼 있었는데 주민기가 거의 도착할 때쯤 곽승재에게서 같이 가겠다는 연락이 왔었다.그리 중요한 자리도 아닌데 같이 가겠다고 생각을 바꾼 곽승재가 주민기도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호텔에서 고은서를 봤을 때 주민기는 그제야 곽승재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래서 이번에도 제 상사의 사랑을 돕기 위해 주민기는 곽승재 손에 들린 연고를 보며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사모님, 대표님 손에 연고 좀 발라주세요. 왼손으로 하면 불편하시잖아요.”“그래요, 약은 바로 발라야죠, 안 그럼 흉 져요.”허 교수까지 거들자 고은서는 금실 좋은 부부 사이를 연기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곽승재 손에서 연고를 건네받아 손가락에 조금씩 짜서 손등에 펴 발라 주었다.연고의 효과인지 아니면 고은서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풍기는 향기 때문인지 곽승재의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됐어요.”고은서가 약을 다 바르고 손을 떼자 곽승재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화장실 갔다 올게요.”그렇게 화장실 앞에 선 고은서는 아까 저를 품에 넣던 곽승재의 긴박함과 사람들한테 저를 아내라고 소개하던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곽승재의 관심을 그렇게 원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의 신분을 인정해주길 바랄 때는 그런 맘을 모른 척하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백미러로 그를 보며 물었다.“내가 민시후랑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잖아.”곽승재는 아까보다 조금 냉랭해진 얼굴을 하고 대꾸했다.“내가 민시후랑 사이가 안 좋은 걸 알고 일부러 날 자극하려고 붙어 다니는 거야?”고은서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그럼 자극은 받았다는 거네?”“꿈 깨. 네가 어떻게 난리를 치든 그건 네 맘인데 그러다 네가 민시후한테 당한다 해도 나는 너 동정 안 해.”“내 일에 신경 끄고 시간 남으면 네 오랜 친구나 신경 써.”조소를 흘리며 말을 마친 고은서는 곽승재를 더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그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그에 곽승재도 더는 말 하지 않고 둘은 정적 속에서 예원 별장까지 도착했다.먼저 별장으로 들어간 고은서는 옷장에서 이불부터 찾아냈다.앞으로 한 열흘 남짓 남았으니 괜히 이사한다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곽승재가 여기서 자든 말든 신경 끄고 고은서는 게스트룸에 들어가서 자기로 했다.그런데 방문 앞까지 가니 곽승재의 큰 몸이 고은서를 막아 나섰다.“어디 가?”“게스트룸.”“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고은서는 곽승재를 한번 보고는 말했다.“너랑 정상적인 부부인 척 연기할 생각 없으니까 비켜.”“연기는 안 해도 되는데.”곽승재는 할머니의 번호를 누르며 말했다.“할머니한테 말은 해야지, 내가 널 게스트룸으로 쫓아낸 게 아니라고.”“...”삼촌과 외숙모가 다녀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고은서는 이 일로 또 할머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만 참기로 했다.열 며칠 정도는 금방이니까.“이불은 나눠 덮어.”씻고 나온 고은서는 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음에도 이렇게 멀쩡한 상태에서 곽승재와 한 침대에 누워야 한다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나마 다행인 건 곽승재가 서재에서 업무를 보느라 바로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렇게 경계만 하다가 고은서가 잠에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내가 열흘 넘게 나가 있었잖아. 시부모님이 뭐라 하시진 않았지만 언짢아하는 기색이 분명했어. 선물을 드렸는데도 별로 좋은 기색이 아니었거든.”박지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넌 이 점에서 행복한 편이야. 고부 사이는 신경 쓸 필요가 없잖아.”고부 사이에 관해 고은서는 신경 써 본 적이 없다.곽승재의 부모님은 모두 해외에 있어 영상통화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뵌 적이 없다.곽승재의 부모님은 사이가 안 좋다고 했다. 곽승재가 겨우 열 살 때 어머니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딸을 데리고 외국으로 이주했다.비록 곽승재의 아버지 곽현수와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줄곧 별거 중이다. 몇 년 전, 곽현수가 중병에 걸린 후에야 GS 그룹을 곽승재에게 맡기고 자신도 외국으로 떠났다.곽승재는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그냥 그랬고 평소에도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고은서가 전미자와 함께 있을 때 곽승재의 부모님과 영상에서 두세 번 만난 적이 있다.전생에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힐 때까지 곽승재의 부모님은 귀국하지 않았다.그래서 고부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괜찮아, 네 일이나 봐.”고은서는 박지연을 위로한 뒤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사실 너 잘하고 있어. 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어.”“온 닥터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박지연이 웃으며 말했다.“사람 마음 다 똑같아. 언젠가는 나를 며느리로 인정할 거야. 어쨌든 나는 이렇게 훌륭하잖아.”고은서는 박지연이 너무 낙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다.“어쨌든 너 자신을 좀 더 사랑해. 처리할 수 없으면 온 닥터에게 맡겨. 바쁜 건 괜찮지만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을 수는 없어.”"그래, 그래, 알아.”전화를 끊고 난 고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박지연은 예전의 그녀와 너무 닮아서 한두 마디로는 도저히 설득할 수 없으니 천천히 해결하기로 했다.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틀이 지나갔다.생방송으로 인해 명운의 ‘알코올 중독' 사건이 인
