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수현은 맑은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이 계약서가 마음이 들지않지만 온은수가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게 싫었다..온은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한 후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그건 걱정 마. 너 같은 여자는 나한테 애원해도 만지고 싶지 않으니까.”차수현은 그의 거친 표현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꼭 그러길 바랄게요.”그녀는 방금 한 말을 열심히 계약서에 적고 사인을 마친 후 온은수에게 건넸다.온은수는 그녀의 서명을 힐긋 쳐다봤는데 돈만 밝히는 이미지와는 달리 글씨체가 생각보다 단정했다.수려하고 깔끔한 필체에서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한 흔적이 묻어났다.온은수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의 서명 옆에 사인을 마친 후 계약서를 내려놨다.그는 블랙카드 한 장 그녀에게 건넸다.“이 카드 사용해. 한도 제한 없어.”차수현은 이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카드를 건네 받았다.“걱정 말아요. 돈만 들어오면 은수 씨 요구대로 전부 다 맞춰드릴게요.”온은수는 코웃음 치고 더는 그녀를 쳐다 보지 않았다.그는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새벽에 깨어나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 날이 밝아오기까지 아직 몇 시간 더 있었다.줄곧 병상에 누워있다가 이제 막 정신이 든 온은수는 피곤함이 몰려와 그녀에게 말했다.“난 이만 쉬어야겠어. 어디서 잘지는 알아서 결정해. 가족들의 의심만 안 사면 돼.”말을 마친 그는 서슴없이 방안의 큰 침대를 차지하고 털썩 누웠다.차수현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돈을 받는 처지라 그가 갑이라는 걸 인정한 그녀였다.방안에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이 꺼지고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그녀가 잠잘 곳을 구해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온은수는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수현은 어디서 이부자리를 찾아냈는지 그새 바닥에 깔았다.그녀는 자리를 아주 조금 차지한 채 가녀린 몸을 움츠리고 누웠다. 너무 조용해 있는듯 없는듯 방안은 고요했다.
온은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책장을 펼치는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그는 여자에게 넋이 나간 자신을 생각하며 한심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돈만 밝히는 여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독서를 해? 이렇게 하면 내 마음이 조금은 바뀔 줄 알고? 천만에, 무의미한 일이야.’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불을 젖히고 곧 바로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차수현은 인기척을 듣더니 그제야 온은수가 깨어난 걸 알아챘다.‘설마 내가 책상을 좀 빌려 썼다고 불쾌한 걸까?’그녀는 더 생각할 새도 없이 서둘러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은수한테서 받은 돈으로 엄마의 병을 치료해야 했으니까.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온은수는 그녀가 물건을 싹 다 정리한 걸 보더니 천천히 말했다.“나가서 밥 먹어.”차수현은 그를 따라 주방으로 걸어갔다. 온회장은 풍성한 차려진 아침식탁 앞에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온은수와 차수현이 나란히 방에서 나와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걸어오는 걸 보더니 온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수현아, 어젯밤엔 잘 잤어? 은수가 널 괴롭히진 않았지?”온은수는 그녀를 힐긋 째려봤다. 이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그럴 리가요. 푹 잘 잤어요.”어젯밤 바닥에서 자느라 그녀는 허리가 쑤시고 온몸이 뻐근했다. 하지만 돈을 받았으니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다행이네. 앞으로 은수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 하거라. 너 대신 따끔하게 혼내줄게.”차수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다들 무사히 아침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후 온은수는 온회장과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서재로 들어갔다.“아빠, 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걸 우리 가족 말곤 아무도 몰랐으면 해요.”“왜? 너한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게냐?”“그게 아니라 왠지 이번 교통사고가 우연치고는 이상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동태를 잘 살피고 그들을 기다리다 보면 느슨해진 그들의 꼬리가 드러날 거예요.”온은수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수년간 재벌가에서 지내다 보니 절
