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떡하지? 그가 가기를 기다려?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하은설은 심유진과 바닥에 주저앉아 등을 벽에 바짝 붙였다. 하은설은 계속 밖에서 나는 이상한 기척을 주시했다.“일단 기다려 보자.”심유진은 꺼림직했다.하은설과 심유진이 거주하는 곳은 보안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거주자가 아니면 들어올 수가 없다.심유진은 혹시나 허태준이 돌아온 걸 가봐 무서웠다.허태준은 전에도 심유진 몰래 그녀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녀 주위에는 위험 요소가 워낙 많았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그때, 의문의 무거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유진의 심장박동도 점점 빨라졌다.드디어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멈췄을 때 심유진의 심장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하은설에게 절대 소리 내지 말라고 문자를 보냈다.[그 사람, 아무래도 바로 내 방 밖에 있는 것 같아. 나와 문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하은설도 심유진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심유진이 보낸 문자는 계속해서 하은설의 핸드폰에 떴다.[이따가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하은설은 숨을 죽이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문밖으로 김욱의 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안에 있어?”“아, 미친!”심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휴대폰을 바닥에 밀칠 뻔했다.“경찰에 신고 안 해도 돼. 우리 오빠야.”심유진은 영상통화를 끊고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난 오빠가 다시는 안 오는 줄 알았어.”심유진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김욱을 바라보았다. “오면 온다고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넌 그냥 회사에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되지만 아직 스파이를 잡지 못했어. 넌 아직 위험한 상태야.”심유진은 계속 보호 받아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이 늦은 시간에 왜 온 거야. 뭔 일 있어?”“방에 불이 켜져 있길래 빨리 자라고 일깨워 주러 왔지.”김욱은 심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말했
재택근무를 해야 했던 심유진은 밖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하지만 업무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심유진은 당분간 판매와 고객 서비스 업무를 처리하는 동시에 다른 회사와의 계약 세부 사항을 소통하고 상담에 응하는 업무를 맡았다.하은설은 방금 끓인 현미차를 심유진 옆에서 주룩주룩 마셔댔다.“나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하은설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공포에 떨었다.심유진은 타이핑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무슨 일인데.”“너 분명 너의 오빠와 싸워서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하지 않았어?”하은설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심유진은 전혀 당황해하지 않았다.“응. 그런데 왜?”“그럼 어젯밤에 왜 온 거지?”하은설은 심유진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며 말했다.“아무리 갈등이 있었다고 해도 얼마나 심하게 싸웠겠어.”“음...”심유진은 적당하게 둘러댈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사실... 나 오빠와 갈등이 없었고 쫓겨난 것도 아니야.”“풋!”하은설은 재빨리 냉소를 지으며 심유진의 얼굴을 꼬집었다.“야! 이것도 친구라고!”하은설은 귀가 아플 정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지 알아?”하은설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어젯밤, 나는 네 오빠가 집까지 찾아와서 괜히 트집 잡는 줄 알았잖아! 그래서 내가 네 오빠를 호되게 꾸짖은 것도 모자라 손찌검까지 했다고! 아, 망했어! 그리고 네 오빠가 나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 줄 알아? 아! 열받아!”심유진은 꼬집힌 얼굴이 너무 아팠지만 뿜어져 나오는 웃음을 끝내 참지 못했다.“푸하하!”“웃음이 나와?”하은설은 어제의 기억이 상기되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자신이 한 어리석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창피한 나머지 쥐구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내가 미안해.”심유진은 웃다가 찔끔 나온 눈물을 손끝으로 닦으며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네가 오빠를 혼내줄 줄은 몰랐지.”