“백유미 씨, 커피 한잔할까요?”서인수의 두 눈에 떠오른 조급함과 절박함을 본 백유미는 마음으로 싫증이 났지만 얼굴에는 직업적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좋아요.”두 사람은 병원 옆 카페로 향했다.서인수는 먼저 지난번에 백유미가 나서 도와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나서 판주가 그의 새 와이너리에 투자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제기했다.백유미는 조금의 희망도 남겨주지 않고 그를 향해 말했다.“서인수 씨, 지금 이런 상황에서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서인수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진 채 자신의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그 더러운 년이 내 명성을 더럽혔어요. 나를 차버리고, 또 나를 이용해 불쌍한 척해서 지금 이렇게 잘나가는 거예요. 나는 투자 하나 유치하지 못하니 업계 사람들도 공공연하게 나를 업신여겨요.”이에 백유미가 대답했다.“도 대표님은 능력도 좋고 운도 좋아요. 경제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고 매출이 안 되면 인지도도 높여주고, 투자 유치에도 도움을 주기도 하죠.”서인수는 당연히 백유미가 말한 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가 오늘 그녀를 찾아온 것도 염탐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곽 대표님의 아내인데 어떻게 그렇게 나쁜 사람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요? 설마 이것은 곽 대표님의 뜻인가요?”백유미는 웃으며 대답했다.“곽 대표님의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람을 시켜 그날에 대한 보도의 진실성과 곽 대표님과 부인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지를 물어볼 수 있어요. 그러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백유미는 비록 이 말을 공개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서인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곽 대표님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 명운를 돕는데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백유미의 말뜻을 대뜸 알아챘다.마음속에 답이 생긴 서인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백 이사님, 커피 같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공장을 더 크게 만들고 더 잘되면 우리가 협력할 그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나도 그날을 기다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서 대표님께서
마침, 이틀 전 고은서가 반값으로 중고 사이트에 내다 판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아마도 가격이 낮아서인지 당일날에 이미 주문을 넣고 사 간 사람이 있었다.‘지금 그 귀걸이가 어떻게 은혜한테 나타난 거지?’“너 이 귀걸이 참 괜찮아 보이네. 어디서 산 거야?”고은서는 직접적으로 물었다.고은혜는 등의 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뭘 좀 아는구나. 이건 G사에서 출시한 신상 귀걸이야. 구하기 엄청 힘든 건데 지훈 씨가 친구한테 부탁해서 어렵게 사서 나한테 선물해 준 거야.”“은혜 씨의 화를 풀 수만 있다면야 더한 것도 다 해줄 수 있어요.”원지훈은 입만 열면 애매한 멘트를 해댔다.고은혜는 그를 한 번 노려보더니 다시 눈길을 고은서에게 돌리고는 도발적으로 물었다.“왜 내 귀걸이를 자꾸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왜? 부러워? 형부가 설마 너에게 귀걸이도 선물 안 해줘?”‘선물해 줬지. 근데 내가 버린 것이 지금 네 귀에 걸려있네.’고은서는 당연히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이틀 전에 중고 사이트에서 비슷한 제품을 봐서 혹여나 네가 걸고 있는 게 짝퉁일까 봐 몇 번 더 쳐다본 것뿐이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얼굴에는 부자연스러운 낌새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연신 둘러댔다.“누나, 내가 산 게 짝퉁일 리가 없어요. 비록 친구가 증서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매장에 가서 진품 검진을 받아봤어요. 절대로 문제없어요!”고은서는 살짝 위로의 말을 했다.“난 그저 비슷한 걸 봤다는 거지 네가 선물한 게 가짜라는 말은 아니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게다가 넌 딱 봐도 중고 사이트에서 선물을 사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고은서는 말을 보충했다.원지훈은 큰 소리로 말했다.“저는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저는 은혜 씨가 오해할까 봐 그런 거죠. 은혜 씨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나중에는 저랑 같이 고르러 가요!”“상대하지 마세요. 얘는 그저 내가 선물을 받았는데 자기는 없어서 그게 아니