“네, 알았어요.”차수현은 얌전히 대답한 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온씨 집안에서 나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후 그녀는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온은수는 감정 기복이 심하여 상대하기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엄마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내야 했다.……차수현은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다. 병실에 도착하자 단짝 친구 한가연이 한참 엄마를 보살펴주고 있었다. 한편 엄마의 안색이 전보다 훨씬 좋아진 걸 발견한 그녀는 걱정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온혜정은 딸을 보자 반가워 하며 그녀에게 새로운 직업이 어떤 일인지 물어보았다.차수현은 미리 준비했던 대로 대답하며 엄마를 안심시키며 이야기 해주었다.세 사람이 한참 얘기를 나눈 후 온혜정이 차수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아 참, 은서는 잘 지낸대? 지금도 해외에 있어? 언제쯤 귀국한대? 걔가 돌아오면 우리 수현이도 이렇게 고생하진 않을 텐데 말이야.”차수현은 미소를 짓고 있다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녀는 오랫동안 온은서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대학교 때 차수현은 엄마를 보살피면서 학교에 다니느라 그 모습은 초라했었다.. 그녀가 가장 힘들 때 온은서가 그녀를 도와줬었다.그렇게 은서는 착하고 해맑은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하였다. 그 뒤로 병원에도 자주 찾아와 온혜정을 돌봐주며 그녀에게 사위로 인정받았다.두 사람은 대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결혼하려 했지만 온은서가 해외 의학연구소로부터 파격적인 오퍼를 받았다. 그에게 첨단의학연구를 위해 출국해달라는 초대장이 왔었다.온은서는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처음 두 사람은 자주 연락하며 지냈지만 갑자기 반년 전부터 연락이 뚝 끊겨였다.차수현도 차츰차츰 눈치를 챘다. 온은서가 어쩌면 날 이제 짐 처럼 느껴져서싫증 났거나 해외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 그녀를 깨끗이 잊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침울한 마음을 뒤로한 채 애써 웃으며 엄마에게 말했다.“엄마도 알다
“이미 사람을 시켜 CCTV를 확보했는데... 한 달 전 영상이라 호텔 쪽에서 싹 다 지웠대요.”온은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날은 그가 직접 돌아가 사람을 찾으려 했는데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요 며칠 윤찬이 믿고 있는 몇몇 사람들도 회사 주가를 유지하며 딴 사람들이 빈틈을 노리고 공격하는 걸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여 그날 일을 조사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온은수도 그런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계속 조사해. 일말의 단서도 놓쳐서는 안 돼.”온은수의 지시에 윤찬은 알겠다며 대답을 하곤 곧장 자리를 떠났다.온은수는 업무를 다 처리한 후 서재에서 나오다가 마침 병원에서 돌아온 차수현과 마주쳤다.차수현은 어젯밤에 잠을 설쳤고 또 아까 길에서 흐느끼며 우느라 몸이 엄청 피곤했다. 그녀는 얼른 조용한 곳을 찾아가 마음을 달래고 싶었지만 문을 열자마자 온은수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온은수는 빨개진 그녀의 눈동자를 보더니 생각에 잠겼다.‘이 여자 엄마 보러 간다더니 딴 사람한테 하소연하러 간 거야 뭐야?’어젯밤에 그의 요구를 들어준 것도 전부 연기한 거였나?. 그녀는 결국 돈이나 밝히는 여자에 불과한 건가?온은수는 싸늘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왜? 아침까지 집에서 뻔뻔스럽게 연기하더니 너무 빨리 본성이 드러난 거 아니야? 그새를 못 참고 누굴 찾아가 하소연 이라도 한 거야?”차수현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시킨 일은 전부 최선을 다해 맞춰준 그녀였다. 단지 슬픈 일이 생각나 마음이 속상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팔 필요가 있을까?그녀는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서운한 마음을 꾹 참았다.“미안해요, 은수 씨. 엄마를 만나서 조금 감격했을 뿐 은수 씨가 말한 그런 거 아니…….”“네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온은수는 귀찮다는 듯 그녀의 말을 잘랐다.“이 말만 기억해. 나와 결혼한게 속상하고 억울해도 꾹 참아. 여기저기에 소문내고 다니지 마. 