하은설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점심시간, 마리아한테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유진 씨, 지금 뭐 해요?”심유진은 입안에 밥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밥 먹고 있어요. 마리아 씨는요?”“저도 밥 먹고 있죠.”마리아의 목소리는 풀이 잔뜩 죽어있었다.“유진 씨, 보고 싶어요. 유진 씨가 회사에 안 오니까 너무 외로워요. 같이 점심밥 먹어 줄 사람도 없고 출근 시간에 같이 농땡이 부릴 동료도 없어요. 휴...”앞으로 마리아와 만날 기회가 적어진 걸 생각하니 심유진도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그녀마저도 우울해 하면 마리아가 더 침울해할 것을 고려해 감정을 숨긴 채 마리아를 타일렀다.“다른 분과 밥을 먹으면 되죠.”비록 대표실 직원을 다 바꿨다고 해도 마리아의 성격에 그들과 친해지는 게 힘든 일은 아니다. 게다가 새로 온 직원 중 마리아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직원이 많았다. 마리아가 마음만 먹으면 공통된 언어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다른 분들이 유진 씨는 아니잖아요.”마리아는 계속 시무룩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마리아가 이토록 자신을 좋아하는지 심유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심유진은 회사를 떠난 후로부터 한 번도 마리아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미안했다.“아니면...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서 같이 밥 한 끼 먹을래요?”심유진은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심유진이 한국 갈 날이 머지않았고 이번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가기 전 마리아와 밥 한 끼 먹으면서 작별 인사를 할 계획이었다.“좋아요!”마리아는 냉큼 승낙했다.“뭘 먹을지는 유진 씨가 정해요! 전 뭐든지 좋아요!”“네.”심유진은 마리아를 다독이다가 전화를 끊었다....김욱은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왔다.같은 시각 심유진과 하은설은 거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놀고 있었다. 그 둘은 문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놀라서 자리에서 튕겨 나가듯 일어섰다. 그러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현관 쪽을 바라봤다.김욱의 두 손에는 큰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그는 거실 중앙에 꼿꼿
하은설이 랩 하는 것처럼 퍼붓는 욕에 김욱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여태까지 육윤엽 빼고 그를 이렇게 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김욱은 겨우 정신을 다잡고 입을 뗐다.“은설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하은설은 여전히 화가 나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오해? 제가 무슨 오해를 해요.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배신을 하니까 하는 말 아니에요? 블루 항공의 상속권을 뺏은 게 오해라는 거예요, 아니면 같이 자라온 정도 무시하고 유진이를 회사에서 내보낸 게 오해라는 거예요?”하은설이 어디서 들은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욱은 꼭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다 오해예요. 저는 상속권을 뺏은 적도, 유진이를 회사에서 내보낸 적도 없어요. 현재 블루 항공의 대표는 여전히 삼촌이고 장차 그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 역시 유진이예요.”“이제 와서 능청스럽게 발뺌할 생각 하지 마요!”하은설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유진이가 다 저한테 말했어요! 제가 친구 말은 안 믿고 당신이 하는 헛소리를 믿을 것 같아요?”김욱은 드디어 일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알 것 같았다.“제 말을 못 믿겠다면 저와 함께 유진이 한테 물어봅시다.”김욱은 누구보다도 떳떳했다.다만 심유진이 장황하게 거짓말을 널어놓은 터라 이 둘이 쉽게 화를 삭힐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김욱의 당당한 모습에 하은설은 괜히 망설여졌다.“진짜... 유진이한테서 회사를 뺏은 게 아니에요?”하은설은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맹세해요.”김욱은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만약 제가 거짓말한 게 맞다면 천벌을 받을게요.”“됐어요. 그만하세요.”하은설은 다급히 김욱의 입을 막았다.“믿을게요. 제가 믿으면 되잖아요.”그녀는 골치가 아팠다.“방금 일부러 욕한 거 아니에요. 저는 그저... 아무튼 미안해요. 김욱 씨”김욱은 더는 하은설한테 따지지 않았다.이 일이 하은설 탓도 아니었고 누구 탓인지 따지기 시작하면 아수라장이 되어버릴 것이다.“괜찮습니다.”김욱