주요하게 평상시 외숙모가 고은혜에게 주는 영향이 너무 컸다.그래서 고은혜가 이렇게 원념이 깊게 쌓인 것이었다.고은서는 고은혜랑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아서 대답했다.“잠시 후에 보내줄게.”“아, 참. 지난번에 봤을 때 네가 지훈 씨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어떻게 짧은 며칠 사이에 두 사람 관계가 그렇게 좋아졌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관심 꺼!”고은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중고 사이트 사진을 캡처해서 고은혜에게 보내준 뒤 복싱 관을 나섰다.차에 올라탔을 때, 그녀는 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뒤돌아보았을 때 이상한 사람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헛것을 봤나?’고은서는 액셀을 밟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이미숙은 얼른 달려와 말을 건넸다.“사모님, 도련님은 이미 돌아와 계십니다. 지금은 위층 서재에서 업무 처리 중입니다. 제가 방금 차를 내렸는데 위층에 가져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도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손목이 아직 아프시다고 하셔서 연고도 같이 올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것도 같이 부탁드리겠습니다.”“아, 그리고 사모님 언제 돌아오시는지도 물었습니다.”이미숙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중얼중얼할까 봐 고은서는 얼른 차와 연고를 건네받았다.“네. 제가 할게요.”차를 들고 위층 서재로 걸어간 뒤 고은서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 곽승재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고은서는 문을 비스듬히 열었다. 곽승재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으며 그의 앞에는 노트북이 놓여있었고 손에는 서류들이 들려있었다.그의 표정은 엄숙하고 진지했으며 미간은 저도 모르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는 몸에서 업무적인 근엄함과 엄숙함을 내뿜고 있었다.들어온 사람이 이미숙인 줄 알고 곽승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물건은 내려놓아 주시면 됩니다.”고은서는 그의 말대로 차와 연고를 옆에 두었다. 아마도 다가온 사람의 기운이 틀려서인지 곽승재는 고개를 들었다.고은서를 보더니
고은서는 곽승재를 한 눈 보고는 말했다.“당신 핸드폰 좀 빌려 쓸 수 있어?”“당신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 되었어?”“아니. 당신 핸드폰으로 인스타 좀 보려고. 걱정하지 마. 절대로 당신 사생활을 엿볼 생각은 없어.”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내 계정으로는 은혜 인스타를 볼 수가 없어. 당신 핸드폰으로 좀 보려고.”곽승재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핸드폰 잠금을 풀어서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핸드폰을 건네받은 고은서는 먼저 인스타를 열어 바로 고은혜의 계정을 검색하였다.안에는 고은혜가 곽승재에게 보낸 DM 안부 메시지도 있었다.하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대꾸할 여념이 없었으며 한 번도 답장한 적이 없었다.고은혜의 인스타를 열어보니 역시나 곽승재는 차단하지 않았다.곽승재의 계정으로는 그녀의 모든 게시물을 다 볼 수 있었다!이런 차별 대우에 고은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고은혜가 외할아버지의 친 외손녀인 것을 생각해서지, 아니면 고은서는 정말 고은혜의 일에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고은혜는 정말 인스타를 올리기 좋아했다. 거의 매일 올리다시피 했으며 아침에 먹은 것부터 해서 저녁에 잠자는 것까지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올렸다.하루 전의 게시물이 고은서의 눈길을 끌었다.[별똥별이 참 이쁘네요. 이런 일을 겪은 것도 참 아슬아슬했네요. 그래도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정말 다행이네요. 세상에는 참말로 내가 언뜻 한 말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네요. (귀엽)]밤하늘 사진을 몇 장 올렸으며 그중 한 장에는 은은하게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외숙모라면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지만 고은서는 뒷모습으로 그 사람이 원지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전날 밤에 은혜가 지훈 씨랑 같이 별 보러 갔었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지?’고은서는 고은혜가 인스타에 올린 아슬아슬했다는 일이 사실은 원지훈이 계획한 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지난번 그 일이 파괴되었으니 지훈 씨가 이번에 또 이런 일을 새로 벌인 거네. 그러니 은혜가 지훈 씨의