그리고 집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그냥 교통 버스만 탔다고?온은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차씨 집안이 어마어마한 재벌가는 아니더라도 그 집안의 귀한 딸이 가난해서 버스나 탈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그는 차수현이란 여자가 점점 더 난해해졌다.온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방문을 열자 차수현이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쪽지를 온은수에게 준 이후로 후회가 밀려왔다.만에 하나 이 남자가 속이 좁아서 이 점만 물고 늘어지며 돈을 다시 가져가면 그녀는 어떡하란 말인가?차수현은 괴로움에 푹 빠졌다. 요즘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고 몸도 지쳐 있어 머리가 잠시 잘못된 듯싶었다.온은수는 분노와 괴로움이 뒤섞인 그녀의 표정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마른기침을 했다.차수현은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이 찔리듯 그를 힐긋 쳐다봤다.“저기 그게 말이에요, 은수 씨. 기분 상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단지 제가 정말 우리의 계약을 어기는 행동을 한 적이 없으니 불필요한 의심은 자제해달라는 뜻이었어요.”온은수는 한참 침묵했다. 그녀가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온은수는 비로소 알겠다며 짤막하게 대답했다.그는 차수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책 한 권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차수현은 그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가 화를 낼 의향이 없는 걸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들고 밖에 나가 잠시 피해있으려 했다. 이때 온은수가 머리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차수현이 입은 옷이 살짝 낡았다는 걸 발견했다. 소매와 칼라 부분은 색까지 바랬다.온은수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는 색이 바래질 때까지 한 옷만 입는 사람을 전혀 본 적이 없었다.“잠깐.”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차수현은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이럴 줄 알았어. 날 쉽게 놓아줄 리가 없지.’차수현은 혼 날 준비를 했는데 온은수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우리 온씨 집안에 당신이 입을 옷이 그렇게 없어?”차수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이고 자
온은수는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이게 웬일이야? 정말 오랜만이네.”온은서는 온은수의 형님 온명우의 작은 아들이다. 온은수는 비록 온명우 부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도 온은서와는 나름 친하게 지냈다.온은서는 어릴 때 꿈이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거라 가업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리곤 의학을 배워 사람들의 병 치료에 전념했다. 부모님 협박을 받지 않기 위해 그는 대학교에 다닐 때 직접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모든 비용을 감당했다. 그리고 현재는 우수한 성적으로 해외 유학을 떠났다.하여 부모 세대의 원한은 삼촌과 조카인 그들 두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 했다.“삼촌, 할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삼촌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다면서요? 게다가 결혼까지 했어요? 이렇게 큰일을 왜 말하지 않았어요?”온은수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외국에 있는 너까지 다 알게 된 거야?”“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그런데 저 너무 궁금해요. 삼촌이 결혼한 것도 신기하고 게다가 할아버지가 칭찬을 금치 못할 정도의 여자는 대체 어떤 분이에요? 나중에 귀국하면 꼭 제대로 소개해줘야 해요.”온은수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땐 아마 차수현과 이혼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두 사람은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눈 후 온은서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온은서는 문득 국내에서 계속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 여자가 떠올렸다. 몇 해 동안 그는 해외에서 공부하며 줄곧 차수현의 엄마를 위해 수술을 해 줄 로스 닥터를 찾아 헤맸다.로스 닥터는 의술이 뛰어나지만 성격이 괴팍하여 아무나 쉽게 그를 만나지 못한다. 그를 청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 온은서도 겨우 인연이 닿아 그와 연락할 수 있었다.다만 로스 닥터는 온은서에게 그와 함께 전쟁터에 있는 국경의 작은 나라로 구조를 하러 가야만 효성에 가서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온은수는 차수현이 걱정할까 봐, 또 그리고 괜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귀국할 것만 같아 모질게 연락을 끊었다.모든 일
