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 수도 있잖아.”안달해서 말하는 전희라의 목소리에 권재혁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이때 화장실 문을 열며 나오던 김지아는 전희라와 도우미들이 문 앞에 모여있는 것을 보고 방금 별소리를 다 내며 토했던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할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재혁이와 같이 병원 좀 가봐.”“재혁이 퇴근했어요?”전희라가 계단 쪽을 향해 눈짓하자 김지아의 눈길도 그쪽으로 향했다. 계단에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권재혁의 눈빛은 어딘가 아주 복잡해 보였다.권재혁은 김지아를 한참 주시하다 즉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기세등등한 그의 모습에 놀란 김지아는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쳤다.“병원 가자.”김지아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괜찮아. 심각한 거 아니야. 음식을 잘못 먹었나 봐.”“데려다줄게. 가자.”“진짜 괜찮아.”표정이 어두워진 권재혁은 더 이상 입씨름하기 귀찮아 두말하지 않고 김지아를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다.그 모습에 속이 덜컹 내려앉은 전희라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놈아, 조심 좀 해. 다치면 어쩌려고 이래.”갑작스러운 권재혁의 행동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김지아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내려줘. 나 진짜 괜찮다니까. 병원 갈 필요 없어.”“권재혁, 내 말 안 들려? 내려 달라고.”권재혁은 빠르게 걸어나가 김지아를 차에 태우고 안전띠까지 매준 뒤 ‘조용히 해.’라는 말로 그녀의 입을 닫았다.김지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권재혁을 바라봤다.차에 올라탄 권재혁은 빠른 속도로 자동차 엔진을 켜더니 쏜살같은 속도로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위가 좀 불편하다는데 왜 심각하게 이러지?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관심을 가졌다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롤스로이스는 이미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권재혁은 김지아를 끌고 병원 안으로 향했고 산부인과라는 글씨를 보고 나서야 그녀는 권재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권씨 가문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자, 전희라는 눈이 빠지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검사 결과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그녀는 권재혁을 보자마자 즉시 지팡이를 짚으며 마중을 나왔다.권재혁은 어두운 얼굴로 검사 보고서를 전희라한테 넘겨주고는 말도 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결과를 본 전희라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권재혁 몰래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걸 말할 수 없었던 김지아는 그런 전희라의 표정에 괜히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불안해졌다.“괜찮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전희라는 김지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내가 나이는 많아도 아직 건강하단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조급해할 거 없다.”김지아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전희라는 김지아를 한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 이러면 안 돼. 많이 먹어야지. 너무 말랐잖아. 바쁜 일만 마무리 하면 할머니가 몸보신 시켜줄게.”김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지금은 좀 괜찮아?”“네 많이 나아졌어요.”“그럼, 뭐라도 좀 먹으러 가자꾸나.”“생각 없어요. 저 좀 올라가서 쉴게요.”전희라는 더는 강요할 수 없어 ‘알겠다.’라고 대답한 뒤 김지아를 올려보냈다.급하게 방으로 돌아온 김지아는 권재혁 몰래 서랍에 숨겨 놓았던 피임약을 누구한테 들키기 전에 미리 버리려고 꺼내는 순간 갑자기 권재혁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손에 들어있는 약을 빼앗아 갔다.딱 봐도 피임약에 이미 두 알이 없어진 걸 알아차린 권재혁은 자신과 김지아의 잠자리가 정확히 두 번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눈썹을 찡그리며 손에 쥔 약을 구겨 버렸다.당황한 김지아는 권재혁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현재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 느껴졌다.“괜찮으면 같이 더블유에나 가지.”권재혁은 김지아를 한참 노려보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거절할 새도 없이 김지아는 권재혁한테 손목이 잡혀 끌려 나갔다.손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단단히 움켜쥔 권재혁 때문에 김지아는