박스 크기를 봐서 액세서리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슨 장식품 같았다.고은서는 걸어가서 박스를 열어보니 아주 특별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토끼 모양의 스탠드였다.토끼는 크리스털로 만들어졌고 두 눈은 빨간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스위치를 누르니 토끼의 몸에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흰색 광을 내뿜었으며 눈 주변에는 연한 빨간색을 띠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정교했다.그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고은서가 토끼 모양을 한 램프를 만지는 것을 보고 곽승재는 그녀가 토끼를 좋아하는 줄로 추측해서 그녀에게 데리고 온 것 같았다.비록 고은서는 곽승재의 물건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토끼가 너무 귀여운 걸 봐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은서는 결국 토끼 스탠드를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오후의 훈련이 너무 힘들었기에 고은서는 시원하게 반신욕을 하였다.욕실에서 나오자, 저녁 밥상이 준비 되었다고 이미숙이 말했다.고은서는 머리에 머릿수건을 두른 채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층계를 내려가려고 했다.마침, 서재에서 나오는 곽승재와 마주쳤으며 그는 고은서의 차림새를 보더니 그녀의 얼굴을 몇 번 흘겨보았다.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곽승재를 한 눈 째려보고는 말했다.“보긴 뭘 봐. 여자 생얼을 처음 보나!”말을 마친 뒤, 그녀는 슬리퍼를 끌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은서는 요즘 외출할 때 빼고는 집에서 거의 맨얼굴로 있었다. 차림새도 예전처럼 정교하고 완벽하게 꾸미진 않았다.곽승재도 당연히 그녀의 맨얼굴을 보았었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모습은 처음이었다.피부는 불그스름하고 촉촉했으며 분홍색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장난기 있고 천진난만해 보였다.곽승재는 방금 왠지 모르게 고은서의 볼을 꼬집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아래층에서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숟가락을 들고 국을 마시고 있었고 왼손에 닭 다리를 쥐고 아주 신나게 먹고 있었다.게다가 입에는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아줌마, 어떻게 된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
곽승재는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리에 덮을만한 담요 하나를 가져오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해성이 기후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초겨울엔 날씨가 으스스했다.히터를 켜놓은 동시에 통풍을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기에 행여나 고은서가 추워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의사 선생님께서 따뜻하게 하고 다니랬잖아.”곽승재가 덤덤한 얼굴로 설명했다.‘그건 생리할 때 따뜻하게 하고 다니란 뜻이었는데.’고은서는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겉으론 티 내지 않고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곽승재는 이내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좀 마셔.”그러나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괜찮아. 목이 별로 마르지 않아서. 얼른 할 얘기나 해.”“그럼 따뜻하게 손에 쥐고 있어.”곽승재는 물잔을 강제로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서야 소파에 앉았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물을 손에 쥔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손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 하나 있지?”고은서는 그의 물음을 듣자마자 표정이 엄숙해졌다.“응. 왜? 문제라도 있어?“여시은이 요즘 들어 유사한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지 연관 분야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어.”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이 그럴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여시은이 회사를 설립한 목적 자체가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기에 유일 투자 은행과 경쟁하려 드는 게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같은 업계에 있는 한 경쟁은 피할 수 없잖아. 예상했던 바야.”그러나 곽승재가 덤덤하게 설명을 보태었다.“투자한 게임 회사가 규모도 크지 않고 팀 내에 집안 배경이 뛰어난 사람도 없다며?”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그의 뜻을 깨달았다.“지금 그 사람들이 여시은한테 수매 당해 우리 회사와의 계약을 해제하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투자 업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지 너도 알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 현재 게임 회사가 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은서야, 데려다줄게.”