“심유진! 이리 와봐!”김욱은 심유진을 불렀다.심유진은 얼굴을 찌푸린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주방에 나타났다.“왜, 복수라도 하려고?”김욱은 눈썹을 찡그렸다.“아니!”심유진은 재빨리 태세 전환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사랑하는 오라버니께서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김욱은 강한 비린내를 풍기며 여전히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스티로폼 박스에서 꺼내 심유진 앞으로 던졌다.“생선 손질 좀 해줘.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손질해야 해.”“윽!”생생하게 살아서 펄떡이는 생물이 몸에 닿는 것도 무서웠던 심유진은 바로 김욱 뒤로숨었다. 심유진은 김욱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오빠, 내가 잘못했어, 진짜!”심유진은 울먹이며 싹싹 빌었다.“설마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 아니지? 나 이러다가 트라우마 생기면 기면 어쩔 거야!”김욱은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았다. 그는 등 뒤에 서있던 심유진을 끌어내고 식칼을 손에 쥐여주었다.“네가 선택해. 물고기를 죽일래, 아니면 네가 죽을래.”김욱은 엄숙한 표정으로 위협했고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왠지 섬뜩했다.상의할 여지 따위는 없어 보였다. 심유진은 하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생선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퍽!”방금까지 펄떡이던 물고기는 이내 숨통이 끊어졌다.“그,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해?”심유진은 멍하니 서서 김욱한테 물었다.김욱은 태연하게 다음 절차를 알려줬다.“비닐을 긁어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다 걸러내. 그리고 생선을 한 조각씩 얇게 썰어주면 돼.”심유진은 눈앞에 펼쳐질 잔인한 광경을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오, 오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오빠...”심유진은 김욱이 방심한 틈을 타 그의 옷소매를 잡으려 했다.김욱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잽싸게 피했다.“그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질 생각하지 마.”그는 심유진을 봐줄 생각 따위 없어 보였다.“빨리 일해!”그 후 김욱의 감시 아래 심유진은 손질을 마쳤다.심유진이 손질을 하는 동안 김욱은 입
토요일 저녁.심유진과 마리아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 잡았다.이번이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니 심유진은 특별히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으로 예약했다. 레스토랑이 워낙 핫플레이스여서 육윤엽의 도움으로 겨우 예약할 수 있었다.두 사람은 레스토랑 문 앞에서 마주쳤다.마리아는 심유진을 보자마자 끌어안기 바빴다.“유진 씨!”마리아는 한참 동안 심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감탄을 자아냈다.“역시 야근을 안 하니까 얼굴색이 좋아졌네요.”심유진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오늘 화장이 잘 먹었을 뿐이에요.”오늘 두 사람이 온 레스토랑은 차림새를 주의해야 했다.하은설은 그녀에게 은색 롱스커트를 추천해 주었다. 메이크업은 자연스럽고 단아하게 연출했다.심유진은 내츄럴 하고 단아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메이크업을 한 시간 만에 완성했다.평소 십여 분 만에 끝낸 메이크업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심유진과 마리아는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의 출중한 외모와 늘씬한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유진 씨?”그때, 옆에서 갑자기 심유진을 부르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심유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먼 곳에 있는 앨런을 발견했다.앨런은 거래처와 레스토랑에 방문했다. 한 남성과 여성이 그와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보통 신분이 아닌 것 같았다.심유진은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앨런과 길게 대화하지 않았다.마리아는 심유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저분이 유진 씨 친구예요?”“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예요.”마리아는 수상함을 느낀 듯 피식댔다.“보통 동료가 아닌 거 같은데요? 저분이 유진 씨를 보는 눈빛이... 묘한데요.”앨런은 심유진에 대한 호감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그와 초면인 마리아조차도 단번에 심유진을 향한 그의 애틋한 눈길을 보아낼 수 있었다.심유진은 그런 앨런이 딱하게 보일 뿐이었다.“진짜 그냥 동료일 뿐이에요.”