말을 마친 심진우는 잔에 들어있는 술을 전부 마셨고 이어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연속 세잔을 마셨다.“오늘 제 생일이거든요. 간단하게 파티하는 거예요.”김지아는 ‘아.’하는 탄성과 함께 그의 생일을 축하했다.심진우는 권재혁을 향해 웃어 보였지만 어두운 그의 얼굴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야, 친구 생일인데 그 표정 좀 어떻게 못 하냐? 왜 죽상이야?”권재혁은 심진우를 흘겨보며 말했다.“네 놀거나 놀아.”“알았어.”심진우는 권재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여자들을 이리저리 끌어안으며 신나 날뛰었다.김지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무래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권재혁의 옆에 앉아있었다.그녀가 권재혁을 바라보는 찰나 그는 누군가의 전화 때문에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김지연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김지아는 급히 모른 척 눈길을 피했다.권재혁은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하초연은 이 기회를 틈타 김지아의 옆에 다가와 앉더니 술을 한잔 권했다.김지아는 마다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속이 좋지 않아서.”하초연은 웃으며 뜨거운 물 한 잔을 받아 김지아에게 건네며 말했다.“그럼 뜨거운 물이라도 마셔요.”“고마워요.”“저랑 심진우는 안지, 오래된 친구 사이예요.”하초연은 심진우와 그녀의 사이를 변명이라도 하는 듯 김지아에게 설명했다.하초연과 심진우가 어떤 사이든 전혀 관심이 없던 김지아는 김지연이 도대체 이 밤중에 무슨 용건으로 권재혁한테 전화한 건지 신경 쓰였다. 그녀는 궁금증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김지아가 룸을 나가자, 권재혁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김지연의 전화 한 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권재혁을 보자 김지아는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다시 룸으로 들어온 김지아는 잔에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초연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한
휴대전화 화면에는 두 사람이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은 문자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김지아의 문자에는 회답도 없던 권재혁이였지만, 김지연과는 계속 문자도 하고 김지아를 옆에 두고 잘 자라는 인사도 나누고 있었다.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김지아는 일 초라도 그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권재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고 그녀가 혼자 클럽을 떠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심진우는 자신의 품에 엉겨 붙는 하초연을 밀쳐내고 권재혁을 놀리며 말했다.“왜 저래? 너희 싸웠어?”권재혁은 심진우의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고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심진우에게 달려드는 하초연을 힐끗 쳐다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너는 거부감도 안 드냐?”아무 생각도 없이 하초연을 안고 있던 심진우는 권재혁의 농락에 입을 삐죽거리며 그녀를 차승훈한테 넘겨줬다.심진우가 아무리 여자가 끊지지 않고 주변에 그를 따르는 여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함께 잠자리했던 여자는 극히 소수였다.그러니 아무리 이쁜 하초연이라도 남자관계가 너무 복잡해 다치고 싶지 않았다.아무 여자와 몸을 나누기는 싫었던 심진우는 차승훈을 보며 말했다.“하초연 씨가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네가 집까지 데려다줘.”붉게 물든 하초연의 예쁘장한 얼굴을 바라보던 차승훈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가 안전하게 잘 모셔다드릴게.”온몸이 달아올랐던 하초연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남자라면 전부 덮치고 싶다는 욕망으로 들끓었다.비록 차승훈이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현재 하초연은 너무 괴로웠고 남자의 손길이 한없이 간절하기만 했다.클럽에서 나온 김지아는 권재혁의 차에 앉아왔던 터라 길옆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혹시 지나가는 누구라도 그녀를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걱정된 김지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있었다.이곳은 그렇게 외진 곳은 아니었지만, 택시를 잡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밤바람은 잘 정리되었던
하초연은 아마 김지아가 자신이 한 짓을 알고 본인이 부주의한 틈을 타 술잔을 바꿨을 거로 생각했다.하초연은 김지아가 어쩌면 사람들의 호감을 살 정도의 미모에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하고 청순한 모습이지만 누구보다 생각이 많고 속셈을 차리는 사람일 거로 생각했다.김지아를 너무 만만하게만 본 것 같아 후회가 밀려온 하초연은 웃음을 거두며 이를 악물고 독설을 퍼부었다.“오늘은 내가 재수가 없었을 뿐이고, 이번 일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 각오해요.”하초연의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알아차린 김지아는 냉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누워서 침 뱉기라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죠.”“뭐라고?”