그는 빠른 속도로 S시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 앞에 주차했다.“수현 씨, 들어가서 쇼핑하세요. 끝나가면 미리 저한테 전화주세요. 바로 모시러 오겠습니다.”윤찬은 회사에 볼일이 있어 그녀와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차수현도 그에게인사를 하며 머리를 끄덕이곤 홀로 백화점으로 들어갔다.안에 들어서니 값비싸고 화려한 물건들이 한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차수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차한명에게 쫓겨난 후로는 그녀는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온은서에게 이끌려 딱 한 번 와본 듯싶었다.온은서를 떠올리자 그녀는 살짝 넋 놓고 말았다. 기억 속의 그 방향대로 걸음을 옮기자 그때 한번 입어봤던 옷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보란 듯이 걸려 있었다.그때 온은서는 그녀에게 나중에 프러포즈하는 날에 꼭 이 원피스를 사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다.차수현은 그리움이 잔뜩 묻어난 눈빛으로 안으로 걸어가 그 원피스를 만져보려 했는데 이때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머, 왜 이래요 정말? 여기 옷들 당신 따위가 함부로 만질 수 있는 옷이라고 생각해요? 흠이라도 나면 당신이 배상할 수 있겠어요?”차수현이 고개를 돌리자 종업원이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차수현은 이 상황이 살짝 우스웠다. 그녀는 이렇게 비싼 원피스를 살 생각이 없었다. 종업원이 친절하게 말하면 그냥 보고만 가려고 했는데 아예 그녀를 거지 취급까지 하다니!이 원피스를 조금이라도 더럽힐까 봐 질색하는 모습에 차수현도 더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옷을 걸어놓은 이유가 손님들을 입어보라고 그런 거 아닌가요?”“그건 살 능력이 됐을 때 그런거죠.”종업원은 저렴한 그녀의 옷차림을 보며 하찮듯이 말했다.차수현은 이번에 진짜 화가 나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녀가 종업원의 태도를 지적하려 할 때 비난 조의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워? 창피한 줄도 모르게!”차수현이 머리를 돌리자 입구에 두 남녀가 걸어들어왔다.
안수지는 말하면서 자신의 추측을 더욱 확신했다.차수현은 비록 예쁘게 생겼지만 옷차림이 항상 초라했는데 지금 난데없이 블랙카드를 들고 쇼핑하고 있으니 내연녀가 된 게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매장을 떠날 생각 없이 일부러 다른 원피스를 구경하는 척하며 몰래 차수현의 위치를 스캔했다.잠시 후 옷을 다 갈아입은 차수현이 탈의실에서 나왔다.그녀가 나온 순간 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그녀에게로 시선이 쏠렸다.차수현은 여전히 과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무채색의 원피스를 입고 새하얀 얼굴에 짙은 화장기도 없이 백옥 같은 피부를 자랑했다.검은색 긴 생머리가 어깨에 드리워지고 몇 가닥만 앞으로 살짝 내렸는데 마치 한 송이 청순한 백합꽃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이주원은 생각이 복잡해지고 심지어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의 차수현도 지금처럼 여리여리하고 아름다웠으니까.안수지는 차수현을 바라보는 이주원의 눈빛에 기분이 확 잡쳤다.그녀는 이주원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아쉽게도 이주원의 머릿속엔 온통 차수현 여우년 뿐이었다.이제 드디어 보란 듯한 집안 조건을 내밀며 이주원의 마음을 확 사로잡으려 했는데 그는 또다시 차수현에게 흠뻑 빠져버렸다.안수지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오늘 반드시 저 천한 차수현의 본 모습을 까발리겠다고 다짐했다.안수지는 잠시 고민하며 앞으로 걸어가 이주원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질투가 가득 담긴 말투로 쏘아붙였다.“수현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넌 여전히 그대로네. 청순한 척하며 남자나 유혹하고. 애초에 너희 집에서 네 행실이 하도 음란하여 집안 망신을 시킬까 봐 내쫓았는데 왜 아직도 개 버릇 남 못 주고? 꼭 이렇게 남의 가정이나 파탄 내는 내연녀가 돼야만 속이 시원하겠어? 어휴... 몸 팔아 번 돈으로 이렇게 자랑질이나 하고 다니는 여자는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차수현은 치마가 꽤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았는데 안수지의 말을 듣자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그녀는 담담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