육현석이 차창 너머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사양했다.“고맙지만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서 사양할게요. 그리고 저도 차 가지고 왔어요.”그러자 육현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운전 조심하고 집 들어가면 지연이한테 문자해.”“알겠어요. 절대 지연이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할 테니까 시름 놓으세요.”육현석과 박지연은 고은서의 재촉 하에 더는 머무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은서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폰을 확인해 보았는데 곽승재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전화한 걸 발견했다.마침 박지연과 함께 폰을 사물함에 넣은 채 한창 스파를 즐기고 있을 때라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곽승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바쁜지 한참이 지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녀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마침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곽승재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방금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여시은 투자 은행에 관해 얘기해줄 게 있어서 전화했어. 라이트문에 왔는데 네가 집에 없다고 해서 전화를 했던 거야.”“알겠어. 내가 당신 집으로 갈게.”고은서는 말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이내 두 사람이 사는 층에 멈춰 섰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이내 일상복을 입은 곽승재가 문을 열어주었다.금방 샤워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먼지가 좀 묻어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었어.”곽승재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자신의 현재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그는 전에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원 별장에 있을 때도 몸에 먼지가 묻거나 이상한 냄새가 배면 꼭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실로 걸어갔다.집 구조가 그녀의 집과 조금 달랐는데 거실이 좀 더 넓어 보였다.소파에 앉은 고은서는 갑자기 집에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부엌에서 요리라도 했어? 뭔가 탄 것 같은데.
곽승재가 요 며칠 바쁜 건 사실이었다.여시은의 투자은행이 곧 개업할 거라 준비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여재훈이 믿음직한 비서를 붙여줬지만, 사업에 생소했던 여시은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했다.곽현수는 이 틈을 타 곽승재에게 당분간 여시은의 회사에 가서 자리를 지켜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탁대로만 해주면 GS 그룹 본사 복귀도 고려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GS그룹으로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고은서와 함께 C선생을 잡아내고 여시은에 관해 조사하려거든 많은 시간과 수단이 필요했기에 곽현수와 다투면서 필요 없는 손해를 보는 걸 최대한 피면 하는 게 좋았다.곽현수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게다가 여시은을 도우면서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나쁠 것도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한테서 미리 소식을 접한 덕분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 모든 내막을 그대로 박지연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곽승재가 제안을 수락한 건 혹시 곽현수가 또 고씨 가문에 무슨 일을 꾸밀까 우려해서일지도 모른다고만 했다.“또라니? 고씨 가문에 해가 되는 조짐이 보였어?”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지금까지 고국성 일을 꾸민 사람이 곽현수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앞으로 곽승재와 자주 연락할 일이 생길 테고,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엔 솔직히 털어놓았다.“곽승재의 아버지가 우리 둘이 재결합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우리 삼촌을 해친 거야.”“그럼 곽승재가 너랑 거리를 둔 것도 네 삼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겠네?”비록 박지연 말처럼 쉽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그렇게 보면 돼.”박지연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그 스캔들도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고 일부러 수습하지 않은 거야?”‘눈치 백단이네.’고은서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모든 스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