김지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하초연이 손바닥을 들고 김지아를 향해 휘둘렀지만, 온몸이 나른했던 터라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태연하게 하초연의 손목을 낚아챈 김지아가 가볍게 툭 밀치자, 하초연은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마침 차를 가지고 오던 차승훈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즉시 차를 세우더니 노기등등한 기세로 달려와 하초연을 부축하며 김지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본인이 자초한 일이에요.”“권재혁의 마누라라고 내가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데 그거 오산이에요. 지난번 권재혁이 그쪽 때문에 술병으로 내 머리를 내려친 것도 아직 기억하고 있거든요? 조만간 그 빚 받을 테니 각오하세요.”김지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얼마든지 기다리죠.”하초연은 차승훈의 품에 안긴 채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차승훈 씨, 김지아한테는 권재혁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은 쓰게도 안 볼 거예요. 그러니 건드리지 마세요. 괜히 건드렸다가 승훈 씨가 화를 입게 되면 어떡해요.”“권재혁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요? 전혀 안 두렵거든요?”하초연의 도발에 화가 치밀어 오른 차승훈은 김지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권재혁의 마누라가
한대 얻어맞은 차승훈은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권재혁은 주먹을 풀더니 손에 묻은 피가 더러워 손수건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하초연은 이 기회를 틈타 즉시 일어나 차승훈을 데리고 차로 달려갔다.운전석에 앉아서야 차승훈은 휴지로 코피를 닦으며 길옆에 서있는 권재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권재혁, 기다려! 나 차승훈이 이렇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어!”애당초 차승훈 같은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았던 권재혁은 그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한번 쳐다봤다.“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 각오해!”권재혁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앉자 기고만장해진 차승훈은 혼자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옆에 앉아있던 하초연은 차승훈의 어깨를 때리며 말했다.“쪽팔리게 그만 소리 지르고 빨리 운전이나 해요.”“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맞았는데요?”“지금 내 탓이라는 거예요?”차가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여전히 다투고 있었다.차승훈과 하초연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나서야 김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권재혁은 피 묻은 손수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김지아를 돌아보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외투에는 따듯한 그의 체온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발렛파킹원이 롤스로이스를 몰고 오자 권재혁은 차 열쇠를 건네받은 뒤 김지아를 향해 말했다.“타.”추워서 발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김지아는 더 이상 심술부리기도 힘들어 순순히 권재혁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위병이 재발한 데다 공복에 술까지 마시고 찬 바람을 맞은 거로도 모자라 스트레스까지 받았던 김지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위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 조수석에 웅크리고 앉아 식은땀을 흘렸다.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권재혁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속도를 올렸다.롤스로이스가 권씨 가문 저택에 들어섰을 때, 시간은 이미 밤 열한 시가 되어있었다.먼저 차에서 내린 권재혁은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웅크리고 있는 김지아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안전띠를 푼 뒤
창안시, 거리엔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석 달간의 촬영을 마친 김지아는 네 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짐을 찾은 그녀는 출구로 걸어갔다.회사에서 마중을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권씨 가문의 운전기사 이용건이 검은 롤스로이스 옆에서 공손히 기다리고 있었다.김지아가 캐리어를 끌고 다가가자, 이용건은 짐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 안에는 잘 재단된 검은색 수트를 입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권재혁이 앉아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고 김지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권재혁과 김지아의 결혼은 벌써 2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김지아는 남편이 직접 공항에 나온 것이 의외였지만, 이내 오늘이 두 사람의 계약 결혼이 만료되는 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권재혁은 예전부터 그녀가 가까이 오는 걸 싫어했다. 