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김지아의 혈액 검사 결과는 문제가 없었다. 골수 적합성도 좋았고 거부 반응도 없었다. 결과로 보면 김지아는 김지연을 살릴 수 있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어도 그녀는 주저 없이 골수를 기증했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라면 더더욱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권재혁은 이미 그녀를 차갑고 무정한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그리고 김지연을 위해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 비참한 광경에 김지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그토록 간절한 그의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김지아와 권재혁은 늘 같은 학교에 다녔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진정한 소꿉친구였다.

권재혁은 김지아를 지키기 위해 다른 남학생들과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고, 그녀의 성적을 올려주려고 밤을 새우며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김지아는 그렇게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켜왔으니, 언젠가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소망을 그렇게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김지아는 김지연처럼 애교를 부리지 못했다. 그녀는 김지연처럼 권재혁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몰랐다. 권재혁은 두 사람 모두를 소중히 여겼지만, 김지연에게 주는 온정은 더 따뜻하고 깊었다.

‘재혁이는 정말 지연이를 사랑하는 걸까...’

그 생각에 가슴이 쿡쿡 쑤셨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권재혁은 나를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으로 여겼을까? 왜 나를 동생마저 외면할 만큼 잔인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때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나도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었고, 홧김에 권재혁에게 결혼을 요구하며 권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다.

비록 그 결혼은 계약일 뿐이었고, 계약 기간은 고작 2년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2년이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운 칼날처럼 그녀를 베어냈고 결국 그녀는 이 게임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그것도 처참할 만큼 비참하게 패배했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와...”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김지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돌아봤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 고선숙이 서 있었다.

김지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고선숙은 그녀의 새엄마였다. 겨우 마흔 살이었지만, 철저히 관리한 덕에 서른 초반처럼 보였다. 게다가 세련되고 우아한 옷차림은 여전히 눈길을 끌었다.

김지아의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고선숙은 김씨 가문의 가사도우미였지만, 임신 중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김지아의 아버지 김석훈이었다.

“가증스러운 악어의 눈물! 누가 속을 줄 알아?”

고선숙은 코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밀쳐내고 병실로 들어갔다.

김지아는 그녀의 가시 박힌 말에 흐느낄 여유도 없이 뒤따라 들어갔다.

김지아를 본 김지연의 눈빛이 순간 밝아졌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맑은 목소리로 김지아를 불렀다.

김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를 보고 싶어 했다며...”

김지연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3개월이나 못 봤잖아.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김지연의 맑고 순수한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김지아의 마음 깊숙한 곳이 욱신욱신 저렸다.

그녀의 진정한 경쟁자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부터 소중히 여겨온 동생이었다.

동생이 아픈 상황에서도, 그녀는 권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 동생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 그 선택은 잔인했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김지아는 김지연이 자신을 미워할 거로 생각하며, 자기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김지연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녀를 따르고 의지했다.

그럴수록 김지아의 마음은 더 깊이 상처를 입었다. 죄책감은 그녀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고, 김지연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를 비열한 악인으로 느꼈다.

“마침 쉬는 시간이 많아져서... 이제 자주 보러올 수 있을 거야.”

김지아는 눈가가 붉어졌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김지연이 해맑게 웃었다.

“정말? 너무 좋아! 퇴원할 때까지 매일 와줄 거지?”

“물론이지...”

옆에 있던 고선숙은 눈을 굴리며 김지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김지연 앞에서는 함부로 화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고선숙은 김지아만 보면 혐오감이 들었다. 과거 김지연이 김지아와 권재혁의 결혼 소식을 듣고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지내던 모습이 떠올라, 그녀가 너무나 안타까웠고 김지아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고선숙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김지연을 재웠다. 그러고 나서야 차갑게 말했다.

“재혁이가 곧 지연이를 보러 올 거야. 여기서 민폐 끼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제 그만 가주는 게 좋겠어.”

김지아는 말없이 일어섰다. 병실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깊이 잠든 김지연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 문을 열었을 때, 고선숙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앞으로 지연이 보러 오지 마. 지연이에게 상처 준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길 와?”

김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반복되는 이런 상황이 이제는 그저 익숙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힘없이 복도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푹 숙이자 참아왔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최유진은 차 안에서 김지아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자 불안한 마음에 병동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복도 끝에서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군 채 넋이 나간 김지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다가가려던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권재혁이 나왔다.

권재혁은 김지아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곧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권재혁의 곁을 지키다 보니 이젠 발소리만 들어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귀에 익은 그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그녀는 코끝을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지연이 보러 왔구나.”

김지아는 고개를 들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붉게 부은 눈과 번진 화장, 눈물 자국까지... 그녀의 얼굴은 지친 흔적들로 가득했다.

권재혁은 무심하게 ‘응’하고 대답했다.

“지연이 만났어?”

“응. 만나고 나왔어.”

그녀의 초라한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던지, 권재혁은 드물게도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지연이는 곧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을 거야. 금방 좋아질 거야.”

“알고 있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병실 문을 열었다. 그때 김지아가 멈출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연이 잘 부탁해.”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지연이에게 돌려줘야지...’

권재혁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지연이는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분노가 묻어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날이 서 있었다.

‘이제 이혼 서류에도 서명했으니, 재혁이는 드디어 나에게서 벗어나 지연이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네... 그렇게 바라왔던 날일 텐데, 왜 화를 내는 거지? 그만큼 내가 싫은 걸까?’

권재혁은 이미 병실 안으로 들어갔지만, 김지아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병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최유진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서둘러 김지아를 일으켜 세워 병동을 빠져나갔다.

그 후 김지아는 매일같이 병원에 들렀다. 자신이 환영받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병실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병실 문 너머 작은 유리창을 통해 김지연을 지켜봤다.

때때로 권재혁이 김지연을 데리고 병원 밖을 산책하러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김지아는 권재혁이 자신에게는 늘 차갑고 무관심하게 대하면서도, 김지연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세심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매일 지켜봐야 했다.

그 뚜렷한 차이는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한 달 후, 김지연은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거부 반응이나 합병증도 없었으며 회복 상태도 매우 좋았다.

김지아는 이제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권재혁은 거의 병원에 머무르며 그녀와 함께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절차를 마쳐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그녀는 권재혁이 김지연에게 쏟는 애정과 배려를 충분히 지켜보며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이제는 진짜로 끝을 내야 할 때였다.

결국 김지아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그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데?”

여전히 차갑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

“이혼 절차, 언제 마무리할 거야?”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 후에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아직 서명 안 했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아직 서명하지 않았다고?