심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리아와 앨런은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는 관계라서 심유진은 굳이 둘을 소개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이쪽은 제가 킹 호텔에서 근무할 때 직속 상사였던 앨런이고 이쪽은 제 동료이자 친구인 마리아예요.”앨런은 젠틀한 모습을 뽐내려고 먼저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앨런 씨.”마리아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녀는 앨런의 손을 살짝 잡으며 인사했다.“제가 정정할게요. 저는 현재 유진 씨의 동료가 아니라 옛 동료예요.”“네? 유진 씨, 또 이직했나요?”“아니요.”심유진은 애써 멋쩍게 웃음을 유지했다.“저 지금은 백수예요.”“무슨 말이에요?”앨런의 눈에는 의혹으로 가득했다.심유진이 킹 호텔에서 퇴사할 때 앨런한테 집에서 운영하는 회사로 이직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 때문에 심유진은 앨런 앞에서 차마 자신이 잘렸다는 거짓말 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잘렸다고 했다간 들통날 게 뻔했다. 게다가 마리한테 그녀의 정체를 들킬 수도 있었다.심유진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마리아를 슬쩍 쳐다봤다.“그냥 저랑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심유진은 마리아가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앨런한테 진실을 말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과연 마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로 눈치를 챘다.“네. 대표님이 유진 씨를 붙잡으려 온갖 노력을 다했어요. 그럼에도 유진 씨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우리 부서 동료들도 다 섭섭했어요.”앨런은 그 둘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심유진의 업무 능력이 강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능력 있는 심유진이 잘린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지금 다니는 직장이 없다면 킹 호텔로 돌아오는 건 어때요?”앨런은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전 일단 좀 쉬고 싶어요.”심유진은 그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그래요. 어쩔 수 없죠.”앨런은 굳이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일할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거래처 고객이 아직 기다리고 있어 앨런은 이내 자리로 돌아
“갑자기 웬 선물이에요?”마리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심유진은 더 이상 마리아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저 다음 주에 한국으로 돌아가요.”“네?”마리아는 깜짝 놀랐다.“진짜 가서 영어 가르칠 생각이에요?”“아직은 모르겠어요. 돌아간 후에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심유진은 미소를 머금고 계속해서 말했다.“사실 집이 좀 그리워요. 혼자 외국에서 직장도 잃었고 너무 힘들더라고요.”“그렇긴 하겠네요.”마리아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럼, 이제 또 여기에 올 거예요?”마리아는 내심 기대하며 물었다.“상황 봐서요. 제가 한국에서 새 직장을 찾으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심유진은 조심스레 대답했다.“그럼 저분은 어쩌고요?”마리아는 그새를 못 참고 먼 곳에 앉아 있는 앨런을 보며 놀렸다.“앨런 씨는 유진 씨가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심유진은 재차 해명했다.“앨런 씨와 저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네, 알겠어요. 두 분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됐죠?”마리아는 여전히 키득거리며 심유진을 놀려먹었다. 심유진의 말을 믿지 않는 게 확실했다.앨런을 마주친 후로 심유진은 이번 식사에 대한 기대감이 뚝 떨어졌다.심유진은 마리아와 밥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를 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멀리서 바라보는 앨런의 눈빛이 그녀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심유진은 부랴부랴 식사를 마친 후 결제를 한 뒤 빨리 떠나려 했다.심유진과 마리아가 레스토랑을 떠나려는 순간 앨런이 따라나섰다.“유진 씨!”그는 큰소리로 심유진을 불러세웠다.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무슨 일 있어요?”“내일 일요일인데, 혹시 시간 돼요?”앨런은 다급하게 물었다.“사실 프레디와 나가서 놀 생각인데 유진 씨도 같이 갈래요?”“죄송해요.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앨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심유진은 거절했다.“부자끼리 좋은 시간 보내요!”“하지만 프레디가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