김지아는 조심스럽게 차에 올라탄 후 자연스레 거리를 두었다.결혼하고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 앉았지만, 여전히 낯선 그에게서 은은한 오드콜로뉴 향이 느껴졌다.이용건은 짐을 트렁크에 싣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차 안 공기는 무겁고 답답했다. 권재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침묵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김지아는 심장이 쿵쿵거렸고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약 20분 후, 롤스로이스가 권씨 가문의 저택 앞에 멈췄다. 집사가 빠르게 달려와 뒷좌석의 문을 열자, 권재혁이 긴 다리를 뻗으며 차에서 내렸다.“서재로 따라와.”그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차갑게 내뱉으며 집 안으로 사라졌다.김지아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도 긴장한 채였다.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었다.예상대로,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권재혁은 서랍에서 이혼 서류를 꺼내 그녀 앞에 던졌다.“이혼하자.”석 달 만에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그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김지아의 가슴에 꽂혔다.김지아가 권재혁을 좋아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권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자리를 얻었
김지아의 혈액 검사 결과는 문제가 없었다. 골수 적합성도 좋았고 거부 반응도 없었다. 결과로 보면 김지아는 김지연을 살릴 수 있었다.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어도 그녀는 주저 없이 골수를 기증했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라면 더더욱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권재혁은 이미 그녀를 차갑고 무정한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그리고 김지연을 위해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그 비참한 광경에 김지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그토록 간절한 그의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김지아와 권재혁은 늘 같은 학교에 다녔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진정한 소꿉친구였다.권재혁은 김지아를 지키기 위해 다른 남학생들과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고, 그녀의 성적을 올려주려고 밤을 새우며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김지아는 그렇게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켜왔으니, 언젠가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소망을 그렇게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김지아는 김지연처럼 애교를 부리지 못했다. 그녀는 김지연처럼 권재혁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몰랐다. 권재혁은 두 사람 모두를 소중히 여겼지만, 김지연에게 주는 온정은 더 따뜻하고 깊었다.‘재혁이는 정말 지연이를 사랑하는 걸까...’그 생각에 가슴이 쿡쿡 쑤셨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권재혁은 나를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으로 여겼을까? 왜 나를 동생마저 외면할 만큼 잔인하다고 생각했을까?’그때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나도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었고, 홧김에 권재혁에게 결혼을 요구하며 권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다.비록 그 결혼은 계약일 뿐이었고, 계약 기간은 고작 2년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2년이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현실은 차가운 칼날처럼 그녀를 베어냈고 결국 그녀는 이 게임에서 완전
한대 얻어맞은 차승훈은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권재혁은 주먹을 풀더니 손에 묻은 피가 더러워 손수건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하초연은 이 기회를 틈타 즉시 일어나 차승훈을 데리고 차로 달려갔다.운전석에 앉아서야 차승훈은 휴지로 코피를 닦으며 길옆에 서있는 권재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권재혁, 기다려! 나 차승훈이 이렇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어!”애당초 차승훈 같은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았던 권재혁은 그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한번 쳐다봤다.“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 각오해!”권재혁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앉자 기고만장해진 차승훈은 혼자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옆에 앉아있던 하초연은 차승훈의 어깨를 때리며 말했다.“쪽팔리게 그만 소리 지르고 빨리 운전이나 해요.”“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맞았는데요?”“지금 내 탓이라는 거예요?”차가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여전히 다투고 있었다.차승훈과 하초연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나서야 김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권재혁은 피 묻은 손수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김지아를 돌아보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외투에는 따듯한 그의 체온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발렛파킹원이 롤스로이스를 몰고 오자 권재혁은 차 열쇠를 건네받은 뒤 김지아를 향해 말했다.“타.”추워서 발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김지아는 더 이상 심술부리기도 힘들어 순순히 권재혁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위병이 재발한 데다 공복에 술까지 마시고 찬 바람을 맞은 거로도 모자라 스트레스까지 받았던 김지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위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 조수석에 웅크리고 앉아 식은땀을 흘렸다.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권재혁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속도를 올렸다.롤스로이스가 권씨 가문 저택에 들어섰을 때, 시간은 이미 밤 열한 시가 되어있었다.먼저 차에서 내린 권재혁은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웅크리고 있는 김지아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안전띠를 푼 뒤
하초연은 아마 김지아가 자신이 한 짓을 알고 본인이 부주의한 틈을 타 술잔을 바꿨을 거로 생각했다.하초연은 김지아가 어쩌면 사람들의 호감을 살 정도의 미모에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하고 청순한 모습이지만 누구보다 생각이 많고 속셈을 차리는 사람일 거로 생각했다.김지아를 너무 만만하게만 본 것 같아 후회가 밀려온 하초연은 웃음을 거두며 이를 악물고 독설을 퍼부었다.“오늘은 내가 재수가 없었을 뿐이고, 이번 일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 각오해요.”하초연의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알아차린 김지아는 냉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누워서 침 뱉기라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죠.”“뭐라고?”김지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하초연이 손바닥을 들고 김지아를 향해 휘둘렀지만, 온몸이 나른했던 터라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태연하게 하초연의 손목을 낚아챈 김지아가 가볍게 툭 밀치자, 하초연은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마침 차를 가지고 오던 차승훈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즉시 차를 세우더니 노기등등한 기세로 달려와 하초연을 부축하며 김지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본인이 자초한 일이에요.”“권재혁의 마누라라고 내가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데 그거 오산이에요. 지난번 권재혁이 그쪽 때문에 술병으로 내 머리를 내려친 것도 아직 기억하고 있거든요? 조만간 그 빚 받을 테니 각오하세요.”김지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얼마든지 기다리죠.”하초연은 차승훈의 품에 안긴 채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차승훈 씨, 김지아한테는 권재혁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은 쓰게도 안 볼 거예요. 그러니 건드리지 마세요. 괜히 건드렸다가 승훈 씨가 화를 입게 되면 어떡해요.”“권재혁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요? 전혀 안 두렵거든요?”하초연의 도발에 화가 치밀어 오른 차승훈은 김지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권재혁의 마누라가
휴대전화 화면에는 두 사람이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은 문자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김지아의 문자에는 회답도 없던 권재혁이였지만, 김지연과는 계속 문자도 하고 김지아를 옆에 두고 잘 자라는 인사도 나누고 있었다.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김지아는 일 초라도 그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권재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고 그녀가 혼자 클럽을 떠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심진우는 자신의 품에 엉겨 붙는 하초연을 밀쳐내고 권재혁을 놀리며 말했다.“왜 저래? 너희 싸웠어?”권재혁은 심진우의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고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심진우에게 달려드는 하초연을 힐끗 쳐다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너는 거부감도 안 드냐?”아무 생각도 없이 하초연을 안고 있던 심진우는 권재혁의 농락에 입을 삐죽거리며 그녀를 차승훈한테 넘겨줬다.심진우가 아무리 여자가 끊지지 않고 주변에 그를 따르는 여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함께 잠자리했던 여자는 극히 소수였다.그러니 아무리 이쁜 하초연이라도 남자관계가 너무 복잡해 다치고 싶지 않았다.아무 여자와 몸을 나누기는 싫었던 심진우는 차승훈을 보며 말했다.“하초연 씨가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네가 집까지 데려다줘.”붉게 물든 하초연의 예쁘장한 얼굴을 바라보던 차승훈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가 안전하게 잘 모셔다드릴게.”온몸이 달아올랐던 하초연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남자라면 전부 덮치고 싶다는 욕망으로 들끓었다.비록 차승훈이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현재 하초연은 너무 괴로웠고 남자의 손길이 한없이 간절하기만 했다.클럽에서 나온 김지아는 권재혁의 차에 앉아왔던 터라 길옆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혹시 지나가는 누구라도 그녀를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걱정된 김지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있었다.이곳은 그렇게 외진 곳은 아니었지만, 택시를 잡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밤바람은 잘 정리되었던
말을 마친 심진우는 잔에 들어있는 술을 전부 마셨고 이어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연속 세잔을 마셨다.“오늘 제 생일이거든요. 간단하게 파티하는 거예요.”김지아는 ‘아.’하는 탄성과 함께 그의 생일을 축하했다.심진우는 권재혁을 향해 웃어 보였지만 어두운 그의 얼굴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야, 친구 생일인데 그 표정 좀 어떻게 못 하냐? 왜 죽상이야?”권재혁은 심진우를 흘겨보며 말했다.“네 놀거나 놀아.”“알았어.”심진우는 권재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여자들을 이리저리 끌어안으며 신나 날뛰었다.김지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무래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권재혁의 옆에 앉아있었다.그녀가 권재혁을 바라보는 찰나 그는 누군가의 전화 때문에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김지연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김지아는 급히 모른 척 눈길을 피했다.권재혁은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하초연은 이 기회를 틈타 김지아의 옆에 다가와 앉더니 술을 한잔 권했다.김지아는 마다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속이 좋지 않아서.”하초연은 웃으며 뜨거운 물 한 잔을 받아 김지아에게 건네며 말했다.“그럼 뜨거운 물이라도 마셔요.”“고마워요.”“저랑 심진우는 안지, 오래된 친구 사이예요.”하초연은 심진우와 그녀의 사이를 변명이라도 하는 듯 김지아에게 설명했다.하초연과 심진우가 어떤 사이든 전혀 관심이 없던 김지아는 김지연이 도대체 이 밤중에 무슨 용건으로 권재혁한테 전화한 건지 신경 쓰였다. 그녀는 궁금증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김지아가 룸을 나가자, 권재혁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김지연의 전화 한 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권재혁을 보자 김지아는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다시 룸으로 들어온 김지아는 잔에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초연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한
권씨 가문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자, 전희라는 눈이 빠지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검사 결과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그녀는 권재혁을 보자마자 즉시 지팡이를 짚으며 마중을 나왔다.권재혁은 어두운 얼굴로 검사 보고서를 전희라한테 넘겨주고는 말도 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결과를 본 전희라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권재혁 몰래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걸 말할 수 없었던 김지아는 그런 전희라의 표정에 괜히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불안해졌다.“괜찮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전희라는 김지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내가 나이는 많아도 아직 건강하단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조급해할 거 없다.”김지아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전희라는 김지아를 한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 이러면 안 돼. 많이 먹어야지. 너무 말랐잖아. 바쁜 일만 마무리 하면 할머니가 몸보신 시켜줄게.”김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지금은 좀 괜찮아?”“네 많이 나아졌어요.”“그럼, 뭐라도 좀 먹으러 가자꾸나.”“생각 없어요. 저 좀 올라가서 쉴게요.”전희라는 더는 강요할 수 없어 ‘알겠다.’라고 대답한 뒤 김지아를 올려보냈다.급하게 방으로 돌아온 김지아는 권재혁 몰래 서랍에 숨겨 놓았던 피임약을 누구한테 들키기 전에 미리 버리려고 꺼내는 순간 갑자기 권재혁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손에 들어있는 약을 빼앗아 갔다.딱 봐도 피임약에 이미 두 알이 없어진 걸 알아차린 권재혁은 자신과 김지아의 잠자리가 정확히 두 번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눈썹을 찡그리며 손에 쥔 약을 구겨 버렸다.당황한 김지아는 권재혁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현재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 느껴졌다.“괜찮으면 같이 더블유에나 가지.”권재혁은 김지아를 한참 노려보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거절할 새도 없이 김지아는 권재혁한테 손목이 잡혀 끌려 나갔다.손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단단히 움켜쥔 권재혁 때문에 김지아는
“임신일 수도 있잖아.”안달해서 말하는 전희라의 목소리에 권재혁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이때 화장실 문을 열며 나오던 김지아는 전희라와 도우미들이 문 앞에 모여있는 것을 보고 방금 별소리를 다 내며 토했던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할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재혁이와 같이 병원 좀 가봐.”“재혁이 퇴근했어요?”전희라가 계단 쪽을 향해 눈짓하자 김지아의 눈길도 그쪽으로 향했다. 계단에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권재혁의 눈빛은 어딘가 아주 복잡해 보였다.권재혁은 김지아를 한참 주시하다 즉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기세등등한 그의 모습에 놀란 김지아는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쳤다.“병원 가자.”김지아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괜찮아. 심각한 거 아니야. 음식을 잘못 먹었나 봐.”“데려다줄게. 가자.”“진짜 괜찮아.”표정이 어두워진 권재혁은 더 이상 입씨름하기 귀찮아 두말하지 않고 김지아를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다.그 모습에 속이 덜컹 내려앉은 전희라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놈아, 조심 좀 해. 다치면 어쩌려고 이래.”갑작스러운 권재혁의 행동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김지아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내려줘. 나 진짜 괜찮다니까. 병원 갈 필요 없어.”“권재혁, 내 말 안 들려? 내려 달라고.”권재혁은 빠르게 걸어나가 김지아를 차에 태우고 안전띠까지 매준 뒤 ‘조용히 해.’라는 말로 그녀의 입을 닫았다.김지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권재혁을 바라봤다.차에 올라탄 권재혁은 빠른 속도로 자동차 엔진을 켜더니 쏜살같은 속도로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위가 좀 불편하다는데 왜 심각하게 이러지?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관심을 가졌다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롤스로이스는 이미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권재혁은 김지아를 끌고 병원 안으로 향했고 산부인과라는 글씨를 보고 나서야 그녀는 권재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쥔 채 멍하니 앉아있는 하초연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멀쩡히 하고 있던 몰로 브랜드 홍보대사도 이렇게 물 건너간 셈이었다.하초연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참아야 했다.고개를 푹 숙인 채 얌전하게 있는 하초연을 보고 나서야 김지아는 돌아서서 권재혁을 바라봤다.노기등등해 있던 표정은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았고 심오하던 눈빛은 차갑기만 했던 예전과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김지아는 하초연의 팔을 잡아 자신을 막아준 권재혁을 떠올리자, 마음이 따듯해졌다.“오랜만이야.”어색한 분위기에 김지아는 한참 뒤에야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권재혁은 ‘응.’이라는 간단한 대답을 남긴 채 고개를 돌려 전태성을 보며 말했다.“차에 있는 물건 가지고 와.”전태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무대 뒤에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전태성은 선물 상자를 들고 들어와 공손하게 김지아에게 건넨 후 다시 권재혁의 뒤로 물러섰다.김지아는 손에 든 상자를 보며 약간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권재혁을 바라보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저녁에 나랑 어디 좀 가자.”“어디?”권재혁은 김지아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섰고 전태성과 부하들도 급히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무대 뒤에서 이들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차츰 흩어져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각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선물 상자를 들고 대기실로 들어온 김지아가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는 짙은 색상의 드레스와 액세서리가 들어 있었다.그녀는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으며 조이현에게 물었다.“오늘 남은 스케줄이 더 있어?”“인터뷰와 런웨이를 끝으로, 몰로 브랜드 측 임원들과 저녁 식사가 있어요.”‘저녁 식사?’김지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조이현을 향해 말했다.“주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식사 자리는 취소하라고 해.”말을 마친 김지아는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남은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저녁 7시가 되어있었다. 김지아는 행사장 대기실을 빌려
권재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깊은 두 눈으로 김지아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한 손으로는 가슴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짚은 채 방금의 해프닝은 별것 아니라는 듯 더욱 당당하고 멋있게 걸어 나갔다.김지아는 마침 무대 앞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던 하초연을 가로질러 우아하게 무대를 돌아 들어갔다.등이 반쯤 노출 될 정도로 옷이 찢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쇼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김지아의 모습에 권재혁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았다.김지아의 무대가 끝나자, 권재혁은 다른 사람의 무대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뒤로 향했다. 전태성과 부하 직원 몇몇이 그의 뒤를 따랐다.무대 뒤는 방금 일어난 돌발 상황 때문에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디자이너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단독 행동을 한 하초연이 김지아의 치마를 밟아 피날레였던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눈길을 끌겠다는 목적을 이미 달성한 하초연은 화가 치밀어 오른 디자이너에게 여유롭게 웃으며 사과했다.“죄송해요. 너무 긴장해서 그랬어요.”“처음 무대 올랐을 때도 안 하던 긴장을 왜 하필 마지막에 했다는 거예요?”“정말 긴장했다니깐요. 피날레라고 하니까 어찌나 떨리던지.”“무슨 말이에요 그게! 피날레는 김지아 씨지 하초연 씨가 아니잖아요.”“알고 있어요. 그냥 당시에 너무 긴장되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하초연의 변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디자이너는 하초연이 고의로 자신의 무대를 망쳤다고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하초연 씨, 당신처럼 본인만 눈에 띄면 된다고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람과는 앞으로 절대 협조 안 할 거니까 각오하세요.”하초연은 디자이너의 말에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조소를 띄며 말했다.“별것도 안 되는 디자이너 따위가 큰소리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디자이너는 하초연을 때리려고 손바닥을 치켜들었다.그녀의 손바닥이 하초연의 볼에 채 닿기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김지아한테 메이크업을 완성해 주자 런웨이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가을 콘셉트로 되어있는 이번 패션쇼는 단풍을 기본으로 한 레드, 해양을 기본으로 한 블루, 노랑과 풀색을 어울려 만든 빈티지 콘셉트로 모두 세 가지가 있었다.세 가지 콘셉트를 번갈아 무대에 올려 스타들로 하여금 충분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김지아가 홍보하는 ‘단풍’ 콘셉트에는 모두 여섯 세트의 옷이 있었고 각 세트의 탈의 시간은 5분가량에 머리 모양도 한번 변경해야 했다.패션쇼가 막 시작되려 하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브랜드 측 직원 및 디자이너와 매니저까지 전부 무대 뒤로 모여들었다.모두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이 쇼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단풍’ 시리즈는 이번 가을 패션에서 하이라이트 콘셉트로 김지아가 제일 먼저 무대에 오르게 되어있었다.모든 준비를 마친 김지아는 무대 뒤에 서서 무대 쪽을 슬쩍 훔쳐봤다. 무대는 T자 형태로 되어있었고 쇼를 보러 온 손님들은 U자 형태로 무대를 빙 둘러있었다.공석 하나 없이 꽉 차 있는 사람 중에서도 김지아는 한눈에 권재혁을 찾아낼 수 있었다.권재혁의 좌석은 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중간 자리의 일렬에 있었다.사회자는 브랜드 시리즈를 소개한 뒤 잠시 농담으로 현장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모든 사람이 전부 사회자의 입담에 웃고 있었지만 유독 한 사람, 권재혁만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의 웃음 포인트가 낮은 건지 권재혁의 웃음 포인트가 높은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김지아 씨, 무대 오를 준비 하세요.”뒤에 있던 스태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사회자가 무대 뒤로 물러나는 순간 쇼장의 불빛은 어두워졌고 런웨이만 환하게 비쳤다.경쾌한 리듬의 음악과 함께 김지아는 하이힐을 신은 채 침착한 표정으로 런웨이에 올랐다.맞은 편에는 권재혁이 정면으로 앉아있었고 무대에만 집중되어 있는 조명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